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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and History

  • : 한국여성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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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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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4)~30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256
여성과 역사
30권0호(2019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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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후기 양반 여성의 질병과 죽음에 대한 사례 연구 -『18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을 중심으로 -

저자 : 문현아 ( Moon Hyun-a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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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들의 건강 상태는 어떠했을까? 얼핏 간단해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학계의 연구 자료는 많지 않은 편이다. 이 연구는 그런 맥락에서 기초적인 수준에서나마 18세기 조선시대 양반 여성들의 건강과 질병의 상황을 살펴보고 건강과 관련된 여성의 삶의 사회적 맥락을 연결해서 분석하려는 시도다.
여성 스스로 남긴 기록이 제한적이었던 시기 여성의 건강을 언급한 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이 논문은 현대 여성문학, 여성사연구자들이 번역한 『18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이하: 『자료집』)을 참고로 이에 수록된 '비지전장(碑誌傳狀)'류 자료, 즉 전, 행장, 비문, 제문, 묘지명 등을 분석한다. 비록 남성들에 의한 여성의 일상과 죽음의 기록이지만 이를 더듬어가며 여성들의 삶, 특히 건강과 질병의 측면에서의 여성의 삶을 재구성해 사회적 맥락의 해석을 시도한다. 『자료집』에 수록된 천 편 남짓한 기록 중에서 일차적으로 남편에 의한 아내 사망에 대한 기록으로 범위를 좁혀 63사례를 찾아 그 내용을 분석한다.
기초적으로 평균 수명, 혼인 연령, 자녀수 등에 관한 자료를 통해 18세기 양반가문 여성의 일상을 조망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질병을 경험했는지를 살펴보고 죽음에 이른 주요 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그 사망의 계기가 된 질병이 유교적 규범을 체화하고 살아가는 여성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에 관한 맥락을 분석한다. 가문을 이어갈 다음 세대, 특히 아들을 낳고 길러야 하는 사회적 압박감이 여성의 재생산권과 연결되어 여성의 일반적인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해서 18세기 여성의 일상을 건강과 질병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덧붙여 개인적 건강은 가족이나 사회로부터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아픈 여성들은 누가 돌보아 주었는지, 이 여성들보다 오래 산 남편들은 이 여성들의 건강과 어떻게 관련되어있는지를 함께 고려해 제한된 사례로나마 기존 연구에서 보여주지 못한 이 시기 여성들의 건강과 질병의 일상을 따라가 보았다.


What were the health conditions of women in the Joseon period? This seemingly simple question has not been given much attention by researchers. As such this paper is a preliminary inquiry into the health and illness of yangban women in 18th century Joseon in order to analyze the social context of women's lives in relation to health.
In order to overcome the great limitation of resources dealing with women's health during the time when records made by women themselves were rare, this paper uses Resource Materials on the Everyday Life History of 18th Century Women translated by contemporary women's literature and history researchers (hereafter, Resource Materials) and analyzes the sources related to bijijeonjang (碑誌傳狀), or biographies, records of the deceased, epitaphs, funeral orations, and memorial inscriptions. Although the records of women's lives are written by men, a close reading of these records sheds light on the social context of women's lives related to health and illness. Among 1,000 or so records found in the Resource Materials, the paper focuses on 63 cases of records of women which were all written by their husbands.
The paper attempts to reconstruct the everyday lives of 18th century yangban women by examining the resources related to average life span, marriage age, and number of children while specifically investigating what kind of illnesses women suffered from and the main causes of their death. In addition, this paper seeks to analyze the context between the illness that became the main cause of death and the lives of women who embodied Confucian norms. In other words, this paper seeks to reconstruct 18th century yangban women's lives from the point of view of health and illness by analyzing how the social pressure on women to bear a son to pass down the family legacy impacted women's very health and life. Furthermore, this paper aims to illuminate little known aspects of women's health and illness in the 18th century through examining a number of cases studies and finding out who cared for sick yangban women at a time when individual health greatly depended on the quality of care undertaken by the family or society. and how are the husbands who lived longer related to women's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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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국근대여성운동의 역사적 기원지 - '여권통문' 결의 장소 발굴 -

저자 : 윤정란 ( Yoon Jeong-ra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3-78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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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최초의 여성권리선언문인 '여권통문'이 각 신문지상에 발표된 후 수백 명의 여성들 지지하에 최초의 한국근대여성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하고 순성여학교 설립을 결의했던 장소에서부터 순성여학교 운영 및 폐교에 이르기까지 여성운동의 전개과정을 각 장소 별로 살펴본 후 '여권통문'취지에 따라 찬양회를 조직하고 순성여학교 설립을 결의했던 장소의 발굴과 오늘날 그 위치가 어디인지를 추적하였다. 추적의 결과 그 위치가 오늘날 서울시 중구 삼각동 117번지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여권통문'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는 홍문동사립소학교 이시선 집, 승동수사 홍건조 집, 경운궁 인화문 앞 장례원 주사 김용규 집, 경운궁 인화문앞, 창선방 느릿골, 계동 전화선 주사 마희률 집, 돈화문 앞 사헌부 조방등이었다.
이 중에서 홍문동사립소학교 이시선 집은 '여권통문' 결의 장소이자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역사적 기원지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1903년 대한제국한성부 호적표에 의하면 남서 홍문동계 홍문동 8통 1호이었다. 이곳은 1912년 토지대장과 비교했을 때 1912년도 삼각정 지적도상의 남부 삼각정31-33번지에 해당되었다. 1943년 남부 삼각정은 중구 삼각정으로 되었고 광복 이후 1946년 중구 삼각동으로 개칭되었다. 1999년 홍문동사립소학교이시선 집은 중구 삼각동 117번지로 통합 정리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여권통문의 취지에 따라 찬양회를 조직하고 순성여학교 설립을 결의했던 장소가 곧 오늘날 신한은행 백년관이 위치하고 있는 중구 삼각동117번지이다. 즉 오늘날 신한은행 백년관 장소는 한국여성들이 여권통문의 취지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한국 최초의 근대여성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하고 한국 여성 최초의 사립여학교인 순성여학교 설립을 결의했던 '여권통문' 결의 장소이자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역사적 기원지였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tracks the excavation of the place where Chanyanghoe was organized according to the purpose of 'Yeogwontongmun' and where Sunseong Women's School was founded. By examining the progress of the women's movement in each place where they organized Chanyanghoe, with the support of hundreds of women, it is revealed that the location is today 117, Samgak-dong, Jung-gu, Seoul. The process is described as follows.
Historical sites related to 'Yeogwontongmun' include Hongmundong Private Elementary School Lee Si-seon's house, Seungdong Susa Hong Geon-jo's house, Jangryewon Jusa Kim Yong-gyu's house in front of Gyeongungung Inhwamun, Gyedong Jeonhwaseon Jusa Ma Hee-ryul's house, in front of Gyeongungung Inhwamun, Changseonbang Neuritgol, and Saheonbu Jobang in front of Donhwamun.
Among them, Hongmundong Private Elementary School Lee Siseon's house can be said to be the origin of the Korean women's movement. According to the 1903 Imperial Daehan's Hanseongbu Family Register, it was 1ho 8tong, Hongmundong, Hongmundonggye, Namseo. Compared to the land register in 1912, this site corresponds to 31-33, Samgakjeong, Nambu on Samgakjeong cadastral map in 1912. In 1943, Samgakjeong of Nambu became Samgakjeong of Jung-gu, and it was renamed Samgak-dong of Jung
gu in 1946 after liberation. In 1999, Hongmundong Private Elementary School Lee Si-seon's house was integrated into 117, Samgak-dong, Jung-gu. Therefore, according to the purpose of 'Yeogwontongmun', the place that organized Chanyanghoe and decided to establish Sunseong Women's School is 117, Samgak-dong, Jung-gu where Shinhan Bank and Baeknyeongwan are located today.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site of Shinhan Bank Baeknyeongwan today is the location of the origin point of the Korean Women's Movement where Korean women organized Chanyanghoe, Korea's first women's organization and decided to establish Sunseong Women's School, the first private Korean women's school in Korea to carry out the purpose of Yeogwontongmun of Korean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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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최매지의 민족운동과 사회활동

저자 : 윤은순 ( Yoon Eun-soo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9-11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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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매지(1896-1983)는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개화된 환경에서 성장하여 근대적 교육을 받고, 일제시기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을 통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진남포를 중심으로 교육활동과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안동에서 독립촉성애국부인회 안동지부장을 역임하면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선거에서 안동군 대표로 뽑혔고, 제헌국회에 출마하였다. 한국전쟁 후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회장을 맡아 여성 구제와 보호, 금주금연과 사치금지 등에 주력하였다. 말년에는 YWCA와 교회활동을 통해 사회봉사로 헌신하였다.
최매지의 생애는 일제시기 항일독립운동, 해방 후 정부수립기 정치활동, 이후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사업 및 봉사활동으로 시기적으로 구분된다. 이는 대부분 일제시기 교육받은 많은 기독교 여성들의 행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일제시기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여성들은 해방 후 민주정부수립과 남녀평등을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의회에 직접 참여하여 여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후 일부 여성들이 현실정치에 진출하여 여성관계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지만, 많은 기독교여성들은 한국전쟁 후 시급했던 여성들의 구호와 사회사업에 집중한다.
남성들의 비협조와 여성에 대한 편견, 조직력과 자금력의 한계 등으로 해방 후 여성의 정치적 진출이 여성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여성운동의 중심에서 여성권익 향상과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구제에 꾸준히 노력하였다.
최매지의 생애는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될 수 있다. '민족', '여성', '기독교'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민족운동, 여성운동, 종교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또한, 각각의 지역에서 치과를 개원하여 전문직 여성으로서 직업의 전문성을 봉사활동에 활용하였다.


Choi Maeji(1896~1983), who went to jail for anti - Japanese independence activities conducted through the Korean Patriotic Women's Party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developed educational activities and enlightenment campaigns centered on Jinnampo. After liberation, she started a kindergarten movement and enlightenment campaign in Andong. Also she served as Chair of the Andong branch of the Independence Promotion Patriotic Women's Association and pursued full-scale political activities by running for the South Korean Interim Legislative Assembly and the first National Assembly election.
After the Korean War, Choi did social work and volunteer work through Daehan Buinhwe, the Korea 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and the YWCA.
Choi's life can be classified into three keywords. 'Nation', 'Women', 'Christianity'.
The series of activities she engaged in, such as the nationalist and enlightenment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national reconstruction activities in liberation space, and social work after the Korean War, are representive of the activities of Christian women, Christian.
Women activists such as Choi regarded the establishment of democratic government and gender equality as the same concept after liberation. And they tried to establish women's rights by directly participating in parliament and government agencies. After the Korean War, Christian women focused more on women's relief and social work.
Although it is true that women's organizations played a role of supporters of the regime after liberation, Christian women stood at the center of the women's movement, and they made steady efforts to improve women's rights and to relieve women as socially weak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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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재일조선인 여성과 암시장 - 해방 직후의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

저자 : 박미아 ( Park Mi-ah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3-14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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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은 해방이 된 후에도 계획수송의 지연, 재산반출 문제, 한반도의 정치경제적 불안정 등 여러 상황으로 인해 귀국을 연기하거나 포기하게 되었다. 비자발적으로 일본에 정주하게 된 이들은 생계를 위해 패전국 일본의 암시장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암시장이라는 공간은 경제활동에서 주변적, 보조적 존재였던 여성들도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재일여성들도 가계경제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가장 역할을 하면서도 일본 사회와 가정에서는 중층적 차별구조에 둘러싸여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조망하지 않았던 해방 공간 재일조선인 여성의 암시장 활동, 그 중에서도 기술습득과 정규교육에서 배제된 비식자(非識者) 계층, 빈핍 계층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전후 암시장이라는 특수 공간은 재일 역사 속에서 조명 받지 못했던 이 여성들의 존재를 가장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After World WarⅡ, Koreans in Japan(Zainichi Koreans) were forced to delay or gave up repatriation to Korea or various reasons including delays in the planned repatriation, the issue of property transfer, and political and economic instability on the Korean Peninsula. Those who involuntarily settled in Japan had to find their livelihood in Japan's black market. The black market provided opportunities for women who had previously been peripheral to economic activities. At the same time, Zainichi women were also responsible for the household economy through the black market. However, women who had never received opportunities such as for technical training or regular schooling tended to stay in poverty.
Zainichi women who worked in the black market after the war were rarely noticed and left behind by history because they could not speak out about their own existence and role. These women were financially self-reliant but emotionally dependent, reflecting the limitations of their era and the complicated reality of Koreans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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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마거릿 생어와 통제의 개념

저자 : 이남희 ( Lee Nam-hee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5-17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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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의 산아제한 운동(Birth Control Movement)의 선구로 평가 받는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의 출산 통제에 관한 생각을 '통제'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한다. 피임문제를 여성의 주요한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데 일조한 인물로 평가받는 생어는 여러 가지 논쟁의 중심에 선 인물이기도 하였다. 이에 이 글에서는 생어의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는 행보를 개인적 통제의 열망이 사회적 통제로, 그리고 자유를 향한 통제로 진화해가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생어의 '출산 통제(birth control)' 속의 통제개념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생어가 규정한 개념은 출산 권력의 이성적 통제에 가장 가까웠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논문에서는 '통제'라는 개념을 이제까지 영미권의 사회학자들이 다루었던 사회적 통제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보다 포괄적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정신분석학적 분석방식과 이해를 근거로 개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개인의 통제 열망(A desire for control)도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통제의 추동력 중 하나로 포함한다. 이를 통해 생어의 산아제한 운동에서의 '통제'의 개념과 그 전개 과정을 더욱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This article examines Margaret Sanger's ideas on reproductive control through the concept of 'control' during the early twentieth century. Sanger who contributed to raising the issue of conception as a social concern during the early twentieth century was a controversial figure because of her radical actions and eugenic perspective. Sanger was criticized for her immense influence on undermining the birth control movement despite her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feminist rhetoric and strategies. However, contrary to existing belief that her actions and ideas were contradictory, Sanger's idea of 'control' was consistent throughout her development. Considering this context, this paper tries to comprehend how Sanger's individual desire to control developed into a form of social and political control by looking into Sanger's concept of control in the birth control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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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시대 선왕 후궁에 대한 처우와 궁가(宮家)의 변천

저자 : 한희숙 ( Han Hee-sook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9-21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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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선왕의 후궁들은 재혼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아들들과 사가에서 살지 못하고, 국가에서 마련해준 공가인 궁가에 함께 모여 살았다. 태종이 죽자 세종이 부왕의 후궁들을 위해 의빈궁을 설치한 이후, 선왕의 후궁을 위해 자수궁, 영수궁, 수성궁, 창수궁, 정청궁, 인수궁 등이 설치되었다. 후궁의 궁가는 후궁들이 죽으면 곧 폐지되어, 중종대 이후에는 자수궁과 인수궁만 유지되었다. 선왕 후궁들은 품계에 따른 대우를 받았다. 국가로부터 의식주와 관련된 물품을 제공받고, 안전과 시위, 궁궐 유지를 위해 궁녀와 환관, 노비 및 여러 인력을 제공받았다. 그런데 자수궁과 인수궁은 불사 기능이 강화되어 비구니사찰이 되어 갔다. 이곳에 불당을 설치하고 불사를 크게 행하자 대간들은 이를 금지할 것을 청하고, 나아가 궁가를 폐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임난 이후 성리학이 심화되어 가는 한편 후궁들의 수도 줄어들어 자수궁과 인수궁에 사는 후궁이 없어지자 궁가는 현종 2년에 혁파되었다. 이후 숙종은 자신의 후궁들을 위해 궁밖에 사저를 마련해 줌으로써 후궁방에 거처하게 되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treatment of concubines of former kings through the creation of detached palaces in the Joseon Dynasty. The concubines of the Joseon Dynasty were not allowed to remarry, and they lived together in a detached palace without living with their son's family. After the death of King Taejong in the 4th year of King Sejong, Sejong established Eibingung for his father's concubines, and King Munjong also set up Jasugung for his father's concubines. Afterwards, the newly crowned kings installed detached palaces for their father's concubines such as Youngsugung, Susenggung, Chansugung, Jengchenggung, and Insugung. The detached palaces were demolished when the concubines died, but Jasugung continued to remain, and the concubines also lived in the Insugung. Therefore, after King Jungjong, the concubines of former king lived in the Jasugung and Insugung. The concubines of former kings were treated according to their rank. The concubines were provided food and shelter, as well as personnel needed to maintain their safety and care. But Jasugung and Insugung used to be Buddhist temples, and they were the last spaces where the royal women remained. The concubines cut their hair, and moved to the palace shortly after the death of the king, and the maidens who served them also shaved their hair and became nuns. When the concubines set up the Buddhist temple in the detached palace, the count officials criticize it and asked for their prohibition. After the Imjin War, Neo-Confucianism deepened, while the number of concubines decreased, and the Jasugung and Insugung were closed in the second year of King Hyunjong. After that, Sukjong provided a house outside the palace and let the concubines live there with their son. So the concubines left the detached palace and resided with their son's family. In short, the concubines of the former king lived individually with their son's family in a private house away from the collective life of state administration in the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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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한국 최초의 간호사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 연구

저자 : 이꽃메 ( Yi Ggod-me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5-255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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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의 서양 의료와의 인연은 미국 감리회 여성해외 선교부에서 세운 여성 전문병원인 보구여관에서 시작되었다. 김마르다는 남편의 폭력으로 다쳐서, 그리고 이그레이스는 병에 걸린 후 주인집에서 버림받아서 보구여관에 환자로 실려왔다. 두 사람은 치료를 받은 후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보구여관에서 일을 하였고, 1903년 한국 최초의 간호학교로 세워진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 제1회로 입학하여 1908년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김마르다는 보구여관, 평양 광혜여원, 동대문부인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후배 간호사를 교육하는 한편 선교활동을 계속하였고 두 아이를 입양하여 다시 어머니가 되었다. 이그레이스는 이하영 목사와 결혼하고 평양 광혜여원에서 일하던 중에 1914년 이구례라는 이름으로 의생 면허를 받았으며, 이후 수원에서 자신의 의원을 열고 활동하였다. 이들의 삶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변화하던 조선을 비추는 거울이자, 주체적 근대인으로의 성장기이다.


Kim Martha and Lee Grace who are known to be the first Korean graduate nurses were the patients of Bokunyokwan, the missionary hospital for women and children in Seoul. Kim was the victim of family violence, and Lee was an abandoned slave. When they recovered, they decided to work at Bokunyokwan and received some education there. When Bokunyokwan started the first nursing school in 1903, they decided to enter it. Other Korean women who entered the school gave up their studies, but Kim and Lee continued their training and graduated in 1908. Kim worked as a nurse in missionary hospitals and was very eager in mission work for years. Lee married to a minister and worked as a nurse in missionary hospitals. Based on her knowledge of western medicine and medical experience, Lee became a doctor of Korean medicine, and opened her own cl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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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하는 어머니의 조력자, 보육교사 -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탁아소를 지탱한 사람들 -

저자 : 장수지 ( Chang Soo-ji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57-303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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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국은 여성들이 사회활동과 임금노동에 참여하기에 수월하도록 보육조직을 세워나가기 시작하였다. 본 논문은 당시 탁아소에서 일한 보육교사들의 역할과 경험,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노동에 대한 대우, 업무에서의 성공과 실패, 보육제도에 대한 기여 등을 각종 규칙과 기록, 사례들을 통해 밝혀보았다.
탁아소는 여성들의 직장(공장, 기업, 정부기관 등)과 생활공간인 거주지역에 건설되었고, 개인이 운영하거나 영리를 위해 운영되는 경우는 없었다. 정규탁아소에서는 보육교사들이 아동을 돌보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근대적 위생지식에 기반을 둔 아동 양육의 역할이 부여되었다. 반면 비정규탁 아소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 청소와 음식, 완구와 교재 조달, 빨래, 간호 등 모든 일을 보육교사가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보육교사의 임금은 전반적으로 공장 노동자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업무시간은 길었다. 보육교사가 되는 사람들은 여성 실업 청년, 공장이나 기관 등 직원의 친척, 가정주부 등이었는데, 이들 중 전문지식이 있거나 보육에 뜻을 두고 탁아소에서 일하는 경우는 적었다. 때로는 의무노동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었고, 인원 변동도 잦았다. 또한 아이를 돌보는 일을 경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이들에 대한 열악한 대우와 불안정한 노동환경을 지속시키는 원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관련 기관과 부녀연합회는 보육교사들에 대한 교육을 시행하였다. 특히 부녀연합회는 관할 지역의 탁아소 업무 상황을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매년 보육훈련반을 개설하여 보육교사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그밖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탁아소 업무 수준 제고를 도모하였다.
19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탁아소는 양적 성장을 거듭했고, 보육교사들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보육교사들이 모두 보육 노동에 적응하거나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부련의 노력과 여성들의 임금노동과 사회활동에 대한 열망, 또한 보육교사들의 노력이 합쳐지는 가운데 탁아소가 널리 보급되었고, 탁아소는 일하는 어머니들을 위한 강력한 조력자로 기능할 수 있었다.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hereafter PRC) in the 1950s, the newly established socialist state actively launched a childcare program as a way to facilitate women's participation in paid work and other revolutionary social programs. This article examines the childcare program in the early PRC, focusing on the experiences of daycare teachers.
Childcare centers were first established in residential communities and workplaces where the majority of workers were female. In permanent centers, many teachers had training in modern hygiene and were able to focus on childcare. By contrast, in temporary centers, teachers were not only responsible for childcare, but also had to do other maintenance work, cooking, cleaning, and daily chores.
In any case, the working conditions of daycare teachers were poor. They were usually overworked and underpaid. Not many daycare teachers had profes sional training. Most of them were hired through personal networks, or were h ousewives without previous work experience. That childcare was still a socially underrecognized labor contributed to the teachers' low wages and unstable wor king environment as well.
Notably, insufficient education and support for daycare teachers advers ely affected the childcare program. To respond to this problem, the governmen t and the Women's Federation tried to offer training for daycare teachers. The Federation offered monthly or weekly classes, teach-in sessions, experts who vi sited the centers, radio broadcasting and so forth.
By the early 1960s, the daycare centers quickly grew and, accordingly, the number of teachers drastically increased. Not all of the teachers were satisfied with their work. Nevertheless, it should be noted that the childcare centers played a crucial role in serving working mothers in the early PRC. Female teachers who sustained the childcare centers, despite difficult working conditions, underwrote the early PRC history of socialist femi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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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내 책을 말한다 (박효근, 『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8)

저자 : 박효근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17-327 (1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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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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