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

여성과 역사 update

Women and History

  • : 한국여성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738-6691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4)~26권0호(2017) |수록논문 수 : 210
여성과 역사
26권0호(2017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하와이 한인 여성단체와 사진신부의 독립운동

저자 : 홍윤정 ( Hong Yun-jeo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26 (2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미주 한인사회는 1902년부터 대한제국의 공식 이민으로 형성되었으며, 초기 이민자 대부분이 남성이었으므로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한인의 하와이 이민이 금지되어 더 이상 새로운 이민자가 하와이 한인사회에 유입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가족들의 입국은 허용되었다. 한편 남성중심의 하와이 한인사회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진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1910년에서 1924년 사이 천여명의 사진신부가 하와이로 갔다. 사진혼인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사진신부들은 노동이민자였던 남편들보다 근대교육을 받아 계몽된 젊은 여성들이 많았고, 이들은 하와이 한인사회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초기 자치회 성격의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정치적 단체로 변모하게 된다. 사진신부들 역시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단체를 결성하였으며 이 단체들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한 하와이 여성단체의 독립운동과 여기서 활동한 사진신부 출신 여성 8명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서술하여 지금까지 남성중심의 독립운동사에서 소외되어온 여성들의 독립운동사를 밝히고 독립운동사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

KCI등재

2하와이에서 한인(韓人) 전통의 창출 : 태평양전쟁 전 하와이 이민 한인 여성의 민족 관계와 근대화

저자 : 이리카 ( Lee Rika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7-79 (5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래, 한인(韓人) 이민노동자들은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 즐기기 위해 캠프에서 춤을 추었고, 몇 년 뒤에는 그들 삶에서 중요한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모임과 단체회합에서 춤을 추었다. 이 경우 춤을 추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여성들은 사람들 앞에서 춤추기를 꺼려했는데, 심지어 같은 민족 앞에서도 거의 춤을 추지 않았다. 그러나 1920∼30년대 하와이 문화행사에서 한국 춤이 공연되었을 때, 대중 앞에서 한국의 전통춤을 추었던 이들은 대부분 이민 2세대 한인 여성들이었다. 이후로 한인 여성이, 고등학교 민족 동호회에서처럼 출신 민족의 배경을 나타내는, 간단한 한국 춤사위를 시연하는 것이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왜 어쩌다가 한인 여성들이 춤을 추게 되었고, 한인 여성들의 춤이 한국의 `전통`을 대표하게 되었을까? 이 논문에서는 이민 1세대와 2세대 한인 여성들의 일상과 민족 관계에 초점을 두고, 20세기 전반기 하와이에서 한인 여성들이 서구화, 근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했는지를 탐구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에서는 한인 여성들이 한국 전통춤을 추는데 참여하도록 동기를 유발한 두 가지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첫째, 주류사회에서 전통춤을 장려하였다. 춤(춤추기)은 하와이 사회에서 하와이 주민의 통합과 화합을 강조하기 위한 활동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둘째, 춤은 이민 1세대 한인 여성들과 이민 2세대 한인 여성들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한인 공동체는 양립할 수 없는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민 1세대가 장려하는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서구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근대적인 생활방식 사이에서의 갈등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전통춤은 한인 이민자들에게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근대(적인 생활방식)를 이어주는 바퀴가 되었다. 한국 전통춤은 한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민족성)과 그들의 삶을 연결하는 동시에 당대의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가치를 아우르는 것으로, 하와이에서 “한국인”으로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상징이 되었고, 한인 공동체를 대표하는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KCI등재

31920∼30년대 김활란의 민족문화 인식

저자 : 김성은 ( Kim Sung-eu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81-10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김활란은 민족의식에 입각해 국제교류와 근대화를 도모하며, 한글과 민족문화를 활용하여 문맹퇴치, 농촌계몽을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당대 서구화 물결 속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이에는 당시 국내외의 민족주의적 신문화론 또는 문화운동론의 분위기와 영향도 있었다. 일제식민지시기 여성 지식인 가운데 문화운동론과 전통문화의식, 민족정신에 대한 강조는 특별히 김활란에게서 보다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며, 김활란의 현실인식과 시대인식으로 고려되어야 할 부분이다. 일제식민지시기 김활란의 의식세계의 중심축은 민족의 근대화였고, 그것은 민족의 독립을 위한 준비단계였다. 김활란이 지향했던 근대화는 서구식 근대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모방이 아니라, 우리 전통문화의 가치와 장점을 적극 활용한 전통과 근대의 조화를 의미했다.

KCI등재

4고려시대 재가에 대한 검토 - 유교사상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

저자 : 박은경 ( Park Eun-gy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11-13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여성의 재혼을 의미하는 재가는 여성의 정절과 연결되며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재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고려시대는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재가가 보편적으로 실시되었으며 남편의 사후 여성이 재가하는 것은 고려사회의 `풍속`이었다. 재가녀가 왕비가 되는 것이 특이한 일이 아니었으며, 과부인 여성이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접근하여 재가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고려시대 재가의 모습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 성에 대한 개방적 인식 등 고려시대의 사회적 여건이 바탕이 되고 있다. 재가에 대한 유교사상의 인식은 부정적인 것으로, 이는 `삼종지도` `일부 종사` 등 유교사상의 종속적 여성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 유교사상의 재가 관련 인식은 유교사상의 본래의 모습에서는 벗어나 있었으니, 이것은 국가 차원에서 실시되었던 정표정책의 특징에서 잘 드러난다. 고려시대 정표정책에서는 절부에 대한 포상이 의부에 대한 포상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면이 두드러진다. 유교사상에서 절부에 대한 칭송이란 남편에게 종속된 부인이 남편의 사후에도 그에 대한 정절을 지켜나가는 `순종성`의 가치에 대해 주어지는 것으로써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적용되었던 도덕적 규범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절부에 대한 포상이 남성을 대상으로 한 의부에 대한 포상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은 혼인에 대한 도덕적 규범이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된 것이 아닌, 여성과 남성에게 함께 적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려시대 여성의 위치와 함께 유교사상의 사회적인 이해의 수준을 보여준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재가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사상의 가치인 수절이나 절의를 칭송하는 묘지명 기사 또한 다수 나타나고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묘지명에서 `수절` `절의` 등의 유교적 용어로 칭송되었던 여성의 실제의 삶은 유교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불교적인 가치를 지향하며 독실한 불교신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나, 유학자에 의해 서술되는 과정에서 그녀의 삶이 유교적인 용어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유교적 용어 자체가 유교사상의 본래의 뜻대로 사용되고 있지 않은 점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유교사상에서 수절이나 절의는 남편 사후 재가하지 않은 부인에게 쓰이는 것으로써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성을 보여주는 용어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사용된 `수절` `절의` 등의 용어는 남편이 살아있는 경우뿐만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도 사용되고 있다. 수절·절의 등의 용어가 유교사상에서의 의미가 아닌, 그녀의 인간적인 삶 전반에 대한 칭송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수절` `절의` 등의 유교적 용어가 유교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고려시대 여성의 삶에 대한 이해는 유교적 용어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제반 사회 사상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KCI등재

5조선 초 명 선덕제 후궁 공신부인 한씨가 조선에 끼친 영향

저자 : 한희숙 ( Han Hee-sook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41-16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조선 초기 명나라에 공녀로 뽑혀가 황제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던 공신부인(恭愼夫人) 한씨가 공녀로 선발된 이유와 가세의 성장, 명황실 내에서의 위상, 그리고 그녀가 조선왕실에 끼친 긍정적, 부정적 영향력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한씨는 성종의 외할아버지인 한확의 여동생으로,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 대비의 고모이다. 한씨의 이름은 계란으로 태종 10년(1410)에 한영정과 의성김씨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한씨는 공녀 출신이었던 언니 여비(麗妃)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점과 얼굴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세종 9년(1427) 5월에 공녀로 뽑혔으나 병이 나 이듬해에 명나라로 갔다. 그녀는 7년 동안 선덕제의 후궁으로 산 기간을 합쳐 57년 동안 명황실의 여성으로 살았다. 그 사이 토목의 변(土木之變)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어린 성화제를 돌보아준 `아보의 공`이 있어 성화제는 황제 즉위 후 한씨에게 지극한 총애와 효도를 바쳤다. 한씨는 명황실 내의 사정에 밝아 `모사(姆師)` `여사(女師)` `노노(老老)` 등으로 불렸다. 또한 한씨는 조선의 왕인 성종의 외척이었던 만큼 명황실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성종 14년 한씨가 죽자 성화제는 그녀를 `공신부인`으로 봉하였다. 한씨는 친정 가문의 성장과 조선왕실 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첫째, 오빠 한확이 세종 및 수양대군(후의 세조)과 사돈을 맺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씨는 청주한씨 한확 가문이 왕실의 외척이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명의 책봉을 받는 것과 조카사위인 의경세자의 책봉에 공을 세웠다. 셋째, 성종의 친부모인 의경세자와 조카 수빈 한씨를 왕과 대비로 추숭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넷째, 조선이 명에서 금지한 궁각(弓角)무역을 허락받는데 도움을 주었다. 다섯째, 명황제에게 성종의 부인 폐비 윤씨의 폐비 사실을 알리고, 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책봉을 받아내는데 도움을 주었다. 여섯째,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는 데에도 적극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도움의 대가로 한씨는 조선왕실에 많은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씨에게 바치는 별진헌은 조선인 화자 출신 명사(明使) 정동이 황제와 한씨를 등에 업고 한씨의 손발 역할을 하며 성종 8년 궁각무역문제에 개입하면서 더욱 부담이 커졌다. 성종 9년에 바치기 시작한 별진헌은 처음에는 한씨의 족친이 한씨에게 사사로이 바치는 것이지만 그 종류와 수량이 점점 늘어나고 점차 상공(常貢)이 되어 조정의 큰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성종 14년에 한씨가 죽은 직후까지 바쳐졌던 별진헌은 조선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KCI등재

6중종 후궁 희빈홍씨의 생애와 행보 - 기묘사화를 중심으로 -

저자 : 이미선 ( Lee Mi-seo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71-197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중종의 후궁 熙嬪洪氏(1494∼1581)의 생애와 정치적 행보를 살펴본 연구로서, 생애 가운데에 己卯士禍를 중심으로 고찰하였으며,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을 복원하는 데에 주된 목적을 두었다. 이 연구의 주된 자료는 주로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그리고 『묘지명』 등이며 기타 자료를 활용하였다. 희빈홍씨는 반정공신 洪景舟의 딸이자 鳳城君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중종반정이후 13살에 부친 홍경주의 공훈에 힘입어 후궁이 되었고, `勳戚政治` 또는 `戚臣政治` 시기에 왕실의 여성으로서 학자 관료인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는 데에 조력하였다. 보통 `己卯士禍`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그녀는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를 비방하였고 궁궐에 퍼져 있는 유언비어를 전달하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새로운 정치 세력인 사림파를 축출하고 자신이 지지하던 훈구 세력의 기반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후궁이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여 결정적 영향을 미친 첫 사례였다. 기묘년에 보여준 희빈홍씨의 정치적 행보는 그녀 자신과 그녀의 아들의 신분적 향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공신 가문의 딸이었고, 궁궐 안팎의 다양한 정보와 풍부한 정치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은 그 당시 아직도 유교적 신분 질서가 고착되지 않았으므로, 후궁과 그녀의 아들이 왕비와 세자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그녀와 같은 후궁의 위상이 비교적 높았다고 할 수 있다.

KCI등재

7한산이씨의 『고행록』으로 본 조선후기 사대부가 여성의 삶

저자 : 김엘리 ( Kim El-ly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99-221 (2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한산이씨가 환갑 무렵에 자신의 일생을 반추하며 쓴 『고행록』을 통해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의 삶을 살펴본 것이다. 한산이씨는 선조대 영의 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현손녀로 1659년에 태어나 69세의 삶을 살았다. 1676년 18세의 나이로 유명천의 三娶로 출가하였다. 남편 유명천은 숙종대이조 예조 호조판서를 역임한 명신으로 한산이씨는 유명천과 결혼하여 남편의 품계에 따라 10대 때 정부인 외명부 직첩을 받게 되었다. 남편 유명천은 진주 유씨 대종가 종손이었으며, 정치적으로 남인계 인물이었다. 숙종대환국정치로 인해 3차례 유배형을 선고 받는다. 외명부 직첩을 받은 영화로움은 정치적 피화로 인해 고행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유배형은 왕의 특별사면이 있어야 해배될 수 있는 형벌로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重刑이다. 한산이씨는 남편의 해배가 기약이 없다고 판단하고 남편의 배소로 이주하여 사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縣吏와 驛卒의 집을 옮겨가며 우거하기도 하고, 절도에 안치되어 이거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유배 중인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상례와 장례를 주관하는 등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한산이씨는 『고행록』을 저술해 후손에게 전한다. 가문의 시련이 오더라도 宗婦라면 의연히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고행을 통해 후대에 알리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종부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한 삶의 태도는 정치적 피화 속에서도 가문을 지켜준 정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저술한 『고행록』은 후대에 전사되어 가문에 전승되는 이유일 것이다.

KCI등재

8삶과 앎의 문제로 본 이사주당 - 인물 재구성을 통한 여성사상사 서술의 시론 -

저자 : 이숙인 ( Lee Sook-i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23-244 (2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80여 생을 산 이사주당을 삶과 앎의 주제로 재구성한 것이다. 삶과 앎의 문제를 통한 인물의 재구성은 두 영역을 범주화하고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 먼저 삶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범주는 혼인을 통한 가족의 구성이기에 25세의 나이로 사취부인이 된 사주당의 혼인관계를 살폈다. 양반 남성은 자신의 혼인 횟수와 무관하게 4, 50대의 나이에도 초혼의 여성과 혼인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진주류씨세보』를 참고했다. 이이서 가족 관계를 만들어 간 사주당의 노력과 성과를 구체적 자료를 통해 살피고, 그녀의 살림과 나눔의 정신이 깃든 경제생활에 주목했다. 사주당 부부는 일상을 나누고 학문을 토론하는 동반자적 관계였다. 아들에게는 출세보다는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도록 이끌었고, 딸들에게는 문자생활을 통한 자기표현의 길을 열어주었다. 다음으로 사주당이 추구한 앎의 성격으로 `위기(爲己)`와 `실용(實用)`에 주목 했는데, 그녀의 저술 『태교신기』는 경험의 지식화라는 측면에서 조명했다. 마지막으로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한 사주당의 노력이 주변 여성들에게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고, `여중유현(女中儒賢)`으로 기억되고 서술된 이사주당의 여성 사상사적 의미를 논하였다.

KCI등재

91920~30년대 정칠성의 사회주의운동과 여성해방론

저자 : 박순섭 ( Park Sun-sub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45-271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대구지역 기생출신인 정칠성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가의 삶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 1922년과 1925년 두 번에 걸쳐 일본 동경에서 유학했고, 그 과정에서 베벨과 山川菊榮(야마카와 기쿠에)의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수용했다. 또한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여성운동계의 통합을 견인했다. 그녀는 주세죽, 허정숙 등과는 달리 코민테른이나 비합법 공산당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지 않고 사회주의 및 여성해방 운동을 이어갔다. 또한 지역 단위 사회운동 경험을 토대로 국내 여성운동계의 현실에 입각한 주체적인 여성해방론을 견지했다. 이는 여성의 계급의식을 배양하기 위한 선전, 강연 활동과 공장과 농촌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통해 드러났다. 지역운동으로의 확장과 원조도 같은 측면에서 구체화되었다. 1929년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된 정칠성은 그동안의 운동방식을 근우회라는 전국적 조직 차원에서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근우회의 내적 한계와 일제의 탄압 등으로 인해 지속적인 성과로 달성되진 못했다. 하지만 당시 근우회의 선전조직 강화와 노농부 신설은 정칠성이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만 가능했던 사업방향의 전환이었다. 근우회를 비롯한 사회운동계 중앙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칠성은 근우회 해소나 학생 시위 조직 등과 관련하여 특별한 입장을 보였다. 특히 근우회의 단계적인 계몽을 통한 여성의 무산계급성 자각을 강조하는 여성해방론을 견지했다. 나아가 본인의 활동경험과 주관에 따라 사회주의 운동계의 대세적인 경향과는 다른 견해와 차별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 나아가 사회주의계열 여성운동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는 여성사회주의자로서 정칠성이 주목된다.

KCI등재

10학적부를 통해 본 일제강점기 동덕여고 여학생의 특성 연구

저자 : 김명숙 ( Kim Myou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73-303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일제강점기 동덕여고 학적부(1926-1945년)를 분석하여, 동덕여고의 학생 구성, 학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졸업생 진로에 초점을 맞추어, 동덕여고 여학생의 특성을 고찰한 사례 연구이다. 동덕여고는 국권회복에 기여할 수 있는 여성인재의 육성을 목표로 순수 조선인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설립된 민족주의 교풍의 사립학교였다. 현재 동덕여고에는 1914-1945년까지 재학했던 동덕여고 학생들의 학적부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데,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여학생 집단의 민족적·계급적·성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사례라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여학생`이란 당시 여자중등교육의 기회를 부여받았던 1% 미만의 조선인 여성 엘리트 집단으로, 이른바 `신여성`으로 일컬어지던 근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동덕여고 여학생들은 입학 단계에서부터 나이가 평균 2-4세 정도 많은 학생들이 81.9%나 될 정도로 법적 학령(學齡)에 준하는 교육기회를 부여받지 못하였다. 여성교육을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했던 동덕여고에서는 평균 5-7세나 많은 만학도, 결혼한 기혼여성에게도 가능한 학업의 기회를 부여하였고,심지어 다른 학교에서 항일학생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한 학생들에게도 편·입학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출신지역별 특성을 보면,경성부 출신이 평균 44.1%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가운데,지방출신 학생들이 보통학교부터 `경성조기유학`을 하였음이 확인된다. 또한 공립보통학교 출신이 사립보통학교 출신보다 많아 일제강점기가 `공립만능시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3년 이후로는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학교 당국의 노력과 함께 점점 치열해지는 입시경쟁 속에서 서북지방까지 동덕여고 진학생이 확대되고 있었으며,지방출신 학생들은 경성과 지방의 문화교류의 매개자로서 역할을 하였다. 동덕여고 여학생의 학부모는 농업종사자가 33.7%인 반면,공무·자유업과 상업·광공업 등 자본주의적 근대직업 종사자가 63.8%로 2배 정도 많아, 농업 종사자가 1930년대 83.1%, 1940년대 74.4%였던 조선사회의 직업 구성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자산규모면에서도 동덕여고 학부모들은 1만원 이상의 자산을 소유한 중류 이상의 유산자가 77.8%나 되었다. 즉,동덕여고 여학생의 2/3정도는 중류 이상의 자산을 소유하고 자본주의적 근대직업에 종사하면서 여성교육에 개방적·적극적이었던 부모의 영향으로,일제강점기에 1% 미만의 조선인 여학생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여자중등교육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덕여고 졸업생들은 식민지 말기로 갈수록 심해지는 취업난,상급학교 진학에서 여학생에 대한 기회 불균등, 조혼을 부추기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졸업생의 평균 70.1%가 가사에 종사하였다. 반면 동덕여고 여학생의 70% 이상이 취직과 진학을 통한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진출을 희망하였으나,취업 14.3%, 국내외 상급학교 진학 13.9%로 졸업생들이 마주한 식민지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이는 일제강점기 여고의 교육목표를 현모양처 양성을 위한 신부양성소적 성격의 종결교육기관으로 설정했던 식민지배자의 의도가 식민지 전 기간을 통하여 강화·고착되어 나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일제강점기의 여고가 여학생들의 희망을 담보하지 못하고,여전히 종결교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지만,만학도들의 진취성에서 보듯이,상급학교 진학과 취직을 통한 `근대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여학생 계층의 선구적 역할과 가능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12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이화여자대학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 성균관대학교
 75
 63
 54
 40
 33
  • 1 이화여자대학교 (75건)
  • 2 서울대학교 (63건)
  • 3 연세대학교 (54건)
  • 4 한양대학교 (40건)
  • 5 성균관대학교 (33건)
  • 6 고려대학교 (31건)
  • 7 한국외국어대학교 (29건)
  • 8 한신대학교 (27건)
  • 9 건국대학교 (22건)
  • 10 서강대학교 (21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