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년 백촌강전투(白村江戰鬪)이후 일본열도로 건너간 백제 유민은 일본 열도의 율령 국가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정부에 중용된 자도 많지만 한편에서는 지방에 정착한 사람들도 많이 존재했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문헌 기록에 남는 근강국(近江國)(자하현(滋賀縣)) 포생군(蒲生郡)의 유적들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에 남겨진 「귀실집사묘비(鬼室集斯墓碑)」나 석탑사삼층석탑(石塔寺三層石塔)은 동 시대의 것은 아니지만 백제 유민의 기억에 관계된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동 시대의 유적으로서 사원유적이 중요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석탑사(石塔寺)의 근처에 위치하는 기전(綺田)[카바타]폐사(廢寺)가 백제 유민과 관계된 사원이라고 추측하였다. 이사원의 창건와(創建瓦)인 「호동식(湖東式)」軒瓦는 일본열도에서는 특이한 문양을 갖고 있고, 새롭게 한반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그 기점이 되는 사원이 근강(近江)[오오미]국애지(國愛知)[에치]군(郡)의 경야탑(輕野塔)ノ총(塚)[가루노토오노츠카]폐사(廢寺)이며, 애지군(愛知郡)의 유력자인 의지진씨(依智秦氏)[에치하타우지]로 추측되고 있다. 의지진씨(依智秦氏)는 백촌강(白村江)에서 활약한 박시전래진(樸市田來津)[에치노타쿠츠]를 배출했으며 백제 유민과도 접점을 가지고 있다. 이 의지진씨(依智秦氏)의 사원(寺院)과 기전폐사(綺田廢寺)가 기와에서 관계가 인정되는 것은, 5세기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에 도래한 사람들이 7세기에 새로운 도래인의 정착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오래된 도래인이 기술이나 지식을 갱신하기 위해 새로운 도래인의 수용에 주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백촌강(白村江)에 참전한 일본 열도의 호족들이 귀국 후에 사원조영을 했다는 이야기는 『일본령이기(日本靈異記)』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유명한것이 비후국삼곡군(備後國三谷郡)(광도현(廣島縣))의 대령(大領)이 백제계 승려인 선사홍제(禪師弘濟)와 함께 귀국하여 삼곡사(三谷寺)[미타니데라]를 건설한 이야기이며, 그 무대라고 생각되는 三谷寺의 수막새와 전적기단(塼積基壇)이 그 증거라고 생각된다. 비슷한 사례는 각지에 더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문헌에 의해 판명된 사례로는 단마국조래군(但馬國朝來郡)(병고현(兵庫縣))의 신직(神直)이 대 신라 전쟁에 종군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에 대해, 현지의 법흥사폐사(法興寺廢寺)에서는 역시 한반도의 특색을 갖는 수막새가 출토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사례들은 결코 특수한 예가 아니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비슷한 사례는 더 많이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7세기 후엽은 일본 열도에서 사원 조영이 급속히 진행된 시기이고, 새로운 기술자의 증대가 전망되기 때문이며, 중앙의 대사(大寺)와는 다른 기와를 창건 시에 이용한 사원의 대부분은 이런새로 도래한 승려와 기술자를 받아들인 것으로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백제 멸망에 의한 새로운 도래인의 활동이 중앙 정부 이외에도 인정되며, 일본 열도의 문명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