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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日本書紀)』 편찬과 백제계(百濟系) 사관(史官)
『日本書紀』の編纂と百濟系史官
박재용
백제학회 2011.09
백제학보 vol. 6 221-238(18pages)
UCI I410-ECN-0102-2012-910-002993902

720년에 완성된 『日本書紀』는 수십 년 동안 백제계 사관의 역사서술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였다. 推古朝에 최초의 백제계 사관이 등장하여 「國記」를 편찬하였다. 그 「國記」는 『일본서기』 편찬의 시작을 알리를 天武朝의 ``記定`` 사업의 근간이 되었다. 天武·持統朝에 천황과 씨족의 근원을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각 씨족들은 백제계 사관이 작성한 대외관계기사를 바탕으로 조상들의 활약상을 과대 포장하였다. 이후 율령 국가의 시작인 文武朝를 거치면서 체재 등의 골격이 완성되고, 『일본서기』 편찬의 최종단계언 元正·元明朝에도 많은 백제계 사관이 투입되었다. 그들은 당대 유명한 문인들로 『일본서기』의 문장이나 체재를 정비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백제계 사관은 일찍이 백제왕이 보냈거나, 망명 백제인들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백제계 사관들이 『일본서기』 편찬에 가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안의 내력이나 개인적인 능력도 있었겠지만, 당대 가장 큰 세력가인 藤原氏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백제계 사관들은 藤原氏와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머물고 있던 곳은 공통적으로 畿內, 그 가운데에서도 河內 지역에 대부분 거주하였다. 이들은 서로 동족관계를 맺고 기내의 유력씨족들과 결탁함으로써 계속해서 사관집안 혹은 유명한 문인집안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에 계속 투입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고, 『일본서기』 이후의 사서 편찬에도 참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720年に完成した『日本書紀』は, 數十年の間, 百濟系史官の歷史敍述に多くの部分を依存した. 推古朝に最初の百濟系史官が登場し, 「國記」が編纂された. その「國記」は, 「日本書紀」編纂の開始を告げる天武朝「記定」事業の根幹となった. 天武, 持統朝に天皇と氏族の根源を明らかにする作業がなされる過程においては, 各氏族は百濟系史官が作成した對外關係記事を土台に, 自身の氏族の活躍像を誇大表現した. 以後, 律令國家の開始である文武朝を經る中で, 體制などの骨格が完成され, 『日本書紀』編纂の最終段階である元正, 元明朝にも多くの百濟系史官が投入された. 彼らは當時著名な文人であり, 『日本書紀』の文章や體制整備を擔っていたのであろう. 百濟系史官が『日本書紀』編纂に加わることができたのは, その一族の來歷や個人的な能力もあったが, 當時最も大きい勢力家であった藤原氏との關係を無視することはできない. 樣樣な資料を檢討した結果, 百濟系史官は藤原氏との關係が非常に密接であることが分かった. 百濟系史官は, かつて百濟王に派遣された者や, 亡命した百濟人の子孫であるが, 彼らが留まっていた地域は決まって畿內であり, その中でも河內地域に大部分が居住した. これらは互いに同族關係を結び, 畿內の他の有力氏族らと結託することによって, 引き績き史官家あるいは著名な文人家に成長することができた. 同時に, これは『日本書紀』編纂に繼續して投入される資格を得ることとなり, 『日本書紀』以後の史書編纂に加わる基礎となった.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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