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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역사연구소> 지역과 역사> 3세기 포상팔국전쟁 이후 남부가야제국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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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포상팔국전쟁 이후 남부가야제국 동향

Southern Gaya Countries after the Posangpalguk War in the Third Century

김양훈 ( Kim Ryang-hoon )
  • : 부경역사연구소
  • : 지역과 역사 46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04월
  • : 5-34(30pages)

DOI

10.19120/cy.2020.04.46.5


목차

머리말
Ⅰ. 포상팔국전쟁
Ⅱ. 포상팔국전쟁 이후 남부가야제국 동향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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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3세기 포상팔국전쟁 이후 남부가야제국의 동향을 살폈다. 포상팔국전쟁은 3세기 초 포상팔국이 가락국을 침공하였고, 신라가 가락국을 지원한 사건이다. 전쟁직후 가락국의 인질파견은 가락국과 신라의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가락국의 배후 안전과 신라의 對한군현 교섭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포상팔국전쟁 이후 남부가야제국은 魏·晉의 對韓정책에 따라 對中교섭이 이루어졌다. 3세기 중반 남부가야제국은 魏의 적극적인 對韓정책을 대응하였고, 가락국과 안야국은 교섭을 위한 탁월한 입지와 교섭 기반을 바탕으로 對魏교섭을 주도하였다. 3세기 후반 남부가야제국은 晉의 동이교위 중심의 對韓정책을 대응하여 유력국 주도의 교섭집단을 통해 교섭을 하였다. 특히 가락국은 自國의 교섭기반 활용과 주변국 포섭을 통해 교섭집단을 구성하고, 對晉교섭을 주도한 것으로 생각한다.
This paper deals with the situations of southern Gaya Countries after the Posangpalguk war in the third century. The war began with Posangpalguk’s invasion of Garakguk, and Silla provided military support to Garakguk. The fact that Garak sent hostage to Silla right after the war suggested that These two countries sought for military safety and the progress of diplomatic relationships between Silla and four provinces of Han in Northeast Asia respectively.
In the aftermath of the war Gaya countries’ relationships with Chinese kingdoms primarily depended upon Wei and Zin’s attitudes towards countries in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middle third century, Garak and Anya were placed at advantageous positions on Gaya-Wei relations. In the later third century, Dongigyowi in Zin led diplomatic policies towards Gaya Countries, and negotiation team was organised led by forceful Gaya Countries. Garak, one of them, could play a leading role in establishing diplomatic relations with Zin by exploiting its capable negotiation initiative and winning over other neighbouring countries to its 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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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반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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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6-2020
  • :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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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포상팔국전쟁 이후 남부가야제국 동향

저자 : 김양훈 ( Kim Ryang-hoo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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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3세기 포상팔국전쟁 이후 남부가야제국의 동향을 살폈다. 포상팔국전쟁은 3세기 초 포상팔국이 가락국을 침공하였고, 신라가 가락국을 지원한 사건이다. 전쟁직후 가락국의 인질파견은 가락국과 신라의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가락국의 배후 안전과 신라의 對한군현 교섭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포상팔국전쟁 이후 남부가야제국은 魏·晉의 對韓정책에 따라 對中교섭이 이루어졌다. 3세기 중반 남부가야제국은 魏의 적극적인 對韓정책을 대응하였고, 가락국과 안야국은 교섭을 위한 탁월한 입지와 교섭 기반을 바탕으로 對魏교섭을 주도하였다. 3세기 후반 남부가야제국은 晉의 동이교위 중심의 對韓정책을 대응하여 유력국 주도의 교섭집단을 통해 교섭을 하였다. 특히 가락국은 自國의 교섭기반 활용과 주변국 포섭을 통해 교섭집단을 구성하고, 對晉교섭을 주도한 것으로 생각한다.

26세기 전반(前半) 고구려(高句麗)와 량(梁) 교섭의 실상(實狀)

저자 : 백다해 ( Baik Da-hae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5-6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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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6세기 前半 확인되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동요가 고구려와 梁의 교섭 양상에 미친 영향을 탐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동안 6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5세기의 연장선으로 이해되었다. 즉, 비등한 힘을 가진 北朝系, 南朝系, 高句麗, 柔然이 '세력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서로의 행동이 영향을 주는 '연동성'에 기반한 질서가 계속 유지되었으며, 남조계, 유연, 고구려는 상대적 군사 강국인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연대하였다고 이해한 것이다.
고구려와 양은 6세기 초부터 교섭하였지만, 그 양상은 미미하였다. 사신 파견도 저조하였으며, 파견의 이유도 교통로 위협에 대한 사후 대책의 차원이었다. 하지만 양국의 교섭이 520년대부터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여기에 국제정세의 동요가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실제 기존의 이해와 달리 6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동요하는 현상이 포착된다. 발단은 유연의 태세 전환이었다. 남조계 및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맺었던 유연은 북위와의 화친[通和]을 모색하였는데, 520년 북위가 이를 수용하면서 유연-북위 간 친선관계가 성립되었다. 게다가 유연은 營州 일대로의 군사행동을 감행했던 고구려에 대한 토벌[東討]을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520년대 이후 확대되는 고구려와 양의 교섭은 이러한 국제정세 변동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534년 북위가 東·西魏로 분할되면서 요동치던 국제정세가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와 접경하였던 동위와 양의 친선관계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양과의 교섭 動因을 상실한 듯하며, 동위와의 교섭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대외정책을 점차 수정해 갔다.

3신라하대 경문왕가기 김위홍의 정치활동

저자 : 권영오 ( Kwon Young-oh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5-9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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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구층목탑의 찰주본기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김위홍의 정치적 위상과 활동에 대한 연구는 그가 경문왕가 국왕의 동생이자 숙부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이루어져 많은 한계가 있었다.
신라하대 정치사 연구가 진전되면서 김위홍의 정치활동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경문왕의 왕권강화 정책에 참여하였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한 헌강왕이 친정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배제 또는 실각되었으며, 진성여왕의 즉위 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고 보고 있다. 반면 경문왕 이후부터 진성여왕의 즉위 초에 이르기까지 경문왕가 왕실의 증심 인물로 지속적으로 정국을 주도했다는 평가도 있다.
김위홍은 경문왕에서 진성여왕 즉위 초반까지 재상과 상대등, 병부령으로 있었고, 이는 그가 경문왕가의 종친으로 왕실을 대변하고 정국 운영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가능했다. 김위홍은 신라에서 유일한 경문왕 자녀들의 연속적인 왕위계승을 지지하고 『삼대목』 편찬을 통해 이를 정당화하였다.
경문왕가는 자신을 신성가족화하여 원성왕계 내의 다른 가계들과 차별화하고 우위를 주장했다. 30대에 조졸하였으며 고립된 경문왕가의 왕들이 김위홍까지 내치기에는 경문왕가의 왕실 구성원은 너무 협소했다. 경문왕가의 구성원들은 각자의 정치세력화보다는 국왕을 구심점으로 왕가의 공통된 정치적 이해를 추구하였다.
경문왕가기 김위홍의 정치활동에 대해 「심원사 수철화상비」에서는 “혜성대왕이 왕가를 위해 자신의 덕을 덜어 잘 화합했다”라고 평가하였다. 경문왕가기 정국의 중심에 선 김위홍의 정치 노선과 정치적 위상은 헌강왕대 후반기 이후 단절되었다가 진성여왕대에 다시 복귀한 것이 아니라 경문왕가 국왕들의 재위 동안 지속되었다.

4조선시대 上言 처리의 행정 체계 - 결송 입안 상언 사례에 나타난 중앙 관사와 지방관의 역할을 중심으로 -

저자 : 박경 ( Park Kyo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1-13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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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결송 입안에 나타난 상언 처리 절차와 상언 처리에서의 지방관과 중앙 관사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상언 중 중앙의 담당 관사에서 지방관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 사안은 왕의 윤허를 거쳐 지방관에 移文하여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경우 지방 수령의 조사와 판단, 관찰사의 검토와 판단, 중앙의 담당 관사의 검토와 판단의 3단계에 걸친 조사, 검토, 판단이 이루어졌으며, 마지막으로 왕의 윤허를 받아 판결이 이루어졌다. 지방 수령과 관찰사의 판단이 중앙 관사의 검토와 법조문 적용 과정에서 번복되는 사례도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이 3단계의 과정이 견제와 보완의 역할을 하며, 최종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 3단계 중 증거 문서와 상언자 및 관련자의 진술을 직접 받아 확인하고 판단하는 과정은 수령의 조사 단계에서만 행해졌다. 특히 분쟁 관련 상언 사안을 조사할 때 수령은 원고, 피고를 출두시켜 시송 다짐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상언자뿐 아니라 소송 당사자 양측에 공평한 변론 기회를 주어 절차상의 공정함을 보장했다. 이는 이러한 절차를 거친 지방 수령의 조사와 판단이 조사 과정이나 법 적용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수용될 가능성이 많았을 것이라는 점을 유추하게 한다.
또한 수령이 상언 내용에 거짓이 있다고 판단했을 때 관찰사의 허가를 얻어 刑推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왕에게 직접 호소한 사안임에도 중앙에서의 형률에 의거한 판결과 이에 따른 처벌만이 아니라 형추를 통한 지방관 차원의 징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상언 처리 절차에서의 지방관 조사 단계의 위상이 단순한 조사과정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상언의 접수와 청리가 '왕의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지방관 조사 단계에서 절차상 공정성을 기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상언이 특혜성 청원의 성격을 넘어서서 조선사회에서 제도화된 민원 해결의 한 방식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18~19세기 함경북도 지역의 발전과 민의 유동 - 북관 육진과 경성을 중심으로 -

저자 : 이용식 ( Li Yong-zhi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5-16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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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에 이르러 대청위기 상황이 완화되기 시작하면서 함경도 지역의 발전은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조청간의 국경 획정은 조선으로 하여금 중앙정부차원에서 변방 지역 주민의 입거와 개척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를 할 수 있게 하였다.
18세기 중엽 후 지역개발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두만강 상류지역의 개간과 주민 이주가 활발히 진행되어 茂山府 토지와 인구가 크게 늘었고 북관의 중심읍으로 성장하였다. 무산부가 북관의 雄府로 지칭될 정도로 성장하였는 바 關防上 수요 때문에 진이 설치되어 있다가 인구와 토지가 늘어나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지속적으로 발전한 무산부의 성장은 이후 북방 지역개발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는 백두산 정계를 통해 백두산 남쪽 지역에 대한 개발이 본격화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북관지역의 발전에 있어 상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컸다.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특산물판매가 상업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북관지역의 특산으로는 삼, 담비가죽, 북포, 다리 등이 있었는데 백두산 정계 후 강역 내에서 채삼이나 사냥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민들의 경제활동이 보장되어 가능하였던 것이다. 상업활동에 있어 특기할 만한 것은 대외무역 가운데 국경무역이었는데 회령과 경원에서 청나라를 상대로 한 개시무역의 영향이 컸다.
함경도 지역의 발전은 유이민의 대량 유입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18, 19세기 함경도는 전 시기에 비해 상업과 어업, 광업의 발달이 두드러졌으며 변경지역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물론 호구가 크게 증가한 곳은 연안포구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지만 무산진과 같은 개척지역에도 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특히 회령, 종성, 경원, 온성 등 지역은 개시무역의 발달로 인해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았다.
18~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두만강 이북으로의 조선인의 월경은 있었지만 그 전시기에 비해 많이 줄었다. 이는 조선정부의 犯越禁止策이 강화된 원인도 있겠지만 적극적인 개발정책과 변민들에 대한 구제책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6'조선총독부의 꽁돈', 경상남도 배당 지방 임시은사금 연구

저자 : 김인호 ( Kim In-ho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7-212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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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17년 지방비회계 전환 전후의 경상남도 지방은사금 회계를 분석하여 이 은사금이 사실상 '총독부의 공돈'이 되어 지방비 보조 수단으로, 나아가 일본인 사업체의 대부금으로 전락한 난맥상을 확인함으로써, 은사금의 목적이 '조선인 본위의 현안 해결'이라고 한일제의 선전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 보여 주는데 기본적인 목적을 둔다. 연구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독립회계시기 경남의 은사금 세입은 해마다 팽창하였는데, 그 이유는 우선 생산물매각대금이 증가한 점, 또한 써야 할 사업비를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이월한 '전년도조월금'이 많았던 것 등에서 찾을 수 있고, 기금편입금의 증가도 중요한 이유였다.
둘째, 지방비편입 이후 은사금 세입은 크게 위축되었는데, ①'전년도조월금'이 지방비로 전환되고 ②생산물매각대 등 잡수익이 사라진 것. ③기금이자도 크게 줄었던 것에서도 원인이 있다. 특히 1925년 조선중남부의 수재 이후 총독부는 기금편입금에서 돈을 빼서 지방비로 조려했는데 이후 이 관행이 빈번해졌고, 결과적으로 기금편입금이자가 감소하고 기금이자의 전반적인 하락이 촉발되었다.
셋째, 지방비회계시기에 특히 지방비 세출경상부는 세입경상부에 비해서 훨씬 큰 결산차를 보였는데, 이것은 당시 경남도 당국이 지방비 수입에 쏟는 열정에 비해 집행에 쏟는 성실성이 무척 낮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지방비회계시기가 되면서 은사금은 일본인 조합 등을 지원하는 저리대출용 자금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는 등 은사금이 이제 일본인에 대한 직접 시혜 도구로 전락하였다.
넷째, 지방비회계시기에는 기금이자 중 수산비 60%, 교육비 30%, 흉겸구제비 10% 기준은 잘 지켜졌다. 오히려 수산비는 높은 수준으로 예산이 편성되었다. 하지만 이는 '뻥튀기' 예산 편성이었으며, 지출은 '쥐꼬리'였다. 아울러 경남지역 주민 삶의 큰 무대인 어업 방면의 수산사업비 지원은 참으로 미미하였다.
다섯째, 1930년대에는 1920년대와 달리 흉겸구제비 집행이 빈번하였다. 진재가 20년대에는 없었던 것도 아닌데 집행은 주로 30년대에 대규모로 이뤄졌다. 교육비는 보통학교 교육비로 은사금 수입의 30% 전액을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7일제 강점기 김해 지역 농촌의 식민지배와 농민의 일상 - 『김영순 일기』 분석을 중심으로

저자 : 차철욱 ( Cha Chul-wook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3-24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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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제 강점기 농민의 일상을 통해 식민지 사회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영순 일기』를 분석하였다. 분석 내용은 식민지 시대 농촌 민중의 근대 경험방식이다.
첫째, 식민지 농업정책의 영향으로 농촌 농민은 벼와 보리의 곡물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부업에도 종사했다. 식민지 농민은 농가소득의 증가보다는 지출증가와 바쁜 일상생활을 경험하였다.
둘째, 조선총독부의 농촌지배는 마을 대표자인 구장을 매개로 진행되었다. 구장은 식민정부가 필요로 하는 세금징수와 농민 동원을 책임졌다. 농민들은 대체로 식민정책을 수용하였으나, 대응방식에서 마을 공동 대응이나 저항하는 모습도 보였다.
셋째, 식민지 농민은 다양한 근대문화를 체험하였다. 근대적인 상품, 교통, 관광, 의료시설 등이다. 농민들이 소비하는 문화에는 식료품이나 의료처럼 전통적인 상품도 많았다. 식민지시대 농촌의 일상은 일본 제국주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배력은 일방적이지 않고 농촌 내부의 질서와 충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8일제 강점기 동해횡단항로 개설을 둘러싼 역학관계

저자 : 하지영 ( Ha Ji-yo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9-28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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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횡단항로는 조선 동북부 지역과 우라니혼을 연결하는 항로로, 그것의 개설 논의는 1910년 전후부터 시작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각 지역민은 순환항로를 개설해 무역을 통한 지역개발에 이용하려 한 반면 당국은 일본과 만주를 최단거리로 잇는 북만주 철도와의 연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편 기선회사들은 비경제성에 주목하며 소극적으로 임했다.
1910년대 중반 이후 경원선과 청회선 등 조선 중북부지역 교통기관이 정비되자 조선총독부는 동해횡단항로를 개설해 이를 지역개발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항로보조금을 통해 기선회사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경영한다는 계획이었는데, 그간 '시기상조'라는 태도를 밝혀 온 일본 정부도 시베리아 파병을 위한 노선의 확장을 고려해 수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 측 기항지는 조선-일본 간 무역관계가 반영된 '마이즈루'가 아니라 본토의 병력 수송에 편리한 '쓰루가'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해횡단항로는 '청진-쓰루가선'으로 개설되었다. 조선우선은 비경제선을 경영해야 한다는 부담도 컸지만 국책회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조선우선의 희생만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는데, 조선우선은 항로보조금과 독점경영이라는 조선총독부의 적극적 지원을 통해 손실을 보전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동해횡단항로는 일제의 대륙진출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조선중심'의 해운정책을 실현하려 한 조선총독부의 적극적 의지 하에 개설된 것으로, 그 실행회사인 조선우선과의 '상생관계' 속에서 원만하게 경영될 수 있었다.

9임진전쟁 극복에서 의병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저자 : 김강식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9-297 (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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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신라 지배집단의 국가 운영 원리를 追究하다 (김희만, 『신라의 왕권과 관료제』, 경인문화사, 2019)

저자 : 이동윤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99-308 (1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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