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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동아시아문화연구> 1980년대 이산가족 영화에서 드러나는 가족주의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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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산가족 영화에서 드러나는 가족주의 양상

The meaning of familism as seen in movies depicting separated families in the 1980s

김승경 ( Seung Kyung Kim )
  •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 동아시아문화연구 5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3년 11월
  • : 217-245(29pages)
피인용수 : 12건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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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이전 어느 시대에도 겪지 못했던 변화를 겪었다. 한마을이 갈라지고, 형제가 갈라졌으며,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생겨났다. 수많은 외국군대가 전쟁에 개입했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과는 우방이 되고, 같은 민족은 적군이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고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속에서 총부리를 겨누면서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많은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중에 하나인 이산가족의 문제도 수면으로 드러나지 못하다가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TV는 가족들의 상봉장면을 감정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나라는 눈물바다를 이루었으며, 전쟁의 상처는 완벽하게 봉합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산가족 ``찾기``이면에 있는 30여 년 동안 서로 떨어져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그저 ``혈연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났을 때, ``찾기``가 현실이 되었을 때 ``살기``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몇 편의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영화들은 전쟁의 종식이 아닌 멈춤이라는 불안정한 휴전의 상황이 지속되면서 전쟁으로 생겨난 문제들을 해결하고 못하고 한 세대가 흘러버린 80년대 중반 현재의 시점에서 가족과 민족, 국가의 개념의 변화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One of the problems caused by the Korean war that still persists today is the problem of separated families. It was not mentioned in the movies until KBS started airing programs that sought out separated family members, as only after the broadcasts did the topic appear in fiction and movies. However, it was not mentioned along the war which has long become history, instead focusing on the ``family`` that were separated during the war and have already lived over three decades in entirely different environments. It broke the illusion created by the emphasis on ``finding`` separated family members, but relating the stories of ``living`` as separated families. These four movies are about the restoration of families that were physically separated because of the war and have lived in separation due to the armistice. and show how strong patriarchal families collapse and fathers lose their patriarchate. They also show that the traditional families, based on kinship, have taken on another meaning coming from social status, slowly transforming from the absolute to the more relative social entities. Although families in terms of kinship, if they have drifted apart and became different through separation, they can only become a true family after acknowledging each other and calling each other family. These two movies also show the darker side of capitalism and the changing society of Korea, namely the increasing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during the high-growth industrialization period from 1960 to 1970. At the same time, the movies also point out the unsolved problems brought by the pause of -not the end of- the Korean War and the changing concepts of family, ethnicity and nation in the mid 1980s when a generation has passed already.

ECN

ECN-0102-2014-900-001549773


UCI

I410-ECN-0102-2014-900-001549773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 등재
  • : -
  • : 계간
  • : 2383-6180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0-2018
  • :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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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두산의 “민족 영산”으로의 표상화

저자 : 박찬송 ( Chan Seung Park )

발행기관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동아시아문화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9-3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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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오늘날 흔히 ``민족의 영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언제부터 등장한 것일까. 그리고 한국인들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백두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주로 조선 산천의 조종산이라는 지리적 표상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는 조선후기까지 이어졌으며, 조선후기에 백두산은 중국의 곤륜산과 대등한 명산으로서, 조선의 소중화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또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워지면서 백두산의 일부가 조선의 영토에 확실히 편입되었기 때문에, 비록 소수이지만 백두산에 관심을 갖고 이곳에 다녀오는 이들도 나타났다. 19세기 후반 들어 함경도의 주민들 가운데 두만강을 건너 간도지역으로 이주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백두산정계비에 나오는 토문강은 두만강과 다른 강으로서 송화강의 한 지류라고 주장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도 한때 그와 같은 인식을 갖고 청국과 국경 교섭에 나섰다. 그러나 1712년 정계비를 세울 당시 ``토문강은 두만강과 같다``고 기록한 문서가 발견되면서 정부는 이와 같은 주장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청국과의 국경 분쟁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백두산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높아졌다. 그런 가운데 1908년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독사신론」에서 삼국유사의 단군 관련 기사에 나오는 태백산은 묘향산이 아니라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1909년 나철은 단군교(1년 뒤의 대종교)를 세우고 신채호의 설을 이어받아 ``백두산=단군탄강지``론을 강력히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주장은 1910년대 대종교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고, 1920,30년대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이를 더욱 확산시켰다. 두 신문사는 백두산 탐험단을 조직하고, 강연회, 전시회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백두산=단군탄강지``론을 대중들 사이에 크게 확산시켰다. 그리고 이를 권덕규, 최남선 등이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려 노력했다. 그런 가운데 동아일보는 ``백두산은 조선의 영산``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富士山은 일본의 영산``이라는 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백두산은 이제 지리적 표상보다는 역사적 표상으로서의 의미를 더 갖게 되었다. 해방 이후 남한 사람들은 한동안 백두산을 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남한의 언론과 관광업계는 ``백두산=민족의 영산``이라는 담론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는 ``백두산=민족탄강지``라는 담론을 더 추상화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백두산=민족 분단과 통일염원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덧보태어졌다. 또 최근에는 한반도의 모든 산맥이 ``백두대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 확산되면서 백두산의 지리적 표상으로서의 의미도 다시 강조되고 있다.

2라프카디오 헌의 신도관 : 내셔널리즘과 신국표상을 중심으로

저자 : 박규태 ( Kyu Tae Park )

발행기관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동아시아문화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37-7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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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에서 1904년까지 14년간 일본에 체재하면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일본에 귀화하여 고이즈미 야쿠모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영국인 라프카디오 헌은 14권에 이르는 일본 관련 영문저서와 방대한 서간문을 통해 당대 서구세계에 독특한 일본인론을 널리 알렸다. 흔히 지금까지도 일본인들 사이에서 "일본인보다 더 일본을 잘 이해했던 외국인"으로 각인되어 있는 헌의 일본연구와 관련하여, 본고의 목적은 특히 헌의 신도 이해를 중심으로 그의 내셔널리즘과 신국표상이 가지는 의미를 규명하는데에 있다.이를 위해 본고는 구체적으로 헌의 신도관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부여해준 이즈모대사와의 만남이 가지는 의의, 자연 속에서 신적인 것을 보는 신도적 감수성에 대한 그의 직관, 나아가 그가 일본의 가미(神)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그 특징 등을 살피면서, 궁극적으로 일본인의 생활원리 및 국민정신을 집약한 것이 바로 신도라는 그의 이해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이와 같은 헌의 신도관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그의 내셔널리즘과 신국표상의 문제에 대해 문화적 내셔널리즘, 정치적 내셔널리즘, 종교적 내셔널리즘의 세 측면으로 나누어 검토하면서 그것들이 각각 ``신들의 고향``으로서의 신국표상, ``신들이 수호하는 나라``로서의 신국표상, ``사자(死者)들의 나라``로서의 신국표상과 대응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로써 본고는 헌 일본학에 있어 신국일본 표상은 이와 같은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내셔널리즘의 공모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며, 이때 ``사자들의 나라``로서의 종교적 내셔널리즘적 신국표상이 그 중심적인 매개 역할을 하면서 신도내셔널리즘으로 이어져 오늘날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한다.

3국경과 국치 -근대 중국 기념식의 표상 전략-

저자 : Onodera Shiro

발행기관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동아시아문화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71-9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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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유럽에서 발전한 Commemoration이라는 정치문화는 동아시아로 전해진 후 먼저 일본에서 ``기념(紀念)``으로 번역되어 1880년대에 기념비, 기념회 등으로 널리 쓰였다. 무술변법 전후 중국에서는 梁啓超로 대표되는 입헌파가 일본의 ``기념회``라는 모델에 독자적인 해석을 덧붙여 국치기념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를 통해 국민감정을 고취시킴으로써 자강을 도모하는 전략이었다. 또한 梁啓超는 프랑스 혁명기념일과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유사한 ``축전(祝典)``도 필요하다며 과거의 ``사업``을 표창함으로써 민중의 애국심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신정시기 입헌파는 이러한 방안을 채택해 국치기념회를 열고 만청사(晩淸史)를 외세에 받은 치욕으로 가득한 국치사(國恥史)로 묘사하는 한편, ``축전``을 열어 신정을 국치를 설욕하는 묘책으로 삼아 대중들로부터 개혁에 대한 찬성을 얻어내려 했다. 청조 전복을 목표로 했던 혁명파는 입헌파와 달리 한족이 만주족의 압제를 받은 ``국치``를 더 강조했다. 신해혁명 성공 후에 경축 분위기 일색에서 새로 수립된 민국정부에서는 국경일 등 ``축전``을 채택하고 국치기념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지만 1915년 ``21조 요구`` 사건으로 중국 지식인은 홀대 받던 ``국치기념``의 필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게다가 이후에 반복적으로 ``치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국치``는 ``국경``보다 더 영향력 있는 근대 중국의 자아 표상과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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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악(五嶽)은 중국의 유서 깊은 명산인 泰山、華山、衡山、嵩山、恒山을 말한다. 본문에서는 근자에 중국이 오악을 유네스코의 세계자연 및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프로젝트를 구성하고 새롭게 현대의 오악 담론을 구축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고대 중국에서의 오악의 개념과 인식의 형성, 그리고 그에 대한 외부의 시선 및 현대의 시선을 통해 지리적 표상으로의 오악이 정치적, 문화적 표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양상을 살폈다. 오악은 고대 산악 숭배로부터 시작된 聖山 숭배의 중심에 있다. 특히 진한 이래 封禪을 거행한 帝國 영토의 상징으로서 정치적 의미가 부여되었고, 유가 사상 그리고 도교 및 민간신앙의 요람으로서 종교적 성산으로 인식되었고, 시인묵객들에게는 문학적 상상력의 온상으로서 은둔의 대상지로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 그 중에서도 태산은 동방 태일신과의 결합으로 오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聖山으로서, 封禪을 거행한 帝國의 중심으로서, 유가 사상의 요람으로서, 인문적 태산 문화의 다양한 의미망을 형성한다. 서양에서는 특히 오악 그 중에서도 태산의 봉선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제국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동악대제와 벽하원군으로 대표되는 민간 신앙의 성지로서 주목하였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중국적인 방식으로 오악을 전유하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문화유산이 기존의 국가적 정체성과 낭만적 민족의식을 나타내는 문화적 표상으로 기능하는 양상은 아직도 전 지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근자에 중국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초미의 관심을 쏟는 것은 단순한 문화 정체성의 강화나 관광 자원의 개발을 넘어 새로운 제국의 문화적 표상에 대한 갈망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중국 오악 담론의 현대적 부활의 가능성을 살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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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중국에 불어 닥친 근대화 물결은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남성에 종속적 관계였던 여성의 해방 문제도 중국 청년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자각, 사회 진출, 자유 연애 등의 이슈로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 갔다. 이는 오랫동안 유교적 사고방식으로 견고하게 유지된 혼인제도에 대한 회의로 이어져 가면서 중국 봉건체계를 뿌리 채 흔들었다. 중국 근대화의 상징인 □신청년(新靑年)□제4권 제5호에 게재된 저우쭤런(周作人)의 「정조론(貞操論)」은 여성 문제가 태동하여 확대 재생산 되어가는 시기에 여성 해방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고 중국내 여론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근대 중국 여성해방 문제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하였다. 「정조론」은 일본의 사상가 요사노 아키코(與謝野晶子)의 「정절은 도덕 이상으로 존귀하다(貞操は道德以上に尊貴である)」라는 글을 번역한 것으로, □신청년□에 발표 후 루쉰(魯迅), 후스(胡適) 등과 같은 당시 저명한 지식인들 사이에 중요한 토론 주제가 되어 오늘날 온라인 논쟁을 방불케 하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본고에서는 「정조론」문제의 주요 토론장이었던 □신청년□을 중심으로 저우쭤런의 「정조론」과 이 글을 둘러싼 여성 담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6김종삼의 후기 시 다시읽기 ―"죄의식"의 정동과 심리적 구조를 중심으로―

저자 : 강계숙 ( Gye Sook Kang )

발행기관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동아시아문화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151-18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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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의 후기 시에 두드러지는 죄의식의 정동은 주체의 자기정립 과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본고는 텍스트에 내재된 가족 로망스적 상상과 세대적 무의식을 분석함으로써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정체성 표상의 시대적 의미를 살핀다. 무능한 아버지의 상징인 ``장님 아비``는 주체가 스스로를 아버지로서 (무)의식할 때의 자기표상에 속한다. 그러나 김종삼의 시적 주체는 이를 용인하고 수락하지 않는 자기모순 속에 있다. 이러한 모순의 심화는 ``아버지의-이름``의 폐제를 시 전체에 걸쳐 구조화한다. ``성년-남성``이 부재하는 세계, 모성적 예수와의 동일시, ``예술가-공동체``라는 환상의 구축은 부권적 은유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으로 폐제된 것의 자리를 채우는 상징적 보충에 해당한다. 하지만 전(前)-외디푸스적 관계로의 퇴행은 죄의식의 심화를 해결하지 못하며, 후기로 갈수록 자기파괴적인 징벌 욕구와 강렬한 죽음충동이 시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본고는 이러한 심리 구조가 ``장님 아비``가 아닌, 그것의 역상(逆像)인 새로운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이 싹튼 데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김종삼 시의 죄의식은 아버지-되기의 욕망이 작동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신호라 할 수 있다. 이 신호에 의해 주체는 새로운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만, 욕망의 포기는 죄의식을 오히려 강화한다. 김종삼에게서 아버지-되기의 욕망은 철저히 억압된다. 새로운 아버지-되기란 현존하는 아버지도, 부도덕한 상징적 아버지도 아닌, 그들 모두를 몰아내는 원초적 아버지가 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을 품고 있다는 것에 대해 초자아의 판결은 훨씬 가혹해진다. 자아는 혹독한 처벌을 받아야하며, 자기의 죽음을 징벌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죄의식은 죽음충동으로 점차 심화된다. 후기로 갈수록 김종삼은 자신을 죽음을 원하는 자로 정체화한다. 이러한 주체에게 삶은 스스로를 벌하는 충동과 바닥모를 죄의식의 심연이 한묶음으로 주어지는 것과 같다. 삶이란 쾌락을 택하면 죽음을 원하는 자기파괴가 뒤따르고, 그러한 고통을 덜고자 죽음의 쾌락을 택하면 삶의 상실이라는 괴로움이 잇따르는 것은 주이상스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후기에 이르러 김종삼의 시적 주체는 주이상스의 주체로 현현한다. 한국시에 이러한 주체의 형상이 드물다는 것은 김종삼의 시를 고유한 것으로 만든다. 죽음을 수용하는 한에서만 주체는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의 주체-되기가 포기되는 상황은 한 개인의 욕망과 심성, 무의식의 체계와 마음의 구조, 삶의 태도에 대한 문화적 억압의 정도를 시사한다. 욕망의 추구가 자유의 문제와 직결되는 한, 욕망을 포기한 죄의식의 주체는 그가 속한 세계의 ``자유의 부재``를 상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김종삼의 후기 시는 욕망의 추구를 구속하고 그것의 포기를 강제하는 현실이, 그 같은 사회적 억압과 불합리성이 전후 한국적 모더니티가 구축해온 역사의 ``이면``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7미군정하 검열과 천황제의 존속 -다나카 히데미쓰의 소설분석을 중심으로-

저자 : 송인선 ( In Sun Song )

발행기관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동아시아문화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183-21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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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 이후, 전쟁의 통수권자였던 일본의 천황과 그 지배체제를 둘러싼 논의가 연합군 점령 하의 일본문학과 문화 표상의 공간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또한 점령정부는 그러한 표현물들에 대해 어떠한 반응과 태도를 취하였는지를 당시의 검열 양태를 통해 고찰하고자 하였다. 전시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난 점령기에는 다양한 의견과 이야기들이 소설과 영화, 에세이를 통해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천황 및 천황제 유지를 둘러싼 논의는 패전 이후에도 전전(戰前)의 권위를 연장하고자 하는 일본 구(舊)지배체제의 의지(意志)가 일반 국민들과는 어떻게 공명ㆍ길항하고 있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또한, 그에 대한 점령정부의 대응은, ``점령``을 통해 피점령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점령주체의 의도에 부합하는 전후일본으로 재건시키고자 했던 새로운 지배 권력의 정치적 욕망을 엿볼 수 있는 틈새가 되기도 한다. 본 논문에서는 다나카 히데미쓰의 미완성 소설을 통해, 패전 이후에도 일상생활의 레벨에서 변함없이 작용하는 연장된 전전체제와 천황에 대한 민심의 소재를 더듬어 보았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무법한 권위에 대한 관성적이고 타성화한 의존 심리``를 ``일본인의 일본인다움``으로 요약한 바 있는데, 다나카 히데미쓰 역시 천황제에 관해 나카노와 관점을 공유하며 이를 자신의 소설 속에서 "일본적" 습성과 일상의 모습으로 풍자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상징``이라는 단어의 첨가로 전전과 전후를 절합(節合)하는 일본의 천황제가 일본의 내부적 논리에 의해서만 유지되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점령주체와의 첨예한 줄다리기와 긴밀한 교섭 끝에 얻어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검열의 양태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본 논문은 천황(제)를 둘러싼 구체적인 검열 사례와 검열 기준을 통해, 검열 그 자체가 ``미완의 탈(脫)제국``에 머문 전후일본 만들기에 공조했을 뿐 아니라, 천황(제)야말로 모호하고 이중적인 점령정부의 검열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81980년대 이산가족 영화에서 드러나는 가족주의 양상

저자 : 김승경 ( Seung Kyung Kim )

발행기관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동아시아문화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217-24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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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이전 어느 시대에도 겪지 못했던 변화를 겪었다. 한마을이 갈라지고, 형제가 갈라졌으며,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생겨났다. 수많은 외국군대가 전쟁에 개입했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과는 우방이 되고, 같은 민족은 적군이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고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속에서 총부리를 겨누면서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많은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중에 하나인 이산가족의 문제도 수면으로 드러나지 못하다가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TV는 가족들의 상봉장면을 감정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나라는 눈물바다를 이루었으며, 전쟁의 상처는 완벽하게 봉합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산가족 ``찾기``이면에 있는 30여 년 동안 서로 떨어져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그저 ``혈연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났을 때, ``찾기``가 현실이 되었을 때 ``살기``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몇 편의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영화들은 전쟁의 종식이 아닌 멈춤이라는 불안정한 휴전의 상황이 지속되면서 전쟁으로 생겨난 문제들을 해결하고 못하고 한 세대가 흘러버린 80년대 중반 현재의 시점에서 가족과 민족, 국가의 개념의 변화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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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군사적 측면에서 東魏北齊가 망한 원인을 살펴보았다. 東魏北齊의 지배자는 주력인 胡人(鮮卑) 군사들은 평소에 훈련시키며 유사시에 전투에 투입하였다. 평소에는 漢人 군사들을 변방에 주둔시켜 변경방어를 맡겼다. 이들은 漢人군사들은 북쪽 長城이나 남쪽 변경에 모두 배치되어 防守와 屯田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강력한 柔然과 突厥의 상시적인 위협이 있었던 북쪽 변경에는 北齊시대부터 六州鮮卑를 배치하여 침입에 대비하였다. 孝武帝의 西遷 이후 西魏北周 정권이 성립하고 長安에 도읍을 정하자 太原(晉陽)과 長安은 關中盆地와 汾水 유역으로 이어진 평지 사이에 위치하여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西魏北周의 수도 長安과 東魏北齊의 실질적인 수도인 太原 사이의 거리가 짧은 상황에서 한번의 전투에서 무너지면 상대방의 수도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할 수 있었다. 東魏의 실력자 高歡과 高澄, 北齊의 皇帝들은 太原에 장기간 거주한 이유는 太原 주변에 거주한 정예부대인 六鎭鮮卑를 통제함과 동시에 汾水를 거슬러 공격하는 西魏北周 군대를 방어할 목적 때문이었다. 반면 西魏北周도 사실상의 지배자 宇文泰와 宇文護가 長安의 동북쪽 同州에 주둔한 것도 東魏北齊의 공격을 방어함과 동시에 東魏北齊를 신속히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河東의 상실로 太原의 방어가 더욱 취약해졌다. 河東의 전략적 중요성은 北周의 北齊 정복 때 명백하게 드러났다. 北齊는 晉州城 전투에서 주력부대가 괴멸되어 사실상 전의를 상실하였고 손쉽게 太原(幷州)과 嶪을 내주고 멸망하였다.

10홍석주(洪奭周) 원체산문(原體散文)의 담론생산자적 의미와 수사적 특성

저자 : 박동주 ( Dong Ju Park )

발행기관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동아시아문화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269-29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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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奭周(1774~1842)의 5편 원체산문은, 정격고문체로 작성된 연작 산문이다. 새로운 문예원론 및 철학담론을 제시하면서 여타산문과 대별되는 이지적인 산문미를 노정하고 있다. 이는 선초 이후 비롯되어 조선후기에 집중적으로 창작된 원체산문이 대부분 성리학 이론이나 정치 원론에 집중되어 있었던 점과 비교해 볼 때 유다른 색채를 띠는 것이다. 「原詩」에서 다루고 있는 ``詩發於情``의 문제는, □詩經□ 이후 비롯된 시학 원론에 해당하지만, 조선 후기에 본격화된 논의 중의 하나이다. 「원시」에 포착된 홍석주의 시론은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정감 및 개성이 긍정되는 조선 후기 시학상의 새 흐름을 참조하면서, ``文章載道之器`` 및 ``感人效用``을 위주로 하는 전통적 문예 원론 및 시학 이론을 아우르는 것이다. 「원시」에서 발아된 홍석주의 시학 논의는 저자의 말년 저술 □鶴岡散筆□에서 더욱 구체화되었고, 저자의 실제 작품 창작 경향으로도 나타났다. 전통과 새 흐름을 아우르는 홍석주의 시론은 조선 후기의 시학상의 큰 흐름과 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미와 가치가 있다. 「原名」에서 다루고 있는 ``名實``문제는, ``名 보다는 實``을 중시하는 지식인 일반의 도덕적인 修己ㆍ處世學의 논리를 기본으로 한다. 다만 홍석주는 자신의 명실론적 입장을 정리하면서 ``名을 거론하는 일 자체``에 대한 도덕적 자기 검열의 과정을 포함하여 명실 논의의 가치와 의미를 새로이 발견해 내고 있다. 이는 가장 본원적인 질문에 소급하여 문제의 원인과 대안을 찾는 원체 산문 고유의 논리 전개 방식과 서술 방식을 충실히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가장 본원적인 질문에로 소급하는 원체산문 고유의 이러한 논리전개 방식과 작문 기법은 저자만의 남다른 생각과 가치관, 지식 및 철학담론을 이끌어내는데 효율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5편 원체 산문을 통해 홍석주가 견지한 詩論과 名實論적 입장은, ``辭達``을 중시하는 그의 古文觀과도 공명하면서, 작품 자체에 빈번한 몇 가지 수사법으로도 표출된다. 問答文 형식은, 작품의 내용 전달력을 높이면서 핵심 논지와 주제를 전개시킨다. 논의 전개상 빈번하게 사용된 ``혹자 힐문[或曰]``은, 이전까지의 논의를 재검하고 구체적인 반론과 역전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저자가 내세우는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홍석주 원체산문이 지닌 이러한 修辭들은, 작품의 내용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빈번하게 사용된 다양한 인용ㆍ열거법, 대비ㆍ비유법 등과 더불어 현대 작문 기법으로 활용할 만한 방법론적 대안과 요소로써 주목할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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