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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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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5)~29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283
인문과학연구
29권0호(2019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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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후보

1<기획논문1 신북방문화와 문화외교> 협업전시부터 공동발굴까지 - 상해박물관의 아시아에 대한 시각 -

저자 : 천지에 ( Chen Jie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3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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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박물관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종합적 고대예술박물관 중 하나로 해외와의 교류와 협력을 중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협업전시는 박물관의 가장 전통적인 교류방식이다. 아시아의 경우 지역 내 박물관 및 연구기관과 연계하여 중요 전시를 적지 않게 개최하기도 하였다. 초장기 협업전시의 다수는 일본과 공동으로 개최하였지만, 점차 한국 및 동남아, 서남아 등지로 확대하였다. 최근 몇 년 동안 상해박물관은 시야를 넓히면서 새로운 협력 모델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공동발굴'이었다. 본문은 먼저 아시아 내에서 교류가 전개되는 과정을 정리하고, 협업전시 과정에서 끊임없이 심화 되고 확대되는 교류의 방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어서 최근 몇 년간 상해박물관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을 논하고자 하며, 이에 2018년도 스리랑카와 함께 진행하였던 공동발굴의 일부 성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협업전시부터 공동발굴에 이르기까지 상해박물관의 대외교류에 있어 끊임없이 넓혀가는 협력적 지향과 모델을 살펴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아시아에 대한 시각이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museums of ancient art in China, the Shanghai Museum values exchanges and cooperation with foreign countries, while collaborative exhibition is the museum's most traditional mode of exchange. In Asia, major exhibitions were held in conjunction with museums and research institutes in the region. Many of the initial collaborative exhibitions were held jointly with Japan, but gradually expanded to include Korea, Southeast Asia, and Southwest Asia. In recent years, the Shanghai Museum has expanded its horizons, and a new model of cooperation has been tried: joint excavation. The text first outlines the process of the museum's exchanges within Asia, and analyzes its gradual development and expansion in the course of collaborative exhibitions. It then discusses the museum's focus in the Asian region in recent years, and introduces part of the achievements of the joint excavation with Sri Lanka in 2018. From collaborative exhibitions to joint excavation, the Shanghai Museum's ever-expanding cooperative orientation and model in foreign exchanges can be revealed. In addition, one can also see that the museum's view of Asia is becoming clearer and more focused than ever before. In future overseas cooperation, the Shanghai Museum hopes to further contribute to the exchange and mutual understanding of local culture by seeking a pluralistic method of coop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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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획논문1 신북방문화와 문화외교> 대만의 아시아예술사 연구 - 국립고궁박물원의 예를 통해 -

저자 : 웡위원 ( Weng Yuwen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7-6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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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국립고궁박물원의 예를 통해 최근 대만의 활발한 아시아예술사 연구의 현황을 소개하고, 아시아예술사 연구의 기원과 변천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대만에서 아시아예술사 연구가 시작된 초창기에는 중국예술사가 핵심이었다. 중국예술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시작점은 고궁 문물이 1949년 바다를 건너 대만에 오면서 부터이다. 대량의 중국 문물을 연구하기 위해 정부는 박물관과 관련 연구 인력을 적극 육성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의 노력을 거쳐 대만의 중국예술사 연구자들은 서예, 회화, 도자, 청동기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각지에서 대량의 고고발굴품들이 발견되면서 대만 연구자들의 강점이 점차도전을 받고 있으며, 특히 공예미술품은 그 형세의 전위에 놓여있다. 이를 계기로 대만의 연구자들은 중국과 아시아 간 이루어진 물질과 문화교류의 시각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고, 옛 대만이 아시아와 유럽 무역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역할을 맡았다는 점 역시 크게 부각되었다. 심지어 일본, 한국, 베트남, 태국, 중동 등 아시아 각지까지 그 연구범위가 확대되었다. 문화교류와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중시하는 추세에 따라 서예와 회화 등의 학문 역시 궤를 같이하였다. 아시아 다른 나라문물의 특징에 대한 연구가 점차 심화되면서, 연구자들도 고궁에 소장된 청궁의 작품 중 다수의 아시아 유물을 가려내기 시작하였고, 이는 동시에 중국과 아시아 각국 간 사절이나 무역 등의 과정을 통해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 변화하는 연구 방향의 추세 속에서 국립고궁박물원은 최근 10년간 아시아예술사 연구에 주력하였다. 아시아의 시야를 갖춘 전시와 세미나를 기획하는 것 외에, 「아시아 예술 문화」를 주축으로 한 남부 분원의 설립 역시 기획되어 2015년 완공과 함께 개막하였다.


The text introduces the present state of the recent active study of Asian art history in Taiwan through the example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and tries to reflect on the origin and the transformation of Asian art history research. In the early days of the study of Asian art history in Taiwan, Chinese art history was the key. An important starting point in the study of Chinese art history is when the ancient collections of Palace came to Taiwan across the sea in 1949. To research the) large quantities of Chinese collection, the government has begun to actively foster museums and related research personnel. After decades of efforts, the researchers in the history of Chinese art in Taiwan have come to occupy an important place worldwide in the fields of calligraphy, painting, ceramics and Bronze. However, in the recent years, the researchers in Taiwan have been increasingly challenged to discover the large quantities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various parts of China in particular, the craft sector is representative. This has lead researchers in Taiwan to change their direction to the view of materials and cultural exchanges between China and Asia. It was also highlighted that ancient Taiwan took on a role as an important hub for Asian and European trade. The scope of the research has even expanded to other countries, including Japan, South Korea, Vietnam, Thailand and the Middle East. The study of calligraphy and painting also joined, as the research on cultural exchanges and interactions was valued. As the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other Asian collections gradually deepened, researchers also began to identify a number of Asian artifacts in the Palace's collection, which became historical evidence at the same time that they were interacting with each other through processes such as envoys and trade between China and other Asian countries. Amid the changing trend of research,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as focused on Asian art history for the last 10 years. In addition to planning exhibitions and seminars with a view of Asia, the establishment of the Southern branch, led by “Asian Art Culture,” was also planned and opened with completion in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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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획논문1 신북방문화와 문화외교> 퐁피두센터 - 국가 메세나에서 문화 민주화, 문화외교의 주역으로 -

저자 : 박혜영 ( Park Hai Young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7-9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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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프랑스 퐁피두센터 성공비결을 그 탄생과정, 건립 동기와 역사적 배경을 통해 분석해보고, 21세기 문화민주화의 새로운 행보, 문화외교 활약상을 살펴본다. 1968년 5월 정치적인 위기 상황을 겪은 이듬해 퐁피두대통령이 직접 구상하고 건립을 추진한 퐁피두센터는 불가능한 이상향으로 여겨졌던 문화 분야의 민주주의- 모든 국민에게 문화예술기구를 통한 개인 정체성 재구축이라는 2차 사회화 과정의 동등한 기회 부여-를 시도했다. 이런 관점에서 퐁피두센터는 국가메세나와 프랑스 대혁명, 이 이중의 프랑스 전통을 계승한다. 문화민주화 개념은 기존의 건축문법을 뒤엎는 퐁피두센터 건물설계에서, 문화의 엘리트주의와 결별한 문화 개혁에서, 무상의 대중개방을 표방하는 공공서비스개념에서 드러난다. 문화와 정치의 연대성의 예외적 성공사례인 퐁피두센터의 21세기 문화 민주주의 확대시도를 문화의 탈중앙편중화와 대중 찾아가기 사례에서 알아보고, 말라가, 브뤼셀, 상하이 퐁피두센터를 통해 퐁피두센터의 문화외교 활약상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secret to the success of the Pompidou Centre, France's leading contemporary art museum and cultural complex. It will delve into the creation, motive, historical background, and impact of the Pompidou Centre on French society an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t large. Born from the national patronage of president Pompidou, just after the political crisis of May 1968, the Pompidou Centre tried to provide the French people with secondary socialization to reconstruct their identity through the contact of the arts and the knowledge. Hense the Pompidou Centre inherited the French tradition of national mecenat and the French Revolution. The revolutionary conception of the cultural democratization reflected in the architecture of the Pompidou Centre subverted established methods of construction. It's cultural innovations broke with the tradition of elitism and instead offered an free open door policy to the public. As an exceptional successful case of cultural and political solidarity, the Pompidou Centre reestablished Paris as the capital of art in the end of 20th century. In the 21th century, the efforts to grow the cultural democratization are continuing through the decentralization of the Centre Pompidou-Metz, and the proactive approach to go to meet the visitors of the Mobile Pompidou Centre. Due to these strong points, the Pompidou Centre has become a leader of cultural diplomacy with the expansion plans of the Pompidou Centre provisoire in Malaga, Brussels and Shang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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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획논문1 신북방문화와 문화외교> 북한 수예와 여성 미술

저자 : 권행가 ( Kwon Heang-ga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9-12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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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미술사에서 여성미술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동경 여자미술학교 유학생의 80% 이상이 자수과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현모양처교육체제 속에서 이들은 전통적 여성상에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공적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타협점으로 자수과를 선택했다. 이들은 유학 후 여교사가 되기도 하고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급미술과 공예간에 존재했던 위계 질서 뿐 아니라 공예 내에서도 존재했던 남녀간의 성별화된 위계질서라는 이중의 위계질서 구조 속에서 이들이 미술가로 자리잡기는 어려웠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여자미술대학의 설립 초기에는 자수과가 독립된 과로 존재했으나 1981년 이후 섬유예술로 편입되면서 실질적으로 그 의미와 기능을 상실했다. 반면 북한의 경우 해방 직후부터 국가의 강력한 개입 하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공예의 대표적 장르로 자리 잡았다. 천리마시기부터 현재의 만수대 창작사 수예창작단에 이르기까지 수예는 주요 수출상품이자 정치적 사상 교양 수단로 발전되어왔다. 남한에서 자수가들이 미술계 내에서 잊혀진 것에 반해 북한에서의 수예가는 고귀한 항일혁명전통의 계승자이자 혁명적 여성 영웅의 계승자로 자리잡았다. 1970년대 이후 김정숙의 신화만들기가 진행되면서 수예는 김정숙의 항일활동의 대표적 예이자 여성들이 따라해야 할 고귀한 전통이 되었다. 그러나 창작가와 기능인 사이에 젠더에 기초한 이분법적 구도는 여전히 엄존하고 있다. 북한미술계에서 수예가들이 인민예술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인정을 받는 반면, 수예부문에만 여성미술가들이 집중된 이유는 혁명적 노동자이자 가부장적 위계 질서를 내면화한 여성이라는 이중의 역할이 요구되고 있는 북한의 젠더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Little female artists are acknowledged in Korean modern art history. This is, for the most part, because of more than 80% of Korean overseas students who studied at Joshibi University of Art and Design majoring in embroidery. Within the education system that raises good wives and wise mothers, women chose the embroidery department as a compromise to be able to operate in the public sphere without any violation of the traditional feminine image. After graduation, some became teachers while the others exhibited their works in the craft section of Chosun Fine Art Exhibition. However, becoming an artist was nearly impossible for them as the hierarchical order between genders existed within the craft art sector, let alone the hierarchical distinction between high art and craft art.
After the Korean War, in South Korea, the embroidery department had been independent in newly established women's art college only until 1981, when it was incorporated into textile art and practically lost the meaning and function of its existence. On the contrary, the embroidery was settled as a representative genre of socialist realism craft since the liberation under the strong intervention of the state in North Korea. From the Chollima period to today's Mansudae Art Studio, embroidery has been developed both as a major exporting product and a means of political education. While embroidery artists in South Korea are forgotten in the art world, embroidery artists in North Korea have become successors of the noble anti-Japanese revolutionary tradition and to revolutionary female heroines. As Kim Jong-Suk's myth was modeled since the 1970s, embroidery has become a representative example of Kim Jeung-suk's anti-Japanese activities, as well as an honorable tradition to be followed by women. Nonetheless, there still exists the dichotomy between the creator and the craftsman based on gender. In the North Korean art world, although craftsmen are credited as People's artists, the reason behind female artists being concentrated only in the embroidery sector is closely related to North Korea's gender ideology that demands the dual role of a revolutionary worker and a woman who completely internalized the patriarc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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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기획논문1 신북방문화와 문화외교> 북한 조선미술박물관의 설립 경위와 초창기 전시 체계

저자 : 박윤희 ( Park Yoon-hee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7-15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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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948년 정권 수립 후 남한과의 체재 경쟁 속에 국립박물관의 창립을 서둘렀다.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내세우고 인민교화를 통해 김일성 유일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그리고 미술박물관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6·25 전쟁으로 평양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한다는 명목 하에 주변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박물관 신축을 서둘렀다. 1948년 창립을 선포한 이후 약 70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미술박물관은 남한에 비해 수적으로 부족했던 미술작품을 모으기 위해 북한 내 개인 소장품 뿐 아니라 국외에 소재하고 있던 미술문화재까지 구매와 기증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수집했다. 오늘날 조선미술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전통회화 수 백점은 대부분 초창기에 수집된 것들이다.
북한의 조선미술박물관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模寫圖)부터 최근에 창작된 조선화(朝鮮畵)까지, 한 곳에서 관람할 수 있게 전시하였다. 이와 같은 전시체계의 구성은 1965년 3월 11일 김일성 수상의 조선미술박물관 현지지도를 통해 강화되었다. 그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모사도 전시를 더욱 확대할 것을 지시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사상과 계급의식을 드러내는 그림들과 전통회화 가운데서도 선묘와 채색이 결합된 화풍의 작품들을 크게 칭찬하였다. 그가 작품을 평가하고 지시내린 내용들은 조선미술박물관의 작품 수집과 전시의 규범이 되었으며 이후 조선화 창작의 지침이 되었다.


After establishing a new regime 1948, North Korea hastened to build national museums as part of their competition with South Korea to demonstrate the supremacy of their political system. As a means to underline its historical legitimacy and strengthen the monolithic system under Kim Il-sung through public education, North Korea pushed for the establishment of a history museum, a museum of the revolution, and an art museum. Even though the entire city of Pyongyang was essentially destroyed in the Korean War, the North Korean regime accelerated the construction of new museums through financial and technical aid provided by its neighboring socialist nations in the name of founding an ideal socialist state.
Over the more than seventy years since the proclamation of its founding in 1948, the Korean Art Gallery has expanded its art collections, which were smaller than those in South Korea, in various ways. These include the purchase and donation of private collections in North Korea as well as works from overseas areas. Most of the hundreds of traditional paintings in the current collection of Korean Art Gallery were assembled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gallery.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nd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n South Korea respectively feature pre-modern and modern and contemporary artworks. In contrast, the Korean Art Gallery in North Korea exhibits works from all eras, from a copy of a tomb mural from the Goguryeo Kingdom to contemporary Joseon (North Korean) paintings. The exhibition framework allowing visitors to trace the history of Korean art in chronological order originates from the idea that contemporary artworks are produced based on the traditions of the past. This exhibition system was enhanced by on-the-spot guidance from Premier Kim Il-sung at the Korean Art Gallery on March 11, 1965. Kim not only ordered the expansion of the exhibit on a copy of a Goguryeo tomb mural, but also highly praised artworks that effectively demonstrate a sense of socialist class consciousness and others that combine drawing and color. These comments by Kim established criteria for Korean Art Gallery's further collection and exhibition and provided guidelines for creating contemporary North Korean pain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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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DMZ는 아직도 살아 있는 세계 냉전사의 현장으로서 분절된 경계의 상징이자 공유의 거점이 되는 공간이다. 본고는 DMZ를 유·무형적인 문화 거점의 영역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는 전쟁의 역사로 단절되었으나, 서로 공유하고 있는 한반도의 경계를 유·무형적으로 연결 가능한 플랫폼으로서 인식한 것이다. DMZ 프로젝트에 플랫폼을 결합한 개념은 DMZ를 매개로 동시대적 이슈 안에서 심리적 경계까지 포괄하는 확장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함이다. 현 시대에 있어서 DMZ는 기억을 저장하고 확장하는 플랫폼으로서 문화의 중심으로 기능할 수 있는 잠재가능성을 내포한다. 이 연구의 중심이 되는 DMZ 플랫폼의 개념은 이 시대에 필요한 가치관으로서 향후 DMZ 관련 연구에 있어 동시대성 안에서 문화의 영역을 규정하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작용할 것이다.


The DMZ on the Korean Peninsula is a place of paradox where North and South Korea, who are complete strangers to each other but inseparable at the same time, coexist. As a living vestige of Cold War, the DMZ has become a symbol of divided country and the site for a “platform,” a foothold in sharing. Research on the DMZ as the essence of the history of the Korean War and the huge war heritage archive have been actively carried out, but most of them are policy studies mainly focusing on national and regional governance strategies for the area. Since 2010, however, studies have been published suggesting the DMZ as a cultural resource and presenting methodologies for incorporating arts and culture in the DMZ and the area along the border. This paper goes further from the previous studies, defining the DMZ as a stronghold for both tangible and intangible culture. It recognizes the borderline in the Korean Peninsula as a platform that can connect the two Koreas - divided due to the war but sharing the same boundary- in tangible and intangible ways. Combining the concept of platform in an art project at the DMZ aims to expand the idea to include psychological boundaries within contemporary issues through the DMZ as medium.
Projects for contemporary arts and culture at the DMZ area focus on the “relationship” that leads to our lives. In fact, the paradoxical place, the DMZ where reality and fantasy, and borderline and stronghold coexist, overlaps with our reality. And there, our past is remembered, statements of the present are made and creations for the future are realized all through art and culture, an empathic mechanism. To clarify this concept, this paper focuses on case studies of two site-specific projects which took place in and around the DMZ, aiming to reflect our time. The Real DMZ Project, an ongoing project at Cheorwon, Gangwon Province which has been carried out since 2012 trying to cross the psychological and physical border of the divided country, falls into this category as well as The DMZ Peace Platform, a project produced at the borderline between public and artistic nature at a former US military base, Camp Greaves in the DMZ in Gyeonggi Province. The two examples symbolize the process of preserving the DMZ's identity with artists and creating new values in our time through their creative endeavor with an eye on the future.
Based on this research, the DMZ has the potential to be a platform of the cultural center of our time that can archive our memories and expand them.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view the DMZ as the territory of arts and culture from the perspective of sharing and exchange. The concept of the DMZ platform - the focus of this study - is the necessary values of our time which will serve as a new methodology that defines the realm of culture for the future DMZ research and related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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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서울의 동북부 지역 중에서도 도봉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는지 20세기 후반이라는 시점에 집중해 연구한다. 1980년대 중반은 신군부세력이 도시개발 사업을 통해 '사회의 안정'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성공시키려 했던 시기이다. 또한 서울 동북지역 외각에 자리한 도봉구가 주택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간으로 주목받은 시기이다. 더불어 당시는 '수도권 정비'라는 거대한 흐름이 법적 근거를 가지고 집행된 시점이기도 하다. 국제스포츠 대회 유치도 서울의 경관변화에 한 몫을 했다. 서울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해야 했다. 때문에 당시 서울의 도시개발은 단순히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사업을 넘어 그야말로 획기적인 수준의 공간변화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도봉구는 여러 변화를 거쳐 現도봉구의 모습을 갖췄다. 만들어질 당시부터 넓은 면적으로 구성되었던 도봉구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구성된 공간이 아니었다. 일부는 시 외곽 거주지로써의 역할을 했지만, 또 다른 일부는 공장지대와 판잣집이 가득한 지역도 있었다. 본고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 하에서 1973년 도봉구가 만들어질 때 덧씌워진 '외곽'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구 內의 분절된 생활권을 만들어갔는지 확인한다. 또한 정체되어 있던 도봉구의 도시개발사업이 서울 '동북권' 개발이라는 호재를 만나 '창동지구'개발로 연결될 수 있었던 과정도 함께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창동개발 이후 도봉구 전체로 번진 주택개발로 인해 도봉구라는 공간이 어떻게 분화되고 변화해갔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1980년대 신군부에 의해 진행된 서울시 도시개발 사업에서 도봉구는 중랑천을 기준으로 왼편과 오른편의 개발 속도에 차이를 보였다. 때문에 현 도봉지역의 부동산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창동지구' 개발은 시기도 비슷했고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는 점에서 마들평야 개발과 비교되기 좋았다. 다만 두 개발 사업은 서울의 주택부족 문제를 해결한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계획과정부터 차이를 가지기도 했다. 생활권 차이와 재개발 조건의 차이도 컸지만 행정적으로 추진과정에서 차이를 보였다. 창동이 서울의 대표적 공장지대였기 때문이다. 창동의 공장은 오랜 시간에 걸쳐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화해 갔다.


This paper focuses on the late 20th century and examines the process how Dobong-gu in Seoul became as it is. The mid-1980s was a time when the new military forces tried to achieve both “social stability” and economic growth through urban development projects. It is also a time when Dobong-gu, located outside of northeastern Seoul, upraised as a place to solve the housing shortage problem. In addition, the huge trend of “regeneration of the Seoul metropolitan area” was carried out with legal biasis. In the midst of these changes, Dobong-gu has undergone various changes to be now. Dobonggu, which was composed of a large area from the time it was made, was not a space consisting of a single identity. Some took a role as residences outside the city, and the others played role as factory zones and shackles. In the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s urban development project conducted by the new military in the 1980s, Dobong-gu was shown differences in the development speed of the left and right sides based on the Jungnang-cheon. As a result, the value of real estate in the current Dobong area has been forced to fall relatively low. On the other hand, Changdong, which used to be a factory zone, has been transformed into a large apartment complex over a long period as part of the renovation of the Seoul metropolitan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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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해방 이후 도봉구 지역을 관통하던 경원선 철도의 전철화와 이에 따른 주택지 조성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오늘날 도봉구 일대는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장된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되었다. 서울시는 '장래市勢 팽창에 대비'하기 위하여 '수도기본정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는 신편입지에 6개의 부도심 대상지를 선정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도봉구 지역에는 창동을 핵으로 한 숭인지구가 계획되었고, 지하철 4호선이 우이동에서 창동을 우회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서울시의 계획은 재원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고, 1968년 국가안보위기 직후 국책사업으로 전환되었다.
1970년 서울시가 계획한 것은 수도권 종합교통시스템이었다. 서울시와 교통부가 공동으로 참여한 이 사업은 도심구간을 지하로 관통하고 경인선 철도의 인천과 경부선 철도의 수원, 경원선 철도의 성북까지 연결함으로써 서울의 생활권을 확장시켰다. 이때 경원선 철도의 성북까지만 우선 전철화가 이루어진 것은 1968년 1.21사태를 계기로 수도권 개발에서 국가안보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8년 도심에 교통인구가 집중되자 이를 시 외곽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교통부는 외곽교통망을 확충시킬 수 있는 수도권 전철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경원선 철도의 성북~의정부 구간에서 전철화 사업이 추진되었다. 도봉구 지역은 1986년 경원선 철도의 성북과 의정부 구간이 전철화되면서 도심과 직접 연결되었고, 창동역에서 지하철 4호선과 교차되었다. 이로 인해 도봉구 지역에는 주택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상계신시가지의 건설로 주택단지가 형성되었고, 철도 연선과 중랑천변에 위치했던 공장들이 이전한 자리에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이처럼 경원선 철도의 전철화는 도봉구 지역에 대규모 주택지가 조성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railroad electrification of the Gyeongwon Line that passed through the Dobong-gu Area and the subsequent establishment of residential areas after Liberation. The electrification of the subways and railroads built in the 1960s with Seoul's territory expansion enlarged the scope of Seoulites' lives and greatly also affected the Dobong-gu Area. Today's Dobong-gu Area was incorporated into Seoul in 1963 when the administrative district of Seoul was expanded. The Seoul City government has established a 'Capital Basic Maintenance Plan' in order to 'prepare for future expansion of Seoul'. The plan was to select 6 sub-center sites on the vast new site and build urban infrastructures based on them as regional hubs. In the Dobong-gu Area, Soong-in District with Chang-dong as the key area was planned, and Line 4 of the high-speed streetcar was to be connected from Wui-dong to Maljukgeori by bypassing Chang-dong. However, the Seoul City government's high-speed streetcar plan failed to be realized due to a lack of funds and has been converted into a national project right after the national security crisis in 1968. Mayor Yang Taik-sik(梁澤植), who was appointed in 1970, contribut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backbone of the General Transportation System of Metropolitan Area. This project, involving the Seoul City government and the Ministry of Transportation, expanded Seoul's life zones by penetrating a downtown section through the basement and connecting to Incheon of the railroad Gyeongin Line, Suwon of the Gyeongbu Line, and Seongbuk of the Gyeongwon Line. The Dobong-gu Area was directly connected to the downtown in 1986 when the Seongbuk and Uijeongbu sections of the Gyeongwon Line railroad were electrified, and crossed with Subway Line 4 at Changdong Station. This was the result of the expansion of the Metropolitan Area Transportation Network, including the Gangbuk Area, in the late 1970s. This railroad electrification of the Gyeongwon Line has transformed the Dobong-gu Area into a residential area. First, Sanggye New Town was created, creating the largest residential area in northeastern Seoul. And as factories located along the railroad and along the Jungrang riverside moved to the outskirts of Seoul, the apartment complexes were built at the site. As such, the Dobong-gu Area has been included in Seoul's life zones by expanding the transportation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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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기획논문3 덕성 백년사를 탐구하다> 1930년 서울지역학생 연합시위와 근화여학교

저자 : 박현옥 ( Park Hyun-ok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7-27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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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은 '광주'라는 지역을 넘어선 전국적 운동이었고, 이는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 광주에만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들을 재확인시켜준다. 그리고 광주학생사건에 호응하며 서울에서 대규모로 전개된 학생들의 연합시위는 광주학생운동이 광주라는 지역 차원의 운동에서 전국적 민족운동으로 확산되는 분기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29년 서울지역 학생들의 시위는 각 학교에 조직되어 있는 전위동맹 산하 독서회 조직이 활약했다. 근화여학교 학교 역시 전위동맹 측의 격문살포가 자극이 되어 1차 시위에 여학교로서는 선도적으로 참여했다. 1930년 서울지역 2차 시위는 계획부터 온전히 학생들이 주도했고, 특히 여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시위를 조직해 남학생과도 연대하여 대규모연합시위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서울지역학생 2차 연합시위를 이끈 여학교 중에서도 근화여학교 학생들이 적극적인 참여를 보였다는 것은 근화여학교 학생의 회의 참여 비율, 시위 주도자 중 검거자 비율에서 잘 나타난다. 근화여학교 학생들은 '광주의 희생'에 대한 공분과 희생자가 같은 학생 신분이라는 연대의식 속에서 1929, 1930년 두 차례의 서울지역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즉 근화여학교 학생들 또한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셈이다.


The Gwangju student movement was a national movement which has been risen all around the country. The large scale of joint demonstration of students in Seoul that spread out in response to Gwangju student incident contains an important meaning that it has become a turning point spreading from the regional movement of Gwangju to the nationwide movement.
In 1929, the reading clubs under the vanguard unions which were organized in each school were the ones that lead the students demonstration in Seoul. Geunhwa Women's School was triggered by the manifesto of vanguard union and has initiatively participated in the first demonstration among girls' schools.
From the second demonstration in Seoul, students have led the whole process from the beginning. Especially, the distinction of this time is that the female students played a key role in it and developed into a large-scale union demonstration by uniting with male students in 1930. With indignation triggered by the sacrifice of Gwangju and a strong solidarity that the victims of Gwangju are also the same students, the students of Geunhwa Women's School aggressively participated in the two demonstrations in 1929 and 1930. In other words, the students of Geunhwa Women's School were also the main activists of Gwangju student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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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획논문3 덕성 백년사를 탐구하다> 1920~30년대 근화여학교의 연극 활동

저자 : 유미 ( Yoo Mi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7-29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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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920~30년대 일반 대중이 주체로 활동한 소인극 운동의 측면에서 차미리사(1879~1955)가 세운 근화학원과 근화여학교의 연극 활동을 살펴보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루어진 근화여학교계의 연극 활동은 여성이 주체가 되어 운영기금 모집, 민중계몽과 결집, 소통을 주도하였으며, 여학생들로만 구성된 근화의 연극 활동은 연극의 대중화와 서구근대문화 보급에 기여하였다. 당시 근화의 연극 활동은 여성이 주체로서 공동체 활동을 통해 현실을 인식하고 문제 해결 방법을 구성원이 스스로 찾아봄으로써 소통과 여성 집결을 주도하였다. 또한 여성들이 가정으로부터 나와 학교에서 독립성과 자기인식을 배우고 새로운 삶의 방향과 여성상을 고찰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여성에 대한 인식을 계도하도록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1930년대 근화여학교의 학생연극활동은 이전과는 달리 학생들의 사회적 행동으로서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근대연극을 관객에게 소개함으로써 서구문화보급에 기여하였다.


This article looked at the theatrical activities of the Geunhwa Academy and Geunhwa Women's School, founded by CHA, Melissa(1879~1955), in terms of the amateur theatricals movement in which the general public acted as the main agent in the 1920s and 1930s. The theatrical activities of the Geunhwa Women's School in the 1920s and 1930s, which was organized by women, led the operation fund raising, integration and communication, and contributed to the popularization of plays and the dissemination of Western modern culture. At that time, the theatrical activities of Geunhwa, which consisted only of female students, led women's solidarity by recognizing the reality through community activities and finding out how to solve problems on their own. It also provided an opportunity for women to come out of the home and learn independence and self-awareness at school, examine new directions of life. In addition, in the 1930s, the student theatrical activities of Geunhwa Women's School were aimed at public enlightenment as a social activities of students, and contributed to Western culture distribution by introducing modern plays to the aud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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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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