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일제시대에는 대표적 민족언론인 동아일보사와 민족기업인 경성방직 그리고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던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운영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리고 해방정국(解放政局)에서는 민족진영 중심의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인촌은 1948년 제1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독재의 길을 걷게 되자 이승만과의 깊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반독재의 길을 걸었던 민주적 정치인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되어져 있다. 그러나 1940년대에 그가 보인 행적에 대하여 진보학계(進步學界)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어 왔고 마침내는 그의 행적이 친일(親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판단은 학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親日人名辭典)의 등재로 현실화 되었고,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도 등재됨으로써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 되었다. 그렇지만 유족과 동아일보사를 비롯한 인촌관련 인사(人士)들은 이에 대해 수긍하지 않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현재 소송이 진행 중에 있다. 필자는 이처럼 이중적(二重的)평가 속에 놓인 인촌의 생애를 조명하고, 특히 친일행적 논란에 대해 중립적 입장에서 기존의 자료를 분석함으로써 나름의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했던 인사들에 대해 객관적 평가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Inchon Kim Song-su was widely known that he made every effort for independence of our nation and establishment of our own government while managing Dongailbo Newspaper, a representative media, Geyongsung Textile Factory, and Jungang School as a base of anti-Japanese movement. As well, he was recognized as a democratic politician who resisted against his despotism in spite of strong ties with Lee Seung-man when he pursued for despotism after the first Republic of Korea was established in 1948. However, continuous problems in respect to his behaviors were raised by progressive academic circles and it was judged his behaviors were pro-Japanese in 1940s. Such judgement was confirmed as he was listed in ``Japanophilism Name Dictionary`` published by Minjok Research Center and in Pro-Japanese and Anti-National Behavior Investigation Committee. However, his family and acquaintances including Dongailbo Newspaper sued against the judgement and the lawsuit has not been completed yet. This study attempted to analyse his life under ambiguous evaluation and existing data in a neutral position regarding controversies on his Japanophilic behaviors. For it was believed that the study will positively contribute to objective evaluation on the persons who gave much care to the nation and the peo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