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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Korean Seowo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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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11)~9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69
한국서원학보
9권0호(2019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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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의 서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 등재 과정과 탁월한 보편적 가치

저자 : 이상해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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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18세기 함양 정여창 가와 남계서원의 노론화 과정

저자 : 박소희 ( Park So-hee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5-5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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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우도는 남명학파의 본거지이자 인조반정 이전까지 북인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특히 함양은 정인홍의 문인들이 많아 선조 연간 양홍주, 노사예 등 일부 서인계 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하동정씨 정여창의 차남 계열인 정홍서가 노사예를 두둔함으로써 정인홍의 문인으로부터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는 광해군 대 정인홍의 비호를 받던 정여창의 장남 측과 종사문제로 이어졌다. 이후 정홍서의 후손들은 서인으로 좌정, 무신난에 창의하면서 노론계로 전향하였다.
한편 인조반정 이전 남계서원은 풍천노씨의 참여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신계서원 [향현사] 내 위차문제를 두고 향론이 분열되면서 이는 남계서원 내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 광해군 대 남계서원은 정인홍의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북인계 서원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원록』의 입록 범위도 함양에 한정되지 않고 우도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북인의 실각으로 남계서원은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온과 강익, 유호인의 별묘 제향을 통해 남인화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효종 연간 원장 朴以燾·유사 朴鳴震을 통해 남계서원의 서인화도 일정 부분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숙종 연간 하동정씨를 비롯한 서인계 가문의 참여도 확대되어 갔다.
이후 영조 대 무신난을 겪으면서 남계서원에도 노론계 인사들이 경원장을 지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신난 때 창의한 하동정씨 가문의 참여도 점차 높아졌다. 특히 순조 이후가 되면 과거 많이 참여했던 반남박씨, 남원양씨, 삼척박씨 등은 감소하고 하동정씨의 압도적인 참여 속에 진양하씨, 풍천노씨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향안을 둘러싼 향전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남계서원은 1820년(순조 20) 정여창의 종사를 되찾아온 정홍서를 별묘에 배향, 1849년(헌종 15) 정환필 주도로 風詠樓를 중건하는 등 하동정씨 중심으로 운영되어갔다.


Gyeongsangwu-do was the base of Nammyeong school, and before King Injo's restoration, the region had been strongly influenced by Bukin. Especially, in Hamyang, there were many followers of Jeong Inhong. In the process, Jeong Hongseo, a descendant of the second son of Jeong Yeochang, of The House of Jeong in Hadong, sided with Roh Saye, and was criticized by the followers of Jeong Inhong. It resulted in the conflict with the group of descendants of the eldest son of Jeong Yeochang, protected by Jeong Inhong, in the era of King Gwanghaegun due to the problems of sacrifice services. Since then, the descendants of Jeong Hongseo converted to Seoin and participated in raising an army in the cause of loyalty against the Mooshin Revolt, and converting to Noron-line. 
Before King Injo's restoration, Namgye Seowon was highly dominated by the House of Roh in Pungcheon. However, because of the issue about the order within Shingye Seowon(Hyanghyeonsa], local opinions were disrupted, resulting in disruption in Namgye Seowon. Since then, many followers of Jeong Inhong participated in Namgye Seowon in the era of King Gwanghaegun, it became seowon under the Bukin line. Ater King Injo's restoration, Bukin lost their power, and coverted to Namin line. As a result, Namgye Seowon enshrined Jeong On and Gang Ik in the separate shrine, converting to Namin Line. However, In King Hyojong's reign, Namgye Seowon showed considerable conversion to Seoin Line through cases of the head of Seowon, Park Ido, and Confucian teacher, Park Myeongjin. And in King Sukjong's reign, the participation by the house of Seoin Line including the House of Jeong in Hadong was more extended. 
After that, the Mooshin revolt occurred during King Youngjo's era, and there were Gyeongwonjang from the Noron Line in Namgye Seowon. In the atmosphere, the House of Jeong in Hadong who participated in raising an army in the cause of loyalty against the Mooshin Revolt, increased their share in the participation. And then, the management of Namgye Seowon had been emphasized by the House of Jeong in Hadong as Jeong Hongseo was enshrined in separate shrine after recovering the task of sacrifice services to Jeong Yeochang in 1820(the 20th year of King Soonjo's reign), and Pungyoungru was constructed by leading of Jeong Hwanpil in 1848(the 15th year of King Heonjong's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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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세기 청주(淸州)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송상현(宋象賢) 추모의 정치적 함의 -송상현 사묘(祠廟)와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저자 : 정수환 ( Jung Su-hwa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7-8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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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양란을 전후한 16∼17세기 전쟁영웅의 현창 과정에서 작동한 정치적 배경을 송상현을 제향하는 전국의 祠廟와 청주의 莘巷書院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분석 결과는 17세기 전란 직후의 위기상황에서 정치적 부침이라는 환경과 서원 건립과의 관련성을 추적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임진전쟁 당시 동래성에서 죽음을 맞이한 송상현에 대한 전후 추모 및 현창 양상을 평가했다. 전국에 산재한 송상현을 위한 祠廟의 건립 추이를 추적하여 시대적 배경이 17세기 중엽에 있음을 확인했다. 사묘의 건립 배경으로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 그의 죽음을 둘러싼 평가의 변화 양상을 분석하고, 인조반정을 계기로 서인에 의해 그의 죽음이 殉節로 규정되면서 추숭사업이 본격화하는 과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이 효종조 이후 송준길과 송시열 등 노론에 의해 집중적으로 그의 행적에 대한 정리와 청주 신항서원에 대한 사액 성취로 연결되었음을 파악했다. 이를 통해 송상현의 죽음이 17세기 중엽 송시열에 의해 순절로 규정되고, 그에 대한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신항서원 향사와 사액을 달성하게 되면서 17세기까지 전국에 송상현을 위한 묘우 건립이 실현되었음을 규명했다.
청주의 신항서원에 송상현을 병향하고 서원을 사액하는 과정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의 영향력이 작용하여 송상현에 대한 忠節을 상징화 했으며, 이는 정치적 함의를 가지면서 전국에 송상현 祠廟의 건립과 사액으로 이어 졌다는 이 연구성과는 조선 초기의 이념적 忠보다는 17세기 실천적 忠으로서 송상현에 대한 형상화가 필요했던 17세기를 규명하는데 기여한다.


This essay explores political background in enshrining and establishing Seowon (private academy) and Sawoo (shrine) between 16th and 17th century Choson. The case is Song Sang-Hyun(1551∼1592) who died on the battlefield in the second day of the Imjin war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his Seowon and Sawoo. His dying was regarded as a kind of righteous death during the war due to boosting fighting spirit and suggesting role model. The meaning of his death was highly appreciated from the Manchu invasion of Chsoon between 1627 and 1636. Noron Party, accomplished King Injo Restoration in 1623, evaluated his death as dying in defense of his royalty for country and ideology (Neo-Confucianism), and started worship movement. The leader of this party, Song Si-Yeol, took a key role to enshrine Song Sang-Hyun in Seowon and to appoint royally chartered one. This is because the party and the leader created political doctrine so called northern campaign, wiping away a disgrace in 1636, they need to invent a model case and seize the initiative. Their political rhetoric was sending an expedition to conquer the Qing, as Choson was surrendered by barbarian Manch Qing. After the ShinHang Seowon was to be royally bestowed where he buried, many Sawoo established across the country for him where his birthplace, hometown and battlefield in 17th century. Noron took Song Sang-Hyun's royalty and make him a symbolic icon for their political agenda, then they stay in power for a century. This research proposes that political doctrine was also one of the reasons in founding a Swowon and Sawoo compared with general idea, Neo-Confucian ideological fa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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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세기 남양향교의 운영과 지역사회에서의 위상

저자 : 김자운 ( Kim Ja-woo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7-11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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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현존하는 고문서 자료들을 토대로 19세기 남양향교의 운영 실상을 분석하고 당시 지역사회 내에서 남양향교의 위상을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첫째, 남양향교의 역사를 간략히 검토하고, 둘째, 조선후기 남양향교의 운영상을 19세기 남양향교의 이건 과정, 향교 전답의 유실과 회복, 청금록의 문란과 재정비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19세기 남양향교의 운영에 양반과 평민이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들 각 계층은 향촌에서 자신들의 존재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향교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는지 검토함으로써 조선후기 지역사회 내에서 남양향교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에 대해 해석하였다.
조선후기 향교는 흔히 교육기능을 상실하고 군역을 면제받기 위한 피역소로 전락한 채 간신히 제향활동만을 유지해온 황폐화된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과 달리, 19세기 남양향교는 향교 이건 시 재원의 60% 이상을 양반 유생들의 자발적 기부금으로 확보할 만큼 향교 운영에 유생들의 참여가 매우 활발하였다. 이는 같은 시기 직산향교나 진주향교의 사례와 비교해볼 때 대단한 규모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 남양향교는 언제부터인가 국가에서 지급했던 學田이 제대로 획정되지 않아 재정 기반이 사라지자, 향교 자체 내에서 인근의 전답을 마련하여 운영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향교의 재정난과 관리의 부실로 19세기에는 그 일부가 유실되었으나 19세기 후반 지방관과 교임들의 노력으로 유실된 토지를 되찾고 이를 철저히 관리하기 위한 절목을 마련함으로써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 때 작성한 절목과 1884년 향교 유생들이 작성한 완의의 내용에 따르면, 19세기 남양향교는 단지 제향 활동 뿐 아니라 疏廳으로 활용되는 등 지역 유생들의 향론 집결지이자 다양한 향촌활동의 근거지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18세기 이래로 나타나기 시작한 청금록의 혼입은 당시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상승을 도모했던 남양지역 평민층의 성장과 함께 향교 내 양반유생들의 지위가 점차 위협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교유생들이 명분과 교화를 앞세우며 끝까지 향교에 남아 모칭유학들을 찾아 삭적하고 청금록을 재정비하며 향교를 독점하고자 한 것은 남양향교가 양반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행사할 수 있는 지역사회 내에서의 마지막 활동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후반에는 남양 지역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안곡서원과 사우 용백사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된 상태에서 지역문화의 중심지로서 남양향교의 위상은 이전보다 한층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The Noron of Youngnam may largely be classified in two type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management of Namyang-Hyanggyo in the 19th century and to examine its status in the local community. First, the history of Namyang-Hyanggyo was briefly reviewed. Second, the state of management of Namyang Hyanggyo in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reviewed in terms of the transfer process of Namyang Hyanggyo in the 19th century, the loss and recovery of Hyanggyo-owned land, and the disturbance and reorganization of the Cheonggeumrok(靑衿錄). Third, I reviewed how the gentry and commoners used Hyanggyo to secure their presen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examined the social status and role of Namyang-hyanggyo in the local community. 
Hyanggyo in the late Joseon Dynasty is often described as a devastated state that has barely retained the function of sacrifice while losing its educational function. However, contrary to this prejudice, when the buildings of Namyang-Hyanggyo were transferred in the 19th century, the gentry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process, voluntarily contributing more than 60% of its resources. It can be confirmed that this was a great scale compared with the cases of Jiksan-Hyanggyo or Jinju-Hyanggyo in the same period. 
Also, the scholarship which was supposed to be paid from the state was not properly paid to Namyang-Hyanggyo in the late Joseon Dynasty. So they bought the land on their own and used it as working capital. In the 19th century, they lost part of the land due to poor management, but in the late 19th century, Namyang-vice found ways to restore the lost land and to enact regulations to thoroughly manage it. According to the regulations, Nanyang-Hyanggyo in the 19th century served not only as a function of sacrifice but also as a base for various village activities of the local leaders. 
On the other hand, the disturbance of Cheonggeumrok(靑衿錄) since the 18th century shows the growth of the common people who were trying to raise their status based on the economic power at that time. And this fact was gradually threatening the status of the gentry in Namyang-Hyanggyo. Nevertheless, the gentry remained in Hyanggyo until the end, reorganizing Cheonggeumrok(靑衿錄), and monopolizing Hyanggyo, because Namyang-Hyanggyo was the last place in the community to maintain and exercise its status as the gentry. Especially, in the late 19th century, both Angok-Seowon(安谷書院) which was the only Seowon in Namyang and Yongbaeksa(龍栢祠) were defeated by Daewon-gun's Seowon abolition. Therefore, Namyang-hyanggyo's social status as a center of local culture had to be strengthe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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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년 동안의 중국 서원 연구

저자 : 肖永明 ( Xiao Yongming ) , 刘艳伟 ( Ryu Yeomwi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9-133 (1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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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20, 30년대부터 신식교육에 대한 반성에 비롯하여 학계에서는 서원 연구의 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풍성한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 이후,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서원연구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확대 시키며 전통사회에서 서원의 가치를 발굴해 왔다. 20세기 말에 들어, 새로운 사학 연구방법의 응용에 따라 중국서원사 연구는 연구내용, 방식, 관념 등 면에서 진부한 부분에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발전시켜서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연구적 시야의 편협, 문제의식의 결핍 등 문제점도 드러나 있었다. 이에 다음 단계의 서원연구발전을 위해 과거 서원연구에 대한 총정리도 필요하다고 본다.


Since 1920's and 1930's in the Chinese Republic, including reflection on modern education, academics have paid attention on studies about Seowon with rich research results. After the establishment of New China(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scholars have explored and extended the studies about Sewon based on the Marxist theories with lots of mistakes, and digged the values of Seowon in traditional society. In the late 20th Century, according to new historical methodologies, the contents of Chinese Seowon History, without insisting cliches in research contents, methods, and ideologies, developed new directions and achieved lots of progress. However, there have been problems such as prejudices of research perspectives and lack of research questions. Accordingly, it is necessary to summarize the studies about Seowon from the past in order to develop the study to next ph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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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소장 자료의 유형과 특징

저자 : 김순한 ( Kim Soon-ha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5-179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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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옥동서원 소장 자료 중 기존에 공개된 자료와 미공개 자료까지 포함·정리하여 그 내용과 특징을 검토하였다. 옥동서원은 황희 영정을 봉안한 黌堂이 효시이며 이후 祠宇로, 또 影堂으로 발전하였고, 1714년(영조 40)에는 사서 전식을 배향하여 서원으로 승원 하였다. 이듬해 현재 자리로 이건 후 1789년(정조 13)에 사액 되었다. 옥동서원은 1984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많은 연구자에 의해 서원 연구가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3년 국가 문화재 준비과정에서 서원의 많은 자료가 새롭게 발굴되어 서원의 인적 구성· 운영· 사액·승무(陞廡)·제향 의례 등 연구 범위도 다양해졌다. 하지만 공개된 자료만으로 서원의 종합적인 내용과 특징을 규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 극복하고자 미공개 자료와 함께 모든 자료를 재조사·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고 유형별로 정리하였다.
옥동서원의 모든 자료는 3차에 걸쳐 상주박물관에 기탁 보관하고 있다. 기탁된 자료는 크게 成冊古文書 · 古文書 · 影幀 · 책판 등으로 구분되며, 현대 자료를 제외한 고문서는 약 246종 397건이다. 이들 자료는 165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자료가 두루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통해 서원의 설립과 승원·사액·운영·경제·제향 등을 밝힐 수 있으며 나아가서 서원의 위상까지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 서원의 서적과 책판 자료는 교육과 출판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This study arranged previously undisclosed archives including disclosed ones in Okdong Seowon and reviewed the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archives. Okdong Seowon had been developed from Hoingdang(黌堂) sealed with the portrait of Hwang Hee to Sawoo(祠宇) to Youngdang(影堂). In 1714, Saseo Jeon hick was also enshrined and it was elevated to Seowon and in the following year, it was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and named by King in 1789.
A remarkable characteristic of Okdong Seowon's diverse archives consist of those from the time that it became Seowon in the 1650's and those after being named by King until the 1900's. The archive is very important showing of the Seowon's position by figuring out its establishment, organization, education, and socio-economic relations. And the books and published sources could be very helpful for culture of education and publication.
Okdong Seowon was named by local heritage in 1984 and the researches about it by lots of researchers have been accumulated. In the process of preparing to rise to national heritage, the archive of the Seowon was broadly disclosed and the topics of the researches were various including human organization, management, being named by King, Seungmu(陞廡), sacrifice rites. However, the existing sources are few and in-depth studies are limited. This study aims at rearrange and collect the list of all the archives including new ones in and report the current status in order to overcome these difficulties. Currently, old books and book board stored in Sadang and Kangdang in Okdong Seowon were sent to and store in Sangju Museum in three times. The owned sources consists of old books, documents, portraits, and book board. The old documents are 316 cases and 550 items, and book boards and other boards are 105 items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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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송대(宋代)의 서원교육과 사인(士人) 사상의 통합

저자 : 朱汉民 ( Zhu Han Mi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1-199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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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문화사에 중요한 문화 현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동시에 이루어진 서원과 理學의 흥기와 번영이었다. 정치의 가장자리에 처했던 이학가들은 그들의 문화중심의 입장을 견지하며, 개인적 교습이나 서원 교육의 방식을 통해 학술연구, 인재양성 및 학파구축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송대 서원이 이학사상과 사서교육의 근거지가 되게끔 적극 노려하였다. 정치와 문화 두 가지 측면의 주체가 된다는 사대부집단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학가들은 “學以成聖”의 교육이념을 적극 추진하고 실천하였다. 문화교육에 이루어진 이학의 성공은 송대 士人들의 사상적 통합을 촉진시켰고 이학으로 하여금 점차 송대 사인들의 보편적 사상공식으로 되도록 하였다.


In Song Dynasty's cultural history, there was an important cultural phenomenon and it was rising and flourishing of Seowon and Li studies at the same time.. Scholars of Li who were marginalized from the politics, having their own perspective focusing on culture and conducting personalized tutoring or Seowon education for researches, training students and establishing schools, tried to make Seowon in Song Era become the base for Li thought and education of Four Books. In order to satisfy scholar groups for becoming subjects in both perspectives of politics and culture, the scholars pursued and practiced the educational ideology of "Accomplishing the greatness through studies“(學以成聖)”. The success of Li studies promoted the ideological integration of Sain(士人) in Song Era, and made Li studies become a universal ideological agenda for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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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왕조 서원제도 수용에 관한 몇 가지 문제 - 조선 서원 문헌을 중심으로 한 토론 -

저자 : 邓洪波 ( Deng Hong-bo ) , 赵伟 ( Zhao Wei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1-22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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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동아시아 士人들의 공동의 문화교육조직이다. 조선은 명나라 강정 연간에 중국으로부터 서원제도를 수용하였으며 『죽계지』, 『영봉지』, 『오산지』 등 서원지들이 서원의 수용과정을 잘 보여준다. 우선 주세봉은 주자 백록동서원 고사를 따라 처음으로 백운동서원을 설립하고 『죽계지』를 엮었으며, 근사(謹祀), 예현(禮賢), 수우(修宇), 비름(備廩), 점서(點書) 등의 운행제도를 세웠고, 조선서원의 시작과 기초를 닦는 데 공을 세웠다. 다음으로 노경린은 영봉서원을 설립하고 『영봉지』를 엮었으며 사우를 세워 선현들을 모시고 서원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묘원정의록』, 『학규록』을 제정하는 등 제도적 구축도 처음으로 시도하였는데 서원의 발전에 공이 있다. 그리고 주세봉을 이어서 백운동서원을 운영하였던 이황은 상소를 올려서 사액을 청구하였는데 서원 사액 제도의 시초를 열어주었고, 그 후에 학자의 신분으로 10개소 정도의 서원 건립에 관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록동서원게시』를 해석하여 널리 보급시키고, 『성학십도』에도 편입하였으며 조선서원 제도를 집대성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The academy(書院) was formed in the Tang Dynasty of China at the end of the seventh century, and later developed into the common cultural and educational institution of Confucian scholars in East Asia, it has a history of nearly 1,300 years. Korea's academies were introduced from China and formed part of East Asian academies. In its development process, formed its own characteristics. This paper is based on the academy documents of the Korean era, such as Records of Jukgye(竹溪志), Records of Yeongbong(迎鳳志), Records of Osan(吳山志), Records of Yeogang(廬江志),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李朝實錄)and the literature of academy rules and regulations, etc. In view of how the Chinese academy institution was introduced into the Korean Dynasty, this paper has some different views from the South Korean scholars. 
It is generally believed that the BaegundongAcademy(白云洞書院), which was founded by Joo Se-bung(周世鵬), the Governor of Poongki(豊基), in the Zhongzong(中宗) period, was the beginning of the academy of Korea, and also the beginning of the introduction of Chinese academy institution by Korea. However, according to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s early as in the early years of Shizong(世宗), private academies of Confucian scholars with teaching functions had appeared in the society, which should bring forward the beginning of the history of Korean academies by more than 120 years. Korea's introduction of the Chinese academy institution did not begin during the Zhongzong period, at least as far back as the 21st year of Shizong, more than 100 years ago. By the second half of the 16th century, during the Korean Zhongzong, Renzong(仁宗), Mingzong(明宗) and Xuanzu(宣祖) periods, academies and temples were regarded as institution not found in Korea, which needed to be introduced from China, and Korean academies entered the period of introduction. Generally speaking, the introduction and acceptance period of Korean academies is about 60 years. The three books compiled in this period, Records of Jukgye, Records of Yeongbong and Records of Osan, can roughly show the process of introducing the academy institution. 
Joo Se-bung, Rho Gyeongrin(盧慶麟)and LeeHwang(李滉) made the largest contribution to the introduction of the academy institution. Joo Se-bung and Lee Hwang both believed in Zhuzi-ology(朱子學), but Joo is considered to be the conservative faction, and his contributions are greatly underestimated by later generations. Zhu Xi's behavior in the Bailudong Academy(白鹿洞書院) became the object that Joo Se-bung imitated. He founded the Baegundong Academy, compiled the Records of Jukgye, and put forward five institutions. His achievement lies in his first creation. Some scholars believe that Baegundong Academy is the earliest academy in Korea, it is thought to be an adjunct to the Mun-sung-gong Temple(文成公廟), but this is not the case. In Joo Se-bung's opinion, the Academy and the Temple are different and parallel, one is to urge people to learn, the other is to worship people with virtue, each has its own function. 
Rho Gyeongrin founded Yeongbong Academy(迎鳳書院) and wrote the Records of Yeongbong. He built a temple to honor the sage and an academy to support Confucian scholars. But it also raises questions about why academies should be set up when there are official schools. He wrote the Resolution of the Temple and Academy(廟院定議錄) to record the introduction and development of the academy institution. In addition, he wrote the Records of Learning Regulations(學規錄), emphasizing the construction of institutions. His contribution was to expand the influence of the academy institution. Lee Hwang managed Baegundong Academy after Joo Se-bung. He begged the king to bestow plaque for the academy, thus establishing the institution of plaques for the academies. Later, as a scholar, he wrote many articles about academies, and directly or indirectly participated in the management of nearly ten academies. At the same time, he explained and promoted the Bailudong Regulation(白鹿洞書院 揭示), and spread it to the whole Korean peninsula and even Japan. His achievement was to perfect the Korean academy institution. 
Among Joo Se-bung, Rho Gyeongrin and Lee Hwang, Lee Hwang's reputation was the most prominent, which was fully recognized and even suspected of being overpraised. Joo Se-bung's reputation stems from creating Baegundong Academy, but his role in laying the foundation for the development of Korea's academy institution is not recognized. Rho Gyeongrin's work has not received any recognition. If we can make a detailed study of the academy records, the development situation of the academies in Korea will become increasingly clear.

KCI후보

9조선후기 여산(礪山) 죽림서원(竹林書院)의 운영과 위상

저자 : 이경동 ( Lee Kyungdong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25-25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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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서원은 전라도 여산에 위치했던 兩湖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자인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을 배향하였으며 서인-노론계의 학문과 정치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죽림서원의 건립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는 죽림서원이 서인의 정치적 성장과 맞물려서 건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죽림서원의 건립은 김장생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장생이 정묘호란 과정에서 호소사로 활동할 당시 근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663년(현종 4) '죽림'으로의 사액은 죽림서원이 명실상부한 서인계 서원으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했다. 사액의 과정은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계 산림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으며, 이는 배향인물의 추향 작업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사액 이후 서인들은 서원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으며, 儒疏 등 정치적인 활동에 있어서도 중심지적 역할을 수행했다. 노소분기가 분명해진 18세기부터는 노론계의 서원활동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이와 함께 조정에서는 호남의 도통 서원으로 죽림서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후 죽림서원은 고종대 서원훼철령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양호 지역을 아우르는 노론계 도통서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Jukrim-seowon, located in Yeosan, is the representative seowon in Chungcheong and Jeolla provincial region. Eminent scholars of Joseon, such as Jo Gwang-jo, Yi Hwang, Yi Yi, Seong Hon, Kim Jang-saeng, and Song Si-yeol, were enshrined in this seowon, and it was functioned as the political, academic center of Seoin(西人)-Noron(老論) branch. The establishment of Jukrim-Seowon was led by Seoin in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a group of scholars who succeeded the studies of Yi Yi. The process of building this seowon was interconnected with the political growth of Seoin. It was led by Kim Jang-saeng who lived nearby, and the place was used as the base when Kim was active as Hososa, a recruiting official for volunteer army, during the First Manchu Invasion of Korea in 1627. The official charter of 1663 by the central government meant that Jukrim-seowon became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seowon of Chungcheong and Jeolla region. The chartering process was promoted by the apprentices of Kim Jang-saeng, including Song Si-yeol and Song Jun-gil, who were active in the central politics, and it coincided precisely with the project that enshrined more Neo-Confucian scholars in Joseon dynasty. After being chartered, Seoin participated in the management of seowon more actively, and Jukrim-seowon became the central place of political activities like Yuso(儒疏), literally Scholars' Petition. From the 18th century, activities of the scholarly successors of Kim Jang-saeng and Song Si-yeol are verified. Moreover, the government started to recognize Jukrim-Seowon as the one of the renowned seowon along with Dosan-seowon in Andong and Sohyeon-seowon in Haeju. Until it was abolished in 1868 by seowon reorganization policy of the central government, Jukrim-seowon was operated as the capital seowon of the scholarship and the public opinion in Chungcheong and Jeolla provi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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