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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AN - BAEKJE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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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5)~32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307
마한백제문화
32권0호(2018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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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제(百濟) 천도(遷都) 지명(地名) '지모밀지(枳慕蜜地)'와 속지명(俗地名) '모질매'

저자 : 박종희 ( Park Jong-hee )

발행기관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마한백제문화 3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5-4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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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枳慕蜜地'에서의 '枳(~支~只)'는 [*ki]~[*kΛ]~[*ko]의 변이 관계를 나타내고, '慕(~牟~馬)'는 [*mo]~[*ma]~[*mΛ]의 변이 관계를 나타내므로 '枳慕~支牟~只馬~古馬' 등은 이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음 기록은 '馬'를 '古馬'와 대응시키고 있다. 馬邑縣 本百濟古馬彌知縣 景德王改名 今遂寧縣(삼국사기 권36 잡지5 지리3). 위의 '馬'는 訓을 차용한 것이고, '古馬'는 音을 차용한 것이다. '馬邑'은 '大邑, 雄邑'을 의미하므로 '古馬'의 의미는 '大, 雄'과 같게 된다. 이로 미루어 '古馬~只馬~枳慕~支牟' 등의 의미도 '大, 雄'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중국측 사서에는 '固麻'를 '格們'의 전음으로 본다. '격문(格們)'이란 '도회지(대도시, 대처)' 또는 '서울' 즉 수도(首都)를 가리키는 것으로 '固麻'를 비롯해서 '枳慕~支牟~只馬~古馬' 등은 '大'의 의미를 갖는다.
'枳慕蜜地'의 후행 요소 '蜜(密)地'는 [*mΛlj-ti]로 재구할 수 있다. 이때 [lj]가 모음화하면 [*mΛj-ti]가 되므로 '蜜地'는 '彌知[*mΛj-ti]'와 동음성을 보인다. 이것은 고대국어 한자음에서 '未, 米, 彌' 등의 한자음이 중세국어와 같은 [mi/미]가 아니라 [mΛj/ᄆᆡ], [mij/믜], [məj/메], [maj/매] 등에 가까운 音(김무림 2015: 116-8)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知, 地, 遲, 至'의 고대국어 한자음은 모두 [ti/디]로 재구할 수 있다. [l/ㄹ]이 지닌 [+continuantclassic] 자질이 후행 모음의 자질과 이화를 일으키면 [t/]으로 변해 '彌里[*mΛj-li/ᄆᆡ리]'는 '彌知[*mΛj-ti/ᄆᆡ디]'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蜜(密)地~彌知~彌里~彌離' 등은 이음동의어 관계를 이룬다. 아울러 현대국어의 潮水名에서 '한매-한물, 두매-두물, 세매-세물'(도수희 2005: 176) 등과 같이 북방인 어청도에서는 '-매'이고, 남방인 흑산도에서는 '-물'인 점도 '買, 未, 米, 彌'와 '勿, 蜜(密)'의 고대 음가 및 관련성을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馬邑縣 本百濟古馬彌知縣에서 '彌知'가 '邑'으로 개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邑 = 彌知~蜜(密)地~彌里~彌離~密'이 된다. '彌里 鄕之小者'(遼史 卷116)라 한 것을 보면, '枳慕蜜地'의 일반적인 의미는 '大邑, 雄邑'이 된다. 시대에 따라 聚落의 규모가 커지거나 작아져 의미가 확장되면 首都, 城, 村(일어 mura), 要塞 등의 의미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枳慕蜜'과 속지명 '모질매'의 음운론적 관련성은 첫째, 어두 음절에서의 도치 현상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고지명 표기에서의 도치(臨津縣 本高句麗津臨城 景德王改名 今因之(三國史記 地理 二) 현상은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도수희 1975: 61). 두 번째는 '-蜜(密)'과 '-매'의 음운론적 관련성이다. '-蜜(密)'의 고대 한자음은 [*mΛlj]([*ᄆᆞᆯ])~[*mΛj]([*ᄆᆡ])로 재구되며, 그 의미는 '邑'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枳慕+蜜/慕枳+蜜'의 구성을 이루어 '大+邑'의 의미를 갖는다. 세 번째는 k-구개음화와 관련된 것이다. 전설 고모음 앞의 연구개 파열음이 동일 환경의 경구개-치경 파찰음과 음향적으로 유사해서 청자들이 쉽게 혼동한다는 사실(Guion 1998)은 밝혀진 바 있다. 연구개음의 구개음화는 단일한 음 변화에 있어서 조음적 요인 및 음향적·인지적 요인이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박종희·권병로 2011). [ʧ]와 비슷한 스펙트럼 정점의 진동수를 가지는 전설 고모음 앞의 [k]는 인지적으로 [ʧ]와 자주 혼동(Guion 1998)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인지적 혼동은 고대인들도 현대인과 같은 양상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국어에서 '枳慕([*kimo])'는 [*ʧimo]와 인지적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여기에서 음절이 전도되면 '慕枳([*moki])' 또는 [*moʧi]가 되는데, 이들 중에서 후자인 '慕枳([*moʧi])'가 현재 이 지역의 속지명 '모질매'로 전승되었다. '枳慕蜜地'로 천도했다는 기록(觀世音應驗記)은 지금의 익산 왕궁터가 위치한 현재의 '모질매'(大+관형격 ㄹ+邑) 지역으로 천도했음을 직접 증언해 주고 있다.


'枳慕密地' was the well known place name where the King Mu of Paek Je Dynasty had trnsferred the Capital from PuYeo.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investigate the phonetic value of the several Chinese characters in the Old Korean relating with this place name. In general '枳(~只~支)' represented the variants which had the phonetic value of [*ki~*kΛ~*ko] and 慕(~牟~馬) represented the variants which had the phonetic value of [*mo~*ma~*mΛ]. Therefore I would presume that '枳慕~支牟~只馬~古馬' etc. had been used as a different transcriptions at the old times. Among these, '古馬彌知' was correspondent with '馬邑' in the place name reformed by the King Kyung Deok at the time of Unified Sylla Dynasty. In this case '馬' represented the meaning of 'big' or 'large' which modified the following noun '邑'(town, city) and so '馬邑' was intended to record for the meaning of a 'big town'. According to this analysis I would like to interprete that '古馬彌知' was used to represent 'a big town/city' or 'a large community'.
In the Chinese records '固麻' was correspondent with Old Korean '古馬' and then it referred to '格們' in the Manchuria historical records. At the Keum Dynasty, '格們' meaned to 'a big town'. So I should ascertain that they all had the same meaning of 'big' or 'large'.
'密' could be reconstructured as the [*mΛlj/*milj/*ᄆᆞᆯ/*믈] which was the same as the phonetic value of '彌, 未, 米' etc. Because [*mΛlj/ᄆᆞᆯ] had experienced a vocalization to [*mΛj/ᄆᆡ] and then it became to [mæ/매] by the monothongization. Vowel harmony variants [*milj/믈] was changed to [*mi] by [j] deletion or [*mi] by [i] deletion. '地, 知, 遲, 至' etc. could be also reconstructured as [*ti/디] which was historically changed to [ci/지] by the palatalization in Modern Korean. The feature [+continuantclassic] of the [l/ㄹ] would be dissimilated with the following vowel feature [+continuant] and then [l/ㄹ] should become to [t/ㄷ] having a feature [+continuant]. Therefore '密地~彌知~彌里~彌離' etc. could be composed of synonyms. These variants like [mΛj~mij~mi~mΛ~mi] and [mæ] were respectively distributed according to their regional and social situation. For example the name of tides was divided into two group depending on the location of South and North. In the South '한물, 두물, 세물, …' were widely used on the other hand '한매, 두매, 세매, …' were used in the North. The different forms of '물' and '매' were used at present. The '물' was originated from the '密' and '勿' which had the same phonetic value as that of '水/water'. On the other hand the '매' was originated from '彌, 未, 米, 買' which had the same phonetic value [*mΛj]. These synonymous '密地, 彌知, 彌里, 彌離' etc. had the same meaning as a '邑, 城, 村, 首都, 聚落'.
The frequency of a velar and a palatal-alveolar was more similar before a front vowels other than back vowels. Moreover in the casual speech style the frequency of a [k] and [c] was appeared more similar before a front high vowel other than non-front high vowels. The acoustic similarities of [k] and [c] would be showed up their perceptive similarity. Consquently a hearer seemed to confuse [t] with [c] easily before a front high vowels. '枳慕[*kimo/기모]' was frequently confused with the [*cimo] and would become to [*moci] by the syllable inversion of [*cimo] in Old Korean. The result of syllables movement still survive within the modern place name '모질매' where the site of the Paek-Je Royal Palace was located at Ik-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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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의 고도, 익산의 도성과 왕궁

저자 : 이신효 ( Lee Shin-hyo )

발행기관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마한백제문화 3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47-8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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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古都)는 옛 도읍으로서 한 나라의 수도 또는 도성을 의미한다. 익산에는 백제 말기 왕궁과 사찰, 왕릉, 산성 등 다른 어느 도시 보다 더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궁 주변에 도시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도시를 방어할 수 있는 도성(나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백제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백제 고도 익산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무엇 보다 먼저 백제 말기 도시와 도성의 확인이 요구된다.
이 글에서는 최근 왕궁리유적 주변에서 확인된 소규모 발굴 조사와 기 조사된 자료를 검토하여 백제 말기 도시의 존재 가능성과 도성의 범위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주변의 유적 분포 상황과 함께 백제와 신라에서는 부여를 제외하고는 도성을 축조하지 않고 자연지형과 산성이 대신하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았다.
또한 백제 왕궁의 배치를 통해 공간 활용 문제를 살펴보았는데, 왕궁의 남측 공간은 제1동서석축과 제2동서 석축 공간은 왕이 의례나 의식, 정무를 보는 외조로 보고 제3, 제4 동서석축 공간은 왕과 왕의 가족이 생활하는 내조로 파악하였다.
왕궁의 담장 형태에 대해서는 석재 상부에 'ㄴ'자형으로 가공된 돌이 수적으로 적고 현재 남아 있는 2단의 석재 상면 형태가 판축보다는 돌을 놓기에 더 적당한 점 등을 들어 2단 석재 위에도 상부까지 석축을 한 것으로 보았다.
왕궁은 일정 기간 사용 후 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사용하기 위해 사찰로 변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후원은 집수와 급수 목적의 U자형수로가 오락과 유희를 위한 곡수로로 변화된다고 보았다. 또한 왕궁리유적이 왕궁으로 사용되던 시기에는 익산 천도가 이루어졌으며, 사찰로 운영되던 과정에서는 별도로 활용된 것으로 보았다.


An ancient capital means the capital city of a kingdom that existed long ago. Iksan has many relics from the last years of the Baekje Kingdom including those of the royal palace, Buddhist temples, royal tombs, mountain fortress walls, and so forth. Very few of these can be found in other cities. Nevertheless, there has been a tendency not to acknowledge Iksan as the capital of Baekje because some experts claim there was no evidence of a city and any capital fortress wall (Naseong city wall) that could defend the palace in old Iksan. This is why it is necessary to clearly define the character of Iksan as the ancient capital of Baekje Kingdom. It is important to prove that there was a city and a capital fortress wall around it.
In this paper, I examined the outcome of a small-scale excavation survey performed recently near the Wanggung-ri Site and reviewed the data of previous research to look into the possibility of the existence of towns and the scale of the capital city in the last years of Baekje Kingdom. From the study, it could be presumed that there was a great possibility of utilizing the natural topography and mountain fortress walls instead of constructing capital fortress walls during Baekje and Silla Kingdoms. The only exception is the case of Buyeo as evidenced from the distribution of historic relics around Wanggung-ri and Mireuksa Temple Sites.
The present paper further investigated the utilization of space in the royal palace of Baekje by studying the pattern of its buildings. From the investigation, it was learned that the southern part of the palace between the first and second sections of east-west stonework was used for the purpose of courtesy, ceremonies, and political affairs by the kings. The space between the third and the fourth sections of east-west stonework seemed to have been the living quarters for the kings and royal families.
As for the style of walls in the royal palace, it would be reasonable to assume that additional stonework was undertaken up to the top beyond the two-step stone, judging from the facts that a small number of L-shape processed stones remain in the upper part of the stonework for the walls. Also the shape of the remaining two-step stones' upper surface seems to be more suitable to accommodate stones than for placing hardening and heaping of earth(版築). Backfill stones up to the upper part of the two-step stonework in the east and west side of the walls still remained.
After being used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the palace became a Buddhist temple for the bliss of King Mu. In this process, it is thought, U-shaped water way intended originally for gathering and supplying of water was transformed into a curved water lane for recreation and entertainment. It is also believed that the transfer of the capital to Iksan was completed when Wanggung-ri Site was used as a royal palace. Then Iksan served for another purpose when it repurposed as 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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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전북지역 마한·백제 사주식 주거 구조의 양상

저자 : 조성희 ( Cho Seong-hee )

발행기관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마한백제문화 3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85-12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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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전북지역에서 조사된 마한·백제 주거유적 가운데 사주식(四柱式)의 구조 속성을 가진 주거지의 분포와 양상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전북지역은 마한과 백제의 古土로써, 두 세력집단이 공존한 정치·문화적 점이지대였기 때문에 주거문화의 경우에서도 상호교류를 통한 건축기술을 습득하거나 수용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사주식 주거지는 마한의 특징적인 주거양식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백제(계)의 수혈주거지에서도 사주식 구조 속성이 확인되며, 분포범위 또한 경기도와 경남 일부 지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전북지역에서 사주식 주거지가 가장 성행하는 권역은 서부평야권역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김제, 부안, 고창지역의 사주식 주거지에서는 백제계 주거문화 속성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어 출현시기에 있어서도 가장 이를 것으로 생각된다. 점토제부뚜막에서 판석재부뚜막으로 노 시설의 변화가 나타나고 삼족기, 고배, 단경호 등 백제의 유물이 출토되는 백제(계) 사주식 주거지는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부평야지역에서 출현이 감지되며, 미륵산-모악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통해 정읍지역까지 확산되고 일부는 노령산맥을 넘어 섬진강 유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비사주식 주거지와 사주식 주거지 모두 전북지역 마한의 재지문화이며 백제계 주거 요소를 수용하면서 사주식 주거지 내에서 노 시설과 출토유물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거지 내 사주의 설치 면적은 총 주거면적의 20%∼40% 내의 범위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주거지의 면적 증가율과 사주의 설치면적은 무관하며, 오히려 중대형의 주거지로 갈수록 사주의 면적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북지역의 사주식 주거지는 전북 서부평야지역을 중심으로 확산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심 성행시기는 기원후 3∼5세기 대이며, 백제계 주거문화의 속성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 김제·부안·고창지역의 사주식 주거지가 가장 이를 것으로 생각된다.
사주식 주거지의 발생과 사주 축조기술에는 당시의 문화상과 정치체의 영향력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취락 내 거주민의 선택권에 의해 받아들여져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고 있다.


Attempts are made in this paper to take a overview over the distribution and patterns of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s as investigated from the relics of the Mahan/Baekje residential districts in Jeonbuk province. Jeonbuk area is the old land of Mahan and Baekje where the two groups of forces coexisted like a political and cultural transition zone in which, it is assumed, they learned or accepted the architectural technology from each other through mutual exchanges in the area of residential culture. Although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 has been recognized as a characteristic residential style of Mahan, the characters of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 are found even in Baekje's pit-type settlement, and the distribution is extended upto Gyeonggi and part of Gyeongnam provinces.
The western plain area in Jeonbuk, above all, is believed to be the one where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 was most frequently practiced. Particularly in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ites in Gimje, Buan and Gochang areas, the characteristics of Baekje-style dwelling culture are seldom confirmed, suggesting that its time of appearance is the earliest among them. There was a change in kiln facilities from clay-made fireplace to flagstone one. As for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 of Baekje style with which such relics of Baekje as tripod vessel, high-heeled cup, pot-belly jar, etc. were unearthed, it begins to appear in the northwest plains with Iksan in center. It is estimated that the structure of that style had spread upto the Jeongeup area through the traffic route of Mireuk-Moak Mountains and some of the style advanced even to the Seomjin River basin beyond the Noryeong Mountain Range. In other words, it can be presumed that both the four-pillar-type and the non-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s must be a residential culture of Mahan in Jeonbuk province and that there were changes in kiln facilities and excavated artifacts within the four-pillar-type residential area which accommodated dwelling elements of Baekje style.
The installation size of the four-pillar-type structure in residential area is mainly 20% ~ 40% of the total area. Therefore, there seems no relation between the increasing percentage of the residential area and the installation size of the four-pillar-type structure, and it is shown that the size of the four-pillar-type structure decreases as the dwelling site grows to middle and large size.
It is thought that the four-pillar-type residential area in Jeonbuk province had spread around the western plains area. It is also estimated that the four-pillar-type structure was most prevalent from the 3rd to the 5th century AD. It is believed that the four-pillar-type residential structure in Gimje, Buan, and Gochang was the earliest one since the characteristics of Baekje residential culture were hardly recognized there.
It is therefore judged that the development and construction technology of the four-pillar-type residence might have reflected the influences of the culture and politics of that time, and we do not exclude the possibility that such type of residence must have been accepted and built by the choice of residents in the sett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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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엄사 서오층석탑 부조 신장상 연구

저자 : 윤여창 ( Yoon Yeo-chang )

발행기관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마한백제문화 3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21-14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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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신장상이 부조된 불탑 중에서 화엄사 서오층석탑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통일신라에는 탑을 장식하는 부조상으로 신장상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금강역사를 비롯한 다양한 상들이 부조되었는데. 화엄사 서오층석탑은 하층 기단에 십이지상, 상층 기단에 팔부중상, 1층 탑신에 사천왕상의 순서로 신장상을 배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화엄사의 서오층석탑은 탑의 양식과 구조 및 탑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9~10세기의 승탑 부조상과의 비교 등을 통해 볼 때 9세기 말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에는 華嚴宗의 華嚴神衆信仰의 영향으로 神將의 의미나 비중이 커졌으며, 이에 따라 사천왕, 팔부중, 십이지 등 다양한 존상이 탑에 부조되었다. 화엄사 서오층석탑의 부조상 가운데 사천왕과 팔부중은 화엄경의 40위 신중이 표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십이지신은 화엄신중 내에 포함 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신라 왕릉에 배치되던 方位獸와 같은 의미로 탑에 부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화엄사 서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퍼져있던 화엄신중신앙을 탑 부조상을 통해 표현한 탑으로서 9세기 말 불교신앙의 모습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하층기단과 상층기단, 탑신에 새겨진 십이지-팔부중-사천왕 부조는 불교의 세계관인 수미산의 형식을 축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five story west stone pagoda(西五層石塔) of Hwaeom temple(華嚴寺) among the Buddhist pagodas with buddhist guardians(神將像) relief that is common in Unified Shilla era. In the Unified shilla era Buddhist guardian relief began to appear as the relief to decorate the pagoda, and various iconographies, including Vajrapani, and the five story west stone pagoda of Hwaeom temple attracts attention because it places Guardian relief in the order of Twelve Zodiac Animals(十二支) in the lower stylobate, Eight Glasses of Divine Beings (八部衆) in the upper stylobate, and the Four Heavenly Kings(四天王)in the stone body on the first floor.
The five story west stone pagoda of Hwaeom temple is believed to have been built around the end of the 9th century by comparing the style and structure of the pagoda and the reliquaries found inside the pagoda, and the stupa relief of the 9th and 10th centuries. In the 9th century,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buddhist guardians was increased with the influence of faith in Avatamsaka Buddhist Guardians(華嚴神衆信仰) of Avatamsaka school(華嚴宗),and as a result, various iconographies such as Four Heavenly Kings, Eight Classes of Divine Bings, and Twelve Zodiac Animals have relieved on pagoda. Among the relief of the five story west stone pagoda of Hwaeom temple, the Four Heavenly Kings and Eight Classes of Divine Bings are supposed to represent the 40th Deity-Assemblies(神衆) of Avatamsaka SHtra(華嚴經),but according to the fact that the Twelve Zodiac Animal Deities are not included in Avatamsaka Deity-Assemblies(華嚴神衆), they are believed to have been relieved on the pagoda in the same sense as the azimuth animal(方位獸)were placed in Shilla royal tombs in the Unified Shilla era.
As such, it can be said that the five story west stone pagoda of Hwaeom temple is a pagoda that expresses faith in Avatamsaka Buddhist Guardians(華嚴神衆信仰) widely spread in Unified Shilla era through pagoda relief, and that the relief of the Twelve Zodiac Animals(十二支)-Eight Classes of Divine Bings(八部衆)-Four Heavenly Kings(四天王) engraved on the upper stylobate, the lower stylobate, and the stone body as well as showing Buddhism faith at the end of the 9th century is a reduction of the form of Sumeru(須彌山), that is, the world view of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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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익산 쌍릉(대왕릉 : 사적 제87호) 발굴조사 개요

저자 : 이문형 , 김중엽

발행기관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마한백제문화 3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47-160 (1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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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익산토성(사적 제92호) 발굴조사 개요

저자 : 박동범

발행기관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마한백제문화 3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61-177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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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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