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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Culture Research

  •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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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4)~87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038
민족문화연구
87권0호(2020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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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 전기 법호(法號)의 사용과 그 운영의 특징

저자 : 박윤진 ( Park Yun-j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3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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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법호는 僧職이나 僧階와 함께 승려에게 국가가 하사한 공적 지위였다. 고려 전기의 법호는 중국의 '師號'가 大師라는 직함과 법호를 하사하는 방식이었던 것과 관련된다. 다만 고려 전기는 중국식 '師號'보다 고려의 독특한 제도인 僧階를 중시했기 때문에 법호와 승계를 연칭하여 사용하였다.
법호는 法稱이나 懿號로도 불렸으며, 勳號·功號와 같은 의미를 가졌다. 현재 확인된 사료에 근거한다면 이들 법호 수여의 대상자는 최하위 승계인 大德 이상이었다. 최소 2자에서 최대 34자의 법호를 하사받은 사례가 있으며, 해당 승려의 덕행을 드러내기 위해 주어졌다고 한다. 한편 다수의 승려에게 일시에 법호가 사여되면서 동일한 법호를 가진 승려가 동시기에 활동하기도 했다.
국왕의 즉위나 태후의 임명과 같은 국가적 의례 참석자나 사면령이 내려지는 시기에 관료들에 대한 포상과 함께 승려에게는 승계나 승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보상은 한정적인 승계의 단계와 승직의 수 때문에 한계를 가졌다. 반면에 법호는 여러 차례 하사된다고 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승계처럼 계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개의 법호를 누적해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승려의 공적 지위를 보증해주었다. 법호가 功號나 勳號와 같은 의미를 가진 만큼 국가에서 하사한 법호의 보유와 누적은 이를 가진 승려의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게다가 특정 법회에 참여한 이에게 특정 법호를 하사하는 방식마저 있었다면, 법호를 통해 해당 승려가 참여한 법회나 공로를 파악할 수도 있어 그의 공로를 확인하는 방법도 되었을 것이다.


Abstract In the early Goryeo era, a precept name (beopho) was part of the official status granted to a Buddhist priest, along with the duty and rank of the monk. The presentation of a precept name is related to China's eulogistic title system that included the title of 'Great Master' (dashi). However, as greater importance was laid on Goryeo's own unique Buddhist priest ranks than to the Chinese-style eulogistic titles during the era, precept names and ranks were used in an interconnected way.
A precept name, or 'beopho' was also referred to as 'beopching' or 'uiho', and had the same significance as 'hunho' or 'gongho', a title given to those who made great contributions to the nation. Based on the historical sources identified so far, the eligibility for these precept names was limited to Buddhist priests with the rank of 'daedeok', which was the lowest, or above. As precept names were sometimes granted to a large number of priests at once, some of them were given the same names while they were active during the same period of time. Also, from the fact that the same precept names were granted at a regular interval, it can be presumed that the state had the principle for the presentation of specific precept names for certain achievements.
On the occasion of major state rituals such as the enthronement of the king or the appointment of the queen, or a decree of amnesty, government officials were often given awards while Buddhist priests were assigned with official duties or ranks. However, the granting of these rewards was restricted due to the limited numbers of the duties and ranks allowed to monks. On the other hand, precept names did not lead to any major problems even if they were granted many times. As long as the state was willing to create a social atmosphere where monks with a precept name were better treated and those who had been granted several precept names were respected, precept names had significance as an element determining a monk's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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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려시대 점토석독구결자료인 진본 화엄경 권20에 현토된 구결점 가운데 아직 미해독이거나 해독이 되었더라도 재검토가 필요한 구결점의 해독안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어말어미 '-오-'와 관련되는 12(·), 14(·), 12(|)는 각각 'ノ□', 'ノ□', '□□□'으로 해독된다. 둘째, 연결어미 '-며'와 관련되는 52(·)는 '□□'로 해독된다. 셋째, 조사와 어미에 쓰인 '-과'와 관련되는 54(i), 54(/·), 54(\·), 35(|·)는 각각 'ㅅ', 'xㅅ', '邑ㅅ', '□'로 해독된다. 넷째 부정문과 관련되는 32(·), 35(./), 45(|·), 53(\·)는 각각 'ㅁ ㄱ', '矢刂', 'ㅌ', '<ノ>'로 해독된다.


In this article, I made an attempt to interpretate the undeciphered kugyol points used in Jinben Huayanjing volume 20. The results are as follow. First, 12 (·), 14 (·), and 12 (|), the kugyol points related with pre-final ending -o [□]-, are deciphered as hon [ノㄱ], hol [ノ□], sion [□□ㄱ] respectively. Second, 52 (·), the kugyol point related with conjunctive ending -myə [□], is deciphered as hΛmyə [□□]. Third, 54 (i), 54 (/·), 54 (\·), and 35 (|·), the kugyol points related with ending/particle -kwa [ㅅ], are deciphered as -kwa [ㅅ], -?kwa [xㅅ], -Λpkwa [邑ㅅ], -du [□] respectively. 32 (·), 35 (./), 45 (|·), and 53 (\·), the kugyol points related with negation, are deciphered as -gon [ㅁㄱ], dii [矢刂], -nΛ [ㅌ], -mo [<ノ>] respecti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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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두[紫桃]'의 어휘사 ―표준어를 중심으로―

저자 : 여채려 ( Yu Cai-li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7-9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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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자두가 한자어 '紫桃'로부터 지금의 '자두'에 이르기까지의 의미 변화를 검토하고 '紫桃'로 명명된 이유가 무엇인지, 현재 표준어에서 '자두[紫桃]'로 자두 종류를 통칭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그 결과, '자두'는 한자어 '紫桃'의 축자적인 뜻인 '자주색 복숭아'의 용법으로 사용되었다가 늦어도 15세기부터 자두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紫桃'는 처음에는 자두류의 통칭이 아니라 오직 자두의 하위 품종인 紫李의 속칭이었다. 이러한 '紫桃'는 자두나무에 복숭아나무를 접목하여 개량한, 복숭아와 유사한 특징을 가지게 된 품종이었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紫桃'로 속칭하게 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표준어에서 '자두[紫桃]'가 상위어로 된 계기는 19세기 말에 한국 자두와 의미적 유사성을 가지는 서양 자두의 수입, 개량종인 자두의 재배량 증가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This paper examines the meaning of the Sino-Korean word 'jatu [紫桃]', the reason for the plum is named as 'jatu [紫桃]', and the reason for all kinds of plums are collectively called 'jatu [紫桃]' in standard language. As a result, from the beginning, the Sino-Korean word 'jatu [紫桃]' meant 'purple or red peach', which is the Chinese usage, and meant 'plum' in the 15th century at the latest. 'Jatu [紫桃]' pointed at a generic term for the subtypes of plums not a generic name for plums. This plum variety was improved by applying peach trees to plum trees, and it had characteristics similar to peaches. For this reason, this plum was called 'jatu [紫桃]'.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jatu [紫桃]' became a generic name for the plum species. The reason was seen as related to the importation of Western plums and the increase in the cultivation of plu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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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공민왕 초기 인당(印璫)의 활동

저자 : 김갑동 ( Kim Gap-do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7-12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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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璫은 공민왕대에 이르러 무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먼저 그는 萬戶, 捕倭使의 직책으로 왜구를 격퇴하였다. 그러다가 공민왕 3년에는 아들인 印安과 함께 원의 남정군 출정에 참여하였다. 그것은 물론 원을 돕는 행위였으나 원의 내부 사정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하여 돌아와서는 그 사정을 공민왕에게 자세히 보고함으로써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동왕 5년 친원 핵심 세력인 기씨 일당을 제거한 직후 영토 수복에 착수하였다. 공민왕은 두 방면으로 영토 수복을 명하였다. 하나는 동북면 방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북면 방향이었다. 密直副使 柳仁雨를 東北面兵馬使로, 前 大護軍 貢天甫, 前宗簿令 金元鳳을 副使로 임명하여 雙城 등 지역을 수복하게 하였다. 한편 인당과 강중경을 서북면병마사로 삼고 신순, 유홍, 최영, 최부개를 부사로 삼아 압록강 서쪽 8참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燕邸隨從功臣이었던 강중경과의 불화로 그를 제거하였다. 이어 그는 원 나라의 연호인 至正 연호의 사용을 정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과정 속에서 인당은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한편 서북면으로 출동한 인당은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婆娑府 등 3站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 작전은 원의 군사적 출동에 대비하는 한편 원에 오가는 교통로를 차단함으로써 기철 일당의 제거나 쌍성총관부 공격 등의 고려 내부 사정이 원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고려에 오다 체포되었던 원의 사신이 도망하여 원에 돌아감으로써 고려의 내부 사정이 다 알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원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영토를 점령한 것에 대해 힐책하면서 대군을 동원해 침략할 것이라 위협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염제신의 계책을 받아들여 인당의 목을 베어 사과하였다. 특별히 인당 한 사람만을 처형한 것은 자신의 심복이었던 강중경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의 의미도 있었다. 이에 원은 고려의 사과를 받아 주었고 고려에서는 이에 감사하는 표문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When King Gongmin (恭愍王) ascended the throne, Indang (印璫) defeated Japanese pirates (倭寇) as the position of Manho (萬戶) and Powaesa (捕倭使). Then, in the third year of King Gongmin's reign, he and his son Inan (印安) together joined the expedition to South Province of Yuan (元) Empire. It was, of course, an act to help Yuan Empire, but it was an opportunity to get a closer look at the inside of Yuan Empire. When he returned, he reported the situation to King Gongmin in detail, providing him with a background to carry out the reform.
King Gongmin (恭愍王) removed a group of people who rely on Yuan Empire. After that, he tried to reclaim his territory. He secretly conveyed his message to the General Administration of Ssangsung. Lee Ja-chun, the father of Lee Seong-gye, pledged to meet King Gongmin and cooperate. King Gongmin ordered the conquest of the territory in two ways. One was in the northwest direction and the other was in the northeast. The top commander of northeastern territory was Yoo In-woo, while the top commander of the northwestern territory was Indang (印璫). King Gongmin ordered the In-dang to attack the eight station across the river. Around this time, Sukgi (釋器) rebellion broke out. It has been reported that Limjungbo is secretly seeking treason with Sukgi, the bastard of King Chunghye (忠惠王). King Gongmin then put the party of Limjungbo in prison. He then discontinued the use of an Yuan Empire era name.
In the meantime, Indang crossed the Yalu River with its soldiers and attacked and occupied three station, including the Pasaboo (婆娑府). The operation was designed to block traffic to and from Yuan Empire. It was a measure to prevent internal affairs of Koryo (高麗) dynasty from becoming known as Yuan Empire. However, the internal affairs of the Koryo dynasty became known when Won's envoy, who was arrested in Koryo dynasty, fled and returned to he Yuan Empire. Upon hearing the news, Yuan Empire sent envoys to scold King Koryo. Yuan Empire threatened to invade with a great army. King Gongmin then cut the throat of In-dang by Yeom Je-shin's plan and apologized. In response, Yuan Empire accepted an apology from Koryo. Koryo posted a diplomatic document thanking it.
At the order of King Gongmin, In-dang crossed the Yalu River and attacked and occupied the territory of Yuan Empire. However, the diplomatic situation of Yuan Empire and Koryo dynasty led to an unfair death. In our history he was a great longevity who was temporary but occupied the territory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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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종대 선과(禪科) 복원에 대한 고찰

저자 : 문상련 ( Moon Sang-le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1-16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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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에는 태조 6년(1397) 공포된 『경제육전』 이래 시승(試僧)에 의해 승직자를 선출하는 승려 과거제도, 즉 승과(僧科)가 존재하였다. 태종 2년(1402) 『경제육전』에 근거해 '재행의 시험[試才行]'을 통해 도첩(度牒)이 발급된 이래, 성종 16년(1485) 반포된 『경제육전』 「예전」의 '도승(度僧)' 조 규범은, 도승에 따른 도첩제(度牒制) 시행은 물론 승과 시행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성종 23년(1492) 도첩제가 정지되었으며, 중종 11년(1516) 12월에는 『경제육전』 중 「도승」 조가 삭제되어 승과 시행의 근거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명종 5년(1550) 보우(普雨)와 문정왕후의 세력에 힘입어 양종(兩宗)이 복립되었으며, 명종 7년(1552) 시경(試經)에 따른 도첩 발급과 함께, 명종 9년(1554)에 이르러 승과가 복원되었다. 명종대의 승과는 선과(禪科)라 불리었다. 그럼에도 복원된 선과는 식년의 원칙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던바, 이후 명종 17년(1562) 보우의 관교(官敎) 삭탈에 이어 명종 19년(1564)에는 선과가 중단되었다. 이후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선과를 복구하려 했으나 곧바로 문정왕후의 죽음과, 다음 해인 명종 21년(1566) 제주도 유배지에서 보우가 주살된 과정과 관련해 복원된 선과는 막을 내렸던바, 명종 21년 선시의 최종적 혁파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였다.


There had been an examination for Buddhist monks to select managers of temples since the announcement of Kyongjeyukchon in the sixth year of King Taejo's reign in early Joseon. In the second year of King Taejong's reign, they began to issue an identity tag through the 'Talent Test' based on Kyongjeyukchon. The norms under the item of 'Entering the Monastic Life' in “Yejon” of Gyunggukdaejeon proclaimed in the 16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became grounds for the Monastic Identity Tag System according to Entering the Monastic Life and also the examination for Buddhist Monks. The issuance of the Monastic Identity Tag System was, however, suspended in the 23rd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In December in the 11th year of King Chungchong's reign, the item of 'Entering the Monastic Life' was deleted from Gyunggukdaejeon. As a result, there were no more grounds for the implementation of the triennial examination.
The study then described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wo denominations again supported by Monk Bowoo and the government of Queen Munjeong in the fif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the process of issuing a Monastic Identity Tag based on the sutra test in the seven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and the process of restoring Seongwa (triennial examination) in the nin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Seonsih (triennial examination), however, did not progress smoothly according to the principle.
Later, the restored triennial examination came to an end after the removal of Monk Bowoo from his official position in the 17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the discontinuity of the Buddhist Monk's Examination in the 19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Queen Munjeong's efforts to restore Seongwa (triennial examination) in the 20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the death of Queen Munjeong in the 20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and the murder of Monk Bowoo on Jeju Island where he was exiled in the 21st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In the 21st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the triennial examination was ultimately abo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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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례질서(家禮疾書)』와 『성호예식(星湖禮式)』의 역사성

저자 : 전성건 ( Jeon Sung-k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1-18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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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성호 이익의 『가례질서』와 『성호예식』의 방향성을 살펴보고, 그가 제시한 서인가례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성호는 퇴계를 사숙하였고 근기 퇴계학파의 종장으로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영남 남인과의 교류를 통해 퇴계학파의 일원으로서 퇴계의 철학과 사상을 진전시키고 확장하고자 하였다.
예학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성호는 퇴계의 예학을 계승하는 한편, 사계 김장생 등의 노론 예학자들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예설을 창출하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가례질서』와 『성호예식』이다. 특히 『성호예식』은 사대부 가문에서 행하는 예식의 토대가 되는 『가례』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서인가례를 창출하여 가례시행의 확장을 도모한다. 이는 자신의 신분에 따른 것으로 『가례』를 근간으로 작성된 예식을 사대부의 예식으로 규정하고, 자신은 물론 서인의 신분에 있는 사람들의 예식을 별도로 규정하여 신분질서에 맞는 가례 서물을 작성한 것이다.
당대의 『가례』연구는 주희가 중년에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가례』를 이른바 만년정설을 찾아 보완하여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훈고와 고증 그리고 행례의 측면을 두루 감안한 것이다. 그러나 성호는 서인가례를 창출하여 사대부 이외의 필서들까지 행례할 수 있는 가례 서물을 작성하여 의례실천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가 대종과 소종의 일족들을 의례로 규합하고 종계를 만든 것 등은 그 가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촌 사회의 일반 백성들의 의례적 실천에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aims to look at the direction of Shorthand of Family Rituals and Rituals of Sung-ho Family, and look at what the problem consciousness he presented was. Lee Ik was a private student of Toegye, and he wanted to develop and expand the philosophy and ideas of Toegye as a member of the Toegye school through exchanges with men in the Gyeongsang provinces.
Ritual learning was no exception. While Lee Ik succeeds ritual learning of Toegye, he will create a new example by criticizing the theories of Kim, Jang-saeng and other scholars. Among them, the most important are Shorthand of Family Rituals and Rituals of Sung-ho Family. In particular, Rituals of Sung-ho Family creates a bookcase that differs from family rituals that serves as the basis for the rituals held by the high official and thus seeks to expand the practice. This was based on his social status, and he made an ordination according to the order of his identity by stipulating the rituals of the high official, and the rituals of those in his or her status as well as those in people.
His research on Family Rituals of the time mainly focuses on finding and supplementing the so-called 'the decided opinion' that Zhu Xi wrote in middle age. And it takes into account all aspects of exegesis, studying historical evidence and rituals. However, Lee Ik tried to expand the practice of ritual practice by creating family rituals for common people that could be performed except the high official. It can be said that he did not only assemble the great and the small clan and made the sect into a ritualistic practice of the ordinary people of the country distri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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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德과 禮가 정치의 근본이었고, 법과 형벌은 정치의 보조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조선후기 正祖 때도 백성의 도덕적 각성을 위한 윤리 교과서, 교훈서들이 활발히 간행되었다. 당시 널리 보급된 교훈서 『五倫行實圖』의 수많은 효자·충신·열녀들은 지배층의 도덕적 지향과 목표를 보여준다. 한편 국왕과 刑曹의 형사재판을 수록한 『審理錄』과 『秋官志』에는 그들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라고 평가한 행위들이 수록되었다. 범죄사건과 재판 기록을 통해 우리는,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 앞에 선 인간 군상들과 그들의 욕망을, 그 어떤 자료들보다 생동감 있게 잘 살펴볼 수 있다. 정약용의 『欽欽新書』도 비슷한 기능을 갖는다.
조선후기 성 관련 범죄의 처벌 규정과 판례를 분석한 이 글에서는, 성범죄의 성립요건과 처벌 규정을 담은 『大典後續錄』, 『受敎輯錄』, 『續大典』 등 법조문을 먼저 살펴본다. 법조문에 담지 못한 다양한 사건과 재판 기록들은 『심리록』·『추관지』와 『흠흠신서』를 통해서 분석한다. 성 관련 범죄의 처벌 규정을 살펴보고 재판 운영방식을 분석하는 것은, 당시 법 제정과 운영에 간여했던 지배층, 즉 국왕과 관료들의 내면 심리와 모순된 자의식을 엿보기 위해서다. 영조 때부터 '차미(옷깃)를 당기거나 밥상을 마주대하는[挽裳飯對]' 수준의 행위를 간통죄 성립의 중요한 요건으로 간주하여 국왕 수교로 성문화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 경우, 강간 이수죄 성립 요건으로도 인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여성들은 옷깃을 잡아당기는 정도의 매우 사소한 행위만으로도 자살했다. '만상반대' 행위가 심각한 간통행위로 간주되었기에, 여성들은 이것이 화간이 아닌 강간임을 하소연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표명하기 위해 최후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명백한 간통죄 성립 요건도 반대로 강간 이수죄 성립의 요건은 되지 못했다.
조선후기 남녀가 간통과 강간에 대한 차등적 인식 체계 속에서 살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간통죄를 폐지하고 강간죄에 이목이 집중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和姦과 强奸에 대한 오늘날의 명확한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는 강간죄를 특수한 성관계가 아닌, 심각한 폭력으로 이해할 인식론적 근거를 갖고 있을까? 간통과 강간의 구별에 민감했던 조선후기 위정자들의 성 인식과 그런 인식의 위력에 직면해 투항하거나 싸웠던 여성들의 체험은, 우리들의 성 인식의 좌표를 되묻고 있다.


King Jeongjo's (正祖) reign (1776-1800) in the 18th century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dynasty likewise saw the active publication, first, of diverse ethics textbooks and didactic books (敎訓書) for the people's moral awakening. The countless filial children (孝子), loyal ministers (忠臣), and virtuous women (烈女) featured in Oryun Haengsildo (五倫行實圖) demonstrate well the ruling classes' moral orientation and goals. Meanwhile, the Simnirok (審理錄) and the Chugwanji (秋官志), which include the results of criminal trials conducted by the king and the Board of Punishments (刑曹), enumerate a large number of acts evaluated as 'immoral' and 'unethical' by the ruling classes. A collection of judicial precedents by Confucian Jeong Yag-yong (丁若鏞, 1762-1836), the Heumheum Sinseo (欽欽新書, New Book on Criminal Law), too, performs similar functions. Analyzing punitive regulations and judicial precedents regarding sex crimes from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 Dynasty, this study first examines the relevant legal provisions in the Daejeon Husongnok (大典後續錄), Sugyo Jimnok (受敎輯錄), and Sokdaejeon (續大典), which all include the basic requirements and punitive regulations regarding the establishment of sex crimes. In addition, various cases and trial records not addressed in provisions are analyzed through texts such as the Simnirok, Chugwanji and the Heumheum Sinseo.
I examine punitive regulations on sex crimes and analyze the ways in which these regulations were applied to trials because I wish to glimpse, through trials, at the mentality and self-awareness of the ruling classes who were involved in either the legislation or the direct enforcement of such laws. As discussed in detail in the main body of this study, at the time, the king and officials acknowledged acts on the level of '[a man] tugging at the hem [of the skirt of a woman other] or sitting across each other [i. e., eating together] at a table (挽裳飯對, mansang bandae)' as an important requirement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crime of adultery. If so, then when the women involved had not consented to such acts, those acts should have been acknowledged as the requirements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crime of already committed rape (强奸 已遂罪) as well. In this era, women all too easily committed suicide due to insignificant acts on the level of being tugged at their hems by men. In other words, because the act of 'tugging at the hem or sitting across each other at a table' was considered to constitute serious adultery, women took their own lives in order to plead in advance their own innocence and sense of the injustice of the circumstances. In the case of adultery, the legislators and law enforcers of Joseon at the time created diverse royal edicts and punished acts on the level of 'tugging at the hem or sitting across each other at a table' as the sex crime of adultery. In contrast, as for rape, these figures only clung to provisions in the Daminglu (大明律, Great Ming Code), presenting the interpretation that there was no relevant provision and desisting from strictly punishing the perpetrators.
This paper examines problems and inadequacies in the interpretation and implementation of legal provisions surrounding sex crimes in order to glimpse at the contradictory sexual mores and legal judgments of the subjects who legislated such laws. This, above all, can be seen as better reflecting the intimate sexual desires and aspirations of the ruling classes centering on the monarch at the time. If men and women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 Dynasty lived under a cognitive system that was seriously differential toward the crimes of adultery and rape, then, today, South Koreans conversely live in a world where the crime of adultery has been abolished and public attention is directed at the crime of rape. We have also experienced as an important issue whether or not sexual relations by force can be established as rape. What are the clear judgment criteria for consensual sex and rape today? Do we have the epistemological grounds to understand rape not as a special form of sexual relations but as serious violence? The gender awareness of late Joseon administrators, who were sensitive to the distinction between adultery and rape, and the experiences of women who, faced with the strong power of such an awareness, either capitulated or fought back, prompt us to rethink the coordinates of our own gender awar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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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본 메이지시기 오쓰키 슈지(大摫修二)의 『日本地誌略』 편찬과 독도 인식

저자 : 한철호 ( Han Cheol-h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5-25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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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키는 일본 메이지시기 지리학자로서 『日本地誌略』과 『日本地誌要略』을 비롯해 수많은 지리교과서·부도를 편찬하였다. 특히 일본 문부성이 최초로 발행한 『일본지지략』은 당시 가장 널리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일본지리교과서의 기준이 되었던 대표적인 소학교 지리교과서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새로 발굴한 자료들을 토대로 오쓰키가 『일본지리략』에서 독도를 어떻게 서술·인식했는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오쓰키가 문부성 재직 중인 1874년 1월 『일본지지략』 초고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참고했던 태정관 정원 지지과의 『일본지지제요』 초고는 출판을 위한 최종 교정본 직전의 초고본이었다. 그는 『일본지지제요』를 참고로 『일본지지략』을 편찬하면서 松島(독도)와 竹島(울릉도)의 존재를 인지했지만, 두 섬을 부속섬 관계로 파악하면서 오키의 소도에 포함하지 않았으며, 『日本地名字引』에서도 기재하지 않았다.
『일본지지략』에 수록된 '日本國全圖'와 이에 관련된 「山陰道之圖」·「隱岐圖」에도 모두 松島와 竹島는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 이들 지도에 일본 영토의 변동 상황이 정확하게 반영되었음에도 두 섬이 제외된 사실은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이들 지도와 본문의 내용을 비교해 살펴보면, 松島와 竹島는 오키의 해양상 위치 혹은 경계를 설명하기 위해 서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쓰키는 동생 후미히코의 '暗射日本圖(日本全圖暗射)'를 근거로 편찬한 『日本全圖暗射指南譜』에서도 松島와 竹島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가 『大日本沿海實測錄』를 편수하는 과정에서 참고했던 『대일본연해실측록』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서술되지 않았으며, '암사일본도'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표시될 공간이 있지만 그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쓰키뿐만 아니라 후미히코도 일본 영토의 중요성과 그 변동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인물이었지만, 『일본지지략』을 비롯해 『일본지명자인』과 『일본전도암사지남보』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로 인식된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지지략』은 일본 문부성이 개정·발행한 최초의 일본지리교과서였던 사실에 비추어, 일본정부 차원에서도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Otsuki Shuji (大摫修二), a Japanese geographer during the Meiji era, published a number of Japanese geography textbooks and student atlases. His Nihon-chishiryaku (日本地誌略), initially publish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was the most successful geography book in this period and adopted by elementary schools, which made it the standard geography textbook of the time in Japan. This paper mainly examines how Otsuki treated Dokdo in this influential book.
During his tenure of office at the Ministry of Education, Otsuki completed his first draft of the Nihon-chishiryaku (January 1874) consulting the practically final draft of the Nihon-chishi-teiyo (日本地誌提要) compiled by the Chishika (地誌課) under the Daijokan (太政官). Otsuki was aware of the existence of Dokdo and Ulleungdo but did not consider them as belonging to the Oki Islands. Nor did he register them in the Nihon-chimei-zibiki (日本地名字引). This is probably because he believed that Dokdo was a dependency of Ulleungdo.
We cannot find Dokdo and Ulleungdo on the maps included in the Nihon-chishiryaku such as Nihonkoku-zenzu (日本國全圖), Sanindo-no-zu (山陰道之圖), Oki-zu (隱岐圖). Given that these maps accurately reflected the territorial changes in Japan, that the two islands do not appear on these maps implies that the author did not consider them as Japanese territories. Otsuki did mention Dokdo and Ulleungdo in the text but it was only for explaining the boundaries of the Oki Islands.
Otsuki did not treat Dokdo and Ulleungdo as part of Japan in the Nihon-zenzu-anshya-shinanhu (日本全圖暗射指南譜), a book he wrote based on the Anshya-Nihon-zu (暗射日本圖) by his brother Humihiko (大摫文彦). While working on the Nihon-zenzu-anshya-shinanhu, Otsuki consulted the Dai-Nihon-enkai-zitsokuroku (大日本沿海實測録), where Dokdo and Ulleungdo were not mentioned. Nor did they appear on the Anshya-Nihon-zu despite that there was enough space to mark them.
As seen above, Otsuki excluded Dokdo and Ulleungdo from the dominions of Japan in his geography works including the Nihon-chishiryaku. What this fact tells us is that neither Otsuki nor the Ministry of Education perceived Dokdo as a Japanese territory.

KCI등재

9임화의 통속소설론과 문학사론의 관계 ―저널리즘 인식을 중심으로―

저자 : 배상미 ( Bae Sangmi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57-28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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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임화의 '통속소설'에 대한 견해가 시대적 맥락과 문단의 분위기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그의 1929년과 1938년에 각각 발표된 평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것이 임화 문학사론의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밝혔다. 임화는 1929년과 1930년 사이에 발표한 프롤레타리아 문학 대중화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소설을 대중들에게 더 많이 보급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중들의 기호에 맞는 작품을 창작하고 검열을 피해 대중적인 미디어에 게재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급진성을 약화시켜야한다는 김기진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러나 임화는 1938년에 통속소설이 소설이 게재되는 미디어를 분석하면서 김기진이 대중화론을 주장하면서 사용한 방법론을 차용한다. 임화의 통속소설에 관한 논의는 임화의 문학사론에서 조선에서 저널리즘이 차지하는 다층적인 위치를 보충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임화의 문학사론에서는 전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식민지 조선의 문학사에서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라는 당대의 물질적이자 역사적 조건을 고려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에도 식민지 조선의 문학사 서술에서 고려해야할 가치가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theory of secular novel by Im Hwa between 1929 and 1938. Im criticizes Kim Kijin, who argues that the proletarian literature should debilitate the level of socialist agitation in the literature for both circumventing censorship and spreading their literature to mass, during the debate about popularizing proletarian literature in the late 1920s. However, Im repeated Kim's methodology when analyzing secular novels and the media for literature. His logic for explaining secular literature is different from the Korean modern literary history project focusing on how the Korean modern literary genre has developed dialectically following European order. This discrepancy suggests that literary history should consider colonialism and capitalism, which influence on publications and narratives.

KCI등재

10변혁의 주변에서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주체의 다기한 형성과 세대인식의 교차―

저자 : 허민 ( Heo M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5-31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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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6월 항쟁이라는 변혁의 시간을 통과한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주체(화)의 다기한 형상들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다루고 있는 소설들은 대학생과 노동자로 대표되는 변혁의 인격적 담지자들만을 직접적으로 재현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변혁의 문턱에서 망설이던 자들의 혼란을 재현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어떤 문학의 정치가 모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6월 항쟁의 중심에 서있기 보다는 그 주변에서 변혁의 순간을 '관망'하거나 중산층적 욕망에 사로잡혀 '변심'하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전망 상실의 '좌절' 속에서 참여자체를 망설이던 자들의 여러 사연이 포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현양상에는 주로 6월 항쟁에 대한 세대인식의 격차가 반영되고 있었으며, 이는 운동사적 대의가 일상의 정치로 다시 제기되는 사태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 논문에서는 변혁을 모색하던 1980년대 소설들에서는 발언의 가치를 정당히 평가받지 못했던 자들에 대한 문학의 권리를 복권함으로써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장소로부터 문학의 정치성을, 그 민주주의적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들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6월 항쟁의 (반)정치적 재현 양상의 사회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탐색해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looking into the intricate forms of political subjects emerging in the novels which went through the June Democracy Movement, a revolutionary period. The novels which are about the June Democracy Movement and the 1987 Great Labor Movement do not directly reproduce moral bearers of revolution represented as university students and laborers. They rather claim that politics of possible literature was being sought by reproducing the chaos by those who had been hesitating at the threshold of revolution. In other words, they were not standing at the center of the June Democracy Movement but 'waited and watched' the moment of revolution from nearby or 'changed their minds' after being captivated by middle-class desires and the stories of those who had been hesitating to partake in it amid 'frustration' from losing view were being captured. Such an aspect of reproduction reflects the different views toward the June Democracy Movement among generations and this brought about the cause of movement history being raised again in politics of daily life. Therefore, this study aims to look into the works which secure political character and democratic possibility of literature from the most unpolitical places by giving the portion back to those who did not have the right to speak in the 1980s novels which were seeking revolution. This will explore the social characters of the June Democracy Movement's (anti-) political reproduction aspects in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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