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시대의 예술은 그 유래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예술사조로 혼재되어 있다. 전통적인 예술현상이 지속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표현주의, 다다이즘, 신즉물주의 등 모더니즘이 배태한 새로운 사조가 속속들이 등장하였다. 더욱이 미국에서 유입된 경제모델, 대량생산, 대중매체는 소위 현대적 의미의 대중문화의 세계를 활짝 열어놓았다. 모더니즘 예술은 결코 통일적인 모습을 지니지 않는다. 전통에 대한 회의와 함께 새로운 문화현상이 들어서면서 극심한 혼돈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것은 바로 20세기 초반 유럽이 앓은 공통적 현상이다. 그러나, 전통과 현대의 갈림길에 선 지식인의 방황과 혼돈, 아메리카니즘에 대한 환호와 문명비판에 대한 첨예한 대립이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만큼 치열하게 드러나는 곳도 있을까? 왜 유독 독일의 지식인들은 그리도 심한 열병을 앓아야 했을까?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젊은 세대들은 전통적 문학형식과 이전의 엘리트적 아방 가르드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대중문화를 환호하였다. 그들에게 독일에 유입된 미국식 문물, 사고방식, 대중문화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신세계`의 문명으로 받아들여졌다. 작가들의 작품도 이제는 `엘리트적인` 문자매체인 소설만으로 출판할 것이 아니라, 수많은 대중에게 보다 쉽고 빠르게 전달하기 위하여 다양한 대중매체로 표현되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 한 예로 알프레드 되블린의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1929년에는 책으로, 1930년에는 방송극으로, 1931년에는 영화로 상영된다. 이와 달리 기성세대들은 문명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소위 교양시민계층인 이들은 전통적인 시민계급의 이상과 미학적 이념을 전수 받은 자들이자, 문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담지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적인 예술개념으로 공화국의 새로운 문화현상들을 파악하기도, 수용하기도 어려웠다. 그들에게는 아메리카니즘이나 신즉물주의, 재즈, 영화, 라디오 등의 재 현상이 그저 `문화의 위기` 일 뿐인 것이다. `문명`이 `기계적인 세계`, `유용성`, 기능성 일변도의 `외양적`인 것으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라면, `문화`는 `영혼이 살아 숨쉬는 것`, `생명력이 넘치는 것`, `정신적인 것`, `내면의 세계`로서 높이 추앙되어졌다. 이러한 문명·문화 안티테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며, 이 시대의 문화현상은 바로 그것의 해결가능성을 타진하는 실험의 공간이자, 전통과 현대가 서로 치열하게 맞서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대립과 반목이 치닫는 가운데, 공화국 말기 그 `위대한` 이름의 교양시민계층은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제 2차 세계대전을 배태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 1928년 경제공항, 인플레이션의 폭등, 세계경제시장의 하락, 6백만의 독일실업자의 양산 등의 경제적·정치적 불안 앞에서 과거 위대한 문화향유계층인 교양시민계급은 아메리카니즘과 그것이 표방하는 유용성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새로운 대중문화 앞에서 그들의 영향력도, 나아가야 할 방향도 잃어버렸다. 그들은 이 끔찍한 `위기의 시대`를 그들의 유일한 자산인 `교양`의 이름으로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그들이 이전에 향유했던 독일의 이상주의 전통을 되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이러한 심리를 읽어낸 히틀러 정권과 새 정권이 배태하는 전쟁은 곧 교양시민계급의 헤게모니를 다시 찾는 기회로서의 `문화전쟁`에 다름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