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의 승리로 사실상 로마 제국의 일인자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형성시킨 프린켑스의 지배 체제 즉 프린키파투스는 2세기 이상 유지되면서 로마 제국에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사회적 통합을 가져다주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력에 주목해서 프린키파투스의 형성 과정을 출범-위기-확립의 3단계로 나누어 고찰하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력은 프린켑스의 체제의 출범 당시부터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그는 삼두정기에 행사하던 모든 비상 권력을 원로원과 로마 인민에게 이양하면서 `공화정의 회복`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예칭호와 함께 프로콘술의 임페리움을 그에게 10년 임기로 부여했기 때문에 프린켑스 체제는 형식적으로는 원로원이 프린켑스인 아우구스투스에게 몇몇 속주들의 통치를 위임하면서 출범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신체제의 출범 당시 공화정의 회복자라는 명분과 대부분의 군대속주들의 통제권 장악이라고 하는 실리를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27년 이후에도 콘술직을 계속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율리아의 혼인을 통해서 후계 체제까지 준비해가던 아우구스투스에게 공화정기 노빌레스들의 반대로 프린켑스 체제는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기원전 23년에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콘술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무레나가 프리무스 재판정에서 아우구스투스와 대립하게 되고, 더 나아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암살모의의 한 주모자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력은 기원전 23년의 위기 속에서도 발휘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반대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기원전 31년부터 매년마다 취해오던 콘술직을 사퇴하고 그 대신 속주 통치권인 프로콘술의 임페리움을 상급 임페리움으로 만들고, 종신 호민관의 권한을 확보했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정무관이 아니라 사인(Privatus)이긴 했지만, 관직과 권한을 분리해서 권한들 -예컨대 호민관의 권한과 프로콘술의 임페리움- 만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의 노빌레스들에 대한 이러한 수세적 자세에서 다시 공세로 돌아설 수 있었던 계기는 로마시의 곡물 위기에 나타난 원로일과 노빌레스들의 정치적 경제적 무능이었다. 기원전 22년의 곡물 위기가 왔을 때 원로원은 속수무책이었고, 굶주린 로마시 평민들은 식량 폭동을 일으키며 원로원을 위협해서 독재관직, 곡물위원직 등 비상 권력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주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곡물 공급지로 시의 이집트를 직접 지배하고, 막대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었던 아우구스투스는 곡물 위기를 해결해 주면서 로마시 평민들의 확실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원로원이 기원전 22년에서 19년까지 로마의 계속된 정치 소요에서 로마시 정국의 통제권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즉 기원전 19년에 원로원은 평민들의 소요와 무질서를 수습하기 위해 비상 결의를 통해 속주에 나가 있는 아우구스투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종신 콘술의 임페리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기원전 18년에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기에는 여러 정무관직에 나뉘어져 있던 권한들 -콘술의 임페리움, 호민관의 권한, 프로콘술의 임페리움, 켄소르의 권한- 을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일인자가 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으로 하여금 자기 사위인 아그리파에게 프로콘술의 임페리움과 호민관의 권한을 5년 임기로 부여케하여 공동 통치자로 삼으면서 권력세습을 위한 틀을 마련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제2차로 원로원 의원 200명을 축출하면서 원로원에 대한 정치적 주도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기원전 18년에 프린켑스의 지배체제는 권력의 일인 집중, 후계자의 확보, 원로원의 완전장악을 통해서 안정적인 틀을 마련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