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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and Visual Culture

  •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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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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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9-7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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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2)~22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194
미술사와 시각문화
22권0호(2018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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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불교경전의 시각적 구현: 고려 원각경변상도(圓覺經變相圖)의 도상과 연원

저자 : 김자현 ( Ja Hyun Kim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6-37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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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 필자는 현존하는 고려시대 원각경변상도의 도상과 연원, 그리고 본존(本尊)과 중앙에 자리한 청문자의 문제를 경전의 내용과 불교미술사의 흐름에 근거하여 살펴보았다.
『원각경』은 경의 설주(說主)를 특정한 여래로 지칭하지 않고 '바가바'라고 한 것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그 결과 중국의 『원각경』변상에서는 본존이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화엄과 관련된 보관형(寶冠形)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이 주존으로 등장하는 사례가 가장 많았다. 이는 모든 부처를 포섭하는 가장 광범위한 개념인 '법신(法身) 비로자나'의 형상이 『원각경』에서 의미하는 바가바의 성격과 가장 부합된다고 이해되었던 것에 기인한 결과로 여겨지며, 현존하는 고려의 『원각경』변상 두 작품 또한 이에 해당한다.
현전하는 고려의 원각경변상도는 『원각경』이 설해지는 정경을 묘사한 것으로, 세존과 12보살과의 문답 장면과 문답 이후 경전의 수호를 다짐하며 세존을 찬탄하는 성중(聖衆)들이 함께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화면이 세로로 긴회화와 가로로 긴 사경변상도라는 차이에 의해 성중의 배치가 달라졌을 뿐, 각 존상(尊像)들의 형상과 구성이 대부분 일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려의 원각경변상도는 안악석굴(安岳石窟) 화엄동(華嚴洞)과 대족석굴(大足石窟) 원각동(圓覺洞)과 같이 중국 사천(四川)지역에서 송대(宋代)부터 형성된 원각경변상에 그 연원을 두고 있었다. 또한 이 석굴들과 함께 중국의 관련도상, 그리고 고려의 원각경변상도를 함께 비교, 분석한 결과, 고려의 원각경변상도는 앞서 언급한 석굴들의 원각경변상이 남송(南宋) 이래로 화면에 옮겨진 형태, 즉 경전변상도나 불화의 형식으로 제작된 남송(南宋)∼원대(元代)의 중국본을 모본(模本)으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원각경변상 중앙에 뒷모습으로 표현된 인물에 대해서는 『원각경』의 12보살과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구법장면, 그리고 이 조상을 예배자와 감상자의 관계를 중재하는 경계적인 조상으로 인식하는 세 가지 의견이 공존한다. 전자의 두 견해는 이 인물을 결국 부처에게 法을 구하는 청문자로 인식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다만 이 도상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대족석굴 원각동에서부터 머리에 화려한 영락장식을 하고 있는 보살형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 도상을 측벽에 어린동자의 모습으로 표현된 선재동자와 동일한 인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측벽에 선재동자의 구법도상이 있는 2개의 석굴, 즉 안악석굴의 화엄동과 대족석굴의 원각동 중 안악석굴에는 이 청문자가 표현되지 않았고, 이후 선재동자구법도상이 사라진 고려의 원각경변상에서도 청문자도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 인물이 감상자와 예배자의 관계를 중재하는 경계적인 조상으로서 제작되었다는 의견은 원각경변상이 처음 조성되었던 중국석굴의 구조나 당시 불교미술의 경향에서는 납득할 수 있지만, 고려의 불교미술에는 이와 같은 인물들이 화면 내에 묘사된 사례가 거의 알려진 바 없으므로 재고의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원각경변상의 청문자는 『원각경』의 12보살이 부처의 앞에 나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장면을 시각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This paper examines paintings illustrating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from the Goryeo dynasty, with a focus on the origin and details of its iconography as well as the identity of the main Buddha at the center and the listener before him, based on the content of the scripture and the historical context of Buddhist art.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is noteworthy that the text refers to the preacher as Bhagavat, rather than a specific Buddha. Consequently, the main Buddha of China appears in diverse forms. Above all, most representations of this sutra feature Vairocana with a crown as the principal object of worship. The “Dharma-body Vairocana Buddha” covered the most extensive images of Buddha at that time. Therefore, it conforms with the notion of Bhagavat in the scripture. And this is the case with the two surviving Goryeo examples.
The two Goryeo paintings of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portraying the main Buddha teaching and discussing with the Twelve Eminent Bodhisattvas. The painting also features the devotees vowing to preserve the scripture and praising the main Buddha after the discussion. And these paintings present the figures in almost the same manner and include identical numbers of figures. The only difference is how the attendants are arranged, which results from the difference in the painting format.
The Goryeo tradition of visually describing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has its origin in the Song dynasty (960-1279) representations of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at the Huayan Cave of the Anyue Grottoes and those at the Yuanjue Cave of the Dazu Grottoes from the Sichuan region. And the results of a comparative study between the Chinese iconography of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found in these Caves and the Goryeo paintings of the same sutra are as follows: the latter is modeled after the painting of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made between the Song and Yuan dynasty (1279-1368) which had been visualized from the images of Sichuan Caves since the period of the Southern Song dynasty.
In addition, three different interpretations exist regarding the figure who is sitting at the center with his back to the viewer in visual representations of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The first point of view is that the figure represents one of the Twelve Eminent Bodhisattvas from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The second point of view is that the figure refers to Sudhana. Two different opinions exist regarding the identity of the listener but both see the figure as a person who listens to the Buddha's preaching and asks questions. However, the figure that first appeared in the Yuanjue Cave of the Dazu Grottoes seemed to be a bodhisattva with highly decorative pendants on his head. Interestingly, this figure did not appear in the Anyue Grottos. However, this figure is shown in Goryeo paintings illustrating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The last point of view is that this figure acts as an intermediary between the viewer and the worshipper's relationship. This opinion can be understood in the structure of the Chinese caves with representations of the Perfect Enlightenment Sutra which was first and within the context of Buddhist art at that time in China. However, this opinion should be reexamined given that there are few cases in Goryeo Buddhist paintings where the worshippers are directly drawn in the composition. Therefore, of the three interpretations, the first point of view seems more persuas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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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조대 후반 책가도(冊架圖) 수용의 세 가지 풍경

저자 : 강관식 ( Kang Kwanshi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8-91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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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도(冊架圖)는 조선 후기의 북학(北學)과 서학(西學) 취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시각문화의 하나이다. 이는 18세기 중반경 북경에 갔던 사신 일행이 서책과 문방청완(文房淸玩) 기물이 놓인 다보격(多寶格)을 서양화법으로 그린청나라의 그림을 구입해 오며 조선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종현(趙宗鉉, 1731-1800)은 1750-60년경 서책과 문방청완 기물이 놓인 다보격을 배경으로 문사가차를 마시는 장면을 서양화법으로 그린 서재행락도 계열의 채색 그림을 북경의 시장에서 구입해 자신의 서재에 놓고 감상하며 이를 '서가도'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중국에서 책가도가 전래되던 초기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강완(姜俒,1739-1775)은 1769년에 이러한 중국의 서가도에 보이는 다보격을 직접 제작해 자신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서책과 문방청완 기물을 넣어놓고 사용했는데 이는 책가도가 더욱 확산되고 조선적으로 변용되며 수용되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김사주(金師柱, 1734-1798)는 1775년에 고객들을 찾아 다니며 책가도를 그려주던 시정의 화가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책가도는 속되기 때문에 거부하고 대신 보다 문인화풍이 감도는 서재행락도와 정원도(庭園圖)를 그려 받았다. 이는 영조대 말년에 책가도가 매우 성행하며 세속화되고 있었음은 물론, 이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취향도 함께 나타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Chaekgado (Korean still-life screen painting of shelves with books and objects) is a classic example that symbolizes the visual culture of the late Joseon dynasty derived from the Bukhak (Northern Learning, a reformative intellectual movement to learn Qing culture) and Seohak (Western technology and philosophy). Chaekgado was introduced to Joseon Korea through the envoys to Beijing during the mid-eighteenth century when they imported some Chinese paintings in the Western pictorial manner. These pictures depicted doubaoge (Chinese treasure cabinets) with books and scholars' accouterments.
Jo Jonghyeon (1731-1800) left a record that shows in detail how chaekgado paintings imported from Qing China were appreciated by Korean literati. Sometime between the 1750s and the 1760s, he bought a colored picture similar to xingle tu (painting of leisure activities), portraying a gentleman having a cup of tea in front of doubaoge cabinets with scholar's books and utensils for the gentry. It is noteworthy that Jo named this picture as chaekgado and installed it in his library for appreciation.
In 1769, Gang Wan (1739-1775) built a doubaoge cabinet by himself in order to display his beloved books and items. The manufacturing of a Chinese-style cabinet by a Joseon scholar shows that the genre of chaekgado was proliferating in Korea. The case of Gang Wan highlights how Chinese pictures of books and utensils were adapted and transformed into Korean chaekgado.
On the other hand, Kim Saju (1734-1798) rejected an offer from an itinerant painter in 1769 to draw a chaekgado. Disparaging this type of painting to be 'vulgar,' Kim asked for two pieces of haengnak do (Ch. xingle tu) that featured a scholar's leisure activities in a studio and a landscape painting of a garden instead. This episode reveals that chaekgado gained wide popularity and came to be secularized. At the same time, the story also shows literati's reaction against and negative attitudes towards the popularity of chaekgado during the late Yeongjo (r. 1724-1776) period. As the case of Kim Saju demonstrates, cultural discourse on the elegant vs. the vulgar already took sh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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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성과 경성의 불안한 공존: 식민지시대 서울의 도시 이미지 형성에 대한 연구

저자 : 성효진 ( Sung Hyo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92-127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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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식민지시대 서울의 도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한성(漢城)과 경성(京城)을 상징하는 장소들이 공존한 양상을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이는 한성에서 경성으로의 변화와 그 이미지의 형성을 이분법적인 분리보다는 복잡하게 얽힌 중첩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주목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한성과 단절된 듯한 도시로 여겨진 경성의 도시 이미지에서 한성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경성의 도시 이미지는 당대인들의 인식 및 반응과 시각문화를 활용한 일본의 정책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본고는 1897년에서 1939년까지의 시기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경성의 도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한성과 경성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당대인들이 한성에서 경성으로의 전환을 인식할 만한 시각적인 변화들이 나타나 도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1897년에서 1910년까지의 시기에 한성의 도시 공간에서 나타난 변화들은 한성의 저항과 경성의 태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성의 도시 공간에서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경운궁(慶運宮)을 중심으로 근대화사업이 시행되었으며 아울러 서양 공사관 영역과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이들 사이의 균형은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무너졌다. 한성은 경성으로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남촌 전반으로 확장된 일본인 거류지 인근에서는 경성박람회(京城博覽會)가 열렸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성을 상징하는 장소인 남대문(南大門) 일대의 성벽은 해체되었으며 창경원(昌慶苑)은 동물원으로 격하되었다. 덕수궁(德壽宮)으로 불리게 된 경운궁에는 1910년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경성의 태동과 한성의 쇠락은 도시 공간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났다.
1910년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경성의 도시 이미지가 형성되어가던 과정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인 경성의 건설과 조선왕조의 왕도(王都)였던 한성에 대한 기억의 공존으로 논의될 수 있다. 경성으로 바뀐 도시 공간에서 한성을 상징하는 장소들은 점차 사라졌다. 이 공간은 식민 지배를 상징하는 건물들인 조선총독부 청사(朝鮮總督府廳舍), 조선신궁(朝鮮神宮) 등으로 채워졌다. 경성의 건설은 다양한 행사와 매체를 통해 기념되었다. 당대의 조선인들은 새로운 시각 경험을 즐겼으나 동시에 조선인 지역인 북촌과 일본인 지역인 남촌을 구분 지으며 일본인들의 북부 진출을 우려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한성을 상징하는 장소들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이 장소들을 기억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경성의 도시 이미지에는 한성을 상징하는 장소들이 지속적으로 남아있었다.
경성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경성(大京城)'으로 불렸다. 1926년에서 1939년에 이르기까지 대경성과 그 이미지는 소비문화의 정점에 있었으나 이는 허상에 가까웠다. 남촌의 중심인 조선은행 일대는 백화점과 함께 근대 도시 대경성의 핵심적인 이미지로 굳어졌다. 한성을 상징하는 장소들은 여가의 중심지인 공원으로 변용되었다. 그러나 대경성은 남촌과 북촌이라는 각각의 도시로 여겨질 정도로 격차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대인들은 대경성의 도시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를 파편으로 보았다. 산책자(flaneur)도 그들 중 하나였다. 대경성의 거리를 부유하며 남촌과 북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들은 조각난 대경성이미지 그 자체였다. 이는 경성의 도시 이미지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닌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종합으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경성의 도시 이미지 안에서 이렇게 한성과 경성은 불안하게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attempt to explore the coexistence of Hanseong and Gyeongseong in the urban image of Seoul during the colonial period. It examines the transition from the capital city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anseong to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and the formation of the image of the city. There are two main focuses in this study. Firstly, it is the fact that elements representing Hanseong are found in the image of Gyeongseong, which seems to be disconnected from Hanseong. Secondly, the image of Gyeongseong is located at the intersection of Japanese politics. The period from the founding of the Great Korean Empire (Great Han Empire) to the 1910 Korea-Japan annexation treaty witnessed the birth of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Modernization projects on the Gyeong'un Palace (Gyeong'ungung) were carried out. At that time, there were a Legation Quarter around the Gyeong'un Palace and a Japanese town near the Catholic Cathedral. The political balance among the Korean Empire, the Western superpowers, and Japan collapsed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After this event, Hanseong began to be called Gyeongseong. The Gyeongseong Fair was held near the Japanese settlement that extended to the whole of Namchon (South Village). In contrast, the walls near Namdaemun (the Great Southern Gate), a place symbolizing Hanseong, were demolished. In the Gyeong'un Palace, which was called Deoksu Palace (Deoksugung), the construction of Seokjojeon (Stone Hall), a Western-style building, was completed. The emergence of Gyeongseong and the decline of Hanseong appeared together simultaneously in the formation of the modern city of Seoul.
During the period from 1910 to the mid-1920s, when Hanseong was replaced by Gyeongseong, the image of Seoul based on the construction of the colonial capital was created. During the time, Korean people attempted to remember the lost Hanseong. Their strong feelings of nostalgia for the lost capital city of the Joseon dynasty were found in numerous textual records. The places symbolizing Hanseong were gradually dismantled. This space was filled with buildings that symbolized colonial rule. The construction of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was commemorated by various events and popular media. While Koreans enjoyed a new visual experience of witnessing the birth of a modern city, they worried that the Japanese would occupy Bukchon (North Village), the Korean territory in the city. In this process, they recognized and remembered the places symbolizing the old capital city of Hanseong that was disappearing and fading into oblivion. As a result, the urban image of the new capital city of Gyeongseong was filled with Korean people's sorrowful memories of Hanseong.
After the mid-1920s, Gyeongseong came to be called Dae-Gyeongseong (Great Gyeongseong). The image of Dae-Gyeongseong was created and constantly reproduced in popular media. The rise of modern consumer culture played a key role in the proliferation of the urban image of Dae- Gyeongseong. However, the image of Dae-Gyeongseong was nothing but an illusion. In the urban space of Dae-Gyeongseong, the difference between Namchon and Bukchon was extremely huge to the extent that they appeared to be two separate cities. In this situation, the city-dwellers of the time saw themselves as fragments in the city. The flaneur was one of them. The flaneur who did not belong to either Namchon or Bukchon strolled the streets of Daegyeongseong. The sense of alienation and uncanniness that the flaneur felt was inseparable from the fragmented urban landscape of Dae-Gyeongseong. The urban image of Dae-Gyeongseong can only be achieved by a synthesis of fragmented images rather than a singl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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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근대기 대구화단의 서화론 연구

저자 : 김취정 ( Kim Chwi-jeo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28-153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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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서화론(書畵論)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서화 이해에 기반을 둔 것으로서 19세기 전반까지 서울화단에서 주도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울화단의 전통서화론은 점차 쇠퇴하며 자취를 감추고 지방화단으로 계승되어 발전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화단이 바로 대구화단이다.
근대기 대구화단 형성의 연원은 1922년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 개설 시점으로 올라간다.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1862-1935)가 설립하여 주도해 오던 교남시서화연구회는 1934년 이후 그의 제자 죽농 서동균(竹儂 徐東均, 1903-1978)이 이어받아 운영하게 된다. 현재에도 '교남시서화연구회'의 후신인 '죽농서단'이 대구 서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근대기 대구화단은 조선 말기 맥이 끊겨 가던 문인화풍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대구화단에서 새로운 문인화의 경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서화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가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기 대구화단의 서화론 중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사의(寫意)', '서화일치(書畵一致)', '신운(神韻)', '천작(天作)'등이다. 특히 '사의'와 '천작'이 강조되어 왔는데 이는 '창의(創意)'와 그 궤를 함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기 대구화단이 개성적인 문인화풍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창작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가로서의 정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근대기 대구화단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조명하는 한편 대구화단의 서화론이 어떻게 계승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또한 이 연구는 근대기 지방화단의 일면은 물론 조선 말기의 서화가 어떻게 근대기 서화로 이어졌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Up until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 art world in Seoul played a central role in formulating the traditional discourses on painting and calligraphy based on East Asia's universal understanding of the two highest forms of art. As the traditional discourses on painting and calligraphy, led by the Seoul art world, declined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he provincial art communities succeeded the tradition and managed to develop them further. The Daegu art world is one good example of this development. The Daegu art world dates back to 1922 when the Gyonam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Poetry, Painting, and Calligraphy was established. The association, established by Seo Byeong'o (1862-1935), was taken over by his student Seo Donggyun (1902- 1978) in 1934. Even today, the Juknong Calligraphic Association established in honor of Seo Donggyun, the successor of the Gyonam Association, is active in Daegu. The Daegu art world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the style of literati painting that went out of fashion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The reason why the Daegu art world came to revive the style of literati painting is that it possessed a profound understanding of the theory of painting and calligraphy. Among the main components of the theory are saui (writing ideas), sin'un (divine resonance),' and cheonjak (heavenly creation or heavenly masterpiece).' In particular, saui and cheonjak have been greatly emphasized, as they were closely related to artistic creativity. The Daegu art world achieved one of the most original styles of literati painting because it kept alive the artistic spirit for creativity. This essay sheds light on the formation and evolution of the Daegu art world in the modern period. It also explores how the Daegu art world's theory of painting and calligraphy has developed. This research not only examines how regional art communities were formulated in modern Korea, but also highlights the evolution of painting and calligraphy from the late Joseon period to the modern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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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행락(行樂)과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초상: 증경이 그린 오몽양, 왕시민, 옹덕홍

저자 : 최석원 ( Seokwon Choi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54-181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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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경(曾鯨, 1564-1647)이 그린 초상화는 명말(明末) 강남(江南) 지식층을 일관되게 은자(隱者)로 형상화하고 있다. 명청(明淸)대의 비평가들은 안면 묘사의 사실성에 집중하여 증경의 초상화를 비평했지만, 정작 증경이 초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강남 지식층의 은일은 얼굴이 아닌 배경, 복식, 자세 등을 통해 파악된다. 요컨대 증경의 초상화는 강남 지식층의 은일을 자연 속에서의 '행락(行樂)'으로 표상하고 있으며, 강남의 은자들이 내면화했던 '삼교합일(三敎合一)'적 성향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산수 배경을 포함하고 있는 〈오몽양(吳夢暘)초상〉과 〈옹덕홍(翁德洪)초상〉은 증경이 표현해 낸 강남 지식층의 은일이 자연 속에서의 '행락'에 다름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증경이 금릉(金陵)에서 그렸던 〈오몽양초상〉은 당시에 '행락도'로 인식되기도 했다. 금릉 현지의 산수화가인 호종신(胡宗信)이 그린 〈오몽양초상〉의 산수 배경은 이 작품의 제작지로 명기된 청계수각(靑溪水閣)의 풍광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계수각은 오몽양이 금릉시사(金陵詩社)의 구성원들과 함께 시회(詩會)를 열고 행락했던 장소로서 오몽양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한편 〈왕시민(王時敏)초상〉과 〈옹덕홍초상〉에서 증경은 은일 지향의 강남문인이 체화(體化)하고 있던 유불도(儒佛道)의 융합, 즉 '삼교합일'을 인물의 복식과 자세를 통해 표현했다. 증경은 왕시민을 포단(蒲團) 위에 앉아 불자(拂子)를 들고 좌선(坐禪)하는 재가 불교 신자로 그렸다. 이는 왕시민 개인의 신앙을 반영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사(道士) 담양자(曇陽子)를 배출했던 태창(太倉) 왕씨 집안의 내력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성향이 표현된 가전(家傳) 초상화의 전통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증경의 초상 속에서 평적각(平閣) 주변의 산수를 배경으로 치의(緇衣) 차림으로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 옹덕홍의 모습은 유불도에 통달한 군자가 '행락'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This essay proposes that portraits by Zeng Jing (1564-1647) embody Jiangnan (south of the Yangtze River) literati's eremitic aspirations, illuminating the ways in which the literati visually constructed their reclusive personae. The sitters' clothing, props, postures, and landscape settings in Zeng's portraits functioned as visual signifiers of the political disengagement and reclusive lifestyle that his sitters pursued.
Zeng's portraits of Wu Mengyang (1545-ca. 1615) and Weng Dehong (?-1646) exemplify these ideals shared by the artist and his sitters. Zeng employs the conventional scholar-in-landscape composition, with the help of local specialists in landscape painting, in order to emphasize the sitter's leisure activity (xingle). Thus, contemporary Ming viewers regarded Zeng's portrayal of reclusive figures in nature as inheriting the tradition of xingle tu (painting of leisure activity).
Zeng's subtle use of Buddhist and Daoist iconography shows how archaism and syncretism permeated the literati's ethos of reclusion. For instance, Wang Shimin's (1592-1680) flywhisk and rush mat as well as Weng Dehong's ruyi scepter and black robes point to the Buddhist and Daoist inclination of these two Confucian scholars. These visual motifs in Zeng's portraits testify to the fact that late Ming syncretism deeply affected the literati's practice of recl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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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에도시대 산파 이미지: '토리아게바바(取り上げ婆)'에서 근대의 조산부(助産婦)로

저자 : 김정희 ( Jung Hui Kim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82-223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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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에도시대에 유통되었던 인쇄물, 즉 여성 교육을 목표로 출판되었던 죠쿤쇼(女訓書)와 삽화를 포함한 짧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에혼(繪本), 그리고 산과(産科) 지식을 담은 산과서 속에 묘사된 산파의 이미지를 다룬 글이다. 특히 본 논문은 출산 장면 속에서 조력자로서 등장하는 산파와 아버지의 비중, 그리고 두 사람의 시각적 재현 방법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하였다.
에도시대의 출산 장면은 주로 성공적인 출산 이후 산실(産室)의 모습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에도 초기와 중기에 그려진 출산 장면의 경우, 산고 후 휴식을 취하는 산모의 모습, 신생아를 위한 핵심적인 산후 의례인 우부유(産湯), 그리고 우부유의 집행자였던 산파의 존재 이외에는 아버지, 혹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어떠한 남성의 모습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 논문은 그 원인을 고대일본에서 유래한 '케가레(穢れ)' 관념에서 찾았다. '케가레'란 죽음이나 출산과 같은 생사 의례를 통해 생기는 오염이나 그 상태를 의미한다. 임부의 출혈로 발생한 출산의 케가레는 임부와의 접촉, 혹은 물이나 불의 공유를 통해 공동체 내로 확산되어 신도(神道)의 '카미(神)'를 분노하게 만든다고 여겨졌으며 따라서 케가레에 대한 두려움과 기피는 에도시대의 출산을 최소한의 인원만 참여하는 폐쇄적인 경험으로 만들었다. 아버지가 부재한 출산 장면에서 화면은 우부유를 실행중인 산파와 그 장면을 감독하듯 주시하는 산모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데, 산파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신생아를 목욕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에도시대의 생사관(生死觀)에서 우부유는 갓 태어난 아이가 이계(異界)에서 현세로 넘어오는 마지막 관문이자 생과 사의 공간이 연결되는 위험한 순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때 아이를 안전하게 이 세상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주술적 힘을 가진 존재가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산파였다. 우부유의 담당자로서 산파의 이미지가 부각되었던 것은 출산 현장에서 중세의 미코(巫女), 즉 영매의 후예로서 케가레로 인한 신의 분노를 완화하고 신과 인간을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그 위상을 인정받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출산 의례에서 산파의 지위와 산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 산과학(産科學)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카가와 겐에츠(賀川玄悅, 1700-1777)를 비롯한 산과의들은 '회생술(回生術)'과 같은 산과 지식과 기술을 설파하며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서 산파들에 의해 오랫동안 고수되어 왔던 '오비이와이', '산후(産後) 의자'와 같은 풍속들을 사라져야 할 인습이라고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비전문성을 강조하기 위해 '노파', '무학', '무지'와 같은 단어들을 써가며 산파의 존재를 폄하했다. 산과의들이 저술한 산과서들은 산파의 역할을 출산 후 아이의 배꼽을 소독하는 것과 같은 주변적인 일로 한정했으며 출산을 '주도하는 산과의를 보조하는 산파'라는 관점을 유지했다. 산파와 산파술에 대한 산과 전문인들의 이러한 비판적인 평가는 결국 산파에 대한 에도 사회의 전반적 견해뿐만 아니라 죠쿤쇼와 에혼의 출산 장면에서 산파를 재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죠쿤쇼의 경우, 18세기 말 이전의 출산 장면은 각기 다른 연령대의 산파, 즉 젊은 여인이나 중년의 여인, 혹은 노파의 모습이 혼재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18세기 말을 기점으로 거의 대부분의 출산 장면에서 산파는 산과의들이 줄곧 사용했던 비판적인 언설에서처럼 노쇠한 '노파'로 묘사되었다. 18세기 말 에 혼에서는 흥미롭게도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화면 속에서 우부유를 감독하듯 지켜보거나 산모에게 무언가 지시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히라노쥬세이(平野重誠, ?-1867)와 같은 산과의들은 자신의 산과서에서 산파의 출산전문가로서 산파의 부족함에 대해 피력하며 출산 시 아버지 혹은 남성의 조력을 얻을 것을 강하게 권유하였다. 또한 그는 출산에 참여한 남성이 어떤 식으로 산파를 도울 수 있는지 그 구체적 방법을 삽화를 동원해 설명하였다. 즉, 조력자 혹은 감시자로서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출산에서 산파의 주도권과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산과의들의 강력한 의지와 출산 과정에서 주술적 존재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산파의 사회적 위상 저하를 보여주고 있다.


This study explores images of midwives found in Edo-period printed materials such as educational books (jokunsho), picture books (ehon), and obstetric manuals, with a focus on the correlation between the midwife and the father figure, both of whom play an essential role as helpers in childbirth.
Edo childbirth scenes typically depict post-natal care. They show a mother recuperating from delivery, an infant receiving ubuyu (first bath), and a midwife bathing the baby. Interestingly, early and mid Edo childbirth imagery does not include male figures. This paper proposes that the omission of the father originated from the concept of kegare which regards parturient women as the source of defilement. Kegare is a polluted condition caused by bleeding, inevitable during the process of parturition. Contact with a birthing mother meant transmission of kegare. The fear of kegare made childbirth an isolated experience in which only a few attendants participated. The main component of childbirth imagery is the midwife performing ubuyu. Ubuyu marks the moment when the passageway between the other world and this world is open. This study argues that the emphasis on the image of the midwife can be explained by her ability to alleviate the anger of kami (Shinto gods) and pull the baby out of the other world, as the descendant of medieval miko (female shaman or shrine maiden).
In the late eighteenth century, however, the negative social perception of midwives came to prevail. Edo obstetricians criticized midwives, describing them as 'ignorant, uneducated old hags' and devalued old practices, such as 'obiiwai (wearing a pregnancy wrap)' and the use of birthing chairs, usually performed by midwives. Obstetric manuals written by male physicians relegated midwives to minor roles in the process of parturition. Obstetricians even suggested that midwives should seek help from the father or a male neighbor because their capabilities were insufficient for the task. Late Edo childbirth scenes in jokunsho feature the midwife exclusively as an elderly woman. This shows a transition from the earlier tradition of visualizing the figure as a youthful or middle-aged woman. In addition, fathers begin to appear in childbirth scenes in late eighteenth-century ehon. This paper maintains that these changes reflect the conflict between obstetrics and midwifery, marking a critical phase in the modernization of medicine in the Edo period.

KCI등재

7르네상스 시기 채색필사본에 나타난 추기경의 초상표현연구

저자 : 변경희 ( Kyunghee Pyu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24-253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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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유럽에서 추기경들의 초상화 및 가문의 문장은 채색필사본에 자주 포함되었다. 추기경들은 임명된 당시 새로운 역할에 따라 전례서를 새로 주문하기도 했고 이전의 필사본을 구매하여 본인의 초상 혹은 문장 등을 넣어 수정본을 만들기도 했다. 몇몇 추기경은 당대 미술품 수집가 및 후원가로 이름을 떨치는데, 채색필사본뿐만 아니라 제단화, 장식 미술품, 패널화 등을 당대 최고의 미술작가들에게 주문하였다. 14세기 후반부터 채색필사본에는 개인의 소유권을 보여주는 모티프나 그림 등이 점점 강조되었다. 15세기부터는 교회나 채플 소속으로 남아있던 미사전례서에도 개인용으로 만들어진 기도서나 시편 못지 않게 책 소유주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초상화나 문장, 또는 이 둘을 함께 넣은 삽화의 가장자리 장식 등이 빈번히 나타났다.
이 논문에서는 추기경이 소유했거나 사용한 미사전례서에 등장하는 초상화 및 문장을 분석함으로써, 교황청에서 추기경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고 교황을 배출하는 몇몇 가문에 권력이 집중될수록 기관이나 직책보다는 개인 또는 가문을 강조하는 시각적 상징물이 대두되었음을 살펴보았다.


Portraits and coats of arms of cardinals are often included in illuminated manuscripts created in Renaissance Europe. Cardinals commissioned new liturgical books and acquired older books to be altered for their needs. Some of them commissioned illuminated books, panel paintings, altarpieces, and other types of decorative arts from leading artists of their own time. After the late fourteenth century, the emphasis on individual ownership resulted in the increased appearance of portraits in service books. In the late fourteenth and the fifteenth centuries, individual ownership of a missal was as prevalent as the ownership of books of hours and psalters.
Cardinals crossed the ambiguous boundaries between religious and secular powers. Granted unparalleled access to Church and private property, they spent considerable time, money, and effort on forming some of the best collections of art and antiquities. Some commissioned artworks in churches that advertised their monastic or national connections, while others took Rome and the papacy abroad to enrich their own cities and countries. But theirs was a precarious dignity: while cardinals could thrive during one papacy, they could suddenly fall from power during the next. New research represented by the sixteen case studies in The Possessions of a Cardinal reveals how cardinals used their vulnerable position and spent their substantial wealth on personal and religious interests. These studies underscore the tensions inherent in their position between the spiritual and the worldly.
With this context in mind, I analyze portraits of cardinals and compare them with group representation in monastic missals and choir books and with individual portraits of prominent historical figures. Treated here are French, Burgundian, and Italian manuscripts with case studies on Cardinal Bertrand de Deux (unknown-1355), Cardinal Giacomo Gaetani Stefaneschi (ca. 1270- 1343), Cardinal Ferry de Cluny (ca. 1430-1483), and Giulio di Giuliano de' Medici (Pope Clement VII 1478-1534).
Based on previous research by others and on my studies of monastic groups represented in illuminated manuscripts, I argue that increasing emphasis was placed on individual ownership in illuminated manuscripts for cardinals. I have argued elsewhere that portraits of monastic members in illuminated liturgical manuscripts strengthened their group identity rather than individuality based on family lineage. In illuminated books acquired by cardinals or created for them, however, much emphasis was given to the dynastic succession of the family as manifest in their prominent family coats of arms or portraits found throughout the manuscripts.

KCI등재

8미국형 기사의 탄생: 에드윈 어스틴 애비의 벽화에 등장하는 중세 기사의 기원과 사회적 기능 연구

저자 : 이미경 ( Rhi Mikyu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54-279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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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에드윈 어스틴 애비의 벽화 《성배의 탐색》에 등장하는 중세 기사의 기원과 사회적 기능에 관한 연구이다. 미국 문화에서 중세 기사 유형은 1850년대 말 문학에서 먼저 등장했으며, 1870년대에는 정치 카툰에서도 다루어졌다. 아메리칸 르네상스 벽화 중에서는 1895년 애비의 벽화에서 처음 나타났다.
중세 기사는 영국에서 라파엘전파 화가들이 즐겨 그린 주제였다. 영국에서 활동한 애비는 라파엘전파 회화와 로열 아카데미의 회화 전통을 종합하여 중세기사를 형상화했다. 그러나 신체적 활동에 기반한 모험담을 강조한 라파엘전파화가들과 달리, 애비는 기사의 도덕성을 강조했다. 이는 애비가 1890년대 미국도금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고려한 결과로 풀이된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나 화려한 경제 성장 이면에는 사회의 안정과 결속을 해치는 부정부패, 빈부격차, 그로 인한 계급사회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다. 극심한 빈부 격차는 사회적 위기로 이어졌다. 문학과 미술에서는 이에 대한 자각과 자성을 촉구했다. 애비는 도금시대 자본가의 만행을 고발하고 개혁의 희망을 담은 벽화 《성배의 탐색》을 제작했으며, 개혁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지도자의 상징으로 갤러해드를 선택했다.
애비의 벽화는 보스턴 공공 도서관에 설치되어 정부의 부패와 그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혼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치 단체의 도덕성 쇄신을 촉구하는 공적 기능을 수행했다. 도덕적 책임감을 강조한 애비의 미국형 기사는 또한 애국심을 고취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 작품에서 중세 유럽 기사는 미국 시민으로 탄생했으며, 시민적 덕목을 지닌 지도자의 표상으로 변화했다.


This essay traces the origin and the social function of medieval knights in Edwin Austin Abbey's murals 《The Quest of the Holy Grail》 in the Boston Public Library. Medieval knights in the Arthurian legend appeared in American novels at the end of 1850s and in political cartoons in the 1870s. They are featured in American Renaissance murals as well. 《The Quest of the Holy Grail》 painted in 1895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Britain, the Pre-Raphaelites frequently painted medieval knights. Abbey fused the visual idiom of the Pre-Raphaelites and that of the Royal Academy of Arts in his depiction of knights. Unlike the Pre-Raphaelites, who usually focused on knights' activities, he emphasized their virtue. His representation of knights reflect the social and economic crises in America in the 1890s. After the Civil War, American society enjoyed economic prosperity but suffered from government corruption, economic inequality, and class conflict. Serious social problems such as poverty and inequality decayed American society. Writers and artists brought attention to these issues. This essay argues that Abbey criticized capitalists and expressed his hope for progress through the figure of Galahad as the iconic representation of civic virtue in 《The Quest of the Holy Grail》.
Installed in the Boston Public Library, Abbey's murals performed a public function to warn the viewers of economic and social chaos resulting from government corruption. Abbey's American knights not only emphasized moral responsibility but also promoted patriotism. The artist refashioned medieval knights into American citizens, whose civic virtue became essential to an ideal leader in America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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