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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WEON SA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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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5)~35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305
강원사학
35권0호(2020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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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라(新羅) 장군직(將軍職)의 형성과 운용

저자 : 최상기 ( Choi¸ Sang-ki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8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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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장군은 전쟁 등 유사시에 君主의 군령권을 대행하기 위해 마련된 관직이었다. 군사력의 실질적 운용 근거인 군령권은 본래 君主의 고유한 권한으로, 신라에서도 초기에는 君主가 직접 전쟁을 수행했다. 이후 전쟁의 목적과 규모가 달라지고 지배 체제가 정비되면서 전쟁 현장에서 君主를 대신하는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관직으로서의 장군은 5세기 말에 설치된 좌·우장군을 그 제도적 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단, 장군이 군사력을 지휘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君主가 필요에 의해 자신의 군령권을 적합한 대상자에게 위임했기 때문이었고, 맡겨진 임무를 마무리한 후 장군으로 임명된 자에게 주어졌던 군령권은 곧 君主에게 회수되었다. 『三國史記』에서 장군의 임명 자격을 다른 어떤 관직과도 다르게 上臣과 上堂이라는 관직으로 규정한 것도, 신라 조정의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고위 관료가 상황에 맞춰 한시적으로 장군으로 임명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지금까지는 중고기의 軍主와 장군의 군사적 성격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軍主의 군령권은 관할 영역에 대한 침공이 발생했을 때 즉각적으로 방어에 나서는 수준을 넘지 않았다. 대신 軍主는 상임 지방관으로서 평소에 담당하는 지역의 군사적 역량을 관리해야 했다. 반면 장군은 중앙에서 기획한 군사 행동의 실행자로서 임명과 함께 君主의 군령권을 받은 만큼, 권한의 행사 범위와 활동 규모가 상대적으로 컸다. 아울러 장군에게는 전쟁 등에 수반되는 다양한 외교와 행정 관련 업무의 수행도 기대되었다.


The Janggun of Silla was a government post designed to serve as a military commander of the monarch in times of war and other emergencies. It can be said that the origin of the Janggun post was the Left and Right Janggun established at the end of the fifth century. The military command authority, which is the basis for the actual operation of military power, was the unique authority of the monarch. The Janggun's ability to command military power was due to the fact that the monarch had delegated his authority to a suitable target by necessity, and the military command authority given to the person appointed as a Janggun was soon recovered by the monarch after completing his assigned duties. Unlike any other government posts, the rules for appointment of Janggun post stipulated that the appointee should be one of the officials above a certain rank. It means that a high-ranking official who can participate in the decision-making of the Silla Dynasty was temporarily appointed as a Janggun. Meanwhile, so far, many have equated the military character of the Janggun with that of Gunju. But the Gunju's military command authority did not exceed the level of immediate defense in the event of an invasion of the jurisdiction. On the other hand, as the Janggun was appointed as the executor of the centrally planned military action, the scope of exercise of his authority and the scale of his activities were relatively large. In addition, the Janggun was expected to carry out various diplomatic and administrative affairs related to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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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학농민혁명 시기 지평 민보군 연구

저자 : 박상진 ( Park¸ Sang-ji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9-7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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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9월경에 동학농민군이 재봉기를 함에 따라 경기도와 강원도 내에도 동학농민혁명이 확산되었다. 지평지역에서는 향촌사회를 수성하려는 목적으로 지평현감과 전직 관리인 맹영재가 향약의 외피를 두른 군사조직을 결성하여 도의 경계를 넘어 경기지역과 강원도 홍천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제압하였다. 지평지역은 향약을 매개로 지역 사대부들이 결집하여 포수를 동원함으로써 효과적으로 군사조직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지평지역은 동학농민혁명 시기 이전부터 화포계를 중심으로 양성한 포수들이 민보군의 주요한 인적기반으로 작용하였다. 경기감영에서 부족한 인력과 물력은 지평관아에서 자체적으로 동원하여 민보군을 운영하였다.
지평 민보군은 양호도순무영의 지휘를 받으며 체계적으로 활동하였다. 지평 민보군은 주로 경기도 일대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처형하였으며 경기도 군현의 의병소를 통합적으로 지휘하였다. 10월 말에는 강원도 지역으로 이동하여 차기석계 농민군에 대항하여 벌인 홍천 풍암리전투에서 승전하였고, 영월·평창·정선지역에서 대규모의 연합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지평 민보군은 강원지역에서의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관군을 지원하는 범주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지역의 민보군을 자체 병력에 흡수하거나 함께 작전을 펼쳤다. 황해도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순무영의 전령을 받아 황해도까지 원병을 가기 위해 대응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항일 기운이 고조되자, 1895년 11월 말에 지평 민보군의 포군대장 김백선과 휘하에 있는 포수들이 재결집하였다. 김백선과 지평의 포군은 유생층과 함께 지평의병을 창의하였고, 호좌의진의 기반이 되어 항일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spread to Gyeonggi-do Province and Gangwon-do Province after the Donghak peasant rebels rose to arms again in September 1894. The Jipyeong governor and Maeng Yeong-Jae, a former official, formed a military organization rationalized by Hyangak in the Jipyeong region to uphold the social order of the country districts. This military force crossed the boundaries between provinces to suppress the Donghak peasant rebels in Gyeonggi-do and the Hongcheon region of Gangwon-do. In the Jipyeong region, local gentries convened under Hyangak and mobilized artillerymen to operate military organizations efficiently. Trained artillerymen were Minbogun's primary human resource in the Jipyeong region before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Jipyeong Regional Office self-supplemented the manpower and supply deficiencies in the Gyeonggi Provincial Office to operate the Jipyeong Minbogun.
The Jipyeong Minbogun was operated systematically by Yangho Dosunmuyeong. The Jipyeong Minbogun arrested and executed the leaders of the Donghak peasant rebels, mainly in the Gyeonggi-do region. They also commanded the righteous army centers in counties and prefectures of the same area. In late October, the Jipyeong Minbogun moved to the Gangwon-do region, won the Battle of Pungam-ri against the Cha Gi-seok faction, and attacked a large-scale army of allied peasants in the Yeongwol, Pyeongchang, and Jeongseon areas. The Jipyeong Minbogun were more than auxiliary troops for government forces suppressing the Donghak peasant rebels in the Gangwon regions, as they also absorbed Minbogun from other regions and carried out operations. When Hwanghae-do faced a crisis, they responded by moving to Hwanghae-do as reinforcements under the Sunmuyeong's command.
As anti-Japanese sentiments rose after the Eulmi incident and Short Hair Act Order, the artillerymen regrouped under the command of the Jipyeong Minbogun artillery commander Kim Baek-seon in late November 1895. Kim Baek-seon and the Jipyeong artillerymen founded the Jipyeong righteous army with Jipyeong's Confucian students. This militia provided the base for Hojwauijin and executed anti-Japanese righteous army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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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국학계의 청일전쟁 연구경향과 군사사적 검토

저자 : 김경록 ( Kim¸ Kyeong-lo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9-11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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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근대의 만국체제로 전환은 이미 동아시아 각국의 개항과 동시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은 청 중심 국제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일본의 군사강점에 직면하였다. 청일전쟁으로 동아시아 중심국가의 지위를 상실한 청나라는 쇠퇴하여 결국 중화민국으로 전환되었다. 청일전쟁의 승전국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대신하여 군국주의 강국으로 주변지역에 침략전쟁을 이어갔다.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집권이후 왕권을 강화하여 국력을 강화했지만, 오랜기간 지속된 보수적인 시대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의해 군사적으로 강점되어 결국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전쟁은 국가가 다른 국가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충돌하면 상대국가에 평화수단인 외교보다 군사적 수단으로 폭력적으로 행사하는 정치행위이다. 즉, 청일전쟁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등장하고 국가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조선의 정세를 명분으로 조선과 청나라를 대상으로 일으킨 전쟁이었다.
중국학계는 일찍부터 기초자료의 정리를 시작하여 주로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성을 강조하고 중국인민의 항쟁을 부각시키고 전쟁교훈을 통해 중국의 부국강병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반면에 일본학계는 전쟁의 당사자로서 방대한 연구가 축적되었는데, 주로 청일전쟁 당시 참모본부에 의해 정리된 사료, 이들 사료를 활용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은폐하고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연구경향이 많다. 이러한 청일전쟁을 한국학계는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동학농민전쟁이란 성격에서 많은 연구성과를 축적하였다. 한국학계의 청일전쟁 연구는 외교학, 정치학에서 적지 않은 접근을 하였지만, 조선의 둘러싼 동아시아의 외교과정으로, 전쟁발발의 과정, 전쟁이후 국제정세 변화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정치행위로서 폭력적인 전쟁은 평화적인 외교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러한 전쟁의 성격으로 살펴보면 청일전쟁은 다양한 층위로 분석할 수 있다. 정치외교의 층위, 군사전쟁의 층위, 동학농민전쟁의 층위라 할 것이다.
군사사의 측면에서 청일전쟁은 전쟁배경 및 전쟁원인이 청과 일본의 국가이익 충돌점으로 조선이 부각된 특징이 있다. 전쟁은 우선적으로 전쟁의 배경 및 준비과정이 존재한다. 국가이익의 충돌현상이 발생하면 이를 조율하는 외교활동이 해당국가 및 주변 국가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된다. 청일전쟁은 이 과정이 너무나 격렬하고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청일전쟁의 시기구분은 전쟁이전 준비기, 전쟁발발직전 조성기, 전쟁 초기(성환전투, 풍도해전, 평양전투, 황해해전), 전쟁 중기(요동전투), 전쟁후기(산동지역 전투), 종전기(시모노세끼조약, 삼국간섭, 산동반도 반환)으로 설정할 수 있다. 다른 일반적인 전쟁이 준비기, 초기, 중기, 후기, 종전기 등으로 구분되는데 반하여 청일전쟁은 조성기라는 별도의 시기가 부각된다.
한국학계의 청일전쟁은 현재까지 他者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군사강점의 시작점이자 조일군사동맹을 통해 조선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치룬 전쟁이다. 또한, 청일전쟁의 일환으로 조선인의 전쟁반발에 대해 동학농민군에 대해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청일전쟁은 조선의 공간에서, 조선인이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전개된 전쟁이란 점에서 타자의 전쟁이 아닌 自我의 전쟁이었다. 향후 한국학계는 청일전쟁을 동학농민전쟁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수준을 넘어 조선의 직접 연관된 국제전쟁으로 인식하고 선전포고(전쟁의 명분), 군수지원, 지휘체계(국가의 군대, 군벌의 군대), 戰爭指導, 무기체계, 군사정보(군사지형), 동원체계 등 군사적 검토가 필요하다.


The transition from the China-centered international order(中國 中心 國際秩序) in the traditional era to the modern universal system has already been gradually achieved with the opening of ports in East Asian countries. Through the Sino-Japanese War(淸日戰爭), Joseon completely escaped from the Qing-centered international order(淸 中心 國際秩序) and faced Western imperial powers and Japanese military strength. The Qing Dynasty(淸), which lost its position as a central state in East Asia due to the Sino-Japanese War, declined and eventually converted to the Republic of China(中華民國). Japan, a victorious country in the Sino-Japanese War, invaded the surrounding region as a militaristic nation(軍國主義 國家) in East Asia on behalf of China. Joseon reinforced its national power by reinforcing the kingship after Regent Heungseon(興宣大院君)'s reign, but it failed to overcome the conservative contradictions of the times that lasted for a long time and became militaryly strong by Japan in the Sino-Japanese War and eventually became a colony.
War is a political act that, when a state collides with another state in political interests, is violently exercised against the other state through military means rather than diplomacy as a means of peace. In other words, the Sino-Japanese War was a war in which Japan emerged as a powerhouse in East Asia and fought against the Joseon and the Qing in order to maximize national interests.
Chinese academia began organizing basic data from an early stage, mainly emphasizing the illegal aggression of Japan, emphasizing the Chinese people's uprising, and concluding that China's strong military force of the rich country was necessary through war lessons. On the other hand, the Japanese academia has accumulated extensive research as a party to the war. There are many research tendencies to organize historical records prepared by the Chiefs of Staff during the Sino-Japanese War, and use these to conceal Japanese aggression and emphasize the legitimacy of the Sino-Japanese War. Rather than analyzing the Sino-Japanese War in earnest, the Korean academia has accumulated a lot of research results in the nature of the Donghak Peasant War(東學農民戰爭). The study of the Sino-Japanese War in the Korean academia took not a few approaches in diplomacy and politics, but focused on the process of the outbreak of the war and the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fter the war, as the diplomatic process of East Asia surrounding Joseon. However, violent war as a political act is like two sides of peaceful diplomacy and coins. Looking at the nature of this war, the Sino-Japanese War can be analyzed at various levels. It may be called the level of political diplomacy, the level of military war, and the level of the Donghak Peasant War.
In terms of military history, the Sino-Japanese War was characterized by the fact that the background of the war and the cause of the war were the conflict of national interests between the Qing and Japan. In war, the background and preparation process for war exist first. In the event of a conflict of national interests, diplomatic activities to coordinate this will be fiercely developed between the country and neighboring countries. In the Sino-Japanese War, this process was so intense and elaborate.
The time frame of the Sino-Japanese War can be set as the preparation period, the formation period, the beginning of the war, the middle of the war, the late war, and the end of the war. While other wars are divided into preparation period, early, mid, late, and end of war, the Sino-Japanese War has a separate period called the formation period. In the future, the Korean academia should recognize the Sino-Japanese War as an international war directly related to Joseon, beyond the level of approaching the Donghak Peasant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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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새로운 자유의 탄생? : 미국 내전의 신화와 미완의 제2차 혁명전쟁

저자 : 허현 ( Hur-hyu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5-15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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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전은 미국 역사에서 일종의 신화적 드라마로 남아있는 전쟁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특히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선언했던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내전을 해방 서사로 묘사하면서 노예제 폐지를 위한 위대한 혁명전쟁으로서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에릭 포너(Eric Foner)가 주장하듯 미국 내전이 헌법적 혁명을 통해 '제2의 건국'에 해당하는 역사적 국면을 열어젖혔다는 점에서 내전을 해방 서사라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내전을 일종의 도덕적 승리의 드라마이자 재건국의 장(場)으로서만 바라보는 것은 내전의 역사적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내전을 탈역사화하는 우(愚)를 범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미국 내전은 애초에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한 혁명전쟁이 아니라 노예제를 사수하기 위한 남부연합 세력의 반(反)혁명전쟁으로 시작되었고 더구나 이러한 남부연합 세력의 반(反)혁명전쟁에 맞서 써내려갔던 대통령 링컨의 서사는 결코 해방서사가 아니라 연방 수복의 서사, 연방분리주의 분쇄의 서사, 그리고 민주주의 원리의 수호 서사였다. 링컨뿐만 아니라 북부인들의 내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도 흑인노예들 및 노예제와 관련성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백인들의 전쟁”이요 “형제들의 전쟁”일 뿐이었다. 이들은 내전이 인종질서의 붕괴를 야기하는 급진적인 사회혁으로 전화하는 것에 대해 늘 경계와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를 위한 흑인들의 투쟁은 기어코 내전을 '혁명'으로 만들어버렸고 링컨은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은 내전을 노예제 폐지를 위한 혁명전쟁으로 만드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켰던 남부연합 세력은 전쟁이 '혁명'이 되어 노예해방전쟁으로 역사화되어 가던 바로 그 시점에 내전의 의미를 재규정하여 노예제 사수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주권(州權)과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만들어버렸다. 남부 노예제세력은 패전과 더불어 노예제 사수를 위한 반란의 기억을 철저히 지워버리고 중앙집권적인 연방정부의 압제에 맞서 주권 수호와 민주주의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난 허구적인 해방 투쟁의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날조된 전쟁의 역사는 남부인들에게 “좌절된 대의(the Lost Cause)”로 남게 되었고 미국 역사에 다시 명예롭게 편입할 명분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결국 미국 내전은 또 다른 의미에서 신화적 드라마로 남아있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링컨의 해방 서사로서가 아닌 남부연합 세력의 해방 서사로서 말이다. 내전이 그 누구, 어떤 세력의 해방 서사가 아닌 미완의 혁명으로 설명되지 않는 한 미국 내전의 역사 속에는 링컨의 본 모습도, 남부연합의 진실도, 결연한 흑인들의 혁명 서사도 존재할 수 없다.


The Civil War remains a myth of Abraham Lincoln's emancipation narrative in the American history. Especially, the Gettysburg Address that declared “a new birth freedom” was considered a historical moment in which Lincoln defined the Civil War as the abolition war. As Eric Foner argues, the Civil War could be defined as a revolutionary war in that it made “the Second Founding” through the constitutional revolution. However, labelling the Civil War only as a moral victory or as a “the Second Founding” restrains from understanding what the Civil War really was.
In fact, the Civil War started as a the Confederate's war to defend slavery. And Lincoln's war against secession was not a emancipation narrative but reunion narrative or democracy narrative. Northerners also regarded the war as “the white men's war” or “the brothers' war,” consistently avoiding the transformation of the meaning of the Civil War into a social revolution. However, blacks' struggles for freedom during the war turned the war into a 'revolution' in the end. As a result, Lincoln confessed in the Second Inaugural that slavery was the major cause of the Civil War from the start. But, the Confederates transformed the war for the slavery into the war for the states' rights and democracy against the centralized federal government after their defeat. Using the ideology of “the Lost Cause,” the Confederates defended their war as moral and liberal, pretending that secession had nothing to do with slavery and race. This fabricated history enabled the Confederates' honorable re-incorporation into the American history.
Then, it is said that the Civil War remains another myth of the Confederates' liberation narrative as well as that of Lincoln's emancipation narrative. Unless the Civil War considered an unfinished revolution for universal freedom and human equality, there is no truth in the historical narrative of the Civi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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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려말선초(麗末鮮初) 정치적 변동과 은진송씨(恩津宋氏)의 회덕(懷德) 정착

저자 : 허인욱 ( Heo¸ In-u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3-17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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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는 회덕을 중심으로 성하였던 가문으로, 은진송씨가 회덕에 입향한 시기는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해당한다. 고려 말을 살았던 宋明誼가 회덕황씨 黃粹의 사위가 되어 이곳에 온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다만 은진송씨가 懷宋(회덕의 송씨)이라고 칭해질 만큼 지역사회의 깊은 연고를 가지게 된 것은 손자인 宋愉가 거주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회덕 松村里는 白氏들이 다수 거주해서 배달촌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고려 말기에 은진송씨의 선조인 송유가 이 땅에 거주하기 시작한 이래 그 자손들이 번창해서 송촌이란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송명의가 관직에 진출한 것은 1362년 10월에 과거에 합격하면서부터이다. 그는 1369년에서 1372년 사이에 신돈의 당여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인척 유탁으로 인해 정계에서 밀려나, 처향인 회덕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중앙정부와의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그의 아들인 송극기가 진사에 합격하고, 조선에 들어와서 손자인 송유가 무반으로 호분위부사정에 임명된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송유 또한 정계에서 밀려났는데, 그 이유는 외조부인 유준이 태조이성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탓에 태종 이방원과의 관계가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유는 신덕왕후 강씨의 종묘 부묘 문제로 인해 회덕으로의 낙향을 결정하였다. 은진송씨의 사례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낙향을 해 지방에 세거하게 된 다른 가문의 연구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


Eunjin-Song Clan(恩津宋氏) is a family that was founded mainly in Hoedeok(懷德), and the time when Eunjin-Song Clan came to Hoedeok is from the end of the 14th century to the beginning of the 15th century. It originated from the fact that the Song, Myung-Ui(宋明誼) who lived in the Late Goryeo, became the son-in-law of Huedeok-Hwang Clan(懷德黃氏). However, Eunjin-Song was called Heosong(懷宋, Song Clan of Hoe-deok) so deeply related to the local community that it was only after his grandson, Song, Yu(宋愉) began to live.
Song, Myung-Ui entered the office after passing the state examination in October 1362. He was pushed out of the politics in 1369-1372 due to the surrender of a relative who was killed by the party of Shin Don and moved to Hoedeok, his wife's hometown. However, that did not mean that it completely ended ties with the central government. This can be seen from the fact that his son, Song, Guek-ki(宋克己), passed the first examination for office, and after entering Joseon Dynasty, his grandson, Song, Yu, was appointed to the busajeong without ban. However, Song, Yu was also pushed out of the politics because her foreign grandfather Yoo, Joon(柳濬)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Taejo Lee, Seong-gye(李成桂), and his relationship with Taejong Lee, Bang-won(李芳遠) was not friendly. Song Yu decided to return to Hoedeok due to the issue of the Jongmyo Shrine of Queen Shindeok(神德王后). Eunjin-Song Clan's case is believed to be helpful in the study of other families who lived in the region after Living in the countryside in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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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지도 상의 삼척포진성과 진동루 고찰

저자 : 최장순 ( Choi¸ Jang-s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7-19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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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포진성은 고려 시대에 수군의 동진수(桐津戍)가 있었던 요충지였으며, 조선시대에도 진영이 설치되어 수군첨절제사를 두고 4개의 만호를 거느리는 요충지였기에 시대마다 동해 방어의 최전방 수군 기지로 역할을 하였기에 역사성과 희소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삼척포진성과 이에 부속된 동쪽 문루로서 진동루는 기록상 조선 중종 6년(1511) 부사 이함에 의해 창건된 이후 고종 35년(1898)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꾸준히 중수되어 온 삼척포진성의 문루로 역사성을 갖고 있다. 현재 진동루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에서 육향산과 연결되는 성벽 일부가 이사부 공원 내에 잔존 흔적이 있으며, 정하동 뒷산을 잇던 성벽 일부도 도로로 남아 있어 진동루의 위치는 현재 새천년도로와 허목길이 만나는 정라식육점 앞 새천년도로 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전해오는 그림 상의 자료로 판단컨대 진동루는 1800년대 홍예식 성문이었을 때는 단층의 전면 2칸 측면 1칸 규모로 지붕 형태는 팔작지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로부터 70여 년 후에부터는 홍예식 성문이 아닌 개거식 성문으로 바뀌면서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 형태는 팔작지붕에서 우진각지붕으로 변모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삼척포진성과 진동루의 복원을 위해서는 현재 추정되는 위치를 중심으로 발굴작업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이러한 위치 확인이 되면 성곽 기저부의 발굴 유물로 건물의 규모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고, 발굴 이후에는 포진성의 성문이 홍예식 성문 위의 초루 형태였는지 혹은 개거식 성문의 중층 누문형태였는지와 규모가 전면 2칸 혹은 3칸이었는지와 측면 1칸 혹은 2칸이었는지, 그리고 팔작지붕 혹은 우진각지붕이었는지에 대한 결정은 발굴작업을 통해 더 분명해질 것으로 판단된다.


Samcheokpojin-seong, which was a fortress for the purpose of defense and containment of the Malgal tribes before Silla Dynasty unified the Three Kingdoms of Silla Dynasty, was a strategic place where the Dongjin naval forces existed even in the Goryeo Dynasty. In this respect, the fortress had great history and scarcity as the forefront naval base for defense of the East Sea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Samcheokpojin-seong Fortress and an eastern gatepavilion, named Jindong-ru in the fortress, are the historical castle and a gate that have been steadily reconstructed since they were destroyed by fire in the 35th year of King Gojong (1898) after those foundation in the 6th year of King Joongjong (1511). There are remaining traces of a part of the castle wall, connected to Yukhyang Mountain in Isabu Park, and a part of the castle wall that connects the mountain behind Jeongha-dong remains as a road. It is estimated that the location of the Jindong-ru is in front of the Jeongra Meat Shop, where Saecheonnyeon road and Heomok-gil meet. Judging from handed-down traditional drawings, when the castle gate was a Hongye-sik in the 1800s, Jindong-ru composed 2x1 Kan(between post and post)s and it seems that the shape of the roof of Jindong-ru was a Hipped-and-Gable Roof(Paljak). However, after 70 years, the gate was changed to a Gaegeo-style instead of a Hongye-style gate, and Jindong-ru appears to have been changed to a scale of 3x2 Kans. Also, the shape of the roof seems to change Hipped-and-Gable Roof into a Hipped roof(Woojingak).
Therefore, for the restoration of Samcheokpojin-seong and Jindong-ru, it is most important to excavate around the currently estimated location, and once this location is confirmed, the size of the building should be more clearly identified by the excavated relics at the base of the fortress. It is considered to become more evident through excavation whether the Samcheokpojin-seong gate pavilion was in the form of a second floor of 2 by 1 Kan building above the Hongye-style gate, or whether the Samcheokpojin-seong gate pavilion was in the form of a second floor of 3 by 2 Kan building above the Gaegeo-style 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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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세기 말~20세기 초 강원지역 궁방전의 농업경영

저자 : 박성준 ( Park¸ Sung-j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1-24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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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지역을 넘어선 조선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농업발전의 일반성을 추출하기 위해 지금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강원지역의 농업경영을 궁방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조선후기 강원지역에 형성되었던 궁방전의 비중은 함경도 다음으로 가장 낮을 만큼 왕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궁방전의 비중이 증가했다. 강원지역에 궁방의 관심이 높아지고, 장토의 비중이 증가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원지역 궁방전의 농업경영은 삼남지역 사적 지주와 비슷했다. 궁방은 강원지역에서 답 중심으로 토지를 매득·개간하며 집적했다. 경영방식에서 답은 타조, 전은 도조를 선호했다. 궁방은 부재지주였지만 일반 재지지주처럼 현지에 마름을 두고 장토를 관리하면서 타조방식을 선호했으며, 도조는 자연재해를 입은 답을 안정된 상태로 회복하기 위한 보조적 장치로 활용했다. 타조로 경영한 답에서 궁방은 결세를, 작인은 종자를 부담했다. 궁방이 半種子를 지급한 경우에는 작인이 결세를 부담했다. 도조로 경영한 전답은 작인이 결세와 종자를 모두 부담했다. 타조로 경영한 답에서는 草價를 따로 징수하기도 했다.
궁방이 강원지역 답에서 징수한 지대량은 삼남지역 사적 지주의 지대량에 비해서는 약간 낮은 수준이었지만 동일한 궁방이 삼남지역 답에서 징수한 지대량보다는 약간 높은 수준이었다. 전의 지대량은 삼남지역의 사적 지주가 징수한 지대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으로 강원지역은 산간지역이라 농업이 삼남지역에 비해 덜 발달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강원지역의 농업경영 양상과 전답의 두락당 지대량은 삼남지역과 큰 차이가 없이 비슷했다. 그리고 극심한 자연재해가 들어도 지대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한 것이 아니라 다음 해에 이를 극복하며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였다. 강원지역의 농업은 자연재해를 겪어도 다음 해에 정상적으로 경작할 수 있는 생산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의 농업생산력은 전국적으로 발전되어 삼남지역과 강원지역이 비슷한 수준을 이루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e Royal Household Land formed in Gangwon area in the late Joseon Period has not received the attention of Royal Family to the lowest point after Hamkyoung Province. However, in the latter half of the 19th century, the importance of Royal Household Land increased as Myeongnye Palace, Gyeongseon Palace, and Yeongchin Royal Palace became to be interested in Gangwon area. What the interest of Gungbang in Gangwon area becomes high and the importance of farmland increased means that the economic profit has been guaranteed as much as that.
The agricultural management of Royal Household Land in Gangwon area was similar to the agricultural management of private landowner of three southern provinces. The Gungbang accumulated the land with the field as the center in Gangwon area. The field preferred the system paying the half (50%) of crop, the paddy preferred the system paying the determined amount in the landowner management. The Gungbang bore the land tax, the tenant farmer bore the seed in the field managed by the system paying the half of crop. In case the Gungbang paid the half seed, the tenant farmer bore the land tax. In paddies and fields managed by the system paying the determined amount, the tenant farmer bore the land tax and seed all. The tax items shall be collected separately in the field managed by the system paying the half (50%) of crop.
The amount of ground rent that Gungbang collects in the field of Gangwon area is a little bit higher than the amount of ground rent that Gungbang collects in the field of three southern provinces. The amount of ground rent of paddy is similar to the amount of ground rent that the private landowner collects.
The aspect of agricultural management and the amount of ground rent by the amount of seed of paddy and field are similar to those of three southern provinces. The agriculture in Gangwon area didn't continue to decline in the amount of ground rent even though there is the severe natural disaster, it has the productive base to overcome it the following year and recover to the previous level. The agricultural productivity of Joseon at the end of 19th and early 20th century was developed nationwide, three southern provinces and Gangwon area were at a similar le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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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50~1970년대 미국의 전략변화에 따른 한국의 원자력 선택과 자립화

저자 : 이세진 ( Lee¸ Se-ji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5-28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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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한국은 명실상부하게 원자력기술을 수출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이 글에서 살펴보기로 한 것은 한국의 원자력 선택과 자립화이다. 1950-70년 한국 원자력 선택의 배경에는 한국이 처한 상황과 미국의 정책 변화가 중요했다. 남북한 모두 체제 경쟁 및 전력에너지 부족 문제에 봉착하였고 이것이 원자력의 선택과 자립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세계 모든 국가들은 핵무기와 원자력 발전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체제 경쟁만으로는 1950-70년대의 원자력 도입을 설명할 수 없다. 원자력 기술의 선진국인 미국이 기술을 이전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결국 한국의 원자력 문제는 미국의 태도가 핵심이었다. 한국의 정치엘리트들은 미국의 정책 변화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였다. 첫째,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책변화이다. 미국은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한 핵을 허용한다는 정책을 가졌다. 한국은 이를 통해 원자력으로의 첫 걸음을 시작했다. 둘째, 존슨행정부의 정책 변화이다. 동아시아의 공산화 도미노 현상 속에서 존슨은 베트남전에 개입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함으로써 차관, 과학기술 등을 공여 받았다. 특히 미국의 원전회사인 웨스팅하우스와 한국 원전 제1호인 고리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계약하였다. 셋째, 닉슨행정부의 정책 변화였다. '주한미군철수와 아시아는 아시아의 힘으로'라고 일컬어지는 괌 독트린의 정책 변화로 한국은 미국의 통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 중화학공업, 핵개발계회 등을 모색하였다. 미국도 한국의 핵개발계획의 확장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표면적으로 한국정부와의 에너지관계의 형식과 내용을 개선시켜 미국의 상업적 발전원자로를 판매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정책변화를 이용하여 non turn-key 방식을 추구하며 원자력 기술이전에 참여하였다. 한국표준형 원자로(KSNP)는 미국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가 원자로설계 핵심기술을 한국에 건네줌으로써 완성할 수 있었다.


In the 2000s, Korea became a country that could export nuclear technology in a real way. What I decided to look at in this article is Korea's choice of nuclear power and independence. The background of the choice of Korean nuclear power in 1950-70 was the situation in Korea and the change in US policy. Both Koreas faced the problems of system competition and lack of power energy, and it is true that this has had a great impact on the choice and independence of nuclear power. However, since all countries in the world were pursuing nuclear weapons and nuclear power generation at the time, competition in the Korean peninsula alone can not explain the introduction of nuclear power in the 1950s and 1970s. The situation was that the United States, an advanced country in nuclear technology, had to transfer technology. In the end, the attitude of the United States was the key to Korea's nuclear power problem. The political elites of Korea strategically used the changes in U.S. policy: first, the policy changes of the Eisenhower administration; and the U.S. policy to allow nuclear weapons as long as it uses nuclear weapons peacefully. South Korea began its first step toward nuclear power. Second, it is a change in the policy of the Johnson administration.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has received loans, science and technology from the Korean military to Vietnam, and has signed a contract with Westinghouse, the US nuclear power plant, to build the Kori Nuclear Power Plant, the first nuclear power plant in Korea. Third, it was a policy change in the Nixon administration. The change in the Guam Doctrine policy, which is called the withdrawal of USFK and Asia as the power of Asia, has allowed Korea to have relatively free from US control. The Park Chung Hee government sought Yusin, the heavy chemical industry, and the nuclear development society. The United States also actively cooperated in expanding Korea's nuclear development plan and promised to sell commercial nuclear reactors in the United States by improving the form and content of energy relations with the Korean government on the surface. Since then, Park Chung Hee government has participated in the transfer of nuclear technology by pursuing non turn-key method using US policy change. The Korean Standard Reactor (KSNP) was able to be completed by Combuscheon Engineering Co., Ltd., which handed over core technology for reactor design 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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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청말(淸末) 안휘성(安徽省)의 창저(倉儲) 복구와 구제식량(救濟食糧)의 확보

저자 : 김두현 ( Kim¸ Du-hyu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3-348 (6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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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세기말 태평천국의 동란을 거친 이후, 붕괴된 청조의 창저 시스템의 복구 과정을 분석했다. 특히 화북지역에서 발생한 대한재를 계기로 창저의 복구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되면서, 실제 창곡의 복구의 방향과 성격, 복구의 주체, 비축유형은 어떠했는지 안휘성 사례를 통해서 분석했다. 아울러 실제 창곡 복구가 이루어진 이후, 재해 발생 시 어느 정도 구호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는지도 살펴보았다. 먼저 기존 상평창 위주의 창곡 시스템을 대체할 목적으로, 의창, 풍비의창을 중심으로 한 민간역량 동원을 통해 창저의 복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민간의 자발적 운영에 맡긴다는 당초의 취지와는 달리, 실제 안휘성에서의 복구 과정은 관료의 개입이 현저했다. 그 이유는 안휘성 내 엘리트층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역량의 한계때문이었다.
다음으로 복구 주체를 보면, 역시 안휘성 엘리트층의 한계로 인해 실제 복구는 관료의 주도적 역할이 현저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창저의 문제점 중 하나였던 관의 개입이 극복되지 못하고, 오히려 '관치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창곡 비축도 실물 비축보다 현금 비축 경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이는 관의 창곡에 대한 착복이나 유용 등 폐단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한편 창곡을 현금으로 비축하는 현상은 당시 미곡의 상업적 유통을 배경으로 출현한 것이었다. 어쨌든 안휘성에서 복구된 창곡이 과연 어느 정도의 구제효과를 발휘했는지를 분석한 결과, 1인당 비축량 표준에 근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창곡이 복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곡의 기능은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조는 전통적인 구제 수단으로서 창곡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이는 유교적 '인정'의 논리가 왕조의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restoration process of the Qing Dynasty's Granary system, which collapsed after the upheaval of Taiping Heaven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In particular, as the needs for restoration of Granary system emerged as a result of the Great disaster in North China region, the actual direction and nature of the restoration of Grain, the subject of restoration, and the type of storage were analyzed through the case of Anhui Province. In addition, after the actual restoration of Grain System, it was also examined how much relief food could be provided in the event of a disaster.
First, in order to replace the existing ever-normal Granary, the restoration of the Grain storage was accomplished through the mobilization of civilian capabilities centered on Charitable Granary and Society Granary. However, contrary to the original purpose of leaving it to the voluntary operation of the private sector, the actual restoration process in Anhui province was remarkable by bureaucrats. The reason was that the elites in Anhui Province had an uncooperative attitude and limited capabilities.
Next, looking at the subjects of restoration, the bureaucrats played a remarkable role in the actual restoration due to the limitations of the Anhui elite. In the process, the intervention of the Officials, which was one of the problems of the existing creation, has not been overcome, but rather has a tendency to become governmental.
Grain stockpiling was still more likely to stockpile cash than stockpile. There was a lot of room for this, such as embezzlement or misappropriation of the Offiacial's spear. On the other hand, the phenomenon of stockpiling grain for cash emerged against the backdrop of commercial distribution of rice at that time. Anyway, as a result of analyzing to what extent the remedy effect of the restored grain in Anhui Province, it seems that it did not come close to the standard of stockpiling per capita. This shows that even though grain storage was restored, the functions of grain system had limitations. Nevertheless, the Qing Dynasty did not give up grain storage as a traditional remedy. This shows that the Confucian “benevolence”logic was indispensable for the maintenance of the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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