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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es in Philosopy East-West

  • : 한국동서철학회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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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5-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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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4)~93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484
동서철학연구
93권0호(2019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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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실재론적 진리에서 실천적 정당화로 - 인간의 삶과 실천을 중심으로 -

저자 : 권수현 ( Kwon Su-hyeon )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간행물 : 동서철학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3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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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실재론적 진리' 개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과 실천을 위한 진리이론으로서 상호이해 과정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상호주관적 진리' 개념을 재조명한다. 진리의 정의와 기준에 관한 견해에 따라 진리이론은 크게 '진리 대응론'(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진리 연관론'(coherence theory of truth) 그리고 '상호주관적 진리론'(intersubjective theory of truth)으로 구분될 수 있다. 진리 대응론의 일종으로 에이어의 진리이론을 살펴보면서 논문은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그의 진리이론이 진리 문제를 사실 차원에 한정시키지 않고 실천적 차원으로 확장하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진리이론이 지닌 실천적 의의에도 '진리'와 '정당화'(justification)라는 두 층위의 타당성 요구를 인정하지 못했다는 한계다. 특히 이 한계는 분석명제나 경험명제가 진리치를 갖는 반면에 가치진술은 경험적 사실을 포함하는 진술로 전환될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 있는 진술로 간주된다는 가정과 연관이 있다. 이에 따르면 윤리학의 객관적 타당성은 기술적 영역에는 가능하지만, 순수 규범 영역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서 진리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맥락에서 재구성하며 실천적 인식에 대한 관심과 연결시킨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언어행위자의 참여'를 전제하는 의사소통적 행위이며, 의사소통적 행위자는 서로에게 타당성의 요구를 내 걸고 이 요구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산출한다. 행위 차원에서 진리를 규정하는 방식은 정당화 개념에도 적용되므로 '진리'와 '정당화'는 모두 타당성의 요구라는 점에서 그리고 의사소통적으로 합의된 이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진리가 경험의 확실성을 근거로 삼아 직접적으로 증명되거나 이론적 담론 과정에서 타당성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반면에, 정당화는 적절한 규범적 배경을 제시하거나 실천적 담론 과정에서 그 타당성의 요구를 만족시킨다. 사실에 대한 진리와 규범에 대한 정당화라는 이 두 타당성의 요구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결과물로서 우리의 삶과 실천을 위한 연대의 토대가 된다.


This paper sheds light on the intersubjective conception of truth which deviates from the realistic conception of truth and presupposes participation in the mutual understanding process as a truth theory for our life and practice. According to views on the definition and criterion of truth, the theory of truth can be largely divided into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coherence theory of truth' and 'interdependent theory of truth'. Looking at Ayer's theory of truth as a kind of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this paper points out two things: One is that his theory extended the truth problem to a practical level without limiting it to the factual level, and the other is the limitation in which it failed to recognize the demand for two layers of validity, namely truth and justification―despite its practical significance. In particular, this limitation is related to the assumption that while the analytical or empirical proposition has truth-value, the value proposition is considered a meaningful statement only if it can be converted into a statement containing empirical facts. According to this, the objective validity of ethics is possible in descriptive areas, but not in purely normative areas.
Beyond this limitation, Habermas reconstructs truth in the context of communicative rationality and links it with interest in practical recognition. According to him, truth is a communicative act that presumes 'participation of language actors'; and communicative actors make a demand for validity to each other and produce truth in the process of fulfilling this demand. The way in which truth is defined at the level of action also applies to the concept of justification, so 'truth' and 'justification' can be considered the same in that they are both a demand for validity and a communicatively agreed understanding. However, while truth is directly proven based on the certainty of experience or satisfies the demand for validity in the theoretical discourse process, justification provides an appropriate normative background or satisfies the demand for validity in the course of a practical discourse. These two demands of validity―truth about facts and justification of norms―serve as the result of communicative rationality as the basis of solidarity for our lives and pract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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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간사에 필연적인 사건은 존재하는가?

저자 : 백훈승 ( Paek Hun-seung )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간행물 : 동서철학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3-52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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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에 필연적인 사건이 존재하는가? 인간사에는 모든 일이 '우연적인' 일이며, 어떤 특정한 조건이 주어지는 경우에 어떤 일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의 '필연'이란, '조건적 필연'으로서, 이때의 '조건'이 주어지는 것 또한 우연이므로, 전체의 사건의 계열은 우연으로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연'의 세 가지 의미를 분석하는데, 첫 번째는 필연의 모순개념으로서의 우연이고, 두 번째는 '의도하지 않음'이라는 의미의 우연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예기치 못함'이라는 의미의 우연이다. 그런데 '우연'의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의미인, '의도하지 않음'과 '예기치 않음(못함)'은 '필연'과 반드시 대립하지는 않는 개념으로서, 인간사에서의 '우연한 사건'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필연'의 모순개념으로서의 '우연' 개념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Are there necessary events in human history? Every event is contingent in human history. We can say, of course, that some events happen necessarily, when determinate conditions are given. But 'the necessity' in this case, is a conditional necessity. And since these conditions are contingently given, the whole series of events become contingency. In addition, three meanings of contingency are to be differentiated, namely: 1) contingency as a contradictory concept of necessity, 2) contingency as 'to be without purpose', and 3) contingency as 'to be unexpected'.
The problem of 'contingent events' in human history, treated in this paper is essentially connected with '1) contingency as a contradictory concept of neces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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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아리스토텔레스의 리더십에 관한 연구

저자 : 김요한 ( Kim Jo-hann )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간행물 : 동서철학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3-75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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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에 대한 논의는 리더십을 어떤 관점에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리더십 연구는 무엇이 리더십인가라는 정의 문제를 촉발한다. 그러나 리더십의 정의 문제가 “무엇이 리더십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 리더십인가?”라는 문제에서 다뤄진다. 여기서 좋음은 도덕적으로 좋음과 유용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덕이 리더십 연구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리더십과 도덕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리더십은 권력을 중시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즘이 리더십 연구에서 더 선행되어야 할 요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리더십의 핵심이 도덕이라는 주장을 하려면 그 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야 한다. 이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 도덕과 리더십이 연관될 수 있는지를 다룬다. 철학적 근거 없이는 리더십은 그것이 유용성을 유발한다면 다른 모든 도덕적 가치들을 무시해도 좋다는 히틀러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총기획적 기예로서 리더십과 『정치학』에서 통치자가 총기획적인 제작자는 두 가지 근거에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리더십의 정의는 에우다이모니를 목표로 하는 총기획적 덕이 되어야 한다. 이 구조 내에서 리더십은 단순하게 효용성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들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리더십은 행복을 증진시키고 자기애를 갖는 참된 정치가를 생성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참된 정치가를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영웅적 리더십은 지배 욕망 실현과 명예추구라는 카이사르의 권력과 천상의 진리 추고와 아름다움에 대한 관조를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영혼의 결합체가 될 것이다.


The discussion of leadership depends on how one should define the concept of leadership. A study on leadership thus triggers the definition of what leadership is. But the definition of leadership is not addressed by the question: "What is leadership?", but rather: "What is good leadership?". The meaning of 'good' here means morally good and practically useful. Thus, morality seems to be the center of leadership research.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leadership and morality? The leadership which we generally think of emphasizes the concept of power. Thus, Machiavelism seems to be a more important factor in leadership research. But in order to claim that the core of leadership is morality, we have to find what its philosophical basis is. This study deals with how morality and leadership can be related. Without a philosophical basis, leadership raises Hitler's problem; that if the leadership is useful, it can ignore all other moral values.
With this problem I am going to deal with the most important concepts of Aristotelian leadership: first master art in Nicomachean Ethics, and master creator in Politics. According to Aristotle, the definition of leadership should be the virtues of planning for Eudaimonia. Within this structure, leadership can encounter moral values, not simply utility. Aristotle's virtue leadership can create a true politician who promotes happiness and loves self-love. We can call these true politicians heroes. His heroic leadership will be the union of Caesar's power of realizing ruling desires and pursuit of honor, and of the Christ's soul performing contemplation of the celestial truth and bea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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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주어-술어 이론의 존재론적 함의

저자 : 손윤락 ( Sohn Yun-rak )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간행물 : 동서철학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7-9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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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이다”를 의미하는 동사 einai로 연결되는 주어와 술어의 다양한 경우를 분석하여 그 용어들 혹은 존재자들(ta onta)의 종류를 구분하고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즉, 존재자들은 예컨대 '소크라테스'나 '사람'과 같은 실체와 '희다'나 '크다'와 같은 속성들로 구분되는데, 여러 가지 종류로 구분되는 속성들은 모두 어떤 주어의 술어가 될 수 있지만 실체는 그렇지 않으며, 그 가운데서도 개별자를 가리키는 제일 실체(protê ousia)는 언제나 주어 자리에 있지 결코 어떤 것의 술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존재자들을 실체-속성들로 구분하는 것은 그것들을 주어-술어들의 관계로 보는 것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논의를 “주어-술어 이론”이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주어-술어 이론은 『범주론』에 나타나는 존재론의 문법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든 언어상으로든 존재하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것들을 가리키는 이른바 “존재자들” 혹은 “진술 속에 사용된 용어들”(legomena)을 술어들(kategoroumena)로 보고 그것들을 성격에 따라 구분하고 그 다양한 쓰임들을 밝히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 논문은 이렇게 『범주론』에 나타나는 주어-술어에 관한 논의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존재론적으로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기 위한 연구로서, 그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강력한 존재론적 함의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주어-술어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 상의 자료들을 『범주론』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의 몇몇 구절과 함께 검토해볼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어-술어 이론이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서 제기된 하나와 여럿의 문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결책으로 읽을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범주론』에서의 실체 개념이, 이 텍스트에는 “질료”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존재론 전체에서 변화를 위한 수용자가 된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This paper is a study to answer the questions about what is the ontological implications of the “subject-predicate theory” in Aristotle's Categories, and I conclude that it has a fairly strong existential implication in terms of the criticism of Plato's theory of Idea. In Aristotle, “subject-predicate theory” is used to reveal the grammatical character of the theory of being that appears in the Categories. The theory is based on Aristotle's consideration of so-called “things”(onta) or the “words”(legomena) as “predicates”(kategoroumena), which classifies them by ontological characteristics and reveals their various uses.
Aristotle makes the following important points about the “things” in his Categories. He divides the “things” into substance and attributes, then he stresses that all the other things can be predicates of a subject, but a substance can not be the predicate of other things, and that the first subject, which refers to an individual, is always in the position of the given subject and never the predicate of something another. In other words, to separate the beings into substance and attributes is to consider them as a subject-predicates relationship, and thus I call these parts of Aristotle's “subject-predicate theory”.
In conclusion, Aristotle's subject-predicate theory, which appears in the Categories, can be read as his solution to the problem of “one and many” raised in Plato's Parmenides. And I point out that the concept of substance in the Categories becomes a receptacle for changes, even though there is no mention of “matter” in this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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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피론학파의 계속된 탐구는 가능한가?

저자 : 박승권 ( Park Seung-kwon )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간행물 : 동서철학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9-119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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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투스는 피론학파 회의주의자를 계속 탐구 중에 있는 자로 규정한다. 이 규정은 피론학파에 대한 일관된 이해의 혼란을 야기한다. 탐구 중에 있다는 것이 규정이라면 탐구의 목표인 진리의 발견이 불가능해 보이고, 판단유보를 통해 평정을 획득하는 피론주의자에게는 탐구가 필요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진리탐구가 평정 목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수행될 수 있다는 해석이 있지만, 이는 진리탐구가 이성의 요구라는 이념적인 구도만을 보여줄 뿐 실제적인 수행의 가능성은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다. 섹스투스의 탐구 개념을 진리 찾는 탐구와 논박하는 탐구로 구분하여 이해할 때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본다. 실제로 섹스투스는 탐구를 하나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논박하는 탐구는 진리 찾는 탐구와 달리 자기의 목표를 성취하는 탐구이고 일차적인 탐구인 진리 찾는 탐구를 계속 수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는 탐구이다. 이러한 해석을 통하여 피론학파의 계속된 탐구가 회의주의에 관한 설명 내에서 일관되게 이해될 수 있다.


Sextus Empiricus defines the Pyrrhonian skeptic as being in investigation. This definition makes a consistent understanding of the Pyrrhonian school impossible. If it is definition that he is staying on the process of investigation, it seems impossible to find truth, which is the goal of that investigation, and it seems that the investigation is not necessary for the philosopher who gains peace through Epochē. Some scholars try to solve these difficulties through the interpretation that investigation is not only aimed at Ataraxia. However, this shows only the ideological aspect of investigation as a demand of reason, but the possibility of actual execution is left unexplained. We can solve this problem when we divide the concept of investigation into 'investigation for truth' and 'investigation for refutation'. Actually, Sextus did not use inquiry in one sense. Unlike 'investigation for truth', 'investigation for refutation' is a quest to accomplish one's goal and to provide a basis for continuing the inquiry search for the truth, which is the primary inquiry. In this interpretation, Pyrrhonian 'staying on investigation' can be consistently understood within the account of skep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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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회적 감정으로서의 분노: 흄의 철학에 나타난 분노감정의 도덕적·친사회적 기능에 관하여

저자 : 양선이 ( Yang Sunny )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간행물 : 동서철학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1-14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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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흄의 철학에 나타난 분노감정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사회변혁의 역동적 힘이 될 수 있는지를 탐색해 보는 것이다. 흄은 18세기 상업주의 시민사회에서 능력과 취향에 따라 문화를 향유하면서도 어떻게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도덕 감정론을 통해 논하였다. 흄은 '자부심'과 '분노'와 같은 감정이 도덕적이고, 사회변혁적인 측면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흄에 따르면 인간이 사회적 투쟁을 하는 이유는 개인의 자연적 자기보존을 위해서 라기보다 사회적 인정을 얻음으로써 도덕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흄은 홉스적인 투쟁관념, 즉 인간은 오로지 자기 이해만을 추구하며 사회적 투쟁은 그러한 개인들 간의 자기보존 투쟁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리하여 흄은 『탐구』에서 정의가 요구되는 조건으로 홉스적인 입장을 수정한 '국민저항권'에 대해 논하였으며, 그 근거로서 '분노'를 든다. 흄이 말한 이 분노는 사회적 투쟁의 규범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이 사회적으로 실천적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무시 받거나 부정의를 경험하게 될 때 '분노'라는 감정이 인정투쟁을 촉발하는 심리적 계기가 된다. 흄은 분노가 효과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관습(규약)들이 정의의 규칙이 될 수 있는 시나리오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흄에게서 분노감정은 도덕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정의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The aim of this paper is to illuminate whether it can be a dynamic force of social change by analyzing the 'resentment' feelings in Hume's philosophy. Hume argues through moral sentimentalism how to become a moral being while enjoying culture according to his abilities and tastes in 18th century commercial civil society. Hume attempts to show that there are moral and social transformation aspects of passions such as 'pride' and 'resentment'.
According to Hume, the reason why humans struggle socially is to secure moral identity by gaining social recognition rather than for the individual's natural self-preservation. Hume opposes the Hobbes's concept of struggle, that man seeks only self-interests and that social struggle is nothing more than a self-preservation struggle between such individuals. In this sense, in the Enquiries, Hume talks about the right to 'national resistance,' which revised Hobbes' position as a condition that requires justice. The reason for this is 'resentment'. The 'resentment', Hume said, is intended to provide a normative basis for social struggle. In other words, when human beings are neglected or experience injustice in the process of socially pragmatic relations, resentment feeling is a psychological moment that triggers the struggle for recognition. Hume believes that in order for resentment to be effective, a scenario is needed where conventions can be the rule of justice. In this sense, resentment feelings can play an important role in Hume's moral philosophy as well as in social 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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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음악에서 공감의 문제 ; 칸트와 헤겔의 음악미학을 중심으로

저자 : 양희진 ( Yang Hee-jin )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간행물 : 동서철학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3-16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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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칸트와 헤겔의 음악 이해를 바탕으로 음악에서의 공감의 방식을 밝힌다. 먼저 이를 위해 헤겔의 『수난곡』에 대한 평가를 문제 삼는다. 흔히 우리는 작곡가가 슬픈 곡을 작곡했기 때문에, 그것이 슬프게 들린다고 생각한다. 헤겔에 따르면 이는 곡에 대해서 작곡가와 감상자가 일치된 정서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작곡가가 슬픔을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그 곡을 다른 감정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예수의 수난을 다룬 곡인지 모르고 듣거나, 기악곡처럼 선율만 들리는 연주곡의 경우, 우리는 작곡가가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정서로 이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작곡가와 공감의 정서를 갖지 못한다하더라도, 우리의 정서는 다른 감상자들과 공감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음악의 공감적 특이성을 칸트의 음악이론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그의 이론은 결국 공감은 감상자가 느끼는 보편적 감정임을 일깨워준다. 음악의 공감은 감상자 자신이 곡에 대해서 느낀 것과 같은 정서를 작곡가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느낄 것이라는 주관적 확실성의 감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두 철학자의 음악이론을 통해 구체적인 정서로 공감되는 방식을 제시한다. 연주곡에 노랫말을 첨가하거나, 아니면 청중이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시각 예술과 같은 다른 장르를 결합시켜 공연을 하거나, 곡 선율에 일정한 규칙성을 부여하게 되면, 감상자들의 정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갖게 된다. 물론 칸트와 헤겔의 음악적 공감에 대한 주장은 한계가 있지만, 오늘날 다양한 음악의 소통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기술의 발전으로 음악을 듣는 방식은 다양해졌다. 칸트미학은 음악의 영향력을 형식적으로 규명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감상자들 간의 자유로운 공유문화를 살펴보는데 도움을 준다. 한편 헤겔은 작곡가와 감상자사이의 공감만을 다루지만, 그것이 곡의 내용에 관한 공감임을 각인시켜준다. 이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현대 음악인들의 다양한 공연 문화, 소셜 미디어 활동을 이해할 수 있다.


This essay reveals the ways of sympathy in music based of Kant's and Hegel's understanding of music. To do this, I first make an issue of Hegel's evaluation of The Passion. We often think that the song sounds sad to us, because the composer wrote it sadly. According to Hegel, this means that there was a sympathy between the composer and the audience about the song. But we can feel the song with different emotions, even if the composer expresses sadness for it. In the case of a song that does not know whether it deals with the sufferings of Jesus or in the case of a piece of music with only melody like a musical instrument, we can enjoy it with a variety of emotions that the composer didn't anticipate. And even if we don't have sympathy with the composer, our emotions can be shared with other listeners. I try to explain this singularity of sympathy in music through Kant's theory of music. His understanding of music in the end reminds us that sympathy is a universal emotion felt by a listener. The sympathy of music is the listener's feeling of subjective certainty that everyone, including the composer, will feel the same emotion as he felt about the music. In this regard, I suggest a way to empathize with specific emotions through the music theory of two philosophers. If lyrics are added in music, the music performances are combined with other genres, such as visual arts and its melodies are regularly repeated, the emotions of the listeners have specific details. Of course, Kant's and Hegel's arguments for musical sympathy are limited, but they help to understand the various musical cultures of communication today. Technology advances the way we listen to music. Kant's Aesthetics is criticized for formally investigating the influence of music, but it helps to understand the free sharing culture among the listeners. Hegel, on the other hand, deals only with sympathy between the composer and the listener, but he remind us that it is a sympathy for the content of the music. Through this, we can understand various performance cultures and social media activities of modern musicians who attempt to communicate with the 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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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현상학적 가치미학론 소고

저자 : 김연숙 ( Kim Yeon-sook )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간행물 : 동서철학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7-19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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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은 그 학적 대상을 미적 가치 및 가치실현의 문제로 삼고 있다. 본 논문은 가치에 관한 전면적 고찰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현상학적 가치론에 입각하여 현상학적 가치미학을 논한다.
제반 가치들 중 미학적 가치는 정신적 가치로 분류된다.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미학적 인간의 영혼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체험에 열려있다. 가치들이 가치체험에서 주어지듯이, 미학적 가치도 미학적 가치체험에서 주어진다. 미학적 가치질은 미적 대상이 실질적으로 담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미학적 가치이념은 미에 대한 개념과 관련된다. 미학적 가치체험은 직접성을 지니며, 감정이 작용한다.
인간의 가치의식은 일면적이기에 가치 파악과정에는 비극이 내재된다. 즉, 특정 가치에의 몰입은 다른 가치들에 대한 부정을 내포한다. 또한 미적 가치의 추구가 삶의 의의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미적 가치의 구현과정에도 고통은 따른다. 예술가의 미적 가치 직관은 형상을 묘사하도록 추동하고 그로부터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그러나 작품이 작가의 직관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할 때, 작가의 고뇌는 심화된다. 또한 직관된 가치체험을 객관적 형상으로 부여하는 과정에서 간극이 벌어지고, 형상부여의 비극이 발생한다. 또한 견고한 형식으로 전승된 미적 체계와 새로운 기풍을 느끼는 생동하는 영혼을 지닌 예술가 사이에는 불가피하게 간극이 생기로 이로부터 비극이 생길 수 있다.
미적 가치의 창조과정에는 경계를 넘어서는 경향이 있다. 가치 실현과정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넘어 자기를 초월해 가려는 욕망이 분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창조적 인간의 내면에는 창작욕과 창조력간의 분투가 벌어진다. 창작욕망을 따라잡지 못하는 창조력은 예술가에게 무력감을 준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무력감은 신적인 힘에로 연결되는 계기가 된다. 즉 단순히 신에게 속죄를 탄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목표에 이르는 도상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힘, 거룩한 힘을 주기를 희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무한자와의 내면적 만남을 체험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여타의 미학과 현상학적 가치 미학의 차별성은 미적 가치나 그 실현과정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창작과정에 주목하고 그 과정에서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esthetics regards its object as a matter of values and a process of enabling these values. From this point of view, this paper discusses phenomenological aesthetics, based on a comprehensive consideration of the phenomenological theory of value.
Among all values, aesthetic values are classified as spiritual values. An aesthetic soul that pursues aesthetic values is likely to go through beautiful experiences. As values are given in value experiences, aesthetic values are also given in aesthetic value experiences. Aesthetic values are related to a beauty that aesthetic objects actually contain a concept of this beauty. Also, experiencing these values requires direct and emotional interaction.
Since human cognition is commonly limited, tragedy is inevitable in the value process. In other words, a commitment to one specific value implies denial of other values. A pursuit of aesthetic values does not necessarily guarantee that the meaning of life and pain also comes about during the process of enabling these aesthetic values. An artist's intuition for aesthetic values drives us to describe shapes, from which artistic works are produced. However, in a case when the result of an artistic work does not properly embody the artist's intuition, the artist's agony increases. In addition, a great gap appears during a process of projecting intuitive experiences onto objective shapes and, consequently and inevitably, a tragedy occurs because of the difference between a robust mechanism of aesthetics which have been passed down and the artist with lively spirits who builds a new ethos.
A creation of aesthetic values tends to go beyond boundaries. Then self-transcendence, a desire to transcend oneself beyond one's own potential, is reached and causes a rift between one's desire for creativity and artistic creativity. As a result, the creativity that does not catch up with the creative desire hurts the artist with a sense of helplessness. However, paradoxically, his helplessness leads to a divine power. In other words, instead of simply pleading to God for his atonement, he rather hopes to be given a new life, a divine power, and an infinite goal. In this process, he also experiences inner encounters with the Infinity.
Considering the above discussion, it can be concluded that a differentiation between other aesthetics and phenomenological aesthetics is made on the fact that the former is limited to only aesthetic value and its realization, but the latter also includes the artist's pains in this creative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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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레비나스와 평화 :홉스와 다른 윤리적 평화의 설립82

저자 : 김영걸 ( Kim Young-geol )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간행물 : 동서철학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1-208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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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보존을 위한 코나투스는 존재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코나투스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 존재에 있어 코나투스의 이 같은 본질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코나투스의 부정적 측면들은 불거져 나올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각자의 코나투스의 행사는 타자들과의 갈등과 투쟁을 불러 일으킨다. 왜냐하면 타자는 그의 존재 가짐을 강화하기 위해 나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홉스는 그것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홉스는 투쟁을 통제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강력한 국가를 요청한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홉스의 사유를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즉, 타자는 적으로 간주되기 보다는 그의 불행마저 나의 책임으로 여기게 하는 염려의 존재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에게 홉스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평화를 상상케 한다. 이것은 또한 레비나스가 상상하길 시도했던 새로운 인간학의 지평을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다.


Conatus of self-preservation is necessary for existential maintenance. In other words, it is not too much to say that conatus is the essence of human beings. But in spite of this essential role of conatus in human beings, the darker side of conatus expands. For example, if we each exercise our own conatus, the competition or the conflict with the other caused by conatus will be unavoidable. Because the other can be counted as an enemy who threatens my life and my peace for the intensification of his own being. Thomas Hobbes declared this phenomenon as a war of all against all. Thus Hobbes calls for a strong government in order to control the conflict and achieve the peace. But Levinas completely overthrows the thinking of Hobbes. That is to say, the other is not an enemy but rather a human being, even one whose misfortune I am responsible for. This thought lets us imagine the peace as totally different from the peace proposed by Hobbes. This will also show us new anthropology that Levinas tried to imagine.

KCI등재

10포스트모던인들의 삶의 조건 비판: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죽음관을 중심으로

저자 : 김완종 ( Kim Wan-jong )

발행기관 : 한국동서철학회 간행물 : 동서철학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9-255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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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자아 유아론적(egoistic solipsistic) 죽음, 다시 말하면 죽음의 각자성(jemeinigkeit, mineness)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인간 현존재(Dasein)의 전체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에게 죽음의 의미는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는 점, 아직-아님과 항상-이미의 존재론적 구조를 가진다는 점, 죽음은 고유한 존재가능이라는 점, 즉 죽음은 현존재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죽음을 향한 존재는 아직 경험되지 않았지만 이미 닥쳐 있는 임박한 종말로 죽음을 향해 앞질러(Vor) 달려갈 수 있다(laufen)는 점, 즉 현존재 자신은 가장 고유한 가능성 속에서 앞에 서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죽음에 의미가 인간 현존재에게 적용될 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두가 대중 속에 있는 그들-자아이고 이 속에서는 본래적 자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란 아무도 아닐 수밖에 없고 아무도 아니다. 무한 긍정을 통해 무한 자본만을 획득하는 그들-자아의 일상성을 깨고 자신의 존재가능을 실현하며 계속 성취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을 향한 존재 앞에서 자신의 현존재를 문제시하며 의문을 던지는 본래적 자기이다. 이에 비해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에 노출된 연약성은 그의 가사성이나 죽음을 의미하며, 그에게 얼굴은 타자의 죽음을 노출시킨다. 레비나스에게 신비로서의 죽음은 주체가 주인이 될 수 없는 사건이며 그 사건과의 관계에서 주체는 더 이상 주체가 될 수 없다. 하이데거와는 다르게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사건과 주체간의 심연을 도입한다. 죽음은 대상을 환대하고 환영하는 사건에 마주하는 관계를 도입한다. 레비나스의 죽음 이해가 타자나 타자성과 관련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레비나스에게 형이상학적 욕구는 다름 아닌 타자에 대한 욕구이다. 죽음은 주체에게 낯선 것이나 타자이다. 죽음은 절대적 타자이다. 타자는 미래이다. 그래서 죽음은 미래와 같은 타자이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현존재의 본래적 자기성을 정립시키는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가능의 근거인 반면에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절대적 타자성이다.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타자와의 관계 물음의 근거이다. 레비나스에게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나의 존재는 죽음을 향한 타자의 존재로, 다시 말하면 내가 죽음을 향해 있다는 것이 타자가 죽음을 향해 있다는 것으로 바뀐다. 논자는 이러한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죽음관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일견 대립해 보이는 두 견해가 오히려 포스트모던 시대의 우리에게 유의미가 있다는 점을 제시할 것이다. 논자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자기중심적 죽음이해와 레비나스의 타자 중점적 죽음이해가 무한 긍정, 무한 능력, 무한 경쟁을 통해 무한 자본, 공간, 권력 등을 소유하며 편안함과 안락함, 즉 포스트모던인들의 삶의 조건들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던 시대 현대인들의 사유와 삶의 방식에 통찰력 있는 함의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meaning of Heidegger 's death and Levinas' death, and examines the difference of meaning. I would present the implications of the negative discourse of death on the thinking and way of life of postmoderns in postmodern times, pursuing only comfort and easiness by acquiring infinite capital and power through infinite affirmation, infinite ability, and infinite competition. To Heidegger death is egoistic solipsistic death, that is mineness of death. According to Heidegger, death is a way of revealing the Ganzsein of human Dasein. For him, the meaning of death is that of Sein-zum-Tode, and the ontological structure of not-yet and always-already, in other words the possibility of impossibility of Dasein. Sein-zum-Tode has not yet been experienced, but it is that it is already standing before (bevorstehen) the imminent end that has already can run (latufen) ahead (vor) toward death. In other words, Dasein is standing in front of itself in its ownmost potentiality for Being. Everyone is a They-self in the public, and because they cannot find their true selves in this, they are nobody and no one. It is the authentic self, who is able to break his everydayness to acquire only infinite capital through infinite affirmation, to realize his existence possibility and continue to fulfill own potentiality for Being. It is an authentic self who asks question of its own Dasein in front of Sein-zum-Tode. On the other hand, Levinas' vulnerability to the other's face means his mortality or death, and his face exposes the other's death. For Levinas, death as a mystery is an event in which the subject cannot be master, and the subject can no longer be subject in relation to the event. Unlike Heidegger, death is not my death, but the abyss between events and subjects. Death introduces opposing relationships in events that welcome and welcome objects. This is why Levinas' understanding of death has to do with other or otherness. For Levinas, metaphysical desire is a desire for the Other. Death is an unfamiliar thing to the subject. Death is an absolute Other. The Other is the future. So death is the same as the future. Heidegger 's death is the basis for its ownmost potentiality-for-Being that establishes the authentic selfhood of Dasein, whereas to Levinas death is an absolute Other. To Levinas, death is the basis for a relationship with the Other. To Levinas, Being for my death turns into Being for the death of the Other. In other words, my Being towards death turns into the Being of the Other towards death. I would not criticize both Heidegger's view of death and Levinas's view of death. I would suggest that both Heidegger's self-centered understanding of death and Levinas' the other-centered understanding of death will give They-self to those who live in the conditions of postmodern life, that is, infinite capital and space through infinite affirmation in-depth thought about what Being of the other person and the original human being is in their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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