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단군신화를 최초로 수록한 『삼국유사』가 단군의 시조를 `환인`이라 기술하고 있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지만, 거기에는 `제석`이란 주기(註記)도 함께 병기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지금까지 `제석`에 관해서는 무속신앙의 원류인 고대 천신(하느님)신앙과 호국사상을 배경으로 형성된 불교의 제석신앙이 습합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또 『삼국유사』 편찬 당시 고려 불교의 제석신앙을 반영했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고유 신앙과 불교의 습합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지만, `제석`이라는 전부의 신(神)이 인간세상을 통제하는 절대 신으로 또는 단독 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으로 된 것은 매우 특정적이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왜 `제석`만이 특화되었는가? 라는 의문은 동아시아에 나타나는 신佛습합의 동향을 생각해 볼 때도 매우 흥미 깊은 문제일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그 원인으로 두 가지 점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첫 째, 고대 인도의 인드라 신(Sakra-devanam indra)의 한자 음역연 `석재환인(釋提桓因)`이 『법화경』의 주석에 `능천주(能天主)`나 `능천제(能天帝)`로 한자 표기된 것에 의한 의미 변용한 점이다. 둘 째, 산악신앙을 기반으로 `환웅`이 강림한 태백산과 `제석`의 묘고산(수미산)이 습합하기 용이했다는 점이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제석`보다도 그 상위에 불교적인 보살의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 즉, 고유의 하느님을 불교적인 제석의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고, 고대적인 하늘(天)`의 비소화(卑小化). 또는 불교적인 `하늘(天)`과의 이중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고유신과 제석의 습합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제석신앙은 연간세계의 재앙과 호국을 관장하는 신이었고, 단독의 절대 신으로서 신앙되었다는 점이 10세기 무렵 일본에서 형성된 천신신앙의 제석 이미지와도 근접해 있다. 일본의 전신신앙은 스가하라미치자네(管原道眞)의 원령적 성격이 강조되어 있지만, 제석으로부터 일절의 재앙을 위임받았다는 점도, 환인으로부터 인간세계의 지배를 위임받은 환웅과 유사한 점이다. 또, 원한에 의한 왕권의 권위를 흔드는 측면에서도 삼십삼천(제석천)의 아들이라 불리는 김유신이 사후에 원령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제석신앙과 전신신앙의 공통성은 신라 불교의 제석천 신앙이 일본 천신신앙의 기반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10세기 무렵부터 이미 일본의 천신신앙은 신라의 제석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으로 간주해 보면, 『삼국유사』에 묘사된 제석신앙도 고려시대의 투영이 아니라, 신라시대의 제석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오히려 신라의 제석신앙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일연에 의해서 『삼국유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호국사상의 중심에 놓아두었던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유 신인 하느님의 표기를 `제석환인`의 `환인` 문자를 사용한 것은 편자인 일연에 의한 창의적 발상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古代韓國の檀君神話を最初に記した『三國遺事』が、檀君の始祖神を『桓因』と記していることは周知のことであるが、そこには『帝釋』という注記も倂記されていた。從來、この『帝釋』という注に關しては、巫俗信仰の源流である古代の天の神(ハヌニム)の信仰が、護國思想を背景に佛敎の帝釋信仰と習合したものであり、『三國遺事』編纂當時の高麗佛敎の帝釋信仰を反映したものであると理解されてきた。固有信仰と佛敎の習合は、東アジア地域に廣く見られる現象だが、帝釋という天部の一神が、人間世界を統制する絶對神として位置づけられ、單獨の神として信仰の對象とされたことは極めて特徵的である。韓國佛敎において、なぜ帝釋が特化されたのかということは、東アジアにおける神佛習合の廣がりを考える上でも興味深い問題である。本稿では、その要因として、古代インドのインドラ神(Sakra-devanam indra)の音譯である『釋提桓因』が『法華經』の注釋の中で『能天主』や『能天帝』と漢字表記されたことによる意味の變容、また、山の信仰を基盤として檀君が降臨する太伯山と帝釋の住む妙高山(須彌山)が融合し易かったことの二點に注目する。但し、『三國遺事』では、帝釋よりも上位に佛敎的な菩薩の世界が置かれている。つまり、古來のハヌニムを佛敎的な帝釋の名に置き換えただけの單純な論理ではなく、古代的な『天』の卑小化、あるいは佛敎的な『天』との二重化を通じて、初めて固有神と帝釋の習合が可能になったのである。こうした韓國の帝釋信仰は、人間世界の災厄と護國を司る神であり、單獨の絶對神として信仰された點において、十世紀に日本で形成された天神信仰に見られる帝釋のイメ―ジとも近似している。天神信仰は菅原道眞の御靈的性格が强いが、帝釋から一切の災厄を齎す許しを與えられたとする點は、桓因から地上の支配を委任された桓雄と類似し、また、수りによって王權の權威を搖るがす側面は、三十三天(帝釋天)の子と稱された金庾信が死後に怨靈的性質を帶びたことを想起させる。こうした帝釋信仰と天神信仰の共通性は、天神信仰の基盤に新羅佛敎の帝釋天信仰が流れ입んでいる可能性を示唆するものと言える。このように十世紀の段階で旣に日本の天神信仰が、新羅の帝釋信仰の影響のもとに形成されたと見るならば、『三國遺事』に描かれた帝釋信仰も、高麗時代の投影ではなく、新羅時代の帝釋信仰を映したものであり、むしろ新羅の帝釋信仰に自らの理想を託した一然によって、積極的に同書に取り入れられ、護國思想の中心に據えられたものと考えるべきであろう。その意味では、固有神のハヌニムの表記に、『釋提桓因』の『桓因』の字を當てたのは、編者一然の創意であった可能性も否定できないと考えられ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