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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update

The Oriental Studies , Dong Yang Hak

  •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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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9-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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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69권0호(2017)~81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05
동양학
81권0호(2020년 10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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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창헌(蒼軒) 조우각(趙宇慤)의 <대명복수가> 연구

저자 : 김수현 ( Kim¸ Su-hyun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6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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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趙宇慤이 지은 가사 <대명복수가>에 대한 연구로서, 조우각의 생애, 본 작품의 창작 배경을 밝히고 한글본의 특징을 학계에 보고함을 목적으로 한다. 조우각은 영남의 문인으로 갈암 이현일을 사숙한 퇴계학파의 문인이다. 李玄逸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가 중국에서 패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로 명나라의 부활을 소망하며 「山東檄文」을 지었다. 조우각은 이 글을 접하고 200년이 지난 시대상황에서 <대명복수가>를 지어 마치 병자호란 직후의 분개한 선비처럼 강개한 심정을 쏟아내었다. 이는 퇴계학파의 학풍과도 관계되는 것으로서 주리론을 강화하며 의리를 숭상하는 전통이, 북벌이라는 소재로 조우각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본 연구는 그동안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한글본 <대명복수가>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기존의 연구에서는 밝히지 못했던 작가의식이 구현되는 양상을 파악하였다. 이를 위해 작가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였고, 여러 이본과 비교하여 한글본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특히 필사자를 여성으로 추정하면서 한문 고사가 매우 많은 본 작품을 필사하여 향유한 점을 미루어, 매우 광범위하게 향유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필사한 표기법을 연구한 결과 한문의 발음이 온전하게 기록되지 않은 점으로 봐서 구전되는 것을 적었을 것이라 판단할 수 있었다.


This study is about Gasa < Daemyung-boksooga > which Cho woo Gak wrote, have purpose such as reaching Cho woo Gak's life and creative background, academic reporting of Korean version's peculiarity. Cho woo Gak was a writer of letters in the Gyeongsang Province who study from Galam Lee Hyoen Il, scholars of Toigye. Lee Hyoen Il wrote 「Sandong- Proklamation」 with wishing resurrection of the Ming Dynasty after Qing Dynasty Convicts China's hegemony. Cho woo Gak read this work and a couple of hundred years later, wrote < Daemyung-boksooga > venting his anger just like an indignant scholar right after the Manchu Invasion of Korea. This have relation with the Toegye school tradition which strengthen one's argument and justice stretch to Cho woo Gak with an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This study research Korean version < Daemyung-boksooga > that is not reported to the academic circles, and figure out the aspect of the writer's consciousness being realized which never been able to study in existing research. For that, this study search and analyze various data about tracing the author's thoughts and establish Korean version's peculiarity by textual bibliography. Especiall it could be guessed < Daemyungboksooga > to be widely enjoyed, from point of view which an examination of Chinese characters were very numerous. By result of a research about transcribed notation, Chinese character's pronounce was not recorded intact. This is proof that the speech were written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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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연의 침공을 받아 서부 지역 2,000여 리를 상실하고 만반한까지 패퇴하였다. 따라서 2,000여 리의 실상과 범위는 고조선의 강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쟁 당시 2,000여 리는 도보에 의한 이동 거리로 이해할 수 있다. 2,000여 리는 전국 시대 이정으로 보이며 약 748㎞로 환산되었다. 기점은 2,000여 리가 고조선의 서부 강역이므로 고조선과 연의 접경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랴오닝과 허베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고조선과 연은 대략 서기전 4세기 무렵 롼허 유역에서 접경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2,000여 리의 기점은 대개롼허로 상정할 수 있다.
개전 직전 연은 내전과 외침으로 인해 망국의 위기를 겪고 국가 체제가 붕괴되었다. 때문에 롼허 중·하류유역 대부분은 고조선의 정치·군사적 세력권 내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연은 고조선의 감시가 미치는 롼허 유역이 아닌 구베이커우를 통한 산악 통로를 따라 우회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연군의 주요 행군 경로는 롼허를 도하하여 다링허를 따라 전진하다가 이우뤼산에서 북으로 우회하여 요동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 당시 현 요하 하류 지역은 현재보다 해안선이 내륙 쪽으로 북상하고 그 북쪽으로 광대한 소택 지역이 펼쳐져 있어 이우뤼산 남쪽으로의 이동은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기점인 롼허에서 행군 경로를 따라 약 2,000여 리를 이동하면 랴오양 부근에 도달한다. 요컨대 2,000여 리의 지리적 범위는 롼허 유역~요하 평원이며 이 지역이 곧 고조선의 서부 강역이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2,000여 리의 종점인 만반한은 요하 평원을 크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About the beginning of the 3rd century BC, according to Weilue Gojoseon was retreated after losing more than 2,000 lis to the Yan. About 2,300 years ago, the exact distance between two distant points was unknown, over 2,000 lis are assumed to be walking distances. Over 2,000 lis are understood as milestones of the Warring States period and convert to about 750 kilometers.
According to the record that the starting point of over 2,000 lis was the western part of Gojoseon, it was considered as the border area between Gojoseon and Yan. The border area between Gojoseon and Yan is presumed to be the Luanhe basin.
At that time, the march route of Yan's army seems to have departed Yanxiadu, left Gubeikou, passed Pingchuan, followed from Luanhe to Dalinghe, and headed north along Yiwulushan to Fuxin, Zhangwu, etc. to enter Liaodong. At the time of the war, the lower shore of Liaohe had a coastline rising to the north, and a vast swamp spread over it. Therefore, it was impossible to move to the south of Yiwulushan.
In short, the walking distance from Luanhe, the starting point, to liaoyang is more than 2,000 lis. In conclusion, the over 2,000 lis lost by Gojoseon ranged from Luanhe basin to Liaohe plain. And over 2,000 lis can be said to be the western territory of Gojoseon. These conclusions can be seen as proof of the credibility of the Wei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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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삼국사기』 신라 인물 열전의 원전과 편찬

저자 : 전덕재 ( 38)jeon¸ Deogjae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7-6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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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삼국사기』 신라 인물 열전의 원전과 찬술에 대해 살핀 것이다. 거도열전과 이사부열전 전체 혹은 일부 기록의 원전은 『鷄林雜傳』에 전하는 기록이었고, 百結先生列傳의 원전은 『樂本』에 전하는 기록 또는 이에 기초하여 새로 정리한 전승자료였다고 보인다. 上古期의 인물인 昔于老·勿稽子·朴堤上列傳의 원전은 『國史』의 찬자가 참조한 전승자료와 계통이 다른 별도의 전승자료였다. 사다함과 관창, 김흠운열전의 원전은 『花郎世記』, 비녕자열전의 원전은 金庾信行錄에 전하는 기록이었으며, 이외의 중고기 신라 인물의 열전은 각 인물의 행적을 정리한 전승자료였다. 『삼국사기』 본기의 찬자는 신라본기를 찬술하면서 중고기 인물의 열전이나 이들 원전에 전하는 기록을 축약하거나 일부 내용만을 발췌하여 添入하였음에 반하여, 열전의 찬자는 열전을 찬술할 때에 신라본기에 전하는 기록을 적극 참조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의 찬자는 설총열전은 金大問의 『鷄林雜傳』, 설총과 그의 아들 薛仲業 관련 전승자료를 참조하여 찬술하였고, 최치원열전을 찬술할 때에 국내의 최치원 관련 전승자료와 上太師侍中狀, 『新唐書』 藝文志 등에 전하는 최치원 관련 기록을 두루 참조하였다. 張保皐列傳은 杜牧의 『樊川文集』에 전하는 張保皐鄭年傳을 주요 저본으로 삼고, 『신당서』 신라전에 전하는 장보고 관련 기록을 참조하여 찬술하였다. 이밖에 강수를 비롯한 나머지 중·하대 인물 열전의 원전은 개별 인물의 행적을 정리한 전승자료였는데, 이 가운데 김인문과 김양열전의 원전은 行狀의 성격을 지닌 전승자료였음이 주목된다. 『삼국사기』 열전의 찬자는 중·하대 인물의 열전이나 이들 원전의 기록을 거의 참조하지 않고 신라본기를 찬술하였고, 비록 신라본기에 어떤 인물의 행적이 전하더라도 신라본기의 기록을 저본으로 삼아 그를 열전에 入傳하지 않았다.


This paper examines the original texts and compilation of Silla figures's Biography(Yeoljeon) in Samguksagi. The Geodo-Yeoljeon and entire or part of the records of Isabu-Yeoljeon were originally from Gyelimjabjeon(鷄林雜傳), while the records of Baekgyeolseonsaeng-Yeoljeon seem to had been newly compiled based on the records of Akbon(樂本). Further, the biographies of Seokuro·Mulgyeoja·Park Jesang, who lived in the Early Ancient Period(上古期), were based on the sources of roots different from ones that the compiler of Guksa(國史) referred to. The original texts of Sadaham·Gwanchang·Kimheumoon-Yeoljeon were originally from Hwarangsegi(花郞世記), Binnyeongja-Yeoljeon from Kimyusin-Haengrok(金庾信行錄), and the biographies of other people, lived in the Middle Ancient Period, originated from the passed down materials that compiled each person's life. While the authors of Samguksagi Bongi wrote the book by summarizing or making excerpts from these original texts or biographies, they did not actively utilize the records from Sillabongi(新羅本紀) when they were compiling Yeoljeon. The authors of Samguksagi Biography wrote Seolchong-Yeoljeon by referring to Kim Daemun's Gyelimjabjeon along with the passed on materials about Seol Chong and his son Seol Jungeop. When they were compiling Choichiwon-Yeoljeon, they utilized domestic and international records related to Choi Chiwon like Sangtaesasijungjang(上太師侍中狀), or Yemunji(藝文志) in Xintangshu. The author of Samguksagi Biography wrote the Jangbogo-Yeoljeon from Beoncheonmunjip(樊川文集) as its original texts, and also referred to the records related to Jang Bogo in Xintangshu. In addition, Kangsoo-Yeoljeon and the rest of the characters, who lived in the Mid-Later Silla Period, were written with passed down records compiling each person's life as its original texts. It should be noted that the original texts of Kiminmun·Kimyang-Yeoljeon were passed down records which had features of haengjang(行狀: records of a dead person's life). In writing Sillabongi the authors of Samguksagi barely had not been utilized Yeoljeon of characters lived in the Mid-Later Silla Period or itsoriginal texts. Further, even when a person's life was described in detail in Sillabongi, the authors of Biography did not resister the person in Yeoljeon, based on the records of Sillabo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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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초기 고구려의 기층문화 연구③:통화(通化) 만발발자(萬發撥子) 유적의 무덤

저자 : 하문식 ( Ha¸ Moonsig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5-9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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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만발발자 유적은 혼강 상류에 위치하며,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조사가 진행되어 왔다. 이 유적은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발굴조사되어 신석기 후기의 집터를 비롯하여 청동기~초기 고구려 시기에 이르는 무덤, 재구덩이, 구상 유구, 환호 시설과 토기, 석기, 뼈연모, 청동기와 철기 등 많은 유구와 유물이 찾아졌다.
이 글은 만발발자 유적에서 조사된 움무덤, 돌덧널무덤, 고인돌(개석식과 적석형), 돌무지무덤(단 없는, 3단) 등 41기에 대한 분석 결과이다.
만발발자 유적은 구릉의 능선에 따라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지는데 동쪽에서는 무덤이, 서쪽에서는 집터와 재구덩이 등 생활 유적이 조성된 것으로 밝혀져 당시에 이미 공간 분할의 개념이 있었던 것 같다. 무덤의 조성과정을 보면 낮은 지대의 움무덤부터 점차 높은 곳으로 갈수록 돌덧널무덤, 고인돌, 돌무지무덤이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무덤의 구조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이른 시기의 돌덧널무덤은 모난돌을 사용하여 무덤방의 벽체를 단순하게 만들었지만 점차 판자돌을 이용하였는데 이러한 축조 방법은 다음 시기의 개석식 고인돌로 발전되어가는 연속 과정으로 추론된다. 돌덧널무덤과 고인돌에서는 딸린방이 조사되었는데 이것은 껴묻거리를 부장하기 위한 공간으로 보이며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을 이해할 수 있다.
움무덤에서는 묻힌 사람의 머리뼈가 없는 것이 조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가 복합사회 단계였기 때문에 갈등 관계에 따른 전쟁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묻는 방법에서는 어울무덤인(20호, 34호) 경우 묻힌 사람이 얼굴을 서로 마주보는 특이한 것도 확인되었다. 여러 사람을 여러 차례 묻기 한 움무덤(21호)과 돌덧널무덤(36호)은 핏줄을 매개로 한 가족 구성원이 한 곳에 묻힌 집단무덤으로 해석되며, 신빈 용두산과 구태 관마산 무덤과 비교된다.
만발발자 유적에서는 움무덤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에서 화장 행위가 조사되었다. 몇몇 무덤에서는 무덤방안에서 화장한 제자리 화장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제자리 화장의 장례습속은 길림 남부의 합달령 지역 고인돌, 태자하 유역의 동굴무덤과 고인돌에서도 조사되고 있어 서로 비교된다. 이러한 묻기는 뼈의 보존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화장은 동북지역에서 청동기시대가 되면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오다가 만발발자 유적이 자리한 혼강 유역의 무덤에서는 중요한 매장 행위로 유행한다. 이것은 초기 고구려의 장례습속인 훼기 습속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The site of Tonghua Wanfabozi are located in the upper valley of Hunjiang. As the result of excavation, coffin tombs, stone lined tombs, dolmens, and stone mound tombs dating from the Bronze Age to early Goguryeo were excavated. This site was divided into the living space where the ruins of the houses were excavated and the tomb space where people were buried at that time. Looking at the process of constructing the tombs, the coffin tombs were built in the lower area in the early days, and the stone lined tombs, the dolmens, and the stone mound tombs were built gradually toward the higher places.
It was found that there were no head bones among the coffin tombs, which is believed to be due to the war because the society at the time was in a chiefdom society. The coffin tombs, which buried several people several times, and the stone lined tombs, appear to be a group tomb where family members are buried in one place.
Meanwhile, other stone tombs, except for the coffin tombs, were found to be buried through cremation. In some tombs, in situ cremation was found inside the grave pit. These burial customs were also investigated in dolmens in Hadaling area in the southern Jilin, cave graves and dolmens in the Taizihe basin, and the stone graves in Liaonan region. These burial practices among them are compared and researched. The subordinate coffin, which can be interpreted as a space for funerary objects, was found in the stone lined tombs and dolmens.
The orientation of the head of a person buried in several tombs in the site of Wanfabozi was determined according to the surrounding natural topography. Among the funerary objects were small potteries that appeared to be the mortuary gifts for being buried and those showing the formality of potteries of the early Goguryeo. More than 200 bone arrowheads were excavated from No. 21 coffin tomb, regardless of gender or age. This has to do with people's belief of afterlife at that time. Transformed-type bronze daggers, which are mainly found in the middle andlower reaches of the Yalu River, have been excavated. They are helpful in understanding the succession relationship between Gojoseon and early Goguryeo.
The materials excavated from the tombs of Wanfabozi site are important for understanding the basic culture of early Gogu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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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불교와 기독교 초기 미술에 나타난 붓다와 하나님의 상징표현 중 '붓다의 발자국'과 '하나님의 손'에 주목하여 두 상징물에 투영된 종교적 상징성을 고찰했다. 먼저 Ⅱ·Ⅲ장에서 미술로 표현된 불족적과 하나님 손의 의미와 역할을 살펴봤다. 붓다의 발자국은 2C BC.~AD 3C 인도 스투파에 경전의 일화를 배경으로 한 쌍 혹은 한 발로 묘사된다. 화면 속에서 예경을 받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맥락에 따라 그 의미를 이동·여정, 정신·육체적 완성의 경지, 위대한 인물의 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세분했다. 경전의 일화에서 독립된 불족적도 제작돼 불족적 자체를 숭배한 신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반면, 십자가에 앞서 하나님의 상징으로 사용된 하나의 손은 4~6C 로마의 장례용 석관과 성당 모자이크화에 구원과 관련된 성서의 특정 일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항상 화면의 위쪽에 한 손으로 묘사된다. 화면 속에서 숭배되는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는데, 맥락에 따라 구원의 주체로서의 권능, 그리스도·성인·왕에게 권위를 보증하는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분류했다. Ⅳ장에서는두 상징의 함의를 도출하기 위해 양 미술사에서 붓다와 하나님을 상징으로 표현한 맥락, 형상화에 대한 경전의 금제, 족적과 손이 경전에 서술된 방식을 조명했다. 그리고 족적과 손의 화면상 위치 및 위상을 붓다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관련지었다. 전자는 깨달은 자의 불성과 인성을 본질 면에서 不二로 보고, 후자는 창조주의 신성과 피조물의 인성을 엄격히 구분한다. 이러한 인식이 미술에 투영됨으로써, 먼 곳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중생의 행복을 위해 직접 맨발로 걷는 부처님을 전제로 한 족적은 화면에 조각되는 위치가 고정적이지 않고 화면 속 등장인물에게 극진한 예경을 받는다. 반면 하나님께서 손가락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계시는 것으로 시각화되지만, 하나님의 손은 위치가 항상 하늘에 고정됨으로써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극과 위계를 현시한다. 비록 가까운 거리에서 편안하게 대면할 수 있는 신으로 모시지 않았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늘에서 뻗는 하나님의 손을 가시화하여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붓다의 족적과 하나님의 손은 붓다와 하나님의 속성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고, 양 종교의 가치관과 부합하는 덕분에 붓다와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장기간 활용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This writing contemplated the religious sensibility that is reflected in two symbols by focusing on Buddha's footprint and God's hand among symbolic expressions shown in the earliest buddhist and christian art. First of all, in chapter Ⅱ and Ⅲ, we examined the symbol of Buddha's footprint and the role of God's hand expressed by the art. Buddha's footprint was described as one pair or one foot with a background of sacred book's anecdote in Indian stupa from 2C BC to AD 3C. It is expressed as the image of getting worship in the screen, and it symbolizes migration·travel, stage of mental·physical completion, and great man's lucky omen depending on the context. As the independent footprint was produced in the anecdote, we could get a sense of the first degree of religion that worshiped the symbol of Buddha itself. On the other hand, God's hand established an intimate relation with a sarcophagus for funeral in Rome between 4C and 6C and Bible's particular anecdote related to the salvation on mosaic in Catholic church, and it was always described as one hand on the top of the screen. It symbolizes the powerful authority as the subject of salvation and absolute authority that gives the authority to Jesus, saints, and kings, but it was not expressed as the image of being worshiped in the screen. In chapter Ⅳ, to draw the implications of two symbols, it examined the context that expressed Buddha and God as a symbol, sacred book's prohibition about Buddha's and God's embodiments, and the method of describing the footprint and hand in sacred book. Also, the footprint's and hand's locations and status on the screen were related to people's understanding and appreciation of Buddha and God. The former saw that the enlightened one's Buddha-nature and sentient beings's characters are the same in terms of the essence, and the latter strictly sorted God's attributes and creatures' characters. As this kind of recognition is reflected in the art, the carved location of the mark that is subject to Buddha who walks barefoot for humankind's happiness is not fixed in the screen, and its mark gets the devoted worship from characters. On the other hand, it was visualized thatGod stays at nearby location to a degree that his finger can be visible, but as the location of God's hand is always fixed in the sky, it reveals the gap and the hierarchy between God and creatures, which can't be narrowed. Because the mark and hand accord with Buddha and God's attribute, we confirmed that they were used as Buddha and God's symbol for a long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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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홍은원 감독의 영화 연출 경향 연구 - <여판사>(1962)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세아 ( Kim¸ Sea ) , 함충범 ( Ham¸ Chungbeom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3-145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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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국영화사상 두 번째 여성감독인 홍은원의 영화 연출 경향에 대해, 그의 감독 데뷔작이자 세 편의 연출작 중 유일하게 영상 자료가 현존하는 <여판사>(1962)를 통해 탐색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이 작품은 여성이 사회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겪는 갈등을 주된 주제로 삼은 동시기 한국영화 제작 경향의 자장 안에 위치하면서도, 사회적 주체로서 여성 캐릭터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여타 작품들과 차별점을 보이기도 한다. <여판사>는 주인공 진숙(문정숙 분)이 판사라는 사회적 위치와 며느리라는 가정 내 위치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시조모 사망 사건에 얽힌 곤궁을 해결함으로써 그것이 해소되는 서사 구조로 전개되는 작품이다. 영화는 이러한 전개 과정을 통해 여성 주체의 욕망과 의지가 발현되어 실천적 전복의 가능성이 노출되는 주제적 효과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기저에는 홍은원이 실화를 토대로 구성된 이 작품의 각본에 대한 각색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이 자리한다. 아울러, 홍은원은 영화적 표현기법을 적절히 활용하여 남녀 간 성적 위계의 문제와 그 구별에 대한 무화의 가능성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한다. 이를 통해 그의 연출 작품에 묻어나 있는 홍은원의 여성주의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바탕에 <여판사>가 제작·개봉된 1960년대 당시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 및 여성이 처한 현실적 상황 등이 놓여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1960년대 한국 사회라는 당대 현실의 자장에서 작품 창작 행위를 경유하여 새로운 시대상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홍은원 감독과 그의 연출 경향은 주목을 요하는 영화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is the result of a study of Hong Eun-won who is the second female director in Korean film history, through “A Woman Judge”(1962) that her debut film and the only one among the three directing works that has video data present. This work is located in the trend of Korean films in the same period, which made women's conflict in the social and private areas the main theme, but it also shows a difference from other works in that it constructs a female character as a social subject. “A Woman Judge” has a narrative structure in which the main character Jinsuk (played by Mun Jeongsuk) resolves the conflict by solving the case of grandmother-in-law's death while having a conflict between the social position that the judge and the position in the family as the daughter-in-law. Through this process of story development, the desire and will of the female subject are expressed, revealing the potential for practical subversion. The effect is related to the fact that Hong Eun-won directly participated in the adaptation of the scenario, which is based on a true story. In addition, She makes appropriate use of cinematic expression techniques to visualize the problems of sexual hierarchy between men and women and the possibility of incapacitation of their distinctions. Through this, we can discover Hong's feminist perspective embedded in her directing works. The basis for this was the social atmosphere of Korea and the realistic situation faced by women in the 1960's when < A Woman Judge > was produced and released. In conclusion, the female director Hong Eun-won and her film directing tendency are notable film history “events” in that she sought a new era through the creation of film art in the 1960's amid the contemporary reality of Korea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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