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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update

The Oriental Studies , Dong Yang Hak

  •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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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9-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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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69권0호(2017)~80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99
동양학
80권0호(2020년 07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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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식민지 조선 지식인 김구경의 재중 문화적 교류와 그 학술적 성과에 대하여

저자 : 김철 ( Jin Zhe ) , 김교령 ( Jin Jiaoling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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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지식인 김구경은 1928년 말 조선을 떠나 광복을 맞기까지 이국땅 중국(베이징, 봉천 등)에서 16년 이란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적지 않은 학문적 성과들을 이루었는바 그러한 성과들은 오늘 다시 보아도 의미가 작지 않다.
전체적으로 볼 때 북경시절 김구경의 교류는 루쉰, 저우쭤런, 후스, 워이젠궁, 류반눙 등 문인들을 상대로한 문화적 교류가 중심이었다면 봉천시절의 교류는 진위푸과 일본학자들 간의 학술적 교류가 중심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베이징 시절 김구경은 중국의 현대지식인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나름의 새로운 문화의식으로 불교학을 중심으로 한 동양학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특히 후스와 진위푸 등 중국 최고의 학자,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학술사상과 방법을 수용하는 한편 보다 객관적이고 폭넓은 동아시아 학술 연구 시각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학술 시각은 그의 동양학 연구에 소중한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김구경이 중국현대지식인들과의 사상, 문화적 교류에서 획득한 가장 값진 성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김구경은 중·일 현대문인들과의 긴밀한 교류와 협력 속에서 돈황(敦煌) 석실자료교감 및 간행과 같은 중요한 업적들을 이루게 된다.
다음, 봉천 시절에 이룩한 업적들도 의미가 크다. 김구경은 중국의 학자들 못지않게 풍부한 지식과 다양하고 폭넓은 학술적 시각으로 만주역사와 언어 민속, 몽골어연구 등에서 적지 않은 성과들을 이루어냈는바 이러한 업적들은 개인적인 업적의 의미를 넘어서 한·중·일 3국의 동양학연구에 대한 기여가 된다. 이 과정에 김구경은 동아시아 3국의 학자, 문인들이 동양학연구에서 상호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교량적 역할을 담당했었는바 이는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세계와 통할 수 있는 동양학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추구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던 김구경의 문화의식과 학술이념은 마땅히 학계의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Korean intellectual Kim Gu-gyeong lived a life of 16 years in China (Beijing, Bongcheon, etc.) in a foreign land until he left Joseon in late 1928, and such achievements are significant today. Overall, if Kim Gu-kyeong's exchanges during the Beijing period were centered on cultural exchanges with writers such as Lu Xun, Zhou ZuoRen, Hu Shi, Wei Jian Gong, and Liu Ban-Nong, the exchanges of Bongcheon period were centered on academic exchanges between Jin YuPu and Japanese scholars. First of all, during the Beijing period, Kim Gu-kyeong tried to overcome cultural differences and look at Oriental studies centered on Buddhism with his own new cultural consciousness. Especially, by interacting with China's top scholars and writers, such as Hu Shi and Jin YuPu, he tried to accept their academic ideas and methods, while sharing a more objective and broader view of East Asian studies, which was a valuable foundation for his Oriental studies. This is also the most valuable achievement that Kim Gu-kyeong has made in his ideological and cultural exchanges with modern Chinese intellectuals. Therefore, Kim Gu-gyeong will achieve important achievements such as the teaching and publication of Dunhuang stone chamber materials in close exchanges and cooperation with modern Chinese and Japanese writers.
Next, the achievements made during the Bongcheon period are also significant. Kim Gu-gyeong has achieved considerable achievements in Manchurian history, language, folklore, and Mongolian language research with abundant knowledge and diverse academic perspectives, as well as scholars in China, and Japan, and these achievements go beyond the meaning of personal achievements and contribute to the study of Oriental studies in Korea, China, and Japan. In this process, Kim Gu-kyung played a bridge role to enable scholars and writers from the three East Asian countries to communicate and cooperate with each other in the study of Oriental studies, which I believe is related to the pursuit of universal values of Oriental studies that can communicate with the world beyond the boundaries of nations and nations. In this regard, Kim Gu-gyeong's cultural consciousness and academic ideology, which pursued universal values of mankind, deserve due evaluation by the academic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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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는 당쟁이 매우 치열한 시대에 살았다. 조선시대에 현종과 숙종 대는 정권을 잡기 위해 여러 당파들이 정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김석주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이러한 정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정쟁의 수단은 바로 소차문이었다. 상대 당파에 대한 공격과 자신을 지켜내는 수단으로 소차문이 활용되었다. 이러한 외적 환경에서 문장가 김석주는 163편이라는 소차문을 남길 정도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활동을 하였다. 소차문은 내용별로 다양하게 분류되는데 김석주가 가장 많은 글자 수를 할애한 분야가 바로 상대방의 공격에 대해 무고함을 입증하는 소차문이었다. 변무소라고 하는 이 분야의 소차문은 상대방의 공격적인 탄핵에 반박을 하며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는 것이 중심이다. 변무소는 당사자의 생사권과도 직결되는 것인 만큼 다른 분야의 소차문보다 더욱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전개된다. 그중 하나인 <因正言趙根避辭辭職疏>에는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며, 분량적으로도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많은 글자 수를 할애하고 다양한 설득 요소를 활용하였다. 그는 오해받았던 상황을 재현하여 논리성을 확보하고, 진위를 밝히는 데 효과적인 설득 전략을 사용하여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성공하였다.


Kim Seok-ju lived in an age of the rage of faction. In Joseon Dynasty period of the King HyeonJong's and Sukjong's Reign, various political groups throw oneself heart and soul into a political contest. Kim Seok-ju the led political situation as the maternal relatives of the King. Appeal style prose is a political subject. Appeal style prose was means of self-defense from the political opponent. In this environment, Kim Seok-ju as writer are particularly inventive in this area with writing 163's appeal style prose. Appeal style prose is divided various field. In Appeals of innocent situation, Kim Seok-ju put efforts and many time. False accusation appeal style is centered on defense from opponents' attacks about aggressive appeals. Appeals of innocent situation is directly connected with the right to life and death. So it is written more precisely and dialectically than other appeals. In Kim Seok-ju's appeal style prose, one of them, <因正言趙根避辭辭職疏> have these features. These characteristics is prepared and quantity of contents with many characters. He reappear circumstances which is misunderstood to secure logic. Also he utilize a persuasion strategy that could clarify truth and succeed to prove his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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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국 고대 목간(木簡) 및 금석문(金石文)에 보이는 고유한자(固有漢字)의 양상과 구성 원리

저자 : 윤선태 ( Yoon Seon-tae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9-66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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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를 수용 학습했던 한국 고대사회에서는 한자 형성의 여섯 가지 원리, 즉 六書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기존 한자의 뜻을 조합해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會意字 방식이 고유한자 생성에서 가장 일찍 등장하고, 가장 일반화된 구성 원리로 확인된다. 우리 최초의 고유한자 사례인 '창고 椋'자도 會意의 원리로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에서는 한자문화의 성숙과정에서 더욱 많은 고유한자들이 생성된다. 그 한 축은 최초의 '椋'과 같은 '䢘', ' ', '鎰' 등 會意字의 증가이며, 다른 한 축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文書行政의 발달과 궤를 같이하여 合字의 書寫慣行에서 생성된 '忄吏', '畓', '畠', '□' 등과 같은 고유한자들이다. 이를 통해 한국고대 고유한자의 대부분은 會意와 合字의 원리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會意字의 부류들은 글자의 각 변을 구성하는 두 글자가 상용어휘가 아니며, 의도적으로 글자들을 선택하여 조합했거나 글자의 일부 획을 없애는 등의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생성된 시기의 문화적 기초가 사라지면 그 글자 역시 생명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측면을 강하게 띠었다. 지명에 쓰였던 탓으로 '䢘'는 고유명사 속에서 예외적으로 생명을 이어갔지만, 나머지 글자들 특히 '椋', '鎰'처럼 중국 한자에서 똑같은 자형이 다른 뜻으로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글자들은 그 쓰임새가 지속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고대나 고려를 하한으로 글자로서의 생명력이 소진되었다.
한편 合字란 “연속되는 둘 또는 그 이상의 한자를 수직이나 수평 방향으로 한 글자처럼 합쳐 쓴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畓'자는 '水+田'을 합한 글자라는 점에서 會意字의 범주에 포함될 수도 있지만, 앞의 椋, 䢘,  , 鎰 등의 부류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상용어휘의 합자에서 훈과 음을 가진 완벽한 한 글자로 생성되었기 때문에, 또 문자 속에 두 글자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어서 글자의 생명력도 끊어지지 않고 현재까지 지속되었다.
끝으로 월성해자 출토 <목간17호>에서 확인되는 '咊'자를 묵서 내용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이 '咊'자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새길 섭(석)'의 뜻을 지닌 고유한자이며, 그 생성 시점이 6세기~7세기 전반의 신라로 소급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 이 글자의 '口'는 새기다, 쪼다(啄)의 뜻을 가진 의미부이며, 禾는 의미와 관계없이 아로새긴다는 뜻에 해당되는 우리 고유의 음만을 표현하기 위해 결합시킨 形聲字가 아닐까 제안해보았다.


In ancient Korean society, where Chinese characters were accepted and studied, they understood the Six principles of Chinese character formation(六書). Compound-ideograms(會意字), the method of creating new characters by combining the meanings of existing Chinese characters was found to be the earliest in the creation of unique characters and the most generalized composition principle. It is thought that our first case of unique characters, 'Warehouse 椋', was made with the same principle.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Silla produced more unique characters in the process of maturing Chinese characters. One axis is an increase in the number of Compound ideograms, such as 䢘,  , and 鎰, while the other is Combining-two-letters(合字), new unique Chinese characters, such as 忄吏, 畓, 畠, and □, which were created by the calligraphy habit of combining two letters and pasting them together in line with the development of document administration since the Three Kingdoms Period. This shows that most of new Hanzi characters made in ancient Korea were created from the principles of Compound-ideograms and Combining-two-letters.
Finally, through a new interpretation of the '咊' found in the wooden document No. 17 excavated at the Wolseong moat in Gyeongju, it was emphasized that the letter '咊' was unique character to the meaning of 'engraving 咊(seop)', which was used until the Joseon Dynasty through Goryeo, and that the date of its creation could be traced back to Silla in the 6th to the early 7th century. I also suggested that the letter “口” is a semantics with the meaning of engraving and pecking, and that the letter “禾” is sound of seop. This shows that 'engraving 咊(seop)' was created from the principle of Phono-semantic-compounds(形聲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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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00년대 이후 부여사(夫餘史) 연구 동향과 'POST 동북공정

저자 : 이승호 ( Lee Seung-ho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7-87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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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0년대 이후 한·중 학계의 부여사 연구 동향을 살펴보되, 특히 동북공정 이후로 두 나라의 부여사 연구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 분석할 목적으로 준비하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2007년 2월을 기점으로 종료되었지만, 동북공정에 기초한 중국학계의 연구 방향과 기조는 현재도 여전히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배타적 역사 연구 경향이 부여사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강하게 미치고 있음을 본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중원왕조 중심의 역사와 질서 속에 부여를 종속시키는 중국 학계의 연구방법론은 부여사 연구를 기형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많은 우려를 자아낸다. 즉 지금의 중국 학계 부여사 연구는 '부여사'에 변방성과 종속성을 덮어씌움으로써 '온전히 부여를 주인공으로 하는 역사' 연구를 불가능하게끔 만들어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문에서는 앞으로의 한국 학계 부여사 연구 방향에 대해서도 간단하게나마 짚어 보았다. 요점은 단순히 부여사를 한국 역사로 주장하는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여의 역사를 그 자체로 분석하고 연구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한국사를 넘어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부여사를 탐구할 수 있는 기반과 연구 풍토를 안착시켜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This article observes the research trends of Buyeo(夫餘) history of Korean and Chinese academic circles after the 2000s and in particular, it was prepared for the analysis of aspects through which the Buyeo history research of these two countries were developed after the Northeast Project(東北工程). The Northeast Project of China concluded in February of 2007 but the research direction and basis of Chinese academic circles based on the Northeast Project are still steadily being maintained. Also, this study confirmed that such exclusive history research trends strongly affect the field of Buyeo history.
There are great concerns that the research methodologies of Chinese academic circles that make Buyeo subordinate to history and order focused on the Central Plain dynasties(中原王朝) like that of the present can deform research on Buyeo history. In other words, research on the history of Buyeo conducted by Chinese academic circles that is still trapped within the influence of the Northeast Project covers 'Buyeo history' with peripheral properties and dependency, having the risk of making research on 'history that is solely focused on Buyeo' impossible.
Within such problem awareness, this article pointed out the research direction of Buyeo history of Korean academic circles. The point is that the history of Buyeo should not simply be dealt with through methods that adhere to exclusive positions that argue it to be Korean history. Instead, emphasis is placed on the need to analyze and research the history of Buyeo on its own and to settle researching climates and foundations on which the history of Buyeo can be explored, not simply as Korean history, but on East-Asian dimen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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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20년 청산리대첩의 배경과 신흥무관학교

저자 : 박성순 ( Park Sung-soon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9-110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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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20년 청산리대첩과 신흥무관학교와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밝혀보고자 하였다. 특히 북로군정서가 조직될 때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대거 가담하였다는 통설에 더해서, 북로군정서가 탄생하기까지 좀 더 다양한 이면의 사실들을 신흥무관학교의 성장 발전과 관련하여 기술하였다.
신흥무관학교와 부민단의 역량이 축적되면서, 1918년에는 서북간도의 중심인 길림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 결과 1919년 2월 길림에서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을 주축으로 한 대한독립의군부가 조직되었다. 대한독립의군부는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국내외에 배포하였으나, 조직적 무장투쟁을 위해서 길림군정사로 재편하였다. 길림군정사는 북로군정서의 직접적인 모체가 되었다.
1919년 10월 길림군정사의 군사 전략가들과 대한정의단이 합작하여 북로군정서가 탄생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무장투쟁 기관으로의 변모를 꾀하였지만, 대종교나 공교회 중심 인물들이 대부분이어서 사실상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군사전략가들이 많이 참여한 길림군정사 인사들에게 북로군정서 사령부의 요직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홍범도 부대에도 참여하였다. 서로군정서 교성대가 안도현으로 이동하면서 홍범도부대와 합류하였고, 그들이 제공한 무기로 무장하여 청산리전투의 최대 격전이었던 어랑촌전투에서 김좌진 부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20년 청산리대첩은 단순히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가 '우연히' 거둔 전승이 아니었다. 청산리대첩의 연원에는 신민회원들의 여망이 신흥무관학교로 온축되어 발전한 대한독립의군부 - 길림군정사 – 북로군정서로 이어지는 도도한 무장투쟁의 흐름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온축된 힘이 홍범도 연합부대와의 협동을 통해서 청산리대첩을 통해서 발휘되었던 것이다.


This paper aimed for confirming the connection of Qinshanli Warfare and Sinheung Military School. Especially in addition to that when Northern Route Military Command was built many members of Sinheung Military School joined in it, I tried to write more various hidden facts to make Northern Route Military Command organized and developed.
As the capacity of Sinheung Military School and Bumindan accumulated, they spreaded out their power into Jilin City, the center of Western and Northern Manchuria in 1918. Therefore Korean Independence Headquarter of Righteous Army was organized by people related in Sinheung Military School on February of 1919. Korean Independence Headquarter of Righteous Army was reorganized into Jilin Military Headquarter for systematic armed struggle. Jilin Military Headquarter became the direct root of Northern Route Military Command.
In October of 1919, militarists of Jilin Military Headquarter and Korean Righteous troops together organized Northern Route Military Command. Korean Righteous troops aimed for armed forces but it had to give exclusive power to members of Jilin Military Headquarter because there were nearly religious men in Korean Righteous troops.
The alumni of Sinheung Military School also participated in General Hong's armies. Student Soldiers' troops of Western Route Military Command moved into Antuxian for meeting General Hong's armies and they armed with the weapons given by General Hong's armies. Student Soldiers' troops of Western Route Military Command with arms fought in connection with Northern Route Military Command at Eorang Village Combat, the biggest battle in Qinshanli Warfare and won big victory.
A Great Victory at Qinshanli in 1920 was not an plain victory on which Northern Route Military Command and the combined armies led by General Hong Beom-do accidentally gained. We can confirm that there were continuous flow of military struggles from Korean Independence Headquarter of Righteous Army, via Jilin Military Headquarter, to Northern Route Military Command on which members of Sinminhoe made through Sinheung Military School. The explosive power was embodied in the field of Qinshanli in connection with General Hong's combined arm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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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우하량 유적 적석총의 축조 목적 재고(再考)

저자 : 원중호 ( Won Joong Ho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1-13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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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牛河梁) 유적은 2003년 공식적으로 발굴이 완료됐다. 현재도 관련 유적들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연구는 꾸준하게 계속된다. 1983년에 확인된 대규모 적석총 군의 존재는 동북 지역의 신석기 시대 후기 적석총해석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본 논문에서는 당시 적석총이 축조된 목적과 사회적 특징을 매장 방법과 출토 유물에 관한 비교·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다. 중국 동북 지역에 있는 적석총에 관한 연구는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꾸준하게 진행되었지만, 위계 구조 집단의 출현 여부에 집중되면서 적석총 무덤 속성의 특징인 축조목적과 거주인의 세계관, 생존 능력과 정신문화의 관계는 불투명한 상태다. 현재도 동북 지역의 신석기 시대후기 적석총 사회들의 한시적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출토 유물들이 대규모 공동체 사회의 특정 위계 집단과의 상관관계 맥락으로 해석되는 문제점은 계속되고 있다. 우하량 서로 다른 지점 적석총(제2, 3, 5, 16지점) 내부의 매장 관습과 출토 유물의 특징을 비교·분석한 결과 자유로운 매장 방법들과 부장품 옥기 특징의 자유로운 변화 양상을 확인했다. 당시 우하량 적석총의 축조 목적을 알 수 있는 고고학문화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행해진 매장 방법들의 발견이고, 둘째는 생동감 있고 자유로운 부장품 옥기의 종류와 그것을 사용하고 관리한 자의 변화, 셋째는 구성원의 이동 및 교류행위가 자유로웠던 적석총 사회 구조의 특징이다.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씨족 사회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영역 표시 수단의 특징이거나, 농경 정착 사회의 규격화된 집단묘로 알려진 우하량 유적 적석총이 축조된 목적을 재고찰하였다.


The sites of NiuHeLiang(우하량) officially excavated in 2003. Even now, studies for the preservation and development of related relics continue steadily. The presence of large-scale Stone mound tombs identified in 1983, provided essential data for the interpretation of Stone mound tombs in the Late Neolithic Period in the Northeast.
In this paper, the process and social features of the build of the stone mound tombs at that time examined through comparative analysis on burial methods and excavated artifacts.
The study of the Stone mound tombs in northeastern China has steadily conducted by scholars at home and abroa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pose of the construction and the resident's mental world view, viability, and spiritual culture, which is characteristic of the Stone mound tombs, is unclear as it concentrated on whether or not the hierarchical structure is mass-produced.
Even now, the problem continues that excavated artifacts reflecting the temporary dynamics of the late Neolithic society in the Northeast region interpreted as the context of the correlation between specific hierarchical groups in large-scale community societies.
A comparative analysis of burial methods and characteristic burial relics found inside the burial gun(the 2, 3, 5, and 16th of NiuHeLiang) confirmed free burial methods and free changes in private burial excellent jade properties.
At that time, three main archaeological culture properties show the purpose of the construction of the Stone mound tombs in NiuHeLiang. First, the discovery of burial methods conducted in different locations. The second lively and free type and use of burial goods jade and the change of manager(specialist). The third is the characteristic of the social structure of the Stone mound tomb's social members' movement and exchange activities were free. Based on this, the process of the build of the sites of NiuHeLiang(우하량), known as the standard group tomb of the agricultural settlement society, was reconside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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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석 서석화가 살았던 구한말은 한일합방, 국권상실 등 민족적 위기의식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경설유편』은 그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편찬되었다. 비록 청석이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지만 퇴계, 갈암, 대산, 정재의 경설을 『경설유편』에 정선해 넣은 사람은 바로 청석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청석이 『경설유편』을 편찬한 의도와 학봉학파의 경학적 특징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청석이 『경설유편』을 편찬한 의도는 당시 민족적 위기의식 속에서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던 이유와 자신이 몸 담았던 학봉학파에 대한 학문적 자부심을 되살리고자 했던 의지에서 찾을 수 있겠다. 청석은 학봉학파 대대로 내려온 경설을 계승·발전시키며 '敬'을 중심으로 한 실천적 학풍이나 異說에 맞서 대처하는 방법 등을 일깨워 자주적 민족의식 고취를 통해 이를 현실 생활에 직접 접목시키려는 실천 의지를 『경설유편』에 반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After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and the loss of national sovereignty in the late Joseon period, there existed a growing consciousness of the national crisis. During this period of crisis, Seo Seok-hwa published the 『Gyeongseolyupyeon』 by carefully selecting and compiling the doctrines of Confucianism that had been explicated by Yi Hwang, Yi Hyeon-il, Yi Sang-jeong, and Ryu Chi-myeong. This study confirms the purpose of the book and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the Chinese Classics that had been expounded by the Hakbong School. When compiling the 『Gyeongseolyupyeon』, Seo Seok-hwa intended to suggest that the whole nation needed something which could play a pivotal role in overcoming the national crisis. Seo Seok-hwa also attempted to revive the Hakbong school with which he was academically involved, as he inherited and developed the Chinese Classics that had been explained by and handed down for generations in the Hakbong school. Moreover, he centered on the idea of respect [Jing, 敬] explicated by the Hakbong school, and stood against different schools that pursued practicalities or erroneously interpreted the Chinese classics. Finally, Seo Seok-hwa sought to promote national consciousness for the public to put his idea into prac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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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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