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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말 변안열 묘표음기와 내외손 계승의식의 변천

The 16th Century’s Epitaph of Byeon An-yeol and the Transition of His Descendants’ Commemorative Sentiment

김지영 ( Kim Jiyoung )
  • : 한국계보연구회
  • : 한국계보연구 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9년 12월
  • : 169-196(28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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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변안열에 대한 평가와 변안열 실기
3. 16세기 근기 지역 내외손의 변안열에 대한 기억
4. 근기와 영남의 변안열 계승의식 편차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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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안열은 고려 말 공민왕~우왕 대의 명장으로 이성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군사적 업적을 세운 인물이다. 홍건적과 왜구를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그는 개혁에 반대하고 쫒겨난 전왕[우왕]을 옹립하려다가 건국주도세력에게 배척받고 끝내는 역모에 연루되어 죽었다. 변안열 사후에도 후손들은 서울과 경기지역에 세거하며 대표적 양반 가문으로 자리잡았다. 일부는 사화를 피해 영남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에 변안열은 _고려사_에서 간신으로 평가받았고 무덤의 위치조차 모를 정도로 후손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16세기 말 변안열의 후손들은 무덤을 재발견하고 비석을 세워 무덤 주인공에 대해 기록했다. 이 비문 속에서 변안열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고려 명장이자 공신으로 부활했다. 한편 영남지역 후손들은 변안열을 단지 명장이자 공신으로서만이 아니라 정몽주와 다를바 없는 왕조의 절의 인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자료를 수집하고 신도비문을 작성해서 가문기록으로 전승했다. 공식적으로 1800년에 작성된 족보에 이르러서 근기지역 후손들까지 공신이자 절개를 지킨 인물로 변안열을 기억하게 되었다. 나라의 공식 사료에서 변안열의 평가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변안열 내외 후손들은 자기 삶에서 중시하는 가치를 조상의 삶을 통해 재확인하고자 했고 가문기록과 족보 간행을 통해 계승의식을 공유하며 가문의 역사를 정립해갔다.
Byeon An-yeol is a renowned general of King Gongmin~King Wu period in the late Goryeo Dynasty, who has achieved many military achievements comparable to those of Lee Seong-gye. Byeon An-yeol, although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of defeating Red Turban invasions(紅巾賊) and Japanese raiders(倭寇), he at last was involved in a conspiracy and was killed by the leading force of founding new country. The reason was because he tried to enthrone King Wu once again, who opposed to reform and was deposed. After the death of Byeon An-yeol, the descendants lived in Seoul and nearby Gyonggi province and was considered as a representative noble family. Some of the descendants moved to Yeongnam to escape from a massacre of scholars(士禍). Meanwhile, Byeon An-yeol was judged as disloyal subject(奸臣) in The History of Goryeo(高麗史) and the memories about him were alienated from the descendants, even the location of his grave was forgotten. In last 16th century, the descendants of Byeon An-yeol found his grave again, and recorded about the owner of the grave by erecting monument. In this monument, Byeon An-yeol was revived as great commander and a contributor(功臣) of Goryeo, who was unjustly killed. At the same time, descendants in Yeongnam tried to establish him as not just as a great commander or a contributor, but a person who was loyal to his country, Goryeo. In this sense, there was no difference between Byeon An-yeol and Jeong Mong-joo, who is a model of pure loyalty in Goryeo Dynasty. The descendants collected records, inscribed new epitaph, and handed down the memories about Byeon An-yeol as family records. From the official genealogy written in 1800, even the descendants in nearby Gyeonggi province also commemorated him as loyalist of Goryeo. Although the evaluation of Byeon An-yeol has not changed in the official records of Joseon, but the Byeon clan tried to reaffirm the values they consider important through their ancestor’s life, and formulated family history by sharing commemorative sense through family records and genea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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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진주류씨(晉州柳氏)의 연원과 가문의식의 정립

저자 : 權奇奭 ( Kwon Kiseok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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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동족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동성동본'의 계보를 모아놓은 기록이다. 따라서 가문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상계 인물에 대한 고증이 필요한데, 시조 이하 선대 인물들은 고려 이전의 먼 조상들이기에 자료적 실증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진주류씨도 시조와 계보 연결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고, 통칭 '移封' 진주류씨(移柳)와 '土姓' 진주류씨(土柳)로 불리는 두 계열이 별개의 족보를 편찬하며 상반된 주장을 펼쳐온 바 있다.
이류에서 주장하는 계보는 『안동권씨성화보』와 『문화류씨가정보』 등 초기 족보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들 족보는 신뢰도가 높고 여러 족보에 참고가 된 바 있지만, 편찬자 류희잠도 계보적 논란에 대한 여러 이견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고, 이류의 晉州 移封說에 대해서도 수긍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_晉州柳氏丙子譜_(1756)는 계보적 논란에 대해서 이류 측의 정리 내용을 공식화한 족보이다. 1423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永樂子姓編譜圖」를 인용하고, 「子姓編考證」이라는 항목을 두어 상계 논란에 대한 여러 견해를 밝혔다. 『晉州柳氏己丑譜』 (1829)는 계보적 논란을 재론하고 이류와 토류의 계보를 통합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토류에서 주장하는 계보적 근거는 16~17세기 저명 보학자인 鄭崑壽(1538~1602)와 趙從耘(1607~1683) 등의 권위에 힘입어 널리 통용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 다수의 방목류 자료가 토류의 계보 파악을 따르게 되었다. 토류의 족보에는 계보적 논란에 관하여 정리한 「晉州柳氏世譜記事」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에 인용된 柳珦妻 李氏 戶口草는 토류 측의 계보 고증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자료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호주가 되는 호적 자료는 조선시대에 실재하였기는 하지만, 관청 문서의 서식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고, 당시의 가족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이류 측의 반박도 이루어졌다.
동성동본은 한국의 족보 문화에서 동족인지 他族인지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성관 체계와 동족 관념을 형성하는 계보 고증의 과정은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류와 토류는 서로 상충되는 계보 정리를 해 오면서 독자적 가문 의식을 성장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 지속된 계보적 논란 속에서 무리하게 合譜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혈통에 대한 고증을 중시하는 것이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가문의식이 형성되는 기본 원리였음을 잘 보여준다.

2≪문화유씨가정보≫(1565)를 통해 보는 여말・조선전기 엘리트

저자 : 5백광열 ( Baek Kwang Ryeol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3-5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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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씨가정보》는 문화유씨 시조 柳車達의 내외자손을 기록한 족보이다. 내외손보의 특성상 혼인관계를 통해 이어진 당대(고려~조선전기)의 엘리트들이 포괄적으로 망라되어 있어, 이 시기 지배층 연구에 도움을 준다. 이 글에서는 여말선초 신진사대부를 주축으로 하는 사회세력 교체론, 그리고 조선전기 훈구-사림 대립의 역사상(歷史像)에 대한 기존 논의에 주의하면서, 족보에 기록된 인물들과 그들 관계의 구조에 대해 살펴본다. 이를 통해, 여말~조선전기 지배층 성격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하며, 이를 향후 연구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3류순정의 가계(家系)와 정치, 군사 활동

저자 : 이근호 ( Lee Geun Ho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7-9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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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류순정의 생애를 따라가며 그의 정치, 군사 활동을 추적한 것이다. 지금까지 성종~중종대 해당되는 시기의 역사는 '사림과 훈구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연구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류순정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균형잡힌 이해를 위해서는 류순정을 비롯한 이른바 훈구로 분류되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와 연구도 필요하다. 류순정은 성종 연간 문과 급제 후 출사하였으나, 문과 출신의 일반적인 관직 진출과는 달리 변방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북방과 남방을 오고가며 야인과 왜구, 수적을 제압하는 활동을 하였다. 연산군대 중앙 정치에 참여하였으나 무오사화 때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음에도 이를 모면하였다. 연산군대 후반 재상으로 국정에 참여하였으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대신이나 대간 등은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심지어는 일종의 충성 맹세라고 할 수 있는 경서문에 연명하기에 이르렀다. 연산군대의 폐정은 류순정과 함께 성희안, 박원종이 주도한 반정에 의해서 끝났다. 반정 후 류순정은 삼대장으로 불린 성희안, 박원종 등과 공신 선정을 주도하거나 중종의 조강지처인 신씨를 폐위시켰고, 연산군대 폐정을 대전체제에 맞추어 다시 복원하였다. 이런 가운데 신진 세력을 등용하거나 비공신세력이 주장하던 소격서 혁파에 동조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삼포왜변을 진압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기여하였다. 이상과 같은 류순정의 정치, 군사 활동을 지금 당장 일반화하여 훈구의 패턴으로 단정할 수는 없겠다. 차후 다른 인물들에 대한 추가 검토를 통해서 이루어져야할 작업이다. 이에 대한 후속 연구를 기대해본다.

4조선후기 무반벌족과 진주류씨 무반가계 -류형(柳珩)계를 중심으로-

저자 : 張弼基 ( Jang Pil Ki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3-12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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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무반벌족(武班閥族)은 문치중심의 사족지배체제 속에서 정권의 실질적 기반이 되는 군사력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존재였다. 이들은 17세기 이후 군권에 대한 중요성의 인식과 함께 벌열가문의 무반가계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8세기 후반 왕권강화를 기점으로 더욱 성장한 무반가문들이었다.
이들 가문의 대부분은 왕실의 외척(外戚)이었다. 뿐만 아니라 통혼(通婚)과 출계(出系)관계 등 매우 폐쇄적인 관행과 세습적인 관직체계를 토대로 하여 그들자신의 사회 신분적 정체성 확보와 유지에 주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문반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던 만큼 이들은 독자적인 하나의 정치세력으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어느 정권이든지 군권(軍權)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는 제대로 존속할 수 없었던 만큼, 또한 이들 무반가문으로 대표되는 무반벌족 세력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조선후기의 집권세력과 무반벌족은 상호 의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 무반가문의 벌족화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진주류씨 무반가계는 대개 중시조 류인비(柳仁庇)의 6세손인 자해(子偕)・자문(子文)・자행(子行) 3계열로 나누어져 각각 그 당색을 달리 하는데, 자해・자행계는 北人인데 비하여 자문계는 남인(南人)계통이었다. 따라서 자해・자행계는 문반가계이면서 광해조 이후 북인의 몰락으로 관직 진출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자문계는 전통 무반가를 이루어 끊임없이 무반관직자를 배출하면서 무반의 상층부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그 정점에 충경공(忠景公) 류형(柳珩)이 있다. 류형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의 막료로서 크게 활약한 용장으로 진주류씨 무반가계를 벌족으로 나아가게 한 원초적 인물이기도 하다. 류형 이후 이 가계의 성장과정은 여느 무반벌족가문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무반 청요직을 거친 장신(將臣)들을 배출하면서 그들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진주류씨 무반가계는 명문거족(名門鋸族)의 무반벌족 관계망 속에서 지속적인 통혼과 더불어 동종 입후(立後)라는 관행을 통해서 가문의 사회적 지위와 가격(家格)을 유지하고, 나아가 무반벌족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렇듯 진주류씨 충경공파 무반가계는 끈임 없는 무반 관직자를 생성 배출하면서 대대로 국가로부터 은전과 후대를 받으며 무반의 최상층부를 형성하는 위치에 이를 수 있었다.

5서파(西陂) 류희(柳僖) 가문의 정치적 성향과 가계(家系) 인식

저자 : 김봉곤 ( Kim Bong Gon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1-16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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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는 정통성(正統性)에 입각한 통질서를 중시하였다. 나라에서는 왕통(王統), 집안에서는 가통(家統), 학계에서는 학통(學統)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계속 되었다. 특히 각각의 정통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학파와 정파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다양하게 분기하였다.
본고에서 다루려고 하는 서파(西陂) 류희(柳僖) 가문 역시 북인에서 서인, 서인에서 소론으로 정치적 발전을 거듭하며,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서파 가문은 시간이 갈수록 사상적 폭이 넓어지고 시대적 모순에 대한 자각이 깊어져서 박학과 의리를 동시에 추구하는 학풍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학풍은 중도적 입장에서 실증과 공평함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함께 수반되었다.
특히 서파 류희(1773–1837)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 19세기 초 경학과 문학, 과학, 국어학 등 다방면에 걸쳐 학문을 집대성하였으며, 노론가문 출신이었던 어머니 사주당(師朱堂) 이씨(李氏)의 가르침을 통해서 의리와 명분, 실질의 입장에서 합리성과 공정성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경서 가운데에서 특히 _춘추_에 대한 관심으로 표명되었으며, 도통에서 정통의 수수여부가 아니라 참된 도리와 심법의 실현이 중요하다고 설파하였다.
이러한 서파 가문의 정치적 성향과 류희의 학문적 성격은 가문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배경으로도 작용하였다. 서파가문이 속한 이봉진주류씨는 류차달의 10세손 류인비에 이르러 진산군에 봉해지면서 문화류씨에서 진주류씨로 갈라졌다고 이해하였다. 이 때문에 류정을 시조로 하여 이성진주류씨와 합보(合譜)하려고 하였던 토성(土姓) 진주류씨와 마찰이 빚어졌다.
이에 서파 류희는 토성진주류씨와 이봉진주류씨간의 기존의 견해를 모두 수집하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 두 류씨의 계통이 서로 다르다고 정리하고, 남원부사 류시정의 견해에 따라 이봉 진주류씨 토성 진주류씨가 서로 다르다는 인식하에 독자적인 족보를 편찬하였던 1756년 병자보를 계승하였다. 특히 서파 류희는 문화류씨 가정보를 중시하여 류차달에서 류인비에 이르는 상계, 류혜손을 중시조로 하는 안간공파와의 관계를 확정지었으며, 이러한 서파 류희의 견해는 안간공파나 군사공파, 영광군사파 등도 대차 없었다.
결국 서파 가문의 정치적 성향과 학문적 특징은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박학과 엄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며, 가문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서로간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616세기말 변안열 묘표음기와 내외손 계승의식의 변천

저자 : 김지영 ( Kim Jiyoung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9-19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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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안열은 고려 말 공민왕~우왕 대의 명장으로 이성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군사적 업적을 세운 인물이다. 홍건적과 왜구를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그는 개혁에 반대하고 쫒겨난 전왕[우왕]을 옹립하려다가 건국주도세력에게 배척받고 끝내는 역모에 연루되어 죽었다. 변안열 사후에도 후손들은 서울과 경기지역에 세거하며 대표적 양반 가문으로 자리잡았다. 일부는 사화를 피해 영남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에 변안열은 _고려사_에서 간신으로 평가받았고 무덤의 위치조차 모를 정도로 후손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16세기 말 변안열의 후손들은 무덤을 재발견하고 비석을 세워 무덤 주인공에 대해 기록했다. 이 비문 속에서 변안열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고려 명장이자 공신으로 부활했다. 한편 영남지역 후손들은 변안열을 단지 명장이자 공신으로서만이 아니라 정몽주와 다를바 없는 왕조의 절의 인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자료를 수집하고 신도비문을 작성해서 가문기록으로 전승했다. 공식적으로 1800년에 작성된 족보에 이르러서 근기지역 후손들까지 공신이자 절개를 지킨 인물로 변안열을 기억하게 되었다. 나라의 공식 사료에서 변안열의 평가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변안열 내외 후손들은 자기 삶에서 중시하는 가치를 조상의 삶을 통해 재확인하고자 했고 가문기록과 족보 간행을 통해 계승의식을 공유하며 가문의 역사를 정립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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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점필재 김종직의 고향인 밀양지역에서 점필재 김종직-오졸재 박한주(朴漢柱)-송계 신계성으로 대표되는 점필재 학맥의 쇠락 원인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점필재 이후, 조선전기에는 한훤, 일두, 오졸재, 탁영(濯纓)에서 남명(南冥), 송계(松溪)로 이어지는 조선 도학의 거장(巨匠)들이 나타나 밀양, 창녕, 현풍, 청도, 함양, 진주, 합천, 산청 등으로 이어지는 학문벨트를 형성하고 영남유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과 더불어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 정치적으로 패퇴하자, 영남유학의 헤게모니가 밀양・산청권에서 예안・안동권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점필재 학맥의 강력한 기반이었던 밀양권 유림의 쇠락을 불러오게 되었다. 더구나 '주자학=정학(正學)'이라는 도학(道學)에 관한 관점이 좁아지면서, 점필재가 창도한 조선적 도학(道學)은 정통성을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인조반정과 '역반정' 사건으로 몰락하거나 사라진 가문들은 대부분이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했던 가문이거나, 부(富)와 명성(名聲)을 갖추었던 가문으로 보이는데, '정변'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 인해 밀양의 많은 선비들은 남명(南冥), 송계(松溪), 박재(璞齋), 내암(來庵), 동계(桐溪)정온(鄭蘊) 등으로 이어지는 학문벨트를 버리고,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매개로 퇴계학파로 연원을 전환했으며, 그 과정에는 취원당(聚遠堂) 조광익(曺光益)의 창녕조씨 가문과 오한 손기양의 밀성손씨 가문이 매개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고, 국담 박수춘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송계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킬 후속세대를 사라지게 했고, 이것은 동시에 조선후기 내내 점필재의 학문과 사상을 제대로 계승하고 천양(闡揚)할 수 있는 세력의 쇠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8베트남의 한자-놈(Nôm)어 족보 현황 연구: 국립 자료관 소장본부터 개인 소장본까지

저자 : PhạmThịThùyVinh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33-25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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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자-놈어학 연구소(The Institute of Sino - Nom Studies) 서고에는 베트남의 여러 가문에서 한자와 놈어로 기록한 300여 종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족보들은 20세기 초, 1910년대에 하노이에 위치한 프랑스 극동연구소(The cole francaise d'Extreme-Orient)에서 수집하였다. 이 외에 한자-놈어학 연구소에서도 각 지역 방언으로 기록된 족보 수백여 종을 베트남어로 번역하였다. 족보들은 현재 베트남어 서고에 소장되어 있다.

9응우엔(Nguyen) 왕가의 왕실 족보

저자 : NguyenThiThuThuy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59-281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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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응우엔 왕조 시대 왕실 족보의 기본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 응우엔 왕조 시대 왕실 족보 편찬 기관, 2. 응우엔 왕조의 족보 편집편찬, 3. 응우엔 왕조 왕실 족보의 종류, 4. 응우엔 왕조 왕실 족보의 편찬과 보존방식, 5. 응우엔 왕조 왕실 족보의 역사적 가치. 이를 통해 응우엔 왕조 왕실 족보에 대한 기본 이해를 돕는다.

10우리나라 족보(族譜)연구 성과에 대한 검토와 제언

저자 : 정만조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85-31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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