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794년의 개종을 싯점으로 반전된 라 아르쁘의 생애와 사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그는 파리 대학의 문학 콩쿠르에서 탁월한 수상기록을 세웠고, 비극 『바르위크 백작(Comte de Warwick)』으로 문학계에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볼테르의 후원하에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에 피선되고, 『메르뀌르 드 프랑스지』(『Mercure de France』)의 편집자가 되어 카톨릭 교회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그의 전사가 된다. 혁명직후 라 아르쁘는 파리 의원이 되지만 프랑스 학술원과 시민개방학교(Lyce´e)의 폐쇄를 추진하려는 혁명정부와 충돌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현함으로써 그는 투옥되고, 감옥에서 계몽문인으로서의 과거를 참외하고 카톨릭시즘으로 개종하였다. 로베스삐에르의 사망으로 출옥한 후 그는 반혁명가가 되어 엘베티우스, 디드로의 계몽사상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1795년 그가 이끄는 La Buttedes-Moulins 지구는 Le Peletier 지구와 함께 국민공회의 입법에 반대하여 소위 "왕당파의 봉기"를 주도하였다. 다시 석방된 그는 퐁뗀느(Fontaines)와 반혁명 신문인『Le Me´morial』를 창간하였고, 이때문에 국외추방을 선고받는다. 또 다시 추방중에 탈출한 그는 은거하다 1803년 신앙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라 아르쁘를 개종 이후의 시기까지 연장하여 볼테르의 수제자로 보려는 Christopher Todd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것은 라 아르쁘가 작품, 『 Lyce´e ou Cours de Litte´rature ancienne et moderne』(1799-1805, 16권)을 통해 볼테르의 종교관을 비난하였던 사실로 확인된다. 또한 Louis de Pre´audeau와 Alexandre Jovicevich는 그를 "배신자"로 소개하였는데, 이는 그의 개종이후의 활동을 부정적으로 본 결과이다. 이러한 두 경향은 라 아르쁘의 생애가 개종을 기점으로 정치적인 태도가 극명하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결과이며, 개종이후의 시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라 아르쁘의 개종은 그의 종교관은 물론, 정치적인 관점까지도 바꾸었다. 개종 이전에는 군주정을 혐오하였고 그리하여 공화정만이 그의 유일한 정치적 이상이었지만, 이후엔 입헌군주제를 -군주 한 사람의 각성에 의해 신속하게 정치적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다는 이유로- 더욱 선호하고 있다. 神法을 헌법보다 우위에 두는 그의 시각도 개종이후에야 발견된다. 혁명의회를 찬양하던, 그의 입장 또한 반전되어, 로베스삐에르 이후의 국민공회를 권력을 유지하고 임기연장에만 집착하는 집단으로서 더 이상 국민의 수임기관이 아니며 오히려 국민을 탄압하고 기만하는 폭정의 산실이라고 보았다. 카톨릭시즘을 찬양하고 혁명을 비판하는 라 아르쁘의 태도는 그의 벗인 퐁뗀느와 샤또브리앙(Chateaubrianc)에게 종교적, 사상적인 영향을 남겼다. 또 퐁뗀느는 라 아르쁘에게 반혁명 이론가인 보날(Louis de Bonald)을 소개하였고, 보날은 라 아르쁘의 추천으로 그의 뒤를 이어 『메르뀌르 드 프랑스』지의 편집자가 된다. 이들의 인맥에 대한 추가적인 접근이 반혁명가들의 사상적 연결을 위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