端宗은 1452년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취약한 왕권을 탐낸首陽大君이 1453년 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영의정이 되어 모든 권력을 장악한 후 1455년 15세의 단종을 上王으로 밀어내고 王位를 찬탈한다. 1456년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단종의 복위를 모색했으나 실패하여 단종 복위 세력들이 축출되고 단종도 1457년 6월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寧越로 귀양 가게 된다. 같은 해 6월 순흥부로 귀양 간 錦城大君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이 되어 10월 錦城大君과 단종의 장인 송현수 등이 사형을 당하자 端宗은 自殺했다고 『世祖實錄』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世祖實錄』의 기록은 사실과 다름을 알고 역대 『朝鮮王朝實錄』과 기타 문헌을 검토한 결과 단종의 죽음은 賜死나 絞殺임을 確證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날짜도 世祖3년(1459)10월 24일 酉時였다. 당시 조정의 公論은 단종을 逆賊의 首魁로 규정하고 사약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그 때의 형벌제도로 보아 역적에 대해서는 屍身을 梟首하거나 一定期間동안 放置하는데 이는 관료나 백성들에 대한 警戒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屍身은 官의 許諾이 있기 전까지는 일반인이 손을 댈수 없었다. 端宗死後에 記錄된 문헌들을 綜合檢討한 결과, 방치된 端宗의 屍身을 嚴興道가 收拾하였다. 엄흥도는 당시 영월 호장으로 귀양 온 단종이 죽기 전에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다. 엄흥도는 단종이 죽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단종의 屍身을 收拾하여 자신의 先山인 冬乙旨山에 안장하였고 그 무덤이 현재의 莊陵이다. 당시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를 용납할 수 있는 정치 사회적 상황이 되지 못했다.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자신의 아들들이 병약해서 후계구도가 불안하고 단종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총명하였다. 게다가 민심은 단종에게 쏠려 있어 권력을 노리는 세력이 단종을 옹호하면 언제 정권이 뒤바뀔지모르는 상황이어서 단종을 경계하고 그에게 접근하거나 호의를 보이는 사람은 逆律로 다스리는 상황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출세를 노리는 자들이 체제를 비난하거나 도전하는 사람들을 고변하고 무고하는 일이 어느 때 보다 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가 영월에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영남으로 몸을 피했다는 내용이 역대 왕조실록이나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엄흥도가 은거하여 생을 마치고 그 곳에 묻혀서 묘소가 있다고 제시된 곳은 寧越과 淸州와 경상도 義興인데 영월의 경우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으로 보아서 隱居한다는 것이 不可能하고, 청주에 은거하고 무덤이 있다는 설은 제기되던 當時의 主張에 矛盾이 드러났다. 군위 의흥에 은거하여 생을 마치고 무덤이 있다는 설만이 合理性이 있었으나, 寒微한 후손들이 경제적 여건이 취약하고 嚴興道의 逃避處와 墓所의 존재에 대한 公論을 바꿀 만한 논리적 근거나 이론적 能力을 갖지 못해 엄흥도의 義興隱居사실과 墓所의 존재를 公認받지 못했다. 본고에서는 엄흥도가 義興隱居한 사실과 그 곳에 墓所가 存在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確認하였다. 첫째, 전술한 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엄흥도의 피신지가 영남이라고 하는데, 義興縣은 嶺南의 中心部에 위치해 있으며, 嚴興道가 숨어 살았다는 軍威의 花本里는 팔공산, 보현산, 화산으로 겹겹이 둘러싼 鳥林山下山間僻地로서 避身隱居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둘째, 義興光舜門의 宗孫인 16세손 海立이 영월을 거쳐 청주로 이사하였는데, 그의 증손자 19세손 嚴守漢이 청주에 살면서 數三代戶籍등을 가지고 三百餘年전 崔錫鼎을 찾아가 自身이 嚴興道의 後孫이고 엄흥도가 義興에 定着하였으며 墓所가 義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였는데, 이는 義興後孫들의 主張과 一致한다. 嚴守漢은 증조부 때부터 百餘年이 넘는 기간 동안 客地 생활을 하면서 義興과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당시 상황에서도 집안의 戶籍이나 文籍을 가지고 崔錫鼎을 찾아가 엄흥도의 後孫이라는 眞正性을 認定받았다. 셋째, 19세손 嚴守漢이 1701년 崔錫鼎을 만난 지 32년 후 義興의 22세손 嚴哲業등이 조정에 책자와 족보 등을 제출하여 엄흥도의 후손이 명백하다는 조정의 傳敎가 있었고, 英祖9년(1733)나라에서 嚴氏宗孫의 軍役과 復戶를 면제하는 完文을 의흥 종손이 약 300년부터 현재까지 비장하고 있는 것을 학술조사단이 발굴했다. 이 完文은 義興光舜門이 엄흥도의 子孫임을 조정으로부터 公式的으로 認定하는 귀중한 증서임을 밝혀냈다. 넷째, 義興의 嚴氏들이 갖추고 있는 族譜에 나타난 嚴興道의 生沒年代가 역사적 정황과 부합하며 합리성이 있고, 『忠毅公實記』등에 기록되어 있는 엄흥도의 行蹟과 墓所에 관한 記錄이 歷史的事實을 補完하고 論理的으로 一貫되게 나타나 있다. 다섯째, 엄흥도가 경남 산청의 道川書院張院長에게 보낸 편지에 ‘距□陽一衣帶地’의 ‘陽’은 義興縣身南村의 錦陽이나 인접한 河陽과 관계 있는 지명으로 보이며, ‘一衣帶地’의 가까운 땅은 忠毅公系世居地중 義興이 가장 가깝기 때문에 편지를 엄흥도가 作成한 곳이 義興이라 추측된다. 여섯째, 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함께 수습하였다는 丁嗣宗이 義興縣의 이웃인 軍威縣의 縣監을 지냈기 때문에 엄흥도에게 義興을 피난지로 일러주어 엄흥도가 의흥에 정착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곱째, 엄흥도의 묘소가 의흥에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錦陽鳳岡齋에서 발간한 『忠毅公實記』와 『寧越嚴氏波譜』,義興의 光舜門의 典籍뿐만 아니라 咸興후예의 家乘과 淸州후예의 譜牒에 엄흥도의 묘소가 의흥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義興은 물론 淸州와 咸興의 聖賢門家乘까지 엄흥도의 墳墓가 義興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덟째, 三百餘年前에 嚴守漢이 崔錫鼎에게 嚴興道의 墓所가의흥에 있다고 말하였으나 墓所의 存在를 認定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義興의 光舜門은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엄흥도의 墓所를 잘 保存하고 있는 것은 엄흥도가 隱居한 곳이 義興이고 花本里의 묘소가 眞墓라는 確信이 있기 때문이다. 아홉째, 엄흥도의 분묘형태는 그가 隱居地로 삼은 義興鳥林山下의 地形이나 도천서원 張院長에게 보낸 편지 내용등과 함께 極度의 恐怖에 쫓기는 逃亡(flight)이라는 심리적 방어기재(defence mechanism)로서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열째, 嚴興道가 단종 시신을 수습할 때 은밀하게 일을 도운 아들 嚴光舜의 墓와 嚴興道의 墓가 산등 하나 사이의 山間僻地에 현존하고 있어 그들 부자간이 은둔했던 삶의 궤적을 짐작할 수 있다. 열한째, 엄흥도가 義興에 정착해서 살았기 때문에 무덤도 의흥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嚴光舜門中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어 영월엄씨 중앙종친회의 심의에 의해 엄흥도의 무덤이 의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수용, 『寧越嚴氏大同譜』에 의흥에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贈工曹判書忠毅公嚴興道의 묘소가 영월이나 청주에 소재한다는 설은 부당하고, 嶺南義興에서 嚴興道가 隱居하여 살다가 생을 마치고 義興鳥林山身南村에 현존하는 墓가 眞墓임을 穿鑿하였다.
Sejo dethroned Danjong at 1455 and ascended the throne himself. He poisoned Danjong to death after Danjong being condemned to be exiled to Yeongwol, Gangwon-do with being demoted to Nosangun. Eom Hongdo took care of his dead body and performed a funeral service. He sheltered himself below Jorim mountain since perfoming a funeral of Danjong was regarded as rebellion at that time. We figured out the place where Eom Hongdo sheltered and was buried after he died. The palce where he sheltered may have been lots of his descendants living. And there are 9 places where his descendants have been lived a lot, we found that Eom Hongdo hid himself at Hwabon-ri Sanseong-myeon Gunwi-gun Gyeongsangbuk-do among them. There was three opinions that his tomb is in Yeongwol or Cheongju or Uiheung. We confirmed that they are fake in Yeongwol and Cheongju, and then, his real tomb exists in Hwabon-ri Sanseong-myeon Gunwi-gun where he sheltered and di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