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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Korean Seowo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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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2011)~8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57
한국서원학보
8권0호(2019년 06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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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저자 : 권시용 ( Kwon Shi-yong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47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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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퇴계 이황과 그 문인들이 조선시대 서원의 확산에 기여한 점을 살펴본 것이다. 퇴계 이황은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는 의욕적인 신진사림들에게 참다운 성리학 공부를 시켜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구축하고, 이를 발판으로 다가올 사림의 시대를 준비하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대안으로서 서원에 주목했으며 그의 문인들과 더불어 서원 보급에 노력하였다. 퇴계문인들은 출세주의ㆍ공리주의에 매몰된 관학에 대한 비판 위에서 참다운 성리학 공부를 위한 공간으로서 서원의 가치를 인정하고 스승인 퇴계의 서원 보급에 동참하였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모두 56명의 문인들이 43개소의 서원 건립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이들이 주로 활동하였던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보면 전국적으로 건립된 서원의 절반 이상에 이들이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방관으로 나간 문인들의 서원 건립이 두드러진다. 모두 17명의 문인들이 지방관으로서 22개 소의 서원 건립에 관여하였다. 초기 서원건립에 있어 지방관의 역할이 상당하였음을 고려하면 각 지역으로 부임해 나간 이들의 서원 건립 노력은 조선 서원의 확대ㆍ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특히 경상도 지역에는 광해군대까지 건립된 서원의 55.2%에 퇴계 문인들이 관여하였으며, 임란이전까지는 70%의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경상도 지역의 서원 건립에 있어 퇴계문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나타낸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경상도에 비해 퇴계문인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대부분 임란 이전에 관계한 사례였다. 이처럼 퇴계와 그의 문인들은 조선에서 서원제도가 도입되던 시기에 그 보급과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study is focused on Seowon(書院) establishment activities of the Toegye's students(退溪門人) involved in distributing Seowon based on the Toegye's theory of Seowon. Toegye intended to prepare for the coming era of Sarim(士林) by teaching Sung Confucianism to new powers in Sarim and establishing Sung Confucian(性理學) order in the local areas. He considered Seowon system as a distinctive means for his intention and strove to distribute Seowon along with his fellow scholars. This study indicates that 56 students of Toegye's participated in Seowon establishment in 43 places. This accounted for approximately half of the total number founded nationwide before the Imjin War(壬辰倭亂). In addition, it was proved that they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Seowon establishment in Kyeongsang area(慶尙道).
Toegye's stdents made efforts to found Seowon not just at the very places where they lived but where they served as local officials and the latter, especially, came to remarkable results showing that 17 students as local officials founded Seowon in 22 places. They initiated the discussion about founding Seowon, encouraged local people to join the establishment activity , and provided them with administrative, financial support. They kept on supporting after completing Seowon through taking part in academic trainings(講學) and engaging in running Seowon. These facts tell us that they did play an essential role in introducing and spreading Seowon in the early Chosun Dynasty. In conclusion, Seowon establishment activities of the Toegye's students made its way to succeeding and developing the Toegye's theory of Seowon which was aimed at the academic training and moral cultivation of Sar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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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칠곡 인동장씨 정사·서당·서원 건립 활동과 성격

저자 : 이해준 ( Lee Hae-ju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9-64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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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서당, 그리고 서원·사우는 향촌사회의 지성들이 접촉·교류하면서 학문전통과 지성사적 활동을 한 곳이며 지연·학연을 배경으로 여론과 공론 결집하는 정치세력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이후 19세기 전반에는 문중중심의 경쟁적 성격도 강하게 지니게 된다.
본고가 주목하는 칠곡 인동장씨의 사례는 이러한 향촌사회의 사족 활동과 지역. 학연의 문중 인물배출과 사회사적 활동 양상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자료이다. 이중 본고에서 주목하는 不知巖精舍, 花山書堂, 花山書院은 인동장씨 가문의 克明堂 張乃範(1563-1640)과 그의 아들 晩悔堂 張慶遇(1581~1656)의 유서가 서린 유적들로 향촌사회에서 지연과 학맥, 지성사적 교류를 통하여 이루어진 조선후기 300여 년 간의 다양한 활동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부지암정사, 화산서당과 화산서원의 창건·운영과정을 통하여 여헌 장현광과 장내범·장경우 부자와 학연, 또한 서당과 사우, 서원의 연계성을 밝힐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칠곡 인동장씨의 사례를 통하여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학맥과 문중활동의 연계와 교류, 사회사적 성격을 한 사례로서 확인, 엿볼 수가 있다.


Monastery(精舍)·school(書堂) and academy(書院)·shrine(祠宇) is a place that within intellectuallies contact and at same time connect with learning tradition in rural society. School ties as a background it will concentrated the public opinion & general opinion of Political Influences. Focus of the family's competitive character became more intensionally after the late 18thcenturytoearly19thcentury.
This article focus on Indong Jang's hereditary gentry activities of Chilgok and it's a historical data about school ties families of their great talents appear successively,in the meantime that show social activities with us. This article concentrate on Pu Ji Am monastery(不知巖精舍), Hwa san school(花山書堂) and Hwa san academy (花山書院), Which is a family of Jang nea beom張乃範(1563-1640) and his son Jang kyong ou張慶遇 (1581~1656), From his testament we will know rural society's intellectuallies contact and go through with this we will clear about later 300 years of Joseon Dynasty. Through with Pu Ji Am monastery(不知巖精舍), Hwa san school(花山書堂) and Hwa san academy (花山書院) we will know Jang hyung kyang張顯光&Jang nea beom Jang kyong ou's(張乃範·張慶遇)school tie, as well as clarify the difference of school(書堂) and academy(書院)·shrine(祠宇). Also through the example of Indong Jang's we will know later Joseon's rural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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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향(鄕)'에 대한 퇴계의 이해와 실천

저자 : 한재훈 ( Han Jae-hoo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5-8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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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鄕'이라는 단어를 다양한 층위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우선,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 친척과 친지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곳,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도 돌아가야만 하는 곳 즉, '고향'의 의미로 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음으로는, 나라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난 곳, 그래서 문화적으로 수준이 떨어진 곳, 다시 말하면 '시골'이라는 의미로 '鄕'이라는 단어를 사용된다. 마지막으로는, 교화가 필요한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마지막 용례는 위의 두 가지 용례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즉, 문화와 교양의 수준이 낮은 '시골'이기 때문에 교화가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곳이 바로 나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 당위는 더욱 절실하다. 또한 '鄕'이 유학자들에게는 '家'의 연장이면서 '國'으로 나아가는 연결체적 성격을 갖는 곳으로 이해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조선향약'의 실질적 물꼬를 튼 것은 퇴계의 「鄕立約條」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후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이를 굳이 '鄕約'으로 명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권도적 내용은 생략하고 징벌적 내용으로만 채움으로써 일반적인 향약의 체제를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명목상으로든 내용적으로든 '鄕'단위의 교화와 관련하여 국가의 역할이나 기능과 충돌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鄕'의 교화와 관련하여 퇴계가 주목한 것은 오히려 '書院'이다. 퇴계가 남긴 여러 서원의 記文 등을 살펴보면, 퇴계는 교육을 시행하는 근본 이유가 '좋은 나라'를 구현하는 데 있음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동인으로 '선비들의 기풍 변화'와 '아름다운 풍속'을 들었다. 즉, 좋은 나라[國]는 결국 아름다운 풍속을 가진 고을[鄕] 또는 집안[家]을 전제로 가능하며, 그것은 다시 그것을 만들어갈 주체인 선비들이 어떤 교육을 받느냐와 직결된다는 차원에서 서원의 존재 이유와 교육의 방향을 제시 했던 것이다.


Toegye used the word 'Hyang(鄕)' in many ways. He used the word to mean "hometown," or "countryside." He also used the word to mean an area that needed to be enlightened, which was linked to the two preceding cases. And it should be noted that this last example is closely related to the academic purpose of the Confucian scholar. Because he thought he should cultivate himself(身) as a scholar first and then have a good influence over Hyang(鄕) beyond his family(家).
In Joseon, it initially took a way of imitating China's Hyangyak(鄕約). Then, gradually, they began to develop Hyangyak(鄕約) that were suitable for Joseon society. A case in point is the "Hyang-lip-yak-jo(鄕立約條)" created by Toegye. Based on this, many researchers say that the beginning of independent Hyangyak(鄕約) in Joseon's society is from Toegye. However, as well as not naming his own "Hyang-lip-yak-jo(鄕立約條),"" the structure of the content is much different from that of the general Hyangyak(鄕約). Therefore, the argument that the Toegye tried to make a difference in the Hyang through the Hyangyak(鄕約) should be put on hold.
Regarding the issue of cultivating hyang, it was Seowon(書院) that the Toegye took note. Toegye made great efforts to build and spread Seowon despite the fact that there was a public educational institution called Hyanggyo(鄕校). It was not just for educational environment or for curriculum changes. Toegye wanted to cultivate scholars who nurtured themselves first through education in Seowon and then had a good influence on others. He was convinced that hyang can be enlightened through scholars who can have a good influence on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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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영남지역 노론계 가문의 분포와 서원 건립 추이

저자 : 채광수 ( Chae Gwang-su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1-12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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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노론은 크게 전통적인 노론 사족 가문과 노론을 표방하며 등장한 신향층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전자의 대략적인 지표를 제시해 주는 것은 1738년(영조 14) 정언 이수해가 안동 김상헌 서원 재 건립을 요청한 상소에서 영남 내 대표적인 서인 명문가들을 언급한 내용을 통해 일단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영남 최고의 노론 명문인 덕수이문 일원으로 열거한 대개의 가문들과 긴밀한 혼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가문의 통혼권 특징을 요약하면, 17세기에는 기호지역 서인 가문들과 주로 혼인하면서도 영남지역 사족가문과도 혼인을 매개로 노론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8세기에도 앞 시기와 유사한 흐름 속에서 상대적으로 통혼권이 더 확대되어 영남지역 내 가문들과의 혼인 비중이 높아졌다. 즉 영남 내 同色이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검토할 영남 노론계 서원 건립 흐름도 바로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여기에는 18세기 영남 사회의 변화 속에 관권의 비호를 받은 신향 세력의 부상도 큰 몫을 차지했다.
조선후기 영남 서인계 원사는 노론계 60개소[당파, 문중], 소론계 2개소, 노·소론계 공존 1개소로 총 63개소이다. 이들 가운데 중간에 승원한 곳이 대다수였으며, 지역별로는 38개 군현에 분포했고, 좌도가 우도에 비교해 앞서 있었다. 건립 시기는 18세기의 비율이 가장 높았으며, 대구부·상주목·경주부·성주목 대읍에 그 숫자가 높게 나왔다. 이중 사액 원사는 6개소이고, 대원군 원사 훼철 당시에는 2개만이 존치되었다.
영남 노론계 원사 제향인의 성격은 ①당파 ②문중 인물 ③충절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중 ①이 핵심이다. 당파 관련 인물은 노·소론 분당 이전 서인계 인물 6명, 노론계 29명, 소론계 5명, 기타 1명순이었다. 이들의 제향 배경을 점검한 결과 지방관 15개소, 유배 관련 14개소, 장루지지(杖屢之地) 5개소, 은거 2개소, 문인·입향조·지명·처향 각 1개소, 미상 5개소로 확인이 되었다. 합천 출신 윤봉구문인 최남두를 제외하면 영남인은 전무했다. 제향인은 송시열 제향 원사가 14개소로 가장 많았고, 이이와 주자 ⇒ 김상헌·김창집·윤봉구 등의 순으로 파악되었다. 문중관련 인물을 제향 한 노론계 서원은 14개 가문에서 16개소가 건립되었으며, 충절인을 제향 한 원사는 5개소가 건립이 되었다.


The Noron of Youngnam may largely be classified in two types; The traditional Noron (a political fac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well-established family and the newly emerging party by claim to be Noron. First of all, the outlined indications of the former was presented by Jeonon Lee Su-hae in 1738 (the 14th year of King Youngjo's reign) with his petition to request the re-establishment of Andong Kim Sang-heon Seowon with the content that mentioned about the representative Seoin (a political fac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of distinguished families in Youngnam in a way of finding the clue. He had established close relationship made in marriage with the most of families listed as members of Deoksu Lee Family, the top echelon well -established family in Youngnam. By summariz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gional territory of marriage for the family, they had a significant role to disperse Noron's principle by mainly married to the Seoin families in the preferred area during the 17th century while taking the marriage with the well-established families in the Youngnam area as its medium. In the 18th century, under the similar flow to the earlier-mentioned period, the regional territory of marriage was even more expanded relatively that the ratio of marriage with the families in the Youngnam area was heightened. In other words, It implies that the same color in Youngnam had increased. The flow of establishing the Seowon of Youngnam Noron-line to be reviewed is made under such environment. Obviously, the emergence of the newly emerged people that had the protection of government authority under the transition of the Youngnam society in the 18th century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
The Youngnam Seoin-line Wonsa in the later part of Joseon had 60 places of Noron-line [political faction, family], 2 places of Soron(a political fac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line, 1 co-existing place of Noron and Soron-line for a total of 63 places. Among them, most of them were the places for Buddhism in the middle, and they were scattered in 38 guns and hyeons for each area, and Jwado (one of the two regions formed by splitting a province) was comparatively ahead of Wudo (one of the two regions formed by splitting a province). The establishment period had the highest ratio in the 18th century and the figure was shown to be high in Daegu-bu, Sangju-mok, Gyeongju-bu, Seongju-mok Dae-eup. Among them, the bestowed Wonsa was in 6 places and only two were retained at the time of the damage by Daewon-gun Wonsa.
The characteristics of Youngnam Noron-line Wonsa ritual personnel may be classified for ① political faction, ② family personnel, and ③ men of fidelity and the above ① is the core aspect. As for the political faction related personnel, there were 6 Seoin-line persons, 29 Noron-line persons, 5 Soron-line persons, and one person prior to the split of Noron and Soron. As a result of checking out the background of their ritual service, it is confirmed to be 15 places of local government office, 14 places related to exile, 5 places of Janglujiji, 2 places of seclusion, 1 place each for literary man, iphyangjo (persons settled in a new place), land name and religious service for ancestors, 5 unknown places. With the exception of Yoon Bong-goo from Hapcheon and literary man Choi Nam-doo, there was no one from Youngnam. For the sacrificial rite personnel, the Song Si-yeol Ritual Service Wonsa had the most for 14 places, followed by Yi Yi and Zhu Xi, Kim Sang-heon, Kim Chang-jip and Yoon Bong-goo. The Noron-line Seowon that ritual service for the family related persons shows 14 families with the establishment of 16 places and the Wonsa that men of fidelity with sacrificial rite had 5 places esta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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