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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Journal of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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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6)~47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445
지역과 역사
47권0호(2020년 10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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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보라국(保羅國)의 형성과 변천

저자 : 김경림 ( Kim Keong-lim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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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포상팔국 중 하나인 보라국의 형성과 변천을 추정하였다. 보라국은 삼포강 일대의 비옥한 토지와 교역에 유리한 위치를 배경으로 성장한 해상세력이다. 이들은 목지국 멸망 이후 신미제국이라는 백제와는 다른 문화권에 속하였으며, 해남 신미국과 견줄 수 있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백제가 성장하면서 동북아연안항로의 주도권을 빼앗겼고 연쇄적으로 발생한 중국 내부 혼란에 따라 對中교섭이 쇠퇴하게 되자, 신미제국은 對日교역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경남지역의 해상세력이 안라국 침공을 도모하자, 보라국을 비롯한 전남 해상세력은 경남지역 해상세력이 가진 일본과의 교역루트를 활용하기 위해 포상팔국전쟁에 가담한다. 시종면을 비롯한 삼포강 일대에 옹관묘가 확산되는 모습으로 보았을 때, 전쟁의 결과로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보라국은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백제와 우호적 관계를 맺었고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다가, 백제의 마한복속정책에 따라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This paper estimates the formation and transition of Bora, one of the eight states in Posangpalguk of the Gaya Confederacy. Bora was a maritime power that grew by taking advantage of fertile land and trade in the Sampo River region. Following the fall of Mokjiguk, it belonged to a different culture from Baekje, which was called Shinmijeguk, and it was a force comparable to Haenam Shinmiguk.
However, as Baekje grew, the leadership of the northeast Asian coastal route was lost, and negotiations with China declined due to internal turmoil in China, and it is assumed that Shinmijeguk shifted its focus to trading with Japan.
Meanwhile, when the Gyeongnam maritime forces attempted to invade Alla, the Jeonnam maritime forces, including Bora, did not have any direct reason for the invasion, but participated in the Posangpalguk War in order to utilize the trade network of the Gyeongnam maritime forces with Japan. In view of the spread of Ongwan tombs throughout the Sampo River region including Shijong-myeon, it seems that the war did not result in a severe blow to the area.
After that, by the time of King Geunchogo, Bora had a friendly relationship with Baekje and continued to grow, but gradually collapsed due to Baekje's policy of subjugation to Ma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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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안라국제회의' 개최와 참가국의 목적검토

저자 : 박민경 ( Park Min-ky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7-6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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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년 고구려의 한성공격으로 인한 백제의 웅진천도는 6세기 한반도 남부를 둘러싼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무령왕대에는 남방으로의 영역화를 가속화하여 513년에 기문을 장악한 후, 신라와 안라, 반파를 참가시키는 4국회의를 개최하며 백제의 영역임을 공식화하였다. 이어 백제는 늦어도 522년에는 대사지역까지 장악함으로써 대왜 교통로와 진주 및 함안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531년에는 안라 주변까지 진출하여 걸탁성을 축조하였다. 이러한 백제의 움직임은 가라(반파)로 하여금 대신라 통혼전략을 추진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편 신라와 통혼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려던 가라(반파)의 전략은 신라 역시 군사적 진출의도가 드러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라는 3성 및 5성을 빼앗고 이어 금관국까지 멸망시키며 낙동강 이서로의 진출을 가시화하였다.
당시 가야제국의 일국이었던 안라의 당면과제는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 압박이 가시화 된 상황에서 어떻게 자국을 보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안라는 532년 백제, 신라, 왜국의 사신을 초빙하여 '안라국제회의'를 개최, 외교의 장에서 국제적, 공식적으로 자국의 안위를 보존하고자 하였다. 이 회의에 참가한 각국은 각자의 목적이 있었다. 백제는 장군 君尹貴 등을 파견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왜국의 이중적 외교자세에 대한 동향파악이 목적이었다. 왜국은 안라의 요청인 '和解相疑'의 중재자로서 참가하여 한반도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높이는 한편 磐井의 난에 개입한 신라에 대한 의도 및 정세파악이 주 목적이었다. 신라는 안라의 장악방식을 둘러싼 방법모색에 있었기 때문에 외교를 담당하는 奈麻를 파견하여 안라에 대한 정보 및 백제와 왜국의 내부동향에 대한 정보파악이 목적이었다. 안라의 국제회의 개최는 안라국의 정치적 역량을 공식적·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After takin power of Gimun and Daesa, Baekje expanded it's power to Anra, fortifying Geoltak-Seong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Since then, Geoltak-Seong had become a military strategic bridgehead for the invasion of Jinju·Haman as well as a inland way of negotiation with Japan.
In reponds, Daegaya, the leader of Gaya empire, tried to make a political matrimonial alliance with Silla. Yet the alliance broke down because of Shilla's military purpose toward Gaya. In 532, Shilla annexed Namgaya in order to visualize as a way of getting through the western part of Nakdonggang.
At that time, an urgent task of Anra (a member of the Gaya Alliance) was to preserve the nation under the condition of military pressures from Baekje and Shilla. Therefore, Anra held the Anra Inter-Regional Conference, inviting Baekje, Shilla, and even Japan. The obvious reason for the conference was to guarantee the safety of the nation internationally and officially.
Each participating nations had their own purpose. Baekje needed to both observe any reaction of neighboring nations and grasp the status of Japanese hypocrisy and double standards in foreign policy. Japan, as a mediator of a reconciliation among powerful nations increased it's massive influence on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r. In addition, Japan tired to find out a purpose of Shilla why it intervened in the Uprising of Iwai in Kyushy. Shilla also needed to response the diplomatic way of Anra and observe the stance of Baekje and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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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세기 여몽 경계지대에서의 삼별초 세력에 대한 고찰

저자 : 오기승 ( Oh Ki-se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7-10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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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출륙환도 이후 여몽관계가 이전과 다른 형태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장래의 생존이 불안해지게 되면서 봉기를 일으켰다. 초기 지향점은 개경 정부를 무너트리고 자신들이 고려 정부로서 존속하는 것이었으나, 이는 내륙 배후지 확보 실패와 이에 따른 전략 방침 전환 과정에서의 확장성 상실 및 생산력 문제로 한계에 부딪혔다. 이후 삼별초는 쿠빌라이의 양해 하에 전라도 지역을 얻어 몽골제국에 직접 예속되는 것을 제의하였다. 고려 변방지대 일부를 제국령으로 편입하고 내투한 세력가에게 그 지역을 담당시켰던 쌍성총관부나 동녕부의 선례에 근거하여, 여몽 경계면의 접경세력으로서 존속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별개의 국왕을 옹립하고 조정을 자처했던 삼별초 세력은 그 존재 자체가 원종과 쿠빌라이의 합의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교섭은 결렬되었다.
여몽연합군에게 진도가 함락되고 승화후 왕온이 살해당하면서 삼별초 세력이 가지는 대립정부로서의 입장은 사실상 소멸하였으며, 이후 탐라로 이동한 잔여 세력의 활동은 물자 획득을 위한 조운선 습격이나 진압군 차단을 위한 선박 건조 방해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이들의 목적이 세력의 생존과 유지 그 자체로 수렴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며, 이들이 진압당하면서 세력으로서의 삼별초는 소멸하였다
삼별초 세력은 생성에서 소멸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패착으로 해석되는 전략적 선택지를 택하기도 하였으며, 여몽관계의 경계면에서 쌍방의 입장이 교차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일관적인 정체성과 지향점은, 여몽전쟁 종결로 형성된 새로운 세력구도 내의 접경을 배경으로 추구되었던 독자적 생존이라는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Sambyulcho caused an uprising as the future survival became unstable as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progressed in a different form after the abandon Ganghwado and return capital of Goryeo government. Their initial goal was to overthrow the Gaegyeong government and they continue as the Goryeo government, but this was met with limitations due to the failure to secure an inland hinterland and the loss of scalability and productivity problems in the process of changing the strategy policy. Afterwards, Sambyulcho proposed to acquire the Jeolla region under the understanding of Kublai and to be subordinated directly to the Mongolian Empire. Based on the precedents of the Ssangseong-chonggwanbu and the Dongnyeongbu, which incorporated some of the Goryeo territory into imperial decrees and took charge of the region to the surrendered leaders, it sought to survive as a border force on the border area of Goryeo and Mongol. However, the forces of Sambyulcho, who had declared themselves as the government, were directly denying the new system formed by the agreement between Wonjong and Kublai, and thus, the negotiations broke down.
As Jindo fell by the Goryeo-Mongol Allied Forces, the confrontational government in Sambyulcho disappeared, and the activities of the remaining forces that moved to Tamna afterwards consisted mainly of raids on the cargo vessels to acquire supplies and obstruction of ship construction to block the suppression forces. This indicates that their purpose was converging with the survival and maintenance of the forces themselves, and as they were suppressed, Sambyeolcho as a force disappeared.
The forces of Sambyulcho sometimes chose a strategic option that was interpreted as defeat in the process from creation to extinction, and also became a medium in which both positions intersect at the boundary of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The consistent identity and orientation that consistently emerges in the process can be found in the context of independent survival, which was pursued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border within the new power structure formed by the end of the Goryeo-Mongo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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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朝鮮) 중종(中宗)-선조대(宣祖代) 향약(鄕約) 시행(施行) 논의(論議)의 정치적(政治的) 의미(意味)

저자 : 허준 ( Hur Joo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3-13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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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 이후 기묘인들이 주도한 정치적 제안들은 부정되었고 그들이 주도한 국가 정책의 시행 또한 거부되었다. 특히 양반과 비양반 그리고 중앙정부와 지방사회간의 교류를 촉진하고, 더 나아가 국가의 사회 풍속을 개정하기 위해 기묘인들이 주도했던 '향약'은 그 시행의 결과와 관련하여 심각한 비판론에 직면하였으며 결국 그 실행은 좌초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나타난 기묘인들의 정치에 대한 비판론을 단순히 적대적 두 집단 간에 벌어진 정치적 투쟁 과정의 부산물로 치부하거나 기묘인이 추구한 모든 정치에 대한 전면적 거부의 일면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기묘인들의 정치에 대한 비판론자들이 모두 기묘사화를 주도한 직접적 가화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묘인의 정치철학과 이상에 동의하였던 이들 또한 사화 이후 종종 기묘인들의 정책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비판 중대표적 하나가 '향약'에 관한 것으로, 소위 '사림'으로 분류되는 많은 중앙관료들마저 '향약'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한 그들의 동의와는 별개로 기묘인들의 향약 시행 방식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기묘인들이 향약의 효율성에 과도한 기대를 걸고 지나치게 성급히 시행하였다는 점은 그러한 비판의 주 대상이었다.
향약에 관해서는 이후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선조대에 이르러 결국 정부 주도의 제도화된 향약 시행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되었다.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한 조선의 지배 사족들이 강압적 규제가 일체 배재된, 지속적 가르침을 통한 점진적 '교화' 방식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신민들의 도덕성과 행위 규범의 향상을 중시하였던 조선의 양반 사족들은 각각의 지역 사회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향촌 교화에 대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After the kimyo sahwa, many of the kimyo group's political suggestions were rejected and the state's policies reverted to their former state. Especially, the kimyo group's way of implementation of hyangyak which presumably contributed to the facilitation of interactions between the state's elite and non-elite, and the central government and local society, was criticized and rejected.
However, even though it is true that after the kimyo sahwa, the critics of the kimyo group seriously reproached many of the group's policies, it cannot be simply said that this criticism was merely a byproduct of the political struggle between two opposing political groups or that the critics totally rejected all of the kimyo group's political vision.
As a matter of fact, not all those who criticized the kimyo group's political ways supported the purge of the group. Rather, among those who revealed their criticism of the kimyo group after the kimyo sahwa, there were many who agreed with and continued the group's political vision. In other words, after the kimyo sahwa, a considerable number of central government officials, including those who have been categorized as sarim, pointed out that the kimyo group overemphasized the urgency in implementing hyangyak although they agreed with its significance in state politics.
Finally, during the reign of King Sǒnjo, the central government refused to take responsibility of implementing hyangyak after political debates between the state officials. As a method for the state's civilization, Chosǒn elite chose a long-term educational process instead of any forceful regulation, minimizing the risk of resistance from the people. However, due to their recognition of the importance of the moral and behavioral improvement of the people, the elite never stopped their efforts to educate the people in their localities in their own 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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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정조대 대청 외교와 대명의리의 공존, 그 맥락과 의미

저자 : 허태구 ( Huh Tae-koo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1-17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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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정조대의 유화적 대청 외교와 대명의리의 공존이라는 모순적 현상을 왕권 강화가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설명하고자 한 연구이다. 그럼으로써 이 시기 대청관계의 역사성과 대청 인식의 특징을 부각하고자 하였다. 정조대 조·청 관계는 유례없는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정조는 대청 외교의 현장에서 실용적이고 호의적 태도를 일관되게 보였다. 이러한 그의 외교 노선은 기본적으로 安民과 保國을 위해서 시행된 것이었다. 동시에 정조는 건륭제의 후대를 받은 이상, 외교적 기만술의 차원이 아닌 신의와 공경으로써 청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명이 멸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中華 문명을 보편으로 간주하는 당대 조선인의 믿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신념을 상징하는 對明義理는 禮와 史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실천됨으로써 대청 외교의 현실과 충돌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당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행위는 명·청 교체라는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무의미한 행위가 아니라, 華夷의 역전이라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감내하게 하는 그들 나름의 탈출구였다.


This paper aims to explain contradictory phenomenon of Joseon's amicable diplomacy to Qing Dynasty and the coexistence of Daemyeongeuirie(對明義理) in the reign of King Jeongjo from a new perspective, not from strengthening the royal authority. As such, it was intended to highlight the historical nature of Joseon's relations with the Qing Dynasty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Joseon's awareness of the Qing Dynasty. The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Qing in the reign of King Jeongjo remained stable amid the unprecedented friendly atmosphere. King Jeongjo maintained a pragmatic and friendly attitude in the diplomatic field with Qing Dynasty. His diplomatic line was basically implemented for the safety of the people and the security of the nation. At the same time, King Jeongjo thought that the Joseon should maintain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Qing Dynasty through good faith and respect, not on the level of diplomatic deception, as long as he was treated with extreme treatment by Emperor Qianlong. Meanwhile, despite the collapse of the Ming Dynasty, Joseon's people belief in universal Chinese civilization remained unshakable at all. The Daemyeongeuirie(對明義理), which symbolizes this belief, was practiced in various ways at the level of Li(禮) and History(史), allowing it to coexist without conflict with the amicable diplomacy to Qing Dynasty. From the perspective of the Joseon's people of the period, this was not a meaningless act that could have no effect on the outcome of the Ming-Qing Transition, but rather a way out of the unbelievable reality of the reversal of Hwa'ih(華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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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제하 진주지역의 수해와 남강치수사업

저자 : 김희주 ( Kim Hee-ju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9-21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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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제하 진주지역의 수해대책이었던 남강치수사업의 추이와 성격을 살펴본 것이다. 매년 되풀이되었던 진주 수해의 주원인은 남강의 범람이었다. 그 진원지를 절개하여 강물을 방류함으로 시가를 보호한다는 것이 사업의 개요였다. 수력발전, 농지개간의 효과와 함께 일본인 소유지가 많았던 낙동강 하류의 방수책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한제국기 일제에 의해 공식 조사, 입안되었다. 초기에는 개발이익을 염두에 둔 중앙의 고관들에 의해 민자 운하사업으로 변용, 선전되기도 했다.
시행을 보지 못하고 지역에서 숙원화 되었던 이 사업은 1925년 경남도청 이전문제가 등장하면서 기폭되었다. 반대 운동에 직면한 식민권력은 남강치수사업을 필두로 각종 '代償案'을 제시하며 지역사회와 교섭했다. 이전 저지는 실패했으나 지역은 대상안을 단계적으로 획득하며 실리를 찾았다. 그 결과 진주의 기반시설과 공공기관이 확충되고 교육환경이 상당 부분 개선되었다. 향후 10여 년간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이를 반증한다. 일제하 경남 도청 이전을 계기로 진주지역이 낙후되었다는 기존의 이해는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제는 의지를 가지고 사업을 준비했으나 비용 문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곡절 끝에 1937년 착공되어 1969년 대한민국 제 3공화국 정권이 완공했다.
남강치수사업이 대두되어 논의, 교섭되는 과정은 권력과 상호작용하며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조절해 간 지역사회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라는 조건 하에서 유력자를 전면으로 나름의 공적 영역을 확보해가는 양상도 발견된다.


This work analyzes the process and property of the Namgang Improvement Project, which was a countermeasure against flooding in Jinju under Japanese imperialism. The cause of the flood was overflow of Namgang. The outline of this project is to protect the city by cutting the source of the flood and releasing river water. It was effective in the hydroelectric power generation and the farmland development. It was also a countermeasure against flooding in the Nakdong River basin, where the Japanese owned large farmland. So, Japanese surveyors planned the improvement project for the first time in the early 20th century, but it was not implemented due to budget problems. Initially, the power holders of the central authorities tried to transform it into a canal project.
This project became a main problem in 1925 when the issue for the movement of Gyeongnam Provincial Office entered the stage. The Japanese colonial authority proposed 'various compensations' including this project. The local community got real benefits step by step. As a result, the city infrastructure and the educational environment in Jinju have improved significantly. The population growth over the next 10 years proved this. Therefore, the past understanding that the Jinju area has been backward due to the movement of the provincial office should be reviewed.
After many twists and turns, the project began in 1937 It was completed in 1969, during the regime of the Third Korean Republic The communities in Jinju continued to negotiate with the Japanese colonial power for the Namgang Improvement Project. It was for the benefit of the community In this process, a internal division rarely occurred. Even under Japanese imperialism, they had achieved a degree of progress in public sp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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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기록매체를 통해 본 일제강점기 진주의 명소 특성

저자 : 하혜경 ( Ha Hye-ky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3-24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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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제 강점기 진주군을 기록한 기행록, 여행안내서, 지역안내서, 관광안내엽서, 신문 기록을 통해 진주의 명소를 파악하여 장소적 특성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진주군의 역사와 공간변화에 기초한 사실적인 문헌자료를 통해 명소 분포를 도출하였으며, 역사명소, 자연명소, 생활명소 등으로 유형을 구분하고 시대별·집단별로 인식한 명소의 특성을 파악하였다. 분석 결과 첫째, 일제강점기 진주군의 대표명소는 촉석루가 있는 '진주성공원(역사명소)', '남강(자연명소)', '본정과 진주역일대(생활명소)'로 구분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진주경관의 발달 특징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진주민의 일상적 삶의 궤적이 중첩된 장소였다. 둘째, 일제강점기 진주의 명소는 본정이 위치한 촉석루, 진주성 중심의 北村에서 신설된 진주역일대를 중심으로 남강 남쪽에 있는 南村으로 이전되면서 역사명소에서 생활명소로 관심이 이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1910~1920년대에는 자연명소와 역사명소 중심이었다면, 1930~1940년대는 생활명소들이 일상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진주지역 조선인은 역사적장소를 명소로 인식한 반면, 조선총독부 관료 및 일본인은 근대시설을 강조하였다. 본 연구는 진주가 가지고 있던 전통적 행정중심도시로서의 기능은 탈각되어 간 반면 보편적인 근대도시로 발달을 보여줌과 동시에 미래 진주의 도시재생사업 추진에 있어 진주성이 있는 남강 북쪽 권역뿐만 아니라 남강 남쪽 권역의 진주역 일대까지 확대하여 하나의 원도심으로 바라볼 필요성을 설명한다.


This study identified the tourist attractions of Jinju through administrative records, tourist guides, tourist guide postcards, and newspaper records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analyzed the characteristics of attractions recognized by local residents. To this end, the history and spatial changes of Jinju-gun were documented to derive what attractions are and where they are distributed. The types of attractions were largely divided into historical, natural, and living attractions. In order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of the perception of the attraction through the records reproduced by subjective memory, the interpretation was performed through the viewing object of the attraction, the activities of the people, and the meaning given to the attraction. As a result of the analysis, first, the representative attractions of Jinju Coun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ere divided into 'Jinjuseong Park (historic attraction)', 'Namgang(natural attraction)', and 'Main town and Jinju Station area(living attraction)' with Chokseokru. Secon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famous attraction of Jinju will be moved to Namchon, which is connected to the south of the Nam River, centering around the existing Chokseokru, where the main shrine is located, and the area around Jinju Station, which was newly built in Bukchon, the center of Jinjuseong. Third, it is necessary to connect Bukchon, Namgang, and Namchon, where the origin and development characteristics of the Jinju landscape are found most condensedly, as one original city center and connect them to regional re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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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제강점기 동래지역자본가 한성홍의 경제활동과 연고결속

저자 : 선우성혜 ( Sunwoo Sung-hye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9-28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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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동래(읍)면을 중심으로 정미업과 주조업에 종사했던 韓星洪의 경제활동을 살펴보고 그가 기업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으로 전통적인 연고 결속에 주목하였다. 한성홍의 경제활동에서 주목되는 점은 그의 경제활동이 확대되는 것과 함께 부동산 투자와 소유 부동산의 매매가 있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한성홍 및 그의 가족이 운영했던 회사는 가족 상호 간에 교차하여 자금을 투자하고 있었다. 한성홍과 그의 가족들의 경제활동은 1942년 한성홍을 대표로하는 자본금 12만원의 동래주조(주)로 집중된다. 더욱이 1943년 한성홍 형제는 이웃사촌인 박길호·박길문이 기와·벽돌제조업에도 투자하였다. 한성홍 운영의 동래주조(주)는 해방 이후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한편 그의 경제활동이 확대되면서 동래(읍)면에서 한성홍의 사회·경제적 입지는 확대되어 갔다. 한성홍은 동래 토박이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기영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한성홍의 경제활동이 확대되기 시작하던 1930년대부터 그는 동래상무회, 식산조합 등 지역 내 경제단체를 비롯하여 읍면협의회 의원, 교육지원사업 등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또 온천장 배탕권 민영화 반대와 같은 지역 현안 참여, 온천장 개발과 관련하여 상호 이익도모를 위해 조직된 온천지주회의 회원 등의 활동을 했다. 그와 같은 활동을 통해 한성홍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정보를 얻거나 지역 내 사회·경제적 입지가 공고해 졌으며 이 역시 경제활동에서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한성홍의 경제활동이 지속될 수 있었던 요인은 조선인 상권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던 고향이 주된 경제활동의 기반이었다는 점, 부동산 투자 및 매매와 가족들의 자본금을 투자하여 사업체를 유지했던 점 등이었다. 또 주력 업종인 정미·양조와 유관한 타 지역 업종에 참여, 유동인구의 증가시기 운송업에 참여하는 등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긴밀하게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제강점기 동래 지역에 설립된 조선인 경제인들이 비록 동래(읍)면 토박이라 하더라도 한성홍과 같이 경제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업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의 무대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금 또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가족들의 자본 투자와 지역 내 사회·경제적 입지를 넓히는 것이었다.


The study focused on the Dongnae portion of Japan's colonial-era period in the economic activities of Han Seong-Hong's rice-producing and brewing industry. And noted his Cronyism as a factor that enabled him to maintain business activities. What is noteworthy about Han Seong-Hong's economic activities is that there were real estate investments and the sale of owned real estate along with the expansion of his economic activities. In addition, Han Sung-Hong and his family-run company were cross-investing funds between family members. Hans and his family's economic activities will be concentrated on Dongnae Brewery Co., Ltd. with a capital of 120,000 won, headed by Han Sung-Hong, in 1942. Furthermore, in 1943, brothers Han Seong-Hong and his neighbors Pak Gil-ho and Pak Gil-mun invested in tile making and brick making. Dongnae Brewery Co., Ltd., operated by Han Sung-Hong, continued until after liberation.
Meanwhile, as his economic activities expanded, Han Sung-Hong's social and economic status expanded in Dongnae area. Han Seong-Hong is a native of Dongnae and has been a member of Kiyeonghoe for generations. Since the 1930s, when Han Sung-Hong's economic activities began to expand, he has actively participated in local economic organizations such as the Dongnae Chamber of Commerce and the Local Politics, as well as members of the township council and educational support projects. He also participated in regional issues such as opposition to the privatization of rights of hot-spring water. and members of the Hot Springs Holding Association organized for mutual benefit in connection with the development of hot springs. Through such activities, Han Sung-Hong has gained information to respond to changes or his social and economic position in the region has been solidified, which also seems to have served as an advantage in economic activities.
In short, the reason why Han Sung-Hong's economic activities could continue was that his hometown, which was relatively well maintained by the Korean People's Commercial District, was the basis of major economic activities, and that he maintained his business through real estate investment and sales, and family capital investment. It was also because the company was able to closely cope with the changing economic environment by participating in other regional industries related to its main industries, Jeongmi and Jujo, and participating in transportation during the period of the increase in the floating population. Of course, Korean businessmen established in the Dongnae area were not able to continue their economic activities like Han Sung-Hong, even if they were native to the Dongnae region. In the end, the environmental factors of economic activity were also important to maintain the business, but they basically had to be able to secure funds or opportunities continuously. And what made this possible was to expand family capital investment and social and economic presence in the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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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해방기 부산 음악사회의 동향과 연주단체

저자 : 남영희 ( Nam Young-hee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5-325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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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해방기 부산지역 음악사회의 동향, 그리고 음악가와 연주단체의 활동을 실증적으로 고찰하였다. 해방기 부산지역 음악단체와 음악인들은 대중계몽과 사회적 실천을 전개하는 한편, 순수예술을 지향하며 음악적 수준을 드높이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극장이나 미국공보원과 같은 문화예술기반시설, 악극과 음악영화, 연주회 등은 이 지역 공연문화를 확산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하였으며, 특히 다방은 문화예술인의 사교장이자 음악의 생산과 향유를 추동하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이 시기 부산지역 음악계를 주도한 음악인들은 대체로 학교제도를 통해 음악에 입문하여 일본유학을 다녀온 부류였으며, 학교 음악교육, 공연을 통한 사회적 실천, 전문 연주단체결성과 연주회 개최, 전문교육기관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부산은 음악사회를 두텁게 형성함으로써 성장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This article empirically examined the trends of the music society and performances in Busan during the liberation period and the performance of musicians. During the liberation period, music groups and musicians in Busan performed public enlightenment and social practice. On the other hand, they pursued pure art and conducted activities to raise the musical level. Culture and arts infrastructure including theaters and the Busan branch of USAFIK OCI (Office of Civil Information), and musical plays, musical films, and concerts served as the basis for the development of local performing arts. In particular, tea rooms served as a social center for artists and a space to promote music production and enjoyment. Musicians who led the music society in Busan during this period were generally those who entered music through the school system and studied abroad in Japan. They carried out various activities such as school music education, social practice through performances, formation of professional performance groups, presenting concerts, and operation of specialized educational institutions. Through this, Busan was able to establish a foothold for future growth by enriching the music society.

KCI등재

101965년 전후 한일 양국의 동아시아 지역주의 구상과 미국

저자 : 신재준 ( Shin Jae-joo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27-35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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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60년대 중반,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한일 양국의 동남아 지역주의 구상, 즉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와 동남아시아개발각료회의(SEAMCED)의 추진과정을 비교 분석했다. 이들은 외양은 비슷하지만 실상은 대조적인 구석이 많다. 예컨대 아스팍은 한국의 독자 구상으로 출발했지만 개발회의는 미국의 구상에 일본이 화답하는 형태로 등장했다. 대미 협의과정에서 아스팍은 미국의 의견이 수용되는 형태였다면 개발회의는 상대적으로 일본의 입장이 관철되는 모양새였던 것도 대비된다. 전자에 일본이 참가했다면 후자에 한국은 불참했던 것도 서로 다르다.
이상과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한미/일미 관계의 위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을 자신들의 아시아정책의 “키(key)”로 여긴 반면, 한국에게는 국내 문제 또는 기껏해야 한일문제 해결을 기대했을 뿐이었다. 더욱, 서로 다른 두 구상의 출현은 갓 국교를 '정상화'한 한일관계에 다시 미묘한 긴장을 가져왔다. 특히 한국으로서는 아스팍이 약화될 가능성을 염려하면서도 개발회의 참여를 고려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양국은 신경전을 벌이던 한일회담의 관성에서 여전히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가까스로 얽어맨 '한일협정체제'는 어딘지 불안정하고 어설펐다.


This article analyzes Korea and Japan's plan for Southeast Asian regionalism in the mid-1960s. These plan are similar in appearance, but in reality there are many contrasting points. For example, ASPAC was started as a Korean initiative, but SEAMCED was appeared in the form of Japanese responses to the American initiative. In the process of consultation with the United States, it is also contrasting that ASPAC has accepted the opinion of the United States, while SEAMCED has achieved the position of Japan relatively. Japan participated in ASPAC, but Korea could not participate in SEAMCED.
This difference is due to the different status of Korea-US/Japan-US relations. Moreover, the emergence of two different plan brought about a subtle tension again in Korea-Japan relations that had just “normalized” diplomatic relations. In particular, Korea has fallen into a dilemma to consider participating in SEAMCED while worrying about the possibility of weakening ASPAC. These two countries still couldn't get away from the inertia of the Korea-Japan talks that were in a battle of nerves. The “System of 1965 Treaty” that was barely established was somewhat unstable and clum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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