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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Daejonggyo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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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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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19)~3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9
대종교연구
3권0호(2020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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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檀君敎五大宗旨佈明書』 연구

저자 : 유영인 ( Yu¸ Yeong-in )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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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 (이하 오대종지서)의 저술 주체인 백봉 교단은 근대 대종교의 성립을 위한 배후조직의 역할을 담당했던 조직이었다. 이 집단은 종교 구성에 필요한 요소들을 확립하는데 상당한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특히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데 관심과 노력을 집중했다. 이러한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의미 있는 결과물을 산출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물은 「종리(倧理)」·「종사(倧史)」·「종례(倧禮)」로 불리는 것으로 교리·역사·의례를 망라한 것이었다. 『오대종지서』는 종리(倧理)의 영역에 포함되며, 그것은 다시 “교리”와 “종교윤리”를 구성요소로 하는데 종교윤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종교윤리를 담고 있는 『오대종지서』는 5개의 종지를 핵심으로 하며, 이는 다시 대신(對神)·대인(對人)·대물(對物)에 대한인간의 종교적 실천 원리로 범주화 된다.
한편 백봉 교단이 『오대종지서』를 구성함에 있어 나름의 전거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종지'의 사상적 배경을 서술함에 있어 종교 구성을 위해 수집된 경서(經書)가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오대종지서』의 서술이 순전히 자료에 기반 하지 않는 백봉 교단의 창작적 산물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단서라 할 수 있다. 『오대종지서』는 내용상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오대종지서의 이념적 기원이며, 다음은 신교사를 종지에 기반을 둔 사관에 따라 서술한 부분이고, 마지막은 백봉의 오대종지 포명 부분이다.
『오대종지서』는 최초의 포명이 행해진 이후 변화를 겪게 된다. 그변화는 내적 변화와 외적 변화다. 내적 변화는 『오대종지서』 내에서볼 수 있는 것으로 3회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표현의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취지는 변화가 없다. 외적 변화는 『오대종지서』 공표되고 난 뒤에 이루진 것으로 5개의 중에 한 조항이 본래의 것과 내용상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초기 대종교 포교운동에서 시교전략이 노출되는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종교의 포교를 진행함에 있어 전략적 선택으로 판단된다. 『오대종지서』는이러한 내적 외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교리 정리의 차원에서 심화의 과정을 겪게 되고 나아가 대종교 교사를 서술함에 그 근본이념을 제공함으로써 교리의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백봉 교단의 교단 확립 과정의 최종 결과물인 _오대종지서_는 그연구의 단계에서 보면 출발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_오대종지서_를 중심으로 한 후속연구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The Baekbong religious group, the author of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was the organization that played the role of the backbone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modern Daejonggyo. This group devoted considerable effort to establishing the elements necessary for the constitution of religion. They particularly focused their attention and efforts on building the theoretical foundation. These efforts yielded significant and meaningful results. The result was called “Jongri”, “Jongsa”, and “Jongrye”, which encompassed the doctrine, the history, and the rituals of the religion.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is included in the domain of “Jongli”, which again consists of “doctrine” and “religious ethics”, among which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corresponds to the religious ethics. The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which contains religious ethics, has five creeds as the core, which is again categorized as the principle of human religious practice for the god, human beings, and material objects.
On the other hand, it can be seen that the Baekbong group is based on its own reference in constructing the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In particular, indescribing the ideological background of “OhJong-ji”, it is observed that the scriptures collected for religious construction are used. This can be said to be a clue that the description of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is not the pure product of the creation of the Baekbong group that is not based on data.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is largely composed of three parts. The first is the ideological origin of the book of Odaejongji, the next is the part that describes the history of Shinkyo according to the ideology based on the Jongji, and the last is the part of Baekbong's proclamation of Odaejongji.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had been undergoing some changes after the first proclamation was made. The changes is an internal change and an external change. The internal change, which can be seen within the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was carried out three times, but despite the differences in the way of expression, the fundamental purpose remains unchanged. The external change was made after the publication of the Book “Odaejongji”, and one of the five creeds shows a deferent content from the original. This originated from the incident in which the missionary strategy was exposed in the early Daejonggyo missionary movement. This is judged to be a strategic option in carrying out the mission of Daejonggyo. Despite these internal and external changes, the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went through a process of deepening in the dimension of doctrine arrangement, and further had a significant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the doctrine by providingits fundamental ideology in the description of the history Daejonggyo.
The final result of the process of Baekbong group's denomination establishment, “Odaejongjiseo”, can be said to be at the starting point when viewed from the stage of the study. Therefore, it is hoped that the follow-up research centering on the Dangungyo-Odaejongjipomyungseo will continue.

2이극로의 북한 행적과 『이극로 전집』의 과제

저자 : 조준희 ( Cho¸ Junhee )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9-132 (9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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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대표였던 이극로(1893~1978)는 광복 후 조선건민회를 조직해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 후 평양에 잔류한 이후 1978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북한의 조선어학 토대를 다지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런데 이극로가 북한 정권 수립에 일조하고 대남선전선동의 선봉으로서 활동했던 이력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극로는 김일성의 신임을 받아 북한 초대 내각 무임소상에서부터 승승장구하였으며, 반미 반이승만 발언을 지속했다. 한국전쟁 때는 대남선전선동에 앞장섰고, 군사정권 때는 반미 반박정희 강경 발언을 지속했다.
이극로의 민족어 연구와 공헌은 남한과 북한에서 공히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김일성의 사상과 혁명 사업을 고수하고 선전하는 데 앞장섰던 그의 정치 행보는 남한에서 재평가될 것이고, 체제 찬양발언으로 인해 기념사업은 난관이 있을 전망이다.
본고에서는 2019년 『이극로 전집』(전4권) 간행 이후에 확인된 글을 보완한 총목록을 부록에 실었다.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imperialism, Korean Language Study Society Representative, Yi, Geugno (Kolu Li, 1893~1978) organized the Chosun KUNMIN-HOI (Strong People's Society) and leapt into the political world. In 1948, he attended South-North Joint conference (joint conference with representatives of Korean political parties and social organizations in North and South Korea), and stayed behind Pyongyang in North Korea. Afterward, until his death in 1978, he contributed to solidifying and developing the foundation of Korean language studies in North Korea.
However, the history of Yi, Geugno's contribution to the establishment of the North Korean regime and serving as the vanguard of propaganda against South Korea was not well known in the Koreas. Yi, Geugno earned the trust of Kim Il-sung. As a Minister without Portfolio in the first cabinet of North Korea, he went from strength to strength and continued to speak for anti-Americanism and against Syngman Rhee.
During the Korean War, he took the lead in anti-American propaganda, and during the military regime in South Korea, he continued to speak for anti-Americanism and against Park Chung-hee.
Yi, Geugno's study of and contributions to the national language are recognized by both South and North Korea. However, his political actions, which were focused on adhering to and promoting Kim Il-sung's ideas and revolutionary work, may be reevaluated in South Korea, and his commemorative project is expected to be experience difficulty due to his remarks in praise of the North Korean regime.
In this paper, a general table of contents that supplements the articles confirmed after the publication of the The Complete Works of Yi Geugno (all 4 volumes) in 2019 is included in the appendix.

3평북 정주 배천 조씨 일가의 배달학교 설립과 경신참변

저자 : 조준희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3-204 (7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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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경신참변 희생자 가족의 일 사례로서 피해 학교 특성, 경신참변의 전개, 국가보훈처의 공훈 선양 문제 3가지 관점으로 세밀히 살펴본 성과물이다.
첫째, 경신참변 때 방화로 전소되어 폐교된 배달학교는 1918년 3월 서간도 통화현 반랍배에 정착한 평북 정주인들이 교포 2세의 민족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조용석·김기전·이시열·승진 4인이다.
핵심 인물인 조용석은 배천 조씨 진사 입격자로서 많은 가산을 정리해 일가를 데리고 망명한 뒤 동향 김기전 형제와 함께 학교를 경영했고, 서간도 동창학교·흥동학교 교사 출신 이시열과 동창학교교사 출신 승진은 교사 경험을 살려 교육을 분담했다. 유일한 함경도 출신 강화린도 교사로 합류했다.
1918년 기준 배달학교 교직원의 평균 연령은 29.8세였으며, 50대 최고령자인 조용석이 교장을 맡고, 20대 강화린과 이시열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다른 이들은 회계와 서무로서 보조하는 구조였다.
배달학교에서는 민족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국치일과 개천절 등 민족 행사를 개최했다. 1919년에는 서간도에 확산된 3·1 운동에 참가했고, 신흥무관학교와도 교류했으며, 재만동포들에게 “의용군이 되어 2천만 민족을 구하고 3천리 강토를 회복하라”는 내용을 담은 격문을 돌리기도 했다. 그해 3월에 교사 이시열과 강화린이 독립운동에 투신해 각각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로 떠나면서 교사진에 공백이 생겼다.
둘째, 1920년 10월 23일 서간도 지역 반일지사와 민족학교에 대한 일제의 2차 '소탕' 작전이 중국 장작림의 승인(10/17) 하에 개시되었다. 서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의 지휘 체계는 관동군 16사단 휘하로 요령성 철령에 있던 보병 제19연대장 스기야마(杉山) 대좌와 보병 1개 대대, 그리고 길림성 공주령에 있던 사쓰카(目) 중좌의 기병제20연대가 주도했다. 16사단장 시기모리 하루는 일본 서남단 가고시마 출신이었고, 스기야마는 사가현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육사 1기, 4기로 선후배 간이었다.
출병한 이들은 중국군 및 순경과 함께 중·일 합동으로 반일인사토벌에 나섰다. 스기야마 보병 대대는 10월 23일 '현지 불령선인 및 그에 가담한 마적들에게 위협할 목적'으로 동쪽으로 시위 행군을 개시했고, 사쓰카 기병대는 남쪽으로 행군을 개시했는데, 통화현을 향해 서쪽과 북쪽에서 협공 작전을 펼쳤다.
여기서 친일파 최정규가 이끄는 만주보민회가 흥경현에 출병한 관동군을 환영하고 적극 협조해 반일인사 체포에 전면으로 나섰다. 최정규와 27명의 조사원들은 10월 28일부터 스기야마의 명령을 받고서 10월 31일 천장절축일 축하회를 함께 하고서 다음날인 11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1개월 간 흥경현에서부터 관전현에 이르기까지 500여 명을 체포했다. 최종적으로 선별된 81명이 관동군에 의해 참살되었다. 『독립신문』의 서간도 피살자는 총 1,323명이었는데, 일본 측 기록보다 16배 많은 수치로 과장된 측면이 있다.
흥경현 개신교 계열 삼성학교에 이어 통화현 배달학교는 보민회의2번째 표적이 되었다. 11월 2일 반랍배에서는 배달학교 교장 조용석과 교감 김기선, 교사 조용주 3인, 그리고 현지 한족회 반일지사 4인(승병균·승대언·김기준·최찬화)이 체포되어 다음날 20km 끌려가 영액포진에서 참살되었다. 반랍배 7인 희생자는 배달학교 인근기슭에 묻혔는데 조용석과 조용주의 시신은 다시 고향으로 반장되었고, 5인의 시신은 현지에 안장된 채로 세월이 흘렀다.
관동군 측에서는 서간도 시위행군 작전의 성공이 전적으로 보민회덕분(반일지사 및 학교 선별 지목)임을 밝혔다. 따라서 서간도 지역경신참변의 가해자는 일본 관동군만이 아니라 만주보민회, 그리고 장작림과 그 휘하 중국인 관헌도 공범이다.
셋째, 국가보훈처에서는 반랍배 7인 희생자에 대해 1977년부터 1998년 사이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해 예우를 갖추었다. 나아가1993년 해외안장 독립유공자 실태조사단을 꾸려 7인 희생자 묘소를 확인하고 1994년부터 2007년까지 6인의 유해를 세 차례에 걸쳐 국립대전현충원에 봉환했다. 비록 당연한 업무지만 1977년부터 2007년까지 보훈처의 30년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다만 1996년에 중국 현지에서 반일지사지묘를 세우고 묘소를 단장할 때 『독립신문』(1921.1.21일자) 기록을 기준으로 조용주 대신 조동호라는 이명으로 묘비와 묘소가 복원되었다. 보훈처에서 조동호=조용수=조용주인 사실을 치밀하게 검증하지 않아 2007년에 유해(?)가 봉환되는 해프닝이 일어나 지금에 이른다. 조동호 곧 조용주의 유해는 고향으로 반장되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1차 사료와 족보 분석을 면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사태다.
다음, 보훈처의 한자 오독으로 인한 1991년 조용석에 대한 중복포상 건은 논자의 민원제기로써 2017년에 정리되었다.
끝으로 조용주(수) 지사의 전해지지 못했던 훈장도 포상된 지 19년 만에 논자에 의해 유족에게 전수되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험난했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을 때 보훈처는 한 마디로 '관료적' 태도로 일관했다. 구체적으로, 5년 이상 소요된 논자의 노력과 증거자료를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반대로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는 마치 자신들의 성과처럼 보도하는 반칙적 행동을 보였다. 잘못된 보도는 학위논문에 잘못 인용되기조차 했다.
2020년 경신참변 100주년을 맞아 평북 정주인들이 세웠던 통화현 배달학교와 반랍배 7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는 의미 깊다. 그리고 피해 사례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조용석 일가에서 신흥무관학교생도 1명(조태연)과 광복군 1명(조동윤=조지영)이 배출된 영예로운 후손들의 역사도 같이 조명되어야 한다.
한편 친일 단체 만주보민회와 일본 관동군에 대해서도 잊지 말고 계속 추적하고 규명 작업을 이어나가야 한다. 중복 포상 문제 등 여전히 보훈처 내부에 마무리되지 못한 경신참변 희생자들에 대한 역사 바로 잡기 작업도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本稿は、庚申惨変の犠牲者家族の一例として、被害学校の特性、庚申惨変の展開、国家報勲処の功勲宣揚の問題を、三つの観点から詳しく探ってきた成果である。
一つ目に、庚申惨変の時に放火により全焼し廃校になった培達学校は、1918年3月に西間島の通化県の半拉背に定着した平北、定州人らが、同胞二世の民族教育を目的に設立された。設立者は趙庸錫、金基甸、李時説、承震の4人である。
核心人物である趙庸錫は白川趙氏の進士入格者として多くの家産を整理し、一家を連れて亡命した後、同郷の金基善兄弟と共に学校を経営し、西間島の東昌学校、興東学校の教師出身である李時説と東昌学校の教師出身である承震は、教師の経験を生かし教育を分担した。 唯一の咸鏡道出身の姜華麟も教師として合流した。1918年基準の培達学校の教職員の平均年齢は29.8歳で、50代の最高齢者である趙庸錫が校長を務め、20代の姜華麟と李時説が教師として学生たちを教え、他の者たちは会計と庶務として補助する構造であった。
培達学校では民族教育を通して青少年らの抗日意識を鼓舞し、国恥日や開天節など、民族的な行事を開催した。1919年には西間島に拡散した3·1運動に参加し、新興武官学校とも交流しながら、在満同胞らに「義勇軍になって二千万の民族を救い、三千里の領土を回復せよ」という内容の書かれた檄文を発した。同年三月、教師である李時説と姜華麟が独立運動に身を投じ、それぞれ西路軍政署と新興武官学校へ発つ本稿は、庚申惨変の犠牲者家族の一例として、被害学校の特性、庚申惨変の展開、国家報勲処の功勲宣揚の問題を、三つの観点から詳しく探ってきた成果である。
一つ目に、庚申惨変の時に放火により全焼し廃校になった培達学校は、1918年3月に西間島の通化県の半拉背に定着した平北、定州人らが、同胞二世の民族教育を目的に設立された。設立者は趙庸錫、金基甸、李時説、承震の4人である。
核心人物である趙庸錫は白川趙氏の進士入格者として多くの家産を整理し、一家を連れて亡命した後、同郷の金基善兄弟と共に学校を経営し、西間島の東昌学校、興東学校の教師出身である李時説と東昌学校の教師出身である承震は、教師の経験を生かし教育を分担した。 唯一の咸鏡道出身の姜華麟も教師として合流した。1918年基準の培達学校の教職員の平均年齢は29.8歳で、50代の最高齢者である趙庸錫が校長を務め、20代の姜華麟と李時説が教師として学生たちを教え、他の者たちは会計と庶務として補助する構造であった。
培達学校では民族教育を通して青少年らの抗日意識を鼓舞し、国恥日や開天節など、民族的な行事を開催した。1919年には西間島に拡散した3·1運動に参加し、新興武官学校とも交流しながら、在満同胞らに「義勇軍になって二千万の民族を救い、三千里の領土を回復せよ」という内容の書かれた檄文を発した。同年三月、教師である李時説と姜華麟が独立運動に身を投じ、それぞれ西路軍政署と新興武官学校へ発つことになり、教師陣に空白が生じた。
二つ目に、1920年10月23日、西間島地域の反日志士と民族学校に対する日帝の二次掃討作戦が、中国の張作霖の承認(10/17)の下で開始された。西間島に出兵した日本軍の指揮システムは、関東軍16師団の麾下として遼寧省の鉄嶺にいた歩兵第19連隊長の杉山大佐と歩兵一個大隊、そして吉林省の公州嶺にいた目中佐の騎兵第20連隊が主導した。16師団長の志岐守治は、日本の西南端に位置する鹿児島出身で、杉山正之は佐賀県出身だった。この二人はそれぞれ陸士1期と4期で、先輩後輩の間柄だった。
出兵した彼らは中国軍や巡警と共に日中合同で反日人士討伐に乗り出した。杉山歩兵大隊は10月23日、現地の不逞鮮人及びそれに加担た馬賊らに脅威を与える目的として東側へのデモ行進を開始し、目騎兵隊は南側への行軍を開始したが、通化県に向かって西側と北側で挟み撃ち作戦を展開した。
ここで親日派である崔昌圭が率いる満州保民会が興京県に出兵した関東軍を歓迎し、積極的に協力し合い、反日人士逮捕に全面的に乗り出した。崔昌圭と27人の調査員たちは、10月28日から杉山の命令を受けた四人が先発隊として出発し、残りの者は共に10月31日の天長節祝日の祝賀会に同席してから、翌日の11月1日から11月30日までの1ヵ月間、興京県から寛甸県に至るまで約500人を逮捕した。最終的に選ばれた81人が関東軍によって惨殺された。_独立新聞_の西間島で殺害された者は計1,323人だったが、日本側の記録より16倍多い数値であり、誇張された側面がある。
興京県のキリスト教系列の三成学校に続き、通化県の培逹学校は保民会の二番目の標的になった。11月2日、半拉背では培達学校の校長である趙庸錫と教頭の金基善、教師の趙龍珠の三人、そして現地の韓族会の反日志士である四人(承昞均、承大彦、金基畯、崔賛化)が逮捕され、翌日20km連行され英額佈鎮で惨殺された。半拉背の七人の犠牲者は、培達学校近くの裾野に埋められたが、趙庸錫と趙龍珠の遺体は再び故郷に移された後に葬られ、五人の遺体は現地に埋められたまま歳月が流れた。
関東軍側では西間島のデモ行進作戦の成功が全面的に保民会のおかげ(反日志士及び学校選別指目)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したがって、西間島の地域での庚申惨変の加害者は、日帝関東軍だけではなく、満州保民会そして張作霖とその麾下である中国人官憲も共犯である。
三つ目に、国家報勲処では、半拉背の七人の犠牲者に対して1977年から1998年までの間に、建国勲章愛国章を追叙し礼遇を尽くした。さらに1993年、海外安葬独立有功者実態調査団を立ち上げ、七人の犠牲者の墓所を確認し、1994年から2007年にかけて、六人の遺骨を三度にわたり、国立大田顕忠院に奉還した。当然のことにしても、1977年から2007年までの報勲処の30年間の努力は高く評価されるべきである。
しかし、1996年に中国現地で反日志士之墓を建て、墓所を改装する際、_独立新聞_(1921年1月21日付)の記録によると、趙龍珠の代わりに趙東鎬という異名で墓碑と墓所が復元された。報勲処では、趙東鎬=趙龍洙=趙龍珠である事実を緻密に検証せず、2007年に遺骨(?)が奉還されるというハプニングが起き、現在に至る。趙東鎬、すなわち趙龍珠(洙)の遺骨は故郷に移された後に葬られ、初めから存在しなかった。一次の史料と系譜分析を綿密に行わなかったために生じた事態である。
次に、報勲処の漢字誤読による1991年の趙庸錫に対する重複褒賞の件は、論者の請願提起として2017年に整理された。
最後に、趙龍珠(洙)志士に渡されなかった勲章も、褒賞されてから19年ぶりに論者によって遺族に受け渡された。しかし、その過程は険しいもので、正確な情報を提供した際、報勲処は一言“官僚的”な態度を一貫し、五年以上も費やしてきた論者の努力と証拠資料を意図的に無視し、反対に問題が解決した際には、まるで自分たちの成果であるように報道するといった反則的な行動を見せた。誤った報道が学位__論文に誤って引用されることさえあった。
2020年の庚申惨変が100周年を迎え、平北、定州人らが設立した通化県培達学校と半拉背の七人の犠牲者に対する追慕は意味深いものである。そして、被害事例にとどまらず、民族教育者である趙庸錫一家から新興武官学校の生徒一名(趙泰淵)と韓国光復軍一名(趙東潤=趙志英)を輩出した栄誉ある子孫たちの歴史にも、スポットライトを当てなければならない。
一方、親日団体の満州保民会と日本関東軍に対しても忘れずに引き続き追跡し、究明作業を続け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 重複褒賞の問題など、依然として報勲処内部で決着がついていない庚申惨変の犠牲者に対する誤った歴史を正していく作業も継続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

4『道通之前旦』

저자 : 이관구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5-277 (7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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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一生記』

저자 : 조경연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79-322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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