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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등재
고구려(高句麗)와 현도군(玄?郡)의 관계와 책구루(?溝?) 설치 배경 검토
The Background of the Installation of Ch'aekkuru in Regard to the Relationship between Koguryo and Xuantu Commandery
이종록 ( Lee Jong-rok )
선사와 고대 55권 403-438(36pages)
UCI I410-ECN-0102-2018-900-003678940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에서 고구려 초기의 국가형성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현도군과의 대립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으며, 이를 전제로 하여 『漢書』 地理志 및 『三國志』 東夷傳에 기록된 현도군 관련 사료를 통해 현도군과 고구려사회의 관계 및 그 변천을 추적해 왔다. 그러나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는 시종 대립과 항쟁으로 한정되지 않고 타협으로 유지되고 있던 측면 또한 존재하였으며, 양자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다. 본고에서는 먼저 현도군은 이전에 설치된 滄海郡이 부활하는 형태였다고 보았다. 또 창해군 은 중국 문물을 토착 세력에게 제공하는 조건으로 설치되었으며, 압록강 중상류의 고구려인들은 창해군이 설치된 예군남려의 28만구의 집단 중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계가 이후 현도군에서도 이어져, 文物의 제공의 조건으로 현도군의 유지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았다. 이후 기원전 75년 이전 夷貊의 침략으로 인해 현도군은 그 치소를 신빈 방면으로 이전해야 했으나, 이와 같은 문물 제공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신빈 방면에 이전된 제2현도 군의 구조는 그 속현 수가 불과 3개인데 반해 인구가 지나치게 많은 특성과 더불어, 여타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형태로 高句驪라는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 등 그 존재 양식에서 이질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이는 제1현도군을 축출할 수 있었던 정도의 정치적 결집력을 완성시킨 고구려에 대해 기존의 군현지배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던 한나라의 정책이 상충된 결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무렵에 설치된 ?溝?는 고구려가 현도군을 이탈하는 것을 방지해야 했던 현도군과, 단일 교섭 창구를 통해 중국 문물을 수용하려 하였던 고구려가 합의한 결과로 해석하였다. 결론적으로 고구려 와 현도군의 관계는 군의 소속이라는 명목상의 관계와 이를 대가로 중국의 문물을 回賜하는 형태였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창해군 개척때부터 추진되어 온 한나라의 이 지역에 대한 군 현 편제 시도와, 토착 세력의 반발로 인해 이 시도가 무산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변화를 겪으며, 이후 大武神王代에 소멸된 것으로 여겨진다.

Many studies had emphasized on the significance of the Koguryo's conflict against Xuantu Commandery(玄?郡) in regard to the kingdom's process of state formation. Under this hypothesis, they examined the relationship between Koguryo and Xuantu Commandery through historical sources such as "Treatise on Geography(地理志)" in the Book of Han (『漢書』) or "Biographies of Dongyi" in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Yet, their relationship was not consistently hostile, since there was an aspect that they collaborated for their benefits in a certain extent.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of their long-lasted relationship and its ramifications, it is necessary to analyze this aspect that allowed the establishment of Xuantu Commandery. This paper first examined Canghai Commandery(滄海郡), which was established in 128 BC and Xuantu Commandery's former self. This commandery was installed with the submission of the local residents to the Han dynasty's and this submission was under the condition that the dynasty provides the Chinese cultural products. Although the commandery was abolished after a few years, it is likely that Xuantu Commandery was established through the same process. In 75 BC, Xuantu Commandery relocated its capital to the area around Xinbin, Liaoning province, and the commandery's directed interference to Koguryo was severed. Still, the provision of cultural products from the commandery continued, as it was the key element to maintain Koguryo's submission and nominal subordination to the commandery. Ch'akkuru was constructed in this process, when the small groups of Koguryo refused to separately visits the commandery, but Xuantu Commandery tried to maintain provision of the cultural products.

Ⅰ. 머리말
Ⅱ. 滄海郡의 설치와 第1玄菟郡
Ⅲ. 第2玄菟郡의 高句麗 관할 방식과 幘溝漊
Ⅳ. 高句麗와 玄菟郡의 관계에 관한 중국의 高句麗 인식
Ⅴ. 맺음말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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