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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didate
문학 , 일본학 편 : 후크자와 유키치 (福澤諭吉)의 「 이주론 (移住論) 」과 조선
Literature , Japanology : Hukuzawa Yukichi`s Imigration Theory and Chosun
다카시로고이치(Takashiro Koichi)
일어일문학연구 vol. 38 295-315(21pages)
UCI I410-ECN-0102-2009-730-005821102

후쿠자와 유키치가 본격적으로 이주론을 전개한 것은 명치17(1884)년에「時事新報」에 게재된「移住論의 弁」에서였다. 그 사설에서 후쿠자와가 전개한 이주론은 이주지에서 성공한 후 다시 본국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임시적인 이주론이였다. 후쿠자와는 명치 17년에 위의 사설을 포함해서 여섯 편의 이주관련 사설을 발표했다. 그것은 당시 일본이 불경기로 능력있는 젊은이들이 국내에서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활약의 기회를 잡을 것을 권유 한 것이다. 명치 20년 이후의 후쿠자와의 이주론은 定住的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 때 후쿠자와는 이주지로서 남북아메리카, 南洋諸島, 훗가이도, 특히 미국을 생각하고 있었다. 후쿠자와는 미국 이주 사업을 사람들에게 권유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자금을 내어 제자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로 하여금 15명정도의 이주민을 인솔시켜 미국에 파견했다. 이 이주 사업은 성공스럽게 출발했지만, 이노우에가 농원 확장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갑신정변 관련 여부로 구속되자, 농원 운영 자금이 막혀 미국에 남아 있었던 이주민들이 농원을 팔고 해산시키므로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후 후쿠자와는 미국이주 사업에 관심을 잃은 것 같고, 그 일에 대한 언급이 없어졌다. 그의 관심은 훗가이도 이주사업으로 옮겨졌다. 명치 25년 7월 이후 조선을 이주지로 하는 "조선이주론"이 등장한다. 이 시점에서는 일본의 인구증가와 빈민의 증가를 배경으로 한 빈민 수출적인 성격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주지로서는 조선인들이 러시아 영토로 도망가는 것이 빈발하고, 불모지가 많다고 하는 함경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명치 28(1895)년에 들어서 일청전쟁 승리의 결과로 받은 대만으로의 이주를 권유하는 논설이 몇 개 등장하지만 대만으로의 이주는 어디까지나 2차적인 것이고, 후쿠자와의 관심은 조선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명치 31년 4월 이전의 후쿠자와의 이주론은 인구 급증과 식량부족을 해결한다는 일본 국내 사정을 정면으로 나타낸 빈민 수출·定住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명치 31(1898)년 4월 이후가 되면 그것이 조선의 문명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이 조선인과 雜居하여 일본인의 행동을 통해서 직접 조선인의 의식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이주·雜居적인 조선론이 등장하게 된다. 즉 후쿠자와는 이주·잡거적인 조선론은 이때까지의 일본을 위한 조선 이주에서 조선의 문명화를 위한 이주로, 논조를 바꾸면서 일본의 조선이주를 정당화하고 있다. 더욱더 이주지로서 이때까지의 인구가 적고 불모지가 많다고 하는 함경도로부터 조선의 곡창지대이자 인구 밀집지대인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3남지방으로 바뀐다. 이점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시기부터 후쿠자와 이주론이 "移民"이라기 보다 "植民"에 중점을 두는 침략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더 후쿠자와의 이주론은 이민의 移送을 일본 선박으로 하고, 이주지에서는 일본어를 쓰고, 일본의 풍속, 생활 습관, 神社佛閣을 그대로 이전하고, 僧侶와 매춘부까지 동반하여 이른바 "小日本"을 이주지에 건설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자기(이주민)를 현지 생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지(특히 조선)를 자기에게 맞추게 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런 후쿠자와의 이주론의 성격은 그대로 이후의 일본 식민정책에 계승되어 간다.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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