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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문서학회> 고문서연구> 조선성종대(朝鮮成宗代)의 낙산사(洛山寺)관련 문서에 대한 분석 -세역(稅役)면제 문서와 사패(賜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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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종대(朝鮮成宗代)의 낙산사(洛山寺)관련 문서에 대한 분석 -세역(稅役)면제 문서와 사패(賜牌)-

Analysis of Documents Issued to Naksansa(洛山寺) Temple 洛山寺during Reign of King Seongjong(成宗), Joseon Dynasty: Documents for Tax Exemption and Sapae(賜牌)

카와니시유야 ( Kawanishi Yuya )
  • : 한국고문서학회
  • : 고문서연구 4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14년 02월
  • : 57-75(19pages)
피인용수 : 29건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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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洛山寺관련 문서의 사진, 판독문, 해석문
Ⅲ. 洛山寺관련 문서의 내용 검토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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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공문서는 사례 수가 워낙 적어 그 양식의 변천 과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조선초기의 사원 관련 문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成宗代에 洛山寺에 발급된 2점의 문서를 예로 들어 그 내용과 문서양식, 발급배경 등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그 문서 중 하나는 1470년(成宗원) 4월 洛山寺의 雜요와 鹽盆(製鹽하는 솥)稅를 면제한 것이다. 이 세역 면제 문서는 특이한 양식이지만, 그 기능으로 생각하면 世祖代의 免役敎旨의 맥을 이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의 문서는 1470년 6월 洛山寺에 노비 20명을 하사한 賜牌이다. 賜牌란 국왕이 노비나 토전을 사여할 때 사용하는 문서이다. 이 賜牌에는 洛山寺가 노비를 영원히 보유할 것을 인정하는 문언이 적혀 있는데, 이것은 문서가 발급된 후 10년이 지난 시기에 추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2점의 문서는 成宗先王睿宗願刹洛山寺睿宗의 명복을 빌 목적으로 발급한 것인데, 그 배경에는 당시 貞熹王后의 垂簾聽政과 院相制가 시행되고 있었고, 왕실 관계자들이 활발하게 사원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사회 정치적 조건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Due to the shortage of examples, there is little achievement focusing on how the style of official document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changed. Especially the number of the documents related to temple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s so small that there is almost no proper work on them. In order to develop such a situation, two documents issued to Naksansa temple are analyzed based upon its content, style, and background in this paper. One of the documents is to give an exemption from tax and labor for Naksansa Temple in April, 1470. This document is written by uncharted style which is considered to be based on the one us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世祖). Another one is a document written for providing 20 slaves for Naksansa temple in June, 1470. This document`s style is called Sapae which was used when King gives lands or slaves. This Sapae includes a passage saying that Naksansa temple was allowed to retain slaves forever. It is estimated to be written additionally 10 years after it issued. These documents were issued to mourn for the loss of the lives of King Yejong(睿宗). On the politics at that time, they were mainly managed by Empress dowager Jeonghui(貞熹王后) and ministers, and royal officials engaged actively in protecting temples.

ECN

ECN-0102-2014-900-001506447


UCI

I410-ECN-0102-2014-900-001506447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 등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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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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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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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시대 국왕의 비망기(備忘記)연구

저자 : 이근호 ( Geun Ho Lee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1-2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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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시대 비망기를 중심으로, 왕명의 전달과 체계 등을 살핀 연구이다. 조선시대에 비망기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단정할 수 없으나 중종대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선조대에 이르면서 거의 정착되었다. 이는 16세기 이후 공론정치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국왕의 입장에서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망기는 내시가 담당하는 承傳色이 주로 작성하며, 간혹 액정서 소속의 司謁이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작성된 비망기는 주로 승전색을 통해 승정원에 전달된 뒤 해당 관서에 하달되었다. 비망기는 대부분이 승정원에 내려지지만 備邊司등에 하달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주로 특정의 관서에 전달되는 내용이었다. 비망기로 하달된 명령은 그대로 국왕의 傳旨로 만들어져 내려지기도 하였다. 비망기는 대신이나 고위 관원 혹은 山林들에게 국왕이 별도로 내리는 돈유나 별유 등과 함께 다양한 政令을 전달할 때 이용되었다. 정령 중 비망기로 내려지는 사항은 다양하여, 주제별로는 왕실이나 인사 외교 군사 사법과 관련된 내용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활용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비망기가 조선후기 숙종대 이후에는 주요 정치적 사건에 활용되며 국왕의 입장에서 정국의 전환을 꾀하는데 중요하게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조선 후기에 비망기가 광범위하게 활용된 이유로, 비망기가 국왕의 의도를 잘 보여주며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비망기는 구전하교와 비교해볼 때 그 층위가 달랐다. 구전하교 역시 다양한 내용으로 내려졌으나, 조보에 반포하지 않거나 혹은 반포하지 말라는 지시가 구전하교로 하달되었다. 또한 비망기에 대한 후속 조치 등이 구전하교로 내려졌다. 인사의 경우도 구전하교는 그 대상 관직이 내시를 비롯해 하위 관직이었고, 비망기는 그 보다는 당상관 이상을 대상으로 하였다. 비망기는 조선시대 다양한 왕언의 체계 중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된 경우였다고 판단된다. 이는 비망기의 성격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언에는 교문, 윤음, 비답, 판부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 중 교문과 같은 경우는 국가의 문한 제도라는 틀 속에서 작성되었기에 절제된 언어로 작성되어 국왕의 세밀한 심정까지 전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비답은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간결하고 신중해야 하였다. 판부는 정형성을 갖고 있기에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기에 유효한 수단은 아니다. 이에 비해 비망기는 政令을 하달할 때 국왕의 의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조선시대 사송(詞訟)재판의 두 양태 -해남윤씨가 소장 결송입안(決訟立案)을 중심으로-

저자 : 한상권 ( Sang Kwon Ha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31-5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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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소송사례는 사적 소유권의식과 소유권이 침탈당하였을 경우, 소송과 재판을 통해 권리관계를 회복하려는 권리의식이 전통사회에서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민사소송인 詞訟의 판결문인 決訟立案은 당시 사람들이 소송을 권리구제, 분쟁해결 수단으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해남윤씨가 고문서자료 가운데 두 건의 決訟立案이 현전한다. 민사와 형사가 구분되어 詞訟이 진행된 재판양태를 보여주는 고문서자료인 「1716년 결송입안」(결송입안B)은 訟官인 해남현감이 당사자주의와 쌍방심리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객관적·중립적인 입장에서 소송을 지휘하고, 증거문기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림으로써, '私權을 보호하고 이에 곁들여 사법질서의 유지와 분쟁의 해결에 이바지 한다'는 민사소송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였음을 보여준다. 반면 민사와 형사가 병행된 형태로 詞訟이 진행된 재판양태를 보여주는 고문서자료인 「1686년 결송입안」(결송 입안A)은 해남현감이 피고와 증인에게 拷訊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판결을 하는 등 직권주의 방식으로 소송을 처리하였음을 보여준다. 전통시대는 법의 중심가치가 명분확립에 있었으므로 송사를 판결하는데도 시비곡직을 가리는 법률적 관점보다는 권선징악이라는 도덕적 관점이 우선시되었다. 법의 객관적이며 엄격한 적용을 보여주는 '결송입안B'의 재판양태보다는 예교상의 倫常을 기준으로 송사를 판단한 '결송입안A'의 재판양태가 훨씬 친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로 들어오면서 신분제가 해체되고 평등사회가 도래하면서 형벌의 경중을 결정하는 기준이 신분관계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되는 생각이 일반화되었다. 1895년 3월 이후 재판을 民事와 刑事로 구분하여 처리한다는 새로운 원칙이 수립됨에 따라 '결송입안B'에서 보여준 재판양태가 민사재판의 일반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는 반면, '결송입안A'에서 보여준 재판양태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3조선성종대(朝鮮成宗代)의 낙산사(洛山寺)관련 문서에 대한 분석 -세역(稅役)면제 문서와 사패(賜牌)-

저자 : 카와니시유야 ( Kawanishi Yuya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57-75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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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공문서는 사례 수가 워낙 적어 그 양식의 변천 과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조선초기의 사원 관련 문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成宗代에 洛山寺에 발급된 2점의 문서를 예로 들어 그 내용과 문서양식, 발급배경 등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그 문서 중 하나는 1470년(成宗원) 4월 洛山寺의 雜요와 鹽盆(製鹽하는 솥)稅를 면제한 것이다. 이 세역 면제 문서는 특이한 양식이지만, 그 기능으로 생각하면 世祖代의 免役敎旨의 맥을 이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의 문서는 1470년 6월 洛山寺에 노비 20명을 하사한 賜牌이다. 賜牌란 국왕이 노비나 토전을 사여할 때 사용하는 문서이다. 이 賜牌에는 洛山寺가 노비를 영원히 보유할 것을 인정하는 문언이 적혀 있는데, 이것은 문서가 발급된 후 10년이 지난 시기에 추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2점의 문서는 成宗先王睿宗願刹洛山寺睿宗의 명복을 빌 목적으로 발급한 것인데, 그 배경에는 당시 貞熹王后의 垂簾聽政과 院相制가 시행되고 있었고, 왕실 관계자들이 활발하게 사원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사회 정치적 조건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4정조대 전교축(傳敎軸)을 통해 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의 문서 등록(謄錄)체계

저자 : 명경일 ( Kyung Il Myung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77-11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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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최근에 承政院日記 의 문서 등록 체계를 보여주는 자료인 傳敎軸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승정원의 출납 문서가 어떤 과정을 거쳐 承政院日記 에 등재되었는지 밝히는 내용이다. 매일의 承政院日記 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일자와 날씨, 승지와 주서의 좌목, 국왕의 위치와 經筵·常參의 시행 여부를 기재한 부분이다. 두 번째는 승정원에서 출납한 문서를 베껴놓은 부분이다. 세 번째는 국왕이 참석한 의례 또는 신료를 인접하는 자리(筵席) 등에서의 국왕과 신하의 언동에 대한 기록이다. 첫 번째 와 두 번째 부분은 당일 입직했던 주서가 등재했고 세 번째 부분은, 해당 연석에 입시했던 주서가 각각 맡아 등재했다. 승정원 출납 문서 및 주서의 草冊을 謄錄하여 承政院日記를 편찬하는 작업은 실시간 또는 매일 단위로 진행 된 것이 아니었다. 정조대에 承政院日記 은 한 달 단위로 편찬 되었는데, 주서는 맡은 분량의 일기를 다음달 20일 전까지 꾸며서 납부(修納)해야 했다. 承政院日記 가 일정한 주기에 따라 편찬되었기 때문에 승정원에서는 기록물의 중간 관리 방편으로 매일 傳敎軸을 만들었다. 즉 전교축은 承政院日記를 편찬하기 위해 만든 문서철로서, 편철된 문서의 순서가 같은 날 承政院日記 의 등재 순서와 일치한다. 또한 전교축은 문서를 承政院日記 에 등재할 때 일어나는 기록의 형태 변형까지 반영하고 있다. 즉 승정원의 문서철인 전교축의 형태 역시 承政院日記 의 문서 등록 구조에 맞추어 편철했던 것이다. 또한 전교축은 承政院日記를 편찬하는 기간 동안 원 문서가 갖고 있는 고유 가치를 보존하여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이와 관련한 전교축의 역할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현용문서의 역할이다. 둘째 역할은 원 문서에 담긴 정보를 보존하여 필요에 따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셋째 역할은 승정원 이외에 여타 관아의 기록물 생산에 자료를 제공하는 왕명 기록의 집합 소 같은 역할을 했다.

5조선후기 실록의 세초 기록물과 절차

저자 : 조계영 ( Gye Young Cho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117-14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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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후기에 실록을 찬수하고 인출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종이를 洗草의 시각에서 고찰한 것이다. 즉 세초되었던 종이라는 기록의 매체를 통해 실록의 생산과 관리에 대해 조명한 것이다. 실록의 찬수와 인출은 실록청 아래 설치된 '①산절청→ ②찬수청→ ③교정청→ ④교수청'의 순서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조선후기에 실록을 춘추관에 봉안한 후 세초하였던 기록물은 실록청의 작업 과정에서 나온 ①¹시정기를 비롯하여 ②¹初草·③¹中草·④¹初見印出·④²再見印出에 사용된 종이이다. 본 논문에서 새롭게 밝혀 낸 것은 산절 결과인 ①°出草의 형태와 인출을 위해 大粉板에 베껴낸 ④°正書의 존재이다. 이들은 세초 기록물은 아니지만 실록의 편찬 과정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하였다. 선행연구에서는 세초를 마친 휴지는 조지서로 보내져 재생되었다고 하였으나, 본 논문에서는 차일암에서 紙匠과 洗草軍에 의해 세초된 휴지는 호조로 옮겨져 災傷休紙로 비축되었다가 활용되었음을 밝혔다.

6조선후기 궁방(宮房)의 등록(謄錄)작성과 고문서의 등서(謄書)실태 -『용동궁등록(龍洞宮謄錄)』,『용동궁공사책(龍洞宮公事冊)』의 기초 분석-

저자 : 조영준 ( Young Jun Cho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143-171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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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조선후기에 각 宮房에서 생산한 謄錄과 거기에 등서된 고문서에 대해 고찰하였다. 특히, 조선후기 왕실의 조달기관 중의 하나였던 龍洞宮의 사례를 위주로 기초적인 분석을 수행하였다. 조선후기에 기록된 여러 가지 유형의 등록 중에서 궁방의 등록은 특히 圖署牌子를 비롯한 몇 가지 고문서를 주요 대상으로 하여 등서한 자료이다. 용동궁의 등록에 수록된 고문서의 주요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고문서의 등서 양상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또한 작성자, 작성 주기, 원본 문서 등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궁방 등록의 등서 원리와 특징을 엿볼 수 있었다. 이로써 일부 자료를 발췌하여 활용하는 방식이 아닌, 전체 자료의 DB화를 통한 분석 방법론을 적용해 볼 준비가 충분히 갖추어진 셈이다.

7경주최씨의 용산서원(龍山書院)운영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저자 : 안승준 ( Seung Jun A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173-20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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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경주 이조 마을 경주최씨 崔震立(1568-1636) 종가 및 龍山書院소장의 고문서 분석을 통해 최씨 가문 고유의 도덕적 전통이자 가문 경영 전략,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원과 그 전개과정을 연구한 것이다. 그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家訓'으로 대표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校洞의 최부자집 만이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조 마을의 최씨 문중 구성원들이 용산서원 운영과정에서 생겨난 '경험의 소산물'이었다. 일종의 기부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용산서원 원납전(願納田) 기부 관행, 형제간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의장계(義莊契) 운영이 바로 그것이다. 즉 儒家가문에서 사회적 책임은 부모와 가족, 그리고 친족 공동체 운영 과정에서 발현되는 것이었다. 둘째, 최씨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 경제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유지했던 최씨가 그들의 소유 노비이거나 소작인 등 지역 주민과의 타협과 소통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최씨가의 '가훈'은 최씨가 노비 소작인 등 이웃들과의 반목, 살인 직전까지 가는 치열한 갈등을 겪고 난 뒤에 찾은 해법이었다. 셋째, 용산서원의 別庫운영에서 나타난 빈민구제 의식이다. 용산서원 조사위원회(査핵所)에서는 대부분 하층민인 채무불이행자의 사유를 조사, 확인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탕감(蕩減)하거나 면제해 주었다. 요컨대 용산서원은 先賢奉祀, 자제 교육이라는 양대 기능 이외에 금융 및 빈민구제 기능을 동시에 행한 서원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8조선후기 충청도 서해안 지역 상업 활동의 사회적 의미 -홍성군 성호리 김녕김씨가 소장 고문서를 중심으로-

저자 : 김혁 ( Hyok Kim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44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pp. 209-24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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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30년 전 내재적 발전론자들에 의해 주목 받았던 19세기 성호리에서의 상업 활동을 최근 이곳에서 새로 발견한 고문서들을 통해 그 활동의 성격을 재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 고문서들은 김녕김씨의 가계 기록과 그들의 거주지인 성호리가 운영되던 향약, 절목, 완문 등 많은 규약문서들을 포함한다. 자료를 검토한 결과 다음의 세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 김녕 김씨 집안의 상업 활동은 이 집안의 긴 역사를 미루어 볼 때 비교적 단기간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집안은 17세기 이 마을에 들어온 이래로 주로 어업에 종사하였고, 18세기 전반까지 어업에서 얻은 이익을 토지 구입에 재투자 하고 雇奴를 통해 경작하게 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증식시켜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집안이 18세기 후반 들어 성호리가 포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상업 활동을 개시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상업은 우연이었다. 둘째, 이 집안이 수행한 상업 활동의 목적은 서구의 부르즈와(bourgeois)가 이윤을 자신의 사업에 합리적으로 투자하는 것에서 자신의 행동이 동기화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수익을 주로 자신의 신분을 개선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성호리에는 이윤을 창출하는 부르즈와가 없었지만 이윤을 창출하는 신분에 대한 선망은 있었다. 그 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추구 하였다는 관점에서 보면 유사하지만, 그 양태에서는 차이가 있다. 셋째. 성호리의 향약 조직이 반영되어 있는 규약문서인 향약문서를 검토한 결과, 성립 당시에는 상하계 중 안동김씨 집안이 상계에 속한 것 외에 성호리의 모든 집안이 하계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초엽 이 향약에 상계와 하계의 중간에 해당하는 副契를 창출한다. 부계는 이들의 신분 상승이 갖는 욕구가 머물러 선 곳이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표현된 최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부계는 경제적 기준에 의해서 분화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 기준에 의해서 하계와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곳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신분, 즉 자신에 대한 문화적 표현의 종착지였다. 김녕김씨는 애초에 자신을 “常宗”, 다시 말하여 '상민의 종중'을 자처하였지만, 이후에는 점차 상위적인 양반 문화를 더욱 활발히 모방해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당시의 신분은 돈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신분이 돈보다 더 큰 마술적인 힘이 있다는 은유로 설명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당시 사회에서 돈을 벌어 직첩을 사서 신분 상승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집안은 충분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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