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共憤과 公憤은 지배 권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사용되었다. 共憤은 다수의 권위에 위에 의지하여 도덕 ?법칙에 어긋나는 문제의 해결을 촉구할 구할 때 거론되었다. 반면 公憤은 18세기 국왕이 공론을 판정하여 國是를 마련해 나가자 상대당과의 경쟁 속에 서 표출된 새로운 집단 감성의 표현이었다. 18세기 이전에는 개인의 憤이라는 감성 영역에 公을 결합한 어휘를 찾아보기 어렵다. 天下로 대표되는 公이라는 어휘가 갖는 중요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세기 ``爲國``, ``爲君``의 명분과 ``自黨의 公義에 기반 한정치 권력의 획득``이라는 정치 권력적 요소는 집단감성 즉, ``公憤``이라는 어휘가 등장할 수 있는 토양으로 작용하였다. 19세기 세도정치기를 거치면서 국왕권이 약화되어 公憤의 토대인 公論의 주인도 士, 民으로 확대되었으며 共憤의 영역을 잠식하면서 현재와 같은 의미가 자리 잡게 된 것이라 하겠다.
朝鮮時代の共憤と公憤は支配權力の正當性を立訂するための政治的 修辭として使われていた。共憤は多數の權威に賴り道德·法則に反する問題の解決を促す時、擧げられた。その反面、公憤は18世紀 國王が公論を判定して國是を立てていくと、相手堂との競?の中に表出された新たな 集체感性の表現であった。18世紀以前は個人の「憤」という感性の領域に「公」が結合した語彙を見出すことが難しい。それは、天下に代表される「公」という語彙 の重要性のためであった。しかし、18世紀の「爲國」、「爲君」の名文と「自黨」の公義に基づいた「政治權力の獲得」という政治權力的要素は各黨の集체感性、すなわち「公憤」という語彙が登場できる土台の동きをした。19世紀の勢道政治期を經ながら國王權が弱化されて公憤の土台である公論の所有者も士、民まで擴大されていき、共憤の領域を蠶食しながら現在のような意味を持つことにな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