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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의 주자(朱子) “종묘개황론(宗廟改黃論)” 수용 논쟁
정기철
동양예술 vol. 5 143-169(27pages)
UCI I410-ECN-0102-2016-910-000703631

조선시대 건축제도의 형성과 정착과정에 끼친 중국문화의 영향은 주자학의 수용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특히 철저한 주자학자로서 16-17세기의 士林들은 기존의 건축제도를 새로운 세계관, 바로 주자학의 禮制에 입각한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창조적으로 변용하였다. 그 단적인 사례는 종묘제도이다. 종묘제도는 後漢代 이후 同堂異室制라는 건축제도로 운영되어 왔다. 周代의 都宮制에 비해 건축영건에 필요한 物力을 절약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昭穆질서의 착란, 室數의 끊임없는 증가, 太祖가 1실로 한정된 편벽된 곳에 위치하는 義理上의 문제, 공간규모의 협착함 등 많은 문제점이 점차 부각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인식과 그 대안 모색은 宋代 朱子學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주자학은 종묘개혁론으로 "僖祖始論"과 "義理名分論에" 입각한 종법관이란 핵심적인 개념 하에 周代의 都宮制를 대안으로 제출하였다. 이러한 주자학의 종묘개혁론은 임란 이후 종묘를 재건하는 논의 속으로 홉수되면서 17세기 전 기간에 걸친 종묘개혁 관련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선조 40년 종묘재건을 둘러싼 예조와 홍문관의 논쟁에서 예조의 안을 대표한 김장생은 주자 종묘개혁론을 그대로 遵奉하며 목조를 시조로 하고 형제계승을 각 1代로 보는 도궁제 안을 제출하였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김장생의 도궁제 案에서 미진한 채 남아 있었던 목조시조론의 문제와 제후의 세실 설치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을 전개하였다. 김장생과 송시열의 종묘개혁안이 좌절된 이후 현종 4년 영녕전 중건에 대한 논의가 개시되면서 다시 주자학의 종묘개혁론에 대한 의의가 검토되었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고유한 건축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17세기 이후 전형적인 조선시대 건축문화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건축역사상의 시기 구분은 주자학으로 무장한 士林의 등장과 활약이란 역사적 사실에 일정하게 부합된다. 建築史의 견지에서 볼때 주자학자로서 士林들이 최초로 자신들의 고유한 세계관을 드러낸 건축유형은 書院건축이라 할 수 있다.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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