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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례안(禮安) 분강서원(汾江書院)의 창건과 청액(請額)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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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안(禮安) 분강서원(汾江書院)의 창건과 청액(請額) 활동

Founding of Yean Bungang Seowon and Requiring Saek Activities

채광수 ( Chae Kwang-soo )
  •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 : 석당논총 7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9년 11월
  • : 125-150(26pages)

DOI


목차

Ⅰ. 머리말
Ⅱ. 분강서원의 창건 과정
Ⅲ. 분강서원의 청액 활동과 한계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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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현 분강서원은 농암 이현보를 제향 한 영천이씨 가문의 문중서원이다. 본고는 분강서원 창건을 기록한 『汾江書院創院日記』와 사액을 받기 위한 활동 기록인 『汾江書院請額日記』를 근거로 창건과 청액 활동을 검토한 사례 연구이다.
17세기 후반 예안현의 사론은 서원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고, 족적기반의 중심기구로 대두되는 분위기에 편승해 영천이씨 문중에서도 서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1699년(숙종 25) 후손들 주도로 서원 신설 금령을 피해 먼저 영당으로 건립한 다음 향중 공론을 거쳐 서원으로 확대 창건 하였다. 그 과정에서 도산서원의 지원과 공조가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717년(숙종 43) 서원 비적격자를 제향 한다는 사유로 사우로 강등 당했다가 1724년(경종 1)에 다시 서원으로 승격한다. 이러한 경험은 국가에 공인받는 사액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다음은 1781년(정조 5) 1차 청액 활동은 도산서원 치제관 이정양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제안대로 개장한 이현보 문집을 들고 재경 관료들에게 청탁을 시도하나 대다수가 만남 자체를 거부했고, 대면한 인사들도 ‘때가 아니다’라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이 시기 영남 남인들에게 산견되는 채제공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공격한 공서파들이 주류였던 점이 흥미로웠다. 1784년(정조 8) 2차 청액활동 역시 봉입의 기회조차 얻지를 못했다. 봉입 실패의 이유는 채제공 탄핵·세자 책봉례와 같은 정국의 동향과 추동할 중심인물의 부재에 기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련의 준비 부족이 낳은 결과였다. 또한 정조 연간 사액 된 21개의 원사의 기준 곧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서원 사액이 활용된 경우로 분강서원은 이에 부합 되지 않는 서원이었다.
Bungang Seowon in Yean-hyeon was the Seowon for the Youngcheon Lee Clan that had the ancestral ritual of Nongam Lee Hyun-bo. This article is a case study that reviewed the founding and requiring saek activities based on 『Bungang Seowon Changwon-Ilgi (journal)』 that recorded the founding of Bungang Seowon and 『Bungang Seowon requiring saek-ilgi』 that is the record activities to receive the Sa-a다 (a tablet given by the king).
In the later part of the 17th century, the Saron of Yean-hyeon was integrated around Seowon (a memorial hall for Confucianist services to honor distinguished scholars and statesmen), and by following the atmosphere to emerge as the trace-based central organization, the Youngcheon Lee Clan also felt the need of Seowon. Therefore, the descendents led in 1699 to establish Youngdang in avoidance of decree to newly establish Seowon and then it went through public discussions in the locality to expand and found Seowon. In the process, the support and cooperation of Dosan Seowon was a great assistance for the cause. However, because of the ancestral ritual for Bijeokgyeokja in Seowon in 1717, it was demoted to Sawoo but it was promoted again to Seowon in 1724. This type of experience worked as the turning point to recognize the importance of nationally-acknowledged Sa-aek.
Next, the first requiring saek activities of 1781 began with the suggestion of Lee Jeong-yang who was the Chijegwan of Dosan Seowon. According to his suggestion, the request was made to the bureaucrats in Seoul with the literature collection of Lee Hyun-bo but most of them refused to meeting him and those who were actually met replied that 'it was not the time'. The interesting point was that the Gongseo-pa (faction) that attacked him was the main stream, not to depending on Chae Je-gong (one of prime ministers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that was seen to the Youngnam Namins during the time. The second requiring saek activities of 1784 also did not gain an opportunity of sealing as well. The reason for failing the sealing could be attributable to the absence of critical leader to lead the trend of political situation, such as, impeachment of Chae Je-gong or the crowning ceremony of prince. However, more than anything else, it was a result from insufficient sequences of preparation. In addition, for the case of facilitating the Seowon Sa-aek in more flexible ways following the political needs as the standard of the 21 main tablets that were annually Sa-aek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Bungang Seowon was not a conforming Seowon for the purp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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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3회
  • : 1738-6578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77-2020
  • :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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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해인사대장경판 인출본의 역사·문화적인 성격과 대성사 소장 『사분율(四分律)』

저자 : 崔永好 ( Choy Young-h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3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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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해인사대장경판의 현존 인출본에 담겨진 역사·문화적인 성격을 진단한 다음, 보물 제1943호로 지정된 『사분율』의 인출본을 분석하였다. 현재까지 해인사대장경판의 인출본 가운데 고려말기~조선초기의 불교기록유산이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이 시기 찍은 『사분율』의 경우에도 국내에서 유일하게 확인되었으므로, 보물 제1943호 『사분율』에 담긴 역사·문화적 가치와 성격을 집중 분석하여 해인사대장경판 인출본의 새로운 이해 지표를 확보하였다. 특히 보물 제1943호 『사분율』은 표지나 장정 등이 인출불사 당시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이므로, 객관적인 이해 지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첫째, 보물 제1943호 『사분율』은 형태서지학적 기본정보와 구성체계 등에서 해인사대장경판에 포함된 해당 경판을 원천텍스트로 인출한 불교기록유산이다. 둘째로, 인출시기는 조선 세조 때이다. 해당 인출본은 인출상태와 간행기록의 유무, 장정형태나 개법장진언부호의 표제, 인출종이의 종류 등에서 세조가 국가·왕실불사로 해인사대장경판을 50질을 찍어 전국의 유명 사원에 나누어 준 불교기록유산으로 확인하였다. 셋째로, 해당 인출본에는 개법장진언부호의 표기로, 세조 당시 불교경전의 신성성과 장엄성을 인식하는 불교의식이 담겨져 있다. 넷째로, 해당 인출본에서는 세조 당시 高麗國의 왕조에 대한 인식태도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당 인출본은 해인사대장경판에 포함된 『사분율』 권47~50의 훼손 부분을 복원하는 동시에, 해당 경판의 보존상태도 진단할 수 있는 원천자료도 담고 있다.

2金剛院所蔵の高麗版『大般若波羅蜜多經』 -墨書, 奥書, 蔵書印の検討を中心として-

저자 : 馬場久幸 ( Baba Hisayuki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3-5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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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원(金剛院) 소장 고려 재조대장경 『대반야바라밀다경』(이하 금강원본(金剛院本)으로 약칭)에는 고려시대 최문도(崔文度)의 묵서, 변한국대부인정씨(卞韓国大夫人鄭氏) 인출의 묵서, '천화사대장(天和寺大蔵)'이라는 장서인이 곳곳에 보이는 것이다. 최문도의 묵서와 '천화사대장'의 장서인에 관한 선행연구는 있으나 이 관계에 대해서는 『고려사』를 검토했을 뿐이었다. 또 변한국대부인정씨 인출의 묵서에 의해 금강원본은 1310년 이전에 인쇄되었다고 지적되었지만 이 묵서에 대해서 상세히 검토되지 않았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고려시대, 일본 무로마치(室町)와 에도(江戸)시대의 묵서들을 다시 보고 금강원본의 일본 전래 시기와 에도시대 당시의 잔존수, 최문도의 묵서와 '천화사대장'의 장서인과의 관계, 변한국대부인정씨 인출의 묵서에 보이는 인물 등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우선 금강원본은 1435년 이전에 대마도에 왔을 것이다. 또 그것이 수복된 1682년 당시에는 600첩 있었다. 그 다음에 최문도 묵서가 보이는 금강원본은 최성지가 죽은 1330년 이전에 인쇄가 시작되어 1338년까지 걸렸을 것, '천화사대장' 장서인과 최문도 묵서는 같은 시기일 것 등을 알 수 있다. 또 변한국대부인정씨에 대해서 검토하고 최이(崔怡)의 처일 가능성이 있으나 김혼(金琿)과의 관계성이 보이지 않아 그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최성지・문도 부자와 변한 국대부인 정씨의 관계가 불명한 것, 최문도 묵서가 보이는 금강원본에는 죽지(竹紙), 변한국대부인정씨 묵서가 보이는 금강원본에는 저지(楮紙)를 사용한 것으로부터 원래 금강원본은 별개로 발원 인쇄되고 나중에 이들이 하나가 된 가능성이 있다.

3여말선초 해인사대장경(海印寺大藏經)의 인출(印出)과 판본(板本)의 동아시아 유통

저자 : 최연주 ( Choi Yeon-ju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9-8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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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초기 해인사대장경판의 印出 과정과 절차를 살펴보고, 국가 재정의 부담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한편 해인사대장경 版本은 주로 일본과 류큐에서 請求하였는데, 청구의 성격과 의미 그리고 유통에 대해 논의하였다.
해인사대장경판 印出은 까다롭고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특정 개인이 할 수 없다. 그래서 국가 및 공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조선은 건국 직후 일본과 류큐에서 온 사신 접대와 供饌의 지출, 그리고 그들에게 하사하는 回賜 부담은 물론 僞使 접대 등으로 재정 지출이 많았다. 그럼에도 交隣外交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으로 협조하였다. 대장경판 인출의 소요 경비와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인출로 인해 국가 재정은 그 부담이 가중되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대장경 판본 유통은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일본의 국왕과 지방 세력, 僧團과 사원 등에서 대장경 판본을 동시에 希求하여 경쟁하다시피 請求하였다. 대장경 판본을 청구함에 있어서 倭寇禁壓, 被擄人 및 漂流人의 送還 등을 거론하면서 조선을 은근히 압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일본은 사원 창건에 따른 안치, 지배층의 조선 불교문화에 대한 관심, 戰亂 및 災難으로 황폐해진 神寺·佛閣의 재건, 영주 개인의 소유 등 다양한 목적으로 판본을 활용하였다.
류큐는 표류인 송환 또는 토산물을 상납하면서 대장경 판본을 청구하였다. 류큐의 불교는 국가 안녕을 기원하려는 鎭護국가의 기원 성격이 강하였다. 그래서 대장경 판본의 확보가 시급하였을 것이다. 통일 왕조의 정당성 확보와 왕권강화, 불교를 통한 사상의 결집 등을 위해서 판본을 적극 활용하였다.
조선-일본, 조선-류큐의 외교현안과 대장경 판본 청구는 서로 연계되었다. 그래서 조선 전기 동아시아에서 대장경 판본의 유통은 상업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정치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4가야 로만글라스와 진식대금구 유입 시기와 교역로 연구

저자 : 박광춘 ( Park Kwang-choon ) , 김다빈 ( Kim Da-bin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5-12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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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증가함에 따라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외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이 부장품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최근 발굴 조사된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는 로만글라스와 진식대금구가 금관가야 최상층 지배자 무덤인 대형 목곽묘에서 출토하여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과거 로만글라스는 5세기에 축조된 신라왕들의 무덤인 대형 적석목곽묘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으며, 가장 이른 로만글라스는 4세기 말로 편년되는 경주 월성로 가-13호분 출토품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김해에서 로만글라스가 출토한 대성동 91호분과 70호분은 토기편년에 의하면 약 A.D. 300년 전후로 편년되기 때문에 신라의 로만글라스보다 대략 1세기 정도의 시간차를 보인다.
로만글라스와 더불어 중국에서 최상층 계급이 사용한 진식대금구는 대성동 88호분과 70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진식대금구는 中國 江蘇省 宜興 周處墓 출토품을 가장 이른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주처묘의 피장자인 주처장군의 몰년이 A.D.297년으로 알려져 있어 대성동고분군 출토 진식대금구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있어 참고할 수 있다. 형식 비교 결과 대성동고분군 출토 진식대금구는 宜興 周處墓, 洛陽 西郊 24號 등 중원계 진식대금구와 형식학적으로 유사도가 높고, 종래 북연의 喇麻洞 출토품은 유사도가 적기 때문에 유입 시기를 토기 편년과 일치하는 A.D. 300년 전후로 설정할 수 있다.
종래 로만글라스의 무역로는 실크로드 중 오아시스길이나 초원의 스텝로드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진식대금구 역시 중국의 남방지역에서 성행하여 북방과 고구려를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남방특산물을 戰國時代부터 널리 애용하게 되면서 해상 무역로가 일찍부터 열리게 되었으며, 漢代에 와서 남방 교역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漢書』에 기록된다. 또 『後漢書』 「西域傳 大秦國(로마)條」에서 로마인의 무역 활동이 잘 그려져 있어, 지금의 동남아시아·인도지역과 적극적으로 교역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대성동 91호분에서는 로만글라스 외에 日本 琉球産 고호우라 조개로 장식한 마구가 출토되고 있어 남방 무역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금관가야에 로만글라스와 진식대금구가 유입되는 A.D. 300년 전후는 말레이 반도에서 베트남 남부에 이르는 넓은 교역로를 장악한 扶南國이 득세한 시기이다. 부남국의 외항인 베트남 옥애오 유적에서는 2세기경의 로마 금화와 漢鏡이 출토되었다. 부남국은 중국·인도와 중계무역을 통해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로만글라스를 중국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량의 철을 이용해 가야 최상층 지배자는 로만글라스와 진식대금구와 같은 위세품을 중국과의 해상교역을 통해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신라보다 약 1세기 정도 앞서 로만글라스가 유입되었을 것이다. 가야와 중국 간의 무역항로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서해의 해류를 이용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갔다고 볼 수 있다. 2018년 마산 현동유적에서는 舟形土器가 출토되었는데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대형 범선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도 하나의 증거이다.

5례안(禮安) 분강서원(汾江書院)의 창건과 청액(請額) 활동

저자 : 채광수 ( Chae Kwang-so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5-15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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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현 분강서원은 농암 이현보를 제향 한 영천이씨 가문의 문중서원이다. 본고는 분강서원 창건을 기록한 『汾江書院創院日記』와 사액을 받기 위한 활동 기록인 『汾江書院請額日記』를 근거로 창건과 청액 활동을 검토한 사례 연구이다.
17세기 후반 예안현의 사론은 서원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고, 족적기반의 중심기구로 대두되는 분위기에 편승해 영천이씨 문중에서도 서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1699년(숙종 25) 후손들 주도로 서원 신설 금령을 피해 먼저 영당으로 건립한 다음 향중 공론을 거쳐 서원으로 확대 창건 하였다. 그 과정에서 도산서원의 지원과 공조가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717년(숙종 43) 서원 비적격자를 제향 한다는 사유로 사우로 강등 당했다가 1724년(경종 1)에 다시 서원으로 승격한다. 이러한 경험은 국가에 공인받는 사액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다음은 1781년(정조 5) 1차 청액 활동은 도산서원 치제관 이정양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제안대로 개장한 이현보 문집을 들고 재경 관료들에게 청탁을 시도하나 대다수가 만남 자체를 거부했고, 대면한 인사들도 '때가 아니다'라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이 시기 영남 남인들에게 산견되는 채제공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공격한 공서파들이 주류였던 점이 흥미로웠다. 1784년(정조 8) 2차 청액활동 역시 봉입의 기회조차 얻지를 못했다. 봉입 실패의 이유는 채제공 탄핵·세자 책봉례와 같은 정국의 동향과 추동할 중심인물의 부재에 기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련의 준비 부족이 낳은 결과였다. 또한 정조 연간 사액 된 21개의 원사의 기준 곧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서원 사액이 활용된 경우로 분강서원은 이에 부합 되지 않는 서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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