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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동학농민혁명기 나주 수성군의 조직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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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 나주 수성군의 조직과 활동

A Study on the Organization and Activities of the Naju Suseong-gun during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김봉곤 ( Kim Bonggon )
  •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08월
  • : 61-95(35pages)

DOI

10.37924/JSSW.79.3


목차

Ⅰ. 머리말
Ⅱ. 사료 검토 및 시기 구분
Ⅲ. 나주 수성군 조직과 전투
Ⅳ. 호남 초토영 설치와 역할
Ⅴ. 일본군의 나주점령과 수성군의 위축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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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나주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재조명을 위해 나주수성군의 실체는 어떠하였으며, 수성군의 활동은 나주수성단계와 호남 초토영 단계, 일본군진출기에 걸쳐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동학농민혁명기의 나주지역은 관찬사료와 고문서, 개인문집, 일본군 측 사료를 통해 볼 때 동학농민군과의 관계에 있어서 크게 3단계로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주 수성기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처음에는 전라병영(全羅兵營)의 지원을 받았으나, 전라병영의 군사들이 빠져나가자, 전라 우영의 영장 이원우(李源佑)와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 수성군을 편성하였다. 나주는 전라우영으로서 군관과 병사를 갖춘 상시적인 군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수성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킬 수 있었다. 또한 나주지역은 1710년(숙종 30)부터 변란에 대비한 이노작대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어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아전들과 관노로 구성된 수성군이 손쉽게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원군 집권 이후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적된 화포나 군수물자도 상당한 양에 달했다. 수성군의 조직은 아전과 군교 등의 지휘부, 주력부대인 포군, 일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포군은 전, 중, 후군 등 200명이며, 1,000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24개의 초로 나뉘어 나주성 경비와 수리, 군량미 보급 등에 종사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나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공격했으나, 대패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해 민종렬와 이원우를 파직코자 했으나, 나주 수성군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탈환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9월부터 11월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하였으나, 화력의 부족과 전술의 미흡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나주수성군은 600명에 달하는 포군을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응용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포차의 개발로 동학농민군의 전력을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둘째 단계는 호남초토영기(湖南招討營期)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호남소모사, 호남 초토사의 직함이 부여되어 나주 수성군의 활동 반경은 남평이나 무안, 영암, 영광 등지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또한 초토사 민종렬은 관할 구역에 향약을 실시하여 교화를 통해 동학농민군 수뇌부 외에는 죽이지 않는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전라도 전역에 4읍 작통제(四邑作統制)를 실시하고, 작통에 대한 규칙을 두어 함부로 동학농민군을 살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투시에도 수성군의 동학농민군 살상이 20명이 넘지 않는다고 평가될 정도로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
셋째 단계는 일본군 점령기이다. 1895년 1월 5일(양력)부터 2월 10일까지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가 나주의 정토군 본부에 상주하여 일본군과 관군, 나주수성군을 총지휘하면서 동학농민군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처히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서남해안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은 2,000명 이상이 죽어갔으며, 나주에서도 최소한 230명이 학살되었다. 나주관아도 일본군이 장악하고, 4대문도 일본군이 수비했다. 이 때문에 나주목사 민종렬은 관아가 아닌 객사 옆의 노반청에서 머물게 되었다. 잇달은 일본군의 부녀자 겁탈이나 재물 약탈에 대해서도 민종렬이나 나주영장 이원우가 감히 나서서 막지 못하였다. 나주수성군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때까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This article to analyze the truth of Naju Suseing-gun, and the changes in the activities of Suseong-gun throughout the stages of Naju Suseong, of Honam Chotoyeong, and of the Japanese military's entry period, in order to shed new light o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Naju. The Naju during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developed into three major stages in relation to the Donghak Peasant Army, when looking at the official historical records and old manuscripts, private collections, and historical materials from the Japanese military.
The first stage is the period of Naju Suseong (Naju Defence). Min Jong-ryeol, Naju Moksa, got support from Jeolla Byeongyeong (全羅兵營/Jeolla Naval Fortress) at first, but when their troops escaped, he organized the Suseong-gun with the help of Lee Won-woo(李源佑), a head of Jeolla Wooyeong and their Ajeons (subfficials). Naju has Wooyeong of the Jeolla 5-yeong, so, it had a military organization composed of military officers and soldiers, and it was able to train Suseong-gun and could be in charge of the battles. In addition, the Naju area has maintained the tradition of Inojakdae (吏奴作隊) since 1710 (the 30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so whe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ook place in 1894, Suseong-gun who composed of Ajeons (subofficials) and slaves in government employ could be easily organized. Also, the amount of gunpowder and military supplies accumulated to defend the foreign enemy since Daewongun's reign has reached a considerable amount. The organization of Suseong-gun consisted of commanders such as the Ajeon and the military officers, artillery as main-force units, and ordinary soldiers. There were 200 artillerymen, including former, middle, and rear soldiers, and as many as 1,000 soldiers were divided into 24-Cho, and engaged in security, repair, and military rice distribution in Naju Fortress.
Later, the Donghak Peasant Army attacked Naju Fortress in order to capture it, but when it was defeated, it tried to dismiss Min Jongryeol and Lee Won-woo through Kim Hak-jin, the Jeolla governor, but failed due to the resistance of Naju Suseong-gun. Therefore, the Donghak Peasant Army made attacks several times from September to November with all their might, to recapture Naju Fortress, but failed due to lack of firepower and tactics. In particular, Naju Suseonggun has disabled the Donghak Peasant Army by freely applying its 600-strong artillery force and developing gun carriages with highly mobility depending on the terrain
The second phase is the period of Honam Chotoyeong. The Royal Court gave the titles like Honam Somosa and Honam Chotosa to Naju Moksa Min, Jong-Ryeol, to let him take in charge of Jeolla Udo. After that, the movement scope of Naju Suseong-gun was expanded to the front lines in Nampyeong, Muan, Yeongam, and Yeonggwang. Also, the Chotosa Min, Jong-Ryeol implemented a village code in the jurisdiction, including an appeasement policy not to kill anyone through reformation except for the leaders of Donghak peasant army. Also, despite the implementation of four-eup Jaktongje in the whole Jeolla-do, the rules of Jaktong were established to prevent the reckless killing or wounding the Donghak peasant army. This is the reason why no more than 20 soldiers of Donghak peasant army were killed or wounded in the battle with Suseong-gun.
The third phase is the period of occupation by Japanese army. From January 5, 1895(solar calendar) to February 10, 1895, the Japanese army installed the head office of Donghakdang Jeongto-gun in Naju. Minami Goshiro who was the battalion commander of the 19th infantry in Japanese army of the time, resided in the head office of Jeongto-gun in Naju, took the high command of Japanese army, government soldiers and Naju soldiers, thoroughly developed the scorched-earth strategy to prevent the comeback of Donghak peasant army in Honam. In the whole areas of southwest seashores, more than 2,000 soldiers of Donghak peasant army were killed, and at least 230 people were killed in Naju as well.
Also, around this time, the Naju government office was dominated by Japanese army while the four main gates were defended by Japanese army. Minami Goshiro let his Japanese army handle all the affairs of government office. For this reason, the Naju Moksa Min, Jong-Ryeol had to stay in Nobancheong next to an inn, instead of government office. Min Jong-ryul and Lee Won-woo did not dare to fight against in a series of women rapes and plunder property by Japanese troops. The Naju Suseokng-gun was forced to play an auxiliary role until the Japanese troops with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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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국왕조의 정세 변동과 백제의 외교 변화

저자 : 정동준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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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시각에서 6세기 백제와 중국왕조의 외교를 다루면서, 정세 변화와 이에 대한 대응에 주목하였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549년 양에 파견된 백제 사신은 후경의 난과 제위쟁탈전으로 인하여 555년 이후에야 석방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결과 이 사신은 혼란하였던 양의 몰락한 상황을 파악하여 귀국 후 조정에 보고하였고, 백제는 이후 양과 진에 사신 파견을 주저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560년대 이후 진에 대한 사신 파견은 그 주기가 정치·군사적 기대와 반비례하였기 때문에, 주로 경제·문화 교류에 대한 기대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제가 567년에야 북조에 사신을 파견하게 된 것은 백제 내부의 사정으로 사신파견이 어려웠던 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외적인 원인으로는 550년대 이전까지는 북조에 대한 외교 필요성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동위의 우호관계가 여전히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550년대 이후에 백제는 북조에 대한 외교 필요성이 있었고 고구려와 북제의 불화라는 상황 때문에 사신 파견이 가능하였지만, 560년대에 신라가 먼저 그 기회를 이용하였다. 특히 550년대에는 북제가 최강국이었기에 가장 접근이 필요한 시기였다. 결국 대내적 요인 때문에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여 북조에 대한 외교에서는 성과가 적었다고 생각된다.
589년 백제는 수의 통일 정보를 입수하여 그것을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특히 황제에게 무도를 하였다는 것이 주목되었다. 무도는 군주에게 종속을 표시하는 의례적 행위로서 585년부터 의례에 도입된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백제 사신이 이러한 행위를 하였다는 것은 여전한 충성의 표시인 동시에 백제가 수의 '관념적 제후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여, 백제가 수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발빠른 대응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고려 초기 나주선의 톤수 추정과 검증

저자 : 김성준 ( Kim Sung-june ) , 김경옥 ( Kim Kyeong-oc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6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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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나주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나주선은 이제까지 발굴된 한선 가운데 최대선으로 추정된다. 선행연구에서는 나주선을 전장 32-42m에 이르는 초대형선이나 고려시대 초마선으로 추정했다. 문헌상 고려의 배는 누선, 초마선, 과선, 일본원정선 등 4종으로 대별할 수 있다. 과선은 여진족의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동북방면에서 활용되었던 군선이고, 일본 원정선은 일본을 공략하는 데 이용된 배다. 발굴된 지역을 고려하면 나주선이 과선이나 일본 원정선일 개연성은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연구에서처럼, 나주선을 고려의 조운에 이용된 초마선으로 가정할 경우 왕건의 누선일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만곡부재를 갖춘 고려 발굴선과 기타 한선의 주요 제원간 구성비율을 추출함으로써 나주선의 잔존부재인 만곡종통부와 저판재를 바탕으로 나주선의 크기를 추정해보고자 했다. 2에서는 만곡부재를 갖춘 고려선박의 사례를 살펴보고, 3에서는 나주선의 잔존부재인 저판재와 만곡부재를 통해 저판장을 가정한 뒤, 한선의 주요 제원간 구성비율을 적용해 길이, 너비, 깊이 등을 추산해 나주선의 톤수를 계산해보고, 이를 검증해 보았다.
연구 결과 나주선은 총톤수 230총톤으로 추정되었다. 이 경우 저판장은 22m, 저판폭(저판재 9장)은 6.81m, 상갑판장 31.46m, 상갑판 폭 12.34m, 깊이 4.97m(만곡부재 포함 외판재 7열)가 된다. 이 연구는 잔존한 소량의 부재를 활용한 추정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주선이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 공략시 활용한 누선일 가능성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3동학농민혁명기 나주 수성군의 조직과 활동

저자 : 김봉곤 ( Kim Bongg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1-9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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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나주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재조명을 위해 나주수성군의 실체는 어떠하였으며, 수성군의 활동은 나주수성단계와 호남 초토영 단계, 일본군진출기에 걸쳐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동학농민혁명기의 나주지역은 관찬사료와 고문서, 개인문집, 일본군 측 사료를 통해 볼 때 동학농민군과의 관계에 있어서 크게 3단계로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주 수성기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처음에는 전라병영(全羅兵營)의 지원을 받았으나, 전라병영의 군사들이 빠져나가자, 전라 우영의 영장 이원우(李源佑)와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 수성군을 편성하였다. 나주는 전라우영으로서 군관과 병사를 갖춘 상시적인 군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수성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킬 수 있었다. 또한 나주지역은 1710년(숙종 30)부터 변란에 대비한 이노작대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어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아전들과 관노로 구성된 수성군이 손쉽게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원군 집권 이후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적된 화포나 군수물자도 상당한 양에 달했다. 수성군의 조직은 아전과 군교 등의 지휘부, 주력부대인 포군, 일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포군은 전, 중, 후군 등 200명이며, 1,000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24개의 초로 나뉘어 나주성 경비와 수리, 군량미 보급 등에 종사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나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공격했으나, 대패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해 민종렬와 이원우를 파직코자 했으나, 나주 수성군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탈환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9월부터 11월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하였으나, 화력의 부족과 전술의 미흡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나주수성군은 600명에 달하는 포군을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응용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포차의 개발로 동학농민군의 전력을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둘째 단계는 호남초토영기(湖南招討營期)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호남소모사, 호남 초토사의 직함이 부여되어 나주 수성군의 활동 반경은 남평이나 무안, 영암, 영광 등지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또한 초토사 민종렬은 관할 구역에 향약을 실시하여 교화를 통해 동학농민군 수뇌부 외에는 죽이지 않는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전라도 전역에 4읍 작통제(四邑作統制)를 실시하고, 작통에 대한 규칙을 두어 함부로 동학농민군을 살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투시에도 수성군의 동학농민군 살상이 20명이 넘지 않는다고 평가될 정도로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
셋째 단계는 일본군 점령기이다. 1895년 1월 5일(양력)부터 2월 10일까지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가 나주의 정토군 본부에 상주하여 일본군과 관군, 나주수성군을 총지휘하면서 동학농민군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처히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서남해안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은 2,000명 이상이 죽어갔으며, 나주에서도 최소한 230명이 학살되었다. 나주관아도 일본군이 장악하고, 4대문도 일본군이 수비했다. 이 때문에 나주목사 민종렬은 관아가 아닌 객사 옆의 노반청에서 머물게 되었다. 잇달은 일본군의 부녀자 겁탈이나 재물 약탈에 대해서도 민종렬이나 나주영장 이원우가 감히 나서서 막지 못하였다. 나주수성군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때까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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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병영은 상업이 발달하고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된 곳이어서 그 어느 곳보다 환(換)을 일찍 사용하였다. 그 결과 박약국도 19세기 말기에 약재 매입이나 금융 거래 과정에서 환을 빈번하게 하였고, 60여건 정도의 흔적이나 내역이 약국 장부나 자산 장부에 수록되어 있다. 박약국 환의 거래 수수료는 원금의 2% 정도였고, 추심 기간은 장날을 매개로 한 5일 내외가 보통이어서 전국적 상황과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환의 규모는 100냥 이내의 소액이 압도적으로 많아, 200~1,500냥이라는 기존의 연구결과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접한 장흥 읍내장보다는 멀리 대구 약령시와 거래한 환의 소액 점유율이 더 높았으니, 신용도를 토대로 환의 규모가 결정되었던 것 같다.

51930년대 전반기 '전북교원사건'의 구성과 재해석

저자 : 정호기 ( Jung Ho-g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3-15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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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이해하고 구성하는데 생략할 수 없는 주제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대한 인식은 양면적인데, 하나는 존재와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서와 자료에 남겨진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당국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조직사건이 구성되었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글의 연구 대상은 1930년대 전반기에 사회주의 항일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전북교원사건'이다. 이 사건의 공식 별칭은 '조선공산주의운동통일동맹사건'이다. 이 사건은 1933년 중반에 전북 임실에서 시작되었고, 1935년 10월 25일 재판부의 판결로 종결되었다. 1년여에 걸친 경찰의 수사와 검거는 전북을 넘어 전남의 동부 지역과 경상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그 외 지역들에서도 수사가 전개되었다.
경찰은 수사 초기 단계에 사건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록과 자료에 의하면, 평소 주시하던 사회주의자들과 조직운동 전력자를 '투망식'으로 조사ㆍ검거하면서 사건을 확대하고 구성했음이 확인된다. 경찰은 장기간 구금과 강압적인 조사를 벌여 단일 사건으로 구성했는데, 수사의 과정에서 새로운 수많은 조직사건들이 생겨났다. 수백 명을 연행하여 조사했으나, 예심에 회부된 사람들은 42명이었고, 재판부는 32명만 유죄를 인정했다. 예심과 재판결과는 '전북교원사건'이라는 명칭이 표상하는 성격을 점점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성격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판결했으나, 판결문은 이를 입증할 충분한 개연성을 담고 있지 않았다.

6웹사이트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의 스토리텔링 연구

저자 : 윤효정 ( Yoon Hyo-j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3-17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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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산업유산국민회의가 운영하는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이하 '진실')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구성된 하시마 섬의 역사 스토리의 체계와 내용을 살펴보았다. '진실'은 옛 하시마 도민들의 구술을 주되게 활용한 여러영상물들의 배치를 통해 지옥섬 하시마의 '이미지'를 벗겨내면서 일체감의 코드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어려운 시절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일상을 영위하고 노동했던 1940년대 하시마의 역사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스토리 속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피해는 일본인도 함께 겪은 전쟁의 공동 피해로 변형되며, 침략전쟁의 피해자로서 조선인 노동자는 하시마 탄광업을 '지탱했던[supported]' 필수요소 중 하나로 전환되었다. 궁극적으로 '진실'의 스토리는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학대의 어두운 역사를 한국에서 만들어 낸 '이미지'로 탈바꿈했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지켜온 긍정적 역사라는 이미지 창출로 끝났다. 이와 같은 '진실'을 통해 구축 중인 하시마의 역사 스토리는 메이지 산업유산을 구성하는 유적지들 중 강제동원 피해 시설들의 전체역사 해설에 원형의 콘텐츠로 활용될 여지가 크다. 또한 최근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오픈과 함께 사실상 일본의 전체역사 해설 작업이 마무리되는 단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하시마에 관한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 1940년대 하시마의 일상과 노동 실태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실증 작업과 함께 그간 진행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구술 채록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강제동원의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구술자가 겪은 전쟁과 동원, 군수산업과 노동, 징용 등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연구방법의 개발이 과제가 될 것이다.

7북송시기(北宋時期) 동전감(銅錢監)의 규모(規模)와 인적구성(人的構成)에 관한 연구

저자 : 정일교 ( Jeong Il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1-20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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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주전감은 대부분 주전감은 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주전감에서 주조하는 금속화폐는 주로 銅錢과 鐵錢이었지만,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주전감의 설치 지역도 漢代에는 주로 銅鑛이 존재하는 산악 지역에 주전감을 설치하였던 반면 송대에는 교통이 원활한 지역에 주로 주전감을 설치하였다. 이는 동전을 생산하는데 주재료인 銅뿐만 아니라 기타 원료의 원활한 공급을 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감의 규모는 동전을 생산하는 인원이 규모가 큰 경우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예도 있었다. 그리고 보통 3인의 관원이 전감을 관리하였다. 규모가 큰 전감은 文武 관원이 각각 1명 혹은 3명씩 있었고 작은 경우에는 1명 혹은 지방관이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감의 노동자 구성을 보면 송대는 당대와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대 전감에서 주전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임시로 징발되어온 番匠과 役人이었다. 그렇지만 송대 전감의 노동자들을 보면 우선 기술을 가진 工匠, 일반 노동자, 군인 그리고 죄인의 4종류의 노동자들이 전감에서 주전사업에 종사를 하였다. 이들 중에 기술이 없는 자도 시간이 지나 기술을 습득하면 工匠이 될 수 있었고, 군인은 대부분이 죄를 짓고 전감에 배정된 “配軍”이었다. 이는 동전을 주조하는 일이 고된 노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송시기에는 이들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고 부역자들은 대부분이 공장과 일반 노동자들이었다. 그렇지만 남송시기에는 이들에 대한 대우가 북송과 비교하여 안 좋아졌으며 부역자들 또한 대부분인 군병과 죄인이었다.
송대 전감은 관원과 다양한 부류의 인원으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그 규모도 매우 다양하였다. 송대 특히 북송시기의 금속화폐의 유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8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판아테나이아 제전(祭典)의 변화와 그 의미

저자 : 김효진 ( Kim Hyo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7-23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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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 시기 판아테나이아는 제전, 행렬, 관련 공직, 그리고 건물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제전에서는 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경기와 부족들이 주축이 되어 행해지는 경기가 생겨났다. 이외에 음악과 관련한 경기도 재정비하여 시작했다. 다음으로 행렬에서는 동맹국들의 참여가 의무화되면서 아테네 외의 폴리스들이 행렬에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공직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는데, 부족에서 뽑힌 데마르코스가 행렬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가 이후 페리클레스 시기에는 경기위원회가 판아테나이아의 전반적인 사항을 조율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주정 시기에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에 다양한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테네는 이후 제전이 열린 아고라와 아테나의 신전이 있던 아크로폴리스에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시행하였다.
참주정이 끝나고 민주정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판아테나이아에 이렇듯 다양한 변화가 초래된 것은 시대적, 정치적 의미가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민주정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행해진 새로운 부족제는 혈연과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기존의 부족을 타파하고 개편하였기에, 판아테나이아에서 부족경기의 증대와 부족에 기반하여 선출된 공직자들이 판아테나이아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새로운 부족제를 효율적으로 자리 잡게 했을 것이다. 판아테나이아는 국내·외적으로 아테네의 군사적 위대함과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과시하는 장이었을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 이후 자신감을 얻은 아테네는 자신들의 폴리스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며, 국제적인 제전이 된 대 판아테나이아는 가장 유용한 선전도구였을 것이다. 또한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 판아테나이아를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아테나이아 행렬에서 참여하는 동맹의 위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써, 아테네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을 때 어떠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테네는 판아테나이아를 통해 아테네가 오랜 전통을 가진 토박이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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