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update

THE JOURNAL OF HONAM STUDIES

  •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2671-8944
  • :
  • : 호남문화연구(~2018) → 호남학(2019~)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3)~67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552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7권0호(2020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박물관 등록 제도와 비교를 통한 문학관 등록 제도 검토

저자 : 박효주 ( Park Hyo-ju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9-54 (2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문학관 등록제도는 문학진흥법의 시행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문제점은 박물관·미술관 진흥법에 의하여 박물관으로 등록되어 있는 문학관조차도 문학관 등록제도에 의무적으로 신청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관 등록제도는 기존에 시행된 박물관 등록제도와 매우 유사하며 일정 부분 박물관 등록 제도를 참고하여 설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박물관에 지원되는 여러 가지 지원 혜택 및 부족한 예산을 마련할 기회 등을 등록 박물관에 우선하여 제공하기 때문에 등록 박물관으로 혜택을 보고 있는 문학관들은 문학관 등록을 취소하고라도 박물관으로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문학관 전문 인력 또한 박물관 학예사보다 범위가 넓고 전문성은 낮아 전문적인 학예연구사로 인정되기는 어렵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제도 개선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문학관 지원 정책 증설이다. 현재 진행되는 문학관 지원 사업은 문학관 활성화 차원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 문학관의 운영경비 절감 측면에서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또 박물관에서 시행하는 전문 인력 지원사업과 같은 인력지원 사업도 문학관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문학관 등록제도도 박물관 제도처럼 등록문학관의 세제 감면 혜택과 전문 인력 지원정책 등의 부차적인 지원 정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또, 등록문학관 제도도 박물관 등록제도에 맞추어 기존의 전문 인력 기준을 강화하여 문학학예사 인증 기관으로 제도를 개설하거나 현재 운영되고 있는 박물관 경력 인증대상 기관으로 동시 인정 될 수 있게 하는 등의 개선점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기존 등록문학관에 근무하고 있는 인력이 박물관 학예사정도의 전문성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교육도 실시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교육은 앞으로 설립된 국립문학관에서 주관해야하며 건립 이전까지는 한국문학관협회와 같은 기관에서 담당해야 할 것이다.


The literary Museum registration system was initiated by the enforcement of the Literature Promotion Act. The problem is that even the literature museum registered as a museum under the Museum and Art Promotion Act is required to apply for the literature museum registration system. The registration system of the literature museum is very similar to the existing museum registration system and seems to have been established by referring to the museum registration system.
As the museum prioritizes registered museums with various support benefits and opportunities to raise insufficient budgets, the literature museums that are benefiting from the museum will try to keep it as a museum even if they are unregistered. Literature museum professionals are also wider and less specialized than museum curators, making it difficult to be recognized as professional academic researchers. To this end, the following measures are proposed to improve the system:
First of all, it is an extension of policies to support literary museums. The ongoing project to support the literature museum may be helpful in terms of revitalizing the literature museum, but in fact, it does not help much in terms of reducing operating expenses of the literature museum. In addition, there are no human resources support projects in the literature museum, such as professional human resources support projects implemented by the museum. Like the museum system, the registration system of the literature museum should be followed by secondary support policies such as tax breaks for registered literature museums and policies to support professional human resources.
In addition, the registered literature museum system also needs to be improved by strengthening the existing standards for professional human resources in line with the museum registration system so that it can be recognized as an institution for certification of literary and academic experts or as an institution subject to certification of museum career that is currently in operation at the same time. In addition, education should be provided to ensure that the existing personnel working at the registered literature museum have the same expertise as the museum's curator. Such education should be organized by the National Literature Museum, which will be established in the future, and should be handled by institutions such as the Korean Literature Museum Association before its establishment.

KCI등재

2최흥종 목사관련 전기소설의 성경적 모티브 연구

저자 : 최창근 ( Choi Chang-geun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5-76 (2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최흥종 목사는 광주 전남 지역의 시민운동과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중 한명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전쟁을 거쳐 1966년 사망할 때까지 최흥종은 평생을 약자와 빈자의 편에 서서 살았다. 그는 특히 나환자 치료와 구제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흥종의 삶에 대한 기록이 대체적으로 부실한 탓에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다소 신화화 된 측면도 있다. 신화화는 인물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진실과 업적을 왜곡시키는 신화화는 결과적으로 부정적 작용을 하게 된다.
최흥종의 대표적 행적 중 하나는 나환자들을 인솔해 경성으로 간 구라행진이다. 그러나 나병환자의 건강 등을 고려한다면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리고 총독과의 면담 이후 지원을 얻어냈지만 이는 일제의 나환자 정책과 부합했기 때문이다.
광주의 빈민촌 철거를 막기 위해 총독과 담판을 벌였다는 이야기 역시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어려웠다. 빈민촌 철거는 도시계획에 의해 사전에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즉 나환자구제는 총독부도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빈민촌 철거 역시 총독부의 결정이었다. 전후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두 이야기에서 최흥종 목사의 역할은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
최흥종 목사 이야기는 그 배경이나 결과와는 무관하게 성경의 에피소드와 유사하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나 사도 바울 그리고 모세의 출애굽기가 최흥종의 전기에 내재되어 있다. 이는 기독교 선교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즉 성경의 에피소드로 한 인물의 일생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기독교 전파 초기의 흔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인물의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다. 객관적이고 근거를 갖춘 해석만이 그 인물의 가치와 업적을 훼손하지 않는 길이라 할 수 있다.


The reverend Choi Heung-jong is one of the symbolic figures representing local civil movements and Christianity in Gwangju and Jeonnam region. Through the Japanese occupation, the liberation, and the Korean War, Choi Heung-jong lived all his life on the side of the week and the poor until his death in 1966. He is especially famous for his great role in the treatment and relief of lepers. In addition, he was arrested for independence movements and imprisoned. However, many of the stories about Choi Heung-jong's life has become mythical because of poor records. Mythology hinders evaluating a person objectively. Mythology, which distorts truths and achievements, functions in a negative way.
One of Choi Heung-jong's the most representative events is the Gura March in which he led lepers to Gyeongseong. However, considering the condition of leprosy patients, it seems almost impossible. Also, he gained support after the interview with the governor, but it was possible in accordance with the Japanese leper policy.
The episode that he met the governor for negotiation to prevent from demolishing Gwangju slum area could hardly bring meaningful results. Demolition of the slum area was already planned by the city plan. In other words, the Government General also had the intention of helping lepers, and the demolition of the slum area was either the decision of the Government General. The part he played in the two anecdotes is rather exaggerated considering the situations.
The reverend Choi Heung-jong's stories are similar to the episodes in the Bible with no regard to the background or the consequence. The Good Samaritan, the Apostle Paul and the book of exodus of Moses are embedded in the biography of Choi Heung-jong. That was resulted from the Christian mission work. Namely, it is to describe the life of a figure by the episodes of the Bible. This commonly occurred in the early days of spreading Christianity, though it is distant from the truth of the person. It is quite certain that objective interpretation with proof will prevent damaging the value and achievement of the person.

KCI등재

3새로운 세대를 위한 오월교육의 탐색적 연구

저자 : 김정은 ( Kim Jeong-eun ) , 김봉중 ( Kim Bong-joong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7-108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Z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세대들은 기존의 세대와 세계관, 가치관, 행동양태, 소비형태에서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이며 교육에서도 스마트 교육에 익숙해져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세대를 위해 세계시민교육이나 예술·인문교육에서 새로운 세대가 지식의 정보가치를 판별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판단력인 리터러시를 기를 수 있는 교육체제로 변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왔다.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은 오늘날의 Z세대가 타인의 감정과 소망, 욕구를 이해하고 이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서사적 상상력과 비판적 사고력을 제공할 것이다. 이러한 서사적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서 충분한 놀이와 예술적인 경험을 통한 상상력 훈련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본 논문은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에서 강조한 충분한 놀이와 예술적 경험을 통한 상상력 훈련을 오월교육에 적용할만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 박물관이나 기념관에서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예술작품과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증강현실, 가상현실 그리고 모바일 플랫폼을 활용한 교육용 콘텐츠는 반성적 체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경험을 통해 실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오월교육에 좋은 예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박물관과 기념관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오월단체들이 진행하고 있는 오월답사의 학습자 또는 체험자에게 공동체의 소속감을 느끼게 하고 대상경험, 인지경험, 내성경험을 통해 시대와 장소를 상상하게 하여 해당 사건에 공감을 느끼도록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세대를 위한 오월교육의 방법적인 모색으로 개인적, 정서적 차원의 참여를 유도하는 인터액티브 갤러리나 인터액티브 전시를 활용하고 증강현실과 매핑기술을 기반으로 제작된 '모바일 투어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그리고 특정 사건의 장소와 도시 전경을 화면에 비추는 증강현실 기술로 이미지와 영상형태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법에 본 연구는 관심을 집중했다. 또한 여러 공간 중에서 특정 장소를 지정하고 1980년 5월의 상황을 볼 수 있게 하는 영상형태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법뿐 아니라 당시의 광주 전체를 박물관화하는 프로그램을 오월교육에 적용가능한지를 타진했으며, AI기법에 따라 홀로그램이나 증강현실로 만들어진 증언자들을 통해 오월 당사자들의 증언을 듣는 방법도 제시하였다.


The younger generation, often called 'Generation Z', is used to smart education and has completely different characteristics in its world views, values, behavior patterns, and consumption patterns from the existing generation. For the younger generation the education system would be transformed into a Digital Literacy, which raises the judgement for reconstructing information value of knowledge in global citizenship education and art and humanities education. It has been argued that Z generation is needed Digital Literacy education, which emphasizes narrative imagination and critical thinking that would encompass the feeling and desires of others, thus raising empathic ability. For the narrative imagination, imagination training through sufficient play and artistic experience need be carried out.
This essay argues that digital literacy education is applicable in the May education. We examine the cases of applying digital devices to education in museums and memorials, having a particular attention given to educational contents using mobile platforms, virtual reality and augmented reality that are used to inspire practical imagination through experience of sharing reflective experiences and emotions.
The May experience makes learners or experiencers feel the sense of belonging to the community and makes them feel sympathy for the event by imagining the times and places through the experience of the object, the cognitive experience, and the experience of tolerance. We look at the programs used in overseas museums and memorials.
We present an interactive exhibition and interactive exhibition that induces participation at the personal and emotional level, by applying a mobile tour program based on augmented reality and mapping technology. We are interested in providing image and image content using augmented reality technology to illuminate the location of a specific event and the view of the city.
We propose a program that can expose the entire city of Gwangju as well as the place where the 5·18 incidents occurred. It can designate a specific place among various spaces as an educational method of May education and allow us to see the situation in May 1980. It also includes an AI program that allows us to hear the testimonies of the participants in the May 18 movement with holograms or augmented reality.

KCI등재

4한국 전통시기의 산악신앙·성황신앙과 지역사회 - 역사상 인물의 산신·성황신 추앙을 중심으로 -

저자 : 변동명 ( Byeon Dong-myeong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9-147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전통시기 한국의 산악신앙과 성황신앙을 지역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검토하였다. 역사상의 인물이 산신이나 성황신에 추앙된 사례를 중심으로, 그에 담긴 정치·사회적인 의미의 시기별 변화에 유의하며 그 대세가 드러나도록 정리하였다.
삼국과 통일신라 곧 한국의 고대사회에서는, 중앙에 의한 지방세력 견제나 회유·장악의 측면에서 산악신앙의 존재 의미가 부각되었다. 오악이라든지 감악산신 설인귀의 존재 등이 그것이거니와, 중앙귀족이 산악신앙을 통해 지역사회를 위무하고 민심을 안정시킴으로써 지방을 원활히 통치하는 데 도움을 얻으려는 게 삼국과 통일신라시기의 대체적인 추세였다. 성황신앙의 경우 일러야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즈음에 들어 비로소 등장하는 바, 산악신앙의 그러한 전개와는 무관하였다.
고려왕조에서는 산악신앙이나 성황신앙이 지역 토착세력의 존재 과시에 내세워지곤 하는 게 보다 일반적이었다. 지역의 토착세력이 성장하고 또 그들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등에 발맞추어, 중앙에 지역사회의 요구를 전달한다든지 혹은 지역 내의 주도권 다툼에서 산신이나 성황신이 앞세워지곤 하였다. 더불어 지역을 주도하는 사회세력의 성쇠가 산악신앙과 성황신앙에 반영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에 들어 산악신앙과 성황신앙은 유교적 예제의 정립과 함께 규제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음사로 지목되어 금지되고 억압당하기 일쑤였다. 다만 향촌에서 吏胥系列과 士族系列의 사이에 전개된 힘겨루기라든지 혹은 산신·성황신으로 추앙된 인물의 후손의 번성 여부에 따라 지역별로 편차가 적지 않았는데, 대개는 유교식화한 제의와 전통적이며 기복적인 그것이 병립 혹은 절충되는 방향으로 정리되어 갔다.
조선이 유교화되어 갈수록 산악신앙·성황신앙의 위상은 추락하고 그 설 자리는 좁아져 갔다. 거기에 일제의 이른바 미신배척은 결정적 타격을 입혔으며, 그리하여 한국의 다른 민속과 함께 그 전통이 단절되다시피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고대사회에서는 중앙의 지방통제에 그리고 고려시기에는 지역 토착세력의 존재 과시에 각각 내세워지며, 나름의 정치 사회적 의미를 지닌 채 공공영역의 한 켠을 차지한 가운데 전승되어 오던 산신과 성황신이, 조선왕조의 유교적 예제 정비에 따라 대부분 음사의 대상으로 추락한 끝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는 아예 한국의 전통에서 추방되다시피 하며 소외되어 잊힌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The mountain faith and Seonghwang religion in the Korean traditional period were reviewed in connection with the local community. Focusing on the cases in which historical figures were admired to the gods of the mountain or Seonghwang God, this study was organized to reveal the trend by paying attention to chronological changes of the political and social meanings.
In the ancient society such as the period of the Three Kingdoms and Unified Silla, the existence of mountain faith stood out in terms of the central government's check on local power, conciliation and control. This is the existence of the Five Mountains or Xue Rengui, the God of Mt. Kamaksan, and the central nobles tried to get help to govern the region smoothly by stabilizing the community and the public through the mountain faith. And it was a general trend during the Three Kingdoms and the unified Silla period. However, in the case of Seonghwang religion, it appeared only between the end of Silla and the beginning of Goryeo, so it was not related to the development of mountain faith.
In the Goryeo Dynasty, it was more common for the mountain faith and Seonghwang religion to be used to show off the existence of the native force. As the native force grew and it progressed to the center, the gods of the mountain and Seonghwang God were often used to deliver the needs of the community to the center or to fight for leadership in the region. In addition, the rise and fall of the social forces that lead the region was reflected in the mountain faith and Seonghwang religion.
In the Joseon Dynasty, the mountain faith and Seonghwang religion became subject to regulation with the establishment of Confucian's system. It was often forbidden and oppressed because it was named as impious rites. However, there was a variation by region depending on whether there was a power struggle between yangban literati families and petty functionaries in country districts, or the descendants of a person who was respected as a mountain god or Seonghwang God thrived or not. Mostly, confucianized rituals and traditional rituals were combined or compromised.
As Joseon became confucianized, the status of mountain faith and Seonghwang religion fell and their position narrowed. In addition, it was a decisive blow that Japan rejected superstitions, and thus came to this day as the tradition was cut off along with other Korean folklore. In ancient societies, the gods of the mountain and Seonghwang God were used as the central goverment's local control and in the Goryeo period, they showed off the presence of the native force and they had been handed down as part of the public area with its own political and social significance. However, following the reorganization of Confucian system in the Joseon Dynasty, they fell into the object of impious rites and after going through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y fell into forgotten existence as if they were expelled from the Korean tradition.

KCI등재

5광주의 역사인물 기념 가로명 연구

저자 : 조상현 ( Cho Sang-hyun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9-185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광주읍성이 허물어지고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 길이 정비되고 다양한 도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제는 1930년 지방 제도를 개편하면서 광주의 중심 가로망에 일본식 명칭을 붙이는데, 本町과 明治町이 그것이다. 본정은 광주에서 가장 번화하고 높은 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었다. 조선이 본받아 달성해야 할 일본식 근대화의 상징이나 결과물 같은 존재였다. 명치정은 일본의 개화를 이끈 무쓰히토[睦仁]의 연호를 활용한 것이다. 일본이 새롭게 개설한 이 길의 시작점에는 총독의 전남지역 통치를 대행하는 전남도청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식민지 지배를 대행하는 국가기관이 즐비했다. 이 외에도 일제강점기 광주에는 텐노의 연호를 사용한 昭和町·大正町, 떠오르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같은 旭町과 大和町도 있었다.
광복 이후 한반도는 일본색을 지우기 바빴다. 1947년 광주에서도 본정과 명치정 이름을 없애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일본으로부터 당한 치욕을 통쾌하게 갚아준다는 의미로 김덕령 장군과 정충신 장군이 소환됐다. 충장로와 금남로는 그렇게 생겨났다. 그러나 인물과 장소의 직접적 연관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였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광주에 다시 가로명 명명 작업이 필요하게 된 것은 광주 시가지가 급속히 확장된 1960년대 이후였다. 1978년 금남로와 충장로를 포함한 총 24개의 가로명을 시작으로 1992년까지 총 53개의 가로명이 새로 생겼다. 이 가운데 역사인물의 이름을 활용하는 기념 공간으로서의 가로명은 총 13개이다. 70·80·90년대의 역사인물 기념 가로명의 추세를 보면 초반에는 광주의 주요 정체성이자 상징 이미지인 '節義'를 내세우는 武人 위주로 선정되다가, 90년대에 들어서는 文人으로 급격한 변화가 이뤄진다. 그리고 가로명을 둘러싼 정치도 처음에는 '국가 대 국가'의 단계에서 이제 '가문 간 정치'이 형태로 변하면서 가문선양의 목적에 의한 청원이 가로명 제정에 큰 힘을 발휘하였다.


As Gwangju Eupseong collapsed and the size of the city grew, existing roads began to be refurbished and various roads began to emerge. In 1930, the Japanese imperialism reorganized the local system and gave the Japanese name to the central road of Gwangju, they are Honmachi and Meijimachi. Honmachi was the way to confirm the busiest and highest development in Gwangju. It was a symbol of modernization that Joseon should imitate and a result. Meijimachi is based on the era name of Mutsuhito, which led to the enlightenment of Japan. The new road, which was not existed during the Joseon Dynasty, was opened at the starting point by the South Jeolla Provincial Government, which took over the governorgeneral's rule in South Jeolla Province, and was surrounded by various statecontrolled facilities. In addition, there were 'Showa' and 'Taisho' using Tenno's era in Gwangj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Asahi' and 'Yamato', which are symbols of rising Japanese imperialism.
Since liberation, Korea has been busy erasing the remnants of Japan. In 1947, Gwangju also removed the names of Honmachi and Meijimachi and gave them new names. General Kim Duk-ryong and General Chung Chung-shin were summoned to mean that they would repaid the disgrace suffered from Japan. That's how Chungjang-ro and Geumnam-ro came into being. However, it is regrettable that there was a lack of concern about the direct connection between the person and the place.
It was after the 1960s when the Gwangju city area expanded rapidly that the name of the street name was needed again in Gwangju. Starting with a total of 24 street names including Geumnam-ro and Chungjang-ro in 1978, a total of 53 new street names were created by 1992. Among them, there are 13 street names that utilize the names of historical figures. Looking at the trend of street naming in honor of historical figures, in the early days, the general was chosen to express Gwangju's main identity and symbolic image, “honor(jeolui)”. In the 90s, a rapid change is made to 'literate'. And gradually, the documents petitioned for the purpose of raising the family's ancestors exerted great power on the street name.

KCI등재

6근대기 광주 전통화단의 형성과 전개

저자 : 김소영 ( Kim So-young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7-224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근대기 광주는 1896년 도청소재지가 되면서 일제강점기 때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광주는 정치·경제·교육·문화의 중심적 입지를 확고히 다지며 호남권의 중심도시로 부상하였다. 1900년대 초 호남 각지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은 광주로 모이기 시작했고, 1930년대 후반에 화단이라 불릴만한 기틀이 마련되고 광주 전통화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호남화단'이라는 전남·전북·광주를 아우르는 일반적인 지역개념에서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근간으로 한 광주화단은 사생화와 채색화풍의 목포화단이나 사군자와 서예 위주의 전북화단과는 다르게 산수화에 있어서 사의적(寫意的)인 전통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주지하듯 광주 전통화단은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을 중심으로 1938년 창립한 연진회(鍊眞會)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연진회의 활동은 광주지역 서화교육의 중심역할을 하였으며, 1930년대와 1940년대를 거치면서 광주화단이 성장, 발전하는 계기를 맞게 하였다. 허백련과 연진회는 '전통적 남종화의 부흥'에 뜻을 두고 전통회화의 계승과 후진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이 때문에 광주화단은 전통회화가 강세를 보이며 다른 지역화단과는 구별되는 문화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허백련과 연진회를 통한 남종화의 부흥운동은 화단의 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지방화단으로서 문기와 사의성을 중시하는 광주화단의 특성이 확고하게 구축되었다. 연진회에서 활동한 화가들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허백련과 함께 그의 가르침에 부응하는 제자들이 조선미전에 입선하였다. 소산 정규원과 서운 임신, 백양 조정규 등이다. 이들은 허백련의 남종화에 부응하는 전통화풍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전통남종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개성을 표출했던 정운면, 허행면의 경우는 전통화풍에 신화풍을 가미하여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주었으며, 김정현, 조복순은 허백련에게서 배웠지만 주제와 소재의 선택과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연진회에는 기존 회원들과 그림을 배우고자 새로이 문하에 들어간 신진작가들에 의해 광주화단의 성격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광주 전통화단이 지방화단의 보수적인 집단화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전통회화의 맥을 이어오면서 다양한 조형세계를 펼쳐 보였던 몇몇 화가들의 활동은 광주 전통화단이 다른 지역미술계와 차별되며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During the modern era, Gwangju became an administrative hub at Japanese colonial era when it became the seat of 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in 1896. Since then, Gwangju has firmly established its central position in politics, economy, education and culture, emerging as a central city in the Honam region.
In the early 1900s, artists from all parts of the Jeolla provinces gathered in Gwangju, and in the late 1930s, a foundation to be called the tradition of Gwangju Artist Group began to form.
The traditional Gwangju Artist Group started from Yeonjinhoe, which was founded in 1938, with Uijae Heo Baek-ryeon (1891-1977) at the center. The association's activities served as the center of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Education in Gwangju, and through the 1930s and 1940s, the Gwangju Artists Group Foundation was given an opportunity to grow and develop. Heo Baek-ryeon and Yeonjinhoe aimed at inheriting traditional paintings and fostering backwardness, with the aim of "the revival of traditional Chinese painting of the Southern School." For this reason, Gwangju Artists Group has a cultural characteristic that distinguishes it from other local paintings.
Artists who worked at the Yeonjinhoe also stood out at the Joseon Art Exhibition. The disciples, who were taught by Heo Baek-ryeon, entered the Joseon Art Exhibition. They include Sosan Jung Kyu-won, Sewoon Im Shin and Baek Yang Cho Jung-kyu. They produced their works in traditional style.
In the case of Jeongun-myeon and Heo Haeng-myeon, which adopted a new style of painting based on traditional Chinese painting of the Southern School(南宗 畵) paintings and expressed their own individuality, the traditional style of painting was added with a new style. Kim Jeong-hyeon and Cho Bok-soon learned from Heo Baek-ryeon, but they showed a completely new aspect in their choice of subjects and materials and how to express them. After liberation, the association further cemented the character of the Gwangju Painting Company by newly entering the literary world to learn painting from existing members. For this reason, the Gwangju Traditional Painting Group is considered to be a conservative group of local painters, but the activities of several artists who have continued to develop various forms of painting are thought to have been the basis for Gwangju's traditional painting to be differentiated from other local art circles.

KCI등재

7일신재 정의림의 역할과 위상 - 한말 기호학파의 논쟁을 중심으로 -

저자 : 조우진 ( Cho Woo-jin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5-252 (2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한말 기호학파 내부 논쟁에서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의 역할과 위상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정의림은 기정진을 만나기 전에 김정묵(金正默) → 송치규(宋穉圭) → 박영주(朴永柱)로 이어지는 사승관계 속에서 이이·김장생·송시열의 성리학 이론을 접했다. 특히 그의 학문과 사상적 기반은 기호학파의 종주인 이이의 이론체계에 있다. 정의림은 20세기 초 논쟁의 발단과 전개 과정에서 중추적인 가교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호남이 성리학 논쟁의 중심지가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위상은 새로운 학문이론을 구성하기보다는 이이와 기정진을 융합하는 리(理) 중심의 성리학 체계를 확립하여 현실 세계에 대응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role and status of Il-Shin-Jae(日新齋) Jung Eui-rim(鄭義林) in the internal debate of Kiho School(畿湖學派) at the late Joseon Korea. Jeong Eui-rim encountered the Neo-Confucianism of Lee Yi, Kim Jang-saeng, and Song Si-yeol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eacher and student from Kim Jeong-muk to Song Chi-gyu, from Song Chi-gyu to Park Yeong-ju before meeting Ki Jung-jin. In particular His academic and ideological base lies in the theoretical system of Lee Yi, the master of the Kiho School. Jung Eui-rim plays a role as a pivotal bridge in the beginning and development of the controversy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sets the stage for Honam to become the center of the Neo-Confucian debate. His status is that he established a Li(理) centered system of neo-confucianism blending Lee Yi and Ki Jung-Jin rather than constructing a new academic theory and regards the system as a rationale for the real world.

1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전남대학교 제주대학교 조선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동국대학교
 43
 21
 19
 17
 15
  • 1 전남대학교 (43건)
  • 2 제주대학교 (21건)
  • 3 조선대학교 (19건)
  • 4 성균관대학교 (17건)
  • 5 동국대학교 (15건)
  • 6 고려대학교 (15건)
  • 7 경북대학교 (12건)
  • 8 중앙대학교(서울) (11건)
  • 9 서울대학교 (8건)
  • 10 한양대학교 (7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