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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 update

Paekche Kingdom`s Culture

  •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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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8-2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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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7)~60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491
백제문화
60권0호(2019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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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주 반죽동 추정 대통사지 발굴조사 내용과 성과

저자 : 조원창 ( Cho Weon Chang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6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3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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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반죽동 197-4번지 유적은 2018년 1월 15일부터 53일간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해당 지 역의 남동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지점에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당간지주가 자리하고 있고, 동쪽으로 130m 떨어져서는 금강의 지류인 제민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조사지역은 한옥 신축사업과 관련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구지표면으로 추정되는 4개의 층위가 검출되었고, 이 중 Ⅴ층은 해발 19.8~20.1m로서 백제 웅진기에 조성된 대지조성토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18.0~19.8m까지는 모래층이 조사되었고, 그 아래층은 암반층으로 확인되었다.
각 층위에서는 백제시대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대통'명으로 보이는 인각와를 비롯해 지두문 암막새, 유단식 암막새, 연화문 수막새, 연목와, 부연와, 소조상, 치미 등이 수습되었다. 특히 이들 유물은 중국 남조에서도 살필 수 있어 당시 백제와 중국과의 대외교섭이 밀접하게 이루어졌음을 판단할 수 있다. 아울러 대통이 중국 남조 양나라 황제였던 무제의 연호라는 점에서 이들 유물이 대통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파악케 되었다.
한편, 지두문 암막새의 등면에서는 1조의 붉은 횡선이 확인되었다. 이는 연함이라는 목부재를 단청하는 과 정에서 묻어난 것으로 당시 대통사의 위상을 살피게 한다. 특히 이러한 형적이 그 동안 왕성으로 추정된 공산 성에서도 검출된 바 없다는 점에서 대통사의 화려함과 장엄성을 엿볼 수 있다.
다만, 금번 발굴조사가 204㎡라는 아주 제한적인 면적, 그리고 폐와무지가 주변지역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많은 아쉬움이 있다. 향후 주변지역에 대한 전면 발굴조사를 통해 문헌상의 대통사가 현실 세계에서 발현되기를 기원해 본다.


Excavation surveys were conducted for 53 days from January 15, 2018 for the relics at 197-4 Banjuk-dong, Gongju-si. At about 150m southeast of the area, there is a Flagpole Support, which is estimated to be the Unified Silla period, and 130 meters eastward, the Gemin Stream, a tributary of the Geum River, flows from south to north.
Excavation surveys were conducted in connection with the new construction of the Hanok (Traditional Korean-style house). The results showed that four soil layers were detected, which are estimated to be surfaces, and the lowest layer of the V layer was 19.8 to 20.1 meters above sea level, which was identified as the site built during the Baekje Woongjin period. And sand layers were formed from 18.0 to 19.8m, and the lower layer was identified as rock layers.
On each floor, various Baekje relics were excavated. Roof tile with character written as “Daetong”, Concave Roof-end tile with Finger-tip Design, Female roof-end tile, Male roof-end tile, Rafter roof tile, Rafter-end tile, Clay Buddha Finial, and Ridge-end tile were excavated. In particular, the fact that the Daetong is the era name of the Wu-Ti, Emperor of the Liang Dynasty of China makes it clear that these remains are directly related to the Daetongsa Temple.
However, there is a great deal of regret in that the excavation survey is very limited to 204 square meters, and tile dump is expanding to the surrounding area.
I hope that the Daetongsa temple in the literature will be manifested in the real world through a full excavation survey on the surrounding area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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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百濟) 대통사(大通寺)의 위치에 대한 시고(試考)

저자 : 서정석 ( Seo Jeong Seog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6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1-5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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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사는 백제 웅진기의 대표적인 사찰이자 寺名과 寺域을 알 수 있는 最古의 백제 사찰이다. 그러한 대통 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간단한 설명이 붙어있다. 따라서 백제 성왕 때에 공주시내에 대통사가 창건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위치가 어디이고, 어떠한 구조로 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웅진 천도 직후에는 濟民川 동쪽이 서쪽보다 먼저 개발되었을 터인데, 동성왕 20년(498)에 웅진교를 가설하는 것을 보면 제민천 동쪽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그 이후에는 제민천 서쪽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대통사는 웅진교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최근 반죽동 197-4번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대통사와 관련된 것으로 믿어지는 많은 양의 유물을 수습하였는데, 그런 점에서 그 일대가 대통사가 있던 곳이 아닌가 한다.


Daetongsa(大通寺) Temple is the representative temple and the oldest temple knowing temple's bound and name in Baekje.
Daetongsa(大通寺) Temple's establish is seen 『』Samkukyusa(三國遺事)』. Therefore it is very clear Daetongsa(大通寺) Temple was located in Gongju city. But we do not know Daetongsa(大通寺) Temple's place and structure.
Gongju has Jemincheon(濟民川) stream, so Gongju was divided Jemincheon's east and west. The palace was located in Jemincheon's east during Woongjin period in Baekje. Therefore it was developed to Jemincheon's east in first time. Daetongsa(大通寺) Temple was established in King Seongwang(聖王). So we guess Daetongsa(大通寺) Temple was located in Jemincheon's west.
Recently we discovered relics of Baekje in 197-4, banjukdong, Gongju city. We believe that relics have some connection with Daetongsa(大通寺) Temple. Therefore I think Daetongsa(大通寺) Temple was located in Jemincheon's west in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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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주 반죽동 출토자료로 본 백제 대통사의 위상

저자 : 李炳鎬 ( Lee Byongho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6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5-8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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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공주 반죽동 197-4번지와 그 주변에서 출토된 기와 및 소조상 등 출토유물을 분석하여, 그러한 유물들이 기존 백제 사원 연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검토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Ⅱ장에서는 반죽동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을 소개하고 기술적 특징을 검토했다. 반죽동 출토 와당은 문양의 차이에 따라 원형돌기형과 판단융기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양자는 와당을 성형하는 방식이나 수키와를 접합하는 기술이 약간 다르다. 암막새의 경우 指頭文과 先端 有段式, 일반적인 암키와가 암막새로 轉用된 것 등 3형식이 있다. 공주 지역에서 처음 발견된 소조상은 소형 파편으로 적갈색을 띠며 태토에 모래가 섞이고 뒷면이 평평하다. 심목을 사용한 흔적이 있고 머리와 몸통을 따로 제작하여 접합했다. 이곳에서는 '大通'이 날인된 문자기와, 무령왕릉 벽돌과 동일한 문양전, '大通之寺'가 찍힌 고려시대 문자기와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Ⅲ장에서는 이러한 출토자료의 제작시기나 계통, 의미를 검토했다. 원형돌기형과 판단융기형 와당은 남조 梁나라 기와 제작기술의 영향을 받았지만 백제적인 변형을 거친 것이다. 부여·익산의 백제 사원이나 경주 흥 륜사지, 일본 飛鳥寺에서는 최소 두 그룹의 창건와가 확인되는데 대통사에서 그 원형이 확인된다. 지두문 암막새의 경우 북조나 고구려 계통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남조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선단 유단식 암막새는 백제 내부의 창안으로 신라나 일본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소조상의 경우 태토나 색깔, 제작기술 등이 부여 정림사지, 南京 지역 소조상과 유사하다. 반죽동 소조상은 출토위치나 공반유물에서 볼 때 웅진기에 속하며, 원래 목탑 내부를 장엄하던 塔內塑像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주 대통사는 백제적 기술이 구사된 기와를 지붕 재료로 사용한 佛殿과 소조상이 장엄된 木塔이 정연하게 배치된 본격적인 가람으로, 중국 남조와 신라, 일본의 불교문화 교류에서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되는 백제적 사원형의 성립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한편 대통사의 위치는 현재의 대통교에서 공주사대 부고 일대를 가로지로는 동서도로의 북쪽, 고려시대 남북 방향 담장이 확인된 반죽동 330번지의 동쪽에 자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This paper was drawn up to check the significance of such materials (i.e., roof tiles and clay-molded objects) as were unearthed from 197-4 Banjuk-dong, Gongju. Chapter II of this paper introduces these items, along with their features.
The concave roof-end tiles unearthed from the site are divided into those displaying petal patterns with the end raised sharply and those with embossed petal patterns. The two types show slightly different methods of molding and jointing with convex tiles. There are three types of concave roof-end tiles unearthed: those containing patterns similar to the fingertip, those with a tiered front, and ordinary convex roof tiles-turned convex roof-end tiles.
Clay-molded objects first found in Gongju are small, broken, red-brown pieces. The clay used to make them was mixed with sand, and the objects show traces of a wooden core. Their bodies and heads are guessed to have been made separately and jointed together later. Other items also found here include roof tiles displaying the stamped Chinese characters “大通(Daetong)”, patterned bricks similar in design to those found in the tomb of King Muyeol, and roof tiles displaying the stamped Chinese characters “大通之寺(Daetongjisa)” dating from the Goryeo Period.
Chapter III checks the timing of the production of the objects found, facts related to them, and their significance. The two types of concave roof-end tiles unearthed are those made by people of the Baekje Period under the influence of craftsmen from the Liang Dynasty during China's Northern Dynasties period. At least two types of roof tiles are found in Baekje temples left in Buyeo or Iksan, Korea and the site of Heungnyunsa Temple in Gyeongju, Korea and Asukadera Temple in Naran-ken, Japan. It is thought that those found at the site of Daetongsa Temple are their prototypes. The fingertip patterns of concave roof-end tiles are believed to be associated with the Northern Dynasties period of China or Goguryeo, Korea, but they might have also been influenced by those of the Southern Dynasties period of China. As for concave roof tiles with the tiered front, it is guessed that they were first made in Baekje and later influenced those made in Silla or Japan.
Looking at the clay-molded objects in terms of their source soil, color, and production skills, they are similar to those found at the site of Jeongnimsa Temple in Buyeo or in Nanjing, China. From the location and the other relics unearthed, those found in Banjuk-dong, Gongju date back to the Ungjin Baeje Period. It is guessed that they were originally internal clay figurines. These objects tell us that Daetongsa Temple in Gongju had a hall where the roof was made with Baekje craftsmen's own skills and was complete with a wooden pagoda containing clay-molded objects. The fact that it served as a core link between the Buddhist culture of the Southern Dynasties of China and those of Silla/Japan is significant.
It is guessed that Daetongsa Temple was located to the north of the curent road between Daetonggyo Bridge and Gongju National University High School and east of 330 Banjuk-dong, where a section of longitudinal fence wall of the Goryeo Period was f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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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제 웅진 도성기의 지형경관

저자 : 이홍종 ( Lee Hong-jong ) , 안형기 ( Ahn Hyong-ki ) , 조보람 ( Cho Bo-ram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6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1-11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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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공산성 주변과 제민천 주변의 고지형을 분석한 후, 공산성 주변의 유적 분포를 통해 백제 웅진 도성기의 지형경관을 추정해 보고자 하였다.
한성백제의 도성 경관, 공주, 부여, 그리고 세종 나성리유적은 ① 하천 본류에 위치 ② 기원전 2세기 전후에 형성된 충적단구 ③ 충적단구는 하천을 이용한 물류집하, 운송 혹은 교통의 요지로 이용 ④ 충적단구 옆 독립구릉 혹은 산지와 연결된 돌출된 구릉이 존재하며 이곳을 성으로 활용 ⑤ 구릉과 충적단구 사이 하도의 흔적 등의 유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풍납토성은 자연제방, 몽촌토성은 독립된 구릉에 입지한다. 두 토성 사이는 커다란 단구가 존재하는데, 퇴적 및 침식작용에 의한 평탄화가 넓게 이루어져 있어 선착장, 교역품 관련 각종 시설물과 이를 위한 집단 취락 등이 입지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나성리유적은 한성백제기 도시유적으로 독립된 구릉과 그 주위를 둘러싼 구하도의 존재, 그리고 구릉과 마주한 곳에 형성된 넓은 제2충적단구가 대지를 이루고 있어 물류의 집하지, 혹은 교통요지로서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성이 위치한 제민천 주변은 곡저부에서 흘러내린 선상지성 지형이 하천과 합류하면서 협소한 단구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교통, 물자 집하장소 등 공산성과 통하는 중요한 역할을 위해서 제민천 일대의 지형을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종합하면, 한성백제기 몽촌토성 주변의 도성유적, 세종시 나성리 도시유적, 공산성 도성유적 등은 단구지 형의 이용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공산성은 주변이 협소하고 금강 남쪽의 토지이용이 제한적이어서 도성의 집하장 혹은 교통요지로 활용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부여로의 천도 가능성도 지형 이용적인 측 면에서 추정해볼 수 있다.


This paper attempts to reconstruct the landscape of Ungjin based on the results of aerial photograph analysis on the vicinity of the Gongsanseong fortress and the Jemincheon stream and the spatial distribution of archaeological sites when it was the capital of Baekje. The similar geomorphological characteristics of Gongsanseong, Hanseong Baekje, Gongju, Buyeo and Naseongri, Sejong include ① location close to the main channel of the river ② river terrace formed in 2th Century BC ③ usage of the river terrace for logistics and transportation center along the river ④ the presence of hills or hills connected to the mountain and their usage as the fortress location ⑤ palae ochannels between the hills and the river terrace.
The Pungnap Fortress is located on the natural river levee while the Mongchon Fortress is located on the hills. Two large river terraces, which were formed extensively by depositional and erosional processes, provide sufficient space to build the piers and facilities for trade goods and the large settlements. The Naseongri site was the city ruins of Hanseong Baekje period, located on the large second tiered river terrace in opposite to the hills and river channels. It is assumed to have played a crucial role as the logistics center or transportation junction. The vicinity of Jemincheon stream, where the Gongsanseong Fortress is situated on, is the place where alluvial fan meets the river stream, forming a narrow river terrace. It is highly likely that this area was used as a center for transportation and logistics in association with the Gongsanseong Fortress.
In summary, there are similarities in choosing and utilizing of landscape between the use of river terrace along the Mongchontoseong fortress and that of Naseongri city site. However, the limited land availability of the vicinity of the Gongsanseong fortress and the north of the Geumgang river might have constrained the Gongsanseong fortress's role as a logistics center or a transportation junction. Thus it might have been one of reasons of capital relocation to Bu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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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성왕(聖王)의 대통사(大通寺) 창건(創建)과 량(梁) 무제(武帝)

저자 : 蘇鉉淑 ( So Hyunsook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6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1-141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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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의하면, 웅진의 대통사는 신라 법흥왕이 양 무제를 위해 양 대통 원년, 즉 527년 건립했다. 그런데 이 기록은 당시 웅진 지역이 백제의 도성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아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심지어 '웅진 대통사'의 존재 여부조차 부정되기도 했지만, 최근 대통사지로 전해지고 있는 공주시 반죽 동에서 또다시 '大通'銘 와당이 정식 발굴됨으로써 백제 대통사의 존재가 확실해졌다.
본고는 그동안 대통사 창건과 관련해 많은 의문을 불러 일으켰던 세 가지 문제, 즉 연호를 채택한 사찰 이름의 가능 여부, 창건 시기, 창건 목적 등에 대해 중국의 사례를 통해 그 해답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먼저 寺名의 경우, 6세기 전기 북위 도성 낙양에서 황제의 연호를 채택한 景明寺와 正始寺의 존재를 확인 함으로써, 양 무제의 연호를 채택한 대통사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가능함을 확인했다. 사찰의 창건 시점에 관해서는 중국의 6세기 사례와 한반도 삼국시대의 創寺 기록을 분석, 문헌 속에서 언급한 창건 연대가 꼭 완공 시점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사찰의 이름이 정해진 시기도 창사 시점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함으로써, 527년 창건설이 가능함을 제시했다.
양 무제는 동아시아에서 불교적 성왕, 즉 전륜성왕적 통치의 전범을 만들었다. 그는 황권에 대립했던 귀족 중심의 승단세력을 통제하고, 전륜성왕적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는데, 527년은 바로 이와 같은 무제의 이상을 실현해줄 同泰寺가 완공된 시점이다. 동태사 완공과 함께 무제는 이를 기념하여 연호 마저 동태의 反語를 취해 대통으로 바꾸었다. 성왕의 대통사 창건은 무제의 이와 같은 정치적 전범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성왕은 무제처럼 계율을 중시하여 謙益을 우대하고, 전륜성왕에 의한 호법통치를 설한 『열반경』을 중시함으로써 국내 통치의 안정과 왕권 강화를 기도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 사는 성왕의 전륜성왕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백제판 동태사'라 부를 만하다.


According to the Samguk-Yusa, the Daetongsa Temple in Woongjin(熊津) was built in 527 by the Silla King Beopheung(法興) for Emperor Wu of Liang Dynasty. But at that time, Woongjin was the capital of Baekje. This is not consistent with the historical facts, which made us question the reliability of the records. Even the existence of the “Woongjin Daetongsa Temple” mentioned in the records was denied. However, a tile with the name of 'Daetong' has been discovered again at Banzook-Dong in Gongju City, which is known as the site of the Daetongsa Temple.
This research aims to solve three problems that have raised many questions about the construction of Daetongsa Temple. In other words, through comparative analysis with Chinese cases, I wanted to explore whether the name of the temple adopted the title of an emperor's reign was possible, and when the temple was built, and what was the purpose of the temple.
At the first half of the sixth century in China, there was a case of using the title of an emperor's reign as the names of temples. It is Jingming-si(景明寺) and Zhengshi-si(正始寺), which were built in Luoyang(洛陽), the capital of the Northern Wei Dynasty. If so, the records of the Samguk-Yusa, which describe the construction of the Daetongsa Temple using the annal of Liang Wudi, are reliable.
On the Daetong Temple's construction, I analyzed the cases of China's 6th century and the Three Kingdoms Period of the Korean Peninsula.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the time of construction referred to in the literature does not necessarily refer to the time of completion, and that the time of make naming of the temple could also be the time of construction. Thus, the record of the Samguk-Yusa, which said the Daetong Temple was founded in 527 is very reliable.
In East Asia, Emperor Wu of the Liang Dynasty made a model of the Buddhist holy king, i.e. Cakravartin King(轉輪聖王). He controlled a group of monks from the nobility who were opposed to the royal authority, and he steadily laid the groundwork for the Cakravartin King's rule. The year 527 was the time of completion of the Tongtai-si(同泰寺) to realize this vision of anarchy. With the completion of the temple, he even changed his reign name to Datong(大通), which has meaning with Tongtai-si Temple.
It can be said that the King Seong's creation of the Daetong Temple was an imitation of this political practice of the Emperor Wu. He also favored Buddhist monks who were as bright in Buddhist doctrine, and valued Nirvana Sutra as the Emperor Wu. This Sutra highlights the rule of law by Cakravartin King. Through these King Seong tried to pray for the stabilization of domestic rule and the strengthening of his royal authority. In this sense, Daetong Temple was built as a place where King Seong's Cakravartin King royal activities take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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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제 성왕과 대통사 - 대통사지의 역사적 의미 -

저자 : 노중국 ( Noh Choong Kook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6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1-157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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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사는 527년 백제 성왕에 의해 세워졌다. 최근 발굴조사에 의해 백제 유물이 출토된 공주시 반죽동의 대통사지가 대통사가 세워진 곳임이 밝혀졌다.
성왕은 “백제를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아버지 무령왕의 뜻을 이어받고, 양나라 무제가 동태사를 건립하여 불교치국책(佛敎治國策)을 편 것을 본받아 새 정치를 펴기 위해 대통사를 세웠다.
대통사는 한국고대 사찰 가운데 창건 주체, 시기, 위치, 목적을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사찰이어서 한국고대 불교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가 된다. 따라서 문화재청과 공주시는 대통사지의 전모를 밝히기 위한 체계적인 학술발굴을 해야 한다.


Daetongsa temple was built in 527 by King Seong of the Baekje Kingdom. Some artifacts of the Baekje Kingdom were unearthed by a recent excavation at the site of Daetongsa temple, Banjuk-dong, Gongju-si, which turned out to be a place where Daetongsa temple was built.
King Seong built Daetongsa temple in order to inherit the will of King Muryeong, his father, “to make the Baekje Kingdom a strong nation again,” and to carry out new politics based on the example of Emperor Wu of the Liang dynasty who built Tongtai temple and conducted a policy of governing the country using Buddhism.
Daetongsa temple is a key resource for understanding Korean ancient Buddhism history because it is the newest temple among Korea's ancient temples whose founding subject, timing, and purpose are known. Therefore,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and Gongju-si Municipality should conduct a systematic academic excavation to identify the whole aspect of Daetongsa temple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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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평안시대(平安時代)의 예(穢) 관념과 공간

저자 : 김은정 ( Kim Eun-jung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6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9-18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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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의 목적은 고대 일본사회에서 穢 관념의 실태를 공간이라는 관점을 통해 해명하는 데 있다. 고대 일본사회에서 부정 관념의 일종인 穢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떠한 사물과 현상에 대해 부정하다는 가치를 부여한 행위 그 자체가 갖는 보편성이었다. 실제로 부정한 것으로 인식된 사물과 현상에서 보편성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그것은 각 사회에서 독자적으로 양성된 가치 관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養老율령의 시행세칙으로 9세기에 편찬된 式에는 부정 관념의 일종인 穢가 등장한다. 이 穢에 따르면 인간 과 동물의 죽음, 출산, 피, 육식, 화재 등은 부정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것들을 접촉한 사람은 신성한 존재인 神과 접촉할 수 없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고대 일본에서 式이 편찬되기 이전 즉, 奈良시대에는 이러한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延喜式』 임시제에 규정된 穢는 奈良~平安시대에 존재했던 穢 관념 가운데 어디까지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전부터 존재했던 관념의 일부가 변화된 것이었다. 따라서 奈良~平安시대의 穢 관념은 전시대의 그것과 비교하면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9세기 전반 이후에 변화된 양상을 주목하면, 분명히 역사성을 갖춘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성이 탄생된 계기는 바로 神과 천황 사이에 성립된 공간의 변용에서 찾을 수 있다. 9세기 후반에 이르러 천황의 권위가 平安京 주변에 소재한 22社에 진좌하고 있는 神과 의사소 통을 통해 유지될 정도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평안경에 거주하는 천황과 이를 둘러싼 22개의 신사로 이루 어진 새로운 공간이 平安시대에 穢라는 부정 관념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This paper demonstrates how sense of impurity had been recognized and treated in ancient Japanese society from the viewpoint of space. Originally, impurity seems to be universal sense. It has been existed every time, everywhere. But this “universal” means that of human's behavior appointing something as impure. We do not have any decided objects being appointed as impure. Consequently, content of impure has been diverse depending on difference of time and place. The principle that men depend on when they chose something as impure generates based on the value that has been pervasive in each society. Historians thus should aim to figure out its historicity with its universality in mind. This paper shows that the viewpoint of space will be effective on this attempting.
The concept “Kegare” appeared in the Siki, the enforcement regulations of the ancient law Rituryo. Siki regulated that death of human and animals, birth of human and animals, blood, eating meats and fire as impure and prohibited those who touched or did these stuffs to contact with deities. This like concept did not exist before the Siki was established in 9thcentury. This paper elucidates it at first and figures out the historical process that this concept had been generated. Additionally, this paper points out that this generation caused due to change of relationship between the Emperor and deities. The Emperor became to response only to specific deities that were enshrined in 22 shrines around Kyoto since 9th century. Before then, the Emperor had interacted with all deities that were around nation. Generation of the concept “Kegare”, a kind of impurity, synchronized with change of form of space that was composed by the Emperor and de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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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성(江蘇省) 연운항시(連雲港市) 경내에 있는 현존하는 '토돈석실(土墩石室)'유적은 고고학계에서 그 성격이 춘추 오(吳)나라의 군사시설 이라는 설에서 당나라의 무덤이라는 설로 바뀌었다. 단 그러한 '토돈석실묘'는 동시기적이나 통시적으로 비교하더라도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필자는 구고(舊稿)에서 그 묘주(墓主)의 신분이 당나라 때의 신라 이민(移民) 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한국의 학자는 '백제 유민(遺民)'설을 제기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민'과 '유민'의 차이점을 바탕으로 당대(唐代)의 역사 문헌에 근거하여 '토돈석실묘'의 묘주인은 어떤 돌발적인 정치사건에 의해 형성된 '유민'이 아니라 장시간에 걸쳐 사람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민자(移民者)들이며, 이러한 집단(社會圈)는 분명히 문명 왕래의 결과 라고 보고자 한다.

KCI등재

9“百濟遺民” 還是 “新羅移民”? - 連云港土墩石室墓墓主群體身分的再辨析 -

저자 : 張學鋒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6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9-209 (1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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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蘇省連云港市境內現存的“土墩石室”遺存, 對其性質的認定, 在考古學界經歷了一個由春秋吳國軍事設施說到唐墓說的轉變。 但這類“土墩石室墓”无論從橫向上還是縱向上比較, 均爲非常特殊的存在。 作者在舊稿中首次提出其墓主的群體身分爲唐代新羅移民。 針對這一觀点, 韓國學者提出了“百濟遺民”說。 本文在辨證“移民”與“遺民”異同的基礎上, 基于唐代歷史文獻, 主張“土墩石室墓”墓主人不是因某個突發政治事件瞬間形成的“遺民”群體, 二十在長時段因人群的頻繁流動而形成的移民群體, 而這個社會圈, 正是文明交往的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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