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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학회> 대구사학> 청초(淸初) 지역사회질서(地域社會秩序)의 재확립(再確立) -엽몽주(葉夢珠)의 『열세편(閱世編)』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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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초(淸初) 지역사회질서(地域社會秩序)의 재확립(再確立) -엽몽주(葉夢珠)의 『열세편(閱世編)』을 중심으로-

The Reestablishment of Local Society Order in the early Qing -Focus on Yemengzhu` 『Yueshibain(閱世編)』-

한지선 ( Han Jiseon )
  • : 대구사학회
  • : 대구사학 12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6년 11월
  • : 243-278(36pages)

DOI

http://dx.doi.org/10.17751/DHR.125.243


목차

서론
1. 葉夢珠의 一生과 松江의 學風傳統
2. 明淸交替와 雲間의 名望家들
3. 入關 以後 松江의 士風變化와 背景
4. 明末淸初의 危機意識에서 地域秩序再確立으로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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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閱世編』을 통해 上海의 하급지식인 葉夢珠가 왕조교체의 혼란 속에 어떻게 적응하는가를 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엽몽주의 일생, 지역의 문학활동과 명문가들의 흥쇠, 청조의 제 정책과 그에 대한 반응에 초점을 두었다. 송강부의 문인들은 가문과 가문이 師生과 인척관계로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문인결사의 활동에 참여했다. 엽몽주 역시 송강부의 문사단체인 幾社와 雲間詞派를 추종하며 송강의 문학적 기풍에 자긍심이 강한 자였다. 그러나 청의 입관 이후 명망가들이 쇠락하고 지역의 士風은 건전하지 못했으며 신사들의 지위는 추락했고 지역의 인문 구심점인 학교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엽몽주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청 정부에게 있다고 파악했다. 즉, 청정부는 주소안으로 지역 紳士들의 학위를 박탈하는 한편 연납을 비정상적으로 확대시키고 실력으로 학위를 획득하는 길을 심각하게 축소시켜 결과적으로 송강부의 인문전통 기반을 흔들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강부의 관학은 무너졌으며 신사들의 활동공간과 역량은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삼번의 난이 발생하자 청 정부는 재정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복을 실시하고 사민들을 끌어안는 적극적인 조처를 내렸다. 그리고 博學鴻儒, 明史의 찬술 등의 문화적 창구를 열고 학교의 입학 정액을 정상화하며 연납의 사례를 축소시켰다. 이것은 지역의 구심점인 학교가 회복되고 신사들을 중심으로 한 질서가 재확립되는 신호였다.
This study speculates on 『Yueshibain(閱世編)』 to understand how Yemengzhu, a lower-class intelligentsia in Shanghai, adjusted to the confusion in dynasty replacement. For this purpose, this study focused on Ye`s life, literary activity in the local area, ups and downs in prestigious families, Qing`s policy and reactions to it. In Songjiangfu(松江府), associations between literary persons very active by teacher-disciple relationships and marriages. Yemengzhu also followed both literary communities, Ji Association(幾社) and Ci school of Yunjian(雲間詞派), and was very proud of literary atmosphere of Songjiang. However, after the Ming`s collapse, families of renown declined, local culture became corrupted and the positions of gentry fell. Yemengzhu felt sorry about the collapse of the official school as a local center, which did not function properly. He considered it caused by the policies the Qing government. That is, the Qing government made gentry in Jiangnan depressed along with Zouxiao case (奏銷案), and then expanded donation admission of The Imperial College (國子監). This led to a serious decline of the system where they could acquire diplomas according to academic ability. In conclusion, the Qing government broke the base for the tradition of humanities. Under these conditions, the local official schools collapsed and the ranges and capabilities of local gentry activity declined seriously. When Revolt of the Three Feudatories occurred, the Qing government rehabilitated the policy and ordered active measures to accommodate the people. Then, it opened cultural gates through the Recommendation of A profound scholar(博學鴻儒) and the Compilation on Ming-dynasty History and increased to annual payments through normalization of The entrance number for the official schools. this was a signal that the official schools as a local center were rehabilitated and the order centering on gentry was reesta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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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18-900-000281409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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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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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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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라의 노인촌(奴人村) - 「울진봉평리신라비」를 중심으로-

저자 : 노중국 ( Noh Choong Ko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25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3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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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회에서 중앙과 지방은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국왕의 거주지가 王都가 되면서 생겨났다. 지방이 형성된 이후 지방 사회는 점차 분화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울진 봉평리신라비」에 보이는 奴人村이다. 노인은 奴와 같은 존재로서 신분적으로 비자유민이었으며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존재였다. 따라서 노인촌은 사회적으로 천시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노인촌 생성의 배경은 懲罰이 주된 원인이었다. 반란을 일으켜 징벌로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徙民 집단과 포로로 잡혀 일정한 곳에 거주하게 된 집단은 노인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외에 기근 등으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집단의 경우도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면 노인촌으로 전락되어 갔다. 노인촌은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힘든 일들을 맡았기 때문에 그 役은 매우 고달팠다. 그렇지만 노인촌은 지방행정구역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노인촌은 그 출신자가 큰 공을 세웠을 경우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일반촌으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이 노인촌은 奴人法에 의해 관리되고 운영되었다.

2상주본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의 고려 경상도 안찰사 명단 검토

저자 : 한기문 ( Han Kim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25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31-6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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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기 경상도 안찰사 명단을 담고 있는 『경상도영주제명기』의 신빙성을 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경상도 안찰사의 기초적 제도 운영의 일면을 알아보았다. 『경상도영주제명기』의 고려 안찰사 명단은 고려시기에 정리된 일차 자료이다. 1425년 하연에 의해서 전사 되고 다시 1622년 김지남이 전사하였다. 문종대부터 공양왕대까지 6삭 갱대의 번으로 637번의 인명이 기재되어 있다. 연기대, 문집, 묘지명 등의 자료에서 일치된 60여 예가 확인되어 신빙성이 입증된다. 연대가 확인되는 명단에는 즉위년 칭원법이 적용되어 고려시기에 작성된 자료임을 보여준다. 희종대까지는 중임되어도 번을 건너서 하였지만 이후는 연속 잉번의 형태였다. 임기가 실제 연장된 셈이다. 도부서사 직임은 33년 정도, 안찰사 직명은 187년간, 제찰사는 60여 년, 안렴사는 20여 년 정도, 도관찰출 척사는 2년여 썼다. 안찰사 직명을 가장 긴 시간 사용하였다. 경상도를 관칭한 안찰사 직함을 많이 사용하였다. 안찰사를 대신한 다양한 직함이 나오지만 『경상도영주제명기』에는 모두 안찰사로 쓰고 안찰부사도 나온다. 안찰사 정 부사가 함께 파견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사가 파견되면 정사는 보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안찰사는 6삭 갱대의 국왕 사신관인 만큼 중서문하성 낭사직과 형부, 어사대의 경관직을 겸대한다.

3울산 송정동유적 조선시대 취락의 구성과 성격 검토

저자 : 황대일 ( Hwang Dae-i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25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61-9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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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송정동유적 조선시대 취락의 성격에 대해 취락의 구성요소와 시간적 위치, 문헌자료, 울산지역 내 다른 유적과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았다. 울산 송정동유적은 총 9개의 지구로 구분되며, 유적 내에서 생활ㆍ제의ㆍ생산 등의 공간이 분리되어 조성되었다. 취락의 구성요소 중 건물지는 지상식과 고상식건물지로 구분되며, 평면형태는 一자형과 ㄱ자형, ㄷ자형이 있다. 건물지 내부에 집수시설과 외부에 배수구가 설치된 형태도 확인된다. 주거지는 평면형태 원형과 방형으로 구분되며, 규모는 면적 15㎡ 전후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건물지와 주거지 등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존속범위를 검토한 결과 14세기 말~18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으며, 중심연대는 15세기 중반~17세기 전반에 해당한다. 취락의 성격은 3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부평역의 속역인 신역에 형성된 역촌의 성격을 가진 취락, 송지원 또는 고지원의 중심지에서 벗어난 외곽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여관의 성격, 울산지역 조선시대 대규모 취락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4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저자 : 정재훈 ( Jung Jae-h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25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91-110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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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1416∼149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서 태종 연간에 태어나서 성종 때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이약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선전기의 인물 가운데서 전형성을 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문과로 과거 급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어 문무를 겸비하였다. 또 관료로서 내직과 외직을 고루 거쳤다. 특히 외직으로 지방행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점은 그가 관료로서 매우 유능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초기 사림들이 진출하는 시기이기는 하지만 성종대의 경우 아직 사림세력의 활동이 충분하지 않은 때였다. 이약동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이 시기에 많은 문제에 봉착하여서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구성절제사, 제주목사, 전라도관찰사 등의 경험은 현실의 문제를 절실하게 다룰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에 기여하였다. 중앙의 내직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경험을 통해 문제가 되었던 현실을 바꾸는 데 노력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은 그의 청백리 정신과 함께 관료로서 전범(典範)이 될 수 있는 측면이었다. 중앙관직으로 나가서 이약동은 그 사이에 문제가 되었던 유향소의 복립을 청하는 등 사림들과 입장을 같이하였다. 이약동은 김종직과 막역한 교유를 가져서 자신이 지방관으로 내려갈 때 전별시를 주고 받을 정도였다. 지역적 연결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지연(地緣)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정치적 지향(指向)과 관련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당장은 이들의 지향이 현실에서 충분하게 소통되지는 못했지만 결국 사림들이 조선을 바꾸는 데 일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렴이라는 가치를 내면화하고, 지방에서 수령으로서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내려지는 세금이나 억압을 줄이려고 했던 것, 합리적인 행정을 지향한 것, 일방적인 통치보다는 사대부 사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태도 모두 이전의 장점을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초기사림으로 평가받는 김종직(金宗直), 또 함께 신진 사림의 기풍이 있었던 조위(曺偉)와 함께 이약동이 김천(金泉)에서 최초로 세워지는 서원에 모셔졌던 사실은 그만큼 그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공유하였던 인물이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5조선 후기 속현 단위 읍지 편찬의 배경과 목적- 대구 화원현 읍지 『금성집언』(1788)을 중심으로 -

저자 : 이재두 ( Lee Jae-d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25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11-14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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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788년(정조 12) 이수완(李壽完)이 편찬한 화원현 읍지인 『금성집언(錦城輯言)』을 분석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성주목에 속하였던 화원현(화원 8방)은 1685년(숙종 11) 경상 감영 소재지인 대구도호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1788년(정조 12) 화원현의 사족인 이수완은 이 지역의 읍지인 『금성집언』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일종의 속현(屬縣) 지역에서 편찬한 읍지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가 크다. 이보다 앞선 1749년(영조 25) 권상일이 『상산지』를 증보하면서, 상주목 속현인 산양현(산양 5면)의 읍지인 『산양지』 편찬을 시도한 기록이 보이나 현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 무렵 『상산지』 증보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단밀현지』가 남아있다. 『금성집언』은 성주읍지인 『경산지』의 화원현 관련 내용을 위주로 하였으며, 『여지도서』와 『대구읍지』의 구성 항목에 따라 이들 읍지에서 누락한 내용을 중심으로 보완하였다. 이 책은 속현 사족(士族)들이 중심이 되어 읍지 편찬 과정에서 자신들의 지역이 소외된 것에 반발하면서, 지역 사족의 현양(顯揚)과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지역의 정체성(正體性)을 찾기 위해 편찬한 읍지이다. 『대구읍지』와 비교해 보면, 방리(坊里)를 비롯하여 명승(名勝), 패설(稗說), 이문(異聞) 등 화원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故事]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러나 의욕과는 달리 수록된 인물들은 대부분 『대구읍지』 편찬 기준에는 미흡한 화원현 지역 단위의 인물들이었다. 일연이나 이숭인, 정구 등 전국적인 인물을 발굴하려는 노력도 부족하였다. 18세기 말 당시의 지역 사회 사족들을 중심으로 자신들과 관련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수록하고자 한 인식의 한계를 드러냈다.

6상주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

저자 : 금중현 ( Kuem Junghyun ) , 엄창옥 ( Um Chang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25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41-16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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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의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록물 3점이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이 1907년 2월21일에 일어났는데, 이 기록물에 의하면 상주, 그것도 상주의 아주 외지인 유천리(이천리로 추정)에서 1907년 2월 의연금 성책이 작성되었다. 이처럼 조속한 반응이 상주에서 어떻게 일어났으며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상주의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의 영향을 직접 받아서 전개되었다. 대구 운동의 발기인인 강신규는 상주사람으로서 선산의 심정섭, 이우열 등과 함께 대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와 인적 연관이 있는 상주지역의 중인(향리)인 김재익, 박정준으로 하여금 상주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김재익이 이천리에 거주하였으므로 `이호서당`을 중심으로 하여 국채보상모금운동이 상주 각 지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상주는 사대부나 유림 등의 지식인이나 부호층 보다는 일반 서민의 참여가 현저히 높았으며, 이호서원이나 상주향교를 제외하고는 유림이나 사대부의 집합적 참여를 아직 발견할 수 없다.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은 전국의 0.6% 수준에 머물지만 민중이 주도가 된 구국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상주동학농민운동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식민지기간의 항일무장투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7윤치호(尹致昊)의 아산지역사회(牙山地域社會) 개조론과 경제·사회활동

저자 : 조형열 ( Cho Hyongyer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25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69-207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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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은 윤치호의 고향이자 대토지 소유지로서, 그는 일제시대에만 78회 아산을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표현된 지역사회 인식과 활동에 대한 연구는 윤치호의 조선 현실인식을 파악하는 데, 대지주로서 지위를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해평윤씨가는 19세기 초 아산 둔포 신촌을 근거지로 부를 축적했다. 윤웅렬·윤영렬이 관직에 진출하면서 정치적 권위를 동시에 갖게 되었고 지역유력자로 부상했다. 윤영렬은 청일전쟁 당시 아산 주둔 청군이 조선 정부에 요청한 물자 징발 요구를 대행했다. 그러나 이 가문은 동학농민전쟁, 의병운동 당시 지역민의 봉기를 피해 급히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윤웅렬의 사망 이후 가문과 토지에 대한 관리책임을 맡은 윤치호는 아산을 낙후한 공동체로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지역민이 처한 현실을 개인의 문명적 의식 부재로부터 찾았고, 그에 따라 해결책도 개인의식의 성숙과 자구적 활동에 맞추는 등 개인책임론을 내세웠다. 윤치호는 10여 명의 토지 관리인을 두고 대토지를 관리하는가 하면, 아산군수·헌병분견소장, 지역 내 조선인 유력자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 농업정책을 수용하고 토지 매입을 이어갔다. 또한 선산에 대한 광산채굴권 인허가를 막기 위해 총독으로부터 온양경찰서 관계자까지 폭넓게 접촉했다. 그는 지역민에게 개인책임을 강조했지만 가산 유지를 위해 식민권력과 지주자본가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윤치호는 아산에서도 교육·사회사업에 참여했고 지역민은 송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칭송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3·1운동 당시에도 해평윤씨가가 지역민의 비판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은 개인책임론을 바탕으로 한 윤치호의 아산지역사회 개조론과 활동이 지역민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전 받았음을 의미한다.

8해방 이후 의무 교육 요구와 정책의 전개 방향

저자 : 최병택 ( Choi Byung Tae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25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209-24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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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한국인들은 일제시기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의무교육제를 하루빨리 실시하자는 데에 뜻을 같이 하였다. 일제는 겉으로 의무교육제 실시를 약속했지만, `수익자 부담 원칙`을 내세우면서 국고보조금을 전혀 지출하지 않았다. 교육의 공공성 원칙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미군정은 1946년 1월에 여론을 의식하여 의무교육제 실시를 천명했지만, 학교 시설 확충에 소요되는 비용의 지출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그 실현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각 지방자치단체는 학교 관련 부과금의 세율을 올리거나, 단위 학교에 후원회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는 편법을 택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정부 출범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헌헌법에 의무교육제 실시가 규정되어 있었지만, 재정적자를 의식한 정부는 의무교육제 실행에 필요한 제도적 정비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결과 의무교육재정은 여전히 지방자치단체의 학교비 부과금 수입과 사친회의 기부금 수입으로 충당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사친회는 교사 급여, 교실 신축 비용 등을 모두 부담할 정도로 학교 재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사친회가 반강제로 거두어들이는 기부금의 액수가 상당했고, 그 사용처도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의 비판적인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정부는 1950년대 말 교육세를 신설했지만, 그 역시 기존의 지방 학교비부과금 일부를 국세로 전환하는 데에 그쳤다.

9청초(淸初) 지역사회질서(地域社會秩序)의 재확립(再確立) -엽몽주(葉夢珠)의 『열세편(閱世編)』을 중심으로-

저자 : 한지선 ( Han Jis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25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243-27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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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閱世編』을 통해 上海의 하급지식인 葉夢珠가 왕조교체의 혼란 속에 어떻게 적응하는가를 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엽몽주의 일생, 지역의 문학활동과 명문가들의 흥쇠, 청조의 제 정책과 그에 대한 반응에 초점을 두었다. 송강부의 문인들은 가문과 가문이 師生과 인척관계로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문인결사의 활동에 참여했다. 엽몽주 역시 송강부의 문사단체인 幾社와 雲間詞派를 추종하며 송강의 문학적 기풍에 자긍심이 강한 자였다. 그러나 청의 입관 이후 명망가들이 쇠락하고 지역의 士風은 건전하지 못했으며 신사들의 지위는 추락했고 지역의 인문 구심점인 학교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엽몽주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청 정부에게 있다고 파악했다. 즉, 청정부는 주소안으로 지역 紳士들의 학위를 박탈하는 한편 연납을 비정상적으로 확대시키고 실력으로 학위를 획득하는 길을 심각하게 축소시켜 결과적으로 송강부의 인문전통 기반을 흔들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강부의 관학은 무너졌으며 신사들의 활동공간과 역량은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삼번의 난이 발생하자 청 정부는 재정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복을 실시하고 사민들을 끌어안는 적극적인 조처를 내렸다. 그리고 博學鴻儒, 明史의 찬술 등의 문화적 창구를 열고 학교의 입학 정액을 정상화하며 연납의 사례를 축소시켰다. 이것은 지역의 구심점인 학교가 회복되고 신사들을 중심으로 한 질서가 재확립되는 신호였다.

10청말(淸末)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진사관(進士館) 2기생(期生) 진사(進士)들의 일본(日本) 유학 후 향배(向背)

저자 : 장의식 ( Jang Ui Sh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25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279-31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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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朝는 1904년 1월 반포한 `奏定學堂章程`에서 新式 學制의 정착을 위해 각급 學堂 졸업자와 해외 유학생에게 소정의 시험을 거쳐 進士 등 科擧의 科名과 官職을 수여하는 장려 정책을 규정했다. 이로써 科擧가 아닌 통로로 科名 소지자가 대거 배출되었다. 본고는 京師大學堂 진사관 2기 進士들이 대거 日本에 유학하였다가 귀국한 이후의 向背, 특히 그들에 대한 졸업시험과 장려를 분석한 글이다. 진사관 졸업 進士의 다수도 장려 정책으로 待望의 翰林院 編修나 檢討를 授職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淸末 民初, 나아가 그 후 중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科名 및 官職 소지자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科名과 官職 소지 여부 자체가 아니라 어떤 학문적 배경을 가진 科名과 官職 소지자인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科名과 官職 소지자라 하더라도 科擧가 아니라 新式 學制나 해외 유학으로 배출된 자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존의 관련 연구들은 이 점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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