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단국사학회> 사학지

사학지 update

The Historical Journal

  • : 단국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226-1548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7)~56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446
사학지
56권0호(2018년)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1고려(高麗) 명종대(明宗代) 무신사신(武臣使臣)의 출현과 활동

저자 : 김현주 ( Kim Hyun-ju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32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高麗明宗代는 무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武臣政權期가 펼쳐졌으며, 북방민족이 세를 키워 강성해진 여진의 金이 대륙을 장악한 시기이기도 하다.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간 무신정권이 수립되어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의 흐름을 맞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정권의 중심에 문신이 아닌 무신이 서게 되었으며, 그들이 정계의 요직들을 차지해간다. 중앙 직책뿐만 아니라 외관직과 지방직으로도 진출하게 되며, 문신에게만 부여되던 지위와 직책으로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다.
본고에서는 明宗代사신 파견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武臣使臣을 출현케 한 정치ㆍ사회적 배경을 검토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무신정권기라는 배경을 고려하여 사신 파견의 이유와 그 역할은 어떠하였는지 살펴본 것이다.
먼저 毅宗에서 明宗으로 왕위가 넘어가는 武臣政變으로 인한 변화와 이때에 출현하게 된 武臣使臣의 배경을 파악하였다. 앞서 와는 어떠한 양상과 차이점을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통하여 문신의 역할이 어떻게 점차 무신으로 넘어오게 되었는지를 보려 한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明宗代武臣使臣파견과 활동양상을 통해 武臣政權期에 나타난 사신파견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또한 『金史』를 통해 대외관계에 있어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에 없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 사료의 공백을 보완해주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무신사신이 출현하게 된 전후로 하여 나타난 양상을 시기별로 살펴보았다. 明宗代에 무신들이 대외관계에서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파악해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간의 공백에 해당되는 무신사신에 대한 연구 성과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This dissertation aims to ascertain the appearance of the military official to envoy and the varying role by phase at the period of King Myeong-Jong. The period of King Myeong-jong of Goryeo, the Military Rule mainly consisting of military officials had come to power, over the course of 100 years from 1170 to 1270. Goryeo faced with a wave of change throughout the society, the military officials had been invested in an office of Central as well as diplomatic and provincial, also primarily civil officials' duties. Moreover, at the northern Korean Peninsula to main area of China, the Jurchen, one of the Northern people, had become powerful and prosperous, finally occupied the ruling position on the Chinese Continent by the name of Jin Dynasty.
First, this dissertation points out the shifts with the Military Coup Detat, King Ui-Jong to King Myeong-Jong, moreover, how the military officials replaced the duties of civils' in that period. Second, this examines closely the features of dispatching envoys in military regime period of Goryeo by looking through duties and activities the Military Official-Envoys in Myeong-Jong period.
As a result, with the intension and stability of Military Rule, the duties of military envoy were foreignly enlarged by phase. Also, this study supplements the former studies in the main Goryeosa and Goryeosajeolyo by searching for 'Geumsa' filling up foreign relation of Goryeo. This is also for exploring the influences of military official at diplomat field previously unwatched.

2파주(坡州) 혜음원지(惠蔭院址) 출토(出土) 칠기(漆器)의 제작기법(制作技法) 연구(硏究)

저자 : 박성우 ( Park Seong-woo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3-65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파주 혜음원지 5차 발굴조사에서는 출토사례가 적은 칠기굽접시 6점이 출토되었다. 그 중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고 복원이 되지 않는 편이 많은 4점을 선정하여 과학적 분석방법을 이용하여 칠기굽접시의 제작방법을 연구하였다.
혜음원지 칠기는 목재 백골 위에 직물로 형태를 잡고 칠을 이용해 제작한 목심저피칠기이다 .칠기의 내부관찰을 통해 확인한 결과 구연부, 동체, 바닥, 굽 부분 등을 따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용된 목재는 소나무로 분석되었으나, 분석된 시료가 한정적이어서 6점 모두 소나무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칠기굽접시-3, 4에서는 바닥에 '惠䕃'이라는 명문이 확인되는데, 분석 결과 수은(Hg)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진사(HgS)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속테두리는 주석(Sn)으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칠도막의 층상구조를 분석한 결과, 칠을 4번 실시한 것으로 추정되고, 바탕칠은 인(P)이 일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골분을 섞어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혜음원지 칠기굽접시 6점은 지금까지 매장문화재에서 알려진 적 없는 고려시대 칠기로 고고학, 미술사, 칠기공예사, 보존과학 등의 중요한 자료로써 주목된다. 또한 고려시대의 칠기문화 발전단계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In the 5th excavation investigation of Hyeumwon in Paju, six lacquer ware plates with few excavated cases were excavated. Four types of relatively complete and unrestored ones were selected and the method of making lacquered plates using scientific analysis method was studied.
Lacquer ware is Moksim jophy lacquer ware, which is made by using cloth to form a fabric on wood. As a result of internal observation of the lacquer ware, it is presumed that the mouth of a plate, the fuselage, the floor and the heel were separately manufactured. The wood used was analyzed with pine trees, but the analyzed samples are limited, so it is unlikely that all six trees are pine trees. On the lacquer ware plates 3 and 4, the lettering "惠䕃" is confirmed on the floor. It is presumed that cinnabar(HgS) is used because Hg(mercury) and S(sulfur) are confirmed as the result of analysis. It is confirmed that the metal frame is made of tin (Sn). The layer structure of lacquer was estimated to be painted four times, and the background paint was presumably mixed with bone fragments because phosphorus (P) and calcium (Ca) were partially identified.
The six lacquer ware plates of Hyeumwon are noteworthy in the burials of the Goryeo dynasty, and are noted as important materials such as archeology, art history, lacquer craft history, and conservation science. It is also expected to play an important role in studying the lacquer culture development phase of the Goryeo Dynasty.

3<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발견 시기와 출토 장소에 대한 논쟁들

저자 : 박은영 ( Park Eun-young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67-84 (1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하 경교비)는 당나라때 전해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교리와 전파과정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따라서 경교비가 발견되었을 때 당시 중국에 들어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경교비에 대한 큰 관심을 보이며, 연구를 진행하였다.
경교비는 발견 당시부터 그 진위문제 등 많은 논쟁이 야기되었는데 특히 경교비의 발견 시기와 출토 장소에 대한 논쟁이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경교비 발견 시기는 '1625년 설'과 '1623년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1625년 설은 세메도 등 당시 경교비를 직접 보고 관찰한 예수회선교사와 이지조, 서광계 등이 주장하고 있어 그 신뢰도가 높다. 1623년 설은 일본의 구와바라 지쓰조우(上原隲藏)가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 그는 디아즈의 기록과 이지조의 기록 등을 분석하여 경교비 발견 시기가 1625년 이전이라고 하였다.
경교비 출토 장소에 대해서도 장안에서 출토되었다는 '장안설'과 장안에서 약 150리 정도 떨어진 주질 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주질설'이 대립하고 있다. '장안설'을 지지하는 학자는 구와바라가 대표적이고, '주질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쁘레, 사에끼 등이다. '장안설'의 장점은 경교비가 300여 년 가까이 있었던 금승사의 위치가 당대 장안 대진사가 위치했던 의녕방이라는 점이다. 비의 매몰 당시 상황으로 보아 비를 옮겨 매몰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경교비는 금승사에 있었고 따라서 경교비가 발견된 장소는 장안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주질설'은 경교비 발견 당시 기록들에서 경교비 발견 위치가 대체로 주질 지방으로 쓰여져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The Monument Commemorating the Propagation of the Da-Qin Jing-Jiao(hereinafter Nestorian Stele) is a valuable material to show the doctrine and spreading process of Nestorian Christianity transmitted to Tang. When it was first discovered, many scholars including the Jesuit missionaries in China showed huge interest in it and conducted research on it.
Since its discovery, it had been subjected to much controversy over its authenticity. The controversy is still going on over the time of its discovery and the place of its excavation. There is a tense confrontation between two theories about the time of its discovery: one argues that it was discovered in "1625," and the other in "1623." The former was advocated by the Jesuit missionaries that personally saw and observed it including Alvare de Semedo and also by Li Zhizao(李之藻) and Xu Guangqi(徐光啓), thus enjoying high reliability. The latter was strongly argued by Kuwabara Jitsuzo(桑原隲蔵) of Japan, who analyzed the records of Diaz and Li Zhizao and maintained that it was discovered before 1625.
There is also a confrontation between different theories about the place of its excavation: one argues that it was excavated in "Chang'an," and the other in "Zhouzhi" that is about 150 Ris from Chang'an. The former was advocated by Kuwabara Jitsuzo, whereas the latter was by Henri Havret and Saeki Yoshiro(佐伯好郎). One of the advantages of the former is that the location of Geumseung Temple(金勝寺), where the Nestorian Stele was standing for approximately 300 years, was Uinyeongbang(義寧坊) where Daejinsa (大秦寺) was in Chang'an during Tang. Given the situation in which it was buried, there is no way that they moved it to bury it there. It was thus argued that it was at the Geumseung Temple from the beginning, which means that it was discovered in Chang'an. On the other hand, the advantage of the latter is that the records from the time of its discovery mostly said that it was discovered in Zhouzhi.

41975년 이후 통일베트남을 위한 교육시스템 수립 -도전과 해법 그리고 몇 가지 경험

저자 : 쯔엉티빅하인 ( Truong Thi Bich Hanh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5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85-106 (2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국가의 통일 과정이 완성되기까지는 1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고, 특히 교육 부문에 대한 것은 복잡했다. 본고는 1945년 9월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이 해방된 이후의 교육과정의 변화를 살피고, 1975년 베트남 재통일 후 교육과정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먼저 임시 분리 기간의 베트남 교육(1954-1975)이다. 해방 직후 베트남은 반 문맹 퇴치를 목표로 했다. 1946년에는 국민을 위한 과학·통속적이며 민주주의에 부합한 교육 제도, 1단계(4년)-2단계(3년 특수 과정의 일반 교육/1년 실험 교육 후 1~3년의 직업 관련 전문 교육)-3단계(최소 3년의 대학 과정)이라는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나 1950년 인도차이나전쟁으로 인해 이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인도차이나전쟁 후 베트남 교육은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소련(USSR)의 교육 시스템을 모방한 북베트남과 미국의 교육을 모델로 삼은 남베트남의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베트남은 초등 4년-중등 3년-고등 3년의 교육 과정을 채택하고 다각적으로 발달된 좋은 시민이자 관리자를 육성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목표는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교육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북베트남의 교육 과정은 지혜와 애국심을 갖춘 젊은 세대를 양성했다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정책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고전적인 교육 과정 접근법에 편향되었다는 문제가 있다.
남베트남은 인본주의·민족주의·국가 해방·과학이라는 요소를 내걸고 교육 과정을 수립했다. 또한 초등 5년-중등 4년-고등 3년이라는 교육단계를 설정했다. 고등 교육 과정은 실용성보다는 학문적 측면을 강조했다. 남베트남의 교육 과정은 미국 국제 개발처(USAID)의 지원을 받았는데, 점차 학구적인 프랑스식 교육에서 현실적인 미국식 교육으로 변모했다. 그 결과 학생 수는 물론 학교의 수도 증가하게 되었다. 남베트남의 교육 과정은 국가의 예산이 부족해 장기 정책이 부재했고 시설이 낙후되었으며 좋은 교사가 부족했다. 또한 국가의 부패 역시 국민에게 불신을 불러왔다.
1975년 베트남 전쟁 이후의 교육 과정은 남베트남의 방식을 소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교과서는 새로 만들어졌고, 교사도 다시 채용되었으며 학교는 국유화되었다. 그러나 지역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가 없이 너무 성급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반 문맹 퇴치를 시행했으며, 1979년에는 교육 제도의 구조를 수정해 12년의 일반 과정을 적용했다. 이러한 노력은 전후의 어려움으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베트남의 경제는 어려웠고, 교육을 지원할 재정이 부족했다. 그 결과 학생과 학교의 수는 감소했다. 베트남은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86년 민주화·사회화·다각화·표준화·현대화를 바탕으로 교육 개혁을 시작했다.
이러한 베트남의 교육 과정 전개는 다음의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첫째, 한 국가의 통합은 오랜 시간이 소모되며 교육은 더욱 주관적이고 성급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 둘째, 통일의 기본은 국가주의라는 점 셋째, 각 교육 시스템의 긍정적 요소의 활성화이다.


In April 1975, the Vietnam War ended and completed the reunification process after 21 years of division since April 1975 to July 1976, when the 6th National Assembly of unified Vietnam was held for the first session. However, the unification in term of economic - social, including education sector was much more difficult and complicated. Building up a new education system for a country after the war encountered many difficulties and challenges because of not only the difficult situation in the post-war period, but also the fact that those of the two regions in Vietnam were quite different before the independent day.

1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단국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선문대학교 연세대학교 동국대학교
 52
 28
 24
 21
 21
  • 1 단국대학교 (52건)
  • 2 성균관대학교 (28건)
  • 3 선문대학교 (24건)
  • 4 연세대학교 (21건)
  • 5 동국대학교 (21건)
  • 6 이화여자대학교 (20건)
  • 7 건국대학교 (20건)
  • 8 고려대학교 (20건)
  • 9 충남대학교 (20건)
  • 10 서울대학교 (19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