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지방주의를 강조하는 수정론에 대해 중앙과 지방을 연결시켜 주는 통로의 하나로서 의회선거를 고찰하였다. 최근까지 역사가들은 스튜어트 초기의 의회선거들이 대체로 "개방적인" 것이었음을 제시해왔으나, 수정론을 편드는 일부 역사가들은 그 선거들이 이른바 귀족과 젠트리 엘리뜨들에 의한 "간택"에 더 가까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1620년대의 요크셔 선거를 중심으로, 선거정치에서 누가 결정적인 힘을 행사하였으며, 선거의 결과가 "광범위한 정치적 쟁점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는가를 검토하고자 하였다. 1620년대의 요크셔 선거에서는 특히 州 선거구의 경우에 1620년대를 통틀어 한 차례(1624년 선거)만을 제외한 모든 선거(1621년, 1625년, 1626년, 1628년)에서 경합이 벌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선거들에 잠재할 수 있는 요소들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요크셔에서도 지도적인 통치 엘리뜨들은 선거 영향력을 상당히 행사하고 있었으나, 유권자 수의 급증으로 더 이상 소작인들과 자유토지 보유자들의 찬성과 지지를 예전만큼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나. 이제 후보들은 선거구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쟁점들을 그들에게 점점 더 직접 호소하게 되었다. 유권자들의 주요 관심 가운데 하나는 자기 지방의 당면한 이해관계에 관한 것들(모직물 산업문제, 중앙의 행정적 간섭문제 따위)이었다. 그러나 유권자 규모의 증대는 더 많은 사람들을 정치적 과정에 접촉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전국적 쟁점들과 접촉할 수 있을 가능성을 높여놓았다. 1620년대 중반의 요크셔 선거들에서 반카톨릭 감정이 고조되었다는 것은 1640년보다 휠씬 이전에조차 전국적인 정치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선거체계와 유권자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1626년 의회에서조차 재정적인 승인을 얻어내지 못한 국왕이 대권에 의한 직접 과세에 의존하면서 지방의 부담을 증대시키게 되자, 이에 대한 지방의 반발은 비단 지방의 부담액에 대한 불만에 국한되지 않고 과세의 원칙적 부당성을 지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므로 1640년 선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들은 1620년대에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요소들이 좀더 상승된 정도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의회 선거는 국민적인 쟁점과 지방적인 쟁점이 결코 완전히 구분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무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