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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Culture Research

  •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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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9-7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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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4)~84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989
민족문화연구
84권0호(2019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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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본 교토대학 가와이문고 소장 야사총서(野史叢書)의 학술적 가치

저자 : 정우봉 ( Chung Woo-bo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3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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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대학 부속도서관 가와이문고(河合文庫)에는 820여 종의 고서, 3200여 건이 넘는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이 논문에서는 野史叢書를 중심으로 가와이문고 한국 고서의 자료적 가치에 대해 다루었다. 가와이문고 소장 야사총서는 모두 3종이 있다. 『昭代粹言』, 『鵝洲雜錄』, 『說叢』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說叢』은 국내외 이본이 확인되지 않는 유일본이다. 가와이문고본 『鵝洲雜錄』은 편자인 洪重寅의 장서인이 찍혀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 국내외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야사총서뿐만 아니라, 편찬자의 原稿本이 가와이문고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說叢』에서 주목할 사항은 장서인이다. 여기에는 「嘉林白氏之章」, 「永嘉金○信」, 「繡山」의 3顆가 찍혀 있다. '嘉林白氏之章'은 20세기 초 대표적 서적상이었던 白斗鏞(1872-1935)의 장서인이다. 그는 고서 매매 서점과 출판사였던 翰南書林의 주인이었다. 백두용의 장서인이 찍혀 있는 책들이 국내외에 다수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고서들은 백두용이 한남서림을 통해 판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고서의 해외 유출의 경과를 추적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장서인의 정보는 매우 중요하다.


Kawai Library, an attached library of the University of Kyoto, Japan, houses 820 kinds of old books and more than 3,200 ancient documents. This paper deals with the material values of Unofficial History Series Publication (野史叢書). There are three kinds of Unofficial History Series Publication, in other words Seolchong (說叢), Ajujablog (鵝洲雜錄), Sodaesueon (昭代粹言). Seolchong (說叢) is a new material that is not listed elsewhere. The book is stamped with Baek Doo-yong (白斗鏞). Baek Doo-yong was a famous book trader and publisher in the early 20th century. He sold many books, and Japanese scholars bought books through him. You can see the situation of Korean old books exported to overseas.
Ajujablog (鵝洲雜錄) has his own stamp. This Unofficial History Series Publication was copied by many people, and there are several versions. This made it difficult to estimate which text was close to the original. The information on the dojo in the book can help you to estimate the original. In this sense, Ajujablog (鵝洲雜錄)'s academic value in the Kawaii library is high. In addition, I looked at two kinds of writings, in other words Haedongjegapildam (海東諸家筆談) and Jingseonglog (懲省錄). I hope that more research will be done on the old books of Korea in the Kawaii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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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京都大學 東京大學에는 서울 壯洞의 안동김씨, 會賢洞의 동래정씨, 內寺·尙宮 등 京居 양반이나 왕실 주변 인물의 고문서가 다수 전한다. 이 글에서는 서울의 대표적 가문인 안동김씨 金壽增·金壽恒 남매의 분재기를 소개하고 이들의 재산규모와 그 양태를 살펴보았다.
1672년 당시 안동김씨 金壽增 형제 남매가 분재한 재산은 노비 410구 전답 500여 斗落에 달하였다. 17세기 중엽 과거와 관직, 禮學을 주업으로 하는 서울의 學術官僚型 양반의 재산보유 규모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례로 판단된다. 노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답이 적은 것이 영남 등 같은 시기 여타 양반가와 차이가 나는 점이다.
분재기에 나타나는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사조가 노비 205구, 전답이 100여 두락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게 책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봉사조 재산을 종가에서 운영토록 하는 것은 자녀 간 균분의 본 뜻을 저버리고 법을 준수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지만 이는 주자학적 질서를 가정 경제 운용에 적용시킨 경우에 해당하여 오히려 사대부들이 장자의 경제적 지위를 공고히 해주는 본보기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둘째, 김씨가의 노비는 대부분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등 전국의 군현에 분포한다. 이들은 使喚 노비가 아니라 身貢 노비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노비에 대한 納貢 중심의 경제구조이다. 이와 같이 토지와 결부되지 않은 노비의 보유와 운용은 매우 취약한 경제구조를 지닌다.


At Kyoto University and Tokyo University in Japan, many old documents (古文書) by eunuch, court lady or the yangban such as Andong Kim Clan in Jang-dong, Dongnae Jeong Clan in Hoehyeon-dong will be handed down. In this article, introduced the Bunjaegi (分財記) of Andong Kim Clan's Kim Su-jeung, Kim Su-hang and his siblings, and looked at the size of their assets. In 1672, Kim Soo-jeung's brothers distributed assets was amount to Slave 410 gu (口) and farmland 500 durak (斗落). It is considered a very meaningful case in that it is the size of Seoul's academic and bureaucratic Yangban's property holdings, which are based on the gwageo (科擧), government posts and yehak (禮學) in the mid-17th century. The relatively small area of farmland compared to slaves is the difference between Yangban's familly of Yeongnam and other regions during the same period.
To summarize the characteristics of Bunjaegi (分財記), the following:
First, for the purpose of bongsa (奉祀), appropriated budget was that the be amount to slaves 205 and farmland 100 durak (斗落). In addition, for the purpose of bongsa (奉祀), run their property at the head family (宗家) betrayed the original meaning of equal distribution to their children and resulted in non-compliance with the law. however, this is a case in which the order of neo-Confucian (朱子學) is applied to the management of the domestic economy, and rather sets an example for the sadaebu (士大夫) to consolidate the economic status of the eldest son.
Second, Most of Kim's slaves are distributed to counties and prefectures across the country, including Gyeongsang-do, Jeolla-do and Hamgyeong-do. These slaves exist as sin-gong (身貢) and not sahwan (使喚), which means an economic structure centered on napgong (納貢) for slaves. As such, the possession and operation of slaves of non-related with farmland has a very weak economic stru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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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도시 지역에서 3.1운동의 전개와 특징

저자 : 염복규 ( Yum Bok-kyu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5-129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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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도시 지역에서 3.1운동의 전개과정과 특징을 살펴본 연구이다.
먼저 1919년 당시 식민지권력이 행정적 도시로 지정한 12개 府와 23개 指定面, 그리고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고 철도역이 입지한 일부 보통면을 도시로 설정했다.
다음으로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의 분류에 따라 3.1운동의 기본 유형, 행동 양상, 주체, 매체, 운동 발발의 시점, 시간대를 살펴보았다.
기본 유형에서 도시의 특징은 학생의 운동인 휴학휴교와 개인적 투쟁이 대부분인 기타활동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학교가 있는 곳이 곧 도시임을 알 수 있다.
행동 양상은 도시, 비도시를 막론하고 만세가 주류였다. 그런데 도시는 비도시에 비해 파손파괴의 비중이 확연히 높았다. 이는 도시가 비도시에 비해 파괴할만한 시설이 밀집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운동의 주체는 도시, 비도시를 막론하고 예수교도, 천도교도, 학생, 농민이 절대다수였다. 그런데 예수교도는 도시, 비도시를 막론하고 고른 비중인 반면 도시에서는 학생, 비도시에서는 천도교도, 농민의 비중이 확연히 높았다.
깃발, 문서, 구호는 3.1운동의 3대 매체였다. 그런데 깃발은 도시, 비도시를 막론하고 고른 비중인 반면 도시에서는 문서, 비도시에서는 구호의 비중이 확연히 높았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문자 네트워크와 음성 네트워크가 서로 구분되는 공간에서 기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운동 발발의 시점을 보면 도시에서는 3월 초순에 급상승, 중순에 하강, 하순에 재상승, 4월 들어 지속적 하강의 곡선을 그린다. 반면 비도시에서는 3월 내내 서서히 상승, 4월 초순 절정, 중순부터 급하강의 곡선을 그린다. 이는 도시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점차 인근 비도시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운동 발발의 시간대는 도시와 비도시가 비슷하다. 그러나 도시는 오후의 비중이 조금 높으며, 비도시는 야간의 비중이 조금 높다. 이는 두 지역 간의 생활 리듬의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분석은 빅데이터에 기반한 운동의 '양적 분석'이다. 추후 이를 기반으로 '질적 분석'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Abstract This paper analyzes the development and characteristics of the March First Movement in 1919 in urban areas, based on the database built by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The database classified as the urban areas in colonial Korea as of 1919, a composition of the twelve boos (府, administrative cities designated by the colonial government), the 23 designated myeons (面, lager townships), and some of the non-designated myeons of a relatively large population, many of them located with railway stations.
This paper looks into the categories of the database, including the basic types of the protests, the degrees of violence, the types of participants, the media used in rallies, the temporal developments of the protests, and their usual time-slots of the day.
Major characteristics of the types of protests in the cities are students strikes and other activities, mostly done by not-organized individuals. It reflects the fact that most schools were located in colonial cities.
As for the degrees of violence in the independent protests, most of the protesters favored non-violent chanting “manse,” a slogan calling for independence to the Government-General, both in urban and rural areas. However, in the cities, damage to property had higher percentages compared to the rural areas, which showed property worth damaging concentrated in urban areas.
Participants were mostly composed of Christians, followers of Cheondogyo, a Korean religion, students and farmers across the nation. While Christians participated in similar percentages, regardless of rural or urban areas, students had a greater presence in the city rallies and members of Cheondoist and farmers in non-city areas.
Three major media of the March 1 Movement were banners, flyers, and slogans. While banners were favored evenly both in rural and urban rallies, city protesters preferred flyers and their non-city counterparts more heavily depended on chanting slogans. It showed the letter-based network and verbal network co-existed in different spatial zones in colonial Korea.
As for the temporal development of rallies, in most cities, they surged in early March, slowed in mid-March, resurged later in the month, and subsided in April. On the other hand, in rural areas, demonstrations gradually gathered momentum all through March, reached a peak in early April and abated from mid-April. In overall, the nation-wide protests started in the cities and gradually spread out into neighboring non-city areas.
Whereas the time-slots of rallies were similar in cities or non-cities, in cities, more protests occurred in the afternoon, and in rural areas, they happened slightly darker hours than in the cities. That showed a difference in rhythm of life between cities and non-cities.
This analysis is a quantitative one based on the big data and can be used as a basis for further qualitative studies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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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농촌지역 3.1운동 확산과 공간적·형태별 특성

저자 : 이송순 ( Lee Song-so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1-177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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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총독부 각 기관이 생산한 3.1운동 관련 자료를 총합하여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본 연구는 이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농촌지역에서 발생한 3.1운동의 공간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1919년 식민지 조선의 행정구역은 13도 220군 2,509면이었다. 3.1운동은 전국 220개 군 중 212개군(96.4%), 2,509개 면 중 1,019개 면(40.6%)에서 일어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 조선의 행정구역은 13도 317군('옛군')이었다. '옛군' 단위로도 289개 군(91.2%)에서 3.1운동이 발생했다. 통폐합 이후 220개 군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군청소재 지면의 3.1운동 발생 비율도 86.8%였다. 이는 한반도 거주 주민들의 80% 이상이 3.1운동의 발발과 그 내용 및 의의, 경찰·헌병의 탄압 양상도 공유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3.1운동 주도세력별 공간적 특성이다. 천도교는 교구를 활용한 독립선언서 배포와 천도교도들의 조직적인 시위가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평안남북도, 함경남도, 강원도, 전라북도 지역에서 '천도교 벨트/존'이라 할 수 있는 천도교도들의 조직적인 운동 참여가 있었다. 반면 기독교는 교회 중심으로 기독교도들의 참여가 이루어져 특정 지역성을 보이지 않는다. 평안남북도, 황해도, 경상북도 지역에서 기독교도의 주도 및 참여에 의한 3.1운동이 발생했다. 학생세력은 보통학교 학생이 참여했는데 특히 경기도와 충청남도 지역은 보통학교 학생시위가 군내 시위의 첫 시작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3.1운동 발생 공간의 형태에 따른 특성이다. 3.1운동의 발생공간으로 주목되는 것은 장터(오일장)시위, 관청시위, 산상-봉화시위가 있다. 장터시위는 주변으로의 운동 확산에 유리했고, 대규모 시위인 경우가 많았다. 관청시위는 면사무소, 경찰(헌병)주재소 등 식민통치기관을 직접 타깃으로 하는 것으로 대응 폭력에 의한 폭력시위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산상-봉화시위는 시위참여자의 피해와 희생을 최소화 하면서 독립과 식민지배 저항의 목소리를 지역민들에게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공간으로 야간에 산 위에서 봉화를 활용하였다.


In commemoration of the 100thanniversary of 3.1Movemen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created a “3.1. Movement Database” by compiling all the data that the Governor-General of Joseon produced on 3.1 Movement. This research utilized the data from this database to explore the spatial characteristics of the 3.1 Movement that took place in rural areas.
In 1919, the 3.1 Movement took place in 212 Gun/county out of the total of 220 (96.4 percent), and 1,019 Myeon/township out of the total of 2,509 (40.6 percent). The movement took place in 289 traditional Gun, an administrative unit different from Gun of nowadays, out of the total of 317 (91.2 percent). 86.8 percent of the Myeon where county offices were based experienced 3.1 movement. In other words, more than 80 percent of the residents in the Korean peninsula participated in or experienced 3.1 movement.
There is a trend in what kind of groups were in leadership of 3.1 movement in each region. The followers of Cheondogyo employed dioceses to distribute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organized protests around certain regions, which led to the emergence of 'Cheondogyo belt'in PyeonganNam,buk-do/province, HamgyeongNam-do/province, Kangwon-do/province and JeollaBuk-do/province. Christians organized their movements around their churches in both urban and rural area, which means there was not a Regional trends of their movements. Student-led movements were spearheaded by elementary (primary) school students, and such movements played a keyrole in Gyoenggi-do and ChungcheongNam-do.
The 3.1 Movement can be categorized by where each movement was initiated. The categories are marketplace protest, county office protest, and the hill-torch protest. Marketplace protest was strategically advantageous in spreading the movement to neighboring regions, and usually were large-scale movements. County office protests directly targeted the colonial government buildings such as the police office, county office and township office, which were often suppressed through physical violence. Violent protests rose against such suppressions. The hill-torch protests were initiated autonomously by the farmers in community units. This type of the movement enabled the participants to minimize the casualty rate while maximizing the efficacy of the delivering the message of resistance by using the torch on hill t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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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19년 3월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의 재구성

저자 : 정병욱 ( Jung Byung-woo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9-22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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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는 헌병대 인도를 요구하며 하루에 세 번, 총격을 무릅쓰고 격렬하게 시위한 '공세적 시위'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이는 기존 연구에서 일본 헌병이 자신들의 발포를 합리화하고 조선총독부 일부 판·검사가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쓴 용어('습격', '폭동' 등)와 해석(헌병대 '접수' 기도)을 사료 비판 없이 부정적 의미에서 긍정적 의미로 관점만 바꾸어 원용함으로써 구성된 것이다. 시위 횟수, 발포 계기, 요구사항에 대해 기존의 관행적 이해에서 벗어나 합리적 의심을 통해 새로운 역사상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수안군 천도교도의 시위가 '공세적'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존 연구에서 간과했던 시위대의 요구사항 '구속자 석방'을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 피지배자가 자신을 보호해야 줄 국가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 국가와 같은 역할을 기대한 것 중 하나가 종교였다. 그런 종교공동체의 지도자와 동료가 독립선언 시위를 준비하다가 식민지 권력에 의해 구속되었다. 이에 대한 수안지역 천도교도의 석방 요구와 시위는 식민지 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부정이라 할 수 있다. 그 바탕에는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The protest that took place in Suan-myeon, Suan-gun of Hwanghae Province is a prototype of 'aggressive protest', during which the participants demanded the military police to return to Japan and relinquish their office building while risking the shootings that happened three times a day. However, such historical narrative of the protest was produced as scholars rephrased the negatively charged terminologies and interpretations in a more positive light without critical analysis of the primary sources. The negatively nuanced terminologies ('raid', 'riot', etc.) and interpretations (attempts to 'take over' the military police) employed to describe this protest came from the Japanese military police's attempt to justify their shootings and Government General of Joseon's prosecutors and judges' attempts to sentence the accused to treason. This study strives to cast reasonable doubt on the established understanding of the protest and build a new historical narrative based on new interpretations of the frequency of the protest, the reason for shootings and the demands of the protesters.
The fact that the protests organized by Cheondogyo believers in Suan region were not aggressive does not undermine the significance of the protests themselves. 'Release of the detainees', which was one of the demands of the protesters, needs to be brought into light though previous studies have overlooked this aspect. Religion served as a mechanism for protection and security by making up the absence of a nation-state, which has fallen and lost its function under the colonial rule. In the case of Suan, the religious leaders and followers, who were key components of such security and protection mechanism, were arrested as they prepared for the protests. Considering such context, the demand for release of the detainees and protests in Suan should be understood as the challenge of and resistance to the colonial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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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고문헌에 나타난 천문 현상에 따른 풍흉과 길흉 예측 ―해, 달, 별을 통한 예측과 민속과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저자 : 김태우 ( Kim Tae-wo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23-26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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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세시기, 개인 문집, 농서, 유서류 등 여러 문헌에서 해와 달, 별 등의 천문 현상을 보고 풍흉이나 길흉을 어떻게 예측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중에 해와 달, 별과 관련된 천문 예측의 대략적이고 공통적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해를 보고 예측하는 경우 주로 비와 바람에 대한 것이다. 햇무리가 지면 비가 오고 해에 귀가 생기면 맑거나 흐리게 된다. 해의 남쪽에 귀가 생기면 맑고 북쪽에 귀가 생기면 비가 오며 두 개가 생기면 비가 그친다. 햇무리의 색도 대체로 누르면 좋고 다른 색이면 좋지 않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달을 보고 예측하는 경우, 달빛이 붉으면 가뭄이 들고 희면 비가 많이 와서 수해가 있다고 했다. 반면, 누런빛이나 짙은 황색이면 풍년이 든다고 보았다. 달무리가 있으면 바람이 분다고 했다.
다음으로, 별을 보고 예측하는 경우, 묘성(좀생이별) 보기의 내용은 상대적으로 혼재되어 있다. 즉, 달과 묘성의 거리가 가깝고 묘성이 달보다 뒤에 있으면 풍년으로 보았고 반대로 거리가 멀고 묘성이 달을 앞서서 가면 흉년으로 인식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현재까지 이어져 지역에 따라 좀생이별 보기의 기준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 밖에 별빛이 불안정하면 대체로 바람이 분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일식과 월식은 대체적으로 모두 좋지 않은 징조로 보았다. 오성들도 계절별로 그 색깔과 밝기가 정상이면 화평하지만 원래의 상태와 다르다거나 오성 중에 두 개 이상의 행성들이 합(合), 수(守), 범(犯), 투(鬪)하면 재해가 있다고 보았다. 그 외 요성, 객성, 유성, 혜성의 경우는 모두 불길한 징조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천문 예측 문헌 기록과 민속과의 관련성을 볼 때, 달점 보기나 좀생이 별 보기 등 달이나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민속의 상당 부분이 문헌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았다. 추후 민속 연구에 있어서도 이러한 관점은 유념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We examined how astronomical phenomena such as sun, moon, and stars are predicted from various literatures such as writings on seasonal customs, personal literatures, agricultural books, and encyclopedic literatures.
First, when looking at the sun predict it, it is mainly about rain and wind. When it is the ring around the sun, it rains, and when the ears are in the sun, it becomes clear or cloudy. If there is ear on the south side of the sun, it becomes clear. If there is ear on the north side of the sun, it becomes rains and if there are two ears, it becomes stop raining. People generally think that the color of the halo of the sun is good if it is yellow and it is not good if the color is different.
Next, if you look at the moon and predict it, the moon is red, and it is said to be drought. And when the moonlight is white, it is said that there is a lot of rain and floods. On the other hand, it was said that if it was yellow or dark yellow, it was good year. When there was the halo of the moon, the wind was broken.
Next, the methods of forecasting of the Pleiades view are relatively mixed. In other words, when the distance between the moon and the Pleiades is close and the Pleiades is behind the moon, it is seen as a good year. On the contrary, there were cases in which they were recognized. This aspect continues until now, and the standards of forecasting of the Pleiades view is different according to the region. When starlight was unstable, people generally saw that the wind was mostly blowing.
Next, sun eclipses and lunar eclipses were generally regarded as bad signs. Even if the colors and brightness of the Oseong (五星) are normal, they are peaceful. But when the Oseong are different from their original state, or when two or more planets are Hab (合), Su (守), Beom (犯), or Tu (鬪), the disaster occurred. In addition, people are all ominous signs when they see Yoseong (妖星), Gaegseong (客星), Yuseong (流星, meteor), and Hyeseong (彗星, comet).
Finally, when we look at the relationship between astronomical predictive documents and folklore, it is necessary to keep in mind that much of the folklore may have originated in the literature. This viewpoint should be kept in mind also in the study of folklore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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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진실' 사이 ―동계(東谿) 조구명(趙龜命)의 역사 소재 산문 연구―

저자 : 정하정 ( Jung Ha-j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3-29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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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귀명은 통념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解悟와 독자적인 사유를 강조한 문학론 및 그에 상응하는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문학을 남겼다. 역사 소재 산문 역시 그것들과 궤를 달리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그의 문학이 가지는 섬세한 결이 '독자적', '개성적'이라는 명명 하에 매몰되지 않도록 보다 면밀하게 검토하고자 하였다. 구체적으로, 사실 기록으로서 인식되었던 역사를 소재로 한 산문에서 그가 보여준 문학적 특징을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이는 그의 문학이 통념과 보편이라는 범주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가늠하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 조귀명의 역사 소재 산문이 보이는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蘇軾에 대한 특별한 지향을 보였던 조귀명은 역사 소재 산문이라는 지면을 통해 소식의 문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자 하였는데, 이 점이 누구보다 강하게 드러났다.
둘째, 유교의 이념 윤리 대신에 현실 결과를 중시하는 관점을 제시하고, 일반 擬作과는 다른 관찰자의 시점을 취하여 역사 기록에 틈입한 서사의 확장을 이룩하였다.
셋째, 역사에 존재할 수 없는 장면을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연출하면서 허구성, 서사성, 과장된 묘사, 극적인 연출 등을 갖추는 한편, 통념이 된 주제를 자신만의 논리 구조를 통해 제시하였다.


Jo Gui Myoung (趙龜命) rejected common idea and created a unique literature, leaving the theory of literature to emphasize his own enlightenment. Historical prose does not differ from them. However, in this paper, the delicate essence of his literature was examined more closely so that it would not be buried under the name of 'unique' and 'individual'. It was an attempt to gauge how far his historical prose was in the universal category. As a result, Jo Gui Myoung's historical prose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Jo Gui Myoung, who showed a special interest in Su Shi (蘇軾), showed his consciousness to criticize and transcend Su Shi's view through the prose of history.
Second, instead of the duty of Neo-Confucianism, he had a goal-oriented view acquired by observations of the historical world, and took a third person viewpoint different from the general Uijak (擬作) and achieved the narrative expansion of the history record.
Third, he created scenes that can not exist in history through his own imagination, and it is equipped with fictitious, epic, exaggerated, dramatic and so on and presented my conceptualized subject through my own logical stru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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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세기 경화사족 김용겸(金用謙)의 삶과 교유

저자 : 박현순 ( Park Hyun-so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91-33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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嘐嘐齋 金用謙(1702-1789)은 그리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의 문제적 지식인들은 그와 막역하게 교유하였고, 그와의 관계를 특별하게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글은 18세기 후반의 청년들이 왜 김용겸의 주변에 모여 들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그의 삶과 교유관계를 추적하였다.
김용겸은 장동김문이라는 노론 세가에서 출생하여 누대에 걸쳐 만들어진 노론 낙론계의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런 배경을 둔 김용겸은 정통적인 도학자, 예학자의 면모를 갖춘 노론 낙론계 학자였다. 그러나 김용겸은 당시의 학풍을 '假道學'이라고 규정하고 古禮에 천착하면서 博學을 통해 '眞道學'을 추구하였다. 박학은 도학을 위한 학문적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학보다는 박학이라는 방법론이 그의 학문적 위상을 대변하게 되었다.
김용겸이 청년들의 이목을 끈 것도 이 지점이다. 그는 기성의 학계에 피로감을 느낀 청년들과 문제 인식을 공유하고 長幼와 貴賤을 가리지 않는 개방적인 태도로 젊은이들과 학문적으로 교유하였다. 이를 통해 청년들과 김용겸의 교유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김용겸과 청년들의 교유에는 전승해야 할 학문적인 의제도 없었고, 그 관계를 사제 관계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나아가 김용겸이 그 중심에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관심사에 따라 어울리며 서로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고 스스로의 인식을 확장해 갔을 뿐이다. 박학을 매개로 하는 이 같은 학문적 네트워크의 존재를 18세기 후반 한양 지식인계의 주요한 속성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examines the life and companionship of Kim Yong-kyeom (1702-1789) through special memories left by capital-based intellectuals in late 18th century.
Kim was born to a Noron Jangdong Kim's family and got involved in a broad network of Nakron School formed over a number of generations. From this background, he appeared as a Nakron scholar with aspect of traditional Neo-Confucianist. However, Kim regarded the then academic tradition as 'fake Neo-Confucianism' and attempted to pursue 'true Neo-Confuciansim' through ancient rites and extensive learning. Extensive learning was an academic methodology for Neo-Confucianism, but the methodology itself turned out to represent Kim's academic status rather than Neo-Confucianism.
It was this aspect that Kim attracted young scholar's attention. Kim shared ideas with those young people who got exhausted by the established academic tradition and enjoyed academic companionship with them regardless of age or status through his open attitude, and as a result, the network between them was built. Their relationship was not of teacher-pupil relations, and moreover Kim was not even at the center of that network. They just interacted with one another according to their interest, gained knowledge and information, and expanded their own perceptions. This kind of network formed through extensive learning can be understood as a major characteristic of capital-based academia in late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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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의 해양(해양국가)에 대한 인식 연구

저자 : 임명걸 ( Ren Ming-jie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35-36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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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영재(泠齋) 유득공(1748-1807)의 해양·해외에 대한 인식을 통해 당시 조선지식인의 해양 및 해양국가에 대한 인식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유득공은 청나라의 발전된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이용후생을 이루자는 북학사상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해양과 해외에까지 그 관심의 폭을 넓혔다. 유득공의 해양 및 해양국가에 대한 인식은 그의 연행록 『熱河紀行詩注』(1790)와 『燕臺再遊錄』(1801) 외에 문집 『고운당필기』, 『영재집』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즉 일본, 유구는 물론 서양의 영국과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였다. 유득공은 이들 아시아와 서양의 해양국가들에 대해 지리, 풍속, 물산은 물론 학예의 수준과 학문적 경향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서양 해양국가에 대해서는 정보와 언어의 한계로 인해 이해에 많은 제약성을 보이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정보력을 동원해 그들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한 자취가 글을 통해 역력히 나타난다. 특히 서양의 견고한 선박과 무기에 대한 상세한 기록 등은 유득공이 이때 이미 서양 해양세력이 동아시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자국 즉 조선 주변의 島嶼와 연해 등에도 주목함으로써 근대적 해양인식을 보여주는 기록들도 보인다.


This thesis observed the Joseon intellectuals's understanding of the ocean and ocean countries by studying on YoungJae Lyu, Dug-gong (1748-1807)'s understanding.
As an important intellectual of Bukhak school in 18th century, Lyu, Dug-gong mainly expressed his understanding of the ocean and ocean countries not only in his Yeonhaengrok, Yeolha Travel Poetry Note (1790) and Youn Dae Jae You Log (1801), but also in his anthology, Goundang Pilgi and Selected Work of YoungJae. He had a broad perspective on Japan, Ryukyu and also western countries, such as England and Netherlands. The records reflecting the modern understanding of the ocean, which includes the islands and coastal areas around his own country, can be found in his works.
Lyu, Dug-gong, as a great Joseon scholar of the 18th century, had a wide interest in the geography, customs, products, academic and artistic levels and trends of not only Japan and Ryukyu, but also the western ocean countries. Of course, the understanding of academia and art of western ocean states is poor due to information and language limitations. Nevertheless, the traces of his efforts to understand them with the greatest amount of knowledge can be found in his writings. Especially, he made great efforts to get more information about western ocean countries such as the United Kingdom and the Netherlands. For example, he particularly recorded the strong and solid ships and weapons in details. The sense of crisis that Western maritime forces could threaten East Asia is clear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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