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時代는 紀元前 1世紀부터 統一新羅가 등장하기 이전인 7世紀 중반 까지의 약 700여년의 時期를 가리킨다. 資料에 反映된 文字生活의 變化를 根據로 삼고, 4世紀 初葉 樂浪의 滅亡을 基準으로 해서, 필자는 三國時代를 前期와 後期로 細分하였다. 前期는 吏讀發生以前의 시기인데 漢字의 韓國的 受容 樣相과 關聯하여 注目할 만한 것으로는 三國志에 記錄된 ``濊民作之``가 있다. 여기에 대한 語學的 解釋을 통하여 筆者는 1世紀頃에 이미 韓國人들이 漢字·漢文을 이용하여 文書를 作成하고 文字生活을 營爲했음을 밝혔다. 이것과 더불어 평양에서 출토된 ``初元木簡``, 창원의 ``茶戶裏遺物`` 등은 三國時代前期의 韓半島文字生活을 추론할 수 있는 重要한 資料임을 確認하였다. 三國時代後期부터 初期吏讀가 登場하기 始作하는데, 필자의 관점에서는 그 시초가 高句麗이고, 5世紀 以後 高句麗의 吏讀가 韓半島全域으로 퍼진 것으로 보았다. 7世紀 무렵 新羅에 이르러서는 漢文과는 완전히 결별된 吏讀文이 登場한다. 吏讀發達史에서 중요한 轉機는 7世紀의 新羅吏讀다. 助詞와 語末語尾의 表記는 물론, 漢文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先語末語尾表記가 新羅의 木簡資料에서 確認된다.
三國時代는 紀元前 1世紀부터 統一新羅가 등장하기 이전인 7世紀 중반 까지의 약 700여년의 時期를 가리킨다. 資料에 反映된 文字生活의 變化를 根據로 삼고, 4世紀 初葉 樂浪의 滅亡을 基準으로 해서, 필자는 三國時代를 前期와 後期로 細分하였다. 前期는 吏讀發生以前의 시기인데 漢字의 韓國的 受容 樣相과 關聯하여 注目할 만한 것으로는 三國志에 記錄된 ``濊民作之``가 있다. 여기에 대한 語學的 解釋을 통하여 筆者는 1世紀頃에 이미 韓國人들이 漢字·漢文을 이용하여 文書를 作成하고 文字生活을 營爲했음을 밝혔다. 이것과 더불어 평양에서 출토된 ``初元木簡``, 창원의 ``茶戶裏遺物`` 등은 三國時代前期의 韓半島文字生活을 추론할 수 있는 重要한 資料임을 確認하였다. 三國時代後期부터 初期吏讀가 登場하기 始作하는데, 필자의 관점에서는 그 시초가 高句麗이고, 5世紀 以後 高句麗의 吏讀가 韓半島全域으로 퍼진 것으로 보았다. 7世紀 무렵 新羅에 이르러서는 漢文과는 완전히 결별된 吏讀文이 登場한다. 吏讀發達史에서 중요한 轉機는 7世紀의 新羅吏讀다. 助詞와 語末語尾의 表記는 물론, 漢文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先語末語尾表記가 新羅의 木簡資料에서 確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