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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and Visual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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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2)~25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216
미술사와 시각문화
25권0호(2020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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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아시아 판매하기: 엘리자베스 키스와 조선

저자 : 전동호 ( Chun Dongho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33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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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키스 (Elizabeth Petrie Keith, 1887/8-1956)는 영국의 여성 미술가로 20세기 전반 조선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를 소재로 한 판화를 다수 제작한 작가이다. 그는 일본에 정착하여 동아시아 여러 지역을 널리 여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된 판화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및 미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1915년 일본에서 처음 시작된 '신한가(新版画)' 운동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키스와 그의 작품은 흥미롭게도 키스 사후(死後) 일본이나 영국보다 한국에서 더 높은 관심을 받았고 이에 대한 연구도 한국에서 가장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기존 국내 연구는 당대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키스가 후원자들과 주고 받은 편지 등 새로운 1차 사료 발굴을 등한시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국내 키스 관련 연구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필자가 새롭게 발굴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키스의 생애, 그 중에서도 특히 그의 조선 관련활동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그간 학계에 부정확하게 알려지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키스의 생애와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제시하고 향후 좀 더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키스 연구의 초석을 다지려는 것이 본고의 주요 목표이다. 따라서 본고는 키스가 제작한 특정 이미지에 대한 집중적 분석이나 이론적 논의를 포함하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Elizabeth Keith (1887/8-1956) was a British artist whose colour prints depicting Far Eastern subjects have once gripped the visual imagination of art lovers. At her prime in the 1930s, she was even ranked in the same league as Hiroshige and Hokusai, the eminent old masters of Japanese Ukiyo-e (浮世絵). Based largely on newly discovered contemporary sources such as newspapers and hitherto unpublished correspondence, this article has two overlapping aims. First, it seeks to provide a contextual account of Keith's life in broadly chronological order. Second, it attempts to highlight her relations with Korea: not only was her career as a popular printmaker made possible thanks to her early depiction of Korean subjects but later in life she devoted her energy to producing an illustrated book on Korea. Keith, of course, happened to live in the age of imperialism, and there is no doubt that she colluded, if unconsciously, in orientalising Korea and the Far East. Criticising her simply for being an implicit imperialist, however, does not do justice to her achievements any more than lionising her as a selfless lover of Korea does. After all, the decision to settle in East Asia and to become a printmaker specialising in Far Eastern subjects was ingenious for a British 'surplus woman' to make. As an historical actor and agent, Keith did what she was willing and able to do within the boundary of real life options available to her. This article purports to locate Keith and her art within the context of the interplays between historical contingencies and human desires, and it calls in particular for more solid documentary research than most current studies available on Ke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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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별의 시각화: 한반도 천문 전통으로서의 여말선초 별자리도 고찰

저자 : 김소연 ( Soyeon Kim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4-63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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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별자리 이미지는 단순히 자연물을 모방한 결과가 아니라 하늘에 대한 당대인들의 기록임과 동시에 별에 대한 집단적인 이해,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기호화 혹은 도상화라는 복합적인 과정의 결과이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유사한 지역적, 시대적 배경에서 제작된 별자리 이미지의 사례로 <치성광여래도(熾盛光如來圖)>, 『보천가(步天歌)』와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본 논문은 이 여말선초의 별자리 이미지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최신 천문지식이나 문헌에 대한 무지, 혹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별을 그리는 방식에 관한 지역적인 전통에서 비롯된 것임을 논의하였다. 특정 문헌이나 교리를 바탕으로 별을 이해하고 그 결과로 별자리 이미지가 그려진 것이 아니라, 별과 관련된 한반도 지역의 회화적 관습이 별자리 이미지의 제작에 더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필자는 불교회화인 <치성광여래도>의 사례를 조금 더 살펴봄으로써 동일한 방식으로 그려진 별자리 이미지일지라도, 불교적 맥락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천문 전통과는 다른 종교적 의미가 더해졌음을 살펴보았다.
고대 동아시아에서의 '천문'은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성수(星宿) 신앙, 점성, 천체 관측, 책력, 풍수지리, 기상학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치성광여래도>, 『보천가』,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하고 사용한 14-15세기 한반도 사람들도 이 서로 다른 아이디어들을 구분하여 다르게 취급하거나, 혹은 통합해서 하나의 거대 이론으로 만들고자 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대하는 서로 다른 층위의 전통을 축적시켜 천문이라는 이름으로 공존하게 하였다. 불교회화를 그리는 화가와 궁정의 천문학자들이 별을 그리는 방식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북극성 부처를 그리는 것과 별을 관측하여 기록하는 것 모두 천문 전통의 일부였던 것이다.


Images illustrating asterism by using several dots and lines have appeared in almost every culture. Defining an asterism, that is, connecting dots by arbitrary lines, requires imagination and creativity. Moreover, to be approved as an “asterism,” the combination of dots and lines should be collectively accepted by members of a community. Therefore, asterism images included in visual materials deserve to be highlighted because they are not just a result of copying nature but of a complex process including recording, understanding, and symbolizing the sky and stars.
This paper investigates a Goryeo Buddhist painting, Assembly of Tejaprabha Buddha, the Butiange (Song of Pacing Heaven), a constellation book, circulated in Joseon Korea, and the star map Cheonsang yeolcha bunya jido (Chart of the Constellations and the Regions they Govern) produced by Joseon astronomers as cases of asterism images created within a similar regional and temporal context. By examining them, I shed light on the common features such as the characteristics of asterism and the visual representation of the brightness of a star in fourteenth-century and fifteenthcentury Korea. These features often show discrepancies with earlier Chinese counterparts or texts, which derived not from ignorance or indifference to cutting-edge astronomical knowledge from China but from regional traditions of how to draw asterisms. In this sense, it seems that asterism images are not a result of understanding stars based on a certain text or doctrine. Rather, the images were heavily influenced by the local pictorial convention shared by the artists and astronomers of the time. Consequently, the deeply-rooted pictorial convention in drawing asterisms may have also influenced how to perceive asterisms.
Additionally, through the religious icon Assembly of Tejaprabha Buddha, this paper suggests that asterism images were given further religious significance in the Buddhist context even though they were illustrated in the same way as the asterism images in the non-Buddhist Butiange and Cheonsang yeolcha bunya jido. Overall, this study discusses cheonmun (Ch. tianwen), a notion encompassing astral worship, astrology, astronomical calculation, almanac, geomancy, meteorology, and so forth. Korean peninsula in the fourteenth and fifteenth centuries, where the Buddhist paintings, constellation books, and star maps were produced, also witnessed this broad idea exert its influence in various fields, but not as a grand theory. Under the rubric of cheonmun (J. tenmon), a long-held tradition in East Asian countries, different ideas of heaven have coexisted like accumulated layers. Both depicting Tejaprabha Buddha and his stellar pantheon and recording celestial bodies were a part of this cheonmun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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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건륭제(乾隆帝)의 다보격(多寶格)과 궁정 회화

저자 : 유재빈 ( Yoo Jaeb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4-99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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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는 서화 골동을 수집하고 감상한 데에 그치지 않고 재해석을 거쳐 새로운 창작품으로 만들었다. 건륭제가 조판처(造辦處)에 지시해 제작한 다보격과 그의 수장품을 담은 초상화들은 이러한 재해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우선 다보격의 최근 연구를 수용하여 다보격의 용어, 특징, 진설 장소 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다보격을 지칭하는 용어로 『양심전조판처활계당안(養心殿造辦處活計檔案)』에서 더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백십건(百什件)”이다. 건륭제는 1756년에 조판처 산하에 “백십건”이란 부서를 신설한 것으로 보아, 다보격의 제작을 더 전문화하고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다보격은 크게 상자 형태와 가구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은 유물의 종류와 시대, 지역이 다양하며, 청대 궁정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은 황제의 감상인(鑑賞印)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상자 형태의 다보격이 더 폐쇄적으로 내용물이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가구 형태의 다보격 역시 이동이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건륭제는 다보격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목록을 작성하였으며, 수장물을 보수적으로 유지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단지 유물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기획된 유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구 형태의 다보격은 궁전 내 곳곳에 설치되었는데, 특히 양심전(養心殿)과 수방재(漱芳齋)가 대표적이다. 특히 건륭제는 수방재에서 정초에 내정학사(內廷學士), 한림학사(翰林學士)들과 다연을 베풀고 연극을 관람하였다. 상왕이 된 이후 그는 수방재를 외국의 사신을 맞는 외교적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수방재의 공적 기능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곳에 진설된 다보격과 그 안의 유물이 단지 황제의 호젓한 완상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아니라 정치적인 관계 속에서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건륭제는 소장품을 사실적인 회화로 재현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개별 다보격마다 내장(內藏) 유물을 모은 도록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소장품을 재현한 도록은 관리를 위한 장부였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전범(典範)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건륭제의 수장품은 그의 초상화 속에 등장하여 건륭제의 다양한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역사와 지역의 문화적 코드를 정밀하게 설계된 맥락 안에 재배치한다는 점에서 건륭제의 초상화는 회화적으로 재현된 다보격이라고 할 수 있다.


The Qing Emperor Qianlong (r. 1736-1795) collected and appreciated ancient Chinese paintings and antiques with great enthusiasm. He not only appreciated and appraised the value of his collection, but also created new works of art by rearranging paintings and antiques for his purposes. Duobaoge or “manytreasures boxes (curiosity cabinets)” is the best example of his practice of re-interpreting the antiques and curios in the Qing imperial collections. This paper examines various features of duobaoge and the representation of his collection including duobaoge in court paintings. According to the Archives of the Office of Manufacture of the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in Yangxindian, Qianlong established the Department of Hundred Things to produce duobaoge in 1756. He maintained it until 1767. It explains his special interest in the making and use of duobaoge and their popularity during his reign. Qinalong's duobaoge can be largely divided into box types and furniture types. The box-type duobaoge often has its own catalogue of the contents. The arrangement of the antiques in the furniture-type duobaoge was also thoroughly documented in the Archives of Arrangement of each palace building. The fact that these duobaoge have their own cataloging system shows that duobaoge, in themselves, are independent works of art rather than mere assemblies of precious things in his collection.
Furniture-type duobaoge were installed in various palace buildings. The duobaoge in Shufangzhai is one of the well-known existing examples. In Shufangzhai, Qianlong held tea ceremonies and enjoyed theatrical performances with his courtiers and Hanlin scholars on the first day of the year. Qianlong used Shufangzhai as a place to receive foreign envoys after his retirement. Shufangzhai was known as one of Qianlong's private residences, but its official function mentioned above suggests that his collection of antiques in duobaoge was not only objects of his private appreciation but also a symbol of authority working for his political purposes.
Qinglong commissioned court painters to paint in the realistic pictorial manner antiques and collectibles in duobaoge such as mirrors, bronzes, jades, ceramics, ink stones, and other curios. The paintings are visual catalogues of his collection of precious things. The presentation and housing of works of art in the imperial collections in duobaoge were art forms in themselves. His collection of antiques and curios was also found in the portraits of Qianlong such as Qianlong as Connoisseur and Is It One or Two? These portraits of Qianlong can be read as pictorial versions of duobaoge, in the sense that cultural and historical values attached to his collection of precious things and antiques are carefully rearranged to establish the image of Qianlong's emper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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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해악전신(海嶽傳神): 정선의 1712년 금강산도 제작에 관한 재고

저자 : 이경화 ( Lee Kyunghwa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0-131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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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정선은 이병연의 초청으로 금강산을 여행하며 30폭의 금강산도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들은 '해악전신(海嶽傳神)', 즉 금강산의 정신을 그림으로 표출하였음을 의미하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해악전신첩》은 더 이상 전하지 않지만 조선 후기 최고의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18세기 화단에서 정선의 금강산도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동력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이 화첩을 감상한 문인들이 풍부한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정선의 1712년 금강산도에 관한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해악전신첩》의 제작 과정, 구성 및 내용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하고 이 화첩의 문화사적 의의를 재고(再考)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1712년의 금강산 여행은 정선의 두 번째 산행이었다. 한 해 전 그는 신태동(辛泰東)이란 인물과 금강산을 여행하고 13폭의 금강산도를 제작하여 《풍악도첩》이라는 화첩으로 제작하였다. 《풍악도첩》은 금강산의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한 그림이었으며 이 그림을 통해 정선이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계승하였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병연과 함께했던 제2차 금강산행에서 정선은 금강산의 현장에서 느낀 생생한 감동을 전달하기 위한 표현 방법을 더욱 고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연운에 싸인 비로봉을 그리며 그는 훗날 휘쇄법(揮灑法)이라 불렸던 특유의 활달한 필묵법을 선보였다. 정선이 생동감이 넘치는 속필로 그린 그림은 즉각적으로 금강산의 전신(傳神)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금강산에서 돌아온 이병연과 정선은 강원도로 사경(寫景) 여행을 지속하였다. 이들은 이병연이 현감으로 부임하였던 금화의 명소를 그렸으며 강원도 화천과 그 부근에 위치한 김수증의 유적지를 방문하고 이들을 화폭에 담았다. 이병연의 기획으로 성사된 《해악전신첩》은 그의 금화 체류를 기념하는 작품이라는 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해악전신첩》의 소유자인 이병연은 동시대의 여러 문인들에게 정선의 그림을 보여주며 평가를 받았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정선과 그의 그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정선의 회화에 대하여 가장 적극적인 호응을 보였던 인물은 당대의 감식안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하곤(李夏坤)이었다. 《해악전신첩》을 감상한 이하곤은 정선이 구사한 웅장한 구도, 힘과 생동감이 넘치는 붓질은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를 표현하는 데 매우 적합한 회화 기법임을 깨달았다. 그는 정선의 그림에 금강산의 형사(形似)와 전신을 아우른 그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정선의 그림은 금강산에서 경험한 자연의 조화에 관한 깨달음을 전달할 때 회화는 시문이 지닌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인식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금강산에서 느낀 현장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회화는 언어적 표현을 능가했다. 정선의 금강산 그림은 문인들이 쓴 여행기인 금강산 유기(遊記)를 압도했다. 정선의 그림을 보며 문인들은 이 점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은 문인들의 그림이 지닌 '시각적 힘'에 대한 자각은 정선의 금강산도가 불러온 회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Jeong Seon (1676-1759), the most eminent painter of true-view landscapes in the late Joseon period (1392-1910), produced a thirty-leaf album of topographical landscapes of Mount Geumgang (Diamond Mountains) at the invitation of Yi Byeongyeon (1671-1751) in 1712. The album garnered praise by being called Album of Transmitting the Spirit of Sea and Mountains (Haeak jeonsin cheop). Though this album failed to survive, it is prized as testimony to the artistic achievements of the late Joseon period and is known to have laid the foundation for the reputation of Jeong Seon's paintings of Mount Geumgang in eighteenth-century Korea. Numerous scholars' comments on this album attest to these appraisals of the album. This study investigates the situations around the production of the Haeak jeonsin cheop of Mount Geumgang from 1712 and revisit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is album.
In 1712, Jeong Seon traveled Mount Geumgang for the second time. In his first visit of 1711, he produced a thirteen-leaf album of paintings of Mount Geumgang entitled Album of Pungak Mountain (Pungak docheop). The Pungak docheop featured an elegant and delicate depiction of the scenic sites of Mount Geumgang, reflecting the tradition of the topographical landscape painting of Joseon Korea. In his second visit, Jeon Seon appears to have sought better ways to vividly convey the strong impression of each scenic site that he had in the mountains. Portraying Peak Biro in the clouds, he employed powerful brushwork to capture the dynamism of nature, constituting his signature style called hwiswae beop (literally, “wielding the brush rapidly”), and was thereby praised for transmitting the spirit of Mount Geumgang.
After their visit to Mount Geumgang, Yi Byeongyeon and Jeong Seon continued to travel the Gangwon area to produce topographical paintings. Jeong Seon painted scenic spots of Geumhwa where Yi Byeongyeon served as the magistrate and they visited several sites in the area known as Gogun gugok (Nine-Bend Stream of Gogun) in Hwacheon, where Kim Sujeung (1624-1701), whom Yi respected, lived in seclusion. The production of the Haeak jeonsin cheop was designed by Yi Byeongyeon to commemorate his stay in office in Geumhwa. Yi Byeongyeon showed the album to many of his contemporary scholars and asked them to write their comments on the album. Yi Hagon (1677-1724), who was renowned for his connoisseurship in art, most favorably responded to the artistic achievements of Jeong Seon demonstrated in this album and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promoting Jeong Seon and his topographical landscapes of Mount Geumgang. Many literati joined Yi in praising Jeong's landscapes. Recognizing that Jeong Seon's grand composition and powerful brush strokes were most apt for describing the spectacular scenery of Mount Geumgang, Yi Hagon commented that Jeong Seon successfully represented the appearance and spirit of Mountain Geumgang in painting. Seeing Jeong Seon's paintings, literati of the time might have felt as if they were in the mountains themselves. They must have realized that painting could move beyond the limitations of prose and poetry in conveying the sensory perception of Mount Geumgang. Jeong Seon's paintings of Mount Geumgang such as the now lost Haeak jeonsin cheop created a new understating of painting by proving that vivid visual expressions could surpass verbal descrip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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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군복본(軍服本) 정조어진(正祖御眞)의 제작과 봉안 연구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과 계승 의지의 천명―

저자 : 이성훈 ( Lee Sunghoo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2-183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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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1791년에 비공개로 군복본 어진 대본(大本) 1본과 소본(小本) 1본을 제작한 뒤에 이 두 본을 규장각과 현륭원(顯隆園)의 재실에 각각 봉안하였다. 현륭원은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묘소이다. 이 두 본의 어진은 모두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 중 대본은 〈철종어진〉과거의 동일한 도상의 초상화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조가 자신의 초상화를 부친의 묘소 재실에 둔 것은 선왕(先王)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자신의 어진을 냉천정(冷泉亭)에 봉안한 사례를 따른 것이었다. 냉천정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사묘(祠廟)인 육상궁(毓祥宮)의 재실이다. 정조는 자신의 어진을 현륭원 재실에 봉안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부친을 옆에서 시위(侍位)하는 듯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내고자 하였다. 부친에 대한 자신의 효심(孝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의도도 내보였다. 그런데 더욱 주목되는 사실은 이 재실에 정조가 군복을 복색(服色)으로 한 어진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정조는 군복을 무엇보다 자신의 부친 사도세자가 온행(溫行) 중 수원에 들렀을 때 착용했던 옷으로 기억하였다. 그 결과 그는 수원에 위치한 현륭원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군복을 착용하였다. 군복본 정조어진 속 군복은 이처럼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과 계승 의지가 투영된 상징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조선시대에 어진의 제작과 봉안이 각각 따로 진행된 별개의 사업이 아닌 서로 연계되어 진행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정조가 자신의 전임(前任) 국왕들과는 달리 자신의 어진을 후대에 영원히 남겨야 할 이른바 공적인 보존대상으로만 인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내면의식과 정체성 혹은 개인적인 염원을 드러낼 수 있는 매체로 분명히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즉, 그가 부친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표현하고 자신을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계승자로서 당당히 표방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초상화란 매체를 적극 활용했던 사실을 필자는 이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In the year 1791, King Jeongjo (r. 1776-1800) unofficially ordered the production of two portraits depicting him in military uniform. The larger version of the portraits was enshrined in Gyujanggak and the smaller version inside Hyeollyungwon. Hyeollyungwon is the tomb of his father Crown Prince Sado (1735-1762), who starved to death after being confined inside a rice chest by order of King Yeongjo (r. 1724-1776), Jeongjo's grandfather. Both versions of Portrait of King Jeongjo in Military Attire (Gunbokbon Jeongjo eojin) do not exist anymore. But it is believed that the larger version is almost identical to Portrait of King Cheoljong (Cheoljong eojin) in terms of composition and depicted objects.
Enshrining one of King Jeongjo's portraits inside a building beside the tomb of his father follows the example of King Yeongjo, who had likewise installed his own portrait inside Naengcheonjeong. It is a pavilion belonging to Yuksanggung, which is the ancestral shrine for his biological mother Sukbin Choe (1670-1718). By installing his portrait in this manner, King Jeongjo attempts to create his public image in which he appears to be symbolically waiting on his father. It also visually conveys his intention to express his filial piety towards his father. But the fact that the king is portrayed in military robes deserves special attention. He made efforts to associate the military uniform with the very attire of his father because Crown Prince Sado wore it when the prince visited Suwon in 1762. Accordingly, he always wore his military uniform whenever he visited Hyeollyungwon in Suwon to show his filial piety. The particular clothing, which was chosen for these portraits of Jeongjo, can be interpreted as reflecting his filial piety as well as his wish to be seen as the successor to Crown Prince Sado.
In this article, I have come to two conclusions. Firstly, the production and the enshrinement of royal portraits during the Joseon dynasty were not separate. On the contrary, there are strong interrelations between producing the paintings and enshrining them in specific locations. Secondly, Jeongjo, different from previous kings, considered royal portraits to be formal objects of preservation, which were supposed to be maintained eternally for future generations. He also regarded his own portraits as a means of displaying his psychological selfhood and identity. In other words, this research shows how Jeongjo used his portraits to express his grief about his father as well as to confidently represent himself as the son of and successor to Crown Prince S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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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평성시도》 연구: 등시(燈市)로 표현된 태평성대(太平聖代)

저자 : 전지민 ( Chun Jim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4-219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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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는 상업이 번성한 성곽도시를 상세하게 그린 도시풍속화이다. 《태평성시도》는 상업화와 도시화의 이상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작품으로 이해되었으며 작품의 제작 시기는 19세기 전반으로 추정되었다. 기존 연구에서 《태평성시도》의 상업 공간은 도시를 상징하는 요소인 상설시장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태평성시도》는 실재했던 어떤 도시의 경관도 보여주고 있지 않다. 이 그림의 초점은 상업 공간의 묘사이다. 한편 상업공간의 묘사만큼이나 흥미를 끄는 요소는 그림의 전면에 걸쳐 그려진 상당한 수의 등(燈)과 화면에 많이 보이는 여성 및 아이들이다. 본 논문은 《태평성시도》에 보이는 세부적인 묘사에 주목하여 화면 속의 상업 공간이 세시(歲時) 관등(觀燈)기간에 일시적으로 형성된 특수 시장인 등시(燈市)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아울러 필자는 《태평성시도》가 등시를 통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시각화한 작품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태평성시도》의 상업 공간이 등시라는 근거는 화면의 여러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생활용품보다는 고가의 사치품을 많이 팔고 있는 《태평성시도》 속 상점들의 모습은 등시에 관한 문헌 기록과 일치한다. 그림에는 축제의 분위기를 돋우는 다양한 등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태평성시도》에 그려진 등의 모양과 종류는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서(歲時風俗書)에 기술(記述)된 관등 풍속의 기록과 매우 유사하다. 《태평성시도》에는 유난히 여성과 어린이가 많이 등장한다. 문헌 사료를 검토한 결과 관등 풍속이 세시 풍속으로 전승되었던 명절은 여성과 어린이가 중심이 되는 날이었다. 《태평성시도》에는 거리의 인구 밀도가 매우 높게 표현되어 있으며 화면을 자세히 보면 이 작품을 그린 화가가 의도적으로 많은 풍속 장면을 그려 넣으려 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러한 시각적 표현들은 신분, 나이, 성별과 관계없이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했던 등시에 대한 기록과 유사하다.
등시의 정경은 역사적으로 '왕화(王化)로 구현된 태평성대'란 상징성이 있었다. 이러한 상징성은 국가가 주최했던 상원연등회(上元燃燈會)와 관련된다. 상원연등회의 구체적인 절차와 공연 내용은 왕실의 권위를 확인시켜주는 성격이 강했다. 《태평성시도》에 그려진 '태평(太平)'이라는 문자등(文字燈)은 등시의 풍속을 통해 왕화로 구현된 태평한 이상 사회의 모습을 알려준다. 조선 후기의 등시는 19세기부터 더욱 성대하게 열렸으며 문자등인 '태평'도 이때 등장했다. 문헌에 따르면 조선에서 등시는 19세기 이후 회화의 소재가 되었다. '태평' 문자등이 그려진 《태평성시도》는 19세기 초에 제작된 작품으로 생각된다. 《태평성시도》의 제작 목적은 19세기 초부터 세시풍속 관련 저술에서 보이는 특징과 연관하여 추론해볼 수 있다. 19세기 초·중반의 세시풍속 관련 저술은 풍속을 통해 당대(當代)를 태평한 시절로 찬양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세시풍속 관련 저술에서 19세기부터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은 중국과 조선이 공유한 문화적 동질성에 대한 강조이다. 당시의 이러한 경향은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조선과 중국 사이의 문화적 동질성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인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즉 《태평성시도》에 보이는 중국풍의 인물 및 건물 표현은 중국과 조선의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태평성시도》는 등시를 소재로 당대를 군주의 선정으로 실현된 태평한 시절로 표상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The folding screen The City of Great Peace (Taepyeong seongsi do), currently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is a painting of an imaginary urban landscape which depicts commercial activities inside a city surrounded by a fortified wall in minute detail. This painting can be dated to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It is known as a representation of the commercialization and urbanization of late Joseon Korea (1392-1910). In previous studies, the commercial elements in the painting were thought to have symbolized the regular business activities as the key characteristics of urban life. However, the painting focuses more on the commercial aspects than on sketching a cityscape. Besides the detailed depiction of commercial life, two noteworthy elements of The City of Great Peace are various kinds of lanterns and many women and children found in the painting.
This research argues that this painting depicts a lantern fair (deungsi) in which numerous lanterns are displayed. Furthermore, The City of Great Peace is thought to have been a visual representation of the era of grand peace (taepyeong). There are many pieces of evidence that support the argument that the commercial aspects of the painting show the celebratory and joyful atmosphere of the lantern festival. Most of the commercial goods in this painting are not household items but expensive luxury products, in accordance with historical records about lantern fairs. There are many different kinds of lanterns depicted in the painting that serve to create a festive atmosphere. The customs of a lantern fair in the late Joseon period as described in the books on seasonal customs (sesi pungsok seo) are reflected in this painting. There are many women and children, unlike usual paintings of marketplaces which are dominated by men. Historical records indicate that the annual lantern festival was primarily a holiday for women and children. There is a large number of people on the streets. A closer look at the picture confirms that many elements were painted intentionally to make the composition complex. This visual portrayal of a lantern festival corresponds to textual records that mention people of all ages and classes crowded the streets during the fair.
The scene of the lantern fair is consistently interpreted as a symbol for the era of great peace accomplished by the benevolent rule of the sage king (wanghwa). The symbolic meaning of the lantern fair is closely related to the light-filled festival on the fifteenth day of the first month in the Chinese lunar calendar (Sangwon Yeondeunghoe; Ch. Yuanxiao denghui). The Sangwon Yeondeunghoe called “Lantern Festival” or “Spring Lantern Festival” consisted of procedures and performances for praising and venerating the royal court. The lanterns in the shape of the characters such as tae and pyeong represent the era of great peace accomplished by the kingly way. In the nineteenth century, the Sangwon Yeondeunghoe, a special lantern festival, was even greater than before and the taepyeong (great peace) lanterns also appeared during that period. According to historical records, the Sangwon Yeondeunghoe became the subject matter of painting since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 City of Great Peace showing the tae and pyeong lanterns can be dated to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 tae and pyeong lanterns combine to represent the era of taepyeong that is the world of great peace under heaven.
The purpose of creating The City of Great Peace can be inferred by observing the way seasonal customs were described in the books written after 1800. These books tended to glorify their time through the description of seasonal customs. In addition, these books displayed a strong cultural solidarity with China. Emphasizing the cultural solidarity between Korea and China was a way to demonstrate the greatness of Joseon's culture. Description of the lantern fair in The City of Great Peace showing Chinese-style architectural buildings and people in Chinese hair style and fashion represent the ideal world of peace and happiness. The Chinese elements in the painting show the cultural solidarity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conclusion, The City of Great Peace representing the age of taepyeong served as a means of venerating the royal court and reconfirming the authority of the king by adopting the scene of a special lantern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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