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902년 10월부터 1903년 9월까지 韓半島를 둘러싼 露·日의 角逐을 京義鐵道敷設權, 龍岩浦事件 및 義州開市에 초점을 맞추어 구명한 것이다. 본고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일본의 경의철도 부설권 획득기도와 러시아의 대응을 고찰하였다. 고무라(小村)는 한국정부의 경의철도 자력건설이 소강상태에 빠져들자 외상 취임(1901년 9월)후 棄山會議에서 경의철도 부설권의 획득 구상을 확정하고 英日同盟의 체결로 실현의 계기를 얻어 1902년 10월 각의의 결정을 거쳐 공식화하였다. 이는 1898년 이후 한반도의 現狀維持體制, 즉 로젠-니시(西)협상 체제를 위협하는 조치였다. 이에 러시아는 경의철도 차관 제의와 용암포 및 의주 진출로 맞섰지만 철도 문제가 실패함에 따라 후자에 치중하여 강경대응방침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제2부에서는 鴨綠江森林採伐權을 활용한 러시아의 龍岩浦 租借 義州 進出企圖에 대해 먼저 龍岩浦事件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의 대응을 추적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의 이같은 조치를 일본의 철도부설권 획득기도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보았다. 이에 고무라는 1903년에 열강의 협조(6월∼7월)를 모색하는 한편, 주한 공사 하야시(林)를 통해 한국정부에 威壓을 가함으로써 부설권 확보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다음으로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 재시도 및 의주 진출기도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義州 開市 要求와 對露交涉에 초점을 맞추어 밝혀보았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 위압을 가하여 마침내 경의철도 부설권을 확보(9월 8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경의철도 부설권의 획득으로 용암포 및 의주에서 러시아를 축출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더욱 굳혀졌다. 일본이 英·美와 對露共同戰線을 구축,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기도에 제동을 걸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용암포와 의주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지 않자, 하야시공사는 `龍岩浦·義州 同時開港案`으로 列强의 협조를 끌어내어 러시아를 견제하는 한편, 고무라는 이미 구축된 열강의 대러공동전선(6, 7월과 9월)을 이용, `義州·滿洲 同時處理案` 즉 러시아를 협상테이블로 끌어내어 외교적 수단으로 일괄 타개책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미해결 된 채 露日開戰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요컨대 러시아의 滿洲撤兵拒否와 열강의 대응으로 만주에서 러·일의 대결이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실제적인 양국의 대결은 한반도에서 진행되었고, 한반도에서의 이권쟁탈전은 만주에서의 그것에 못지 않게 러일개전의 발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 본고의 첫 번째 결론이다. 한반도에서가 아니라 만주에서의 그것이 露日戰爭의 진정한 원인이었다는 아직까지의 통설을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재고찰해 본 것이다. 그리고 개전의 원인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물론 일본측에도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반도에 관한 한 일본의 경의철도를 둘러싼 선제조치가 있었고 러시아는 삼림채벌권을 활용한 용암포 조차와 의주 진출로 이에 대응하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두번째 결론이다. 베조브라조프(Alexander Mikhailovich Bezobrazov)일파의 무모한 對아시아强硬政策을 들어 러일개전의 절대적 책임이 마치 러시아에게만 있는 듯이 이해해 온 일반론에 수정을 가하려한 것이다. 경의철도 문제에서 비롯된 용암포 조차와 의주 진출을 내용으로 하는 용암포사건은 러·일간의 대립과정에서 유발된 하나의 에피소드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일본의 韓國倂合의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일개전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1차 세계대전의 동인이 된 모로코위기에 견줄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고, 동북아시아의 일대 위기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