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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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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1986)~121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983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0호(2019년)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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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아시아 근대의 문화론적 전환과 3.1운동

저자 : 윤해동 ( Yun Hae-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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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과 중국에서 독일식 문화 개념이 수용되는 과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개념 자체만 보더라도 전통적 한자 개념이나 문명 개념과 그다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1차대전 종결 이후 '문화주의' 철학으로 정립되기까지 일본에서 문화 개념이 실천적인 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의 좌절 이후 독일식 문화 개념이 수용되자 곧 이어 신문화운동이라는 실천운동이 전개되었다. 문화주의라는 철학적 바탕이 없는 채로, 구문화와의 투쟁을 슬로건으로 내건 강력한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중국은 일본과 달랐다.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수용된 '문화론'은 다시 조선의 전통='국수(國粹, nationality)'에 대해 주목하게 하였으며, 조선의 개별성에 대한 강조는 민족에 대한 자각을 강화하였다. 병합 이전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국수보존운동'은 신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도 조금 갖고 있었으나 1910년대 국수보존운동이 신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는 문명 개념의 지속성 혹은 문화 개념의 혼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광수는 '정신적 문명'이라는 형태로 문화 개념의 적극적 수용에 대비하고 있었다.
민족자결주의와 개조론의 세계사적 흐름은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3.1독립선언서」로 수렴되었다. 「3.1독립선언서」는 민족자결과 개조론을 잇는 매개가 바로 문화 개념 혹은 문화론이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신문명의 시대 곧 새로운 문화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민족자결을 위한 저항권이 용인되는 것이며, 이는 세계 개조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적 연결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3.1독립선언서」는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문화의 시대를 활짝 열어 제친 '문화의 권리장전'이 되었다. 민족자결주의와 개조론의 사조는 문화론과 결합하여 대단한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문화를 위한 투쟁'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요컨대 문화를 위한 투쟁으로서의 3.1운동은 동아시아 차원의 근대의 성격을 크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 3.1운동은 이전의 문명론적 위계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둘째, 3.1운동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1920년대는 '문화의 시대'가 되었다. 셋째, 3.1운동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적 차원에서 '식민지근대(colonial modern)'의 상호성이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는 윌슨·루스벨트적 자유주의 기획을 통하여 2차대전 이후 현대사회를 형성하는 기원이 되었다.


Japan and China's adoption of the German concept of culture before World War Ⅰ was marked with confusion. Culture, as used in those times, had few distinctions from the traditional concept depicted in the Chinese character for civilization: 文化. This German concept, however, failed to spread into a practical cultural movement in Japan, despite the widespread growth of 'culturalism' philosophy after World War Ⅰ. In contrast, the introduction of the German concept of culture into China after the failed Xinhai Revolution catalyzed the New Culture Movement. China, unlike Japan, and with few philosophical groundings adopted 'the concept of culture' and developed a strong cultural movement that made struggles with old ways a powerful slogan.
In the case of Korea, the importation of 'the concept of culture' into Korea via Japan led to renewed interest in Korean traditions. The concept, at the time, equated to nationality in ways that emphasized Korean characteristics and reinforced national self-awareness. And while the movement to preserve national characteristics prior to Korea's annexation to Japan carried signs of a new cultural movement, a full development failed to take place in the 1910s (despite Lee Kwangsoo's activities in 'spiritual civilization').
Regardless, the flow of 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and reconstructionism in world history had great influences on Korea, which culminated in the March Fir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e overarching logic at the time aimed at using civil disobedience to gain national self-determination and to embark on a new civilization and culture while reordering the world order. Combined with the concept of culture, the 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and reconstructionism became a powerful weapon. The March Fir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us became a 'cultural bill of rights' that ushered in a new era of culture to Korea and the world. In this regard, the March First Movement may be called a 'struggle for culture.'
The article presents three major shifts in East Asian modernity that the March First Movement encouraged. First, the March First Movement undermined preexisting hierarchies within the civilizational paradigm. Second, the movement was predicated on an “era of culture” endemic of the 1920s. Third, the movement opened new opportunities to further strengthen reciprocity of the 'colonial modern' in East Asia and the world, which became part of a new modern society through Wilson-Roosevelt's post-WWII liberal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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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아시아 단절의 담론구성체 형성의 맥락에서 살펴본 3.1운동의 사상사적 전환의 공백

저자 : 백승욱 ( Baek Seung-w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92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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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3.1운동 이면에 있는 곤경을 '사상사의 부재 또는 취약함'으로 해석한다. 이를 위해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의 변동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 등장한 '단절의 역사 담론'과 비교해 보고 한국에서 전개된 사상사적 전환의 노력과 한계를 살펴보려 한다. 이 글에서는 네 가지 관찰점을 검토한다. ① 20세기초 동아시아가 겪은 국제질서의 독특성,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등장한 '단절의 근대 담론'의 특징. ② 3.1운동과 중국 5.4운동의 비교. ③ 3.1운동이 형성시킨 사상사적 질문. ④ 임시정부 법통의 질문이 사상사와 관련되어 제기되는 난점. 분석을 통해 우리는 '3.1운동 패러다임'의 문제를 확인하였는데, 이 패러다임은 '우리 민족'의 경계를 한민족과 이를 탄압하는 일본 제국주의로 구획하는 대신, 우리 내부에서는 역사의 '단절'보다는 '연속'의 상상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plights of the March First Movement as consequent of a disregard for or an absence of thought history. To this end, this research compares Korea's March First Movement with discourse of historical discontinuity with China and Japan, and examines efforts to both expand and limit ideological transformations in Korea. It engages this in four ways: 1) an analysis of geopolitics of East Asia, which was characterized with 'discontinuous modernity'; 2) a comparison between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China's May Fourth Movement; 3) a probe of thought and history and history of thought during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4) an investigation of provisional government difficulties raised in relation to the March First Movement. The findings suggest a 'March 1st Movement paradigm' that marks boundary lines between woori nara (our country), as Koreans, which functioned as a means of reifying an imagination of identity/ national continuity while under suppressive Japanese imperia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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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사회적 저항경험은 어떻게 교육주체 형성으로 이어졌는가 ― 삼일운동과 교육주체 형성

저자 : 이경숙 ( Lee Kyu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3-12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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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삼일운동을 계기로 중등학생들이 어떻게 교육주체로 형성되어 갔는가를 탐구하였다. 학생들이 교육주체로 형성되는 데는 삼일운동 당시 학생들이 맡았던 독립선언서 배포, 읽기, 쓰기, 그리고 공적 말하기와 같은 문해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해학습자로서 중등학생들은 삼일운동 당시에는 학교가 소재한 대도시에서 출신지역으로 귀향하여 대도시와 출신지역을 잇는 네트워크 역할을 하였다. 삼일운동을 통해 민족자결과 인류공영의 정신을 접한 학생들은 삼일운동 후 학교로 돌아가 그들에게 일상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였던 교육문제로 1920년대 내내 학교와 일제당국에 맞서 동맹휴학을 벌였다. 동맹휴학 운동을 위해 학생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공적인 말하기와 글쓰기를 전개했다. 각종 성명서와 지지성명을 통해 학교 간, 학교와 사회단체 간, 조선과 일본 사이를 연결했다. 교육 아닌 것(비(非)교육)에 반대하고, 조선인 본위 교육을 주창하였다. 삼일운동부터 1920년대까지 지속되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지식을 암기하고 주해하고 평가받는 문해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이해하고 생성하는 문해활동을 체험하며 교육적 주체로 형성되어 갔다.


This research explores how secondary students formed as main actors and subjects within education during the Samil Independence Movement. Literacy activities―distribution and reading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public writing, and public speaking― played significant roles in shaping students into strong educational actors. As literate youth, these students served as vital networks connecting metropolitan areas where their schools were located with their hometowns during the movement. Students who were exposed to the spirit of national self-reliance and motivated through ethics founded on humanism went on strikes and formed alliances to protest against schools and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to combat daily abuse and curtail fundamental educational neglect throughout the 1920s. In preparation for these strikes, students engaged in their public speaking and writing to justify their claims. Their assertions and political statements served as links between various schools, between schools and social organizations, and between Korea and Japan. These students opposed non-educational practices and instead advocated Chosen people-based educational systems and practices. Through a series of courses between the Samil Movement to the 1920s, these students not only experienced new literacy activities, but also understood and produced themselves into new educational actors and subj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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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운동과 기념일의 역사화

저자 : 김미화 ( Jin Meihu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5-16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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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고종의 승하와 因山을 계기로 일어났지만, 민중은 고종을 애도하기보다는 독립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주목할 것은, 행진과 만세 부르기라는 시위방식이 본래 군주의 탄신일 축하행사를 통해 보급된 의례적 행동이라는 점이다. 이후 행렬과 만세 연호는 식민지기 대중시위 방식의 원형이 되고, 매년 3.1운동을 기념하려는 시도 자체도 독립운동의 일부가 된다. 임시정부는 3.1절, 국치일, 개천절, 순국선열기념일 등을 기념하면서, 일본제국의 시간질서에 대항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두 달 넘게 지방별로 일어난 많은 시위가 '3.1'이라는 하나의 날짜로 묶였다. '만세'의 다의성이나 폭력시위의 존재는 잊혀졌다. 1919년 3.1운동은 한국 국민국가 형성의 결정적 계기 중 하나이고, 3.1절은 그런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최초의 국민적 기념일이다. 그러나 거꾸로 후대의 기념일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March First Movement commenced with the funeral of King Gojong, but the people marched chanting Manse (Hurrah)!―an exclamation focused more on national independence than in mourning the fallen King. The ritual act itself has roots that trace to practices associated with the emperor's birthday and became emblematic of protests during the colonial period. It eventually came to commemorate the March First and became an integral part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competed in terms of time order to beat out Japan in establishing several of its national celebratory and anniversary dates. This included the March First Movement. For nearly two months throughout this process, many protests arose across the country― protests that culminated through representation of one day: March First. The multifarious connotations and insinuations embedded in manse have dissipated over the years with few remembering the violence―both inflicted and endured―encompassed within either the term or the actions associated with it. The March First Movement is a decisive event in the formation of the Korean nation, and March First has been christened as a national holiday to commemorate such a momentous historical event. Conversely, it is the celebrations later generations that ultimately define the memories of such historical 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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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시대 수면의 의미 ― 일기류를 통해 본 수면과 밤 시간에 관한 일 고찰

저자 : 문현아 ( Moon Hyuna ) , 차승은 ( Cha Seung-eun ) , 은기수 ( Eun Ki-s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5-19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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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수면에 관한 연구는 사회사와 문화사 분야에서 아직까지 주요한 주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이 연구는 『쇄미록』과 『병자일기』를 주요 텍스트로 삼아 일기 기록에 나타난 잠에 관한 언급과 그 의미를 파악하고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일기자료에서 수면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먼저 파악하고, 잠을 기록한 것이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는지 분석하였다. 특히 일기에서 잠을 기록하는 경우의 시/공간적 맥락을 비추어 볼 때 '잠을 잤다'는 기록이 단순히 수면의 유무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숙박의 의미, 접대를 하는 의미 등도 있고, 잠을 자는 시간대인 밤, 그리고 밤 시간대 일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는 밤 시간대와 연결해서 일기 기록에 담긴 의미를 따라 불면의 상황이나 잠자는 행위에 대한 사회적 의미화를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잠과 밤시간대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사고, 행위들을 재구성해서 수면이 발생하는 시간이 아무 의미 없는 암흑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일상에 관한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임을 조망하였다. 또한 이 글은 인간의 활동 중 수면이 갖는 사회관계 맥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동시에 조선시대 유교 규범의 틀과 맞물려 어떻게 의미화되는지 분석을 시도했다. 이 연구는 기존연구가 매우 빈약한 상황에서 수행한 탐색적 연구이지만 수면을 둘러싼 조선시대 일상의 새로운 측면을 접근하는 의미 있는 첫 시도라고 할 수 있다.


Research on sleep in Korean society remains an understudied topic in social and cultural history. This research identifies and analyzes the meanings of sleep as expressed in Joseon period diaries with a focus of entries, accounts, and mentions in Swaemirok and Byeongja-ilgi (Diary of Byeongja Year). Using diary data, we first conceptualized and contextualized the meaning of sleep as used in these texts. Focusing particularly on temporal/spatial contexts in which sleep was recorded, we found that 'sleep' not only indicated the presence of unconsciously resting bodies (or somni-related activities), but also served as means of expressing hospitalities and non-sleep related nighttime activities. This study explored the social significance of these accounts and problematized how various events, incidents, and activities mattered especially in cases when expressions of sleep or sleep-related texts were recorded in relation to activities falling outside of nocturnal hours. This research thus revealed how social contexts could alter historical interpretations of human activities as a whole, while exposing Confucian norms of people living and sleeping during the Joseon period. As an exploratory study, this research provides a modest but novel approach to investigating an understudied aspect of everyday life of Joseo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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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역사인구학 지표로 살펴본 조선후기 생활수준의 장기 추이, 1734~1910

저자 : 우대형 ( Woo Dae Hy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5-259 (6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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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가격의 단기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당대의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로 간주된다. 단기적인 생산충격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된 사람들은 주로 그 사회의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로서, 흉풍의 단기적 변화에 대해 사망률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생존위기'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일 조선후기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면, 단기적인 생산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였을 것이며, 이와 반대로 생활수준이 개선되고 있었다면 사망률 민감도는 점차 둔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아이디어에 기초하여, 1734~1910년 간 곡물가격의 연간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를 추정하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 생활수준의 장기 추이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사망률의 민감도를 추정하는데 필요한 곡물가격과 사망률 시계열은 兩班家와 그 친족집단이 남긴 쌀값 자료와 족보로부터 구하였으며, 모형은 시차분포모형을 사용하였다. 추정 결과, 미가 변동에 대한 사망률의 민감도는 19세기 초 정점을 찍은 이후 점차 둔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본 논문의 추정결과는 조선 후기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다가 개항 또는 20세기 식민통치의 시작과 함께 비로소 상승하기 시작하였다는 기존 연구의 주장을 지지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글의 추정결과는 조선 후기의 생활수준이 19세기 초 최저점을 기록한 이후 꾸준히 개선되고 있었으며, 그 증가가 20세기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Much debate surrounds the standards of living in pre-colonial Korea. Often based on various data sources such as real wages, body heights, and agricultural productivity, previous scholarship argued that living standards in Korea began only with Japan's annexation in 1910.
This research uses mortality sensitivities to short-term fluctuations of rice prices as a more salient indicator of living standards from 1734 to 1937. In a society close to subsistence level, poor harvests would lead to increased mortality due to malnutrition and increased vulnerability to various malnutrition-related diseases. Conversely, if the real income level is well above subsistence level, then a harvest failure need not have any substantial effect on mortality. In this respect, vulnerability to short-term harvest outcomes serves as a good indicator of living standards in preindustrial societies. Using rice price records of the Yangban and their kinship groups, as well as from their genealogies in Korea, times series data on rice prices and mortality rates are estimated.
The findings contradict assertions that living standards continuously declined throughout the late Joseon period, only to rise after colonial rule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Instead, living standards hit their lowest point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and rose steadily throughout th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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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한말 식민지기 통영 충렬사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새로운 추모의례 조직

저자 : 이진욱 ( Lee Jin-w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1-28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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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은 '민족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생겨난 것은 한말 이후부터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이순신 장군이 실제 활동하였던 통영 지역은 정작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이 연구는 한말 식민지기 통영의 새로운 추모의례인 '탄신제(誕辰祭)'의 출현에 주목하였으며, 이 시기 통영 지역사회에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문화적 상징을 둘러싸고 여러 집단들이 보여준 문화적 대응의 양상과 그 의의를 논의하려 한 것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통제영이 폐지될 즈음 통영에서는 탄신제가 거행되고 '충무공 생신계(生辰稧)'가 조직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통영 충렬사에 전승되고 있는 『충무공대감생신계좌목(忠武公大監生辰稧座目)』을 분석하여 계의 구성원들이 결성 초기부터 지역을 대표할 만한 엘리트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폐쇄적 멤버십을 유지한 생신계는 통영이 근대 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새롭고 다양한 계층과 충무공에 대한 그들의 기대도 아울러 포섭하려 하였다. 생신계는 1919년 여러 단체를 규합해 '통영충렬사영구보존회(統營忠烈祠永久保存會)'를 조직하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의례를 주도하였는데, 이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의례가 지역사회에서 확대되고 다층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emergence of organizations for new memorial ceremonies and the complicated cultural aspects of correspondence between various groups along with the hegemony of Admiral Yi Sun-sin, centered in Tongyeong County's Chungnyeol Shrine (忠烈祠) The research finds that around the Kabo Reform (甲 午更張) of 1894, Admiral Yi Sun-sin's birthday ceremony was performed in Tongyeong County in which the 'The Organization for Celebrating Admiral Yi Sun-sin's Birthday' (忠武公 生辰稧) was formed. In addition, according to the results of an analysis of 『The Register of Organization for Celebrating Admiral Yi Sun-sin's Birthday (忠武公大監生辰稧座目)』 that was passed down from the Chungnyeol Shrine in Tongyeong County. The elite were members of the community and each represented a region at the time of the organization's inception. The Organization for Celebrating Admiral Yi Sun-sin's Birthday maintained exclusive membership that was formed through class status, leading to the formation of 'The Tongyeong Chungnyeol Shrine Preservation Society (統營忠烈祠永久保存會)'. This organization took the lead in performing memorial ceremonies for Admiral Yi Sun-sin and expanded the scope of memorial ceremonies performed in the region, which was instrumental in fostering a multicultural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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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행기 정의를 통해 본 일본 한센인 운동, 1946~2009

저자 : 김재형 ( Kim Jae Hyung ) , 오하나 ( Oh Ha 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89-33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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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0년 가까이 지속된 「나예방법」에 의하여 한센병시설에 일평생 수용당해야만 했던 한센인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사회의 노력을 이행기정의 개념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이행기정의를 응보적 정의, 회복적 정의, 변혁적 정의로 구분하고, 일본 한센인 운동을 크게 ① 이행기 정의 실현 예비기, ② 응보 및 회복적 정의 실현기, ③ 회복 및 변혁적 정의 실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국면인 법 개정 및 폐지 운동기는 아직 이행기 정의 개념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했던 시기이지만, 변혁적 정의가 태동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이 시기에 당사자 단체가 형성되었고, 전문가 집단이 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국면인 배상청구소송기는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가 동시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소송을 통하여 행정부 및 입법부의 잘못이 인정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의 사과와 경제적 보상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한센병문제기본법 제정기는 회복적 정의와 변혁적 정의가 동시에 추구되는 시기였다. 피해회복의 개념을 더욱 광범위하게 정의했으며, 한센인에 대한 유사한 차별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명시함으로써 사회문화적 구조에 대한 변화를 추구했다. 일본의 한센인 운동 사례를 통해 이행기 정의가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으며, 실천적으로는 정의를 성취하는 단발적인 사건보다는 운동의 축적된 역사적 경험이 중요함을 알 수 있었다.


This article seeks to examine the Japanese civil society's efforts to solve the problem of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PAH), who had been coercively institutionalized for a lifetime in the facilities under the “Leprosy Prevention Law” that lasted for nearly ninety years with the concepts of transitional justice. To do this, we categorize the transitional justice into retributive justice, restorative justice, and transformative justice, and examined how each phase of PAH social movement in Japan conforms to which justice's characteristics.
PAH social movement in Japan can be broadly divided into three phases: ① a prior phase; ② a phase of retributive and restorative justice; ③ a phase of restorative and transformative justice. The first phase was a time when the concept of transitional justice had not yet worked sufficiently, but it should be emphasized that the basis for it had been formed.
The Second phase was a period when retributive justice and restorative justice had been realized at the same time and in part. Through the lawsuit, the failures of the administrative and legislative bodies were recognized and eventually the apology was made by the Prime Minister. At the same time, PAH's damages caused by wrong policy was formulated and economic compensation was completed based on this. However, revealing the truth through litigation was limited to the assailants' abuse rather than the specific damage of the victims, and not to reach the social and institutional efforts to solve this issue.
Finally, the period of enactment of the Act on Promotion of Resolution of Hansen's Disease Issues was a time when restorative justice and transformative justice were pursued at the same time. In this period, the concept of damage-recovery was more broadly defined, and also various efforts to do so were made. Moreover, PAH and Japanese civil society pursued the transformation of social-cultural system by stating their efforts to provide devices to prevent similar discrimination against PAH.
When we analyze Japanese PAH's social movement with the concept of transitional justice, we find, in theory, its fluidity and multi-dimensionality on one hand, and in practice the way of dealing with past history issues should be not just one-off event, but a series of accumulated diverse efforts on the other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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