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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10)~8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49
한국계보연구
8권0호(2018년 1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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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진양하씨(晉陽河氏) 시랑공파(侍郞公派) 상대(上代) 계대(系代)의 고증(考證)과 보완(補完)에 대한 시론(試論)

저자 : 全丙哲 ( Jeon Byeongcheol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7-3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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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晉陽河氏 侍郞公派의 上代 系代에 내재하고 있는 문제를 고찰한 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논지를 전개했다. 진양하씨 시랑공파의 상대 계대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滄洲 河憕이다. 河憕은 족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시조인 平章事 河拱辰의 아래에 河卓回로 계대하는 것은 그릇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오류가 처음으로 생기게 된 까닭은 春亭 卞季良이 浩亭 河崙의 부친인 河允潾의 神道碑를 찬술하면서 先代에 대해 밝혀놓은 내용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河憕은 역사 기록과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河拱辰과 河卓回의 사이를 끊어놓아 후세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河憕이 편찬한 족보는 간행이 되지 않았으며, 1698년에 초안한 『戊寅重修譜』는 이것을 기저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하지만 河卓回를 河拱辰의 아들인 2세로 표기했다. 그러나 河憕의 『滄洲遺事』 권3에 실려 있는 「世系源流」에는 시조 河拱辰에 이어 河則忠-河卓回-河挺才로 계대하고 있으므로, 『무인중수보』와 다르다.
이후 후손들은 족보를 편찬할 적에 河憕의 序文을 수록하여 의문을 전하는 한편, 상대 계대를 보완하지 않고 기존의 계대대로 간행하는 방식을 유지했다. 최근 2015년에 兵判公派의 주도로 간행된 『진양하씨대동보』도 동일한 방식으로 序次되어 있다.
이와 달리 1999년에 간행된 『晉陽河氏判尹公派譜』에는 河憕의 서문에서 제기한 의문과 고증을 바탕으로 새롭게 계대를 보완했다. 하지만 『진양하씨판윤공파보』와 같이 서차하게 되면 河濬이 河則忠의 직계이고 河卓回가 그의 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와 같은 문제로 인해 河濬이 『고려사』에서 河拱辰의 현손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대에 포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譜彙』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譜彙』에서는 河卓回 앞에 '后'라는 글자를 표기하여 그가 河則忠의 직계가 확실하지는 않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방법을 적용한다면, 河濬과 河卓回의 앞에 '后'자를 사용할 경우, 河濬이 河則忠의 직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河拱辰의 현손인 사실은 밝힐 수 있으며, 河濬과 河卓回의 관계도 직계로 확정할 수 없어 서로 계대를 연결하지 못했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This article is purported to contemplate the issues innate to the succession of ancestors for Siranggong Faction of Jinyang Ha Clan and unfold the points of argument in a way of presenting the alternative to resolve the same. The person who first brought up the inquiry regarding the succession of ancestors for Siranggong Faction of Jinyang Ha Clan was Changju Ha Jeong. While the genealogy was reorganizing, Ha Jeong discovered the fact that the succession as the Ha Tak-hoe of the proprietor of Pyeongjangsa Ha Gong-jin as follows would be an error. The reason to have such an error for the first time is attributable to the fact that Chunjeong Byeon Gye-ryang compiled the Sindo-bi (tombstone) of Ha Yun-lin, the father of Hojeong Ha Ryun with the contents depicting the facts of the ancestors.
In light of considering the records in history and other circumstances, Ha Jing thought that it should not interfere with the relationship of Ha Gong-jin and Ha Tak-hoe to cause any confusion to descendents. However, the genealogy that Ha Jing compiled was not published, and Muinjungsubo that was initially drafted in 1698 seemed to be based on the foregoing. However, Ha Tak-hoe was marked as the second generation as the son of Ha Gong-jin. Nonetheless, 「Segyewonryu」 that was on the Volume 3 of Changjuyusa of Ha Jing showed the succession on Ha Chik-chung, Ha Tak-hoe and Ha Jeong-jae following the proprietor Ha Gong-jin that it is different from Muinjungsubo.
Thereafter, when the descendents compiled the genealogy, the inquiry was conveyed by recording the fact on the introduction of Ha Jing without the supplementing the succession of ancestors and maintained the method to publish as in its existing record. In 2015, Jinyang Ha Clan Daedongbo that was published by the initiative of Byeongpangong Faction was ordered in the same method.
Different from the foregoing, the genealogy of Jinyang Ha Clan Panyungong Faction published in 1999 supplemented the new succession on the basis of the inquiry raised in the introduction of Ha Jing and the historical research. However, as in the order for the genealogy of Jinyang Ha Clan Panyungong Faction is placed, it seems like that Ha Jun was in direct descent of Ha Chik-chung and Ha Tak-hoe was his son. Consequently, it has been mentioned that this type of problem was attributable to the fact that Ha Jun to be a descendant of the fourth generation of Ha Gong-jin in the Goryeo history, but it does has an aspect difficult to include it in the succession.
Therefore, as an alternative to resolve this issue, the method used in Bohwi that is kept in the East Asia Library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of the US. In Bohwi, an alphabet of 'Hu' is marked before Ha Tak-hoe in a way of displaying the implication that he was not certain to be the direct descent of Ha Chik-chung. If this method is applied by using the 'Hu' letter before Ha Jun and Ha Tak-hoe, Ha Jun cannot be said as the direct descent of Ha Chik-chung, but it may disclose the fact that he would be a descendant of the fourth generation of Ha Gong-jin, and the relationship of Ha Jun and Ha Tak-hoe would not be finalized as the direct descent that they may break away from the issue of not to connect the succession to each other.

2조선시대 안동 갈전(葛田)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사회적 위상과 향촌활동

저자 : 김명자 ( Kim Myungja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1-6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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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영남은 주로 문중을 단위로 향촌활동이 전개되었다. 문중이 정체성을 어떻게 확보하고 생존을 도모해 나갔는지 구체적인 사례연구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 글은 안동 葛田에 세거하는 순흥안씨가 안동부 풍산현에 정착하여 향촌사족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을 세장으로 나누어 살펴본 것이다. 1장은 순흥안씨가 안동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과 당시의 사회적 위상을 살펴보았다. 2장은 순흥안씨의 世系 정립과 족보 간행 현황을 통해 종법에 대한 실천과 지역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확인하였다. 마지막 장은 순흥안씨의 혼인, 관직 여부, 향촌활동의 모습을 정리하였다.
갈전 순흥안씨 定峯宗宅에서 소장하던 고서 및 성책고문서 1,100여 책과 개별고문서 1,600여점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 중이며, 그 가운데 일부는 1999년에 『古文書集成四十三-安東 葛田 順興安氏篇-』으로 엮어졌다. 여기서는 이들 자료와 『順興安氏第二派族譜』(1999)를 주로 참고하였다.


In Yeongnam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e community activities were mainly performed in the unit of clan. This is the reason why there should be concrete case researches on how a clan secured its identity and promoted the survival. This thesis examined the process for Sunheung Ahn Clan residing in Galjeon, Andong to establish the status of local aristocratic class after being settled down in Pungsan-hyeon of Andong-bu, by dividing it into three chapters. Chapter1 examined the process of Sunheung Ahn Clan's settlement in Andong and the social status of the time. Chapter2 verified the effects on the practice of clan rules and community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family line of Sunheung Ahn Clan and the current publication status of genealogical record. The last chapter arranged the marriage, matter of government post, and the look of community activities of Sunheung Ahn Clan.
Currently, about 1,600 individual ancient documents and about 1,100 old books & tied-ancient documents which used to be possessed by Jeongbongjongtaek of Sunheung Ahn Clan in Galjeon, are stored in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nd, some of them were published as the 『Collection43 of Ancient Documents-Sunheung Ahn Clan of Galjeon in Andong-』 in 1999. This thesis mainly referred to those materials and the 『2nd Genealogical record of Sunheung Ahn Clan』(1999).

317세기 여산(礪山) 송씨(宋氏) 우곡(愚谷) 송량(宋亮)의 가계(家系)와 사회적 위상

저자 : 한희숙 ( Han Heesook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67-10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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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7세기 상주 지역의 향촌 지식인이었던 송량(宋亮)의 가계와 활동을 살펴본 것이다. 송량은 여산(량) 송씨 13대 후손이다. 여산 송씨는 고려시대 진사였던 송유익(宋惟翊)을 시조로 한다. 중시조인 송송례(宋松禮)가 고려 원종 11년에 권신 임유무를 주살하고 왕정을 복고시킨 공으로 여량부원군에 봉해졌고, 그의 두 아들 염(琰)과 분(玢)의 활약으로 여산 송씨는 대성(大姓)이 되었다. 이어 이들의 아들 대를 중심으로 크게 5개의 파로 나뉘어졌다. 송량의 가문은 조선 건국 후 상당한 관직을 역임한 명문이었지만 할아버지 세휘가 연산군대 갑자사화로 인해 관직을 버리고 상주로 내려온 이후 아버지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상주지방에서 활동한 재지 사족이 되었다.
송량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지만 성운(成運)·정국성(鄭國成)·정구(鄭逑)·유성룡(柳成龍)·허후(許厚)·정경세(鄭經世) 등 보은-안동-성주 지역의 매우 명망 있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송량은 학문적으로 성운과 이황의 영향을 받았고, 47세 때 상주 목사로 부임해 온 서애 유성룡을 만나 교류하였다. 그는 학문적 수준은 매우 높았고 충·효의 예절을 생활화하였다. 송량의 효행은 매우 컸고, 그를 본받은 자녀들의 충·효·열은 향촌의 풍속 교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상주가 왜적에게 함락되자 지역 유림들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고, 이후 상주지역의 향풍을 교화하기 위해 솔선수범하였다. 그는 1566년에 노기·정국성·김각 등 16인과 함께 낙사계(洛社稧)를 조직하여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썼고, 1598년에는 우곡정사(愚谷精舍)를 짓고 후진을 가르쳤다. 이후 1606년에는 김각, 정경세, 조정, 이전, 이준, 김광두 등과 합력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설하는데 앞장섰다. 또 임진왜란 뒤 질병에 시달리는 주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김각·김광두·정경세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존애원(存愛院)을 창설하였다. 송량은 일평생 상주에 거주하며 향촌 사회의 교화에 힘썼던 향촌 사족이자 지식인이었다.


This paper is a survey of Song Ryang's lineage and activities, as a Yeosan Songssi's 13th generation, and intellectual in Sangju area. Yu-Ig was a progenitor of Yeosan Songssi and he was a Jinsa in the Goryeo period. Song Rey killed Lim Yu Mu, and re-established Royal, and he was invested Yeorayng Buwongun with recognized as a contribute Royal, as his two sons Yem and Bun, and with their big activities, Song's family had become great family name. And they had been divided into five groups, focusing on Yem and Bun's sons. Song Ryang's family was famous and their many peoples had worked at public service. However, since his grandfather, Se Hui gave up his office by Gabja Sawhoa. he came to Sangju area, and he lived there, also his father did not go to office. Song Ryang did not go office. But Song Ryang had interacted with Seong woon, Jeung Gook Seung, Jeung Gu, Yoo Sung Ryong, Jeung kyung Se etc, who were highly respected scholars in the province of Andong, Boun, and Seungju. Song Ryang was influenced academically by Seong woon and Lee Whoang
Song Ryang interacted with the Yoo Sung Ryong who came to work as a mayor of SangJu. He was excellent in his studies as well as had a good manners and loyalty. His loyalty was great and his sons and daughters had learned it from him, therefore his children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folk customs of the village. In 1592, SangJu fell into the Japan, he fought with the local confucian against Japan. He took the initiative to teach the moral soul and manner to local peoples. In 1566, he organized the Naksagei, including No Gi, and Kim Gak etc, total 16 peoples together, and he also worked hard to rehabilitate the culture custom. Also, in 1598, he built a Woogok- Jeungsa, and taught the upcoming generation.
After in 1606, he had helped to establish the Donam Seowon with Kim Gak, Jeung Kyung Se, and Kim Kwang Doo. In order to treat the suffering residents from the disease after Japanese Invasion war in 1592, and he established Joneiwon with Kim Kwang Doo, Chung Kyung Se and many peoples. He lived in Sangju for a life time as a confucian and intellectual, and worked hard on edify a society.

4『진주류씨족보』의 간행과 그 성격

저자 : 이상규 ( Lee Sangkyu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09-1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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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류씨는 고려 말에 생겨난 본관이다. 이 본관은 문화류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러한 사실이 기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세종 연간의 『문화류씨영락보가첩』, 명종 연간의 『문화류씨가정보』에도 상대 기록이 또다른 진주유씨 가계와 혼동이 된 채로 기재되었다. 선조 연간에 류사규는 안간공파보를 편성하면서 토성파와 이봉파의 상대 계보에 대하여 의문스러운 점을 지적하였다. 인조 연간에 류시정은 이봉파와 토성파가 분관된 현실을 인정하고 별도로 족보 편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1세대 뒤에 영광군사파 9대손 류동량은 진주 류씨가 관직자를 많이 배출한 명족임을 드러내 계보를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봉파 진주류씨의 초간보는 1756년에 진사 류필복이 주도하여 간행되었다. 초간보 속에 「보계변증록」이 들어 있어 이봉/토성의 분파 문제와 상대 기록을 수집하고 변증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사실이 남김없이 수록되었다.


The Jinju Ryu family originated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This clan was an offshoot of the Munhwa Ryu family. However, this is not based on factual records, but was passed down orally and therefore, it is mixed up with another Jinju Yu family in the Chronicles of Sejong 'Munhywa Ryu-ssi Yeongnakbogacheop' and the Chronicles of Myeongjong 'Munhwa Ryu-ssi Gajeongbo'.
In the Chronicles of Seonjo, Ryu Sa-gyu pointed out some discrepancies in the family tree of the Toseong clan and Ibong clan while compiling the Anganggong clan family tree.
In the Chronicles of Injo, Ryu Shi-jeong accepted the fact that the Ibong clan and Toseong clan separated and claimed that the family tree should be compiled separately.
Yeonggwanggunsa clan 9th generation Ryu Dong-ryang attempted to substantiate the family tree showing that the Jinju Ryu clan was a prestigious family that had many senior government officials.
The initial family tree of the Ibong clan Jinju Ryu family was published by Jinsa Ryu Pil-bok in 1756.
The initial family tree contains the 'bogye-byeonjeungrok' clearly showing that efforts were made to collect and demonstrate the issues of the separation of the Ibong and Toseong clans and their records.

5조선시대 진주유씨 경성당 가문의 정치적 위상

저자 : 정해득 ( Chung Haideuk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39-17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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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제9왕녀인 貞正翁主(1595~1666)가 진주유씨 柳頔(1595~1619)에게 下嫁하였다. 晉安尉 유적은 1618년(광해군 10) 인목 대비의 폐모를 주청하는 庭請에 참여하지 않다가 이듬해 25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죽었다.
인조는 潛邸에 있을 때부터 정정옹주의 집을 자주 찾아갔었고 즉위한 이후에도 정정옹주를 잘 보살폈다. 옹주는 조카 柳命全(1628~1664)을 입후시켰고 그의 형제들이 관직에 나가 출세할 수 있었다. 유명전은 본가의 아우들과 열심히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15세에 봉사손이 된 유재는 남인의 거두인 閔點(1614~1680)의 딸과 혼인하였다. 또 인평대군의 세 아들과 허적의 서자 許堅(1646~1680) 등과 친교를 맺었다. 그 이후 叔父들이 문과에 급제하고 요직을 맡아 활약 하였다. 경신환국으로 정치적 상처를 입은 경성당 가문은 기사환국이 후 吏曹를 장악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갑술환국 이후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더구나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유명현의 아들이 연루되어 죽은 뒤에는 재기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 이후 경성당 가문은 안산으로 이거하여 남인들과 교류를 이어나갔다. 정정옹주와 진안위의 봉사손을 이어나가는 문제가 조정에서 거론된 것은 부마를 배출한 경성당가문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추진할 때 의빈출신 남인 가문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Princess Jeongjeong, the 9th daughter of King Seonjo, married Jinju Yujeog[柳頔 1595-1619]. He did not participate in the purge of human waste process in 1618, and died the following year at the young age of 25. King Injo often visited Princess Jeongjeong's house from the time he was in Jamjeo[潛邸], and after he took the throne good care of her even. Ongju was adopt a child Yumeongjeon[柳命全 1628~1664]. And his brothers were able to rise in the world. Yumeongjeon studied hard with her brothers at home and was admitted to the liberal arts department, but died early.
Yu-jae, who became a volunteer at the age of 15, married the daughter of a great man, Minjeom[閔點 1614~1680]. The three sons of the Royal Prince Inpeong and Heojeog's the son of a concubine Heogyun[許堅 1646~1680] have formed a friendship with them. Since then, they have been assigned to a liberal arts major. In 1680, the GyeongseongDang's family, which suffered political damage, took control of the group since 1689, but in 1694 then it fell politically.
Moreover, it became difficult to revive after the death of the son of Yumeonghyun[柳命賢] due to his involvement in the fire of Lee In jwa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Since then, the GyeongseongDang family has done this in Ansan. And they continued his dealings with NamIn[南人]. The fact that the adjustment raised the issue of continuing the service of Princess Jeongjeong and the Jinan Committee shows the status of the GyeongseongDang family that produced the princess' husband. When Yeongjo and Jeongjo pushed for Tangpyeong, they needed to play the role of NamIn, who was from Ui-bin[儀賓].

617세기 반남(潘南) 박씨(朴氏) 족보의 편찬과 그 동학(動學)-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 후손의 활동을 중심으로-

저자 : 정호훈 ( Jeong Hohun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73-221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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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편찬은 어느 경우든, 이 자료를 통하여 가문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문을 결집하고자 하는 의도가 가로놓여 있었다.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족보 편찬은 가문의 규모와 位格을 세상에 크게 알리고 드러내는 활동이기도 했다. 17세기 중·후반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반남 박씨 가문의 족보 편찬 과정은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족보를 편찬하며 반남 박씨 가문에서는 가문의 사회·정치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줄기차게 벌이고 그것을 어느 정도 구현했다. 이와 연관하여 가장 공을 들인 일은 가문의 顯祖를 정치 사회적으로 顯彰하는 일이었다. 17세기 시점에서 반남 박씨 가문의 구성원 중에는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는 인물도 있었지만, 그들은 확보하고 있었던 관계망을 최대한 활용하며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
고려 말의 朴尙衷은 '尊王攘夷'의 시대정신과 연관하며, 조선 전기의 朴紹는 己卯士林을 현창하려는 정치계의 의식과 맞물리며 새롭게 주목 받고 재평가되었다. 이때 이 일은 17세기 후반, 박동량의 손자인 朴世采가 주도하게 되는데, 박세채는 송시열, 남구만 등의 힘을 빌려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반남 박씨 가문은 이후로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 추구해야 할 國是, 사상적 지향을 이미 가문의 선조가 구현했던 일만큼 영광스러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In this article, I looked at the situation in which the genealogy of Ban-nam Park were compiled and published twice during the middle and the late 17th century through the movements inside and outside the family gate.
In compiling the genealogy, the family of Ban-nam Park, made an effort to secure the social and political status of the family and implemented it to some extent. In this regard, the most accomplished work was to honor and celebrate the father of the family in political and social terms.
The politician at the end of the Goryeo era, Park Sang-chung(朴尙衷), was evaluated as a practitioner of 'a spirit of exalting China and rejecting the barbarians', and Park So(朴紹), a scholar of the Joseon dynasty, received new attention as an excellent New Confucian.
At this time, this work was led by Park Se-che(朴世采), and Park Se-che was able to accomplish this by borrowing the power of Song Si-yeol(宋時烈). It seems thatBannampak family was able to have great power after this date.

7『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김사성씨고(金史姓氏考)」의 만주어(滿洲語) 복원(復元)

저자 : 沈永煥 ( Sim Younghwang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25-25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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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滿洲源流考』 「金史姓氏考」에 등장하는 만주어 성씨를 만주어로 복원하였다. 복원에는 『遼金元三史國語解』(1782)를 이용하였다. 이 책의 표제어가 만주어로 되어 있고, 특히 『금사』의 용어는 청대의 만주어와 연결되기 때문에 재구가 용이하였다. 복원에는 먼저 『金史』 「百官志」에 나오는 姓氏를 참고하였다. 『만주원류고』와 비교하는 과정에서 漢字(중국어)의 字面은 달라도 뜻이 같은 만주어 단어를 『금사』는 별개의 단어로 간주하여 수록하였고, 『만주원류고』는 수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금사』의 편찬 과정에서 한자만을 매개로 하여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마지막으로 『金史』 「金國語解」 姓氏條에 나오는 만주어를 새롭게 정리하였다. 이는 만주어가 漢姓(중국어 성씨)으로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피는 데 있어서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This article reconstructs ninety-five Manchu surnames from the chapter “Research of Surnames of The Official History of the Jin (Jinshi xingshi kao 金史姓氏考)” from Researches on Manchu Origins (Manzhou yuanliu kao 滿洲源流考). In the process, I have consulted the Dynastic Language Glossaries in the Liao, Jin and Yuan Histories (Liaojinyuan sanshi guoyu jie 遼金元三十國語解, hereby Glossaries). As the Glossaries is written in Manchu, and the vocabulary in the Official History of the Jin is closely related to Manchu words of the Qing dynasty, the reconstruction process was relatively straightforward. When comparing the two sources and compiling the list, Manchu words with the same meaning but written in different Chinese characters were listed as separated words, and I have noted that these words were not originally included in the Researches on Manchu Origins. The existence of these words reflects that the compilation of the Official History of Jin was based only on Chinese characters. Finally, I have reconstructed all of the Manchu words included in the “Section of Surnames” in the chapter of “Translation of Dynastic Language” in the Official History of the Jin. This is an invaluable source that will contribute to future research on tracing the transformation of Manchu surnames into Chinese surnames.

8조선초기 김종순(金從舜)의 정치적 성장과 경주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의 형성

저자 : 나영훈 ( Na Younghun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57-29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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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계림군파는 고려초 장군공 김순웅을 派祖로 하는 일파로,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계림군에 봉해진 김균을 中始祖로 한다. 특히 중시조 김균의 손자인 김종순부터 그 직계 후손이 조선조에 현달한 인재가 많았다. 따라서 조선조 계림군파 家格의 형성을 김종순을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장에서는 우선 김종순의 가계와 선대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김종순은 조부인 개국공신 김균과 외조인 효자 이정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공신 김균에게는 조선과 군주에 대한 충심을, 효자였던 외조 이정간에게는 효심을 몸소 체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충효를 두루 갖춘 가문의 영향을 받은 김종순은 부친이 白身으로 관직생활에 나아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역량으로 관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3장에서는 김종순이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을 당대 정치 현실과 김종순의 선택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김종순은 공신의 아들이자 문과 출신으로 '청요직'의 관로를 영위할 수 있었으나, 부사직 이보흠의 인사 문제에 연루되어 세종조에 오랜 기간 관로가 막혔다. 결국 단종대에 와서야 관로에 나아갈 수 있었는데, 이때 權擥 등과의 인연으로 首陽大君과 가까워지며 계유정난 이후의 정국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 즉 세조의 정권을 안정화하는데 대간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금성대군, 송현수 등 세조에 적대적이었던 인물의 탄핵과 사형을 이끌어 내며 세조 정권 안정에 기여한 공로로 당상관에 오를 수 있었다.
4장에서는 김종순이 당상관에 오른 이후, 오랜 기간 승지를 역임하며 조선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한 세조를 도와 사회경제적인 여러 국가정책에 기여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김종순은 세조 집권 중반부터 3년간 승지를 역임하며, 良役 충원을 위한 호적 정책과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방의 안정화를 위한 사민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세조 당대의 주요한 사회경제 정책으로, 김종순이 여기에 깊이 개입하여 차후 조선의 국가적 정립에 기여하였다. 승지 이후로는 경기도 관찰사와 한성부윤 등의 핵심적인 外任을 수행하며, 이때의 검소한 官衙 운영으로 淸白吏에 선정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순은 세조의 측근으로서 세조가 사망한 이후 예종과 성종을 섬겼으나 노령의 나이로 인해 예우직인 중추원에 머무르다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5장에서는 김종순의 자손들을 통해, 김종순 이후 계림군파의 성장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다. 김종순은 4명의 아들 가운데 2명이 문과에 급제하여 文名을 떨쳤고, 특히 손자들 가운데 김천령, 김인령, 김영수, 김숭연 등이 갑자사화와 기묘사화의 被禍人으로서 사림의 기치를 높였다. 이들의 희생으로 그 후손들은 더욱 용이한 관료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천령의 아들 김만균으로부터는 2대를 넘지 않고 당상관을 배출하여 조선후기 명문으로서 확고히 안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명문의 하나로서, 경주김씨 계림군파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시조 김균의 손자였던 김종순의 정치적 성장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KyoungJu Kim's Family(慶州金氏) Gyeorimgunpa(鷄林君派) is a group of people who believed to be the founder of KimGyun(金稛), who was sealed in GyerimGun(鷄林君) by founder of the Joseon Dynasty. In particular, KimGyun's grandson Kim Jong-soon(金從舜) and his immediate descendants had many successes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focus on the formation of Kim Jong-soon(金從舜), a member of the Gyeorimgunpa Family,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chapter II, I looked at Kim Jong-soon(金從舜)'s family and fleet. Kim Jong-sun appears to have been greatly influenced by his grandfather, KimGyun, and his maternal grandfather Lee Jung-gan(李貞幹).
In chapter III, I was able to find out why Kim Jong-soon was able to grow politically through the political realities of his time and his choices. Kim Jong-soon was involved in Lee Bo-heum's request for personnel management, which prevented him from holding office for a long time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Eventually, It was not until the end of King Danjong's reign that he was able to move to government office that became close to the Suyangdaegun(首陽大君) and grew politically in the post-KyeYujeong(癸酉靖難).
In Chapter IV, Kim Jong-soon was able to see his long-term success in office, helping King Sejo to contribute to various national policies. Kim Jong-soon, who served as a Seungji(承旨) for three years from the middle of the reign of King Sejo, actively participated in policies for raising taxes and policies for the migration of people to stabilize the North, including Hamgyeong Province(咸鏡道) and Pyongan Province(平安道).
In chapter V, I can see the growth of the Gyerimgunpa after Kim Jong-soon, a descendant of Kim Jong-soon. Kim Jong-soon's four sons became famous for having graduated from the Mungwa(文科), and especially from the descendants of his grandson, Kim Cheon-ryeong(金天齡), produced Dangsangwan(堂上官) almost continuously to secure his footing as a master of the late Joseon Dynasty.

9거창군 북상면 영모재(永慕齋)의 특징과 계보학

저자 : 金鍾秀 ( Kim Jongsoo )

발행기관 : 한국계보연구회 간행물 : 한국계보연구 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97-32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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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의 중산마을에 위치한 영모재는 타지인 이 곳으로 이거를 단행한 경주정씨 문중의 정우신을 추모하기 위해 중수한 추모·제례 공간이다. 정우신은 본향인 경기도 파주에서 타향인 옛 안의 현으로 전격적인 이주를 단행한 입향조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런 정우신이 타계한 이후에 후손들에 의해 입향조를 전면에 내세운 재실 영건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이번의 연구에서는 가칭 피화형 이주로 분류되는 정우신의 이거 경위와 함께, 몇 번에 걸쳐 영건된 재실의 이면사들을 면밀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정우신을 주인공으로 삼는 영모재가 읍지류에서 '묘각(墓閣)'조로 분류된 사실을 집중적으로 규명하였다. 묘소와 재각을 합성한 조어인 '묘각'은 이른바 '수호지제(守護之制)' 의 차원에서 재실의 기능을 규정한 결과를 반영해 준다. 이는 「학교」조로 범주화된 소위 재실형 서당과는 판이한 분류 기준으로, 재실이 수행한 다양한 기능의 일면을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에 추가하여 영모재는 종법제도상의 소종의 이념을 재실 건립을 통해 구현해 보인 점도 주목된다.
한편 금번 논의에서는 가칭 '재실의 사회사'라는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적용하였다. 이 방법론은 재실에 가설된 재기·상량문과 같은 기문과 주련·액호·판상시 등과 같이 고문헌에 준하는 자료들을 대상으로 한 면밀한 내용 분석을 통한 인문·사회과학적 방법을 일컫는다. 이는 조경학적·건축학적 차원의 연구에 국한되었던 기존의 연구 성과들에 대해 방법론적 각성의 의미를 지닌다. 그 결과 이번의 논의가 유교의 문화·제도사 방면에서 미개척 분야와 다를 바가 없는 재실 연구의 장도에 유의미한 계기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


Yeongmojae situated at Jungsan village(中山洞), Buksang-myoen, Geochang-gun is a rebuilt memorial service site in tribute to Bukje(北齊) Jeong-usin(鄭禹臣) the first ancestor(入鄕祖) of Gyeongju Jeong family(慶州鄭氏) who moved to Jungsan village away from paju(坡州) home. So after his death, his descendants, as a guardian of grave(守護墓), began to build a memorial service site in honor of him.
This study, along with details of his move that could be interpreted as an attempt to avoid misfortunes(避禍), examined the stories behind twice-built construction of the memorial service site from the perspective of 'social culture of memorial service sites'. This methodology underwent the process of deciphering materials such as historical records(記文) and poems shown on tablets in front of the building(板上詩), which would form culture of memorial service site. As a result, the study is expected to improve the existing research trend just limited to the level of architecture and landscape.
In case of Yeongmojae maintained by the settling family group, it showcased the upgrade of culture of memorial service site. Behind the rebuilding of Yeongmojae by fourth-generation descendants(玄孫) of great-great-grandfather(高祖父) Jeong-usin was an ideology of clan rule system to firmly(宗法制) set up branched-off minor family groups(小宗) from the mainst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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