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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update

The Oriental Studies , Dong Yang Hak

  •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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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9-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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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69권0호(2017)~76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59
동양학
76권0호(2019년 07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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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국장(國葬)」의 표현기교(表現技巧) 분석(分析)

저자 : 黃炫國 ( Hwang Hyunguk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7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6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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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白先勇(1937~)의 단편소설 「國葬」에서 사용된 작가의 표현기교를 분석하여 그 예술적 성취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國葬」은 1971년에 『現代文學』(第43期)을 통해 발표된 작품으로 소설집 『臺北人』에 수록되어 있다. 『臺北人』은 1965년부터 1971년 사이에 발표한 14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國葬」은 『臺北人』의 마지막 작품이다. 편폭(篇幅)이 매우 짧은 소설이나 독립성을 갖추고 있어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으로 『臺北人』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의의는 주의할만하다.
「國葬」의 주인공은 고인이 된 육군 중장 李浩然 장군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삼십 년 동안 李浩然과 밀접하게 생활한 부관 秦義方을 등장케 하여 주로 그의 내면세계를 통해 李浩然을 묘사했다. 「國葬」의 서술 시점의 운용은 단일시점이 아니라 다양한 시점을 사용하였다. 중국 전통기법인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속에 부차적 인물의 삼인칭 시점을 보탠 것으로 이 두 가지의 서술 시점이 서로 결합하거나 삽입하여 운용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國葬」은 중화민국의 역사를 李浩然의 일생에 축소하여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편소설에서 이렇게 큰 역사를 담으려면 중국 문학 전고를 사용한 祭文과 輓詞와 같은 정제된 언어의 사용은 좋은 서술 효과가 있다. 작가는 이 서술방법을 효과적으로 잘 운용하였다. 「國葬」은 정경의 묘사와 부차적 인물의 회상을 위주로 서술하였다.
白先勇은 「國葬」을 통하여 중·서 소설의 장점을 결합하여 자신의 성숙한 창작기교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적절한 서술 시점의 운용과 숙련된 언어묘사의 표현력, 그리고 '의식의 흐름' 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國葬」의 표현기교에 나타난 특징은 중국 문학 전통의 기초 위에 서양 소설의 기교를 융합시켜 민족 특색을 살린 표현기법을 성공적으로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필자는 『臺北人』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서 진행해왔다. 『臺北人』의 종합적인 분석에 이어서 『遊園驚夢』, 「花橋榮記」, 「孤戀花」, 「梁父吟」 등 작품을 분석하였다. 다시 『臺北人』의 마지막을 장식한 「國葬」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여 『臺北人』의 전반적인 연구에 일조를 꾀하고자 한다.


This paper analyzed the expressive technique of the author used in the short novel Guozang (「國葬」) of Pai Hsien-Yung(白先勇:1937~) to examine its artistic achievement in detail.
Guozang(「國葬」) is a work published in 1971 through Xiandaiwenxue(『現代文學』)(第43期) and is included in the novel's book Taibeiren (『臺北人』). Taibeiren (『臺北人』) is a collection of 14 short stories published between 1965 and 1971. Guozang is the last part of Taibeiren (『臺北人』). The status and significance of TaiBeiren is worthy of caution regardless of its shortness of the novel.
Guozang's main character is the army lieutenant general LiHaoRan. In the novel, the author made the appearance of his deputy, QinYiFang(秦義方), who lived closely with LiHaoRan(李浩然) for 30 years, describing LiHaoRan(李浩然) mainly through his inner world. Guozang used a variety point of view, not a single point of view. An omniscient viewpoint of secondary character is added to an omniscient viewpoint of the writer, the traditional technique of Chinese literature. These two narratives were combined or inserted into each other in Guozang(「國葬」). Guozang can be said to be a miniature of the history of the Republic of China in LiHaoRan's lifetime. The use of refined languages from authentic precedents, such as “funeral oration” and “Elegy,” has a good narrative effect to capture such a large history in short stories. The author has worked effectively on this method of narrative. Guozang(「國葬」) focuses on the description of scene and the recollection of a secondary figure.
Pai Hsien-Yung(白先勇) combined the merits of Chinese and Western novels through Guozang (「國葬」), displaying his mature creative technique without regret. The operation at the appropriate point of view, the expressive power of skilled verbal description, and the 'flow of consciousness' technique were effectively used to achieve great results. The characteristic shown in Guozang's expressive technique is the successful use of expression techniques to improve the characteristics of ethnicity by merging the techniques of Western novels on the basis of Chinese literary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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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賓主交歡席, 威儀在一壺” 中國古代投壺的東傳及其在朝鮮半島**的流變

저자 : 徐成 ( Xu Cheng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7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4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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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壺是極具有儒家色彩的禮儀, 游戱性極强, 具有樂嘉賓、正心術的妙用。由先秦訖淸, 儀節雖有變化闕失, 然總體上绵傳未絶。投壺在南北朝時期傳入朝鮮半島后, 時値半島三國時代, 高句麗、百濟、新羅三國皆樂于此道, 后來在高麗時期投壺之法又傳承漸稀, 到了以程朱理學立國、重視儒家禮儀的朝鮮王朝, 對于投壺較前重視, 投壺之道又藉此大興, 幷發生了本土化的變革。中國的投壺自兩晋南北朝時代傳入朝鮮半島后, 其流也遠, 其澤亦廣, 在傳承着中原投壺之神髓的同時, 也相應因地制宜, 生發出自己的特色。


Pitch-pot(Chinese:Touhu;Korean:Tuhu) is a classic ritual in east Asian cultural circles, which has a strong entertaining and educational aspect. From the pre-Qin Dynasty to the Qing Dynasty, although the details of the game have changed and lost, but the general content of the inheritance to the present day. Pitch-pot was introduced into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in China, when it was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Goguryeo, Baekje and Silla were all keen on this game. Later in the Goryeo dynasty, this kind of game was gradually rare. It was time for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founded on neo-Confucianism and Confucian etiquette. In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founded by the neo-Confucianism and attached great importance to Confucian etiquette, the way of pitch-pot was more important than that of the previous dynasties. The game was revived by this opportunity, and a localized change took place. While absorbing the essence of pitch-pot in Central Plains Dynasty, Korean pitch-pot also adapted to local conditions and produced its own characteris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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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유연의 서역 경략에 대한 약간의 역사적 사실 검토

저자 : 袁剛 ( Yuan Gang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7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5-57 (1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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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륜(社崘)과 이후 몇 대 카한들의 개척을 통해 유연한국(柔然汗國)은 천산(天山) 북부 초원 일부 지역을 점령함과 동시에 하미와 투르판 등의 오아시스 지역으로 뻗어 나감으로 해서 이오와 고창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유연은 이 지역들의 풍부한 물질 자원들을 획득함과 동시에 실크로드 무역을 조종하게 되며 재부가 증가하였다. 북위 태무제 시기에 서역을 경략함에 따라 한 때 유연 세력은 천산 남부의 대부분 지역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5세기 중엽 이후, 내란으로 인해 북위는 서역에 대한 경략과 관할이 느슨해 졌으며 유연 세력은 권토중래하며 서역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를 회복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 강화하였다. 5세기의 80년대 말, 고차국의 건립으로 유연의 서역에 대한 영향력이 재차 약화되었다. 유연의 부흥 시기에 서역 경략에 대한 정책은 다시 한 때 회복되고 발전하였다. 유연이 서역을 경략하며 5~6세기 중엽 중국 서북 지역의 민족 관계사와 동서 교류사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After expansion of Shelun and later generations of Khan, while occupying part of the northern grassland of Tianshan Mountains, Rouran Khanate further extended its antennae to the oasis areas of Hami and Turpan, thus realizing the effective control of Yiwu and Gaochang. As a result, while gaining access to the rich material resources of these regions, Rouran had increased wealth by manipulating the Silk Road trade. The Northern Wei Dynasty Emperor Taiwu's strategy for the Western Regions once forced the Rouran forces to withdraw from most of the southern parts of the Tianshan Mountains. After the middle of the 5th century, the Northern Wei Dynasty relaxed its management and jurisdiction over the Western Regions due to civil strife, and Rouran forces came back, restoring and to some extent strengthening the control of parts of the Western Regions. In the late 480s, the establishment of the Gaoche State made Rouran's influence on the Western Regions weakened again. During the Rouran Khanate rejuvenation period, the policies of the Western Regions were restored and developed at one time. Rouran's administration of the Western Regions had an important impact on the history of ethnic relations and the history of exchanges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in the middle of the 5~6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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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中國的蒙元時期絲绸之路硏究

저자 : 馬曉林 ( Ma Xiaolin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7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9-76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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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元时期欧亚丝绸之路的积极意义,日益受到全世界范围的重视。中国的蒙元史研究有悠久的学术传统,具有超越国别史的视野,重视多语种文献,都是研究丝绸之路的必备条件。中国学者在蒙元时期海上丝绸之路、陆上丝绸之路、移民、物质文化与艺术的传播、旅行记等方面都取得了较丰硕的研究成果。尤其马可·波罗研究,涵盖了东西方学术中的众多领域,在蒙元时期丝绸之路研究中最具有代表性。


The positive role of the Eurasian Silk Road during the Mongol period has been increasingly valued worldwide. In China Mongol-Yuan studies have a long-standing academic tradition with a perspective beyond national history and close attention on multilingual literatures, which prove to be necessary for the Silk Road studies. Chinese scholars have achieved fruitful research results in the Maritime Silk Road, the inland Silk Road, immigrations, the spread of material culture and art, and travel accounts. In particular, the studies on Marco Polo covering various fields in Eastern and Western academics is the representative of Chinese Studies on the Silk Road during the Mongol-Yua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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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의 고대 초원로 연구 성과와 그 의미

저자 : 정재훈 ( Jeong Jaehun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7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7-93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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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대 초원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역사가 한국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초원길에 대한 성과를 학문 분야별로 나눠 정리, 소개하려 한 것이다. 먼저 고고학과 미술사학적 측면의 연구는 선사시대부터 역사 시대 초기까지 남아 있는 다양한 유물들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 고대사의 문화 원류 이해 단서를 찾고자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교섭사적 연구나 비교학적 관점에 대한 반성과 함께 그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분야에서 초원길 문화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그럼에도 국내의 관심은 여전히 한민족의 원류 내지 그의 문화적 기원, 그리고 이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 즉 '관계'에 집중한 측면이 강하다. 더욱이 활발한 발굴 성과에 기초한 고고학 분야가 관련 연구의 주류를 형성한 것에 비해 미술사 분야의 경우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사막길에 비해 관심이 더욱 적은 편이라 향후 많은 연구를 기대하게 한다.
향후 보다 많은 연구의 확장을 통해 이런 한계를 극복하며 보다 객관적이고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접근이 필수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접근을 하려면 초원에서 전개된 고대 유목제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하지만 세계사상에서 초원길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접근 역시 여전히 시기적 편중이 심하다. 또한 중국사에서 벗어나 세계사 속에서 초원에서 전개된 유목제국사의 역할을 균형적으로 이해하려는 것도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 더욱이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자가 현저히 적은 것은 이 분야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다만 한문사료가 아니라 현지 사료에 기초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유목제국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 고무적이다. 향후 이를 보다 발전시키려면 한국 고대 문화의 원류를 확인하려는 관심 정도에 치우친 기존의 접근을 극복하고 보다 객관적으로 초원에서 전개된 고대 유목제국사의 역할이 문화 교류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일 것이다.


As an activity stage for ancient nomadic empires, steppe routes are an important subject of study. This is mainly because the relationship with Korean history was important. However, the studies on this topic was primarily done from a negotiating or comparative perspective. They were thus derived from efforts to reflect on it and to highlight his role later. Since then, studying to steppe routes has been made in various fields, allowing a balanced understanding of the role of nomadic imperial history, which has been developed on steppes in world history, away from Chinese history. This was to continue to understand in a more objective way despite relative difficulties.
The interests in Korean researchers remains strong in terms of the origins of the Korean people, their cultural origins, and their comparative approach. In this context, researches were actively carried out based on the vigorous excavation achievements of prehistoric and historic eras in archaeological aspects. It is also relatively minor in access to the cultural role of oasis routes. Therefore, understanding of ancient nomadic empire's history developed on the steppe is needed to gain a broader perspective on how Korean history had a relationship with steppe in world history.
In addition, the explanation of the historical role of steppe route in world history is also highly timely. It is also encouraging that recent access through raw materials has been made to overcome what has been understood as an extension of Chinese history due to studies relying on Chinese records. To further develop this in the future, access to the role of steppe routes is needed, and the cultivation of a new generation of academics who can make this possible. By doing so, we should overcome our current interest in identifying the origins of Korean ancient culture and take an objective approach to the history of ancient nomadic empires that developed on the Eurasian step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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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현재(玄齋) 침사정(沈師正) 회화의 융화천성적(融化天成的) 심미의식(審美意識) 고찰(考察)

저자 : 한경애 ( Han Kyungae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7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5-113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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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齋 沈師正(1707~1769)은 겸재 정선과 더불어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그는 중국 남종화법의 선행 양식을 토대로 자신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양식을 심화시켜 나갔으며, 남종화의 토착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심사정은 전형적인 문인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집을 남기지 않아 직접적으로 그의 회화사상을 간파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 당대 제일의 비평가였던 姜世晃·南泰膺·沈翼雲의 畵評과 跋文, 그리고 묘지명 등을 통해 그의 회화에 대한 인식과 심미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심사정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이자 세상에 뜻을 전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터득한 주체적 자각으로 전통적 화법과 새롭고 참신한 새로운 화풍을 융합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심사정 회화 세계의 기저를 이루는 미의식은 '淸奇'의 미와 '融化天成적 자연의 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창작과 예술세계에 근원이 되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에는 세속적 욕망을 모두 덜어낸 담담하고 맑은 '청기'의 미가 응축되어 있으며, 애써 이루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조화를 이루는 융화천성적 자연의 심미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심사정은 비록 현실과의 융화를 이루지 못하고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지만, 자연과 합치되고자 했던 그의 심미적 요구에 부합되는 융화천성적 자연의 미와 참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의 자유로움을 획득했다. 요컨대 심사정만의 독자적인 특징인 융화천성적 심미의식은 生意를 존중하는 예술적 지향이자 진솔하게 자신의 감성과 진실미를 표출했다는 점에서 그의 위상을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Hyeonjae(玄齋) Sim Sa-jeong(沈師正)(1707~1769) was a leading literary painter of the late Joseon period along with Gyeomjae. He enriched his idiosyncratic and original style based on the preceding Southern Chinese literati style, and went on to pioneer the indigenization of the Southern Chinese literati painting.
Despite being a typical literary painter, Sim Sa-jeong did not write a single book on his works, making it hard to directly comprehend the ideology of his painting. However, thankfully, perceptions of his paintings and the painter's aesthetic consciousness can be understood through the critiques, postscripts, and epitaphs of such top-notch critics of the era as Kang Se-hwang, Nam Tae-eung, and Sim Ik-un.
The aesthetic consciousness that forms the basis of Sim Sa-jeong's painting world can be summarized as the beauty of “cheong-gi”(淸奇:extraordinarily eccentric atmosphere) and the natural beauty of “yung-hwa-cheon-seong”(融化天成). These virtues are the foundations of his creation and art world. In his work, he condensed the beauty of “cheong-gi,” a fresh and clean energy from which all worldly desires were removed, and clearly manifested his aesthetic consciousness “yung-hwa-cheon-seong” derived from nature, where things become harmonized effortlessly.
Even though Sim Sa-jeong failed to harmonize with the real world and was not free from worldly prejudices, he still achieved the natural beauty of “yung-hwa-cheon-seong” attuned to his aesthetic demand to become one with nature, as well as the freedom of life, which we may well consider to be true beauty. In sum, Sim Sa-jeong's own aesthetic consciousness of “yung-hwacheon- seong,” truly unique to him, should alone lead to a reassessment of his standing because it represents his artistic goal of respecting the meaning of life and an honest expression of his sensibilities and true bea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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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념체계의 삶 지배력: 음·양의 역동적 해석

저자 : 서영이 ( Seo Youngyi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7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5-130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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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개념체계(conceptual system)'의 삶 지배력을 검토하고, 어떤 개념체계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의식과 삶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음을 해명하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글은 음·양 해석의 여러 유형을 검토함으로써, 개념체계가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삶의 패턴 형성에 결정적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 연구는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문화적 범주화가 가질 수 있는 위험성을 고발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개념체계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음·양은 모든 물리적·추상적·정신적인 것들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다. 음·양은 그 자체로 객관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끝없이 재규정되어 왔다. 사회적·문화적 가치체계에 따라 선택된 개념체계는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과 삶의 구조를 결정한다. ① 「양존음비(陽尊陰卑)」 개념체계는 음·양의 지위를 차별화하는 사유를 정당화하는 토대가 된다. 그것은 종법제에 기초를 둔 가부장적 범주화에 결정적 구조를 제공했다. ② 노자의 「존음귀유(尊陰貴柔)」 개념체계는 「양존음비」의 사유에서 은폐되었던 음의 유효성에 주목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③ 「음양균형(陰陽均衡)」 개념체계는 '음'과 '양'의 구도가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관점에서 읽혀야 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우리는 이러한 「음양균형」 개념체계를 통해 삶의 수평적 조화와 화합을 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지금 여기'를 지배하는 개념체계에 대한 현실적 반성과 함께 우리의 유기체적 조건에 반하지 않는, 경험적으로 안정된 개념체계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set out to review the governing power of a “conceptual system” in Our Lives and demonstrate that human consciousness and life could be embodied in completely different ways according to the different choices of conceptual systems. Specifically, The study would show that a conceptual system would play decisive roles in the formation of values and life patterns among members by reviewing the various types of Yin-Yang interpretations. It would also report on the potential risk of social and cultural categorization and ultimately raise a need to reconsider a valid conceptual system for “us now.”
In Northeast Asia, Yin-Yang have been regarded as concepts to explain all things that are physical, abstract, and spiritual. Yin-Yang have continuously been redefined according to values sought after by the society rather than holding an objective meaning themselves. A conceptual system chosen based on a social and cultural value system determines the consciousness and life structure of members in the society. ① The conceptual system of “raising Yang and lowering Yin (陽尊陰卑)” becomes a basis to justify the idea of discrimination between Yin-Yang status. It offers a decisive structure for the patriarchal categorization based on the clan rules. ② Lao-Tzu's conceptual system of “raising Yin and valuing softness(尊陰貴柔)” offers a chance to focus on the validity of Yin that used to be covered up in the idea of “raising Yang and lowering Yin.” ③ The conceptual system of “balanced relations between Yin-Yang (陰陽均衡)” implies that the “Yin-Yang” structure should be read from the perspective of balance and harmony rather than exclusive relations. This conceptual system of “balanced relations between Yin-Yang” offers an opportunity to achieve horizontal balance and harmony in life.
If these attempts are successful, human beings will be able to have realistic reflections on the conceptual system that governs “here and now” and take into consideration a conceptual system that does not go against their organic conditions and is stable experienti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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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류태좌(柳台佐)의 생애와 학문성향

저자 : 권오영 ( Kwon Ohyoung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7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3-155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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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台佐(1763~1837)는 柳成龍 이후 忠孝 두 글자를 전승해온 安東 河回의 豊山柳氏 가문의 8世의 文獻家에서 태어났다. 그는 풍산류씨의 家學을 잘 지켜나가고 몸소 실천을 하였다. 그의 학문성향은 朱子學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는 周敦頤와 二程의 心學의 핵심이 主靜과 主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주정이 주돈이의 「太極圖說」의 가르침으로 심학의 핵심이고, 이정이 주정에서 주경으로 전환한 것은 더욱 道學의 핵심이 된다고 이해했다.
류이좌는 四書 중에서도 『大學』과 『中庸』을 깊이 연구하고 강론하였다. 그는 『대학』의 강령인 明明德의 明德을 本心으로 이해했다. 그는 명덕에 대해 본심의 虛靈不昧한 모습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중용』의 핵심인 誠은 實理, 實心을 말한다고 했다. 그는 하늘에 있어서는 實理라고 말하니, 命이라는 것은 실리의 근원을 가리키고, 性이라는 것은 실리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사람에 있으면 實心이니, 道라는 것은 실심의 功이고, 敎라는 것은 실심의 드러남이라고 이해했다. 또한 그는 朱子書의 강령이 義理를 밝힌다는 '明義理' 세 글자에 있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학문성향은 18세기말 英·正祖시대에 의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조선 주자학의 정치적 성향을 지니면서, 아울러 '實心으로 實學을 강론하고, 실학으로 實事를 실행하는 것이 곧 오늘날의 급선무이다'라고 말한 정조의 經世學的 주자학의 학문성향을 함께 공유했던 주자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Ryu Yijwa(柳台佐, 1763~1837) was born as the 8th generation of the Pungsan Ryu Family in Hwa-Hwi, Andong, in which two letters of meaning loyalty(忠) and filial piety(孝), were passed from Ryu Sungryong(柳成龍). He kept and practiced the academic principles of the Pungsan Ryu Family. He realized that the core of Natural Science elucidated by Joo donee(周敦頤) and two Jung(二程) lied on Jujung(主靜) and Jugyeong(主敬). He understood that Jujung was the center of pratical ethics and the transition of two Jung from Jujung to Jygyeong was also the center of Natural Science through teachings of 「Taegeukdosul(太極圖說)」 by Joodonee.
Among the Four Books, Ryu Yijwa studied and preached on 『Daehak(大學)』 and 『Jungyong(中庸)』 in depth. He understood the illustrious virtue(明德) of Myeongmyeongduk(明明德), a doctrine of 『Daehak』 by his heart. He even mentioned that the Myeongduk was a figure of one's true self. He also claimed that the illustrious virtue contains a mind, not dark, as well as affection. Moreover, he claimed that a faith(誠), the core of 『Jungyong』, represented practical interests(實理) and a practical mind(實心). He also claimed that practical interests were the core of the heaven, and a life(命) referred to the source of practical interests and the sex was the practical interest assinged from the heaven. He understood that persons were all about practical minds, and morally was a meritorious deed from a practical mind and a faith(敎) was the revealability of a practical mind. He also said that a doctrine of Jujaseo(朱子書) lied on three letters of 'Myeongeuri (明義理)', which can be defined as lightning of fidelity(義理). His such academic propensity was in line with the political bias of Neo-Confucianism, overly emphasizing a virtue of fidelity during the reigns of King Yeongjo and King Jungjo, of the late 18th century, and the academic propensity of Administrative Neo-Confucianism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 assisting 'It is an urgent task of today to preach on the Practical Science and to practice and exercise the Practical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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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의 갱화(賡和)와 응제(應製)에 관하여

저자 : 심경호 ( Sim Kyungho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7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7-209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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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정조 연간 내각강제문신(內閣講製文臣)에 초계(抄啓)되었던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 1763~1837)의 갱화(賡和)와 응제(應製)의 사실을 고증하고, 그의 문집에 갱화 및 응제의 시문이 많이 수록되지 않은 이유를 추론한 것이다. 류이좌의 문집 『학서선생문집(鶴棲先生文集)』 (이하 '학서집')은 1902년경 목판으로 간행되었는데, 류이좌 생전의 자편고(自編稿)를 저본으로 삼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시의 편수는 많지 않고, 제2권은 만시(挽詩)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유문(遺文)의 정리자 및 간역(刊役) 주체들은 시를 모은 제1권에 류이좌가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있으면서 정조의 어제(御製)에 갱화한 8제, 초계문신친시(抄啓文臣親試)에서 응제한 15제를 전면에 배치했다. 그만큼 류이좌의 초계문신 시들을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시들을 통해 류이좌 시의 습숙도(習熟度), 온축의 농밀(濃密), 정론(政論)의 지향(指向)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류이좌는 정조가 현륭원에 배알하여 효성을 보이고 명나라에 대한 보은(報恩)의 뜻을 잊지 않아 맑은 시절을 가져온 사실, 황극(皇極)을 세워 정치를 안정시키고 백성들 삶을 윤택하게 만든 사실을 칭송했다. 하지만 『일성록(日省錄)』, 『내각일력(內閣日曆)』, 그리고 갑인년 선발에 가초(加抄)된 이희발(李羲發, 1768~1850)의 문집 『운곡집(雲谷集)』을 류이좌의 문집과 대조하여 보면, 갱화와 응제의 시들이 상당히 누락되었다. 더구나 친시(親試)나 과시(課試)에서 응제(應製)한 시문 가운데 시 이외의 문체들은 거의 수록하지 않아, 전(箋) 2편과 명(銘) 1편만 수습되어 있다. 본래 류이좌는 부화(浮華)한 문풍을 배격하고 자득(自得)의 실공(實工)을 중시했다. 6대조 류원지(柳元之)의 유훈시(遺訓詩)에 차운하여 「선조 졸재선생 9수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敬次先祖拙齋先生九首詩韻]」을 지은 것을 보면 평소 류이좌는 돈목(敦睦), 자수(自守), 섭세(涉世), 산거(山居), 자책(自責), 권학(勸學), 독서(讀書), 자성(自省)을 강조했다. 또 류이좌는 정조가 『어정육주약선(御定陸奏約選)』, 『어정주서백선(御定朱書百選)』, 『사기영선(史記英選)』 등 선집(選集)이나 초집(抄集)을 편찬하는 것에 대해서 문교(文敎)의 진작에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하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간편함을 추구하게 만들까 걱정스럽다고 정조에게 의견을 말하기까지 했다. 정조의 초계문신 제도는 정치 이념을 확인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제술의 부과는 초계문신의 학문 진작을 방해했다. 정약용(丁若鏞)의 경우도, 초계문신 시절 어제 책문(御題策問)에 대한 대책(對策) 작성을 통해서 학문·지리·경제·정치의 각 방면에 걸쳐 기초지식을 축적했으면서도, 초계문신 시절의 제술에 대해 후회하고 특히 사육문(四六文)의 응제문은 '교언(巧言)'이라 규정하고, '후회를 표시하기 위해' 그 대부분을 『열수문황(冽水文簧)』에 수록하여 문집과는 구별했다. 류이좌에게 정조의 학문 기획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의식이 있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류이좌는 수석을 차지한 시문의 경우도 수습해 두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표전(表箋)이나 율부(律賦)의 문체는 정리해 둘 생각이 그리 없었던 듯하다.


This article ascertains interactive poems and responsive poems by royal demands written by Hakseo Yu Ijwa, who was selected as a Kyujanggak official for lecture and composition in a regime of king Jeongjo. Also this article infers the reason for his interactive and responsive poems are hardly being included in his collection. Yu Ijwa's collection Hakseoseonsaengmunjip (Hakseojip) was woodblock printed around 1902, however, it is not clear whether the collection was based on his self-edited manuscript. The number of poems in the collection is small, and the second volume mostly contains memorial poems. Organizers and publishers of Yu Ijwa's posthumous arranged 8 pieces of interactive poems to Jeongjo and 15 pieces of responsive poems written in a royal exam for selected elite officials on the front. It is clear that publishers laid stress on his poems as a selected elite official. Through the poems, it is possible to apprehend proficiency, profoundness, and orientation of Yu Ijwa's poetry. However, compared to Ilseongnok, Naegagilryeok, and Ungokjip, interactive and responsive poems of Yu Ijwa is largely omitted in Hakseojip. Moreover, among responsive poetry and prose composed in royal exam and state exam, works beside poems are mostly not included in the collection, reserving only 2 pieces of royal dedicational documents and a piece of inscription. Yu Ijwa rejected a florid style and put stress on self-fulfillment in nature. According to his poem “Respectfully responding nine poems of my ancestor master Joljae”, written in response to his 6th generation grandfather Yu Wonji's indoctrinational poem, usually Yu Ijwa thought sincerity, self-duteousness, an art of living, hermitism, self-reproach, encouraging learning, reading, and self-reflection as important characteristics. Also he stated his opinion to Jeonjo on publishing anthologies such as Eojeongyukjuyakseon, Eojeongjuseobaekseon, and Sagiyeongseon won't help learning, making descendants pursue convenience. A system of selected elite officials played major role in establishing political hegemony, however composition assignments blocked developing scholarship. Jeong Yakyong, for example, regretted what he wrote as a selected elite official and asserted pianwen a florid words, containing most of his such works in Yeolsumunhwang to divide it from his proud collection. It is hard to affirm that Yu Ijwa had a harsh criticism of Jeongjo's study plan. However he did not have an intention to collect his composition such as royal dedicational documents or fu, even though it was top-graded.

KCI등재

10정조대 유태좌(柳台佐)의 초계문신(抄啓文臣) 활동

저자 : 김문식 ( Kim Moonsik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7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1-23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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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정조 대에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된 류이좌의 활동을 통해, 정조의 교육정책이 영남 사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정조는 1790년대에 들어와 영남에 있던 남인 세력을 주목하고, 이들을 집중적으로 발탁하였다. 영남의 사족이었던 류이좌가 초계문신에 선발되고 중앙에서 활동한 배경에는 정조와 남인계 영수였던 채제공의 후원이 있었다.
류이좌는 초계문신의 교육 과정을 이수하면서 경서를 익히고 문장력을 키웠으며 국가적 행사에 참여하여 정조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올렸다. 또한 그는 규장각에서 주관하는 편찬사업에 참여하고 새로 간행된 서적을 하사받았다. 류이좌는 정조대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활동하며 학자와 관리로서의 능력을 갖추어 나갔다.
류이좌는 정조와 학문을 토론하면서 주자학을 존숭하고 퇴계의 학설을 강하게 지지하였다. 정조도 주자학과 퇴계의 학설을 인정하였지만, 류이좌는 정조보다 주자학과 퇴계의 학설을 더욱 존중하였다. 류이좌는 정조에게 경세 방안을 건의하였고, 그중에서 일부는 실현되었다. 류이좌는 정조가 학문 연구와 서적 편찬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을 경계하고, 탐관오리를 강하게 징계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그는 화성을 육성시킬 방안과 조령 지역의 폐단을 바로잡을 방안을 건의하여 정조의 허락을 받았다.
류이좌는 정조의 의도를 따라 초계문신에 선발되었으며, 정조의 개혁정치를 실천할 인재로 성장한 영남 사족이었다.


This paper was written to examine how King Jeongjo's education policy affected the Yeongnam nobleman, through the activities of Ryu Yi-jwa, who was selected as a member of the Kyujanggak Chogye Munshin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In the 1790s, King Jeongjo took note of the Namin's power living in Yeongnam area and concentrated on selecting them. Ryu Yi-jwa, a member of Yeongnam nobleman, was selected for the Chogye Munshin and acted in the center of the country with the backing of King Jeongo and Chae Je-gong, the head of Namin group.
Ryu Yi-jwa learned the Confucian scriptures and cultivated his writing skills while taking the course of education for the Chogye Munshin, participated in national events and wrote poems in response to King Jeongjo's poems. He also participated in a compilation project organized by Kyujanggak and was granted a newly published book. Ryu Yi-jwa served as a Kyujanggak Chogye Munshin, and developed his skills as a scholar and official.
Ryu Yi-jwa respected the doctrines of Zhu Xi and strongly supported the theory of Toegye Lee Hwang while discussing Confucianism with King Jeongjo. Although King Jeongjo also recognized the doctrines of Zhu Xi and Toegye Lee Hwang, Ryu respected the theory more than the king did. Ryu Yi-jwa suggested a governing plan to King Jeongjo, some of which were realized. Ryu Yi-jwa was wary of King Jeongjo's excessive concentration on academic research and book compilation, and asked him to strongly discipline the corrupt official. He also proposed plans to foster Hwaseong and to correct the problems of Jolyeong area. His plans were accepted by King Jeongjo.
Ryu Yi-jwa was selected for Chogye Munshin according to Jeongjo's intentions, and was a member of the Yeongnam nobleman who grew up as a person who would practice the reform politics of King Jeo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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