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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6세기 중반 신라 단양(丹陽) 적성(赤城)의 경관(景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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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반 신라 단양(丹陽) 적성(赤城)의 경관(景觀)

Landscape of Danyang Jeokseong Fortress of Silla Dynasty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백종오 ( Baek Jong-oh )
  • : 한국고대학회
  • : 선사와 고대 61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9년 12월
  • : 5-27(23pages)

DOI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丹陽 赤城의 現況
Ⅲ. 6세기 중반 丹陽 赤城의 景觀
Ⅳ. 맺는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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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는 단양 적성의 현황과 조사 성과를 토대로 6세기 중반 적성은 어떠한 경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이는 그 동안 막연히 ‘赤城(碑)=新羅(6世紀)=石築山城’이라는 공식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임진강에서 한강과 금강, 그리고 소백산맥 일대에 분포한 신라 석축산성의 대부분은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에 쌓은 성들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문헌기록에 근거한 산성의 위치 비정과 단양 신라 적성비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중심에 報恩 三年山城과 丹陽 赤城이 있다.
이와 관련해 明活山城 作城碑(551년)와 南山新城碑(591년)가 참고된다. 이들 축성비는 토축산성에서 석축산성으로의 변화 시점에서 석축산성의 유지 관리에 목적을 두고 세워졌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큰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명활산성 작성비와 남산신성비가 세워지는 6세기 중후반 들어 경주 분지를 둘러싸고 명활산성 석축구간 신축과 남산신성 신축, 서형산성 수·개축 등 경주의 동쪽과 남쪽, 서쪽 등에 석축산성이 축조되면서 왕경 방어체계가 완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이로보아 지방 거점성의 石築化는 7세기 이후, 석축산성은 7세기 중반 이후에나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단양 적성의 최근 시굴 결과, 토축 성벽이 일부 확인되었고 육안상으로도 토루의 흔적이 관찰되고 있다. 초축 당시에는 토축산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현재의 석축산성은 7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반증하듯 보은 삼년산성의 경우, 남벽 내측구간 2개 지점에서 판축토루가 발굴된 바 있고 옥천 이성산성도 서벽부 판축토루와 외벽의 외면만 석축으로 개축(토심석축)한 사례가 있다. 물론 강릉 강문동 토성, 양산 순지리토성 등도 그 예에 속한다.
따라서 6세기 중반의 단양 적성은 토축산성의 전경과 함께 동벽부에 인접하며 죽령과 마주한 적성비를 연상할 수 있게 되었다. 향후 신라 토축산성 및 석축산성의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반에 걸친 축성방식에 대한 계보적인 정리가 필요하며 이에 대한 연구가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This study investigated landscapes of Jeokseong Fortress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based on the current status and investigation results of Danyang Jeokseong Fortress. It was started from the suspicion whether the proposition, “Jeokseong(monument) = Silla Dynasty (6th century) = Stone-piled Fortress” is rational.
In general, most of the stone-piled fortresses in Silla Dynasty scattered over Imjin River, Han River, and the Sobaek mountains were known as a fortress built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to the middle of the 7th century. It was mainly because of the undefined location of the fortresses based on the records in literature and Danyang Jeokseong Stone Stele of the Silla Dynasty. The representative examples of such fortress were Samnyeon Fortress in Boeun and Jeokseong Fortress in Danyang.
First, this study studied Jakseongbi(551 A.D) in Myeonghwal Fortress and Namsan Sinseongbi (591 A.D) for reference. These monuments have the significance in that they were built in the transition period changing from earthen fortress to stone-piled fortress, with the purpose of maintenance and repair of stone-piled fortresses. Based on that, it is assumed that the defense system of a royal castle was completed when stone-piled fortresses were built in the east, south, and west of Gyeongju surrounding Gyeongju Basin in the middle and late period of the 6th century when Jakseongbi in Myeonghwal Fortress and Namsan Sinseongbi were built. It is also assumed that local key fortresses could have been built with stones after the 7th century and stone-piled fortresses have been built after the mid of 7th century.
As for the excavation research of Danyang Jeokseong Fortress, parts of the earthen wall were identified and we could see the traces of an earthen barrier. It was highly likely that they were initially built as an earthen fortress and they were built as a stone-piled fortress after the mid of 7th century.
As if to disprove it, there found traces of earthen-piled barriers in two spots of the inner part of the south wall of Samnyeon Fortress. Other cases include earthen-piled barriers of the west wall of Yiseong Fortress in Okcheon, partial remodeling of the outer surface of an earthen wall to stone walls, and the Gangmundong earthen fortress in Gangneung. Therefore, Jeokseong Fortress in Danyang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reminded us of Jeokseong Stone Stele facing Jukryeong, adjacent to the east earthen wall casting the landscape of earthen fortress.
It is necessary to work on summarizing the lineage of building methods of the earth-piled and stone-piled fortress of the late 5th century to the 7th century in Silla Dynasty. It is required to do in-depth studies on those issues. As for the earth-piled and stone-piled fortresses built in the times when the Silla Dynasty expanded to the basin of Han River, it is required to keep finding the prototype of the original fortress wall built ahead of current extended and reinforced w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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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9-0432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1-2020
  • : 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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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 신라 단양(丹陽) 적성(赤城)의 경관(景觀)

저자 : 백종오 ( Baek Jong-oh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2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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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는 단양 적성의 현황과 조사 성과를 토대로 6세기 중반 적성은 어떠한 경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이는 그 동안 막연히 '赤城(碑)=新羅(6世紀)=石築山城'이라는 공식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임진강에서 한강과 금강, 그리고 소백산맥 일대에 분포한 신라 석축산성의 대부분은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에 쌓은 성들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문헌기록에 근거한 산성의 위치 비정과 단양 신라 적성비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중심에 報恩 三年山城과 丹陽 赤城이 있다.
이와 관련해 明活山城 作城碑(551년)와 南山新城碑(591년)가 참고된다. 이들 축성비는 토축산성에서 석축산성으로의 변화 시점에서 석축산성의 유지 관리에 목적을 두고 세워졌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큰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명활산성 작성비와 남산신성비가 세워지는 6세기 중후반 들어 경주 분지를 둘러싸고 명활산성 석축구간 신축과 남산신성 신축, 서형산성 수·개축 등 경주의 동쪽과 남쪽, 서쪽 등에 석축산성이 축조되면서 왕경 방어체계가 완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이로보아 지방 거점성의 石築化는 7세기 이후, 석축산성은 7세기 중반 이후에나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단양 적성의 최근 시굴 결과, 토축 성벽이 일부 확인되었고 육안상으로도 토루의 흔적이 관찰되고 있다. 초축 당시에는 토축산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현재의 석축산성은 7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반증하듯 보은 삼년산성의 경우, 남벽 내측구간 2개 지점에서 판축토루가 발굴된 바 있고 옥천 이성산성도 서벽부 판축토루와 외벽의 외면만 석축으로 개축(토심석축)한 사례가 있다. 물론 강릉 강문동 토성, 양산 순지리토성 등도 그 예에 속한다.
따라서 6세기 중반의 단양 적성은 토축산성의 전경과 함께 동벽부에 인접하며 죽령과 마주한 적성비를 연상할 수 있게 되었다. 향후 신라 토축산성 및 석축산성의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반에 걸친 축성방식에 대한 계보적인 정리가 필요하며 이에 대한 연구가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단양신라적성비」연구 현황과 쟁점

저자 : 정제규 ( Chung Je-kyu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9-49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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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연구에서 金石文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 「단양 신라 적성비」는 국가가 주체가 되어 한강 유역에 위치한 단양 '赤城'에서 왕의 교시를 받은 異斯夫등 '大衆等'과 '幢主'와 '軍主' 등 상당수의 사람들이 '也尒次'라는 인물의 공적을 치하하며 있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기록하여 세워진 비석이다.
고대국가에서 영토의 확장과 그에 따른 유공자의 공훈을 새기고,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 포상을 약속한 비석을 세우는 국가의 시책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더욱 비문을 통하여 신라 律令制度 특히 佃舍法 등 신라의 토지제도를 이해할 수 있으며, 小子小女 등 인구를 성별·연령별로 파악했던 당시의 사회상도 엿볼 수 있다. 또한 '幢主' 및 '軍主' 등을 통하여 신라의 지방제도 및 그 성격을 살펴볼 수도 있다.
앞으로 비문에 나오는 핵심적인 개념에 대한 재검토 및 인식의 확대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적성비」에 보이는 '書人'과 '石書立人'의 개념을 중심으로 연구 영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말 그대로 '글을 쓴 사람'과 '비석에 글을 새겨 세운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이는 6세기의 신라 사회가 이미 각 분야의 전문 영역으로 분화되었던 사회였음을 알게 해준다. 이같은 사실은 사회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이제까지의 「적성비」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 및 사회, 경제사 중심의 연구 영역이 보다 확대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금 더 많은 관심과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3백제의 사신(使臣) 파견을 통한 중국과의 문물교류

저자 : 박현숙 ( Park Hyun-sook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1-7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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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백제와 중국의 사신 외교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사신 영접 의례와 그 과정에서의 조공품과 답례품 교류, 그리고 사신 파견을 통해 이루어진 다양한 문물교류의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백제 사신단의 규모는 사신의 목적에 따라 변동이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大唐開元禮』에 의하면, 唐代에는 외국 사신의 입국 절차와 처리 규정이 율령에 명시되어 있어서 외국 사신들은 그 규정에 따라 검사를 받고 입국 허가를 받았다.
백제가 사신을 통해 보낸 물품들을 중국 기록에서는 方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국에 보낸 백제의 방물은 주로 특산물로, 양마·흰매·해산물·포백 등이 있었다. 唐代에는 과하마·명광개·조각한 도끼 등도 방물로 보냈으며, 방물과 함께 전쟁 포로 등의 生口를 보내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도 백제 사신에게 답례품을 주었다. 弔使를 보낼 경우에는 부의품도 전달하였다. 중국에서는 진한제국 성립 이후에 변경의 인적 물적 자원의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백제는 사신 파견을 통해 국외로 반출이 금지된 무기 등의 특수 물자를 반입해 올 수 있었다. 또한 불교나 유교 등의 선진문물도 공식적으로 요청해 수입해 왔다.
백제 사신들은 공식적인 문물교류 이외에, 사행 길에서 書籍 등의 기호품 등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백제 사신들이 중국에서 서예 작품이나 서적을 수입해 온 것은 백제에서 이러한 문화를 소비할 지식인층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를 통해 백제의 학문과 서예가 크게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신들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와 같이 백제의 대중외교에 있어서 사신들은 정치적인 목적과 더불어, 새로운 정보의 획득과 선진문물의 수입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4고구려의 도교(道敎)와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수용

저자 : 박승범 ( Park Seung-bum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9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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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敎와 『老子道德經』의 개요가 高句麗에 전해진 것은 榮留王 때이다. 고구려는 이미 五斗米敎가 성행하였고, '도교적' 문화전통이 있었다. 고구려에 전달된 도교는 노자의 무위정치철학이었다. 정변을 일으킨 淵蓋蘇文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교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유교와 불교 세력을 견제하여 사상적 균형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노자의 사상보다는 養生術이나 方術등 주술적 성격의 도교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 들어온 『노자도덕경』은 王弼의 주석본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사회에는 이미 군사전문가들이 사용한 노자도덕경 이 있었다. 이 시기의 『노자도덕경』은 왕필본이나 河上公本이 아니라, 병법서로서 주석된 것이다.
문화교류는 상대에 대한 이해와 자국의 문화적 성장, 이를 통한 국가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淵蓋蘇文의 도교 수용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자국의 문화적 성장욕구에서 비롯되지 못하고 정통성이 없는 정권 안정의 수단으로서만 도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5고대 삼국과 중국 왕조의 사신 왕래와 물자 교류-무령왕릉 발견 오수전의 유입 경위 고찰을 중심으로-

저자 : 송진 ( Song Ji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7-12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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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대 삼국과 중국 왕조 간의 사신 왕래와 주요 하사품의 내용 분석에 기초하여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오수전의 유입 경위를 고찰한 연구이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는 변경 출입 관리 규정에 따라 귀금속과 화폐 등의 재물은 국외로의 반출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무령왕릉에 부장된 오수전은 백제의 사신이 공식적으로 양으로부터 받아 가져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삼국이 중국 왕조와의 사신 왕래를 통해 구득한 물품은 왕의 즉위와 장례를 위한 중국 왕조의 특별 하사품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중국 왕조에서는 조서(詔書)와 함께 물품들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당시 문물 교류가 사신 왕래를 통해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 또 삼국에서는 때로 조공 사신을 통해 자국에 필요한 물품을 중국 왕조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무령왕 사후 양에 파견된 백제 사신들은 무령왕의 장례에 사용할 특정 물품을 표문(表文)으로 요청하였을 것이며, 양 무제는 상장령(喪葬令) 규정에 정해진 부물(賻物)과 함께 백제에서 요청한 특정 품목 역시 하사하였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6역사 교과서에 나타난 '백제 부흥전쟁' 관련검토

저자 : 조법종 ( Cho Bup-jo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3-15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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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660년 백제 붕괴 이후 백제인들의 백제 부흥활동에 대한 역대 교과서 서술을 검토하여 관련 내용 정리 및 문제점 논의를 진행한 논문이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하였다. 먼저,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백제 부흥활동은 단일민족국가를 지향하는 한국 근현대사적 분위기 속에서 백제부흥 활동에 대한 객관적 평가보다는 지도부의 분열에 의해 부흥활동이 좌절된 내용이 부각되어 교과서에 서술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이란 역사 용어가 미군정기 개념 논의없이 사용된 이래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문제와 백제 부흥전쟁의 동아시아사적 역사의미 부각이 미흡한 점, 그리고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학계의 연구성과 미반영이 문제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향후 교육과정 개편시 이들 문제점이 수정되어 반영될 수 있도록 '백제 부흥운동'을 '백제 부흥전쟁'으로 역사교과서 편수용어 개편이 시급하다. 이와 함께 학계의 중심 견해로 자리 잡은 백제 부흥군 거점 주류성을 부안지역으로 보는 견해의 교과서 반영과 백강 전투의 동아시아사적 의미 확산을 위한 내용보강 및 지속적인 홍보와 교육이 요청된다.

7한탄강 본류역의 후기 구석기 연구

저자 : 이정철 ( Lee Jung-chul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3-18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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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 본류역의 주요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은 배후산지의 사면이나 말단부 또는 구릉 및 그 사면에 위치하며, 여러 유적의 하부에는 현무암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는 층은 사면기원의 점토성 퇴적물이며, 유적 및 유물층별 사면퇴적의 영향은 상이하다.
유적의 유물층은 점토성 퇴적물 내의 색조, 구조, 토양입도 등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세매의 층으로 구분되며, 각 층 내의 유물층은 상부, 중부, 하부 유물군으로 삼분된다. 상부 유물군은 명갈색 층으로 그 연대 범위는 16,000~22,000calBC, 중부 유물군은 쐐기구조가 발달된 암갈색 층으로 중심 연대는 22,000~26,000calBC, 하부 유물군은 쐐기구조의 뿌리 아래에 위치하는 (적)갈색 층으로 30,000~33,000calBC나 그 이전에 속한다.
석기제작을 위한 박리작업은 석영계 돌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늦은 시기로 갈수록 몸돌의 활용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변화가 나타난다. 그리고 돌감은 특정 석기제작기법의 출현과 밀접하게 관련되는데, 응회암은 돌날기법, 흑요석은 좀돌날기법에 활용되었다. 돌감은 상부 유물군으로 갈수록 여러 종류가 나타나며, 돌날기법 및 좀돌날기법에 이용된 돌감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듬은 석기는 하부 유물군에서는 긁개 위주이지만 중부 유물군에 이르러 긁개와 밀개, 홈날, 쐐기, 뚜르개, 슴베찌르개 등이 보여지고 상부 유물군까지 이어진다. 한편 다듬은 석기 중 모든 유물군에서 나타나는 긁개는 점차 돌감과 소재가 다양해지고 소형화되며, 밀개 역시 중부 유물군에 상부 유물군으로 가면서 유사한 양상이 나타난다.

8완주 신풍 유적 군집묘에 대한 새로운 접근

저자 : 이동휘 ( Lee Dong-hui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5-21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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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대토기문화는 세형동검 등의 진일보한 금속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송국리문화와는 이질적인 문화양상을 보이며 한반도 내에서 빠르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물질문화의 변동은 정치·사회적인 변화와 연관되며, 기원전 3세기 이후 한반도 내 정치체들은 복합사회로의 진전을 이루었다.
복합사회로의 진전은 청동기시대에도 진행되어 왔으나, 보다 직접적인 계층의 발생은 점토대토기 및 세형동검의 등장 이후로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당시 사회발전단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계층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완주 신풍유적에서 확인된 유구·유물을 다차원척도법으로 분석하여 계층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주지하다시피 신풍유적은 만경강 일대에서 확인된 최대 규모의 분묘유적으로 군집양상의 변화가 명확하게 확인된 유적이다. 따라서 신풍유적을 면밀히 살펴보는 과정은 계층분화 및 심화과정에 대한 미시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광역적인 범위에서 계층화를 살펴보았던 기존 연구들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분석결과 완주 신풍유적의 위계 단계는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었다. 1. 가장 우월한 최상위층의 분묘군, 2. 무덤축조 양식이나 출토유물의 특수성을 지닌 분묘군, 3. 별다른 특징 없이 표준화 되어 있는 분묘군이다. 물론 무덤을 축조하지 못하는 계층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신풍유적 가지구는 5개 군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2군은 출토유물의 다양성과 배치에서의 정연성이 떨어지는데 이러한 현상은 위계형성의 맹아적 단계로 보인다. 3군은 청동기의 부장 비율이 급증하고 철기가 일부 추가되어 위계가 보다 진보한 모습이 확인된다. 4군은 철기가 부장된 분묘의 비중이 늘어나고 구릉의 상단부에 우월한 분묘들이 배치되는 양상이 추가된다. 5군은 위계 분화가 극에 달하는 시점으로 지배계층 내에서도 선호된 유물이 서로 달랐음이 확인된다. 이는 동일계층 내에서도 富(Wealth) 혹은 역할(Role)의 차이가 발생하였음을 추론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발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하여 신풍유적을 위시하여 존재했던 정치집단은 해체(혹은 이주)되는 수순을 밟았던 것으로 보인다. 철기의 보급은 이러한 변화에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판단되며, 신풍유적에 출토된 철기는 외부세력의 개입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외부세력의 등장으로 새로운 지배체계를 필요로 했을 것이며, 이는 위계의 심화과정으로 이어진다고 하겠다.
역사적으로는 고조선·위만조선의 멸망, 燕계 철기의 도입, 한사군 설치 등과 연관되며, 나아가 마한(國) 성립과정의 일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9부여 능산리 서고분군 출토 금제오각형장식에 대한 고찰

저자 : 서현주 ( Seo Hyun-ju ) , 이솔언 ( Lee Sol-eo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1-24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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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부여 능산리 서고분군(2호분)에서는 금제오각형장식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은 작고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제까지 백제 유적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는 것이다. 유물은 문양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제작기법에서도 특징이 뚜렷하다. 유물이 출토된 2호분은 서고분군 중 가장 잘 치석된 석재로 축조되었고, 구조적으로 능산리 중앙고분군의 동하총(벽화 존재)과 비슷한 평천장(단면 방형) 석실묘이다. 본고에서는 금제오각형장식이 어떠한 유물의 일부였는지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고, 제작기법이나 문양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능산리 서고분군(1, 2호분)의 시간적인 위치와 계통, 동하총과의 관계를 파악해보았다.
금제오각형장식 유물은 도굴갱에서 수습되어 그 용도를 잘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유물의 형태는 평면 오각형, 횡단면 배부분 편제형에 가까우며, 내부는 비어 있어서 함께 수습된 다른 유물들, 그리고 평양 석암리 9호분 등의 금제모자환두소도 등의 유물과 비교해볼 때 철제도자의 칼집 끝장식(초미금구)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금선이나 금알갱이를 누금하여 문양을 표현하였으며, 적색 안료인 진사를 사용하여 색깔을 내고 있다. 전·후면과 양 측면에는 간략화된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데 주문양은 용문과 쌍조(봉황 또는 주작)문, 보조문양은 팔메트문, 산악문, 여백문양은 운문 등이 확인된다. 일부 외곽에는 작은 원문과 삼각의 거치문이 둘러져 있다.
백제에서 누금이나 진사를 이용한 제작기법은 주로 웅진기 무령왕릉, 사비기 능산리사지 등의 금제유물에서 확인된다. 문양 중 외곽문양인 거치문과 작은 원문도 마찬가지이다. 주문양, 보조문양, 여백문양의 내용이나 구성은 웅진기 무령왕릉 동탁은잔, 사비기 능산리사지 금동대향로, 외리 문양전 등에서도 보이는 것이지만, 용문과 쌍조(봉황 또는 주작)문의 세부적인 모습, 후면의 쌍조(봉황 또는 주작)문과 팔메트문, 산악문, 운문 등의 문양 구성은 평양 호남리 사신총, 강서대묘 등 고구려의 사신도 고분벽화와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유물의 시기는 6세기 중엽 이후, 대체로 후엽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동하총과 서2호분은 고구려의 벽화고분의 영향으로 나타났으며, 그 중 2호분을 포함한 서고분군은 소위 동하총식 고분이 확산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0일본(日本) 기내지역(畿內地域) 초기조와기술(初期造瓦技術)의 도입(導入)과 전개(展開)

저자 : 최영희 ( Choi Yeong-hee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1-28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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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말 飛鳥寺의 창건을 계기로 百濟에서 日本으로 전래된 初期造瓦技術은 星組·花組 두 계통의 造瓦集團을 형성하여 기와를 생산하였다. 본 글에서는 畿內地域의 初期瓦 중 암키와·수키와에 주목하여 平野山窯系統과 隼上がり(하야아가리)窯系統으로 구분·재명명하고, 그 도입 및 전개양상에 대해 검토하였다.
平野山窯系統(星組)은 일본의 中央勢力 및 有力豪族의 지원을 받았던 조와집단으로, 암막새, 장식기와, 치미 등 백제 지붕 시공의 선진정보를 보유하였으나 국가 및 왕실과 관련된 건축을 중심으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활동을 영위하였다. 한편, 隼上がり(하야아가리)系統(花組)은 조와기술 확산을 위한 보급형 기술로 평가되며, 在地의 토기 생산 공인을 기반으로 보다 개방적인 조와집단을 형성·전개하였다. 전자의 기와는 백제의 金德里窯址와 陵山里瓦窯址 출토기와의 양상과 거의 일치하며, 후자의 기와는 彌勒寺址, 王宮里遺蹟 등의 출토품과 유사하지만 고구려 기와의 기술요소도 확인되므로 보다 다각적인 검토가 요구된다. 同時期 백제는 기와 제작 방식의 定型化를 통해 造瓦體制가 새롭게 정비되는 변화를 보이는데, 그 과도기적 양상이 일본 畿內地域의 初期瓦에 반영되어 두 조와계통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7세기 2사분기에 이르면, 조와계통의 구분과 관계없이 암키와의 제작방식이 정형화(통쪽표리연결식 성형틀 사용방식)되고 보급형의 와당문양(奧山廢寺式 연화문)이 출현·확산됨에 따라, 常時的인 생산·공급체제를 마련되기에 이른다. 종래에는 7세기중엽 山田寺式 기와의 등장이 技術 및 體制의 전환점을 반영하는 대표 유물로 이해되어 왔지만, 이미 奧山廢寺式 수막새의 출현과 함께 조와기술의 정착과 기내지역을 범위로 하여 확산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변화의 배경에도 역시 백제의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내지역의 초기 조와기술은 일본이 백제의 技術과 制度를 받아들이고 실현시키는 과정과 국가적 생산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노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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