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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Culture Research

  •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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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4)~88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052
민족문화연구
88권0호(2020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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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 초기 종교 심성의 전환과 신사(神事) 혁신

저자 : 최종석 ( Choi Jong-su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5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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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에는 국가와 개인 차원에서 神에게 제사하는 일을 대상으로 하여 대대적인 혁신이 단행되었다. 국가 차원의 제사는 국가와 민인에게 공덕을 베푼 존재를 대상으로 보답과 감사를 전하는 당위적이고 윤리적 행위로 변모하였고, 개인적 치제는 官·民이 分限에 걸맞게 자신의 조상만을 제사 지내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추진되었다.
祀典과 개인적 치제 방면의 이러한 혁신은 종래와는 이질적인 종교 심성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단순히 유교화의 진전의 차원에서 시행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명나라 초기에 새로이 등장한 종교 심성과 이를 토대로 한 각종 조치를 수용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명초의 종교 심성은 유례없이 혁신적이었고 이를 토대로 한 각종 조치 또한 그러하였으며, 이러한 각종 혁신책은 명에서 하향식으로 추진되었고 당시 현실과 괴리가커 예제와 법령을 통해 강제되었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정착되어가기보다는 오히려 유야무야되어갔다. 이와 같은 성질의 것을 수용하여 조선초기에 추진된 각종 개혁책 역시 종래의 종교 심성과 이질적이었고 당시 현실과 괴리가 클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神事를 대상으로 한 각종 개혁은 태조·정종대에 空轉하기는 했지만 태종대를 분기점으로 해서 구현되어 갔다. 祀典과 개인적 치제 방면의 혁신은 조선의 현실이 감당하기에 벅찬 성격의 것이다 보니, 태조·정종대에는 일부 유자 관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왕의 관행·종교 심성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혁신안은 수용되지 않거나 수용되었어도 실행·정착되지 못하였다. 그러다 혁신적 종교 심성을 수용·지향하는 태종의 즉위를 계기로, 공전되어 온 혁신안은 구현되어 갔다. 특히 사전 방면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사전 방면에서의 대대적이고 적극적인 혁신 행보와 달리, 개인적 치제 방면에서의 혁신은 지지부진하였다. 사전 방면의 혁신은 국가(국왕)가 확고한 의지와 지향을 지니고 탑다운 방식으로 구현해 낼 순 있지만, 개인적 치제의 경우 官·民 내에 혁신적 종교 심성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사실상 조상 제사만을 허용하는 금령을 밀어붙였다간 반발과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국가(국왕)는 금령에 의지하지 않고 긴 호흡을 갖고 새로운 심성의 확산과 禮俗의 정착을 유도하고 기다려야 했다.


This paper is a research work on the situation of the offering services for ancestors or god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from the perspective of a shifting religious mentality.
In the early Joseon Dynasty, major changes were carried out targeting the sacrifices to the gods on the national and individual level. The major changes in the area of sacrifices to the gods on the national and individual level were made based on a different religious mentality from the past, and were not merely implemented in terms of Confucianization, but were made by accepting various measures based on the newly emerged religious mentality and these in the early Ming Dynasty.
By the way, the religious mentality of the early Ming Dynasty was unprecedentedly innovative, and various measures based on it were also the same, and these various innovation measures were promoted from the central government to the top-down, and the gap with the reality at the time was large, and even though it was enforced through ritual institutions and laws, as time passed, it became faded. In line with this, various reform measures promoted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also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religious mentality and were innovative enough to be far apart from the reality at that time.
Various reforms targeting the sacrifices to the gods on the national and individual level were not achieved in the periods of King Taejo, the founder of the dynasty, and King Jeongjong, King Taejong's period, but King Taejong's period served as a turning point for achieving the various reforms with the offering services for ancestors or gods.
Not long after King Taejong ascended the throne, he took a measure to promote the reforms, if not all. His measure was based on the newly emerged religious mind of the time, not solely on his own will. Since then, this religious reform measures have steadily expanded. Especially, attainment in the area of sacrifices to the gods on the national level was conspicuous. In other words, the reform on the state register system of sacrifice was successfully implem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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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구수한 큰 맛: 번역된 자연미

저자 : 정혜린 ( Jung He-r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7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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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高裕燮)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미술사학자이자 미학 연구자로서 한국 미술사를 구축했다. 이 논문이 주목하는 바는 그가 「조선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과 「조선고대 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에서 한국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자 전통으로 제시한 '구수 한 큰 맛', '무기교의 기교'를 대표로 하는 자연미 계열의 개념어들이다. 이 개념들은 그 질박한 뉘앙스와 달리 서양 미학과 미술사, 일본·중국의 미술과 긴밀한 비교 속에 조성된 것들이다. 고유섭은 문화과학, 진·선·미와 지·정·의의 분류법을 수입하여 한 국 미술문화의 모든 역사 구간을 아우르는 '보편타당한 가치 표준'을 탐색했다. 이미 우 리에게 잘 알려진 구수함·고수함·맵자·단색·적조미·우아·단아, 이들을 구수한 큰 맛이 그것이다. 문화과학, 진·선·미와 지·정·의 등의 개념은 신칸트학파의 산물로서 경성제국대학에서 고유섭의 재학 시절 철학·미학을 담당했던 아베요시시게는 빈델반트, 리케르트 등의 신칸트학파의 대표적 전달자이다. 고유섭은 당시 최신의 선진적 학문을 따라 자신의 학문의 방법론과 연구대상을 설정하고 이로부터 한국미술의 역사를 한국인의 손으로 서술하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근대 유럽의 학문 체제와 가치로 한국 미술문화를 재단하고 번역함으로써 그의 한국미술사에는 시서화일치를 추구하는 회화가 제외되고 공예만 남았다. 한국근현대사에서 구수한 큰 맛과 같은 자연미를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제시하는 발언은 수없이 이어져 왔는데 시기상으로 볼 때 고유섭 이야말로 이러한 논란을 학계로 끌어들인 근원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공예 미로서의 자연미는 근현대 한국 문화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그 개념들이 한국 자생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한번도 명확히 지적되지 않았다. 이제 구수한 큰 맛이 근현대라는 시대의 산물임을 밝혀 이 개념이 지시하는 과거, 이 개념에서 시작한 현재가 고유섭의 시대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질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Ko Yu-seoup, the first Korean scholar on Korean art history and aesthetics suggested some concepts including 'Earthy and Generous Taste' and 'skillfulness of noskill' as Korean original beauties. Ko imported Neo-Kantianism though Japanese Neo-Kantianism in Keijō Imperial University and applied its famous cultural science as method for studying Korean art history and ideas of values, the Truth, Good and Beauty as its values. The result he got as Korean original art was just craft art and its natural beauty, for traditional Korean art lacked the idea of Beauty and fine arts of modern Europeans. He should have deduced Earthy and Generous Taste from traditional Korean art works and texts not from Modern European thoughts. Though Ko intended describe the history of Korean art with the criteria of newest and advanced academic view and methods, he reduced the history to craft arts and natural beauty, which continues at some corners of academic fields and art world wide as well as Korea until now never critic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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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풍류(風流)로 보는 한국종교의 에토스

저자 : 박종천 ( Park Jong-ch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9-11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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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종교사에서는 불교, 유교, 기독교 등 세계종교의 보편적 이상을 순수하게 추 구하는 주류 엘리트 전통의 '순수 정통주의'와 더불어 다양한 이질적 요인들의 혼성적 병존을 드러내는 비주류 대중적 전통의 '관용적 포용주의'가 병행되어 왔다. 풍류는 순수 정통주의가 배타적 근본주의로 치닫지 않고 포용적 관용주의와 공존할 수 있게 만든 한국종교의 문화적 에토스였다. 풍류는 '현묘지도'(玄妙之道)의 보편적 신비주의의 차원에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특정한 개별적 종교 전통이 주도적인 가운데 외래에서 유입된 보편적 종교사상들을 개별 종교전통에 충실하게 수용하고 계승하면서도, 열린 자세로 타종교 전통의 문화적 장점을 흡수하여 자기 종교전통을 풍성하게 만들어서 '포함삼교'(包含三敎)의 차원에서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문화적 수용성을 통해 종교간 갈등이 증폭되는 배타적 근본주의를 적절하게 제어하는 한편,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엘리트 종교사상과 대중적 종교문화 간의 병행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 따라 풍류의 에토스가 한국종교 사에서 불교, 유교, 기독교의 핵심 교리나 신념을 일심(一心), 리(理), 씨□ 혹은 얼나 등의 보편적 실재에 입각한 회통(會通)적 사유와 활동을 통해 신비주의적 영성의 보편성으로 전개하고, 이것을 근간으로 삼아 외래의 문화를 수용하는 다문화적 수용성과 함께 사회적 교화를 실현하는 양상을 규명하였다.


In the history of Korean religions, the orthodoxy of the mainstream elite tradition pursuing the universal ideals of world religions such as Buddhism,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as well as inclusivism of non-mainstream popular traditions mixing coexistence of various heterogeneous factors have been coexisted. Pungryu (風流) is the Korean religious ethos that made orthodoxy coexisting with inclusivism rather than being driven to exclusive fundamentalism. In the context of universal mysticism, Pungryu has embraced and inherited some cultural merits of other religious traditions in an open attitude while faithfully accepting and inheriting the universal religious ideals that have been introduced from outside in a specific historical context. Through it's cultural acceptance, which enriches one's own religious tradition and recognizes and accepts various cultures, it is appropriate to control exclusive fundamentalism that amplifies conflicts between religions, while inclusive social practices enable parallelism between elite religious ideas and popular religious cultures. In this article, following this point of view, I clarified that Pungryu as the religio-cultural ethos based on universal realities such as One heart (一心), Li (理), Spiritual Seed (씨□), and Spiritual I (얼나) developed the universality of mystical spirituality through the thought and activity of harmonization in the history of Korean religions, and materialized social edification along with multicultural acceptance to accommodate foreign cul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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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후기 중세 한국어에서의 ㅸ의 음운론적 지위와 본질

저자 : 장석 ( Zhang Shu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9-14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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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들이 오랫동안 ㅸ에 대해 연구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ㅸ의 음운론적 지위와 관련된 논의가 진행 중이고 계속 연구할 필요가 있다. 또한 ㅸ은 짧은 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다른 자모보다 특이하다. 따라서 ㅸ의 制字 원인을 비롯한 ㅸ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설명해야 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두 문제를 논의하였다.
본고는 ㅸ과 관련된 음변화, 최소대립쌍, 분포, 그리고 ㅿ, ㅇ과의 비교를 통해 ㅸ의 음운론 지위를 살펴보았다. ㅸ은 수의적인 'ㅂ→w' 혹은 'ㅂ→Ø'의 한 단계이므로 음소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ㅸ과 다른 분절음의 진정한 최소대립쌍이 확인되기 어렵기 때문에 ㅸ은 음소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분포적으로는 ㅸ과 ㅂ이 포괄적 분포를 이루고 있으므로 역시 ㅸ이 음소로 해석되기 어렵다. 한편, ㅸ의 성격과 비슷한 ㅿ, ㅇ이 음소로 해석되기 어렵기 때문에 ㅸ도 음소가 아니었을 것이다.
본고는 ㅸ의 소리 인식, 制字 원인, 그리고 ㅸ으로 고유어를 표기하는 원인을 논의하여 ㅸ의 본질을 밝혔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은 모두 외국어에 능통하고 SLM 이론에 따르면 일반인보다 더 많은 음성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ㅸ의 制字 원인은 훈민정음 문자의 체계성, 외국어의 한글 표기와 관련된다. 한편, 세종은 소리보다 형태를 더 중요시하는 표기 의식을 가지고 있고 집현전 학자들은 精密的 표기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표기 의식은 ㅸ으로 고유어를 표기하는 원인이다.


The scholars have long studied the phonological status of ㅸ, but discussions are still under way. And since ㅸ appeared and disappeared in a short time, it is more unusual than other letters.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accurately explain the essence of ㅸ. These two issues are discussed in this paper.
ㅸ was a step in the numerical 'ㅂ→w' or 'ㅂ→Ø' in Korean of the 15th century. So ㅸ did not function as a phoneme. And it is highly likely that ㅸ was not a phoneme because it is difficult to identify the Minimal Pair of ㅸ and other Segments. In addition, ㅸ and ㅂ are in a comprehensive distribution, so it is also difficult to interpret ㅸ as a phoneme. Meanwhile, the ㅿ and ㅇ were difficult to be interpreted as phonemes. Therefore, ㅸ would not have been a phoneme.
King Sejong and the scholars are all fluent in foreign languages. According to the SLM theory, King Sejong and the scholars were able to identify more voices than ordinary people. In addition, ㅸ is a letter made for the systematicness of Hunminjeongeum consonants, and for the use of foreign languages. This is the cause of ㅸ's creation. And King Sejong has a notation consciousness that places more emphasis on form than sound and the scholars have a strong tendency to narrow transcription. This is the reason why ㅸ is used to mark the Nativ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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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역사학의 관점에서 본 16세기 유연 사건

저자 : 권내현 ( Kwon Nae-hy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7-17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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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조선 사회의 상속은 자녀 간 균분 상속의 관행을 유지하면서도 가계 계승자의 몫을 점차 늘려나가는 과정이었다. 균분 상속은 결혼을 통한 경제력의 확대에 기여 하였으므로 양반 남성들 가운데에는 상속 재산을 두고 처가와 갈등을 일으키는 이들 이 있었다. 한 집안 내부에서 가계 계승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는 일도 있었는데, 이 역시 상속과 연관된 경우가 많았다. 유연 사건은 그러한 갈등 양상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 사건을 주로 다룬 국문학계의 연구는 16세기 사회상이나 역사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유연전」 이외의 자료에 대한 분석이나 인물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관한 탐구도 부족하였다. 16세기에 종법은 아직 완전하게 정착하지 않아 장남이 자식 없이 사망하면 장남의 부인(총부)과 차남 사이에서 가계 계승 및 상속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유연 사건도 이러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는 사림의 전면적 등장이라는 권력 구조의 변화가 나타났다. 유연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린 두 차례의 재판이 열린 것은 이러한 정치 변동과도 연관이 있었다.


Inheritance in Joseon society in the 16th century maintained the practice of equalized inheritance among children. At the same time, it was a process of gradually increasing the share of family successors. Equalized inheritance contributed to the expansion of financial capacity through marriage. As such, among upper class men, there were many who were interested in the property of their wife. At this time, clan rules were not yet fully settled, and if the eldest son died without children, there was a conflict over the inheritance and family succession between the eldest son's wife and the second son. The Yuyeon case shows an interesting illustration of the inheritance practices and conflicts at that time. In addition, this case reveal facts that were hidden by the changed political reality of the emergence of the Neo-Confucian literati. By gathering relevant data and tracking the interrelationships between characters in connection with political and social realities at that time, the meaning of this case can be grasped objectively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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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구운몽(九雲夢)>에 나타난 미적(美的) 표현의 특징과 기능

저자 : 강혜진 ( Kang Hye-j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3-20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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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구운몽>에 나타난 표현상의 특질을 살펴 그것이 지향하는 아름다움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했다. 특히 <구운몽>은 사대부 문인에 의해 창작된 고전소설이므로, 본 논의를 통해 사대부 문인의 의식 세계와 고전소설에 기반한 한국적 아름다움을 도출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리하여 <구운몽>에서 아름다움에 관한 표현들(이하 미적 표현)을 살펴본 결과 크게 두 양상이 확인되었다. 하나는 비움의 미적 표현으로, 깨끗하게 씻겨지고 비워지는 방향으로 아름다움이 구현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주로 맑음과 관련된 투명함의 시각적 이미지와 차가움의 촉각적 이미지가 활용되었다. 반대로 풍성하게 채워지는 방향으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채움의 미적 표현도 나타났다. 밝음과 관련된 시각적 이미지와 패옥·풍악의 청각적 이미지, 향의 후각적 이미지, 요리의 미각적 이미지 등이 채움의 미적 표현으로 활용되었다.
비움의 미적 표현과 채움의 미적 표현은 각기 성진의 세계와 소유의 세계의 성격을 표상하는 데에 주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수사적 기능만 행한 것은 아니다. 미적 표현은 세계 전환을 예비하고 자연스럽게 형상화하는 역할을 했으며, 주제를 구현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이는 3차 세계 전환에 해당하는 결말부에서 잘 드러난다. 채움과 비움의 미적 표현이 오묘하게 어우러짐으로써 궁극의 이상적 경지가 묘사되고 있었다.
이처럼 <구운몽>의 미적 표현은 사대부가 중시하는 정신적 가치들과 공명하고 있다 는 점에서 특징적이었다. 채움의 미적 표현을 통해서는 조화롭고 고상한 삶의 성취가, 비움의 미적 표현을 통해서는 현세에 얽매인 삶의 초탈이 꿈꿔졌다. 또한 그 둘을 넘어서는 궁극의 깨달음도 미적 표현을 통해 구현되었다. 어느 것이든 간에 <구운몽>의 미적 표현은 이상을 상정해놓고 그리로 향하는 특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This paper aimed to look at a phase of beauty represented by classical novels by paying attention to the aesthetic expression of Guunmong. In particular, Guunmong was created by a literati, so it was expected that the aesthetic expression would be able to extract the beauty that was combined with the nobility's world of consciousness.
Thus, the aesthetic expression of Guunmong confirmed two major aspects. One was the aesthetic expression of emptiness, by which beauty was being embodied in the direction of being washed clean and emptied. Therefore, visual images of transparency and tactile images of coldness, mainly related to clearness, were utilized here. On the contrary, there were aesthetic expressions of filling that embodied beauty in the direction of abundance. These include visual images related to brightness, auditory images of jade and music, olfactory images of incense, and tasteful images of cooking.
The aesthetic expression of emptiness and the aesthetic expression of filling were mainly used to represent the character of Sungjin's world and the Soyou's world, respectively. However, such rhetorical functions are not the only ones that have been performed. More active functions were also found; first of all, attraction, a function in terms of narrative development. It is a function that induces a change in the main character's behavior and thus leads to the development of the narrative. The second is the function of global transformation. The world of Guunmong was being transformed three times, and aesthetic expressions were being used to make the transition natural. Third is the function of subject implementation. This, in particular, is well illustrated in the end of the third world transition. The aesthetic expressions of fill and emptiness were subtly blending together to embody the ultimate ideal.
As such, the aesthetic expression of Guunmong was characteristic in that it resonates with the spiritual values that nobility appreciates. Through the aesthetic expression of fill, a harmonious and noble life was dreamed. Through the aesthetic ex-pression of emptiness, rising above the common life tied to the present world was dreamed. The ultimate realization beyond the two was also embodied through the aesthetic expression. Either way, the aesthetic expression of Guunmong showed the character of assuming ideals and heading toward those ide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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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문은 전통 학문의 바탕 위에 서양의 天文學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조선의 역학 적 천문서인 『역학이십사도해(총해)』를 지었다. 본 글은 김석문의 『역학이십사도해(총해)』를 象數學的 관점, 특히 康節易 관점에서 분석한 글이다. 본 글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강절역으로 김석문의 『역학이십사도해(총해)』 전체를 살피는 것과 강절역 관점으로 26개 그림 중 易象圖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필자는 김석 문이 의도한 두 가지 저술 의도-새로운 천문이론과 새로운 易說[二五之說] 제시-와 그의 꿈[목표]이 제대로 이루어졌는가를 점검해 보았다. 김석문의 꿈은 궁극적으로 孔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新儒學으로 무장하여 공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전체적인 분석 결과 그의 저술 목적인 새로운 천문이론은 조선에서 최초로 地轉說을 주장하고, 9重天과 天文象數 등을 제시한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새로운 역설은 태극도설의 재해석, 장재 태허론과 기론의 흡수, 강절 수학의 대용량화, 강절 태극으로 '天行健'의 창조적 해석, 새로운 시초점 개발, 9수를 통한 洛書의 활용으로 입증되었다. 그의 학문의 귀결처인 공자로 돌아가는 것은 그의 그림이 태극에서 시작하여 道[태극]로 돌아가는 것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 돌아가는 길에 위 열거한 이론을 일부 발명하기도 하고, 일부 창조적으로 변용하여 한 단계 격상된 조선의 유가철학을 이루었고 평가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김석문이 朝鮮易 學과 朝鮮儒學에 天文學과 數學을 포함시켜 그 지평이 더 넓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 남은 숙제는 새로운 占法에 관한 심층 분석과 數가 좌선한다는 것 및 낙서와의 상관성 탐구 및 그림에 대한 추가 분석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is an analysis of his book from Xiang shu yi xu (상수학) point of view, especially ShaoYong'I-ching (강절역) point. This article began with two purposes. First, It is to look at the entire book of Kim Seok-mun as ShaoYong'I-ching. Second, observe Changeable image painting (易象圖) out of 26 paintings from the perspective of ShaoYong'I-ching. I'm checking to see if two of his writing objectives-a new theory of astronomy and new I-ching-have been achieved in the process. 
Kim Seok-moon's dream was to ultimately return to Confucius (孔子). But it wasn't just a return, it was an upgrade and a return to Confucius. 
According to the analysis, the new theory of astronomy was proved to be the first time in Joseon to assert the theory of geography (the theory of earth rotary; 地轉說). The new theory of I-ching was established. The return to Confucius, the birthplace of his studies, is implicit in his paintings starting from Taegeuk (太極) to the Taegeuk (太極). On the way back, Kim Seok-mun invented some of the theories listed above, and some creatively translated them to achieve and evaluate the advanced philosophy of Joseon. In other words, Kim Seok-mun's inclusion of astronomy and mathematics in Joseon's I-ching has made his horizons wider. 
The remaining homework in this study is an in-depth analysis of the law of appropriation, and further analysis of the number being left and the correlation with Luo-Shu (洛書), nine (9) and the pi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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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신체유물론적 시각에서 본 심대윤의 '노동 옹호 윤리학'

저자 : 김대중 ( Kim Dae-joo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53-307 (5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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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신체유물론적 시각에서 심대윤(沈大允, 1806-1872)의 복리사상(福利思想)을 탐색한다. '신체유물론'은 말 그대로 인간의 '몸', 인간의 동물성과 신체 활동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흔히 심대윤의 복리사상은 이익 추구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긍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익을 산출하는 것은 노동 행위이고 노동은 곧 육체 행위이다. 따라서 '이익 추구'보다 선차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몸'과 '노동'이다. 본고는 인간의 '몸'과 '노동'에 대한 심대윤의 사유에 주목하여, 일단 심대윤 자신의 노동 체험을 다각도로 분석한 다음, 심대윤의 '육체 긍정 사상' 및 '노동 옹호 사상'을 살펴보고, 심대윤 사상의 서민적 지향을 두루 조망한다. 이런 사상적 면모는 제작자의 유물론적 감수성 및 생활 감각을 투영한 것으로 판단되는바, 인간의 육체성 및 신체활동에 대한 풍부한 사유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This paper explores the welfare ideas of Shim Dae-yun (沈大允, 1806-1872) from the perspective of soma-materialism. Soma-materialism focuses on the human body, animality and physical activity. It is frequently mentioned that Shim regarded the pursuit of profit as a human nature. But it is labor that produces profits and labor is a physical act. Therefore it is body and labor that have preponderance importance over profit-seeking. Focusing on Shim's ideas about human body and labor, this paper first analyzes Shim's own labor experience from various perspectives, then examines Shim's thought of body and labor, and investigates traces of mentality of ordinary people and working-class projected in Shim's thought. Through these discussions, it is judged that Shim's thought has various ideas about human body and show materialistic consciousnes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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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위사(韋史) 신석희(申錫禧)의 글쓰기에 나타난 대외인식의 특징 -양요(洋擾)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저자 : 김용태 ( Kim Yong-tai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09-33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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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희는 신미양요 당시 수원유수를 맡아 서해안 방어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고위 관료였으며, 박규수 신석우 조면호 등과 함께 19세기 중반 서울 북촌시단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역사적으로나 문학사적으로 비중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관련 자료가 흩어져 버린 탓에 본격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 자료센터에서 일본에 소장된 신석희 문집을 촬영하여 일반에 제공하게 됨으로써 본격적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본고는 학계에 제출되는 신석희에 대한 첫 번째의 본격적인 연구라 할 수 있는바 관료로서 그의 활동 양상과 사상적 지향을 살펴봄으로써 향후 연구의 마중물이 되고자 한다.
신석희는 1842년 35세에 관계에 나아가 1873년 66세에 이조판서 재임 중 삶을 마쳤는데, 1861년부터 지속적으로 외교문서 작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는 그의 문장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며, 이런 활동을 통해 그는 해외 정세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쌓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일찍부터 海防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며 兵書에 대해서도 깊은 탐구를 하였다. 그는 침투해 오는 서양 세력에 대해 외교적 수 단보다는 군사력으로 몰아내는 방법을 선호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871년 수원유수로 있을 때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그는 수원과 서해안의 방비에 나름 심혈을 기울였으며 火攻을 이용해 적선을 물리칠 구체적 작전계획을 입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석희의 대외인식은 '주전론'으로 명명할 수 있겠지만, 관념적 위정척사론 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앞으로 이와 관련하여 폭넓게 논의하며 그 의의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At the time of Shinmiyangyo ('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 Shin Seok-hee was a high-ranking official who was responsible for defending the West Coast as a local official in Suwon. In addition, he led the poetical circles in Buckchon of Seoul in the mid-19th century with Park Gyu-su, Shin Seok-woo, and Jo Myeon-ho. He was a considerable person to understand historical circumstances and literary history in those days, but the study on him has not been intensively researched because most of the materials related to him scattered abroad. However, materials and document relevant to Shin Seok-hee including his anthology, which kept in Japan, recently open to Korea. This paper is the first study on Shin Seok-hee in Korean academia and it examines his aspects of activity and ideological orientation as a government official. 
Shin Seok-hee became government official at 35 in 1842 and ended his life as the Minister of the Interior by the time he was 66 years old in 1873. He kept getting involved in writing diplomatic documents since 1861. He was able to participate in the preparation of diplomatic documents because of his outstanding writing skill. We believe he gained extraordinary insight into the state of affairs overseas of those days through these activities. 
Shin Seok-hee collected, organized, and researched books of tactics in-depth since he felt the necessity of defending the seas ahead of his time. We consider that he was the person who preferred to fight with the Western invader with the military strength rather than diplomatic means. Accordingly, he threw himself, heart and soul, into defending Suwon and the West Coast as a local official in Suwon when the 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 broke out, and he also made a specific military operation to use fire to attack enemy ships. 
In summary, Shin Seok-hee's perspective on international relationships is clearly distinguished from Wijeongcheoksa ('the ideology of protecting righteousness and expel wickedness') so that it should be re-examined its significance through the broad discussion.

KCI등재

10일제 강점기 정재 침탈 양상 고찰 -광교기생조합의 공진회(1915) 정재 창사를 중심으로-

저자 : 강혜정 ( Kang Hye-j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7-36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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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신문계(新文界)』 제3권 9호(1915년 9월호)에 광교기생조합의 정재(呈才) 창사(唱詞)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학계에 보고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창사의 제작자를 추정하고, 창사의 내용적 음악적 특성을 분석하여, 본 창사 발견의 의의를 논의하고자 한다. 고려부터 조선조 내내 궁중에서 공연되었던 정재는 음악 반주에 맞춰 춤을 추다가 노래하는 歌舞樂이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특히 정재 중에 부르는 노랫말(창사)은 춤이나 음악보다 더 구체적으로 정재의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해 왔기에 주목된다. 경술국치 이후 정재는 더이상 궁에서 연행되지 못했다. 정재를 담당했던 기생들은 기생조합을 결성하고 극장이나 요리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연하였고, 정재는 대중예술로 변화해갔다. 1910년대에는 이렇게 연행 여건이 급변 하면서 정재 공연에도 급격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재사의 공백기로 남아 있었다.
1915년에는 일제의 식민통치5주년을 기념하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 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가 경복궁에서 50일간 열렸는데, 광교조합과 다동조합은 매일 이곳에서 번갈아 가며 정재 공연을 하였다. 당시 『신문계』는 공진회 기념호를 발간하여 공진회에서 공연하였던 광교기생조합의 정재 창사를 수록하였다. 이 기사의 작성자 는 '太華山人'이다. 이는 최영년의 필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아들 최찬식일 가능 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신문계』에는 총 10종목의 정재 창사가 수록되어 있다. 정재 명을 보면 모두 전통적으로 궁에서 연행되었던 것이지만, 그 창사는 전혀 다르다. 즉 공진회를 앞두고 새로 만들어진 창사이다. 창사는 당대를 태평성세로 인식하고 일본 천황과 총독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친일 창사는 계락, 우락, 편 등 가곡창의 악곡에 얹어 부르게 하였다. 또한 '靈'으로 부르는 곡도 있는데 이는 <靈山會上>의 선율에 얹어 부르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자료의 발견으로 인해 일제 강점기 정재 창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그 단면을 파악하고, 대중문화로 변모 하면서 어떠한 변화를 꾀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paper analyzes the Giseng (female entertainer)'s court song lyrics found in Shin moon gye (新文界) vol. 6 no. 9 (1915. Sep.). First, the court songs' lyricist must be identified and the musical characteristics must be examined to discover the lyric's true intentions. From the Koryo to the Josun age, the Jungjae (呈才) was originally intended to perform directly for the royal family, acting as the palace's main source of entertainment-the Jungjae is a composite art that instructs to dance with the background instrumentals and sing without. The song lyrics of the Jungjae must be highlighted as they perform a significant role in illustrating the true purpose of the Jungjae. Post annexation, the Jungjae was removed as a court ritual. Thus, the Gisengs assigned to the Jungjae formed a union to continue as a group independent of the royal family. The union now performed for the general public, in places such as the theatre and restaurants. The Jungjae displayed a trend of popularization-entertainment for the ordinary. Considering the stage for the Jungjae suddenly changed drastically, there are reasonable suspicion for changes in the Jungjae performance itself also. However, no records have been discovered that support such a position, leaving a gap in the Jungjae history.
In 1915, the Japanese's celebration of the annexation, known as the '1915 Expo (施政 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 initiated at the Kyungbok palace (景福宮), which would continue for 50 more days. The Gwangyo (廣橋) union and Dadong (茶洞) union performed the Jungjae at this event on alternating days. At the time, Shin moon gye published a special edition magazine dedicated for the 1915 Expo; the author with the pen name 'the man living in the Tae wha mountain (太華山人)' recorded the Gwangyo giseng union's the Jungjae performance lyrics on this magazine. The author is widely accepted as 'Choi youngnyun (崔永年)', but we must consider the possibility of Choi youngnyun's son, Choi chansik (崔瓚植), as a candidate for the true author. In Shin moon gye, there is recorded a total of 10 different performances of the Jungjae. Examining the title of each of the Jungjae performances, we can infer that all 10 performances correlated with those originally presented for the royal family. However, the lyrics are different for each of the performances. Thus, we can infer that these lyrics were newly created to perform at the 1915 Expo. The new lyrics acknowledge the current world as the paradise and praised the Japanese King& Chongdok. Additionally, there is a song called 'Young (靈)' which is presumed to be sung along the melody of 'Young San Howi Sang (靈山會上)'. In discovering this record, the paper seeks to unveil why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version of the Jungjae was altered and how the Jungjae changed in accordance with its changing aud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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