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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ekche Kingdom`s Culture

  •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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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8-2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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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7)~56권0호(2017) |수록논문 수 : 456
백제문화
56권0호(2017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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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신라 州의 성격 변화와 수취-명주(溟州)와 삭주(朔州)를 중심으로-

저자 : 김창석 ( Kim Changseok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5-3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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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에서 발견된 銘文자료에 `水多寺`가 나와서 慈藏律師가 北小京에 건립한 사찰이 강릉이 아니라 평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639년에 설치된 북소경은 강릉, 평창을 포괄한 광역의 행정구역이었으며 그 治所가 강릉에 있었다. 북소경이 성장하여 溟州가 되었으므로 명주는 中古期말에 이미 광역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朔州의 원형은 牛首州였다. 637년 우수주가 처음 설치되었을 때는 停군단의 주둔지로서 지역 거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군단은 比列忽, 達忽을 거쳐 이동한 것이어서, 춘천-안변-고성이 같은 방어 권역에 속했다. 진흥왕 때 장악한 영서지역의 교통로와 추가령구조곡이 연결되어 568년 황초령, 마운령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통 상황을 기반으로 하여 673년에 우수주는 광역주로 개편되었다. 이밖에 7개의 주는 처한 여건에 따라 각기 다른 변천 양상을 보였을 것이다. 명주와 삭주, 그리고 부분적으로 살펴본 上州(尙州), 下州(康州)의 경우 이주한 王京人에게 물자를 공급하고 주둔 병력에 군수품 조달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이 광역화의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즉 광역주 출현의 배경에 수취품의 취합과 운송, 그리고 교통로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신라는 중고기 말부터 수취를 중심으로 한 국가 차원의 물자유통을 고려하여 지역 거점을 廣域州로 바꿔나갔고, 전통적으로 활용되던 교통로를 고려하여 주의 영역을 설정했다. 광역주가 성립함으로써 州治가 예하의 행정 단위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관내에서 행정 · 경제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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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저자 : 박성현 ( Park Sunghyun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31-5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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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壽昌郡(?火郡)과 臨?郡(切也火郡)의 郡治는 각각 수창(위화)과 임고(절야화)였지만, 삼국시대에는 大丘(達句火)와 臨川(骨火)이 각각 그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 된다. 이와 같은 군치의 변화에 대해서 기존에는 중앙에 의한 지역(군) 내 세력 관계의 조정이라는 식으로 설명했지만, 본고에서는 공간 구조의 개편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즉 통일기에 들어 王京뿐만 아니라 州治및 小京의 공간에 대해서도 정비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평지에 일정한 시가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군치에 대해서도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금호강 유역 수창군과 임고군의 경우에는 그것과 관련하여 군치의 변경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수창군의 경우, 신문왕 때 달구벌로의 천도 시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당나라 장안성을 모델로 한 새로운 도성을 조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되며, 그렇다면 수창(위화) 지구의 평지가 그 예정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실제로 부지 조성 공사가 이루어졌는지는 알기 어려운데, 그 일대의 지적원도를 검토해본 결과 수창군 추정 중심지의 좁은 범위에서 약간의 정방향 도로와 토지 구획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얼마나 공사가 이루어졌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러한 일이 계기가 되어 수창(위화) 지구의 평지 시가지에 새로운 군치를 마련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임고군치 역시, 사실 그 위치를 확정짓기는 어렵지만 임천(골화)과 구별되는 평지 시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다만 나말 여초의 혼란기에는 다시 인근의 성곽, 堡가 중요하게 활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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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통일신라기 주(州) 치소성(治所城)의 구조와 물자유통-전주(全州) 동고산성(東固山城)을 중심으로-

저자 : 서정석 ( Seo Jeongseog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53-8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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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산성은 전북 전주시에 자리하고 있는 석성이다. 산성이 자리한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곳이다. 따라서 동고산성도 후백제의 도읍과 관련된 산성으로 이해되어 왔다. 마침 동고산성에 후백제의 왕궁이 있었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성내에서 정면 22칸(84.2m), 측면 4칸(14.1m)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가 발굴조사 되면서 후백제의 왕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왕성이 해발 306m에 이르는 높은 山峰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도 납득이 어렵거니와 기록을 보면 오히려 古土城을 지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고산성의 성격을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동고산성은 입지, 규모, 축성법, 출토유물 등을 감안해 볼 때 통일신라기 全州의 治所城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성내에서는 창고로 판단되는 石壁建物이 발견되어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동고산성에서는 11棟 이상의 건물이 발견되었는데, 당시의 창고로 추정된다. 이러한 창고는 통일신라기의 다른 산성에서도 발견된 바 있는데, 다른 郡縣의 치소성에서 발견된 것보다 압도적으로 크고, 수량도 훨씬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통일신라기의 州는 관할하의 군현에서 조세를 수취하여 일정 부분은 王都로 보내고, 나머지는 州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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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원삼국∼백제 한성기 경기남부지역 제철기지 운용과 지배세력의 변화 추이

저자 : 김길식 ( Kim Gilsik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81-10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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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서부지역에 위치하는 경기남부지역은 지정학적으로 마한 중심세력과 백제 중앙과의 교두보역할을 하였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원삼국~백제 한성기에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중요한 고고학적 특징이 발현된다. 그 중 하나가 이 지역에 조성되어 운위되었던 대규모 제철기지였다. 이러한 제철기지는 이미 기원전 3세기, 초기철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고조선을 통해 전해진 전국시대 연나라 계통의 철기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마한 자체의 내제적 발전을 거치는 가운데, 원삼국시대 후기~백제 초기에 들어서 서북한 지역의 군현 이탈 유이민 집단의 이주·정착에 의해 대규모 제철기지화 되었다. 평택 가곡리와 화성 기안리 제철유적 등 원삼국시대 후기 이전까지 경기남부지역에 조성된 초기의 제철유적은 내재적 발전 과정에서 안성천 이남의 마한 중심세력의 직·간접적인 관여에 의해 조성·운영되었으며, 여기서 생산된 철 자원은 대부분 마한 중심지로 공급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원삼국시대 분묘 유형과 출토 유물의 조합은 주구부목관묘와 타날문단경호·심발형토기로서 천안·아산지역의 그것과 같고, 취락 및 주거 유형 또한 대규모 하천 지류의 구하도 충적대지에 많은 구를 파서 구획 및 배수를 하는 등의 대규모 취락 유형을 보이고, 주거지 또는 창고 유형 또한 4주식주거지와 주구부주거지 또는 주구부고상건물로서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천안·아산지역에서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은 철기류들이 집중 출토되고, 주변의 마한 권역에서는 철기 출토량이 매우 빈약하게 나타나는 점 등이 이를 방증한다. 다만 마한 중심 세력의 영향력 추이는 2세기 중엽 원삼국시대 전기 후반부터 진위천 유역의 평택과 오산 남부지역에까지 미치던 것에서 원삼국 후기인 3세기 중·후반경에 이르면 수원 이남의 경기남부 전역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안성천 이북의 경기남부지역은 원삼국 전기 후반부터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마한 연맹체에 포함되었다가 원삼국 후기에는 그 범위가 수원 이남의 경기남부 전역으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3세기 후반~백제 초기에 이르러 이 지역의 제철기지 운용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에 마한 중심세력에 의해 운용되던 제철 기지에 새로 선진 제철기술을 가진 서북한 군현 이탈 유이민들이 이주·정착하여 대거 합세함으로써 이전보다 훨씬 대규모의 제철기지가 운영되었다. 이러한 군현 이탈 유이민의 이주·정착은 백제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백제의 경기남부지역 확보와 지배 목적은 넓은 충적 평야에서 생산된 풍부한 농산물과 제철기지 및 여기서 생산된 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이 지역에 양질의 풍부한 철광산이 입지하고, 하천 수계가 발달하여 제철기지를 조성하여 운영하는데 최적의 입지 환경을 갖추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백제는 원삼국 중기 후반 이후부터 마한 중심세력에 의해 운용되어 왔던 이 지역의 제철기지를 장악하고, 새로 선진 제철기술을 가진 서북한 군현의 유이민 제철기술자 집단을 기안리 유적 등 기존의 제철기지에 합세시킴으로써 철 생산 기술의 향상과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국가 성장·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마련되어 그 이남의 마한 제 세력들을 통합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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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덕진산성의 구조와 축조시기에 대한 검토

저자 : 박현준 ( Park Hyunjune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09-162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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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산성은 고구려에 의해서 처음 축조된 성벽을 통일신라시대에 여러 차례 이상 수축하였고, 이후 필요에 따라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략적인 시기를 살펴보면 초축은 삼국시대 말 즉, 6~7세기대로 추정되며, 축성주체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 공간적 범위는 내성 전역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된 근거로 고구려에 의해 축조된 토축부[치3]에서 출토된 장동호와 시루편, 그리고 주변에 위치한 호로고루와 보루들의 축조시점, 그리고 자연과학적 분석결과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7세기 후반에 이르러 통일신라에 의해 1차성벽[석축부]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개의 치와 치 기저부 강화를 위해 설치한 기단보축은 8세기대에 축조되었으며, 마지막으로 9세기대에 이르러 전면 가공한 화강암제 성돌을 이용하여 2차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치3에서 확인된 치 기단보축의 축조수법이 주변에 위치한 고구려 보루[무등리 2보루, 홍련봉 2보루]의 축조수법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축성기법이 유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내성의 성벽을 기저부로 활용하여 외성을 축조하였으며, 외성문지 토축부와 내ㆍ외성의 연접된 토축부에서 고려~조선시대 기와편과 백자편이 출토되어 편년에 좋은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외성에 대한 초축시기나 축성주체, 그리고 동파리보루와 덕진산성과의 관계는 명확히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후속조사가 이루어지면 좀 더 구체적인 면모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덕진산성 내성과 관련된 문지, 집수지, 건물지 등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가 실시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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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덕진산성의 축조 연대와 의미

저자 : 안성현 ( An Seonghyeon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63-19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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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산성은 고구려에 의해서 축성된 내성과 통일신라시대에 가축된 외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성임이 밝혀졌으며, 고구려는 현재 내성과 동일한 600m의 토성을 축조하였다. 초축 당시 덕진산성의 규모는 임진강 북안에 축조된 성곽들 중 은대리성을 제외하고는 최대형이며, 임진강 중·하류를 통제하는 거점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의 성내부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으므로 평탄지는 협소하였다는 점에서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임진강을 도강하기 유리한 여울목 주변에 덕진산성에 편제된 동파리보루를 축조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삼국이 통일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토성에서 석축성벽으로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으며, 성내부의 경관 역시 이전 시기와 상당히 다르게 변모하게 되는데, 곡부를 비롯한 내부에 대대적인 대지조성이 이루어진 후 기와 건물지가 설치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산성은 이전과는 달리 군사적 기능과 더불어 치소 및 물류의 통제 등을 겸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와 못지않게 덕진산성에 대한 학술조사에서 밝혀진 내용을 근거로 남한지역 고구려 성곽 및 보루의 시기별 경관의 변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와 석축부의 성격, 토성의 구조 등을 재해석 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였다는 점에서 학사적으로도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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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저자 : 서영일 ( Seo Yeongil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99-22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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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임진강은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의 경계 지대였다. 따라서 주요 도강 지점을 중심으로 삼국 대립과정에서 축조된 많은 성곽이 있다. 임진강을 중심으로 방어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고려하면 대체로 5세기경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은 주로 예성강 유역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전투지역이 임진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임진강 북쪽 마식령산맥(임진북예성남정맥) 일대가 격전지였다. 산줄기를 관통하는 고갯길을 중심으로 방어선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후반 경부터 고구려는 임진강의 도강처에 보루라 불리는 관방시설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구축한 것이다. 이후 7세기 전반 경 신라가 임진강 유역에 진출하여 임진강 남안 지역에 성곽을 축조하였다. 그 결과 임진강 북쪽의 고구려와 그 남쪽의 신라가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나당전쟁기까지 유지되었다. 임진강의 관방은 나루나 여울 등 대부분 도강처에 축조되었다. 교통로를 상호견제하기 위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덕진산성은 임진강 유역에서 한강 하구에 가장 가까운 성곽에 속한다. 한강 하구와 임진강 수로는 물론 육로도 통제할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 원인은 한강하구와 경기만의 제해권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과 관련되었다. 따라서 한강하구를 통제할 수 있는 덕진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점차 높아졌다. 호로고루에서 덕진산성에 이르는 지역이 방어의 핵심지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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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Study on the Construction Technology of Deokjinsanseong Fortress(德津山城)

저자 : 심광주 ( Sim Gwangzhu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27-25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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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郭은 규모도 크고 복잡하여 축성에 많은 인력과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 대형의 複合構造物이다. 토목 건축기술의 차이로 인하여 축성법은 국가마다 달랐으며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되었다. 따라서 정확한 축성법을 알면 성곽의 축성주체와 축성시기를 알 수 있다. 3차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덕진산성의 성벽은 중심부와 내벽은 흙으로 쌓고, 外壁은 돌로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단은 고구려가 쌓은 土城을 통일신라가 石城으로 개축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安息角`이 유지되어야 하는 토성의 구조적인 특징을 고려하면, 덕진산성은 土城에서 石城으로 改築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토성과 석성을 결합하여 쌓은 `土芯石築城`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토심석축성`은 고구려 성곽의 일반적인 축성법이다. 그러나 덕진산성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주로 출토되었으며, 성돌의 가공수법이나 성벽의 축조방법 등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축성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므로 덕진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고구려와 신라의 축성기술을 융합하여 쌓았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실시된 4차 발굴조사 결과 덕진산성 서쪽 성벽의 통일신라 성벽 안쪽에서 새로운 성벽이 확인되었다. 다듬지 않은 할석을 사용한 面石과 진흙으로 채우면서 쌓은 濕式쌓기, 성벽 안쪽에 土築部를 먼저 조성하고 석축으로 마감하는 방식은 고구려 축성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덕진산성은 고구려가 `토심석축공법`으로 初築하였을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덕진산성은 고구려에 의한 초축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2차에 걸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다. 1차 修築은 장방형으로 가공한 편마암 성돌을 사용하여 석축성벽과 보축성벽을 쌓았다. 이후 정교하게 가공된 화강암 성돌을 사용하여 1차 수축성벽의 바깥쪽에 2차 수축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이처럼 덕진산성에서 확인되는 여러 시기의 성벽은 축성주체와 축성시기에 따른 축성기술의 변화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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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덕진산성 보존과 활용의 기본방향

저자 : 이한용 ( Lee Hanyong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55-270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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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덕진산성은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개·보수가 이루어지면서 지속해서 사용된 산성으로 우리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덕진산성 정비·복원의 기본방향은 문화재의 보존이라는 대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활용도를 높이려는 방안을 마련하여 진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체계적인 발굴조사를 포함한 학술조사의 결과에 근거한 접근법이 매우 중요하다. 문화재는 우리 세대가 잘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줄 의무가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 점을 깊이 인식하여 보존과 활용을 염두에 둔 학술조사와 정비·복원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재의 적극적인 활용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문화재 보존방법이라는 인식하에 덕진산성 활용의 기본방향을 지역문화자원, 문화관광자원, 생태관광자원, 안보관광자원으로 구분하여 제시해 보았다. 문화재 보존관리의 기본원칙은 원형보존에 있음은 여러 차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향후 진행될 덕진산성의 정비·복원과 활용사업이 유적의 원형보존을 최우선 가치로 하여 무분별한 복원사업을 지양하고 잘 갖춰진 활용프로그램을 통해 효과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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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5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백제의 외교정책

저자 : 김기섭 ( Kim Kiseob )

발행기관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간행물 : 백제문화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71-29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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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濊族, 貊族, 韓族뿐 아니라 漢·倭 출신까지 다양한 종족이 한데 섞여 살았던 多種族, 多文化 국가였다. 백제는 馬韓의 여러 小國들과 경쟁하는 가운데 북방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漢문화에 익숙한 낙랑·대방 유민을 대거 흡수함으로써 3세기 말~4세기 초 국력을 크게 키웠다. 그리고 4세기 중엽부터 고구려와 각축을 벌이며 북쪽으로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였고, 남쪽으로 마한의 여러 소국을 병탄하거나 가야·신라·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중국 東晋에 조공하고 근초고왕이 鎭東將軍領樂浪太守 작호를 받음으로써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백제왕의 위상을 높였으며, 樂浪·帶方故地를 경영하는 데에도 매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4세기 후반, 백제는 고구려와 치열하게 다투면서 加耶·新羅·東晋·倭 등 주변나라들과의 외교에 힘을 많이 쏟았다.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에 지속적으로 대항하려면 당연한 방책이었다. 백제의 모든 군사력을 북쪽의 강적에 맞서는 데 쏟고 있었으므로 남쪽에서는 최소한의 군사활동과 다각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영역을 확장하고 지역패권을 형성하려 하였다. 특히, 바다 건너 왜로 향하는 길을 안전하게 만들려면 加耶와 新彌·牟奴 등 남부 해안지역에 분포한 국가·세력의 협조가 긴요하였다. 백제는 인구가 많은 倭의 군사적 도움을 기대하며 七支刀를 만들어 보내고 학자·기술자를 파견하는 등 선진문물을 과시하였다. 4세기 말~5세기 초,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거듭 패배하였다. 그리하여 이제는 王都가 위협받을 정도로 군사적 열세에 놓였다. 이에 백제는 바다 건너 倭의 군사력을 동원하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王室 사이의 혼인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人的, 物的 교류에 힘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75년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왕도 함락과 왕실 궤멸이라는 대참패를 겪고 말았지만, 그동안 구축한 외교라인(백제-가야-신라-송-왜)이 단단했기에 웅진에서 극적으로 부활하며 6세기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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