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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강좌 미술사> 북제 북향당산석굴 북대굴(9굴)과 경주 골굴석굴 비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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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 북향당산석굴 북대굴(9굴)과 경주 골굴석굴 비교연구

Comparative Study on the North Cave of Xiangtangshan Caves of Northern Qi and Golgul Cave of Gyeongju

강삼혜 ( Kang Samhye )
  •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 : 강좌 미술사 5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06월
  • : 117-149(33pages)

DOI

10.24828/AHJ.54.117.149


목차

Ⅰ. 머리말
Ⅱ. 북향당산석굴 북대굴의 조영(造營)
Ⅲ. 북향당산석굴 북대굴과 경주 골굴석굴 비교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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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북제(北齊: 550~577) 북향당산석굴 중 가장 이른 시기인 552년경 조영된 북대굴을 대상으로 관련 기록과 특징, 석굴의 원형과 조성 목적 등을 살펴 북제와 신라 불교조각과의 관계, 경주 골굴석굴 조성에 미친 영향을 고찰해 보았다.
북향당산석굴 북대굴은 북제 문선제가 조영한 굴로, 중심탑주 3면에 1불 2보살상으로 구성된 삼세불(석가, 정광불,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다. 중심탑주 상단의 빈 감실은 기록으로 전하는 문선제(550~559 재위) 관을 안치한 장소일 것으로 추정되며, 하남성 안양 출토로 전하는 석관상(石棺床)은 문선제 장례구로 짐작되고 있어, 당시 소그드 문화에 탐닉했던 북제 황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남아 있는 북향당산석굴 불보살상은 이전 북위~동서위 시기 수골청상형(秀骨淸像形) 불상의 모습이 아니라, 양감이 풍부하고 얼굴의 부피감이 잘 표현된 깔끔하고 중후한 모델링이 구현되어 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문선제가 북위의 한화(漢化) 정책에 반하여 선비화(鮮卑化) 정책을 추구하면서 소그드 문화를 선호하였던 것과 연결시켜볼 수 있을 듯하다.
당시 신라는 진흥왕(540-576 재위) 때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해로를 통한 중국과의 통로가 열렸다. 북제와 고구려의 관계 악화로 이전에는 고구려에 수여되던 “동이교위(東夷校尉)” 책봉을 565년에 신라가 수여 받기도 하였다. 진흥왕대 신라는 북제와 직접 교역하면서 업성(鄴城)의 발전된 문물, 특히 북향당산석굴의 뛰어난 조형미가 신라에 직접 전해져 국보 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과 같은 기념비적인 찬란한 불교미술을 꽃피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토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6세기 후반~7세기 초에 만들어진 국보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은 런던의 Victoria and Albert Museum에 소장된 북향당산석굴의 중심석주 북면 불상의 얼굴과 비교되며, 양감 있고 당당한 모델링에서 북향당산석굴 존상과 유사한 점이 보인다. 또한 일월식(日月飾) 보관(寶冠)이나 둥근의자 등 세부 표현에서는 북제에서 활동하던 소그드인들의 미술이 반영되었다.
북향당산석굴은 불교조각에서뿐 아니라 골굴석굴 개척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외래 문물의 유입이 빠르게 입수되고 왕실의 행차가 잦았던 교통로상에 위치해 있던 두 절의 위치와 북제의 승조(僧稠, 480~560) 스님과 신라의 원효(元曉, 617~686) 스님에 대해 검토하여 보았으며, 신라 초기 수행굴로서의 골굴석굴 성격도 살펴보았다.
This paper examines the North Cave, the earliest of the Northern Xiangtangshan Caves of the Northern Qi dynasty (550-577), based on related records, characteristics, the cave temple archetype, and purpose of its construction, while also studying Northern Qi’s relationship with the Buddhist sculpture of Korea’s Silla period and its influence on the construction of Golgul cave in Gyeongju, the Silla capital.
The North Cave of the Northern Xiangtangshan Caves, built under the sponsorship of Emperor Wenxuan of Northern Qi, has a central pillar featuring sculptures of one Buddha and two bodhisattvas on three sides. The images are collectively known as the three Buddhas of the past, present and future (Dipankara, Shakyamuni, and Maitreya). Based on records, it is conjectured that the coffin of Emperor Wenxuan (r. 550-559) was enshrined in an empty niche at the top of the central pillar. The stone coffin platform presumably excavated from the city of Anyang in Henan Province, China, is thought to be a funerary item of Emperor Wenxuan. This sheds light on one aspect of the imperial court of Northern Wei, which admired the Sogdian culture.
The Buddha and bodhisattva sculptures remaining in the Northern Xiangtangshan Caves are not in the graceful style known as xui gu qing xiang, literally “elegant bones and clear appearance,” that characterized the Buddhist images of the preceding Northern Wei and Eastern and Western Wei dynasties, but have a generous sense of volume and clean modelling that expresses the fullness of the face. It seems this sudden change in the style of Buddhist sculptures of Northern Qi is related to the court’s preference for the Sogdian culture, as Emperor Wenxuan opposed the policy of Northern Qi’s Sinicization and pursued the policy of adherence to Xianbei traditions.
In Korea, during the reign of King Jinheung (r. 540-576) the Silla Kingdom occupied the Han River basin and had access to China via maritime routes. As Northern Qi and Goguryeo relations worsened, the title of Dongyi Gyowi (Colonel of the Dongyi) that had been conferred on Goguryeo was transferred to Silla in 565. While King Jinhueng reigned, Silla conducted direct trade with Northern Qi, which led to the direct introduction of the advanced civilization of Ye (Northern Qi capital), especially the sculptural art of the Northern Xiangtangshan Caves. It is surmised that this kind of exchange influenced the creation of monumental works of Korean Buddhist art, namely the two pensive images that have been designated National Treasure No.78 and No.83, respectively. These two sculptures, made between the latter half of the sixth century and the early seventh century, can be compared with the Buddha sculpture found on the northern side of the central pillar in the Northern Xiangtangshan Caves, now preserved at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in London. The faces of the Korean pensive images in their sense of volume and confident modelling are similar to the face of the Xiangtangshan principal icon. Moreover, expression of the details such as the “sun-and-moon” decorations on crown and the round seat reflect the style of the Sogdian people who were active in the Northern Qi dynasty.
The Northern Xiangtangshan Caves would have influenced not only Silla Buddhist sculpture but also the construction of Golgul Cave in Gyeongju. This paper examines the location of the Chinese and Korean cave temples, which were situated on traffic routes where the introduction of foreign culture was rapid and where royal processions often took place, and also Master Sengchou (480-560) of Northern Qi and the Monk Wonhyo (617-686) of Silla, as well as the nature of Golgul Cave as a temple for spiritual practice in the early Silla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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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예체능분야  > 미술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226-6604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8-2020
  • :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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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골굴석굴과 운강석굴 제 6굴의 구조와 도상의 비교연구

저자 : 문명대 ( Moon Myung Da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4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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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굴석굴과 운강 6굴의 구조와 도상을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밝히게 되었다.
첫째, 골굴석굴의 구조형식은 전실 사각형 주실 장방형의 구조인데 전실은 벽체가 석실이지만 지붕은 석조가 아닌 목조라는 점, 주실은 완전 석실이지만 긴 장방형 구조에 후진(后陳) 내지 중심에 상이 조각된 탑주가 없는 점이 특징이라는 사실을 다시 밝힌 것이다.
둘째, 운강석굴의 구조형식은 누각식 목조 전실 입구와 3벽면이 석벽인 직사각형 전실구조, 주실은 정사각형 구조에 4벽면 부조와 안쪽 오진에 감실 3존 주불과 중심 4면에 불상을 새긴 4면탑주의 구도형식이 특징이라는 점을 밝혔다.
셋째, 운강 6굴의 도상 특징은 법화경, 미륵경, 유마경, 불본행집경의 사상을 도해한 부조들이 전체 석굴에 가득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넷째. 이 불상들은 만면한 미소 띈 박력 넘치는 얼굴과 건장하고 당당한 역강한 체구, 포의 박대식 중국화된 대의와 평행계단식의 기하학적 의문 등 역강한 초기 중국화 불상조각이라는 사실이다.
다섯째, 이에 비해 골굴석굴 불상 도상은 초창기 골굴 도상이 유가유식 사상에 의한 미륵불일 가능성이 있지만 9세기 중창 골굴석굴은 법화경사상 또는 신인종사상에 의한 석가불이 조성되었던 것이 비교된다.
여섯째, 인도 챠이티야 석굴이 화려하게 변모되어 운강 6굴로 변형되었고, 다시 간명하게 변모되어 골굴석굴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을 밝히게 되었다.

2용문석굴 고양동과 골굴석굴의 비교연구

저자 : 이분희 ( Yi Boonhe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7-66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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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은 중국미술사에서 북위시기부터 당대까지의 석굴사원의 조영과 불상양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석굴사원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석굴사원에도 그 영향을 많이 끼쳤으며, 조성기도 남아 있어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본고에서는 특히 용문석굴 가운데 가장 먼저 개착되었으며, 규모도 큰 고양동 석굴과 우리나라 석굴사원인 골굴석굴을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용문석굴 고양동은 용문 20품 가운데 19품이 있을 정도로 서예사적으로 중요한데, 그 안에 새겨진 여러 조상기를 통해 당시 석굴개착과 불상조성, 그리고 조성 신앙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용문석굴 고양동은 말발굽형의 기본 구조이며, 정벽에 석가삼존의 불상을 봉안하고, 양 벽면에 3층으로 나누어 많은 감실을 만들고 대규모의 불상들을 조성하였다. 불상들은 운강 석굴보다 더욱 중국화로 진전된 불상양식을 보이며, 석가상과 미륵보살상이 주로 봉안되었다. 존명의 구분뿐만 아니라 조상기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파악해보면 법화경 사상을 근간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골굴석굴과 용문석굴 고양동을 비교해보면, 용문석굴 고양동은 개착시기가 골굴석굴보다 앞서지만, 신라시대부터 구법승들이 자주 방문했던 곳으로, 골굴석굴 개착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기본 구조은 두 석굴 모두 말발굽형의 U자형 평면이며, 입구에 목조 건축을 하였던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골굴석굴이 하나의 예배굴에 10개의 승방굴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 비해, 용문 석굴은 예배굴과 승방굴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석굴의 조영사상은 법화경 사상에 기반을 두어 용문석굴 고양동이 우리나라 불상 조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3천룡산석굴과 골굴석굴의 건축 연구

저자 : 손신영 ( Shinyoung Soh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7-9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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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당대에 이르기까지 2백 여년에 걸쳐 조성된 천룡산석굴은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인해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우리에게는 1300여년 전 우리 선조들이 외국 땅에 조성한 조형작품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곳이다. 기록에 전하는 물부순장군과 흑치상지의 딸 부부가 조성한 굴실은 2000년대 이전에는 21굴이라 여겨져 왔으나, 현재는 중국 학자들에 의해 제15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형사적으로는 물부순장군부부가 조성한 굴실을 특정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백제유민인 이들 부부의 활약상을 파악할 수 있고, 勿部旬이라는 인물 및 물부라는 성씨의 존재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전해진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건축적으로 보면, 중국 석굴 중에서도 當代 목조건축이 잘 표현된 사례로서, 특히 굴실 정면에 처마와 공포 및 기둥으로 구성되는 바가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어 주목되고 있다. 특히 제16굴의 두공 하단 권살기법은 중국건축에서 처음 등장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골굴석굴은 초창시기가 불분명하지만 원효선사가 수행하였다는 穴寺에 해당한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골굴마애불좌상>이 조성된 9세기 후반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당시, 굴실 전면에 木造架構가 설치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조선후기 여행기를 통해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에 골굴석굴의 형태와 유지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석굴사원 연구에 참고가 된다. 골굴석굴은 조선후기의 자료를 통해 천룡산석굴과 달리 목조가구가 암벽면에 가설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굴실의 표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인도와 중국의 석굴을 고려해보면 목조가구가 가설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4골굴석굴과 공현석굴 제 1굴의 비교연구

저자 : 주수완 ( Joo Soowa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5-11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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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석굴은 석굴과 함께 마애불이 함께 조성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 마애불은 보편적인 불상조성방식의 하나이지만, 중국에서는 대부분 석굴사원 내지 감실 내부에 불상이 봉안되는 방식이며, 공현석굴의 마애불처럼 완전한 마애불 형식으로 조성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마애불의 사례로서 감숙성 번화현 서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북위시대에 사문 류살하가 그 출현을 예언한 바 있고, 그로부터 87년 뒤인 정광 원년(520년)에 실제로 불상이 절벽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전해졌다. 정광원년이면 공현석굴의 개착 연대와도 유사한 시기여서, 공현석굴에서 이처럼 마애불이 조성된 이유 역시 서상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추론을 해보았다.
나아가 골굴사 석굴 역시 석굴과 마애불이 결합된 형태로서 한국에서도 이러한 사례는 흔치 않기 때문에 공현석굴과의 유사성이 주목된다. 다만 그 순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조각양식적으로 보면 공현석굴에서는 마애불보다 석굴 내부의 중심석주에 조성된 불상들의 한화가 더 진전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마애불이 먼저 조성되고, 이어 석굴사원이 개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골굴사 석굴의 경우는 이미 혈사(穴寺) 즉 석굴이 삼국말~통일신라초기에 활동했던 원효스님이 머물렀고 입적한 장소로 추정되고 있는데 반해 마애불은 통일신라 후기로 편년되고 있기 때문에 석굴이 먼저 운영되고 있었고, 마애불이 나중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번화현 서상도 불상의 출현이 예견된 이후 87년이 지나서 마애불이 출현한 예에서처럼 자연암반이 신성한 곳으로 숭상되고, 주변에 수행공간이 형성된 다음, 나중에 마애불이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그 순서에 있어서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예상된다. 아마도 골굴사 정상부의 마애불과 그 아래 기암괴석의 석굴은 마치 고려시대 오백나한도의 장면처럼 바위에 현현한 부처와 그 주변에서 수행하는 오백나한의 이미지를 실제로 수행공간에 실현한 사례였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5북제 북향당산석굴 북대굴(9굴)과 경주 골굴석굴 비교연구

저자 : 강삼혜 ( Kang Samhy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7-14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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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북제(北齊: 550~577) 북향당산석굴 중 가장 이른 시기인 552년경 조영된 북대굴을 대상으로 관련 기록과 특징, 석굴의 원형과 조성 목적 등을 살펴 북제와 신라 불교조각과의 관계, 경주 골굴석굴 조성에 미친 영향을 고찰해 보았다.
북향당산석굴 북대굴은 북제 문선제가 조영한 굴로, 중심탑주 3면에 1불 2보살상으로 구성된 삼세불(석가, 정광불,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다. 중심탑주 상단의 빈 감실은 기록으로 전하는 문선제(550~559 재위) 관을 안치한 장소일 것으로 추정되며, 하남성 안양 출토로 전하는 석관상(石棺床)은 문선제 장례구로 짐작되고 있어, 당시 소그드 문화에 탐닉했던 북제 황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남아 있는 북향당산석굴 불보살상은 이전 북위~동서위 시기 수골청상형(秀骨淸像形) 불상의 모습이 아니라, 양감이 풍부하고 얼굴의 부피감이 잘 표현된 깔끔하고 중후한 모델링이 구현되어 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문선제가 북위의 한화(漢化) 정책에 반하여 선비화(鮮卑化) 정책을 추구하면서 소그드 문화를 선호하였던 것과 연결시켜볼 수 있을 듯하다.
당시 신라는 진흥왕(540-576 재위) 때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해로를 통한 중국과의 통로가 열렸다. 북제와 고구려의 관계 악화로 이전에는 고구려에 수여되던 “동이교위(東夷校尉)” 책봉을 565년에 신라가 수여 받기도 하였다. 진흥왕대 신라는 북제와 직접 교역하면서 업성(鄴城)의 발전된 문물, 특히 북향당산석굴의 뛰어난 조형미가 신라에 직접 전해져 국보 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과 같은 기념비적인 찬란한 불교미술을 꽃피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토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6세기 후반~7세기 초에 만들어진 국보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은 런던의 Victoria and Albert Museum에 소장된 북향당산석굴의 중심석주 북면 불상의 얼굴과 비교되며, 양감 있고 당당한 모델링에서 북향당산석굴 존상과 유사한 점이 보인다. 또한 일월식(日月飾) 보관(寶冠)이나 둥근의자 등 세부 표현에서는 북제에서 활동하던 소그드인들의 미술이 반영되었다.
북향당산석굴은 불교조각에서뿐 아니라 골굴석굴 개척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외래 문물의 유입이 빠르게 입수되고 왕실의 행차가 잦았던 교통로상에 위치해 있던 두 절의 위치와 북제의 승조(僧稠, 480~560) 스님과 신라의 원효(元曉, 617~686) 스님에 대해 검토하여 보았으며, 신라 초기 수행굴로서의 골굴석굴 성격도 살펴보았다.

6서울 봉은사 왕실발원 석가괘불도 연구

저자 : 고승희 ( Koh Seung He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1-17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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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서울 봉은사 <석가괘불도>의 도상과 성격을 밝혀보고, 양식을 고찰해 봄으로써 봉은사 <석가괘불도>의 미술사적 위치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먼저 제2장에서는 봉은사의 연혁과 석가괘불도의 조성배경에 대해 살펴보았고 '염화인불(拈花印佛)' 도상과 왕실발원 괘불도의 특징과 현황을 알아보았다. 제3장에서는 봉은사 <석가괘불도>의 도상 및 양식특징에 대하여 파악해보았으며, 제4장에서는 봉은사 <석가괘불도> 조성 수화승인 '긍조'의 화적과 화승들과의 유파관계를 살펴보고 화기 내용을 알아보았다.
그 결과 봉은사 <석가괘불도>는 조선시대 후반기 제3기에 해당하는 1886년 조성의 괘불도로서,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를 비롯하여 내명부 상궁들의 시주 참여와 발원을 통한 내용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19세기 많은 화적을 남긴 수화승 '긍조'와 '돈조'가 참여하였으며 화승과의 교류를 통하여 도상과 양식 특징의 유파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봉은사 <석가괘불도>는 손에 연꽃가지를 든 '염화인불' 도상으로 19세기 석가괘불도 가운데 개운사 <석가괘불도>, 호국지장사(화장사) <석가괘불도> 등이 있고, 주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상 대신 가섭존자상과 아난존자상이 협시하고 있거나, 문수·보현동자상이 등장하는 도상은 봉은사 <석가괘불도>를 포함하여 개운사 <석가괘불도>, 내원암 <석가괘불도>, 호국지장사(화장사) <석가괘불도> 등으로 매우 독특한 도상적 특징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왕실발원 괘불도로서의 조성배경과 '염화인불' 도상의 성격을 파악해보고, 다양한 양식 특징을 고찰해 봄으로써 봉은사 <석가괘불도>의 미술사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7기록으로 살펴 본 조선시대 왕실하사 은기의 변화 양상

저자 : 정지희 ( Jeong Ji Hui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7-21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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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은기의 제작과 사용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있어 신분에 따라 은의 사용을 제한하고, 왕실의례나 행사일지라도 은기의 제작과 사용 여부에 대해서 다른 기명과 달리 왕에게 고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현전하는 왕실하사 은기가 매우 드물고, 실물자료가 있어도 언제, 누가, 어떤 용도로 하사되었는지 이력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자료와 일제강점기 신문기사를 면밀히 고찰하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왕실하사 은기의 면모를 분석하는데 유효하다.
조선 왕실에서 하사되는 은기는 중국 및 일본 국왕이나 사신에게 하사된 몇 예를 제외하고는 관부(官府), 공신과 봉조하(奉朝賀) 등 신하들에게 하사되었다. 하사된 은기는 주로 은배와 은병인데 관부는 은배가 대부분이고, 신하에게는 은배와 은병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은배를 하사받은 관부는 승정원, 성균관, 기로소, 독서당, 홍문관, 충훈부, 예문관, 세자시강원 등 폭넓게 나타난다. 하사된 은배는 과음을 경계하거나 좋은 시험성적에 대한 시상, 왕의 뜻을 담은 훈계를 위해 사용되었다. 반면 신하들에게는 반정이나 전쟁 중의 화의 등 특수공적을 쌓거나 각종 시험의 장원, 선온에서 화답에 이르기까지 은배와 함께 은병, 은시저 등이 하사되었다. 근대의 전환기였던 고종대에는 러시아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1841-1910), 손탁(Antoinette Sontag)여사, 영국공사 조던(J. N. Jordan,1852-1925) 부인 등 서양인과 왕실의 특수업무를 위해 조선에 온 외국인에게도 은배가 하사되었다.
순종대가 되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왕실의 은배 하사가 화병 하사로 바뀐다. 『순종실록부록』과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순종대 왕실하사품은 은제화병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 배경은 순종대 강해진 일본의 내정간섭과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일본 왕실의 관례가 조선 왕실에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메이지기 후반 일본은 서양 왕실과 친밀한 교류를 위해 은제화병을 공식적인 외교증답품으로 사용하고, 대중에게 널리 유행하던 일반적인 화병과의 차별화를 위해 국화문을 강조하는 구나이쇼양식을 만들었다. 일본 왕실에 속한 화족으로 전락한 순종대 조선은 일본의 전례에 따라 왕실하사품을 화병으로 대체했다. 순종대에는 화병이 왕실하사품으로 전면에 등장하고, 성격과 기능도 기념품으로 변화하여 전통적인 왕실하사품과 차별화되었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로 들어선 순종대는 일본 왕실의 영향으로 왕실하사 은기의 종류, 성격, 기능이 바뀌는 식민지적 전환기이었다.

8포르투갈·스페인 시장용 명대 크락자기 연구

저자 : 방병선 ( Bang Byungsu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7-24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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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이베리아 반도 포르투갈, 스페인 양국에 수입된 중국 명대 청화백자 크락양식의 기원과 유입 배경을 살펴보고, 양식 변천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먼저 포르투갈의 경우 필자가 직접 실견, 조사한 산토스(Santos)궁 자기방 천장의 청화백자는 크락양식의 다양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피라미드 형태의 중국 청화백자 테두리를 델프트 도기로 장식하여 도자의 위계를 보여주었다. 또한 16세기 침몰선 출토 크락자기는 대체로 구획된 윤곽선 없이 중앙의 주제문과 자유롭게 배치된 테두리 문양으로 구성되는 것을 파악하였다.
다음 스페인의 명대 크락자기 양상은 16세기의 경우 대체로 포르투갈과 유사하지만 17세기 이후는 1600년 침몰선 출수품, 왕궁과 광장 등의 고고학 발굴품, 정물화 등에만력과 숭정 연간의 변화된 크락양식이 표현되었다. 접시, 정병, 주자 등 다양한 기형에 여백 없이 구연부 테두리에 윤곽선으로 구획하였으며, 구획 공간의 여백은 더 넓어지고 시문은 양식화되는 것을 고찰하였다.

9고려 아미타8대보살도(9존도)의 도상학 연구

저자 : 문명대 ( Moon Myung Da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3-252 (1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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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아미타 8대보살도는 고려불화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불화로 평가된다.
첫째 아미타8대보살은 무량수경과 다라니집경, 8대보살만다라경 등 세 가지 경에서 유래한다는 점이다. 즉 고려 아미타8대보살은 무량수경을 기본으로 다라니집경의 8대 보살을 가장 많이 활용했고 팔대보살만다라경을 참고하여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아미타8대보살도의 조성사상은 정토삼부경(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과 이 가운데 무량수경의 사상이 그 기본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는 것이다. 흔히 화엄경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40(四十) 화엄경 보현행원품이 그 사상적 근거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사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셋째 아미타8대보살도의 배치구도는 5형식으로 분류되는데 이것은 8대보살이 4열로 배치되는 순서가 앞뒤로 바뀌는데 따른 형식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10무염파(無染派) 불상의 계보와 고창 문수사(文殊寺) 무염파 불상(삼세불·지장시왕상)의 연구

저자 : 문명대 ( Moon Myung Da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53-274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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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문수사의 불상은 조선시대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첫째, 문수사 불상의 조성배경을 조성기를 위주로 그 의미를 찾아보았다. 이 불상들은 17세기 2/4분기의 최고 조각승 무염이 조성 지도하여 조성한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둘째, 문수사 대웅전 삼세불상의 도상 특징을 밝히게 되었다. 문수사 삼세불상은 불갑사 삼세불상을 계승한 석가, 약사, 아미타의 삼세불상으로 대웅전 정벽 수미단 위에 봉안된 완전한 불상들이다. 이 불상들은 양감 있는 얼굴, 건장한 체구 등 삼세불의 도상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고 평가된다.
셋째, 문수사 지장시왕상의 도상특징을 밝힐 수 있었다.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각 5구씩 10왕상을 배치했는데 지장보살상은 승형의 머리와 갸름한 얼굴, 단정한 체구의 지장보살상이며 10대왕들은 제각기 10대왕의 특징을 나타내면서 좌우로 각각 5구씩 배치되어 있는 점을 밝힐 수 있었다.
넷째, 문수사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문수사 삼세불은 양감 있는 세련된 얼굴, 건장한 체구, 오른팔을 휘감은 활력 있는 옷자락 등 당당하고 활기 찬 양식의 불상으로 평가된다는 점을 밝히게 되었다.
다섯째, 무염파는 석준-원오-각민-행사-무염-도우, 승일, 해심으로 이어지는 석준·원오파에 속하면서 독자적인 대 문파를 이룬 조선 후반기 제1기 17세기 2/4분기의 대조각파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문수사 불상은 무염파 불상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대표작의 하나로 의의가 크다고 판단된다는 점을 밝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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