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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등재
영조~순조대 혜경궁(惠慶宮)의 위상 변화
The changes of Hyegyonggung`s status at the time of King Yeongjo`s reign to King Sunjo`s one
임혜련 ( Hye Ryun Lim )
조선시대사학보 74권 75-107(33pages)
UCI I410-ECN-0102-2016-910-000345015

조선 22대 정조의 어머니이며,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빈이었던 惠慶宮 홍씨는 영조~순조대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 지위와 위상 변화가 있었다. 영조대 혜경궁은 사도세자와 가례를 치르고 세자빈이 되었다. 세자빈에게는 세자를 내조하고, 왕실 어른들을 잘 모시고, 왕실을 화평하게 하며, 후사를 낳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혜경궁은 구성원이 다양하였던 왕실을 편안하게 했으며, 의소세손이 비록 사망하였지만 정조를 출산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영조대 혜경궁은 앞서 사망한 효장세자의 빈 현빈 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이는 사도세자가 차기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에 그와 짝하여 손위 동서 현빈보다 높은 위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 38년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폐세자가 되자 혜경궁도 폐세자빈이 되었고, 세자가 훙서 후 세자의 지위를 회복하자 ‘惠嬪’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 위상은 현빈과 같이 사망한 세자의 빈이었을 뿐이다. 혜경궁은 아들 정조를 보존하면서, 그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숭되면 왕대비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영조는 정조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하여 종통을 계승하게 하는 ‘갑신처분’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혜경궁은 종통상 정조와 숙질간이 되어 그 관계가 희석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후 사친 혜경궁에 대한 존숭이 이어졌다. ‘혜빈’의 칭호 대신 ‘혜경궁’이라 명호를 정하였고, 이에 맞는 여러 격식을 갖추어서 어머니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특히 정조는 4차례의 존호 가상을 통해 혜경궁의 위상을 강화하였고, 신하들의 충성을 이끌어내었다. 정조 19년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에 행차하여 현륭원을 참배하고 봉수당에서 회갑연을 개최하였다. 이렇게 위상이 강화된 혜경궁은 어머니로서 정조의 건강을 걱정하는 언문 교서를 하교하였고, 신하들 역시 정조의 건강이 염려될 때 정청을하여 혜경궁의 도움을 청하였다. 당대에는 이러한 혜경궁을 왕대비와 같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11세에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국이 급변하게 되자 혜경궁의 친정 풍산 홍문은 다시 공격의 대상이 되어 동생 홍낙임이 사사당하였다. 혜경궁은 왕실내명부의 위차에서 며느리인 왕대비 효의왕후보다 뒤에 있게 되었다. 이후 친정을 하게 된 순조는 아버지의 외가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혜경궁에 대한 정조대와 같은 존숭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는 결국 혜경궁이 존숭을 통해 위상은 높아졌으나, 세자빈이라는 지위가 변하지 못한 한계로 인한 것이었다.

Hyegyonggung Hong is King Jeongjo’s mother,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and also Princess Sado’s wif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pursue the changes of Hyegyonggung Hong’s status at the heart of dynamic political changes from the time of King Yeongjo’s reign to King Sunjo’s one. Through a marriage with Princess Sado, Hyegyonggung was proclaimed to the Crown Princess, and she fully performed her role as a Crown Princess. There was an elder sister-in-law, Hyunbin Cho, a wife of Prince Hyojang, who was already passed away. In spite of her hierarchical order according to her husband’s side, Hyegyonggung was higher in rank than Hyunbin Cho as her husband, a Prince Sado, was expected to be installed to a king at the time. However, due to ‘Imo Incident’ in King Yeongjo’s 38th year of ruling, Princess Sado passed away. Therefore, Hyegyonggung was once expelled from the position of Crown Princess and later she was recovered as a ‘Hyebin’, which was, however, lower than Hyunbin in political hierarchy. As she had a son who had a possibility of becoming a king, she expected to be the Queen Mother. Unexpectedly, King Yeongjo adopted her son, a Princess Hyojang and she lost her son. Hyegyonggung’s son became a king, King Jeongjo. Even though King Jeongjo succeeded Princess Hyojang according to royal system, he proclaimed himself as a son of Princess Sado and Hyegyonggung. He also chose and addressed his mother as ‘Hyegyonggung’ in stead of ‘Hyebin’ and became to create and develop systems to meet his mother’s position, as a mother of a king, in a royal court system including 4 times of upgrading honorific names and titles to call his mother. As a result of King Jeongjo’s these efforts, the courtiers respected her as a mother of a king and her status became to be elevated in the reign of King Jeongjo. However, after King Sunjo’s accession, Hyegyonggung’s status was dropped as regency by Queen Jeongsun, whose family was on poor terms with Hyegyonggung’s one, was chosen. To make matters worse, Hyegyonggung’s brother, Nagim Hong, was killed after being applied guilt, which lowered her status even more. She received a bow later than her daughter-in-law, Queen Hyoui as her husband passed away without being able to be installed as a king even though she was Queen Hyoui’s mother-in-law. Her grandson, King Sunjo, was tried to recover Hyegyonggung’s family after Queen Jeongsun’s death; however, Hyegyonggung’s status was not allowed to be higher than the Crown Princess.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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