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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NG GOOK SA HAK

  •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225-0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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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3권0호(1955)~67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714
동국사학
67권0호(2019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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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안료의 향유와 소유가 사회경제적으로 어떤 상관성을 갖고 연계되는지 연계 지점에 관한 다양한 담론을 제시함으로써 교역품으로서의 안료에 대한 인식을 새로운 경계에서 논의해갈 수 있는 토대 및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검토 결과 신석기시대에 이미 안료의 소유 및 사용은 일정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보한 경우에 가능한 것으로, 특히 최상계층을 중심으로 안료 및 채색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게 실현된 것으로 나타난다. 아울러 채도가 옥기의 희소성과 거의 유사한 수준으로 인식되는 상황들도 출현시킨다.
이후 초기 청동기시대를 거쳐 상대에 진입하면서 계층간 안료 소유의 차별화가 더욱 심화되고 서주시대에도 그러한 양상을 거의 그대로 지속해간 것으로 파악된다. 춘추전국시대의 경우 신분적으로 士급 이하 계급에서는 채색문화의 향유가 쉽지 않았고, 경제력에 문제가 있을 경우 신분에 관계없이 채색문화의 적극적 향유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신분보다 경제력 문제가 채색문화의 향유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인으로 기능한다.
이상의 내용은 신석기시대를 포함한 선진시대에 이미 교역품으로서의 안료의 사회경제적 지표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읽게 한다.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suggest diverse discourses about the relation points, the correlations of pigments' enjoyment and possession for society and economy. In addition, it intended to prepare foundation and opportunity to discuss about the awareness about pigments as trading product in new boundary.
As a result of examination, possession and use of pigments were possible to secure a certain position of society and economy in the Neolithic era and especially, it's grasped to realize a strong desire of ownership of pigments and coloring by focusing on the highest class. In addition, it's confirmed to recognize chroma at the level similar nearly to scarcity of Jade period.
And then, while entering Shang Dynasiy through the early Bronze Age, differentiation of pigments possession among classes became more deepened and in Western-Zhou period, the tendency was maintained as it was. In case of the Warring States Period, classes less than the status of classical scholar had difficulties in enjoying coloring culture and if there is a problem in economic power, it was nearly impossible to enjoy coloring culture actively regardless of status. In other words, economic power rather than status was decisive factor making an effect on enjoyment of coloring culture.
Due to the above contents, it's expected to the socioeconomic indicators of pigments approached the high level as trading product in XianQin period including the Neolithic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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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세기 중국 동북지역 정세 변화와 초피(貂皮) 교역

저자 : 이승호 ( Lee¸ Seung-ho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1-7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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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3세기에 걸쳐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개된 담비가죽[貂皮]의 생산과 교역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1세기로부터 3세기 초까지 부여는 동쪽의 挹婁를 臣屬시키고 이들이 생산한 담비가죽을 가공 · 수출하면서 동북지역 담비가죽 교역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3세기 초를 기점으로 부여의 세력권 안에서 읍루가 이탈하면서 중원과 동북 수렵세력을 잇던 부여의 중계 교역망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2세기 초부터 고구려가 두만강 하류 유역을 확보하고 북옥저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 일대에서 부여의 영향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구려의 세력 확장은 부여가 읍루 세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읍루 사회 내부에서도 점차 정치적 결집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읍루에 대한 부여의 영향력이 축소되어 갔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대외 정세는 3세기 초반 읍루가 부여로부터 이탈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3세기 중반 이후로 요동과 요서 지역에서 모용선비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부여로부터 중원으로 가는 교통로가 자주 차단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세의 변동은 중원과 동북 수렵세력을 연결하던 부여의 지정학적 이점을 반감시켰고, 그만큼 부여의 대외적 영향력도 축소되어 갔다. 급기야 285년 모용선비의 기습적인 공격에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된 부여는 동북지역 담비가죽 교역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쇠퇴하는 부여를 대신하여 고구려가 담비가죽 교역망을 장악하게 되면서 3~5세기에 걸쳐 중국 동북지역 담비가죽 교역을 주도해 나갔다.


This study is an analysis of the trend of changes in the trading system of sable fur in the Northeast Asian region in China during the 1st~3rd Century. The conclusion formulated through this study is shown as follows.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n the northeastern region in the 3rd century had a major change. And, under the change of such a political situation, the trading system of sable fur had encountered with a change as well. Up to the early period of the 3rd century, Buyeo took over Yilou and processed and exported sable furs that they produced. However, with the 220s as a turning point, Buyeo lost its initiative right of such sable trading. The cause of it was the growth of Goguryeo and deviation and independence of Yilou.
From the early 2nd century, Goguryeo secured the lower basin of Tumen River and expanded its power toward the North Okjeo region to push off the influence of Buyeo from the region. Along with this development, in the early 3rd century, Yilou gained independence from Buyeo and the trading network for sable fur that Buyeo had complete control was completely collapsed. And, instead of Buyeo, Goguryeo took over the initiative of trading including the distribution network of the sable fur. And thereafter, Goguryeo completely controlled the initiative of the sable fur trading in the northeastern region of China through 3rd~5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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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후기 구무(求貿)를 통해서 본 조· 일간 물품교역의 현황과 특징

저자 : 이승민 ( Lee¸ Seung-min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7-11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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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조선-쓰시마'로 연결되는 특수한 관계 내에서 이루어져 당시 조일관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교역형태로 '求貿'라는 것이 있었다. 구무는 막부로부터 대조선외교와 무역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은 쓰시마가 자국 내에서 특정 물품에 대한 불시의 필요가 발생해 이를 조선 측에 구해달라고 요청하면, 조선에서 이에 대한 사안을 심의해 이루어지는 무역형태였다.
조선후기 구무의 전개양상은 조선후기 조일 국교재개와 함께 쓰시마로부터 구무 요청이 시작되는 '태동기', 1630년대 조일외교 및 무역체제의 정비에 따라 구무가 활성화되는 '활성기', 조일양국 대외정책에 따른 조일관계의 변화와 무역의 변화·쇠퇴로 인해 쓰시마로부터 구무 요청이 감소되어 가는 '쇠퇴기'의 세 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에 따라 품목별로는 약재류·금수류·과실류·문방구류·어패류·직물류·피물류·서적류·다기류·의복류·인적자원·악기류·기타에 이르기까지 수백여가지의 다양한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쓰시마의 구무 요청은 기본적으로는 쓰시마 내의 필요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러한 필요에는 쓰시마번주의 保身을 위한 대막부 교섭의 측면을 간과할 수 없었다. 쓰시마는 구무를 통해 조선에 요청한 물품을 참근교대 때 막부에 가져가 쇼군을 비롯한 막부 유력층에게 접대용으로 사용함으로써 막부 내에서 자신의 입장을 세울 수 있었고, 또한 그들의 의뢰를 받아 필요한 물품을 대리자의 입장에서 다시 조선에 요청했다 이를 통해 쓰시마는 막부에게 자신이 조선과 교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게는 조일관계의 대리자임을 내세움과 동시에 교린의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교역에서 지극한 편의를 얻고자 했다.
반대로 조선의 입장에서는 구무를 통한 교역은 일정한 정도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쓰시마의 계속된 구무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쓰시마를 매개로 형성된 간접통교체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경험하고 대청관계가 변화하면서 조선에서는 북방의 안전을 우선시하게 되고 그 바탕에는 일본이라는 남변의 안전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 1635년 국서개작사건 이후 쓰시마번주가 막부로부터 대조선외교와 무역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받고 외교체제가 정비되어 가면서 쓰시마는 조선정부와 일본막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중간자적 입장을 보다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초기의 왜구문제를 포함해 후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남변의 안전이라는 중요한 정책 목표를 세우면서 쓰시마를 매개로 형성된 일본과의 간접통교관계를 원활히 이끌어나가고자 했고, 그러한 방법의 하나로써 구무를 허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In the special relationship between 'Joseon-Tsushima' and the late Joseon Dynasty, there was a form of trade that show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Japan. Gumu(求貿) was a form of trade in which the Tsushima, which had been authorized by the Bakuhu for the rights of diplomatic relations and trade, asked Joseon to save certain goods because of an unexpected need in his country. 
The development process of Gumu in the late Joseon Dynasty can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First, 'the embryonic stage', when the request for Gumu is initiated from Tsushima along with the resumption of diplomatic ties between Joseon and Japan in the late Joseon Dynasty, Second, 'the active phase', in which the Gumu is activated according to the maintenance of the diplomatic and trade system in the 1630s, Third, 'the decline period' of requests for detention from Tsushima due to changes in diplomacy and trade following the foreign policy of both Joseon and Japan. Accordingly, the trade of hundreds of various items, ranging from medicinal stuffs, animals, fruits, writing utensils, fish and shellfishes, textiles, clothing, books, ceramics, human resources, and other items, was conducted. 
The Gumu request of Tsushima basically originated from the need in Tsushima. But such a need cannot overlook the aspect of negotiation toward Bakuhu byTushima-Hanshu(對馬藩主). Tsushima was able to establish his position within Bakuhu by taking the goods he had traded with the Joseon at the time of Sankinkoutai(參勤交代) and using them for entertainment to Shougun(將軍) and others. Tsushima has also asked Joseon again for the goods they seek on behalf of their representatives at the request of Shougun and others. Through this, Tsushima was able to highlight to Bakuhu that he was the only one able to trade with Joseon, and sought to gain extreme convenience in trade by emphasizing that he was an agent for the Joseon Dynasty and a good-neighbor(交隣) on the other hand. 
On the contrary, from Joseon's point of view, trade through the Gumu was a certain amount of inconvenience. Nevertheless, the acceptance of Tsushima's continued requests for Gumu can be found in the indirect communication system formed by Tsushima's medium. Joseon experienced two wars, Waeran(倭亂) and Horan(胡亂), respectively, and the relationship with Qing Dynasty(淸朝) changed, giving priority to the safety of the north. And based on that, the south safety of Japan had to be the premise. In 1635, however, an unprecedented adaptation case of state letter(國書改作事件) was revealed in Japan. With this in mind, Bakuhu dispatched diplomacy buddhist monk(外交僧), which directs and supervises diplomatic documents at Bakuhu level, to Iteian(以酊庵), while reorganizing the diplomatic system by granting the Tsushima-Hanshu as trade monopoly. Now Tsushima was able to clarify the position of the mediator, which plays a role of connecting the Joseon government with the Japanese Bakuhu. It is thought that Joseon wanted to smoothly lead indirect relations with Japan, which formed Tsushima as a medium, and authorized Gumu as a way of doing so, establishing an important policy goal of safety in the south even after the latter period, including the issue of Japanese pirates in Early Joseo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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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金欽突)의 난은 신라 신문왕(神文王, 681-692)과 그의 왕권이 직면하였던 첫 번째 도전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최측근 신하들은 귀족층에 맞서 왕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왕권에 상징적 권위와 정통성을 부여하는 체제를 시행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문왕은 신라 중대(654-780)의 다른 어떤 군주보다 세습 귀족의 권력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구축하였으며, 『예기(禮記)』의 「왕제(王制)」편에서 설명하는 유교적 이상과 규범의 구조적 제도를 통해 상징적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왕제」편에서 기술된 대로 적합한 왕정(王政)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문왕이 수립한 형태는 교육 제도의 실시, 오악(五嶽) 체제로 이루어진 구주(九州) 제도, 조묘(祖廟)의 개시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Silla King Sinmun (r. 681-692) faced his first challenge to royal authority in the Kim Hŭmdol rebellion. This is experience probably impressed upon him and his closest advisors that the implementation of a system granting symbolic authority and legitimacy was necessary to improve the position of the king vis-à-vis the nobility. King Sinmun, more than any other monarch of the mid-Silla period (654-780), endeavored to check the power of the hereditary nobility, cultivate autocratic rule, and legitimate its symbolic authority through the structured institution of Confucian ideals and norms articulated in the “Royal Regulations” (Wang zhi 王制) chapter of the Book of Rites (Li ji 禮記). Sinmun's establishing patterns of appropriate royal rule as described in the “Royal Regulations” chapter are most clearly manifest in his implementation of an educational system, his organization of Silla into nine prefectures with a system of five sacred mountains, and his inauguration of an ancestral temple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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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구요(九曜)의 라후신앙(羅睺信仰)으로 풀어본 신라 처용(處容) - 처용을 보는 또 하나의 시선 -

저자 : 정진희 ( Jung Jin-hee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9-20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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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신앙과 인도 점성신앙인 구요의 라후가 많은 부분에서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처용의 정체성을 모색하는데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처용이 신라에 당도하였던 879년은 중국 불교의 구요신앙이라 할 수 있는 치성광여래 신앙이 한반도로 전래된 9세기 중후반과 시간차가 크기 않다. 왕의 명령에 의해 불교식으로 천재지변을 해소하는 처용설화의 내용은 라후신앙의 渡來 이전 불교 치성광여래 신앙이 신라에 전래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두 신앙이 비록 한반도로 전파된 경로는 달랐지만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려 준다.
고려 가사 <처용가>에는 직접적으로 처용을 라후라 지칭하고 口舌을 경계하며 돈을 태워 소재의식을 치르라는 의미를 내포한 구절이 있다. 이슬람 점성신앙의 특징을 보여주는 신라 처용에 비해 고려 가사의 처용은 불교 경전에 소개된 라후와 유사한 성격을 나타낸다. 이는 소재도량이 성행하였던 고려시대는 불교의 라후 소재법이 대중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악학궤범>에서 처용무 후반에 불보살을 소청하는 부분이 삽입된 이유 역시 사라진 고려 소재도량의 잔재로 사료된다. 그리고 조선후기 민속놀이인 제웅치기도 불교에서 구요가 사라진 이후 민간의 세시풍습으로 전승된 처용신앙의 흔적이다.
한반도의 구요는 시대를 따라 전승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처용의 전설과 전승기록을 통해 구요는 세월의 흐름에 적응하며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여 신앙의 명맥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본고는 처용의 정체성에 대한 또 하나의 시선으로 서역 점성신앙인 구요의 라후를 통해 처용설화를 풀이하였다. 이를 통해 918년 후고구려 동주 발삽사에 있던 치성광여래와 구요 소상의 존재와 924년 왕건에 의해 구요당이 창건되어진 사회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This study examines the transfer of navagraha faith's Rahu to Korea through the legend and the record of Cheoyong. Rahu is one of nine stars in India's navagraha religion(九曜信仰). Rahu makes the solar eclipse. Cheoyong resembles Rahu's ability to create fog and heal the Measles. The year 879, when Cheoyong came to Silla, is similar to the time when the religion was Tejaprabha Buddha Fait introduced in China. The contents of the story to solve the problem in the Buddhist way by the command of the king. This indicates that there was a Tejaprabha Buddha Fait before Cheoyong came to Silla. In the year when Cheoyong came to Silla, Muslims fled to China to escape the war of Wangso(黃巢之亂). This fact indicates that Cheoyong has relations with the astrologers of the Gentiles who came to Korea in the late 9th century.
In the Korean peninsula, the navagraha religion disappears from the process of passing along the age. However, through the legend and the record of Cheyung introduced to the Korean shows another aspect of navagraha faith. The results of this study provide data that can overcome the limitations of historical records. Through this study, it will be possible to explain the existence of Tejaprabha Buddha sculpture of later Goguryeo at the beginning of the 10th century and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founding of the Guyodang(九曜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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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문경 계립령의 신라말·고려시대 석불에 대한 고찰

저자 : 최성은 ( Choe Songeun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5-244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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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일대에 펼쳐진 계립령은 고대부터 소백산맥의 남북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고 이곳에 전해오는 많은 석불 · 마애불들은 고대로부터 여행자들이 숙박하고 예배하는 도량으로서의 불교사원이 그 일대에 활발하게 경영되었음을 말해준다. 계립령로 주변에 전해오는 석불과 마애불상들은 약사불과 미륵존상이 많은데, 본고에서 살펴보는 여섯 구의 불상들과 석조광배 한 점 가운데, 미륵암지 마애미륵 여래좌상과 미면사지 광배를 제외하고 대부분 신라하대에서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나말여초기에 들어 계립령로를 통한 남북간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문화적 주요 통로로서의 역할을 크게 하였음을 말해준다.
불상들은 신라지역 고식(古式)의 도상을 충실하게 계승한 상과 나말여초기의 새로운 도상이 반영된 상들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까지 삼국시대 신라 불상들이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을 경북 북부의 안동, 봉화지역과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그 지역 고식의 전통이 문경지역에 전해 내려올 수 있었고, 동시에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에 당말오대의 새로운 불교미술의 요소가 전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며 이것은 계립령 일대의 사찰들이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던 점과 관련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주변 교통로를 따라 계립령의 하늘재 남북으로 불상양식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충주 미륵대원 석굴의 소형석조여래좌상이 문경 갈평리사지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착의양식과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문경 대승사 미륵암지 마애미륵여래좌상은 법상종이 크게 유행했던 고려중기의 불상인데 중앙지역의 여러 법상종 사찰에도 오늘날 전하지 않는 대형 미륵불상이다. 이 지역에 법상종의 주존인 미륵존상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교통로상에 위치한 문경지역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중앙 불교계의 움직임을 빨리 수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From the ancient period, the mountain pass of Geripryong(鷄立嶺) located in the present-day Mungyeong(聞慶) region was one of the main traffic routes connecting the southeastern and the northwestern parts of the Korean peninsula: from North Gyeongsang province to North Chungcheong and Gyeonggi province.
A number of rock-cut and Buddhist images in this area reveal that many Buddhist temples were run as chapels and places of lodging for travelers. A number of extant rock-cut and stone Buddhist images along the mountain pass of Geripryeong can be dated to the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 with the exception of the rock-cut seated Maitreya Buddha Image of Mireuk-am site(彌勒庵址) and the stone halo unearthed from the Mimyon-sa site(米麵寺址), for they share stylistic characteristics with a few late Silla and early Goryeo images of Gyeonggi and Gangwon provinces. The images along the mountain pass of Geripryeong show both the traditional, conservative iconography passed down in Silla, and new iconography that was introduced from the late Tang and Five Dynasties Period of the tenth century. Evidence of new iconography in the images indicate that there was geographical access to the northern part of Silla, such as Andong and Bonghwa area where ancient Silla Buddhist temple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were most likely still extant, as well as the advantage of traffic routes through which new cultural sources were easily accepted.
The rock-cut and stone images at Geripryeong are mostly Bhaisajyaguru and Maitreya, which prevailed in the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 Among various Buddhist trends of religious worship, the cult of Bhaisajyaguru and Maitreya had been very popular from the ancient period. It is therefore assumed that people traveling through the mountain pass were familiar with this worship and prayed for the welfare and the safety of their 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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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사리령응기(舍利靈應記)』 재검토 - 편찬자와 특징을 중심으로 -

저자 : 정영미 ( Jeong¸ Young-mi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5-27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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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년(세종30) 文昭殿 옆에 건립한 佛堂의 落成을 기념하여 행한 慶讚會에 대해 기록한 『舍利靈應記』는 金守溫이 저자로 알려져 있고, 금속활자인 初鑄 甲寅字로 인쇄한 조선 초기의 불교 전적이다. 『사리영응기』는 김수온의 문집인 『拭疣集』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나 규모와 내용 면에서 매우 다른 기록이다. 『사리영응기』에는 경찬회를 주도한 승려의 명단, 信眉와 김수온의 공동 저작으로 경찬회의 절차를 모두 기록한 「三佛禮懺文」, 세종이 새로 작곡한 新聲 7곡의 제목과 그의 가사인 9개의 악장, 저자를 확정할 수 없는 경찬회의 발원문인 疏 2편, 법회 참석자 261명의 명단인 「精勤入場人名」이 小字雙行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식우집』에는 없는 내용이다.
특히 「삼불예참문」은 법회의 의식 절차에 대한 일종의 의식집인데, 이는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수륙재 의식집인 『法界聖凡水陸勝會修齋儀軌』, 『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등이 명칭은 다르지만 수륙재 절차를 차례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사리영응기』는 김수온의 저작이 아니라 문소전 불당 건설부터 경찬회까지의 일련의 과정에 관련된 기록을 모아 편찬한 전적이다. 불당은 유교적 추모 공간인 문소전에 짝하는 불교적 추모 공간이므로, 『사리영응기』는 불당에서 행하는 추모 의례의 전 과정을 기록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는 특정 의례의 진행을 위해 설치된 都監에 관련된 모든 내역을 담고 있는 조선 시대 관찬 의궤의 특징과 일치하는 것이다.


The Sariyeongeunggi, the record on the Gyengchanhoe(慶讚會) which was the ceremony for the completion of Buldang next to the Moonsojeon(文昭殿) in 1448, the author is known as Kim Suon and, was Buddhist materials in the early Joseon, which was printed in metal type for the kapin font. The Sariyeongeunggi was included in the Sigu chip, Collected Works of Kim Suon in the same title, but was very different in scale and content. The Sariyeongeunggi and the Sigu chip were the same record on the establishment of Buldang and the process of the Gyengchanhoe, but the former contained the list of leading Buddhist monks, the Sambulyechammun(三佛禮懺文) writing the whole process of the ceremony, the titles and contents of the Akjang(樂章) which were composed by King Sejong, the two votive inscriptions(疏) on the ceremony, and the attendance list. but there were no such records in the latter. 
Especially, the Sambulyechammun was the record of the ritual procedure in Buddhist ceremony, and the Suryuk Uiryemun(水陸儀禮文) of Beopgye Seongbeom Suryuk Seunghwe Sujae Uigwe(『法界聖凡水陸勝會修齋儀軌』) and the Chunji Myungyang Suryuk Saeui Chanyo(『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which was published around the same time was the different name from the former but was written the procedure of the Suryuk in regular sequence. 
Therefore, the Sariyeongeunggi is very same as the general form of Uigwe(儀軌) in regard of the processes, the persons in charge of the ceremony, and the ritual proced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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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 세종대 『사리영응기』 편찬과 왕실불사의 전통

저자 : 박선경 ( Park Sun-kyung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3-30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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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세종 30년 내불당 불사를 『사리영응기』의 내용을 통해 검토하였다. 내불당 불사에 대해 세종 개인의 신앙에 의한 것이라고 치부하기보다 국초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정비해 나가는 국왕으로서 세종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조선 초기 공적 영역에서 불교는 축소되어 갔지만 왕권과 왕실의 위상 강화를 위한 불교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세종이 그린 왕실과 불교의 관계를 검토하는데 있어 『사리영응기』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내불당 불사는 세종의 기획 하에 진행되었으며 『사리영응기』의 편찬은 내불당 불사의 마지막 단계였다. 세종은 김수온 등에게 『사리영응기』를 편찬하게 하고 이를 유사에 명하여 금속활자 본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내불당 조영과 경찬법회 사리 이적을 기록한 『사리영응기』는 왕실의 불사를 현창하기 위해 편찬된 것이다.
세종은 불사에서 담당자 배치 또한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각각의 업무에 전문인력을 배치하고 대군들에게 총감독하게 하였다. 또한 장중하고 신성한 불상 이운 행렬의 중심에는 왕실 구성원들이 배치되었으며 세종은 신곡을 지어 불상을 불당에 안치할 때 연주하도록 하였다. 왕실 구성원을 왕실불사 전면에 내세운 것은 세종의 의도와 관련 깊다. 세종은 대군들을 동원하여 왕실불사를 설행하는 전례를 세자에게 남김으로써 왕실 구성원이 불사에 참여할 수 있는 전통과 안정적인 환경에서 왕실불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끝으로 내불당 법회에서 연출된 '사리이적'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하나는 세종이 사리가 지니는 상징성을 명확하게 인지하였고, 이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측면은 세종이 태조의 전례를 답습하여 사리이적을 연출하였고, 이로 인해 끊어졌던 사리이적의 전통이 후대에 다시 이어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이를 계승하는 모습을 문종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This study was reviewed through Sariyeongeunggi of Buddhist Projects of Naebuldang at 30th year of King Sejong(1448). It was done to understand King Sejong's intention to establishing and maintaining the foundation of a nation as a king rather than to be treated by King Sejong's personal faith of Buddhist Projects of Naehuldang. King Sejong had Kim, Su-Ohn compile Sariyeongeunggi and this was published in Printed with Metal Type by commanding it as national organization. Compiling Sariyeongeunggi was considered as a tool to promote the authority of royal family under plan of King Sejong. King Sejong also closely prepared the person in charge. He arranged an expert in each work and had the princes from the legal queen supervise it. And the royal family members were appointed in middle of the moving parade of spectacle and sacred statue of the Buddha. He excluded the successor to him from the Buddhist Services of Naebuldang. He thought out a plan not to be criticized by bureaucrats who studied Confucianism and for the royal family to traditionally participate in the Buddhist Projects by delivering the manual to him to conduct the Buddhist Services. Finally 'miracles of sarira incarnation' emerged from Gyeongchanhoe Buddhist ritual of Naebuldang clearly recognized the sarira that King Sejong followed as a symbol come from the ancient royal family and King Sejong aimed at enhancing royal authority through it. He got foothold to pass down the tradition of Buddhist Projects that was cut off for imitating the precedent of King TaeJo to descendants. We could see the succession of this from the era of King Moon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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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체코군단

저자 : 황정식 ( Hwang Jeong-sik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07-34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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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공산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체코 군단이 1918년 체코 건국에 별다른 기여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정의롭지 못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즉 그들은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전쟁에 참전했고, 특히 신생 소비에트 정부의 목을 조인 반동적인 존재였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체코군단에 대한 언급이나 연구는 1989년까지는 거의 금기시 되었다. 1989년 이후 새로운 시각으로 군단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나 자료의 접근, 수집 정리의 어려움으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형편으로 국내의 체코군단이나 군단과 독립군과의 관계 등에 관한 연구 역시 단편적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체코군단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지금까지의 독립군과 무기거래라는 일회적, 제한적인 문제 영역을 벗어나 1920년대를 전 후한 동북아의 정세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나아가 체코군단의 시베리아 철도를 통한 이동은 고대 그리스의 Anabasis에 비교되는 역사적 사건의 한 특이한 형태로서 그 자체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흥미 있는 연구 주제이다. 체코군단과 관련된 국내외의 다양한 사료들을 발굴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할 경우 1920년을 전 후한 연해주와 만주, 그리고 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으로 사료 된다. 특히 가이다의 열차 등 체코군단에 합류하고 있던 한인들의 존재와 독립군과의 관계를 추적해 보는 작업은 매우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체코군단이 이동 중에 발간했던 Czechoslovak Dennik는 중앙아시아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했던 무명의 다양한 한인들의 행적을 밝혀 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이미 밝혔듯이 독립군들이 총포와 탄약, 그리고 수류탄 등 체코군단으로부터 구입한 무기는 체코제가 아닌 다양한 출처의 “체코군단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였다. 또한 군단이 독립군에게 무기를 판매한 것도 그들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독립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해서가 아닌 단순한 무기 처분 과정 이었다. 체코군단의 무기를 구입한 사람들은 독립군 외에도 중국인과 러시아인 등 다양한 민족과 계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기 판매 행위도 군단의 공식적인 승인 하에서가 아닌 소수 군단병들의 일탈된 행위였다.
가이다 장군의 여운형 등에 대한 환대와 한국독립에 대한 지지 표명, 그리고 귀국 후에도 필설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겠다고 했던 약속 등의 진정성을 어디까지 믿어야 되는가? 부관 한츠를 대동시킨 열차로 귀로의 여운형을 호위해 주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지만 밝혀진 바 귀국 후의 가이다의 행적에서 우리가 크게 주목 할 만 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진정성을 믿기는 어렵다. 추측건대 독립군으로 넘어간 무기 중 일부는 가이다가 지휘하던 부대의 무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임시정부의 가이다 장군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컷던 것으로 보인다. 파리 평화 회의 등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변해줄 나라는 없었다. 모두가 한국인의 적인 일본의 우군들이었다. 그런데 유럽의 신생 체코 공화국의 유력자로 보이는 가이다가 우리를 이해하고 동정을 표명하였다는 사실은 임정 요원들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임시정부가 체코 독립기념 은컵을 제작하여 가이다에게 선물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나 가이다에 대한 박은식 선생의 기대와 평가도 그야말로 선생의 기대와 희망이었을 뿐이다.


In Czechoslovakia since communization in 1948, there has been a widespread perception that the Czechoslovak Legion had not made any significant contribution to the founding of the Czechoslovak Republic in 1918, nor that its existence itself was just. In other words, they were the frontiers of imperialism and was the reactionary beings who struggled against the fledgling Soviet government. Under these circumstances, references to or studies of the Czechoslovak Legion were almost taboo until 1989.
Although military research has been under way in a new light since 1989, research on this field has not yet received much attention due to difficulties in accessing and compiling data. Against this backdrop, research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zechoslovak Legion and the Independent Army in Korea has also remained fragmentary.
A systematic study of the Czechoslovak Legion has important implications for understanding the situation in Northeast Asia in 1920s. Furthermore, the movement of the Czechoslovak Legion through the Siberian Railway is an unusual form of historical events compared to Anabasis in ancient Greece, and itself an interesting study subject that attracts our attention. The excavation and systematic analysis of various domestic and foreign materials related to the Czechoslovak Legion is to suggest a lot to the study of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in the regions of Maritime Province of Siberia, Manchuria and Gando in the year 1920s. In particular, it will be very meaningful to track down the existence of Koreans who were joining the Czechoslovak Legion, including the train in Gajda, and their relationship with the Independence Army. Related to these issues, Czechoslovak Dennik, published by the Czechoslovak Legion on the move, is to be a valuable source that can reveal the tracks of various unknown Koreans in Central Asia and the Maritime Provinces of Siberia.
The weapons purchased from the Czechoslovak Legion, including guns, ammunition and grenades, were not from the made in Czechoslovakia but from “possessed weapons of the Czechoslovak Legion” from the various country. Also, the Legion's arms sales to the independent forces were not simply a process of disposing of weapons, not because they thought they would support and help Korea's independence. The people who purchased the Czechoslovak Legion's weapons were from a variety of ethnic and class groups, including Chinese and Russians. And arms sales were also an aberration of a small group of soldiers, not under the official approval of the Legion.
To what extent should we believe in the sincerity of General Gajda's hospitality toward Yeo Un-hyung, his expression of support for Korea's independence, and his promise to publicize the legitimacy of Korea's independence even after returning to Korea? It is highly unusual that a train accompanied by a deputy Hanc was used to escort him home, but it is hard to believe his sincerity, as it has been revealed that there is nothing much we should pay attention to in Gajda's tracks after returning home. But we cannot rule out the possibility that some of the weapons that were transferred to the independent forces were those of the troops that were commanded by Gajda.
Because there was no country to understand and represent Korea's position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 Provisional Government's expectations for General Gajda are likely very high. In the Paris Peace Conference, all of the countries were allies of Japan, the enemy of Koreans. But it must have been very encouraging for Provisional Government that Gajda, seen as the leading figure in Europe's fledgling Czechoslovak Republic, understood and expressed sympathy for them. It was in that context that the Provisional Government made silver cup for the establishment of Czechoslovak Republic and presented it to Gajda. But Park Eun-sik's expectations and evaluation of Czechoslovakia and Gajda were nothing but his expectations and ho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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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 졸업생들의 국내 항일운동 - 3.1운동 참여 학생들의 이후 활동을 중심으로 -

저자 : 김상태 ( Kim Sang-tae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43-383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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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결주의, 파리강화회의의 개최, 2.8독립선언 등에 영향을 받은 경성의학 전문학교 학생들은 3.1운동 당시 서울의 1차, 2차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런데 헌병, 경찰의 경계가 강화되고 학교들이 휴교에 들어가면서 3차 시위는 불가능해졌다. 이때 경성의전 학생 김범수는 전남 장성과 광주에서, 양봉근은 부산 구포에서 만세시위에 관여하였다. 이들의 활약은 3.1운동을 전국적인 독립운동,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폭발시킨 동력이 되었다. 또한 허정묵과 김상우는 일제의 식민통치의 실상과 본질, 해외 독립운동 소식 등을 담은 '지하신문'의 배포활동을 벌였다.
3.1운동 직후 국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된 비밀 독립운동단체들이 결성되었는데, 3.1운동에 참여하였던 경성의전 학생들도 이들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의경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편집부장을 맡아 언론활동을 벌였고, 김영철은 대동단의 인쇄물 배포를 시도하였다. 나창헌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대동단에 모두 참여하여 이강공 국외 탈출 계획에 가담하였다.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의열투쟁도 활발하였다. 이때 재학생 오태영은 강우규 의사의 은신과 비밀연락을 지원하였고, 졸업생 허영조는 부산에서 개원 중 의열단 단원의 요청을 받고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1920년대 초반 서울에서는 학생단체 '조선학생대회'가 창립되었다. 경성의전 학생인 이필근, 장세구, 이강은 제2기 지도부에 참여하였고, 특히 3.1운동에 참여하였던 장세구, 이강, 이동영, 양봉근, 허정묵 등은 하기 지방순회강연단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들은 강연에서 식민지 현실의 전반을 다루었으며,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한편 1921년 경성의전 학내에서 일본인 교수의 망언으로 인해 항일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양봉근, 장세구, 전진극, 이동영 등 3.1운동 참여경력의 소유자들이 동맹휴업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은 경성의전 학생들의 민족문제에 대한 고민과 사상이 심화되고, 졸업 후 의사 신분으로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 후반 3.1운동 참여 경력이 있는 경성의전 졸업생, 중퇴생들은 신간회 본부 또는 지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조선공산당의 핵심인물이 된 한위건은 신간회 창립준비위원, 신간회 간사로 활동하였다. 김탁원은 신간회 경성지회, 최경하는 목포지회, 정인철은 재령지회, 이강은 북청지회의 간부가 되어 민족연합전선을 위해, 지역사회의 현안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양봉근은 신간회 울산지회장과 신간회 본부의 검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31년 5월 신간회 해체 후 만보산사건과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만주동포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이때 김탁원은 1932년 1월 특사로서 만주의 수용소들을 방문하여 동포들을 치료하고, 서울에 돌아와 현지의 실정을 보고하였다. 1931년 12월 의료인들과 각계각층의 지도층 인사들이 '보건운동사'를 설립하고 주로 농민, 노동자, 빈민들을 대상으로 보건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양봉근을 필두로 김탁원, 유상규 등 경성의전 졸업생들이 보건운동을 주도하였다.
결국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경성의전 학생들은 1919년부터 19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전개되었던 모든 유형의 항일운동에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Influenced by nationalism, the hosting of the Paris Peace Conference, and the 2.8 Declaration of Independence, Kyungsung Medical School students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first and second demonstrations in Seoul during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However, the third demonstration became impossible as police and military police were on heightened alert and schools closed down. Kim Beom-soo was involved in the demonstrations in Jangseong and Gwangju, South Jeolla Province, and Yang Bong-geun in Gupo, Busan. Their performance contributed to the explosion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as a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and a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Some students, such as Huh Jung-mook and Kim Sang-woo, distributed “Jihangmun,” which contains the facts of Japan's colonial rule, the essence of the 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 abroad.
Soon after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a group of secret independence activists linked to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formed in Korea, and students of Gyeongseongjeon joined the group. Lee Eui-kyung was the editor-in-chief of the Korean Youth Diplomatic Corps, and Kim Young-chul attempted to distribute the printed materials of the Daedongdan. Na Chang-hun joined both the Korean Youth Diplomatic Corps and the Daedongdan to participate in Lee Kang-gong's escape plan. Right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here were also intense protests at home and abroad. Oh Tae-young supported Kang Woo-kyu's hideout and secret contacts, and Heo Young-jo raised fund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at the request of Kang Hong-ryeol, a member of the medical troupe, while opening in Busan.
In the early 1920s, a student organization called 'Chosun Students' was founded in Seoul. Kyungsungjeon students Lee Pil-geun, Jang Se-gu and Lee Kang participated in the second leadership, while Jang Se-gu, Lee Kang, Lee Dong-young, Yang Bong-geun and Huh Jung-mook played a great part in the local lecture group. Their lecture covered the whole of colonial reality and gave directions for our people. Meanwhile, the student movement against Japan was launched in 1921 by a Japanese professor, Gu Bo, at the Kyungsungjeon School. Yang Bong-geun, Jang Se-gu, Jun Jin-geuk and Lee Dong-young led the strike. The incident served as a chance for Gyeongseongjeon students to express their deep concern and thoughts about national issues, and to actively participate in the national movement as doctors after graduation.
Graduates of Kyungsungjeon in the late 1920s, dropouts served as new association headquarters or executive branch officials. Han Yu-gun, who became a key figure of the Communist Party of Korea, served as a founding preparatory committee member of the new association and a secretary of the new association. Kim Tak-won became an official of the Gyeongseong branch of the new association, Choi Kyung-ha of Mokpo branch, Jeong In-chol of the second branch of the Joseon Dynasty, and Lee Kang, a senior official of the Bukcheong branch, made efforts to resolve pending issues in the community for the national united front. Yang Bong-geun also headed the Ulsan branch of the association and the inspection committee of the new headquarters.
After the disbandment of the new association in May 1931, the Manbo Mountain incident and the 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 made the issue of Manchuria an issue. In January 1932, Kim Tak-won visited the concentration camps in Manchuria to treat his compatriots, and returned to Seoul to report on the situation there. In December 1931, medical workers and leaders from all walks of life established 'health activists' and conducted health campaigns mainly for farmers, workers and the poor. With Yang Bong-geun at the center, graduates of Kyungsungjeon, including Kim Tak-won and Yoo Sang-gyu, led the health movement.
Eventually, Gyeongseongjeon students who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March 1st Movement were able to confirm that they participated in all types of anti-Japanese movements in Korea from 1919 to the early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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