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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사총>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정권의 예제 수용의 의의 -정창원 소재 「자일목리추(子日目利箒)」와 「자일수신서(子日手辛鋤)」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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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정권의 예제 수용의 의의 -정창원 소재 「자일목리추(子日目利箒)」와 「자일수신서(子日手辛鋤)」를 중심으로-

藤原仲麻呂政權の禮 制受容の意義 -正倉院所在「子日目利箒」と「子日手辛鋤」を中心に-

강은영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 : 사총 9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0년 01월
  • : 93-127(35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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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중국 수·당대의 친경·친잠의례
3. 고대 일본의 친경·친잠의례와 ‘子日宴’
4.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예교정치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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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의 정창원 소장 의례 용품 중 정월의 궁중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자일목리추(子日目利箒)」와 「자일수신서(子日手辛鋤)」를 통해 친경·침잠 의례가 일본에서 행해지게 된 계기와 의의를 살피고자 하였다.
율령국가의 제사체계는 신기령(神祇令)에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제사가 율령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신기령에 포함되지 않는 제사도 종종 행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교사(郊祀)나 적전(藉田) 의례이다. 이는 율령 계수 단계의 국가제사를 지탱하는 사상적 기반과 이후 중국적 예제의 도입이 절실해진 당해기 지배 이데올로기의 배경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율령국가 형성기에 견당사에 의한 적극적인 문물도입 속에서 『현경례』·『대당개원례』와 같은 당의 예서가 전래되었고, 중국적 의례가 시행되었다. 정창원에는 중국의 예제의 수용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서 궁정의례에서 사용된 물품이 전한다. 이 네 개의 물품은 천평보자2년(758) 정월 초자일(3)에 신농씨를 섬기는 제사와 잠신을 섬기는 제사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국의 적전·친잠 의례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례로 일본에 서는 단 한 차례 혹은 단기간에 행해졌다. 이 시기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집권기로 나카마로에 의해 한화정책이 추진되던 시기와 맞물린다. 나카마로의 한화정책은 당과 발해의 영향을 받은 예교정치였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천평보자 2년 정월 초자일에 열린 친경·친잠의례였다.
本硏究は日本の正倉院所在の儀禮用品のうち、正月の宮中儀禮と關係すると思われる「子日目利箒」と「子日手辛鋤」を通して親耕·親蠶儀禮が日本のおいて行われる契機と意義について檢討するものである
律令國家の祭祀體系は神祇令に簡單に纏められている. しかしながら、全ての祭祀が律令の中に含まれているのではなく、神祇令に含まれていない祭祀も屡々行われた. その代表的な事例として皇帝の權威を現わせる郊祀と藉田儀禮などがある. これは律令の繼受段階での國家祭祀を支える思想的基盤と以後中國的禮制の受け入れが切實に必要した當該期の支配イデオロギ一の背景違いに因るものである. したがって律令國家の形成期において遣唐使による積極的な文物の受容の中で『顯慶禮』·『大唐開元禮』のような唐の禮書が持ち迂まれ、中國的な儀禮が行われた.
正倉院には中國禮制の受容を表わす確實な證據として宮中儀禮で使われた品物が傳わる. この四つの品物は天平寶字2年(758)正月初子日(3)に神農氏を祀る祭祀と蠶神を祀る祭祀てに使われたと思われる. これは中國の藉田·親蠶儀禮を本格的に受け入れた事例で日本ではただ一回或いは短期間に行われた. この時期は藤原仲麻呂の執權期で仲麻呂によって漢化政策が進められた時と重なる. 藤原仲麻呂の政治的目標は律令による天皇のもとで大臣を主導者とする太政官によって行われる政治體制であった. 仲麻呂が政治の核心として浮上する契機は孝謙天皇の卽位と同時に光明皇太后の直屬機關である紫微中台の創設である. 紫微中台は唐玄宗が開元元年(713)に中書省を紫微省に改めた事例と高宗·則天武后の時に尙書省を中臺に改めた事例を型どったものであり、また渤海の中臺省も參照したはずである. 仲麻呂の漢化政策は唐と渤海の影響を受けた禮敎政治であり、その代表的事例が天平寶字2年正月初子日に開かれた親耕·親蠶儀禮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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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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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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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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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고대일본의 견수사 견당사에 관한 기초적 연구 -입당승 입송승 이해를 위한 서장-

저자 : 나행주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6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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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고대 일본의 입당승 및 입송승 이해'를 위한 기초적 연구로서, 7세기에 고대일본이 중국에 파견한 견수사와 견당사(초기견당사), 그리고 그에 동반해 파견된 학문승·학문생(학생)에 대해 관련 자료를 가능한 한 폭넓게 수집하고 그에 기초해 견수사 및 초기견당사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검토했다. 즉, 사절의 기본적인 성격문제, 통사문제 등을 비롯한 사절구성과 파견회수, 항로문제 등을 살펴보고 아울러 학문승과 학문생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인선된 인물들의 출자문제, 파견규모, 수당에서의 체재기간, 귀국 후의 행적과 귀국 시 장래한 문물 등을 가능한 한 추적해 보았다.
그 결과, 견수사와 초기견당사의 사절로서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정치외교사절, 정치문화사절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 사절의 구성은 대사와 부사 체제를 기본으로 하여 제3차견당사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 대사 위에 압사를 두고 있다는 점, 항로는 기본적으로 한반도의 백제 및 신라의 연안을 항해하는 북로가 취해지고 있다는 점, 학문승 및 학생의 인선 대상이 된 인물들은 그 출자가 대체로 漢(아야)·新漢(이마키노아야)씨로 대표되는 한반도 도래계 씨족의 후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 중국에서의 유학기간은 견수유학승·학생은 약 30년, 견당유학승·학생은 약 25년이라는 장기간의 체재가 확인되어 중장기적인 전망 하에서 학문승·학생 파견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수당에서의 귀국 후의 활동은 실로 다양한데 왕재교육을 담당한 교육자·지도자로서의 南淵請安, 국가정책을 건의한 慧日, 국가정책을 입안하는 국박사로서 국가체제 및 법제의 정비에 활약한 僧旻과 高向玄理, 외교사절로 활동하는 고향현리와 혜일, 정치자문역의 승민, 大僧都나 律師로서 불교계를 지도하는 觀常이나 觀智의 사례 등 실로 다양한 방면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중국(수당)에 파견한 학문승·학생이 수행한 역할과 의미에 있어서 특히 신라에 파견한 학문승과의 공통성과 차이점을 보다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 견수사·견당사 파견을 전후한 시기에 한반도 제국과 왜국을 왕래한 학문승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우선, 삼국에서 왜국에 파견된 승의 사례를 정리해보고, 이어서 왜국에서 한반도로 파견된 학문승에 대해 검토한 후, 통일신라에 파견된 신라학문승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로서, 왜국이 해외에 파견한 최초의 학문승은 백제에 유학시킨 善信尼등의 비구니라는 점, 학문승 파견에는 상대국의 허가 등 일정한 절차가 필요하다는 점, 최초의 학문승인 선신니 파견 이후 백제에의 학문승 파견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는 백제에 의한 불교공전 이래혜총과 관륵으로 대표되는 다수의 백제승(비구니도 포함)이 왜국에 장기간 지속적으로 파견되고 있는 점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는 점, 혜총은 비조사의 주지이자 고구려승 혜자와 함께 성덕태자의 스승으로서 추고조를 중심으로 하는 아스카시대의 정치문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고, 관륵 또한 역법이나 천문지리, 둔갑방술 등의 특수기능을 직접 전수·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왜국 최초의 승정으로서 불교계를 통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 고구려의 경우는 혜자와 담징으로 대표되는 다수의 고구려승의 도왜와 아울러 왜국에서 고구려에 학문승이 파견되고 있다는점, 신라의 경우는 645년 이전까지는 왜국에 파견된 신라승의 존재나 왜국의 신라학문승 파견 사례는 일체 확인되지 않아 백제 및 고구려와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는 점, 신라의 경우는 개신정권 성립 이후에 최초의 승려 파견과 신라에의 학문승 파견 사례가 각 1회씩만 확인되고 있다는점, 이와 달리 통일신라와 일본의 경우는 백촌강 전투 이후 단절되었던 공적인 교류가 668년에 재개된 이후 700년까지의 약 30년 동안 14명의 신라학문승 파견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 이는 608년부터 703년까지의 약 100년 동안 수·당에 파견된 학문승의 수 18명에 비하면 그 빈도가 상당히 높다는 점(다만, 신라학문승의 체재기간은 약 3년으로 수·당학문승과 는 달리 단기유학임), 나아가 신라학문승 明聰과 觀智가 신라의 師友에게 보내는 賜物의 존재가 말해주는 것처럼 신라학문승을 통한 신라불교계와의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점, 山田史御形의 사례에서 보듯이 귀국후 국사(『일본서기』)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컨대 백제로 대표되는 삼국에서 왜국으로 파견된 승과 통일신라에 파견된 왜국의 신라학문승의 존재에서 확인되는 승려의 역할과 기능 및 다양한 양태는 왜국(일본)이 중국에 파견한 수·당 학문승·학생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 하고 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후기 견당사에 동반한 입당승이나 입송승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위한 기초적 지식을 마련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양자의 시대적 배경 및 파견 목적, 정치문화와 외교사상의 역할과 기능 등의 차이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승의 다양한 양태를 확인함으로써 입당승· 입송승의 역사적 의미를 추구하는데 있어 매우 귀중한 실마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문무왕 신문왕대의 대일본관계 -조물(調物)과 별헌물(別獻物)을 중심으로-

저자 : 채미하 ( Chai Mi Ha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7-9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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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문무왕과 신문왕이 일본에 보낸 調物과 別獻物을 통해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살펴본 것이다. 신라는 668년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일본 조정에 조물을, 별헌물은 천황을 비롯하여 諸親王등에게 보냈고 사신의 별헌물도 있었다. 이것은 신라의 內省, 진골 귀족의 공방에서 만들어졌으며 일본에 보낼 물품의 조달을 위해 신라는 倭典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신라왕의 조물과 별헌물 등을 가지고 간 신라 사신에게 답례품을 주었고 신라에 온 일본 사신 역시 물품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문무왕과 신문왕이 일본에 보낸 사신과 물품은 일본이 신라에 보낸 사신 및 물품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일본서기』 에 따르면 일본은 東夷의 소제국이었고, 신라는 조공국으로, 문무왕과 신문왕대 조물과 별헌물을 가지고 온 신라 사신을 進調使, 조공사라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표현은 8세기 일본 지배층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신라왕은 8세기에도 자신의 의사를 일본에 口頭로 전달하였고 문무왕대와 신문왕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라 사신은 679년 이후부터 쓰쿠시(筑紫)에서 饗應을 받았는데, 이것은 왕경에서 이루어진 조공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일본에 보낸 조물과 별헌물은 중국에 보낸 물품과 비교되며, 문무왕은 안승을 책봉하고 탐라에게 조공을 받기도 하였으며, 문무왕=호국용 설화는 신라가 당시 일본에 비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근대 동아시아사회의 조공-책봉관계에서 피조공국이 조공국에 별헌물을 보냈다. 당 황제가 원성왕과 경문왕 등에게 보낸 물품에서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신라가 요청한 것이었다. 신라가 일본에 보낸 별헌물 역시 일본에서 요청하였을 것이고, 신라는 별헌물을 통해 일본을 蕃國視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당의 무력 위협을 받고 있었던 신라는 일본을 번국시할 수만은 없었다. 때문에 일본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였고 일본이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문무왕과 신문왕대 일본에 취한 신라의 이중적인 모습은 당과 보덕국에 대한 대응에서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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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의 정창원 소장 의례 용품 중 정월의 궁중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자일목리추(子日目利箒)」와 「자일수신서(子日手辛鋤)」를 통해 친경·침잠 의례가 일본에서 행해지게 된 계기와 의의를 살피고자 하였다.
율령국가의 제사체계는 신기령(神祇令)에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제사가 율령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신기령에 포함되지 않는 제사도 종종 행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교사(郊祀)나 적전(藉田) 의례이다. 이는 율령 계수 단계의 국가제사를 지탱하는 사상적 기반과 이후 중국적 예제의 도입이 절실해진 당해기 지배 이데올로기의 배경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율령국가 형성기에 견당사에 의한 적극적인 문물도입 속에서 『현경례』·『대당개원례』와 같은 당의 예서가 전래되었고, 중국적 의례가 시행되었다. 정창원에는 중국의 예제의 수용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서 궁정의례에서 사용된 물품이 전한다. 이 네 개의 물품은 천평보자2년(758) 정월 초자일(3)에 신농씨를 섬기는 제사와 잠신을 섬기는 제사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국의 적전·친잠 의례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례로 일본에 서는 단 한 차례 혹은 단기간에 행해졌다. 이 시기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집권기로 나카마로에 의해 한화정책이 추진되던 시기와 맞물린다. 나카마로의 한화정책은 당과 발해의 영향을 받은 예교정치였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천평보자 2년 정월 초자일에 열린 친경·친잠의례였다.

4당물(唐物)로서의 유희(遊戱) 문화 -고대 일본을 사례로-

저자 : 정순일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9-16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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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고대 일본의 유희 문화 가운데 몇 가지 사례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역사적 연원에서부터 특징적 요소는 물론 놀이방법, 놀이도구 등 구체적으로 행해지는 모습까지를 고찰해보았다. 종래에는 막연히 일본의 놀이, 일본적 문화로만 취급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동아시아의 제 지역 및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상호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흔히, '당물(唐物)로서의 유희 문화'라고 하면 외부 세계에서 열도 사회 내부로의 방향성을 떠올리게 되고, 이국 문물 및 문화 요소의 일방적 수용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본 연구의 검토에서도 확인하였듯이 고대 일본의 유희 문화는 중국이나 한반도 제 지역으로부터 영향 받은 측면이 크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유희문화 또한 일본으로부터의 자극을 받았던 사실이 동등한 레벨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저포, 쌍륙의 경우 한반도나 일본열도보다 중국이 훨씬 이른 시기에 받아들이거나 향유했던 문화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한반도 및 일본 열도의 실생활에서 구현될 때는 중국의 것 그대로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일본식 저포인 가리우치는 중국의 그것보다는 한반도의 윷놀이와 상호 작용하며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쇼소인 소장 쌍륙국(쌍륙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일본의 스고로쿠 또한 고대 한반도 왕권과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정착, 확산된 문화라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마상 유희로서의 타구가 발해 사신에 의해 처음으로 일본궁정에 소개된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당물'을 막연히 중국의 것이라 인식하거나 설명해오던 종래의 연구를 재고해야 함은 물론,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신라인, 발해인의 움직임이나 그에 동반한 문물의 이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잘 보여준다. 한편, 본 연구에서 시도한 마도3호선 묵서 패각의 용도를 둘러싼 고찰은 어디까지나 시론에 불과하지만, 문헌 및 문자 자료가 부족한 분야에 대해서는 비교 연구의 관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5근대에서의 입송승(入宋僧) 관련 언설(言說) 연구 -일본 국정교과서 내 기술 등장을 실마리로 하여-

저자 : 데시마다카히로 ( Teshima Takahir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3-19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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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北宋)에 도해(渡海)한 입송승들은 예나 지금이나 국사(일본사)의 문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예외로 1945년 쯤에는 중학교 국정역사 교과서에 관련 기술이 등장한다. 역사 교육이 국사와 세계사와의 관련성을 중시하게 된 결과 조넨(奝然)이 송나라 황제와 만나서 일본 천황의 만세일계를 말한 사례가 다루어졌다. 근대에서의 국체(国体) 관념전개도 이에 영향을 끼쳤다. 국사 중 헤이안시대 부분에는 입송승 조진(成尋) 관련 기사도 등장하였다. 이는 조진보다 오히려 그 어머니에게 초점을 맞춘 것으로 당시 일본 여성에게 요구된 애국심 즉 자식을 잘 기르고 병사로 해외에 보내야 된다는 극단적인 현모양처주의와의 연관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근대에서는 조넨 모자 및 조진 모자 양자가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고 있었다. 그 중 후자에 관해서 새로운 자료가 세상에 알려진 후에는 후자를 말하는 언설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사료 발견이 반드시 사실의 탐구와 연결되지 않고 그 당시 일본 사회가 원한 허구를 낳고 그것이 역사 교육 현장에 유입된 과정을 볼 수도 있다.

6조선시대 태백산(太白山) 제사의 변화 양상

저자 : 최광식 ( Choe Kwang Shi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7-23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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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조선시대의 국가제사 연구는 왕조실록 등의 관찬 사료를 중심으로 하여 연구가 진행되어 태백산 제사에 대한 구체적 양상을 알 수가 없었다. 태백산에 대한 제사가 용담과 태백산 등에서 이루어진 구체적인 양상이 조선시대의 문집에 <太白山祈雨祭文>과 <龍潭祈雨祭文> 등이 수록되어 있으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각종 문집에 <太白山祈雨祭文>과 <龍潭祈雨祭文>이 모두 10개 이상 남아 있으나 활용되지 못하였으므로 이를 통하여 태백산과 용담의 국가 제사 양상을 살펴보았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산천제는 嶽海瀆과 名山大川으로 나뉘고 다른 산천제는 淫祀라는 비난을 받게 되어 태백산 제사는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 변화가 나타나 가뭄이 계속되자 중종이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영험이 있는 곳에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중기에는 안동도호부사 정구가 선조 4년(1607) 기우제를 직접 지내지는 않았지만 제문을 짓고 儒生들로 하여금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그의 제자인 승지 김중청은 광해군 14년(1622) 영남의 宣諭使로 와서 경상도관찰사를 대신하여 태백산 기우제문을 지어 태백산 산신에게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국가적 제사를 지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태백산이 국가 사전에 올라 지방관들이 태백산과 용담에 기우제를 지내고 기우제문을 남겼다. 삼척부사 허목은 무당들에 의해 이루어진 기우제를 음사로 홀대하지 않고 민간의 무속식 기우제와 지방관의 유교식 기우제가 공존하여 행하여졌다는 사실을 보이고 있다. 또한 신후재(1636~1699)가 안동부사 시절(1673)에 지은 <태백산기우제문>이 『규정집』에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태백산이 국가 사전에 올라있어서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예조 정랑을 지낸 이 유(1669~1742)가 남긴 태백산 <용담기우제문>이 그의 유고집인 『용포선생문집』에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용담이 국가의 사전에 있어서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적어도 17세기에는 태백산과 용담이 국가 사전에 올라 국가 제사의 편제속에서 제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태백산 제사의 중요성은 관찬 사서인 『高宗實錄』에도 나타나 있다. 백두산, 금강산, 태백산, 지리산, 계룡산 등을 조선의 5대 명산으로 인식하고 있다. 더구나 조선시대 말기의 태백산에 대한 제사의 구체적 양상은 김봉진의 『祈雨日記』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있다. 고종 29년(1892) 6월 17일부터 윤 6월 6일까지 안동도호부사인 김 가진이 20일에 걸쳐 모두 아홉 번의 기우제를 지냈으나 다른 곳의 기우제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태백산 기우제에서는 큰비가 내려 안동도호부사의 권위도 서고 백성들이 매우 흡족해하였다 하였으니 조선말기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태백산 제사에 대한 영험성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태백산에서 천제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진 전통이 개화기를 거쳐 일제시대에도 천제를 지냈으며, 광복이후 현재까지 천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사직단과 선농단 등 유교적인 제장뿐만 아니라 관왕묘와 같은 도교적인 제장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는 점이다. 또한 학가산 기우제는 애련사 윗편에 있는 국사봉에서, 태백산 기우제는 각화사 윗편에 있는 제단에서 제의를 거행하였다. 이는 유교와 불교 및 도교의 유·불·선 삼교의 제장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가산의 국사봉과 갈라산의 문필봉은 산의 정상이므로 민간뿐만 아니라 관에서도 산 정상에서 국가적 제의를 지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71883년 덴주마루(天壽丸)의 울릉도 목재 불법반출과 조일 간 반환 교섭

저자 : 박한민 ( Park Han M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37-280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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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883년 11월 울릉도로 도항하여 섬에 있던 목재를 일본까지 불법으로 반출해 간 사건을 두고 조선과 일본이 교섭한 전말을 외교사료관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자는 에히메현 출신으로 덴주마루를 운항하였던 무라카미 도쿠하치였다. 무라카미는 세 번에 걸쳐 울릉도까지 왕래하면서 일본 상인에게 고용되어 목재를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사이에 일본 내무성에서는 히가키 나오에를 울릉도로 파견하여 섬에 체류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전원 퇴거시켰다. 무라카미가 목재를 반출했다는 소식을 일본 현지에서 접한 동남제도개척사 김옥균은 가이 군지를 에히메현 현지로 보내어 조사하고 소송을 제기하도록 했다. 조선 정부에서도 새로 체결한 「조일통상장정」을 위반한 것을 거론하면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재판 진행 과정에서 일본정부도 무라카미의 행위가 조약 위반임을 인정했으며, 규정에 따라 벌금을 징수하고, 목재를 매각한 비용을 정산하여 조선 정부에 건네주었다. 여기서 활용된 조관은 제33관과 제40관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남아 있던 압수물품을 어떻게 처분할지를 두고 일본 정부 내에서 논의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무라카미에게 돌려주었다. 조선정부에서는 비개항장의 밀반출 물품에 대하여 청구권을 행사하는 조약상 근거로 「조일통상장정」을 적극 활용하였다. 일본 정부에서는 외무성과 내무성, 사법성 등이 논의를 진행하면서 대응 방향을 설정하였다. 아울러 향후 자국민의 조선도항을 단속하는 기준을 마련해 나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8나치정부와 비시정부의 고고학 (1940년~1944년) -협력과 저항의 이중주-

저자 : 박성진 ( Park Seong J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1-327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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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나치 고고학의 기원과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 이에 대한 당시 독일 고고학자들의 반응에 대해 논하였다. 동시에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 앞에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 비시정부의 고고학 관련 정책과 발굴조사의 특징을 분석하면서, 나치정부와 비시정부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논하였다. 범게르만주의적 관점에서 나치의 인종주의 고고학을 완성한 사람은 구스타프 코시나이다. 그는 유럽 언어들과 산스크리트어 간의 유사성을 근거로 상정된 북방 인도 게르만 민족이라는 신화적 성격이 짙은 고대 민족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1차 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고 나치 고고학자들은 코시나의 이론을 받아들여, 그 위에 국가 이데 올로기적 색채가 강한 고고학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이 인종적 특성에서 기인했으며, 과거 게르만족이 점유했던 모든 영토는 게르만족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프랑스 북부를 점령하자마자, 나치 고고학자들은 <문화유산보호국>을 설치하고 점령지의 '문화유산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문화재 목록을 신속하게 작성하였다. 이 목록은 독일이 패전했을 때를 대비한 프랑스 문화재 반출목록이기도 했다. 2차 대전 초기의 패전 이후 비시정부도 나치와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역사적 모델을 통해서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페탱주의자들도 역사 속에서 현재의 패전과 유사한 사례를 찾았고 그 결과 골족을 재발견했다. 로마에 정복당한 골족은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서 갈로-로마 문명을 꽃피우게 되었다는 점을 비시정부는 강조했다. 이와 같은 역사 재해석은 현재 프랑스가 독일에 비록 패했지만 향후 유럽민족국가가 건국되는 시기에, 프랑스가 독일을 제치고 중심국가로 설 것이라는 비시정부의 낙관 어린 희망도 담고 있었다. 이처럼 프랑스 중앙정부는 골족을 강조했지만, 북부 제3제국 점령지에서는 나치 고고학자와 현지의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프랑크족을 강조하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시정부는 고고학을 프랑스의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나치정부와 닮아 있었다. 독일이 게르만 민족의 이상화를 통해서 '민족통합의식'을 강화했듯이, 프랑스는 골족을 이상화함으로써 '분열'을 막으려 했다. 패전 때문에 국가주의적 색채가 강한 고고학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도 양국 모두 같다. 1차 대전의 패배가 나치즘을 불러일으켰듯이, 프랑스 공방전의 패배가 페탱이즘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측면에서 2차 대전 당시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었던 독일과 프랑스의 고고학은 패배 의식에 사로잡힌 자의 일종의 자기암시를 위한 최면술이었으며, '패자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현재의 굴욕감과 상실감을 망각하기 위한 '위대한 조상 찾기' 운동에 고고학이 선두에 나선 것이다.

9발전 경제학의 대안적 경로 -군나르 뮈르달의 경제학적 사유의 특징과 한계-

저자 : 오경환 ( Oh Kyung Hwa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29-35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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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이후 경제학적 사고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 것은 소위발전경제학(development economics)이었다. 냉전 초기의 첨예함과 맞물려 발전경제학은 근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의 핵심적인 경제적 내용이 되었다. 하지만 발전경제학의 역사 전체를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서사로 환원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발전경제학의 역사에 대한 단선적 서사는 냉전 시기에 대한 특정한 견해, 즉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형성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냉전 시기가 담보한 다양한 역사적 가능성과 실천적 모색을 은폐시킨다. 이 논문은 발전경제학의 발전경로를 보다 복잡한 맥락에서 추적하려는 시도로 스웨덴의 대표적 경제학자인 군나르 뮈르달의 발전경제학을 검토한다. 뮈르달은 1930년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정권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그였을 뿐 아니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적 재건에 참여한 관료였고 미국의 인종주의에서 아시아 경제 개발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에 정력적으로 참여했던 지식인이었다. 발전경제학의 역사에서 뮈르달이 갖는 중요성은 그가 미국적 자본집약형 모델이 아닌 사회민주주의적이고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적 유럽형 모델을 구축했으며 발전을 단순한 거시적 지표의 성장이나 서구 역사적 발전단계의 답습으로 보는 입장을 엄밀한 경제학적 입장에서 거부하고 이러한 지표의 상승이 전 사회적인 변화와 순환적이며 누적적으로 결합되었음을 밝혀내었다. 하지만 뮈르달의 발전경제학에서 역시 사회공학적 이상의 근원적으로 폭력적인 성격에 대한 반성이나 복잡하게 재구성된 “발전”을 가능케 할 실천적 입론, 발전 자체에 대한 반성을 찾아 보기는 어렵다.

10현대 아일랜드의 대중음악에 나타난 역사와 저항 -크리스티 무어와 울프 톤즈를 중심으로-

저자 : 이성재 ( Lee Sung Jae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61-40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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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아일랜드 대중음악, 그 중에서도 특히 크리스티 무어와 울프 톤즈의 저항음악을 살펴봄으로써 대중문화가 국민의 역사적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기억하는지, 그럼으로써 어떻게 사회적으로 유용한 가치를 창출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이 두 가수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사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경우가 많으며 매우 구체적이다. 예를 들면 1970년대와 80년대의 단식 투쟁과 같은 사건을 다룰 때 사망한 10명의 이름을 모두 거명하고 그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들은 상세하게 다룬다. 둘째, 북아일랜드 문제를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이것은 2000년대에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펑크 음악의 기수인 시네이드 오코너의 경우는 페미니즘, IRA에 대한 지지를 적극적으로 나타내면서 선배 가수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셋째, 무어와 울프 톤즈의 노래가 여전히 아일랜드의 젊은이들에게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노래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축구 경기응원가와 같은 형식으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북아일랜드 문제가 불거질 때면 어김없이 소환된다. 넷째, 아일랜드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외국에서도 아일랜드인의 정체성과 관련지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아일랜드의 전통 민요나 사회비판과 저항을 담은 앨범이 꾸준히 판매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물론 아일랜드계 이주민이 많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그들이 쉽게 미국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대중음악이 이와 함께 한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다섯째, 무어와 울프 톤즈 모두 세계 분쟁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노래를 통해 제시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에스파냐 내전과 포클랜드 전쟁에 대한 이들의 노래는 그런 점에서 저항 노래로서의 국제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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