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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사학회> 청계사학> 여석 이기백의 학문과 한국사인식

여석 이기백의 학문과 한국사인식

Lee Ki-Baik's scholarship and understanding of Korean History

김진한 ( Kim Jin Han )
  • : 청계사학회
  • : 청계사학 21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9년 12월
  • : 239-268(30pages)

DOI

10.33835/cghs.21.7


목차

1. 머리말
2. 한국사와의 만남
3. 이기백의 한국사인식
4.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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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은 해방 후 역사학계를 이끈 1세대로 한국사의 체계를 세웠으며 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이 글에서는 오롯이 학문에 매진했던 이기백의 삶을 따라가며 그의 한국사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흘러왔는지 살펴보았다. 아울러 역사 속에 아로새긴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은 무엇이었으며 우리역사학계에 남긴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기백은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시대상황 아래 민족주의적인 집안에서 보고듣고 자랐다. 자연스레 우리 역사에 뜻을 두었고 이는 우리 민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민족에 대해 따뜻한 사랑과 역사적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민족을 강조하면서도 국수주의로 흐르지 않았던 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의 토대 위에서만이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역사적 진리 찾기에만 매몰되어 현실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해방후 식민주의사관의 병폐를 직시하고 이를 논파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자존감을 되찾는데 앞장섰다.
그는 한국사의 특수성을 반영하면서도 보편성을 담보할 수 있는 한국사의 발전 법칙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결국 그가 역사에서 찾아낸 ‘진리’는 바로 사람들이 누려야 할 자유와 평등의 확대과정이며 이것이 한국사의 발전법칙이었다. 이는 민족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결코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우리사회에 남긴 또 하나의 업적은 역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가 쓴 『한국사신론』은 연구자들의 입문서일 뿐만 아니라 대중서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였다. 특히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한국사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역사를 공유하기 위해 『한국사 시민강좌』를 간행하였다. 비록 지금은 종간되었지만 여러 역사학자들이 동참하여 쟁점이 되는 역사문제를 집중해서 다룸으로써 많은 관심을 받았고 역사의 대중화에 크게 앞장섰다.
한편에서 그의 역사학은 여전히 민족에 한정하여 논의됨으로써 국사 패러다임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탈근대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적 혹은 세계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자하는 탈근대논의도 ‘국사’ 패러다임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민족’이란 틀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Lee Ki-Baik, as the first generation that led the history academic world after liberation, established the system of Korean history and took the lead in popularizing history. In this article, I examined Lee Ki-Baik's scholarship and perception of Korean history. In addition, I examined what he said about love for the nation and his constant belief in truth.
Lee Ki-Baik emphasized the nation but believed that 'truth' could be found on the basis of objective historical facts. However, he did not turn away from reality because he was in search for historical truth. He took the lead in restoring our own self-esteem by facing and overcoming the illnesses of the Japanese colonial view of history.
He tried to find the developmental law of Korean history. The truth he found in history was the process of expanding freedom and equality, and this was the developmental law of Korean history. This is something you can never find without love for the nation and people.
Another achievement he left in our society was that he tried to popu-larize history. 『A New History of Korea』 became firmly established not only as an introductory book for researchers but also as a popular book for the general public. In particular, it has been translated into languages all over the world and contributes greatly to correctly informing about Korean history. In the late 1980s, he published 『The citizen's forum on Korean history』 to share history with the general public. Although the publication has been stopped, it received much attention by dealing with historical iss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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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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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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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사에서 어부가의 계승과 변용

저자 : 허흥식 ( Heo Heung-sik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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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어부가가 실린 가장 오래된 가사집은 악장가사이다. 악장가사는 조선 중종시대에 朴俊이 지었다고 통설로 전한다. 李賢輔는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 온 다음 은자로 장수를 누리면서 12장 어부가를 9장으로 바꾸었다. 그는 이 노래를 고향 낙동강의 상류인 분강에서 불렀다. 분강은 이현보와 이황의 터전으로 『龍山誌』에 자세하게 실렸고 오늘날 안동시 동쪽 도산면 분천리이다. 이현보가 어부가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과정은 이현보의 문집보다 이황의 문집에 더욱 자세하게 실려 있다.
12장 어부가는 樂章歌詞에 처음 실렸고 이 책의 저자 朴浚은 실재하지 않은 인물이다. 필자는 이보다 60년 이상 앞서는 세조시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朴仲孫으로 樂學軌範보다 앞선 음악서로 논증하였다. 악장가사는 고려와 조선의 악서에 대한 연구를 새롭게 정리할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12장어부가는 고려에만 전하던 백낙천의 7언율시가 음악으로 발전하여 당송의 다른 시구를 합쳐 고려의 음악으로 여러 차례 개작되었다고 밝혔다. 고려 명종시대 이인로가 참여한 죽림고회와 12장 어부가는 실린 칠언시의 다양한 작가를 합쳐서 불교와 도교의 시인으로 은자의 시구가 합쳐졌다. 어부가는 기로회와 속기로회에서 고려와 신라 은자의 시구와 현존하지 않는 당송의 시구가 다시 더하였다. 조선 중종시기의 이현보는 9장으로 줄이면서 백난천이 배경으로 삼았던 동청호와 이인로가 사용한 임진강과 다른 환경인 분강에 알맞도록 중복된 시구를 줄여서 9장으로 개작하였다.
어부가의 뼈대는 백낙천의 칠언율시 漁父를 聯句로 쪼개어 聯詩로 만든 형태이다. 백낙천이 지은 어부는 신라말기 그가 생존했던 시대에 신라에서 사들인 작품이고 『十抄詩』에서만 전해오는 시이다. 백낙천의 시는 신라와 고려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노래로 유행하였음은 확실하다.
聯句로 어부가의 제1장부터 제3장까지와 마지막장에서 각각 첫머리에 인용된 모습은 일본에서 시가로 남아있는 『千載佳句』나 『和漢朗詠集』과 같은 형태로 전승되었다고 확인된다. 『十抄詩』에는 율시의 원형을 보였지만 聯句로 나뉘어 절반의 한시를 후렴에 이어 4장어부가로 불리다가 하나는 원형으로 십초시에 실리고 나머지는 12장 어부가로 확대되었다가 이현보에 의하여 분강에 어울리는 9장으로 줄였으나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40장으로 확대시켰다고 해석하였다.

2『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부금사구국어해고(附金史舊國語解考)」의 북방어(北方語)

저자 : 심영환 ( Sim Young-hwan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1-7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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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欽定滿洲源流考』 「附金史舊國語解考」에 등장하는 북방어를 살펴보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원래의 출전은 『金史』 「金國語解」인데, ①官稱, ②人事, ③物象, ④物類, ⑤姓氏의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淸代에 들어가서 만주어와 한자를 대응시키는 『淸漢對音字式』을 만들어 모든 북방언어를 다시 기록하였는데, 『만주원류고』도 그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청대인의 연구를 통해 『금사』 「금국어해」의 북방어를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다섯가지 가운데서 이 글은 필자가 이미 만주어로 복원한 ⑤姓氏조를 제외한 나머지네 가지를 다루었다.
분석의 결과 청대인들은 북방어를 만주어로만 복원한 것이 아니라, 몽골어와 索倫語(솔론어)도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 단어에 따라 『금사』를 편찬할 당시와 『만주원류고』의 단어 해석이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곧, 하나의 단어가 시대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향후 연구의 과제이다.

3세조의 종친 등용책과 영순군(永順君)

저자 : 박홍갑 ( Park Hong Gap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5-123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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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군의 활약은 세조의 종친 등용책에 기인한 바가 크다. 세조는 집권 9년차부터 아종(兒宗) 정치라는 다소 파행적인 정국 운영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영순군이었다. 당시 아종들은 승정원이 전담하던 왕명출납은 물론 국가의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각종 군사 동원과 국가의례에 참여하게 되었고, “문(文)에는 영순군 무(武)에는 귀성군”이란 말이 떠돌았듯이, 세조 후반기 정국 운영의 핵심이 바로 그들이었다. 집권 전반기부터 종친들에게 의존도를 높여 가던 세조는 이시애 난을 계기로 훈구대신까지 믿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자, 영순군과 귀성군을 더욱 중용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조 시대가 종막을 고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서 훈신들 사이의 내분까지 겹치게 되었다. 영순군이 이런 혼돈의 정국을 피하게 된 것은 짧은 생으로 마감했기 때문인데, 그가 살았더라면 어떤 희생이 강요되었을지 알 수가 없다.

4임진왜란시기 김사모 부자의 활약상과 후대의 현창 -영광 지역 읍지를 중심으로-

저자 : 정해은 ( Chung Hae-eun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5-16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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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임진왜란기 의병으로 활약한 김사모 부자의 활동과 후대의 현창을 검토한 논고다. 김사모는 1592년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세 아들 김억명·김억호·김억룡은 1597년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현재 김사모 부자의 활약상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여지도서』다. 이들의 활약상은 국가적으로 동래성 전투와 송상현에 대한 사적이 발굴되는 과정에서 함께 발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철종 연간에 김사모 부자를 기리는 송촌사가 영광에 세워지고 1908년에는 그 옛터에 '송촌사 유허비'가 건립되었다. 이때 기우만이 비문을 지었는데, 그는 임진왜란기 의병의 역사를 동력으로 삼아 항일 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이후 19세기에 지역사회 인사들이 김사모의 후손인 김광근의 효행을 기리는 과정에서 김사모 부자의 충절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들을 통해서 김사모 부자의 '충절'이 영광과 주변 지역에 지속적으로 퍼져나간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5허목(許穆)의 고문인식(古文認識)과 「동해송(東海頌)」의 의미

저자 : 권오영 ( Kwon Oh Young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3-204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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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은 이학(理學)을 최고의 학문으로 생각하던 17세기 조선사회에 육경(六經)에 관심을 돌려 유학(儒學)연구의 범위와 깊이를 더하였다. 그는 육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순(舜)과 우(禹) 이후의 문장은 질박(質朴)하고, 은(殷)과 주(周)의 문장은 광대하며 엄정하다고 했다. 그런 그는 주(周)나라의 도(道)가 쇠하고 공자(孔子)의 문하(門下)에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문학으로 이름이 났지만, 공자가 돌아가시자 성인(聖人)의 글이 무너졌다고 보았다.
허목은 고문이 진(秦)나라에 이르러서는 분서(焚書)로 인해 없어져버렸다고 했다. 그는 진나라와 한나라 이후로 고문이 변하여 어지럽게 되었고, 어지러운 것이 변하여 기이하게 되었고, 기이한 것이 변하여 기궤(奇詭)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고문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난삽하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고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독특한 형식의 문집인 『기언(記言)』(93권)이란 저술을 남겼다.
한편 허목은 창힐(蒼頡)과 사주(史籒)의 고문 글씨에 대한 여러 서법(書法)을 얻어서 익혔다. 그는 진(秦)나라 때에 이르러 이사(李斯)가 소전(小篆)을 만들었고, 정막(程邈)이 예서(隸書)를 만들었는데, 예서가 나오자 고문 글씨는 폐지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허목은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으로 글을 지었고, 정막 이전의 고문 글씨를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허목의 대표적인 고문 작품인 「동해송(東海頌)」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종족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이 「동해송」의 구성은 먼저 동해가 백천(百川)의 으뜸이 된다는 것을 말하였고, 중간에 물산의 진기함과 여러 나라와 종족(種族)을 말하였고, 마지막으로 옛 성인의 시대에는 덕(德)이 널리 퍼져 비록 풍속이 다른 먼 나라라도 같은 범위에 들어와 교화를 받지 않음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이 글을 통해 허목은 동해의 위대함을 극히 칭송하면서도 자기 당대의 풍속이 크게 경박해진 것을 개탄했다.
허목은 「동해송」이란 불후(不朽)의 고문 작품을 지어, 이를 써서 돌에 새겨비(碑)를 만들어 세웠다. 고문 작품과 고문 글씨는 이학(理學)이 풍미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육경고문(六經古文)이라는 새로운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열었다. 그는 「동해송」에서 삼대(三代:夏殷周)의 덕치(德治)를 갈망했고, 아울러 민중의 재앙(災殃)을 구제해 주기 위해 고문에 자신의 예술혼을 불어넣었다. 특히 '천년 묵은 오래된 등나무(千歲古藤)'란 평을 듣는 그의 고문 글씨는 조선후기 예술계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고 특히 남인과 소론 학자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요컨대 그의 고문은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이 일세를 풍미하고 청(淸)을 향해 북벌(北伐)을 부르짖던 조선후기 사회에 새로운 문풍(文風)을 진작시켰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크게 넓혀 주었다고 할 수 있다.

6『이재난고(頤齋亂藁)』 디지털 역주본 간행의 필요성과 가치 제고

저자 : 정성희 ( Jeong Seong Hee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5-23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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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頤齋亂藁』는 전북 고창 출신의 실학자 頤齋 黃胤錫(1729~1791)이 쓴 일기자료이다. 18세기 연구 자료로서 『이재난고』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특히 과학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과학사상사의 차원에서 볼 때 『이재난고』의 내용 가운데 천문역산학과 수학 관련 자료는 일차적인 관심거리다. 왜냐하면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數學과 實測의 차원에서 거론하고 있었고 이러한 영향 관계가 『이재난고』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재난고』는 초서로 쓰여져 있어서 많은 연구자들이 활용을 하지 못하다가 2003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서본으로 완간되면서 조선후기 연구자료로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방대한 양의 『이재난고』는 개인의 일상부터 다양한 자료가 혼재되어 있다. 연구자 한사람이 이를 전부 읽고 해석하면서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전문 주석이 달려있는 번역서가 간행될 필요가 있다.
『이재난고』는 과학 관련 자료를 비롯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들이 방대하기는 하나 순서나 체계없이 일기 속에 전사되거나 초록되어 있어서 어디까지가 원전을 필사한 것인지, 혹은 황윤석의 견해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필사 자료의 대조를 통하여 원전과 저자의 견해가 구분되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울러 『이재난고』를 탈초하고 활자화하는 과정에서 오탈자 및 띄워쓰기가 잘못된 것이 있으므로 인용하는 과정에서 자칫 오류를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이재난고』의 분류별 역주본 사업의 시급한 과제는 먼저 오탈자를 바로 잡는 교정과 함께 주제별 혹은 문집 체재에 따른 새로운 '디지털 역주본 이재난고'을 발간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향후 문집과 일기자료의 비교 검토를 통해 『이재난고』의 오자 교정과 번역, 주석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조선시대 문화콘텐츠 자료로서 『이재난고』의 활용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7여석 이기백의 학문과 한국사인식

저자 : 김진한 ( Kim Jin Han )

발행기관 : 청계사학회 간행물 : 청계사학 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39-26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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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은 해방 후 역사학계를 이끈 1세대로 한국사의 체계를 세웠으며 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이 글에서는 오롯이 학문에 매진했던 이기백의 삶을 따라가며 그의 한국사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흘러왔는지 살펴보았다. 아울러 역사 속에 아로새긴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은 무엇이었으며 우리역사학계에 남긴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기백은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시대상황 아래 민족주의적인 집안에서 보고듣고 자랐다. 자연스레 우리 역사에 뜻을 두었고 이는 우리 민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민족에 대해 따뜻한 사랑과 역사적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민족을 강조하면서도 국수주의로 흐르지 않았던 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의 토대 위에서만이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역사적 진리 찾기에만 매몰되어 현실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해방후 식민주의사관의 병폐를 직시하고 이를 논파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자존감을 되찾는데 앞장섰다.
그는 한국사의 특수성을 반영하면서도 보편성을 담보할 수 있는 한국사의 발전 법칙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결국 그가 역사에서 찾아낸 '진리'는 바로 사람들이 누려야 할 자유와 평등의 확대과정이며 이것이 한국사의 발전법칙이었다. 이는 민족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결코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우리사회에 남긴 또 하나의 업적은 역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가 쓴 『한국사신론』은 연구자들의 입문서일 뿐만 아니라 대중서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였다. 특히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한국사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역사를 공유하기 위해 『한국사 시민강좌』를 간행하였다. 비록 지금은 종간되었지만 여러 역사학자들이 동참하여 쟁점이 되는 역사문제를 집중해서 다룸으로써 많은 관심을 받았고 역사의 대중화에 크게 앞장섰다.
한편에서 그의 역사학은 여전히 민족에 한정하여 논의됨으로써 국사 패러다임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탈근대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적 혹은 세계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자하는 탈근대논의도 '국사' 패러다임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민족'이란 틀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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