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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Chinese Historical Resea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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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6)~127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480
중국사연구
127권0호(2020년 08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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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주(西周) 시기 권리 구제 연구

저자 : 장더메이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12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6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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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周) 시기에는 비록 성문화된 법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법률적 권리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생활 가운데서 실제 상황에 입각한 권리는 있었다.
이러한 권리는 손해를 입게 되었을 때 손해를 당한 사람이 관할권을 가진 기관을 향하여 공권력 차원의 구제를 요청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 역시 사적인 역량 차원의 구제가 배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것은 쌍방 당사자들이 사건 심리 과정 중에서 협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제 수단을 통해 손해를 입은 쪽에서는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권리를 침탈하거나 계약을 위배하는 행위를 한 당사자는 형사적 처벌을 받거나 민사적 징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상의 권리 구제는 법률상의 권리에 우선하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러한 절차는 근대에 이르러 법전을 통해 권리 규범을 설정하기 전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현대 형법 규범은 재판 규범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특징은 중국 고대의 형법 법전에서도 활용되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서주(西周) 시대 명문(銘文)에 보이는 사례들을 사료로 삼아 이 시기 권리 구제의 상황에 대하여 구체적인 검토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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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운몽(雲夢) 수호지(睡虎地) 한간(漢簡) 문제(文帝) 『전원(前元)십년질일(十年質日)』 에서의 월인(越人)과 안륙(安陸)

저자 : 궈타오 , 스야닝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12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34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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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운몽(雲夢) 수호지(睡虎地)에서 출토되어 공개된 한간(漢簡) 중 문제(文帝) 『전년(前元)십년질일(十年質日)』죽간 자료는 정리자 차원에서는 그 주인이 “월인(越人)”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월인(越人)”이라는 두 글자는 역대 역사 서적에서는 일반적으로 민족 집단 이름으로 쓰여지고 있으나, 드물지만 사람 이름으로 쓰인 경우도 있다. 진한(秦漢) 시대 간독(簡牘) 자료에서 보여지고 있는 월인(越人)은 대부분 사람 이름이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보면, '월인'은 이름에 사용된 글자이며, 좋은 의미를 갖고 있다. “월인' 유형의 사람 이름이 아주 많이 발견되는데, 진한(秦漢) 시기 인명 구성의 다원성에 대하여 보다 풍부한 인식을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월인이 살았던 안륙(安陸)이라고 하는 지역은 한(漢)나라 초기에 이미 후국(侯國)과 탕목읍(湯沐邑)으로 설치 폐지된 바 있으며, 행정 구역으로서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빈번하였다.
한 고조(高祖) 7년 10월 이후 여후(呂后) 원년까지 봉국(封國)으로 존속하였고, 여후 원년 이후에는 탕목읍으로 존재하다가 문제(文帝) 10년에 폐지되었다. 이미 공개된 진한 시대 간독 자료에 근거하여 안륙현의 행정 건치의 정황을 초보적으로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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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晉ㆍ南朝에서의 애책(哀策)에 대하여 -그 활용(活用)과 형식(形式)에 대한 고찰(考察)을 중심(中心)으로-

저자 : 梁鎭誠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12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5-74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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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策是记录有关死者的功德和其死亡的哀痛之心的器物. 在晋ㆍ南朝时 期, 哀策只可用于记录 皇太后ㆍ皇帝ㆍ皇后ㆍ皇太子ㆍ 皇太子妃及作为 例外的皇太子生母即贵嫔的葬禮等事项中. 也就是说, 这是只可用于以皇 帝为中心的直系皇室家族的葬礼的喪葬器物. 晋ㆍ南朝的哀策按竹简形式 制作. 哀策文在遗奠的祭也就是出殡时举行的祭祀中, 在梓宮前朗读, 朗读 完毕后将与梓宮一同移到埋葬地点并被放入玄宮中. 
当时作为与哀策类似的喪葬器物有“墓志”. 墓志也同哀策一同被埋进墓 穴. 此外, 哀策文的目的在于哀悼亡者并表达缅怀的心情, 这一文章的功能 与汉代以来盛行的“诔”重复. 同时, 其文大体由序和辞构成, 这与墓志和诔 的形式相同. 尽管存在这一类似性, 但哀策作为喪葬器物在风格ㆍ文章构 成要素的比重和叙述方式以及通过其制作的可期待功能方面与墓志和诔有 着较大的差异. 
首先, 晋ㆍ南朝举行葬礼时, 被献上哀策的人士属于极少数. 对亲王或公 主ㆍ后宮等不可使用哀策. 这些人死亡时, 制作了墓志, 这方面并无例外情况. 
其次就是哀策文整体上比起序文部分, 后半部的辞构成文章的中心. 这 就是其与墓志及诔的序文属于长篇, 而在文章内对亡者生前履历(家庭关系 ㆍ官历和生前轶事等)的介绍较为详细有着不同之处. 哀策文的序中并无有 关亡者的履历介绍, 只记述了葬日和葬地, 且就哀策文的制作原委进行了 叙述. 同时亡者的功德在辞部分进行了列举. 哀策文的辞中有关亡者的人 品和生前业绩等则按照时间顺序, 通过与其类似的故事进行比喻形式的描写. 其后则是有关亡者的死亡以及留下的人们对其感受的悲痛的心情ㆍ葬 礼的场景和有关陵寢的描写, 而在最后, 随着进行最后道别来以追悼亡者 的字句来收尾. 
最后, 哀策问的制作主体就是“皇帝”. 有关“大行皇帝”', “嗣皇帝”, 就皇 后或皇太子ㆍ皇太子妃及贵嫔等则以“当今的皇帝”作为主体. 虽然哀策文 的制作委派当时文笔出众的文人官僚, 但他们只不过是代替皇帝通过文章 来表达他的意志. 哀策文中哀悼和追思的文章并非书写人的个人感情表达, 而是现实中皇帝的心情. 制作哀策文的官吏尽管较为多样, 但他们的文章 失去了个性且只以“史”或“史官”表达就是这一情况的佐证. 考虑到哀策温 度这一特性, 将晋ㆍ南朝的哀策文视为表达皇帝意志的皇帝的文书, 也就 是“王言”的一种也无妨. 
到晋朝, 透过皇室葬礼中使用哀策的情况增加趋势, 可推断出其与此前 诔的盲目盛行有关. 根据经传上的定义, 诔并非任何人可随意删掉的文章. 地位卑微的人不可删掉身分高贵的人的诔, 年幼的人不可删掉年长者的诔. 但根据这一规定, 天子死亡时不可制作诔. 因为有关天子的诔, 只可以上天 的名义来制作. 但在后汉时期, 民间不分贵贱制作诔的行为较为盛行. 儿子 可为其父制作诔, 门生和故吏为其老师和使君制作诔的情况比比皆是. 这 些都是与经传的规定相悖的行为. 尽管皇帝的诔以上天的名义制作, 但只 不过是其内容有所差异而已, 在本质上皇室与民间使用同一种形式的文章, 且与经传的目的也不相符. 
以晋朝为分水岭导致哀策文增加的背景中, 是否可视其为要与在民间滥 用的诔有所差异而进行的有意识的企图. 哀策文的制作主体是当今的皇帝. 因皇帝是“至尊”, 以其为主体为皇后ㆍ皇太子ㆍ皇太子妃及贵嫔等制作哀 策文并不与经传相悖. 再有, 为成为故人的先皇书写的哀策文也不成问题. 因为从身分的尊贵来说, 两者地位同等. 
直至南朝出现了定型化的哀策文, 而起形式与皇帝及皇后两者并无差异. 也就是说, 皇帝与皇后的哀策文选择的了同样的结构与格式. 有趣之处是 这样的格式在隋ㆍ唐代皇室的哀策文也以同样的形式得以再现. 虽然目前 无法确认北朝哀策文的形式, 但至少在唐代哀策文形式上的完成方面也无 法忽视南朝哀策文的影响. 这与唐代定型化的墓志的线索要从南朝梁代的 墓志得以确认具有类似之处. 因而南朝的哀策文可成为在中古中国葬礼礼 仪的整顿, 以及文体的变化方面确认南朝所具有的契机性重要性的又一个 佐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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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당(唐)과 신라(新羅)의 '赦' 기사 비교 검토

저자 : 鄭炳俊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12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5-10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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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代的赦从大方面可分为叁种: 一, 死罪以下全部赦免, 十恶除外; 二, 赦免十恶以下的所有罪名; 叁, 十恶及其他重要罪名除外, 赦免所有罪名. 伴随着赦的同时, 赐予各种恩赏的情况也很多.
在 『旧唐书』ㆍ 『新唐书』本纪和 『资治通鉴』中大部分情况是只简略地记录 了“赦”或“大赦”, 但毋庸置疑, 实际上是有着多样形式和内容的; 虽然新罗 的赦几乎全部以简略记事的形式载于 『三国史记』本纪中, 但可以看到历史 中包含的各种形式和内容.
片面记录的新罗赦的内容与唐比较来看, 相似点不少. 新罗的赦记事是 以传承资料为基础. 尽管如此, 新罗的赦外形上与唐相同点很多.由此可 见, 新罗很大程度上引进了唐的制度. 尽管新罗与唐在国家体制上存在很 多差异, 但由于(赦制度)其基本塬理十分简单, 所以能很大程度引进唐的赦 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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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朝鮮) 중기(中期) 안명노(安命老)의 팔진도(八陣圖) 분석(分析) - 『연기신편(演機新編)』을 중심으로-

저자 : 洪乙杓 ( Hong Eul Pyo )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12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3-14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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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litary training system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as Oh-yu-jin-bup, but the king Sunjo, who saw the Nam-byoung's involvement in the battle of the Castle Pyong-yang of the Im-jin-wae-lan, Im-jin War), replaced them with the tactics of the "Ki-hyo-shin-seo" written by Chuck Gye-gwang to train their soilders. However, the Joseon Army, trained by the Chuck Gye-gwang's system, did not prevent the invasion of the Chung's army during the Byeong-ja-ho-lan(Byeong-ja-War), causing controversy over the training system.
One of them, An-Myeong-ro(1620-?), Thought that there was a serious problem with the training system of the Joseon army. He pointed out the problem of the Chuck Gye-gwang's tactics with his book “Yeon-ki-shin-pyeon,” and insisted on training with the Oh-yu-jin-bup method in the early Joseon Dynasty. However, his proposal was not adopted due to the indifference of the Byeongjo, the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and the opposition of the political parties. He was exiled to province and died on April 24, 1680.
This is a thesis that studied battle formation, especially Paljindo, among the Yeon-ki-shin-pyeon written by An-Myeong-ro. This article clarifies the error of Pung-hu's “Ak-gi-gyeong” claimed by Ahn Myeong-ro, and considers whether the previous criticism of Pal-jin-do was properly made. In addition, this article analyzes the Je-gal-lyang's Pal-jin-do drawn by Ahn Myeong-ro and studied its meaning and effectiveness as follows.
First, it was confirmed that the error of Pung-hu's Ak-gi-gyeong claimed by An-Myeong-ro, has been controversy from the past, does not exist. the “Ak-gi-gyeong”, which is passed down to modern times, is the Pal-jin-do tactic left by the dead Je-gal-lyang. It contains a poem that praises Ak-gi-gyeong by Seo-jin's master General Ma-lyung, who conquered Seo-lyang. From his achievements in his excellent Pal-jin tactics, it is hard to see any errors in the “Ak-gi-gyeong” he praised. According to my research, 384 letters of “Ak-gi-gyeong” contain sentences that have been interpreted in posterity. However, as it is an essential sentence for understanding, it could not be regarded as an error as An-Myeong-ro claimed.
Second, An-Myeong-ro's criticism of the Pal-jin-do, drawn by previous tacticians, was analyzed to be valid. It is natural that An-Myeong-ro, who studied this field thoroughly, pointed out that the Pal-jin-do presented by non-professionals, such as Lee-jeon and Jang-yeop, have already been proved to be false by the Jo-bon-hak or Wang-myeong-hak of the Ming Dynasty.
Third, it was confirmed that Je-gal-lyang's Pal-jin-do, which he drew, was not drawn as a curiosity or a hobby, but strictly adhered to the contents of Ak-gi-gyeong, deploying troops and commanders, and schematizing change and flexibility to realize the theory that “Everywhere becomes the head, and everywhere becomes the tail, so wherever the enemy meets becomes the front.”
In addition, looking at the middle volume which summarizes the books of the previous wars, and lower volume containing Cheon-mun, Tae-eul, Ki-mun-dun-gab, etc., it was found that he had all the knowledge that a war researcher should possess. In particular, looking at the lower volume, it was found that his tactic was not merely a schematic, but was written with the principles of Yeok-hak(易學), Eum-yang-o-haeng, Ki-mun-dun -gab. Indeed, An-Myeong-ro was a man with military talent.
In particular, if you read "Yeon-ki-shin-pyeon", you can see that he wrote with all his heart with concern for national defense and national security.
However, there are some part to complement. Ahn Myeong-ro's “Yeon-ki-shin-pyeon” can be said to be a great masterpiece, but he focused too much on defenses and did not mention how to switch to an attack. This seems to be the limit he had as a civil minister.
The victory or defeat of a war is determined by its strong attack power. The defense, no matter how good it is, can't destroy the enemy but only stops the attack, and the enemy that has not been exterminated can re-attack us at any time. Therefore, since it was An-myeong-ro who devoted himself to the perfect reproduction of Pal-jin-do, I think it would have been a better tactic if he had added here Chuck Gye-gwang's Won-An-Jin to change the attack strategy.
Even if “Ak-gi-gyeong” or Pal-jin-do is an old method of the past, research and development of it would be quite helpful for national def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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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청대(清代) 도형(徒刑)의 상규(常規)와 특례(特例)

저자 : 천리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12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7-167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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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중국에서는 수나라 때의 『개황률(開皇律)』에 기반을 둔 새로운 “5형(刑)” 제도가 이후 천여 년을 변화 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 가운데 도형(徒刑)의 지위와 경중은 적절히 유지되었으며, 적용되는 죄명은 지극히 광범하였고, 처벌 범위도 지극히 방대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도형(徒刑)은 입법(立法)과 사법(司法)의 실천 과정에서 이미 일반적인 규칙을 갖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가 적용되거나 변통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형(徒刑)은 이미 일종의 형법 제도였고, 아울러 일종의 양형(量刑) 기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기에는 5도(徒)ㆍ준도(准徒) 및 총도(總徒)의 구분이 있었다.
도형의 적용 자체에 있어서는 만주 팔기인(旗民)에 대한 구별, 계급적 특권,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범죄 주체와 지역적 차이에 근거하여 도형 심판에 있어서 관할권이 구분되어 관리되었다. 또한 집행 과정에서도 특정 도형 집행 대상범죄자들에 대해서 칼을 씌워 대중 앞에 돌리거나 문신을 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청대 초기에 열심(熱審)ㆍ사면(赦免)ㆍ속형(贖刑) 및 존류양친(存留養親) 등 형을 낮추어 주는 여러 제도가 도형에 연계됨에 따라 어느 정도 느슨해지게 되었다.
아울러 지적할만한 것으로는, 도형이 청말 법제 개혁 이후에도 계승되어 내려온 것은 고금(古今) 및 중서(中西) 간 도형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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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항전시기(抗戰時期)의 천진전장(天津錢莊)(1937-1945)

저자 : 林地煥 ( Yim Chi Hwan )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12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9-20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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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ese financial market had rapidly modernized by conducting monetary reform, such as the abolish of double monetary system and the adaptation of legal tender, but Chinese traditional bank maintained its conventional banking business without any sign of alteration. In order to induce Chinese traditional bank to carry out its banking reform, Chinese government under Japanese military intensified the financial condition for its establishment : mainly each bank had to secure over fifty hundred thousand won of its own banking fund to get the greenlight for the establishment of bank from Chinese government. As a result, each bank had to change the banking fund raising method for its establishment. They tried to raise banking find for the establishment of bank by offering stocks for subscription to meet the financial condition, or some of them were merged into large scale bank. 
With banking reform in 1942, Tianjin traditional market appeared the following alteration: first of all, Chinese traditional bank could constituted the financial basis that could be developed into large scale commercial bank by increasing its own banking fund. Second, the exclusive banking business among financial faction that had maintained for hundreds of years began to disappear in the financial market. The exclusive banking business that was controlled by Tianjinbang financial faction could not exist in the financial market any more, and Kijubang financial faction began to come to forehead in the financial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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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불편한 진실' : 한국학계의 백두산ㆍ간도지역 연구에 대한 성찰

저자 : 朴宣泠 ( Park Sun Young )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12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7-24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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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analyzed how the Korean Academic Association studied the problems of Mt. Baekdu and Gando before and after China's Northeast Project. First, this paper reviewed the relevant research in the Korean academic association by subject and then suggested the points to be noted in the research and the direction of future research.
The inconvenient truth in this text refers to each country's arbitrary interpretation of historical facts regarding the reasons and procedures make the territory of a particular country a frontier between the countries in the traditional era; why, when and how the became of certain country's land between Korea and China was formed; and the fundamental reason that differences in views of Gando between Korea and China are not clearly clarified.
This is directly related to where Gando is, what Gando is, and how to study and understand the Gando problem as a historical entity between Korea and China.
After China's Northeast Project in 2002, Korea had a sense of crisis that it might lose its history, leading to a plethora of research on the Gando problem. The political, diplomatic, social, economic, and cultural history and international legal aspects surrounding the issue of Gando problem were comprehensively reviewed. As for Mt. Baekdu, the Tuman River and the Tomun River proved to be different rivers by utilizing old maps.
It was not noted in previous studies that the education learning model was needed for the education of the Gando problem in Korea and the civic movement claiming sovereignty of Gando. This is an example of how the problem of Gando is not just a matter of history, but also related to reality.
This paper pointed out that we should be careful in the theoretical and generalization of certain contents about the Gando problem. When evaluating historical facts, also consider the issue of credibility. In this paper, additionally, we presented future research tas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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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마수농언 역주 (馬首農諺譯註)』

저자 : 강판권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12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7-260 (1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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