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한국신교연구소> 대종교연구

대종교연구 update

Journal of Daejonggyo Studies

  • : 한국신교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종교학
  • :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2671-9975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19)~2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4
대종교연구
2권0호(2020년 0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1개천절의 주역 홍암 나철의 홍익인간 사상

저자 : 유영인 ( Yu Yeong In )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45 (4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948년은 주목할 만한 해다. 분단의 관점에 볼 때 그해는 남과 북이 각각 정권을 수립한 해다. 하지만 한민족 전체에서 볼 때 그 해는 민족의 갈라지는 비극의 해이기도 하다. 같은 해 근동의 한 나라 이스라엘은 2000년의 길고 긴 망국의 시간을 보내고 각고 끝에 그들이 두고 떠났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시 세웠다. 어떠한 나라는 없던 나라도 다시 세우는데, 우리 한민족은 5000년을 이어오던 민족이 둘로 갈라졌다. 여러 가지 지정학적 정황을 무시하고 한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이스라엘의 건국사건과 비교해 한민족의 분단 사건은 이해는 할 수 있으나, 용인될 수는 없다.
이 두 민족의 건국과 파국을 가져온 근본적 차이는 민족구성원을 하나로 통합하는 민족정신(national psyche)의 유무다. 유대민족의 민족정신의 중심에는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하는 구약정신이 존재한다. 2000년의 망국의 상황에서 언어와 국적이 갈라졌어도 그들은 오직 하나의 중심 구약정신으로 그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인류역사 전 과정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사건인 건국을 이룩해 낸 것이다. 이스라엘의 건국사건이 시사하는 것은 물리적 국토가 없어도 민족을 통합하는 민족정신이 존재하면 그 민족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500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지만 국파민멸(國破民滅) 비극을 맞이했다. 비극의 원인은 바로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정신의 부재였다. 유구한 역사를 보유한 한민족에게 정신이 부재한 것은 아니었다. 각 시대마다 국가를 이끌어 가는 정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신이 외래의 것이었다는데 있었다.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에서 민족정신이 자민족에서 생성된 고유의 것이 아닌 것이었을 때 민족이 맞이하게 될 운명을 간파한 집단이 있었다. 그 집단은 바로 대종교 중광을 산파역할한 백봉을 중심으로 구성된 선가(仙家) 집단이었다.
백봉은 조선을 지배했던 유교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조선사에서 변방으로 밀려나 있던 조선 고유 종교에 주목했다. 유구한 조선사에서 일찍이 하늘을 숭배하는 천신사상이 조선 고유의 종교로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을 사실이다. 마한 시대의 천신(天神)·천군(天君)·소도(蘇塗)와 최치원의 풍류도 고려의 팔관회가 바로 천신숭배를 근본으로 하는 민족 고유의 종교였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천신숭배를 근본으로 하는 고유의 민족종교가 단군을 표상으로 하는 종교로 재탄생했던 것이다. 단군교 혹은 대종교의 탄생은 한말 우후죽순처럼 탄생한 여타의 민족종교와 마찬가지로 일개 종파의 탄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백봉과 그 과업을 전수한 홍암 나철은 교세의 확장에 급급한 종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한민족 모두의 동의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민족정신은 자생적 민족종교 그것도 유구한 역사성을 갖는 그러한 것이어야 하고 그러한 민족고유정신이 민족의 생존과 어떠한 관련성을 맺고 있는지를 깊이 성찰한 선각자였다.
오늘 우리가 나철을 되새기는 것은 그가 홍익인간을 특수하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가장 온전하게 실천한 표본임을 확인하는데 있다. 더욱이 그것을 훨씬 뛰어 넘어 오늘에 우리가 나철의 삶에 다시금 주목하는 것은 나철의 삶을 통해 개인과 사회와 민족이 직면한 난제에 대한 깊고 넓은 관점에서의 해결의 전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낙관적 기대 때문이다.


The year 1948 was a remarkable one. From the point of view of division, the year was a year in which South and North established their respective regimes. But for the Korean people as a whole, it was also a year of national tragedy.
In the same year, a nation in the Near East spent a long time of two thousand years in exile, putting in a great deal of effort to rebuild the country around Jerusalem, where they had left behind. They succeeded in rebuilding a country whose existence was not to be seen on earth while Korea was divided into two nations that had been around for 5000 years. Ignoring the various geopolitical contexts, a simple comparison between Koreans and the Israelites may be naive. However, no matter how specific the situation was, the Korean people's division can be understood but not tolerated compared to the founding of Israel.
The fundamental difference that led to the founding and catastrophe of these two peoples depends on the existence or nonexistence of a national psyche that unites people. At the heart of the national spirit of the Jewish people is the Old Testament spirit centered on the Pentateuch. Even though language and nationality diverged in the context of the exile of 2000, they were able to overcome all the differences with only one central Old Testament spirit and establish the greatest political event in the whole history of human history. The founding event of Israel suggests that even if there is no physical land, if there exists a national spirit that unites the nation, the nation will never be destroyed.
We Koreans proudly tell us about 5000 years of history, but faced the tragedy of the nation's destruction and the destruction of its people. The cause of the tragedy was the absence of a spirit of uniting the people. The Korean people, who have a long history, were not without a spirit. It is true that in every age there was a spirit that led the nation. But the problem was that the spirit was foreign. In the historical experience of the Korean people, there was a group that saw the fate of the nation when the national spirit was not unique to the people. The group was a group of ascetics centered on Baekbong, a midwife who cultivated the Resurrection of Daejonggyo.
Baekbong violently criticized Confucianism that ruled the Joseon Dynasty, paying attention to Joseon's indigenous religion, which was pushed out of Korean history. It is true that the belief in the celestial god, which originated in the early era in a long history of Korea, have been closely connected to the religion of Joseon. It is evident that Cheonsin, Cheongun, and Sodo in the Mahan period, Punglyudo in the Silla period and Palkanhoe in the Goryeo dynasty were the indigenous religions based on the worship of he celestial god. The indigenous ethnic religions based on the celestial worship were reborn as a religion represented by Dangun.

2홍익인간의 종교적 고찰

저자 : 유영인 ( Yu Yeong In )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7-91 (4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홍익인간의 전거가 되는 『삼국유사』 단군신화를 현대 신화 분석의 유력한 이론을 통해 도출된 결론에서 단군신화가 종교를 본유의 것으로 함을 확인했다. 이러한 결론은 단군신화에 담겨진 홍익인간도 종교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홍익인간의 종교 관련성을 우선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과 관련하여 고찰해 보았다. 홍익인간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두 가지 설은 문헌적 보증의 측면에서 일연이 홍익인간을 선택하는 데 불교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로 보여준다. 하지만 일연의 『삼국유사』 저술 동기와 시대상황은 홍익인간의 선택이 전적으로 불교의 영향으로만 볼 수 없는 단서가 된다. 즉 『삼국유사』 저술의 근본 동기는 외침을 통해 동기화된 자주적 문화의식이 그것이었다.
한편 홍익인간의 종교적 관련성에 대해 단군신화의 상징성을 전승해서 근대에 종교로 확립한 단군 계통 종교에서 찾아보았다. 그 종교는 대종교로, 홍익인간을 담고 있는 경전이 대종교 성립의 모체인 백봉 집단 전수 문적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타종교에 비해 대종교가 홍익인간의 담론을 전개함에 있어 우위를 확보하고 있음 또한 부인하기 어렵게 한다.
대종교의 경전 중 홍익인간 용어를 직접 언급한 것은 『원신사기』로 확인했다. 『원신사기』에 언급된 홍익인간은 대종교 교리 체계인삼일사상 중 삼신사상의 교관(이론철학+실천철학)에 해당됨을 제기했다. 이에 홍익인간의 종교적 의미를 온전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대종교의 교관 즉 종교적 세계관과 종교윤리를 분석적으로 제시해야만 했다. 대종교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삼일철학을 분석했고 종교 윤리로는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에서 제기한 오대 종지를 토대로 분석했다. 홍익인간의 종교적 의미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대종교 종교윤리 헌장에 해당하는 오대종지는 특정 종파 교리에 국한된 내용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제1종지인 '경봉천신'에서 천신을 대종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해당 종교의 궁극적 실재로 대체해서 해석하면 모든 종교에서 수용할 수 있는 종지가 된다. 제2 종지 '성수영 성', 제3 종지 '애합종족', 제4 종지 '안고기토', 제5 종지 '근무산업'도 해석의 개방성을 허용한다면 모든 종교에서 수용할 수 있는 초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간의 홍익인간 담론이 그 추상성과 세론(細論)에 필요한 전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전개된 탓으로 인해 임의성과 주관성의 한계를 그 문제로 안고 있었다. 본고는 그 한계를 문헌적 보증에 기반하여 해결해 보고자 했다. 홍익인간을 특정종교와 관련해서 의미를 규정한 시도는 종교가 어떻게 홍익인간을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하나의 사례로 제시하고자 함이다. 앞으로도 타종교의 관점에서 홍익인간을 해석한 연구물이 생산되어 홍익인간의 의미가 보다 대중적 수용성을 확장해 가기를 바란다.


Dangun myth introduced in Samgukyusa, which is the authority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홍익인 간)”, is derived from the influential theory of modern mythology analysis. This conclusion provides the basis for the interpretation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beings in Dangun mythology as religious.
The religious relations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can be considered in relation to the author's chronology of Samgukyusa. The two theories, which are thought to have affected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show that it is difficult to deny the possibility that Buddhism has influenced Il-Yeon's choice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in terms of documentary assurance. However, the motives and times of the writings of Samgukyusa by Il-Yeon are a clue that the choice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by Il-Yeon cannot be seen solely under the influence of Buddhism. In other words, the basic motivation of the writing of Samgukyusa was independent cultural consciousness motivated through the foreign invasion.
On the other hand, I searched the Dangun-type religions established as a religion in the modern age by transferring the symbolism of Dangun myth for the religious relations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The religion was Daejonggyo, and it was confirmed that the scriptures containing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were included in the Baekbong group's traditional literature, which was the mother of the religion. This fact also makes it difficult to deny that Daejonggyo has an advantage in developing the discourse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over other religions.
In the scriptures of Deajonggyo, the direct mention of the term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is confirmed as the original version of Shinsagi.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mentioned in the original version of Shinsagi suggested that it amounts to the maxim of “the idea of Trimurti” (theoretical philosophy + the philosophy of practice), which is one of the Doctrinal systems of Daejonggyo. Therefore, in order to fully realize the religious meaning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it was necessary to analytically present the core of Daejonggyo, the religious worldview and the religious ethics.
The Trinity philosophy called Samil idea is analyzed as the religious worldview of Daejongggyo. The religious ethics is analyzed based on the five creeds of Daejonggyo raised in the Declaration of the Five creeds in Dangungyo. The five creeds, which is the Constitution of Daejonggyo Religious Ethics, which is directly related to the religious meaning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may be regarded as limited to a specific sectarian doctrine. However, in the first creed of “respecting the heavenly God with reverence”, if you interpret the heavenly God into the ultimate reality of the religion even in religions other than Daejonggyo, it becomes acceptable creeds in all religions. The second creed of “practicing devine nature with sincerity”, the third creed of “unifying the same race with love”, the fourth creed of “defending the territory with security”, and the fifth creed of “working hard industry with diligence” contain the super-religious content that can be accepted by all religions if the interpretation is open.
The discourse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developed in the situation of lacking the authority necessary for the abstraction and the theories has held the limit of arbitrariness and subjectivity as the problem. This paper has made an attempt to solve the limitation based on the literature guarantee. The attempt to define the meaning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in relation to a particular religion is to present one example of how religion can interpret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In the future, it is hoped that researches that interpret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will be produced from the perspective of other religions, and that the meaning of “Devotion to the wel-fare of mankind” will expand public acceptance.

31911년 대종교 공주시교당 사건 연구

저자 : 조준희 ( Cho Junhee )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3-166 (7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대종교는 1904년 음력 10월 3일(양력 11.9) 백두산 도인 백봉이 창시했고, 1909년 음력 1월 15일(양력 2.5) 나철과 정훈모가 중심이 되어 서울 지부 선포식인 중광식을 거행했다. 서울 지부의 초기명칭은 단군교였고 1910년 음력 7월 30일(양력 9.3)까지 18개월간 한시적으로 사용되었다.
단군교의 교세는 날로 커져서 1910년 8월 전국 교인 수는 21,539명에 달했고, 1911년 황해도, 함경도, 대구, 충청남도에 지방 시교당을 개설해 나갔다.
백봉은 1910년 10월 3일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를 반포하고 대종교의 교의인 오대종지를 나철에게 전했다. 그런데 충남도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친일 관료 박중양이 충남 공주 사립명화학교 곧 공주 시교당에서 배포하던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를 압수했다. 1911년 2월 7일 그는 내용을 분석해“백봉의 오대종지가 황당무계한 설이고, 국권회복과 민족단결을 고취시키기 때문에 독이 퍼질 우려가 있다” 고 총독부에 밀고해 공주시교당 사건을 일으켰고 학교 폐쇄를 강경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측의 답변은 오히려 감정을 배제하고 관망하는 자세로 냉철하게 판단했다. 대종교단에서는 본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서 1911년 2월 27일에 오혁(오기호)을 공주시교당 으로 파송하고 수습했다.
공주시교당 사건의 여파로 대종교 도사교 나철은 결국 전략상 종지부터 경전까지 백봉 관련 내용을 대폭 삭제하기에 이른다.
첫째, 1911년 2월 이후 백봉으로부터 받은 오대종지 중 4개를 수정했다. 특히 민족주의 정신이 담긴 안고기토((백두산) 터전을 안정되게 방비할 것) 종지를 “집에서 고요히 복을 구하라”는 '정구이복'으로 바꾼 점은 심각한 변화였다.
둘째, 백봉 교단으로부터 삼신일체 신관이 담긴 『대종교신리』(1910)를 받았으나 이를 폐기하고 신관을 새로 정립해 1911년 음력 1월 15일(양력 2.13)에 『신리대전』을 펴냈다. 또한 대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인 『삼일신고』 발굴자 겸 전수자가 백봉인데 발굴경위가 담긴 기록을 삭제하고서 1912년에 출간했다.
셋째, 박중양의 밀고로 국내에서 대종교 시교 활동이 어렵게 되자 나철은 1914년에 총본사를 북간도 화룡현 청호에 이전한 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도본사를 설치해 조직을 정비했다. 이러한 대응책은 대종교 계열 독립운동 단체의 기반 형성에도 일조했다는 것이 학계 통설이다. 그러나 애합족우 종지를 어기고 신규식(1880~1922)을 상하이로 파견해 중국 혁명가들과 손잡고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에 가담시켰다는 사실은 대종교의 근간이 흔들린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오늘날 대종교의 공식 교주 명단에 대종교 창시자 백봉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학계와 대종교 측의 주장대로 결코 일제의 탄압이 원인이 아니라, 친일 관료 박중양의 고발로 파생된 피해의식과 일련의 시교 전략 수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논자가 최초로 밝힌 1911년 2월 '대종교 공주시교당 사건'을 통해 기존 학계의 통설과 종단 공식기록에서 삭제된 대종교 초기 역사가 바로잡혀야 한다.


Daejonggyo was founded by Baekbong (?~?), an ascetic coming from Mt. Baekdu, on October 3, 1904 of the lunar calendar (November 9 of the solar calendar). In order to reestablish a Dangun religious, its ceremony was held on January 15, 1909 of the lunar calendar (February 5 of the solar calendar) and led by patriots Ra Cheol (1863~1916) and Cheong Hunmo. This ceremony also proclaimed the Seoul Branch of Daejonggyo. The initial name of the Seoul Branch was 'Dangungyo' and this name was temporarily used for 18 months until July 30, 1910 of the lunar calendar (September 3 of the solar calendar). The religious influence of Dangungyo was growing day by day: the number of nationwide members reached 21,539 as of August 1910. Also, they established Dangun Church in Korean province and cities including Hwanghaedo, Hamgyeongdo, Chungcheongnamdo, and Daegu.
Baekbong promulgated Dangungyo-Odaejongjipomyongseo on October 3, 1910 and delivered the Five Creeds in Daejonggyo to Ra Cheol. However, Park Jung-yang (1872~1959), a pro-Japanese official who served as Minister of Chungcheongnamdo, seized the Dangungyo-Odaejongjipomyongseo, which was distributed by Chungnam Gongju Private Myunghwa School that was Daejonggyo Gongju Dangun Church. After analyzing Baekbong's Five Creeds, he claimed that as “an absurd theory” it not only “encouraged the recovery of national sovereignty and national unity,” but also “might spread the poison.” Park then informed on it to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on February 7, 1911. Accordingly, the Gongju Dangun Church incident occurred. Also, he urged the shutdown of a Daejonggyo school. However,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ok a level-headed stance on the incident and sat on the fences without any emotional invention.
Due to an aftermath of the Gongju Dangun Church incident, Ra Cheol, the religious sect leader of Daejonggyo eventually and strategically removed Baekbong-related contents from Creeds and Daejonggyo scriptures.
First, four of the Five Creeds, having been received from Baekbong, were revised since February 1911. In particular, in this revision, it was a serious change from the nationalist Creed of Ahngogito, meaning “Defend the Mt. Baekdu shrine!,” to Jeongguyibok that means “Silently seek for a blessing at home.”
Second, Daejonggyo-Shinri which contained the hieratic of Daejonggyo was abrogated and the hieratic was reestablished since it was received from the Baekbong religious body (1910). As a result, Shinridaejeon was published on January 15, 1911 of the lunar calendar (February 13 of the solar calendar).
In addition, the Samilshingo, the most important scriptures of Daejonggyo was published after records of Baekbong, as an excavator and an initiator, were completely removed from it.
Third, due to the sycophancy of Park Jung-yang, Daejonggyo's activities experienced difficulties in Korea, so Ra Cheol moved the General Headquarter to Cheongpaho(current Qinghucun), Helong-Prefecture in North Gando in 1914. He maintained the four headquarters in East, West, North, and North, centering on Mt. Baekdu. It is a common view in academia that these countermeasures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a Daejonggyo-based independence movement. However, it resulted in a crucial issue shaking the foundation of Daejonggyo as the countermeasures breached the Creed of Aehapjokwoo that means “Ethnic Koreans and Manchurians, reconcile with one another!” As a result of the countermeasures, Shin Gyusik (1880~1922) was dispatched to Shanghai to join the Chinese revolutionaries and bring them to participated in the Xinhai Revolution that eventually destroyed the Qing Dynasty.
Currently, Baekbong, the Daejonggyo founder is not included in the list of Daejonggyo's official religious sect leaders. As both academia and Daejonggyo argue, this exclusion of Baekbong was not caused by Japanese oppression, but resulted from a victim mentality of the religious body, which Park Jung-yang's charge generated, as well as from a strategical revision of a series of religious teaching. Through 'Daejonggyo 's Gongju Dangun Church Incident' in February 1911 firstly revealed by the author, an initial history of Daejonggyo that disappeared from both the established general theories on Daejonggyo in academia and official references of the religion must be corrected.

4박은식 「서도여행기」의 민족사적 의의

저자 : 조준희 ( Cho Junhee )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7-212 (4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구한말 평안도는 화서학파 박문일과 박문오 형제의 인맥적 토대가 확고히 다져졌다.
박문오의 장남 박동흠은 박문일·박문오 사후 가문을 이끌며 평안도 유림의 종장으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을사늑약 이후 화서학파 동문인 박은식이 유림계의 개혁 운동을 제창해 유림 전체의 총체적 반성과 성찰을 여론화시켰다. 박동흠은 유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적극 동참해 양명학을 받아들이고, 서북학회에 가입했으며, 가산군에 육영학교를 설립해 신학문 습득과 신교육 등 애국계몽운동을 솔선했다. 박동흠과 주변 인사들은 그의 뒤를 이어 유신학교, 덕 달학교, 오천학교, 오산학교 등을 세웠다.
평안도 지역에서 1908년 5월부터 서북학회 지교가 승인·확산되어 가자 박은식은 1909년 7월에 6개교(평남 2개교[일신·대성], 평북 4개교[창동·한흥·오산·육영]), 1910년 5월에 다시 12개교(평남 4개교[안흥·중원·봉명·대성], 평북 7개교[유신·오산·오천·신흥·덕달·육영·진명], 황해도 1개교[조양])를 시찰했다. 박은식은 서북학회 지교 설립을 권유하거나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에도 직접 답사했다. 신민회 계열의 평양 대성학교와 안주 협성안흥학 교도 방문했는데, 뒤에 신민회 사건에 연루되는 오희원이나 명이항 등 인사와 만났던 점도 주목되었다.
박은식의 유림계 개혁 운동에 영향을 받아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된 평안도 유림 주도 세력은 의병 운동이 아닌 애국계몽운동을 실천했다. 비록 설립된 학교들이 일제 때 폐교되었으나 1915년에 이르러 국내 최대 항일 단체인 광복회 평안도지부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이를 통해서 박은식의 「서도여행기」는 감성적인 기행문의 차원을 넘어 1910년대 항일민족운동의 초석과 그 사상적 동력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A foundation of personal connections of Mun-Il and Mun-O Park brothers of the Hwaseo school was fully established in Pyeongando in the late Joseon.
After the Park brothers' passing, Dong-Heum, Mun-O Park's eldest son, leading the family, was highly esteemed as a master of Confucians in Pyeongando. However, after the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in 1905, Eun-Sik Park, an alumnus of the Hwaseo school advocated the reformation of Confucian schools so that he publicized the general reflection and introspection of the whole Confucian scholars. Although Confucian schools dissuaded Dong-Heum Park, he not only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reformation, accepted the philosophy of Yang-Ming Wang, and joined Seobukhakhoe but also founded Yukyoung school in Gasan County (current Bakcheon County, Pyeonganbuk-do). Through this school, he took the initiative in offering, providing students with new learning as well as in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In addition to Dong-Heum, his companions, as local figures, following him, founded Yushin School, Deokdal School, Ohcheon School, and Osan School.
As branches of Seobuk School were approved in May 1908 in the Pyeongando region, they spread over the region since then. Eun-Sik Park inspected six of these schools in July 1090: two in the southern Pyeongando[Ilshin and Daesung] and four in the northern Pyeongando [Changdong, Hanheung, Osan and Yukyoung]). In May 1910, he additionally checked twelve schools (four in the southern Pyeongando [Anheung, Jungwon, Bongmyeong and Daesung] and seven in the northern Pyeongando [Yushin, Osan, Ocheon, Sinheung, Deokdal, Yukyoung, Jinmyeong], and one in Hwanghaedo [Joyang]). Eun-Sik Park recommended local figures to establish branches of Seobuk School or personally traveled to areas with strong conservative inclination. He also visited Daesung School in Pyongyang and Hyupsung Anheung School in Anju. Both schools were affiliated with Shinminhoe. Moreover, it was noted that he met several figures, including Hee-Won Oh and Yi-Hang Myung, who were involved in the Shinminhoe Incident.
Confucian schools in Pyeongando, affected by Eun-Sik Park's reformation of Confucian schools, made an ideological shift. Their leading groups drove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instead of the loyal troops movement. Although those schools were closed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y became the core influence of the Pyeongando branch of Restoration Society, the biggest anti-Japan organization in Korea. In this respect, Eun-Sik Park's Seodoyeohaenggi (A travelogue to Seodo) acquires historical significance since it not only served as the cornerstones of the anti-Japanese national movement in the 1910s but also had its ideological power beyond the level of a sentimental travelogue.

5이관구의 사학연구협회 조직과 『단기고사』 초고 검토

저자 : 조준희 ( Cho Junhee )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3-248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황해도 송화 출신 독립운동가 이관구(1885∼1953)가 1945년 서울에 월남해서 1949년까지 행적 중 사학연구협회 조직, 그리고 여러 저술 중 『단기고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첫째, 이관구는 해방 직후 서울에서 4년 간 정치 활동과 군사 활동, 사회 활동을 활발히 했으나 기대만큼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대신 1946년 9월 서울 성북동 5번지 의친왕 이강 별장(현재의 성락원) 내에 사학연구협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으로서 연구와 집필 활동을 통한 문학, 역사, 철학 출판물에서 현대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관구는 사학연구협회를 통해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비밀결사 독립운동 성격상 드러나기 힘들었던 사건과 일화, 고락을 같이 했던 동지들에 대한 기록도 이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서울 성북동 5번지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이 담긴 『의용실기』와 같은 저술이 집필된 장소라는 사실만으로도 현대사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화사유고』(2011)에서 처음 공개된 이관구 필사본 대야발의 「단기고사 중간서」와 황조복의 「단기고사서」를 분석한 결과, 전자의 경우 1949년에 출간된 『단기고사』의 내용과 차이를 보였다. 구체적으로 대종교 경전 『삼일신고』(1912)를 23.4% 차용한 정황이 드러났으며, 이는 『단기고사』 초고(한문본) 중 일부로 판단되었다. 『단기고사』는 본래 모본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1949년 초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규원사화』의 영향 그리고 대종교 신자인 이시영 내지 대종교 교리에 해박한 김두화 등의 교열을 거치면서 대종교 색채가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광복 이후 위서 『환단고기』(1979)의 출현 사이 30년의 공백 기간 동안 이관구가 1949년과 1950년에 『단기고사』를 출판하고서 국립경찰전문학교를 통해 일선 경찰관 및 각 지방 유지들에게 널리 배포해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한 점은 의의가 있다. 비록 그렇더라도 독립운동가로서 이관구의 위상과 별개로 그가 남긴 저술에 대해 냉철한 서지 비판이 더욱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This paper mainly examined Yi Kwan-gu (1885∼1953)'s organization of Sahakyonguhyuphoe of the traces of his activities in 1945 to 1949 when he came to and stayed in Seoul, as well as Dangigosa of his various writings.
First, Yi Kwan-gu did not attain outcomes as expected although he actively engaged in political, military and social activities for four years in Seoul right after Korean independence in 1945. Instead, he organized Sahakyonguhyuphoe in the building of Prince Yi Kang's villa located in 5 Seongbuk-dong, Seoul (current Sungrakwon). Through his research and writing activities as a chairman, the significance of modern history be found in his literary, historical, philosophical publications. Yi Kwan-gu had published many writings through Sahakyonguhyuphoe. Also, these publications disclosed episodes and anecdotes of his comrades sharing joys and sorrows with him, which were unrevealed because they were members of a secret organization. 5 Seongbuk-dong, Seoul was a place where writings such as Ouiyongsilgi that contained records of independence activists were published. Only with this fact, the place cannot be neglected.
Second, as a result of an analysis of Dae Yabal's Dangigosa Jungganseo, Yi Gwan-Gu's manuscript and Hwang Jo-Bok's preface of Dangigosa Seo which was first open to the public in the Hwasayugo (2011), the former was differentiated from the contents of Dangigosa that was published in 1949. More specifically, as part of the draft of Dangigosa (written in Chinese), it adopted 23.4% of Samilshingo (1912), the scriptures of Daejonggyo. Dangigosa has been considered to have an original example. However, during the process of preparations for its first edition in 1949, it was influenced by Gyuwonsahwa and revised by Lee Si-young, a believer in Daejonggyo or Kim Du-hwa knowledgeable of Daejonggyo doctrines. It was then tinged with Daejonggyo.
For thirty years when Hwandangogi (1979), a forged book emerged after Korean independence, Yi Kwan-gu not only published Danggigosa in 1949 and 1950 but also distributed it to first-line policemen and local community leaders so that he was able to contribute to stimulation of national consciousness. Nonetheless, it is necessary to conduct bibliographically critical review Yi Kwan-gu's writings apart from his reputation as an independence activist.

6광복회 연구의 성과와 과제

저자 : 조준희 ( Cho Junhee )

발행기관 : 한국신교연구소 간행물 : 대종교연구 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9-288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최대 항일 단체였고, 지금까지 대한광복회로 널리 알려졌다.
광복회에 대한 연구는 30년간 진행되었으며, 논자는 1980년대를 '광복회 연구의 개척기', 1990년대를 '광복회 연구의 시도기', 2000년대를 '광복회 연구의 도약기', 2010년대를 '광복회 연구의 결실기'로 이름 붙여 보았다.
1980년대에는 7편의 논문이 나왔는데, 1983년 조동걸 교수가 처음 광복회 연구를 개척한 이래 80년대에 박영석-박환 부자의 광복회연구가 이어졌고, 권대웅도 동참했다. 90년대에는 논문 편수가 10편으로 80년대와 큰 차이 없으나 여러 연구자의 관심으로 다양한 연구가 시도되었다.
2000년대에는 논문이 20편으로 이전보다 배로 늘었고, 특히 박사학위논문 2편(김희주, 이성우)이 나왔다. 이 시기에 『박상진 자료집』 등이 발간되어 학계에 도움을 주었다. 북한 지역 광복회 인물과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의용실기』의 전산입력 작업도 처음 시도되었다.
2010년대에는 논문이 11편 나왔고, 기존 학설에 대한 비판 연구가 돋보인다. 그리고 『광복회 자료집』 Ⅰ·Ⅱ(2014)가 출간되었다.
광복회 연구의 과제로서는 첫째, 연구 성과물의 출간과 보급이 필요하다고 보였다. 둘째, 백과사전에 광복회 관련 항목이나 내용상 잘못된 곳이 있으면 최신 성과를 반영해 시정해야 한다. 셋째, 지리연구를 촉구해야 한다. 넷째, 광복회 인물 기초 자료 수집이 더 필요하다.
그간 사건을 중심으로 관련 인물들이 연구되어 개인에 대한 조사가 불충분하다고 보였다. 구술 자료의 중요성이 늘고 있는 학계 상황에서 족보나 문중, 후손에 대한 인터뷰도 다시 한 번 살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끝으로, 누락된 한국군의 역사에 광복회가 반드시 편입되어야 할 것이다.


Gwangbokhoe, also known as Korean Gwangbokhoe, was the biggest anti-Japan organization in Korea in the 1910s.
Research on Gwangbokhoe has proceeded for thirty years. Reviewing the existing research, I defined the 1980s as 'the pioneering period of studies on Gwangbokhoe,' the 1990s as 'a trial period of the studies,' the 2000s as 'the leaping period of the research,' and the 2010s as 'the period of the fruition of research on Gwangbokhoe.'
There were seven articles released in the 1980s: professor Cho Dong-geol pioneered research on Gwangbokhoe in 1983 for the first time, followed by Park Young-seok and Park Hwan as well as by Kwon Dae-ung. There were ten papers in the 1990s, which were not greatly different from the '80s studies. However, multiple researchers conducted diverse studies with their own different research interests.
There were twenty research papers presented in the 2000s, which specifically included two doctoral theses by Kim Hee-ju and Lee Sung-woo. As Source Book by Park Sang-jin was published at that time, it helped academia (develop research on Gwangbokhoe). Also, computation jobs inputting Ouiyongsilgi allowed one to discover figures of Gwangbokhoe from North Korea and their achievements.
While there were eleven articles released in the 2010s. It is noticeable that these publications mainly criticized the existing theories on Gwangbokhoe. Additionally, Source Book of Gwangbokhoe Ⅰ·Ⅱ were published in 2014.
There are several challenges of studies of Gwangbokhoe. First, it is necessary to officially publish and distribute research results. Second, if there are incorrect contents related to Gwangbokhoe in an encyclopedia, they must be corrected through reflecting the latest results of research. Third, geographic research must be conducted. Fourth, more foundational data collection of Gwangbokhoe's figures has to be collected.
Research on individuals involved in Gwangbokhoe has been insufficiently conducted since the established studies, just touching upon the related figures, focused on events or incidents. Currently, the importance of oral data is increasing in academia. Therefore, it is required to re-examine genealogy orinterviews with clans and descendants of Gwangbokhoe members.
Finally, Gwangbokhoe, which has been omitted from a history of the Korean Military, must be included in the history.

1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한양대학교 경희대학교 한국학중앙연구원 원광대학교 인천대학교
 6
 5
 3
 1
 1
  • 1 한양대학교 (6건)
  • 2 경희대학교 (5건)
  • 3 한국학중앙연구원 (3건)
  • 4 원광대학교 (1건)
  • 5 인천대학교 (1건)
  • 6 고려대학교 (1건)
  • 7 충남대학교 (1건)
  • 8 경기대학교 (1건)
  • 9 서울신학대학교 (1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