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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Journal of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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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6)~45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424
지역과 역사
45권0호(2019년 10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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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馬韓諸國의 位置再論 - 漢簡으로 본 朝貢使行과 관련하여 -

저자 : 윤용구 ( Yun Yong-gu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3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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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마한의 범위를 경기·충청·전라도로 보면서 50여 국을 북에서 남으로 고르게 분포하였고,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3세기까지 존속한 것처럼 이해하였다. 이는 馬韓國名이 『삼국지』에 수록된 시기와 대상, 국명을 나열한 기재 순서를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었다.
마한국명은 3세기 중엽, 교섭과 교역을 담당한 대방군 관리에 의해 일괄 작성된 것으로 마한의 존속기간과 공간적 범위에 골고루 있었던 정치체를 망라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자료를 수집하던 대방군은 주로 해로를 통하여 마한과 교섭하였다. 자연히 내륙보다는 연안수로의 거점과 그와 연계된 대소 정치체가 수록대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漢代 서북변경에서 발견된 漢簡은 마한과 낙랑ㆍ대방군과의 교섭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漢簡의 기록은 異民族의 교섭은 정해진 交通路를 따라 이루어지며, 교섭방식은 법률에 의한 통일된 변경관리체계를 통해 시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 『삼국지』에는 마한의 여러 사정을 기재하면서 군현과 교섭하면서 가까운 정치체와 '遠處'의 주민을 구분하였다. 近郡의 여러 나라들은 자못 禮俗이 있지만, '원처'는 죄수와 노비가 엉켜 사는 듯 묘사하였는데, 교섭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282년 서진과 통교한 馬韓의 '新彌諸國'(20여 국, 혹은 29국)을 '歷世未附者'로 기록한데서 曹魏代 '遠處'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新彌諸國이 대체로 전라남도 서남부와 노령산맥 이남에 자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馬韓諸國의 공간적 범위는 노령산맥 以北의 서해 연안 지역에 주로 분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3세기 중엽 마한사회는 한전에 수록된 50여 국 만이 아니라 더 많은 정치체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The study is reviewing the spatial positions of about 50 countries in Sankokchi(三國志), which are seen as a "Sam-han(三韓)." In the meantime, it was wrong to look at the range of the horse and South Korea from Gyeonggi, Chungcheong and Jeolla provinces and look at about 50 horse and South Korean countries as if they were distributed from North to South. This was because the timing and criteria for the records of Mikuni were not considered.
The book, "Sankokchi" was compiled during negotiations between China and South Korea, which were active after 238 years, and during China's massive invasion in the 240s. Sankokchi should have collected and compiled data during negotiations with Daebang-gun. The negotiations with Sankokchi took advantage of waterway traffic on the West Coast.
Since the negotiation between the two Koreas follows the West Coast, Ma and South Korea, which are recorded in the Sankokchi, are described in the direction from north to south.For this reason, the main description was the seashore and the political bodies of the river-coast areas that led to it.
At the same time, the "Sankokchi" negotiated with the county's prefecture, describing the situation of Ma-han, and divided the country into smaller neighboring countries and distant places. I don't think this is the subject of trade or negotiation in China.It is said that "East Inamba Han Shin-kuni" written in "Shinshu" and "Changhwa" as those who had no morning negotiations in the past" was the target area. In conclusion, about 50 countries in the "Sankokuni" category are believed to be mainly distributed in the coastal areas of the West Sea on the north of the Rising Mount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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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리사등', 탁순국, 그리고 백제의 관계 - '아구례산수(我久禮山戍)' 해석을 중심으로 -

저자 : 백승충 ( Baek Seung-chung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5-79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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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일본서기』 계체·흠명대에 서술된 아리사등 기사의 성격 및 백제의 주장인 '我久禮山戍'에 투영된 탁순국에 대한 인식과 그 의미를 살펴보는데 있다. 먼저 아리사등의 출자와 활동 무대는 안라가 아니고 탁순국임을 명확하게 한다. 다음으로는 아리사등 기사를 '남부가야 3국(남가라, 탁기탄, 탁순)'에 포함된 탁순국과 연관짓고, 탁기탄(영산∼밀양)에 소재한 '구례산 5성' 기사의 검토를 통해 탁순국과 백제양국 관계의 실상을 밝혀본다.
신라는 남가라 4촌 초략에 이어 탁순국 '구사모라'에의 축성과 '5성' 공략 등을 통해 낙동강 하류 3국에 대한 지배력을 관철시킨다. 당시 백제는 섬진강 유역의 기문·대사 병합의 여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 점은 흠명대 백제가 '무도한 신라'와 3국의 '신라에의 내응'을 특히 강조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리사등 기사는 신라의 3국 병합 과정에서만 보이는데, 왜 왕권과 백제 중심의 인식에 기초하여 과장 조작했다.
탁순국과 백제의 관계는 흠명대 인식이 계체대까지 소급되었다. '구례모라', '구례산 5성', '아구례산수' 등의 해석이 관건이다. 종래 다수의 연구에서는 흠명기의 '아구례산수'를 근거로 '구례산'은 탁순국 혹은 인접한 곳에 있고, 신라에 앞서 백제가 점령했으며, 이후 신라에 빼앗겼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백제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실제 탁순국 아리사등의 근거지에 축성한 '구례모라'는 '구사모라'의 잘못이며, 축성 주체도 신라로서 남가라 4촌 초략의 연장선에 있다.
백제는 신라가 탁순국을 병합하고 '아구례산수'를 내쫓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흠명대 이 지역에 대한 자국의 연고권을 강조하기 위해 계체대까지 소급하여 '구사모라'를 '구례모라'로 바꾸고 축성 주체도 자국으로 조작한 것과 관련된다. 즉 백제의 일방적인 주장인 '아구례산수'는, 신라가 병합한 탁기탄의 '구례산 5성'을 빼앗고 탁순국을 회복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백제는 신라에 병합된 3국의 멸망 원인을 언급하면서 이른 시기부터 자국과 탁순국과의 관계가 깊었고, 3국 혹은 탁순국만을 특칭하여 '부흥'을 말하기도 한다. 흠명당대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안라와 신라의 통계'를 경계한 것이다. 탁순국은 3국 가운데 정치적으로 백제에 가장 가까웠고, 현실적으로도 안라와 인접한 요충지였으며, 탁기탄의 '구례산 5성'과 함께 안라와 신라가 '내통'한 주요 통로였다.
계체대 탁순국의 치소인 '구사모라'에의 축성과 '5성' 공략은 백제와는 무관하고, 오로지 신라의 남가라 4촌 초략에 이은 탁순국과 탁기탄에서의 군사 활동의 일환이다. 흠명대 백제가 안라와 '임나일본부' 그리고 친신라 가야 인물을 비판한 이유는 명백하다. 즉 신라가 탁기탄의 '구례산 5성'을 전초 기지로 안라에 대한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자, 안라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던 백제는 '구례산 5성'을 압박하여 안라와 신라의 내통 루트를 차단하고 또한 안라와 인접한 옛 탁순국의 회복도 바랐던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as follows.
First, it examines Baekje's perception and meaning of Takujunnokuni(탁순국) projected on 'Our defender of Kuryemurye(我久禮山戍)', which Baekje insisted on.
Second, we will link Arisa and other articles to Takujunnokuni, and analyze the post-war articles on 'Our defender of Kuryemurye' to find out the relationship between Takujunnokuni and Baekje.
Arishito(아리사등) is seen only in the process of merging the southern Gaya three countries. The investment and activity stage of Arishito is not Anra, but Takujunnokuni. The relationship between Takujunnokuni and Baekje is described retrospectively until the destruction of Keitai Ten'no based on the recognition of Kinmei Ten'no.
Baekje claims that Silla merged Takujunnokuni and expelled a soldier of his own country of Kuryemurye(구례산). But this is to highlight its own right to the region at the present time of Kinmei Ten'no. Such recognition is retroactive until the times of Keitai Ten'no, replacing Kusimura(구사모라) with Kuryemura (구례모라) and manipulating the built entity into its own country.
In relation to Takujunnokuni, Baekje emphasizes that the relationship has been deep since the early days. Sometimes, three countries or Takujunnokuni are called 'revival'. It may be a cliche, but he was wary of the statistics of Anra and Silla. Takujunnokuni was the closest to Baekje politically among the three. Because of its proximity to Anra(안라), it was also a necessary military hub of reality. In addition, it was the main passage of Anra and Silla along with Tokukodon's 'Kuryemurye(구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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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려왕릉 출토 '봉황문 장식'의 상징과 강화 능내리석실분의 피장자 검토

저자 : 한나래 ( Han Na-lae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1-11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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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결과가 알려진 고려왕릉 중 봉황문 장식이 출토된 사례는 왕릉급 고분으로 추정되는 '강화 능내리석실분'과 '개성 정종 안릉'이 있다. 『山海經』 등 문헌에 기록된 '봉황'은 닭의 머리와 뱀의 목, 용의 비늘 등을 가진 神鳥이며 '태평성대', '왕', '왕비' 등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기록을 분석하면 용의 후손임을 강조한 고려왕실은 왕의 상징으로 '용'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봉황'은 대체로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표현되었고 의복 등의 장식에는 왕 또는 왕비의 상징으로도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능내리석실분 및 안릉 출토품과 고려왕릉에서 출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봉황문 장식의 사례를 정리하면 동경, 합, 도자, 장신구, 귀중품 보관함 및 관의 장식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대체로 양 날개를 활짝 펴고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과 화려한 꼬리가 표현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의 '상징'은 정확히 규명할 수 없으나 '태평성대' 또는 여인의 장식품일 경우 '왕비'를 상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강화 능내리석실분 출토 두 유형의 봉황문 장식은 각각 상징하는 바가 각각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두 마리 봉황이 표현된 은제도금띠는 정종 안릉 출토품과 같이, 상자의 가장자리 등을 장식하는 용도로서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봉황의 머리가 세밀하게 표현된 장식은 '왕비'의 상징으로 보이며 능내리석실분의 피장자는 강도시기 즈음에 沒한 고종비 안혜태후로 추정된다.


Gang-hwa Neung-neri Stone Chamber Tomb' and 'Gae-seong Jeong-jong An-neung' are the only ones which decoration of 'Phoenix(鳳凰)' were excavated, among the Goryeo Royal tombs the excavation results have been known. In the ancient records, 'Phoenix' was represented as the holy bird with the head of a chicken, the neck of a snake, the scales of a dragon, and has symbols : 'king', 'reign of peace(太平聖代)', 'queen', etc. Examples of 'Phoenix decoration' that is supposed to have been or was excavated from Goryeo Royal tombs include mirror, ornamental knife crafts, etc. Their 'symbols' cannot be accurately identified, but it is suggested that the symbol of the 'reign of peace' or the women's ornaments may have symbolized a woman of high status, 'the queen' from the records of Goryeo. The two types of decoration of 'Phoenix', which were excavated in Gang-hwa 'Neung-neri Stone Chamber Tomb', are believed to have different symbolisms. The one is assumed to be a symbol of the 'reign of peace' such as An-neung excavation. The other one is assumed to be a symbol of the 'queen', and it is believed that the buried person of 'Neung-neri Stone Chamber Tomb' is the Queen of Ah-hye, who died just before the Gang-do period(1232-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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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종대 공법 논쟁의 이념적 성격

저자 : 이민우 ( Lee Min-woo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7-15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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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공법은 20년 가까운 기간에 걸친 치열한 찬반의 논쟁을 거쳐 도입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토론과 검토가 필요했던 데는 전세 수취 제도로서 공법이 미비한 점이 있다는 점 외에도 공법 도입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념적인 문제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는 사정이 큰 영향을 끼쳤다. 공법 논쟁의 이념적 쟁점들은 지금까지 공법 연구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실제 논쟁의 과정을 꼼꼼히 살펴보면 전세 수취의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문제들만큼이나 이념적 과제의 해결이 중요한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이 둘이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세종 연간에 시도된 공법 도입은 당시 전세제도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였다. 그렇지만 이것이 공법을 도입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것은 제도개혁에서 중국 삼대를 이상으로 삼아 고제를 모범으로 따르고자 했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에서 고제를 실현한다는 과제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으며, 공법에 제기된 비판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세종대 공법의 제정은 고제의 실현이라는 문제에 대한 당대의 수준 높은 사고의 결과물이었다.


The Gongbeop[貢法] established in Sejong period is characterized by being introduced after fierce debate over nearly 20 years. Although there are various ideological issues surrounding the introduction of the Gongbeop, the ideological issues of the Gongbeop have not received much attention. However, a careful examination of the process of debate shows that not only is the ideological task as important as the practical problems but the two are closely related. The introduction of the Gongbeop, which was attempted in Sejong period, was a measure to correct the land tax system. And this also was apparently made from the consciousness of trying to follow the example of The Old system[古制] in the Chinese Samdae ideal. The task of realizing the Old system in Joseon was accompanied by various difficulties, and it was never easy to overcome the criticisms. The enactment of the Gongbeop in Sejong period was the result of the complex and high thinking on the issue of realization of the Old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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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후기 향촌 재지사족의 동향과 향촌사회 활동 - 18세기 밀양지역 향촌지식인 사례를 중심으로 -

저자 : 장동표 ( Jang Dong-pyo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1-18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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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8세기 재지사족의 동향과 이들의 향촌사회 활동을 경상도 밀양지역의 향촌지식인들의 사례를 들어 살펴본 것이다. 이들은 모두 향촌의 유력한 가문 출신들이자 유학자들이도 하였으며, 향안과 청금안의 작성, 향교 개혁 운동과 향약 시행 참여, 향현의 추숭과 향현사 건립 운동, 향중 사업과 응지상소 등 다양한 향촌활동을 전개하였다. 본고에서 사례로 든 4명의 향촌지식인들은 모두 지역 내에서 사우와 혼인 등의 관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8세기 밀양의 재지사족은 서원보다 향교의 일에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향교는 향촌사회에서 여전히 재지사족의 중요한 활동 공간이었다. 향교는 문묘가 있는 곳이고, 수령의 주요 행정 관심 사항이었던 만큼, 향교를 무시하고는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들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위한 측면에서 향약 시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향약은 이전 시기에 비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들은 향현을 향사하기 위한 향현사 건립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밀양의 향촌지식인들은 관청에서 주도하는 여러 가지 사업에 적극적 관심을 기울이고 협조하였다. 이들은 성곽을 수축하고 건물을 중창할 때 기문을 짓거나 상량문을 짓는 방식으로 향촌 내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우제를 올릴 때는 사림들이나 수령을 대신하여 직접 祝文을 작성하였다. 왕이 내린 求言敎旨에 대응하여 장문의 應製疏를 올리기도 하였고, 孫思翼의 경우처럼 1725년 소론의 거두였던 李光佐를 탄핵하는 연명 상소운동 등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였다.


In this article we will discuss about situation of Jaeji-Sajok(在地士族) in 18th century and their activities in a local society at Milyang(密陽), Gyeongsangdo(慶尙道) referring from the examples of local elites. They are people of the infulential noble lineage and are confucians, and made the activities such as Hyangan(鄕案), making Chenguman(靑衿案), reformation movement of Hanggyo(鄕校) confucian school, participation in Hyangyak(鄕約), anniversaries for local wothies, movement for local worthy shrine and Eungjisangso(應旨上疏), et cetera. Four local elites at this thesis were intimately connected by marriage, friendship at all districts. Jaeji-Sajoks in Milyang were much interested in Hyanggyo(鄕校) than in Seowon(書院) in 18th century. Hyanggyo was the important place for their activities. Since there were the shrines of confucius at the Hyanggyo that local governors were interested in, it was impossible that the governors ignored influence of Hyanggyo. They emphasized importance of implementing Hyangyak for public order. However, it seems that the Hyangyak wasn't able to be carried out earlier time. On the other hands, the activities of building the shrines for the ritual ceremony for local worthies was enthusiatic. The elites in Milyang cooperated with goverment office leading many projects which they interested in passionaly. They had interest in many events of recontruction of fortress or buildings and writing Sangryangmun(上樑文). In addition, they also wrote prayer instead of local governors or Sarim(士林). They submitted Eungjeso(應製疏) against the king who gave Gueon-Gyoji(求言敎旨) to people as well; for example, in the case of Son Sa-ik(孫思翼), an impeachment of Lee Gwang-jwa(李光佐) who was the leader of Soron(少論) was a political participation with Sangso(上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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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세기 『규합총서』의 탄생과 가정 살림의 지식화

저자 : 정해은 ( Chung Hae-eu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5-21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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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이빙허각이 펴낸 『규합총서』(1809)에 담긴 내용을 가정 살림의 시각에서 검토하고, 지식 분야에 불어 닥친 변화를 탐색한 글이다. 『규합총서』에 담긴 지식은 가정 살림 지식과 함께 그 연원에 대한 지식도 제공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책은 가정 살림에 대한 지식을 새로운 지식으로 만들어 체계화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빙허각이 여성으로서 주관한 가정 살림을 여성 독자층을 겨냥해 지식화한 것이다. 여기에는 여성이 혼인 뒤에 시집으로 들어가는 于歸의 기간이 빨라지면서 살림 지식을 필요로 했던 사회 변화가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규합총서』는 이미 빙허각이 살아있을 때부터 주변 여성들에게 필사되어 읽힌 인기 있는 책이었다. 이제 여성들 사이에서 살림 지식을 공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까닭에 1869년에 음식과 의복의 내용만 새로 편집한 '목판본 규합총서'도 나올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20세기에 각종 요리책이 대중화되는 시초에는 『규합총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set out to review anew the content of Gyuhapchongseo(1809) published by Lee Bingheogak in the era of knowledge explosion from the perspective of housekeeping and investigate changes to the field of knowledge. In her book, Lee arranged housekeeping in a systematic manner and provided knowledge about its origin. In this aspect, the book made the knowledge about housekeeping systematic into new knowledge, thus holding significance. Lee turned her housekeeping knowledge she supervised as a woman into the knowledge of housekeeping economy, targeting female readers. This was set in the social change in which women moved into the family of the husband earlier after a wedding ceremony and needed knowledge about housekeeping. Gyuhapchongseo was a popular book, being transcribed by women around her even since she was still alive. The time had come when housekeeping knowledge was shared, as well. It led to the rebirth of the "block book of Gyuhapchongseo" that edited only the content about food and clothes in 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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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10년대 재일 한·중 유학생의 비밀결사활동과 '민족혁명'기획 - 신아동맹당을 중심으로 -

저자 : 김경남 ( Kim Kyung-nam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9-259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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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10년대 일본에서 비밀결사 활동을 전개한 한·중 유학생들의 활동을 반제국주의로 연결된 '민족혁명'기획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였으며, 주로 비밀결사 신아동맹당의 주체와 조직화 실태를 파악하였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아동맹당에 대한 연구가 김철수, 장덕수 등 한국인이 중심이었다는 설과 황찌에민(黃介民) 등 중국인 중심설로 대립하고 있으나, 본고에서는 이미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던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등과 쑨원(孫文), 천치메이(陳其美), 황찌에민 등의 한·중 합작 민족혁명 기획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제기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에 속한 일본이 대중국 21개조를 요구하게 되자, 중국이 '제2의 한국'이 될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 한·중의 혁명인사들은 제국주의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 민족을 초월한 국제적 연대를 형성하였다. 특히 일본에서 신아동맹당이 주도한 대회에는 베트남, 미얀마, 인도 등 피식민지 학생들까지 참가한 국제 연대 활동이라는 점에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아동맹당은 일본에서 2여 년간 비밀결사 활동을 전개하고 해산하지만, 이후 비밀결사요원들은 일본, 한국, 중국 등에서 각각 혁명활동을 전개하고 서로 지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의 2.8독립선언, 한국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등 1910년대 '민족혁명' 국제기획의 조직적 바탕이 된다는 점과 초기 공산주의 운동의 기원이 되었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eal the identity and organization of the secret Shina Alliance Party in view of the nationalist Revolutional project, which links the activities of Korean and Chinese students who conducted secret mission activities in Japan to anti-imperialism. This will allow us to see what the then nationalist planning and the activities of the Shin-A Alliance Party mean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n East Asia and how they are related to the March 1st Movement and the 5.4th Movement.
So far, there have been claims that the Sinah Alliance study was led by South Korea and China. But if we look at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is period, we need to approach it from a different third point of view.
In the main paper, the group said it was a secret alliance pushed in the course of nationalist planning called the Korea-China joint anti-imperialism movement conducted in China after the participation of the new-style New Year's revolution.
The Shina Alliance was a campaign led by Korea, China and Taiwan, which were pushed by secret groups in Japan and China, in a sense of crisis that even China would become a colony in Japan's demand for 21 of Chinese students, and students from Vietnam and other countries participated. After disbanding, they established their own bases in the space of Korea, China and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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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기생에서 혁명가로, 현계옥(玄桂玉)의 사랑과 자기해방의 고투

저자 : 김영범 ( Kim Yeong-beom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1-30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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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기생' 현계옥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흥미 위주의 일면적·부분적 서사로 그쳐왔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이 글에서는 전기적 방법으로 그녀의 생애사를 최대한 복원함과 아울러 그 사회사적 의미도 고구해본다. 1896년(추정) 경남 밀양에서 악공의 장녀로 태어난 현계옥은 17세 때 대구에서 기생조합 소속의 예기가 되고, 그 얼마 후 기혼청년 현정건과의 사랑에 빠졌다. 상경하여 빼어난 가무와 가야금 실력으로 최고기생의 반열에 오른 그녀는 명성과 안락을 뿌리치고 1919년 국외 탈출을 감행하여,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가 현정건의 '제2 부인'이자 동지가 되었고 한인사회의 인정도 얻어냈다. 의열단에 간청 가입하여 거사용 폭탄의 제조·운반 등을 도우며 활약하던 그녀는 1926년부터 사회주의 노선의 민족혁명운동 대오로 옮겨가 잡지 발간을 주관하며 그 나름의 여자해방론을 주창하였다. 현정건의 돌연피체 후 혼자되어버린 그녀는 1931년 모스크바로 가서 공산대학에서 수학한 후 외몽고에서 활동했는데, 코민테른 특파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극빈가정 출신인 유명기생에서 최전선의 혁명가로 전신해간 현계옥의 행보는 고투어린 '사랑과 혁명' 스토리의 한 전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녀의 인생행로 전체는 근대로의 전환과 식민체제화가 겹치던 시기의 조선의 사회변동 속에서 가능해진바 사회적 지위 상승의 한 실태만 아니라, 여성 고유의 계급적 및 젠더적 각성, 그것에 터해 기해 간 자기해방 및 주체(성) 형성의 극적인 경로도 보여주는 다면적 의미의 것이었다.


Though the story of 'consciousness-raised kisaeng' Hyun Gye-ock seems to be widely conceived, the related narratives have been one-sided and partial ones centered on yellow interest. Then this article is aimed to restore her life history as fully as possible by the biographical method, and furthermore to investigate its social historical and cultural meanings. Born in 1896(estimated) in Miryang of the Gyeongsang Province, Korea, as the first daughter of an official musician with humble origin, Hyun Gye-ock was educated by father to become a performance kisaeng at the age of 17 in Daegu, where she fell in love with a married youngman, Hyun Jeong-gun. After having gone to Seoul about in 1914, she ascended to the rank of top class kisaeng owing to outstanding singing-and-dance skills added to the Kaya harp craftsmanship. Nonetheless, she shook off that fame and comfort to escape abroad via Manchuria in 1919, seeking for liberty and perfection of love. Eventually she realized her own wish to become the actual wife and comrade of the independence activist Hyun Jeong-gun in Shanghai, China. There she entered the Eui′yeoldan by means of continuous begging, and acted with competence in manufacture and transportation of bombs and weapons which would be used in attacking the Japanese colonialist institutions. Since late 1925 she moved to and joined the ranks of the national revolution movement on the socialist line, and argued successively on the women's liberation by publishing a feminist magazine. However, husband's being suddenly arrested and domestic imprisonment in 1928 made her to go after all to Moscow in 1931, where she trained herself at the Communist University, and was sent to Outer Mongolia probably as a secret agent of the Comintern. Hyun Gye-ock's such walks might be a typical case of some bitter story of 'Love and Revolution.' But there remains something to say more than it, that is, all of her life history implied multifaceted meanings, showing a Korean underlayer woman's own class and gender awakening followed by a dramatic path of self-emancipation and subject(ivity) formation, as well as a social status rising which could be realized on the background of social change tangled with a transition to modernity and the deepening coloni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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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제시기 김해군 하동면 임야조사와 분쟁

저자 : 강정원 ( Kang Jung-wo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05-3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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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김해군 하동면의 임야조사과정과 분쟁에 대한 사례연구이다. 김해군 하동면은 1917년 9월 임야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하동면은 1917년 9월 17일부터 30일까지가 임야신고서 접수 기간이었으나 “신고기간을 잘못 알아” 두 달이나 늦게 신고서를 접수하였다. 신고서 접수와 각종 장부 대조가 마무리된 후 소유권 조사와 一筆地 측량작업을 진행하였다. 하동면은 5부분으로 나누어 실지조사를 실시하였다.
1918년 1월 말부터 주중리를 시작으로 2월 말까지 조사가 이루어졌다. 하동면의 실지조사는 1917년 내규에 따라 조사를 실시했기 때문에 1918년 임야조사령이 발포되면서 지적신고 유무에 따라 조정했던 소유를 재구분하는 작업을 거쳤다. 실지조사 과정의 내용을 토대로 임야조사서를 작성하였고, 이는 사정작업의 기본 장부로 활용되었다. 하동면을 포함한 김해군은 1923년 12월 10일 査定을 완료하였고, 사정으로 확정된 소유권에는 절대성이 부여되었다.
한편 김해군 하동면은 국유림 분쟁율이 높았다. 하동면은 북서쪽으로는 신어산, 백두산, 까치산이 위치하고, 동쪽과 남쪽으로 낙동강과 평야를 끼고, 부산과 경계를 접하고 있어 대부자들의 선호도가 높았다. 일본인 內田竹三郞은 하동면 일대의 산림을 대규모로 대부받아 조림활동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동리 부근의 산림을 이용하고 있었던 동리민들과 이용과 소유를 둘러싸고 분쟁이 촉발하였다. 분쟁은 대부자인 內田竹三郞을 緣故者로 하는 국유림으로 판정되었다. 이는 분쟁지를 무주공산, 관행림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관행림은 국유림구분조사 과정에서 국유로 조사되었고, 지역민의 연고를 고려하지 않고 국가의 주도하에 조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자를 선정하여 대부하였던 것이다. 분쟁에서 승소한 대부자들은 조림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고, 동리민들에게 '협조'라는 미명 아래 조림과 보호에 대한 의무와 연대책임을 지우고, 산림이용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This is a case study on the process and disputes surrounding the forest-land survey by Hadong-myeon Gimhae-gun. Hadong-myeon Gimhae-gun conducted a forest-land survey project in September 1917. The official forest-land declaration period was between September 17 to 30, 1917. However, Hadongmyeon was misinformed about the declaration period, and hence, received reports two months later. After receiving reports and checking the books, Hadong-myeon carried out ownership investigation and pilji(筆地) surveying work. From the end of January 1918, Hadong-myeon started to survey forests in Hadong-myeon dividing the area into five parts and beginning with Jujung-ri. The survey lasted until late February. Because this actual site survey by Hadong-myeon was conducted in accordance with the internal regulations in 1917, ownership of forests and lands adjusted according to the declaration status had to be redetermined upon the announcement of 1918 Forest-land Survey Order. Based on the contents of the actual site survey process, a forest-land survey report was prepared and used as the basic ledger for the assessment work. Gimhae-gun, the upper administrative setup including Hadong-myeon, completed the assessment on December 10, 1923, and absolute ownership was granted to a title to forest-land decided through the assessment.
On the other hand, there were a lot of disputes surrounding the national forests in Hadong-myeon, Gimhae-gun. Sineosan Mountain, Baekdusan Mountain, and Kachisan Mountain are located in Hadong-myeon, which also includes Nakdonggang River and wide plains to the east and south. Geographically, Hadong-myeon shares border with Busan, and hence, has the advantage of potential use for both mountains and plains in the event of successful afforestation. Thus, it was an area highly preferred by loaners. A Japanese loaner by the name of Uchida loaned a large-scale forest in the Hadong-myeon area and engaged in afforestation activity. This triggered disputes over the use and possession of forest with the villagers who were using the forest near the village. The disputes were settled with a judgement recognizing the forest as a national forest and Uchida as the person having legal connections. This judgement was made based on the rationale that the disputed place is an ownerless forest subjected to conventional practice. In the course of National Forest Classification Survey, forests subjected to conventional practice were categorized as state-owned forests. These national forests were loaned out to a selected people of capacity who could effectively carry out afforestation under the leadership of the state, irrespective of local people with ties to the forests. The loaners, who won in such disputes, were able to concentrate on their afforestation project. They restrictively allowed the use of forests to the local people, who were desperate of forest usage, imposing on them duties and joint responsibility for afforestation and protection under the name of 'coop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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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50년대 원조와 부산 기업

저자 : 류상윤 ( Ryu Sang-yun )

발행기관 : 부경역사연구소 간행물 : 지역과 역사 4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41-36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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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한국은 막대한 양의 미국 원조를 제공받았고 1957년은 그 중 원조액이 가장 많았던 해였다. 본고는 한국은행에서 작성한 1957년 19주분의 기업 레벨 원조자금 배분 자료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하여 분석하였다. 특히 해방 후 한국 공업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부축의 성장에 원조가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원조자금의 지역별 배분에 초점을 맞추었다. 분석 결과 서울에 소재한 기업이 압도적으로 많은 자금을 배분받았고 그 다음이 경부축의 다른쪽 끝인 부산과 대구였다. 서울 소재 기업의 비중은 당시 제조업 분포와 비교해도 두드러진 것이었다. 원조가 경부성장축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 무게 중심을 부산에서 서울로 옮기는 데도 기여했을 것임을 시사한다. 원조자금을 많이 배분받은 상위기업을 비교해보면 부산 소재 기업은 화학 등 제조업체와 무역업체였던 반면에 대구 소재 기업은 대부분 섬유 관련 제조업체였다. 원조자금이 지역의 산업 발전에 미친 영향은 개별산업이나 기업 연구와 결합된 분석을 통해 향후 이해가 진전될 것으로 기대한다.


In the 1950s, Korean economy received huge amount of foreign aid mainly from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is study analyzes firm-level allocation data covering nineteen weeks of the peak aid year 1957, which were found in 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USA. My main focus is the geographical allocation of aid, because the concentration of industrialization in Seoul-Busan line is one of the main issues in the study of Korean economic development. The result shows firms in Seoul received more than half of the aids, and those in Busan and Daegu received thirteen and seven per cent. It implies that U.S. foreign aid strengthened the Seoul-Busan industrialization axis on the one hand, but helped the rise of Seoul area as the main industrial region compaired to Busan area on the other hand. The main industry of aid-recipient firms in Busan was Chemical industry which reflected the industrial structure and dynamics at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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