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패전 후 1945년 8월 2일 포츠담에서 `독일의 완전한 무장해제와 비군사화, 그리고 전쟁 물자와 전쟁 생산품으로 이용될 수 있는 모든 산업의 무력화`의 선언은 승전국들의 세계평화를 위한 지상목표였다. 이러한 승전국들의 독일정책에 대한 공동 의지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들의 독일 재무장에 대한 불충분한 통제의 뼈아픈 경험이 포츠담선언의 강력한 의지의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서 양대 진영의 갈등이 심화되고 소련의 위협이 증폭됨에 따라 서방 강대국들은 서유럽 경제재건과 질서회복에 독일의 기여는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마샬플랜과 유럽 경제협의기구 그리고 유럽의회의 창설을 거치면서 서독도 경제적·정치적인 면에서 서유럽 자유민주주의 공조체제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련의 핵폭탄 실험 성공과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공산주의 위협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도 서독의 재무장 문제는 서방정치가들에게 있어서 매우 다루기 힘든 일종의 `뜨거운 감자`였다. 소련의 위험이 더욱 증가함에 따라 서독 재무장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독일 재무장에 대한 확고한 대답을 회피하였다. 그렇다고 소련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서방 국가들의 군사력 증강은 미국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능력 밖의 일이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이러한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전쟁은 군사 전략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그때까지의 정치적인 고려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본 논문은 동서 양대 진영의 냉전구도 속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이 서방세계와 독일연방공화국에 뜨거운 감자였던 독일 재무장의 창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몇몇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연 한국전쟁의 발발없이 독일의 재무장은 불가능하였을까라는 문제의 제기는 본 논문이 제시하는 논지의 기본전제이다. 이 때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하였는 바 첫째는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서방강대국들의 정책입안자들의 독일 재무장에 대한 인식변화이며 둘째는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수상인 아데나위(Konrad Adenauer)가 안보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당시 국민적 정서에도 배치되었던 재무장 정책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추진할 수 있었는가의 문제와 세째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재무장에 대해 철저하게 부정적이었던 독일 언론들이 한국전쟁 발발이후 재무장에 대한 그들의 기본입장의 변화를 추적하면서 한국전쟁이 과연 재무장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중요한 자극이 되었는지를 분석하였다. 서방 세계 특히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이미 한국전쟁의 발발이전에 서독의 군사적 기여의 필요성을 인식하였지만 실행을 위한 조건을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아데나워도 독일의 재무장을 서방체제 편입의 완성을 위한 도구로 인식하였지만 국내의 반(反) 군국주의 정서를 고려하여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재무장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의 독일 언론들은 아직도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들의 반군국주의 정서를 감안하면 재무장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음은 당연하였다. 한국전쟁 발발이전까지 독일의 재무장을 반대하였던 가장 중요한 논거는 재무장으로 서독의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정치권력이 부상하여 또다시 유럽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으리라는 것과 갓 태어난 민주주의가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붕괴되리라는 우려였다. 이러한 정치적 고려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설득력을 잃었으며 소련의 위협에 직면하여 군사전략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야기한 소련의 위협에 대한 새로운 안보분석이 서독의 재무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독의 군사적 참여에 대한 인식변화에 중요한 자극이 되었던 것은 한국전쟁으로 보편화된 소련의 위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불안과 공포의 정서였다. 즉 한국전쟁의 영향을 서독의 재무장에 대한 반대자와 지지자들 사이의 비율을 완전히 바꾸어 놓음으로써 동등한 자격으로 서독을 군사적으로도 서방 세계 체제안에 편입시키는 데 중요한 조건을 창출하였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