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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and Visual Culture

  •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 : 예체능분야  >  미술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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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599-7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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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2)~23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202
미술사와 시각문화
23권0호(2019년 05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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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교유관계 파악은 한국회화사 연구에서 필수적이었다. 그동안 화가의 작품 세계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우정, 사승관계, 혈연과 같은 인간관계는 외적 영향의 원인으로 설명되었다. 이 중 전통시대 화가의 '우정(友情)'은 쉽게 이상화되거나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18세기의 화가 정선(鄭敾, 1676-1759)에 관한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연구에서 정선과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은 매우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것으로 전제(前提)되어 왔다. 간송미술관 소장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역시 정선과 이병연의 합작(合作)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들의 우정을 표현한 그림으로 연구되어 왔다. 본고는 《경교명승첩》의 '시거화래지약(詩去畵來之約)'과 관련된 작품들의 시각적 분석을 통하여 정선과 이병연의 우정에 대해 재고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정선의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약속 즉 '시거화래지약'과 관련된 작품들은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재직하던 1740년에서 1741년에 제작되었다. 《경교명승첩》은 정선의 아들 정만수(鄭萬遂, 1710-1795)로부터 심환지(沈煥之, 1730-1802)의 수중에 들어가기 전까지 정선의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다. 정선은 일생 동안 타인의 그림 주문에 수응(酬應)하며 생활했다. 이런 그가 자신과 자신의 친구인 이병연을 위해 그린 《경교명승첩》은 수응화(酬應畵)가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경교명승첩》에 들어 있는 '시거화래지약'과 관련된 작품들은 초상화, 실경산수화, 고사인물화, 시의도 등 다양한 장르를 변형하여 정선과 이병연의 우정을 시각화하였다. 정선과 이병연은 이 작품들을 통해 그들의 우정을 돈독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교명승첩》이 보여주는 정선과 이병연의 우정은 실제로 이들의 개인적 친분 관계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정선에게 이병연은 친구이자, 그림 주문자, 그림 중개인이었다. 정선과 같은 사대부 출신의 화가에게 그림을 주문할 때 그와 직접적 친분이 없는 사람들은 정선의 친구였던 이병연을 통해서 그림 주문 및 제작을 의뢰하였다. 이병연은 중국으로 사신을 가는 사람들을 활용하여 정선의 그림을 대리하여 판매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선은 그림을 판매한 대가를 현금이 아닌 물고기, 비단, 양초, 황유자기와 같은 '선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사대부 출신의 화가가 그림을 통한 상업적 거래를 하는 것이 장려되지 않았다. 따라서 '선물'과 같은 '대가성 현물'을 통해 거래하는 것은 사대부 출신의 화가들로 하여금 그림을 통해 세속적 거래를 했다는 낙인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울러 그림 주문자들은 양반 출신의 화가에게 친구인 이병연을 통해 그림을 부탁함으로써 화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득의작(得意作)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다. 또한 정선과 이병연의 '우정'은 서로의 작품 활동에 있어서도 상업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의 많은 수장가들은 정선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를 함께 하나의 화첩으로 만들어 소장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정선과 이병연은 당대 최고의 화가와 시인으로서 서로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반자였다. 이와 동시에 이들은 시와 그림이라는 예술로 생계를 이어 나가며 명성을 쌓아 가는 데 현실적으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였다.


In the study of Korean painting, analyzing the social environment in which the artist lived and worked is essential for understanding his or her artistic production. Interpersonal relations such as friendship, teacher-student relation, as well as kinship are regarded as external factors in the formation of an artist's world. In particular, the factor 'friendship' was prone to being idealized or romanticized in the narrative of a traditional artist. This phenomenon appears to have occurred also in the case of the eminent painter Jeong Seon (1676- 1759). Most research on Jeong Seon and his friend Yi Byeongyeon (1671- 1751) claims that they shared a pure and beautiful friendship. Until now, the Gyeonggyo myeongseung cheop (Album of Famous Scenic Spots in the Suburbs of Hanyang) in the collection of the Kansong Art Museum is considered to be a collaboration by Jeong and Yi which resulted from their friendship. However, this paper aims to visually analyze those works from the album Gyeonggyo myeongseung cheop, which were based on their “promise of interchanging poetry and pictures.” Its primary objective is to reconsider the friendship between Jeong Seon and Yi Byeongyeon from a critical perspective.
Works produced in accordance with their “promise of interchanging poetry and pictures” were executed between the years 1740 and 1741 by Jeong and Yi, while the former lived and worked in Yangcheon as a county magistrate. The album was in the possession of Jeong Seon's family until Sim Hwanji (1730-1802) acquired it from the painter's second son. It is very rare that Jeong created paintings for himself, since he normally painted on commission for other people throughout his lifetime. The paintings in the album were designed to visualize their friendship while featuring various genres such as portraits, topographical landscapes, narrative pictures, and poetic paintings (paintings based on poems). Jeong and Yi utilized these paintings to cement their friendship.
The friendship represented in these paintings, however, should not be regarded as a true portrayal of their close relationship. Yi Byeongyeon was not only a friend but also a client as well as an agent (go-between or middleman) involved in art sales. Jeong Seon was a literati artist, who belonged to the aristocratic, ruling yangban class of Joseon society. When someone with no acquaintance to him desired to request a painting, Yi Byeongyeon served as the intermediary between artist and client. Yi also assisted Jeong Seon in selling his paintings to the Chinese whenever Korean emissaries went to China on diplomatic missions. Yi asked the emissaries to sell Jeong's paintings on his and the painter's behalf. Instead of money (cash payments), Jeong Seon seems to have accepted various gifts as payment for his art. Thus, he received goods such as fish, silk, candles, yellow-glazed porcelain wares from China, and so forth. In Joseon Korea, literati painters were generally not encouraged to sell their paintings for money. For this reason, exchanging gifts was a way for aristocratic artists to escape stigmatization related to the monetary sale of paintings. Additionally, when clients ordered paintings through Yi, they could obtain high quality works while avoiding to hurt the artist's pride. In this way, the friendship of Jeong Seon and Yi Byeongyeon served as a means of using the output of their artistic activities in a commercial way. Many eminent collectors of the 18th century wished to own an album which combined Jeong Seon's paintings with Yi Byeongyeon's poetry. Jeong and Yi were artistic partners who mutually understood their artistic activities and inspired each other. At the same time, their friendship was mutually beneficial and accordingly came to be utilized commercially for their art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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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 왕실에서의 왜장병풍 제작과 그 문화사적 의의

저자 : 김수진 ( Soojin Kim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2-81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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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8-20세기 왕실 문헌에 보이는 '왜장병풍(倭粧屛風)'의 용례를 정리하고 그 문화사적 의미를 논의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헌에는 왜장병풍이라는 용어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도 이 용어는 왕실 혼례 관련 기록에만 등장한다. 이에 본 연구에서 필자는 먼저 왜장병풍을 언급하고 있는 왕실 문헌을 조사하여 왜장병풍이라는 용어의 사용 맥락과 문화사적 의미를 논하였다. 두 번째로 필자는 왜장병풍의 등장 배경을 밝히는 차원에서 일본이 조선 왕실에 보낸 병풍 예물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15세기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일본은 조선 왕실에 250쌍 500좌 이상의 병풍을 보냈다. 조선 후기에 일본 병풍을 언급한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기록에는 병풍의 기원이 일본에서 유래된 것으로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많은 일본 병풍이 조선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다수의 일본 병풍이 조선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병풍의 시원을 삽병(揷屛)이 아닌 접이식 병풍으로 이해한 데에서 온 오류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왕실 문헌에 보이는 병풍장(屛風匠), 회장장(繪粧匠), 배첩장(褙貼匠), 장황인(粧潢人)이라는 직역의 전문가들이 분화되는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이것이 왜장병풍의 유행과 결부되어 있음을 논의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조선 왕실에서 장엄(莊嚴)과 의구(儀具)의 기능을 담당한 병풍의 역할이 구명되고 그 문화사적 의의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The folding screen has been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formats in painting throughout East Asian art history. However, its historical development has shown their respective trajectories in China, Japan, and Korea, depending on its difference in materials, appearances and uses. Korea has more tended to produce portable folding screens decorated with paintings and calligraphy, which can be easily relocated and reassembled as an indoor ornamental article.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Joseon dynasty, paintings were mounted in four different formats: 1. folding screens, 2. handscrolls, 3. hanging scrolls, and 4. albums. Among these, the format of folding screens increasingly dominated mountings of royal court paintings for rituals or interior decorations during the 18th and 19th centuries.
My study first pays attention to a phenomenon in which the terminology “Waejang folding screen” newly appeared among the royal protocols regarding the national wedding ceremony for royal family members since the 18th century. Waejang literally means “the Japanese mounting” or “mounted in the Japanese style” referring to hinge-connected screens, compared with “gakjang” which refers to isolated panel screens. It is commonly known that the Joseon court artisans already attained a level of technique high enough to produce hinge-connected panel screens before the 18th century. So why did the Joseon court begin to use the terminology “Waejang” for weddingceremony folding screens only after the 18th century? To answer this question, this study examines a list of 250 pairs of Japanese folding screens sent to the Joseon court as diplomatic gifts by the Japanese government in order to see how these screens were understood by Joseon intellectuals, particularly regarding their origins, uses, and functions compared with their Korean counterparts. To get a full picture of the phenomenon, this study also consults the literature of scholars such as Seo Yugu (1764-1845) who compiled an encyclopedia with entries regarding folding screens.
In conclusion, this study argues that the Joseon court and elites had a common acknowledgement that Japanese screens were produced mostly for decorative purposes rather than for conveying historic or moral themes. As a result, some scholars such as Seo Yugu even misunderstood that the format of folding screens itself originated from Japan, not from China, as shown in Seo's entry on them in his encyclopedia. To provide an auspicious wedding space for royal family members, court artisans created a dazzling stage with the eyecatching screens by appropriating “decorative” and “hinged-connected panels” from Japanese screens. This is what the late Joseon people called “Waejang folding screen,” the format that attached more weight to aesthetically useful “decorativeness” than to Confucian “ed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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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 뵤도인(平等院)의 회화적 재현

저자 : 김정희 ( Jung Hui Kim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2-121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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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1세기의 불교사찰인 우지(宇治)의 뵤도인(平等院)이 이후 회화에서 중요한 시각적 모티프로 등장하게 된 배경을 다루었다. 뵤도인을 재현한 가장 이른 예로는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우지가와 센멘즈(宇治川扇面圖)〉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뵤도인은 우지의 정경을 노래한 란파 케이시(蘭坡景茝, 1419-1501)의 시와 함께 핵심적인 화면 요소로 묘사되었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뵤도인 이미지의 등장과 <우지가와 센멘즈>의 제작 배경을 코노에 마사이에(近衛政家, 1444-1505)라는 인물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였다. 코노에 마사이에는 뵤도인을 세운 헤이안시대(平安時代, 874-1185) 후지와라 가문의 직계 자손으로, 뵤도인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닌의 난(應仁の亂, 1467-1477)을 피해 우지에 머무르는 동안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마사이에는 뵤도인에 대한 소유권을 재확인함으로써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과 문화적 위상을 전유(專有)하고자 했는데, 그의 이러한 열망이 반영된 작품이 <우지가와 센멘즈>이다. 란파 케이시와 코노에 마사이에는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의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 빈번했던 시회(詩會)를 통해 친분을 유지했으며, 시회 등을 통한 두 사람의 교류는 <우지가와 센멘즈>의 제작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후지와라 가문의 정치·문화적인 권위의 표상으로서 뵤도인 이미지는 16세기에 카노 에이토쿠(狩野永德, 1543-1590)가 제작한 <라쿠가이 메이쇼 유라쿠즈(洛外名所遊樂圖)> 병풍에서도 발견된다. 현재 4폭 한 쌍으로 남아 있는 <라쿠가이 메이쇼 유라쿠즈>는 왼쪽의 4폭에 우지와 뵤도인의 풍경을, 오른쪽 4폭에 교토의 서쪽 외곽인 사가(嵯峨)와 텐류지(天龍寺)의 풍경을 담고 있다. 우지와 뵤도인의 재현이 16세기 일본 정치사에서 코노에 가문의 활약을 연상시킨다면, 텐류지를 건립한 인물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라는 점에서 사가와 텐류지의 모습은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 1336-1573)와 연결된다. 카노 에이토쿠가 뵤도인과 텐류지의 이미지를 병치시킨 이유에 대해 이 논문에서 필자는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첫째, <라쿠가이 메이쇼 유라쿠즈> 병풍의 제작은 결혼을 통한 두 가문의 결합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의미를 가진다. 둘째, 뵤도인과 텐류지의 평화로운 풍경은 두 가문의 영화로웠던 과거에 대한 코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 1536-1612)의 향수를 반영한다. 코노에 가문의 수장으로서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살았던 코노에 사키히사는 코노에 가문뿐만 아니라 아시카가 막부의 정치적 힘과 권위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사키히사의 주문으로 카노에이토쿠가 그의 저택을 장식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사키히사가 카노 에이토쿠에게 <라쿠가이 메이쇼 유라쿠즈> 병풍을 의뢰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This paper examines why Byo-do- in (平等院), an eleventh-century Buddhist temple located in Uji (宇治), made its appearance as an important visual motif in later paintings. The first pictorial representation of Byo-do- in emerges in the late fifteenth-century Uji River fan (Ujigawa senmen-zu, 宇治川扇面圖) with a poem written by Ranpa Keishi (蘭坡景茝, 1419-1501). The reason for this sudden appearance of Byo-do- in can be explained by the intention of Konoe Masaie (近衛政家, 1444-1505) to appropriate the authority of the Fujiwara family (藤原家), the former owner of the temple as well as the direct ancestor of the Konoe family (近衛家). Masaie's awareness of the significance of Byodo- in seems to develop while staying in Uji during the O - nin War (應仁の亂, 1467-1477). It is highly possible that Ranpa Keishi and Konoe Masaie had known each other from the cultural events such as poetry gatherings, and in one of such occasions, Keishi might have complied with Masaie's wishes by adding his poem praising Uji in combination with the depiction of Byo-do- in in the fan.
Political significance may also have been attached to the representation of Byo-do- in in the sixteenth-century Pleasures in Famous Places around Kyo- to (Rakugai meisho yu- rakuzu, 洛外名所遊樂圖), a set of folding screens, produced by Kano Eitoku (狩野永德, 1543-1590). The left panels depict Byo- do- in against the peaceful scenery of Uji, southern suburb of Kyo- to, and the right panels display famous temples such as Tenryu- ji (天龍寺) and Rinsenji (臨川寺) in Saga, western part of the capital. This paper claims that the presence of Tenryu- ji and Saga in the right panels is connected to the Ashikaga shogunate (足利幕府, 1336-1573) while Byo-do- in and Uji are closely associated with the Konoe family. The juxtaposition of these two regions may celebrate the union of two families through marriage. It may also reflect the nostalgia of Konoe Sakihisa (近衛前久, 1536-1612), the likely patron of this painting, for the most prosperous past of the two families before Sengoku period (戰國時代, 146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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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성지(聖地)의 형성과 존상(尊像)의 출현 ―중국 보타산(普陀山)의 관음상(觀音像)을 중심으로―

저자 : 최선아 ( Sun-ah Choi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2-163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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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 절강성(浙江省) 주산반도(舟山半島)의 보타산(普陀山)을 중심으로, 이곳이 관음보살의 성지로 인식되고 인정받는 과정 속에 등장한 존상(尊像)의 의미와 역할을 살펴본 것이다. 늦어도 북송(北宋) 이래 관음의 주처(住處)로 자리 잡은 보타산은 각각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의 주처로 여겨진 오대산(五臺山), 아미산(峨眉山)과 함께 중국 불교의 삼대도량(三大道場)이라 불렸다. 중국의 특정 산이 보살의 주처로 인식되고 인정되는 데에는 『화엄경(華嚴經)』을 기반으로 한 교학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각종 신비로운 이적(異迹)을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보살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전언(傳言)한 방문자 내지는 순례객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본 논문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묵장만록(墨莊漫錄)』,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 『보타락가산전(普陀洛伽山傳)』 등에 수록된 보타산에 대한 다양한 영이담(靈異談)을 살폈다. 아울러 본 논문은 이를 토대로 12-14세기 사이 보타산의 초기 역사를 재구성했으며 그 과정 중에 중시된 소위 “불긍거관음상(不肯去觀音像)”의 의미와 역할을 살폈다.
불긍거관음상은 보타산의 개창 설화에 등장하는 상이다. 전승에 의하면 이상은 9세기 중엽 오대산에서 온 것이며, 보타산 인근을 지날 때 스스로 섬에 남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후 불전에 안치되어 섬을 찾는 이들의 기도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보타산은 특정한 상(像)의 존재로 인해 관음의 성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런 면에서 보타산은 그보다 앞서 보살의 성지로 자리 잡았던 오대산, 아미산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두 곳은 주로 보살의 시현(示顯)이나 보살이 보인다고 여겨지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알려지면서 성지화되었고, 특정한 존상이 신앙의 중심이 된 것은 비교적 후대에 해당된다. 하지만 문헌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보타산 역시 조음동(潮音洞)을 중심으로 관음의 시현을 중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논문은 조음동(潮音洞)에서의 관음 시현 이야기와 불긍거관음상 이야기가 12-14세기에 어떻게 정형화되었는지를 추적해 존상과 현현 사이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고 그 두 가지 요소가 변증법적으로 보타산을 관음 성지로 자리 잡게 만든 과정을 조명했다.
본 논문은 또한 14세기 중국에서 제작되어 현재 일본 나가노현(長野縣) 조쇼지(淨勝寺)에 소장되어 있는 〈보타락산성경도(補陀洛山聖境圖)〉를 통해 존상과 현현의 상보적인 관계를 확인했다. 14세기 보타산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이 그림은 관음의 시현을 조음동 외에 또 다른 곳에도 표현해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필자는 조음동에서의 관음 시현은 당시 잘 알려진 백의관음(白衣觀音)의 도상이 차용된 것이며, 상공에 표현된 관음 현현은 보타산에 봉안되었던 불긍거관음상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를 통해 필자는 이 그림이 존상과 현현 사이의 복합적이면서도 모호한 관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흥미로운 사례임을 지적하였다.


What is the role of images in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sacred places? This paper investigates the issue by focusing on Mount Putuo, one of the “Four Famous Mountains of Chinese Buddhism.” A small island located in Zhoushan archipelago of Zhejiang province in China, Mount Putuo began to be regarded as the residing place of the bodhisattva Avalokites´vara (Ch. Guanyin) no later than the Northern Song dynasty (960-1127).
The first part of the paper reconstructs the early history of Mount Putuo through a comparative reading of related literary sources, such as Xuanhe fengshi Gaoli tujing (1124) and Mozhuang manlu (first-half of the 12th century), Baoqing Siming zhi (1227), Dade Changguozhou tuzhi (1298), and Putuo luojia shanzhuan (1361). By examining the legend of so-called “Bukenqu Guanyin (Guanyin who does not want to leave),” a miraculous statue which was alleged to express its will to stay at Mount Putuo in the midninth century, this paper suggests that a particular image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Mount Putuo as a sacred site. I also point out that Mount Putuo is distinguished in this respect from its two precedents, i.e., Mount Wutai and Emei, where visitors' visionary experiences made the mountains famous rather than the presence of certain icons: it was in the later stage when particular icons emerged as the focus of worship in these two sites. However, close reading of literary sources of Mount Putuo also indicates that visionary experiences were regarded as much important as the possession of the image. By tracing how the stories of vision at Caoyin Cave evolved in the literature from the twelfth to fourteenth centuries, I stress the complementary relationship between image and vision in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Mount Putuo as the sacred site of the bodhisattva Avalokites´vara.
The second part of the paper revisits the relationship between vision and image by examining a painting, which depicts Mount Putuo of the fourteenth century. Entitled Putuo luoshan shengjing tu and currently in the collection of Jo-sho- ji temple in Japan, the painting not just vividly illustrates the architectural and geographical aspects of the mountain, but also intriguingly presents how the deity's manifestations were experienced. By interpreting two different manners in which visions are represented, I suggest that the painting is an interesting example which shows the complicated yet blurry relationship between image and 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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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교와 대승불교에 나타나는 여인과 영적 깨달음의 문제: 마리아 막달레나, 야소다라, 바수밀다

저자 : 신준형 ( Junhyoung Sh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3-19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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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그리스도교와 대승불교에 나타나는 여인의 사랑을 비교 논의한다.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의 예수와 석가모니를 향한 사랑이 각각의 종교가 추구하는 영성에 어떻게 포용되고 승화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예수의 추종자였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석가모니의 아내 야소다라는 두 종교의 중심인물과 관계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선택하였다. 중세시대 그리고 대승불교의 전통 하에서 여인의 인간적인 사랑을 영적인 사랑, 영적인 구도의 길로 인도하는 모습이 공통되게 나타난다. 다음 장에서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타나는 신비로운 여인 바수밀다를 논한다. 바수밀다는 육체적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 너머의 영적인 단계로 인도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처럼 선과 악, 육체적 사랑과 영적 사랑을 구분하지 않고 전자가 후자로 넘어가는 매개로 될 수도 있음을 설파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교만의 독특한 모티프라 주목된다. 이러한 비교연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와 대승불교에서 상당히 유사한 패턴의 메시지가 발견되는 것을 지적하고, 더 나아가 각 종교가 제시하는 영적 메시지를 좀 더 상대적으로 심도 있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표이다.


This essay discusses women's love described in Christianity and Maha-ya - na Buddhism, and how such love is sublimated and incorporated into the spirituality of two religions. First two sections deal with Mary Magdalene and Yas´odhara- who had direct relation with Jesus and S´a - kyamuni, respectively as Jesus's follower and S´a - kyamuni's wife. In these cases, two women's love of Jesus and S´a - kyamuni in their earthly existences was directed to the higher level of spiritual love. The following section discusses the mysterious woman Vasumitra-, who appears as one of the kalya-n.mitra-h. in Gan.d. avyu-ha Su-tra. She leads men to spiritual realm via physical love, showing that the latter can be employed as a means or conduit to the former. This kind of indistinction between good and evil, spiritual and secular loves, is a unique feature found in Buddhism, not in Christianity. This comparative study of the motif of women's love in two religions, I hope, would contribute to the mutual understanding of two religions in relative perspec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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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로베르 캉팽의 〈화열가리개 앞의 성모자〉에 나타난 마리아 락탄스(Maria lactans) 도상 연구

저자 : 전한호 ( Jeon Hanho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2-219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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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가 런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London)에 소장된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의 〈화열가리개 앞의 성모자(The Virgin and Child before a Firescreen)〉에서 주목하는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수유하는 상황임에도 성모는 실제 아기 예수에게 젖을 물리고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화면에서 구성상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화열가리개의 의미가 소홀히 취급되었다는 점이다.
마리아 락탄스(Maria lactans)는 일반적으로 수유 행위를 통한 아기 예수와의 인간적 친밀감, 모성애를 주된 내용으로 다룬다.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육화, 마리아를 통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기독교 교리를 뒷받침해 준다. 하지만 그림에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가 아니라 관람자를 향하여 정면으로 가슴을 보이고 있다. 화열가리개 또한 당시 서민 가정에서 사용하던 기물에 해당하지만 그림에서는 마치 후광처럼 마리아의 머리를 감싸는 동시에 화면에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이 글은 이 두 가지 사항에 주목하여 마리아 락탄스의 일반적인 도상 전통과 차이를 보이는 캉팽의 작품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성모는 서민적인 가정의 바닥에 앉은 '겸손의 마리아(Maria humilitatis)' 도상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성모는 고급스런 복장에 관람자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어 서민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천상의 마리아(Maesta)'에 가깝다. 아기 예수뿐 아니라 관람자를 향하고 있는 마리아의 젖은 모든 사람을 위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수단”(Mechtild)임을 역설해 준다. 수유 행위에 동참하지 않는 아기 예수의 특별한 몸짓은 할례에 대한 암시로 보인다. 이는 오른편 탁자 위에 놓인 성배와 함께 앞으로 있을 십자가 수난을 예고한다. 구약의 번제의식과 관련하여 예수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비교되듯 화열가리개 위로 보이는 불은 예수의 희생을 시사한다. 예수 수난의 궁극적 의미는 인류의 죄에 대한 정화의식(Purification)에 해당하므로 〈화열가리개 앞의 성모자〉는 개인용 기도화의 주제로 적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 마리아는 예수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사랑과 헌신으로 양육했기에 마리아의 젖은 구원을 간청하는 상징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가슴을 제시하는 행위의 도상학적 의미는 최후의 심판 주제와 연관이 있다. 로렌초 모나코(Lorenzo Monaco, c. 1370-c. 1425)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중보(The Intercession of Christ and the Virgin)〉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옆구리의 상처를 보일 때, 마리아는 가슴을 내보이며 구원을 간청한다. 이때 예수가 보이는 상처가 죄로 인한 희생, 인류에 대한 사랑을 뜻하듯, 마리아의 가슴은 구원을 간구하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This study explores two issues concerning The Virgin and Child before a Firescreen by Robert Campin (1375?-1444) in National Gallery, London. First, Mary is not actually breastfeeding the child, even though she is nursing him. Second, the significance of the firescreen, which plays an important role in composition, has often been neglected in the interpretation.
Images of Maria lactans generally represent Mary breastfeeding baby Jesus in order to stress her maternal love and affection for him. It supports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Incarnation, which explains how God became a human being through Mary. In Campin's painting, however, Mary seems to offer her breast to the viewer, not to the child. The firescreen, used in ordinary households in Campin's time, functions as a halo for Mary. It also serves as a visual device that unites Mother Mary and the Christ Child. Analyzing these two elements, this study suggests a new interpretation of Campin's work that diverges from the iconographic tradition of Maria lactans.
The Virgin is seated on the floor in front of a wooden bench, which reminds us of the iconography of Maria humilitatis. Moreover, the figure's richly ornamented dress and her frontal pose present her as “The Queen of Heaven.” Directed at the viewer, the exposed breast is shown as “a means to reach eternal salvation”(Mechtild) for all. Baby Jesus' unique pose and his lack of interest in his mother's breast seem to allude to his circumcision. The Holy Grail on the table prefigures the Crucifixion. The fire above the firescreen suggests the sacrifice of Jesus, as he is compared to both a sacrificial lamb and unleavened bread in relation to the burnt offering in the Old Testament. The ultimate significance of Jesus' Passion lies in the purification of the sins of all mankind. Thus, The Virgin and Child before a Firescreen, with its unique iconography, serves as a rich material for personal prayer.
Mary gave birth to Jesus, fed him her milk and raised him with love and devotion. In this sense, her breast is a symbol of the promise of salvation. In this regard, the iconographic meaning of the act of presenting her breast is associated with the theme of the Last Judgment. As seen in The Intercession of Christ and the Virgin, attributed Lorenzo Monaco (c. 1370-c. 1425), Christ exposes his side wound, as Mary lifts up her breast as intercessor. Mary's exposed breast shows her mercy and love to those who long for salvation, just as the wounds of Jesus signify his love for mankind, for which he sacrificed his life.

KCI등재

7도제 레오나르도 로레단(Leonardo Loredan)의 두 초상화

저자 : 정은진 ( Chung Eun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20-245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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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75번째 도제인 레오나르도 로레단(Leonardo Loredan, 1436-1521)을 그린 두 점의 초상화에 관한 것이다. 45도 정측면을 띠는 초상은 1501년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가 제작하였고, 측면 초상은 1501-5년 사이 빗토레 카르파초(Vittore Carpaccio, 1465-1520)가 제작하였다. 로레단의 재임기간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은 캉브레 전쟁(The War of the League of Cambrai), 디우 해전(The Battle of Diu), 아냐델로 전투(The Battle of Agnadello)를 겪은 격변기였다. 베네치아 도제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기보다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졌지만, 로레단의 도제권은 예외적으로 강력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 두 점의 도제 초상이 지닌 정치적 의미와 화가가 자신의 양식 안에서 이를 표현한 방식을 밝혀 보았다. 그간의 연구가 인물의 자세와 심리 표현에 관심을 두었다면, 본 연구는 초상화의 배경에 주목하였다. 벨리니의 파라펫은 그의 종교화에서 제대와 무덤의 상징이라면, 초상화에서는 도제의 신성함을 암시하는 장치이다. 한편 카르파초의 초상에서는 배경에 그려진 열린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에 주목했다. 플랑드르의 영향으로 그려진 이 풍경이 지시하는 장소는 바로 베네치아의 국방과 산업의 중심이 되었던 병기창이 있는 공화국의 동쪽 카스텔로(Castello) 지역이다. 결국 파라펫 뒤에 그리스도처럼 그려진 도제와 병기창을 배경으로 로마 황제처럼 그려진 도제는 단지 공화국의 엠블럼이 아니라 신성하고 강력한 권력을 지닌 존재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analyzes two portraits of Leonardo Loredan (1436-1521), the 75th doge of the Republic of Venice. One is a three-quarter portrait painted by Giovanni Bellini (1430-1516) in 1501 and the other is a profile portrait painted in 1501-5 by Vittore Carpaccio (1465-1520). During the reign of Loredan, the Republic of Venice was constantly involved in warfare, as can be seen in the battles of Cambrai, Diu, and Agnadello. The doge of Venice usually had a symbolic role, but Loredan held exceptional executive power.
Previous studies of the portraits have dealt primarily with the posture and psychological expression of the doge. In order to shed light on the political aspect of the portraits, this paper focuses on the details of the setting against which the doge is represented. For example, in Bellini's portrait, the parapet makes the doge look like Christ. It reminds the viewer of the parapet in Bellini's religious paintings, which symbolizes the altar and the sepulcher. In other words, it was used as a device to represent the divine authority of the doge.
In Carpaccio's portrait, the landscape seen through the open window in the background is notable. The influence of Flemish painting is evident in the realistic landscape. Occupying the center of the scene is the Castello area with the Arsenale di Venezia, which symbolically represents the Venetian Republic's keen interest in defense industry. Considering Venice's ambition to become a maritime empire since the thirteenth century, one might even go so far as to say that it is one of the symbols of Venetian collective identity. Set against this background, the two portraits of Loredan represent the image of the Emperor of Venice as the embodiment of heavenly authority and earthly power.

KCI등재

81880년대 초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국립미술관의 건립과 독립에의 이상

저자 : 하정연 ( Jeong-yon Ha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6-267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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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미술관(The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은 1881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국립미술관(Nation Gallery of South Australia)이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었다. 이 연구는 자치령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민족주의라는 관점에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영국의 영향에 의존하지 않고 국립미술관의 설립을 주도하여 독립국으로서의 미래를 구상하였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설립 당시의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이 글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다양한 예술적, 이론적, 제도적 이상과 선례를 어떻게 고려하였는지, 국립미술관의 가치와 목적을 어떻게 정의하였는지, 초기 컬렉션에 포함된 작품들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검토하였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영국 미술은 영국에서와는 다르게 받아 들여졌다. 이는 19세기 후반 영제국(The British Empire)과 식민지 호주 간의 특수한 관계뿐만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역사적 현상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논문은 국립미술관 건립 논의가 식민지에서 독립된 문화에 대한 열망과 독립국으로서의 이상이 형성되는 데 기여하였음을 규명하였다.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민족주의에서 시각예술과 국립미술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The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opened as the National Gallery of South Australia in 1881. Situating it in the context of South Australian nationalism, this study elucidates South Australian leadership in founding the Gallery in order to demonstrate its role in the colonial conception of an independent future. It examines the debates around the establishment, evaluating ways in which South Australians considered various artistic, theoretical and institutional ideals and sources, defined the value and purpose of a national gallery, and viewed artworks forming its founding collection. Their reception of British and colonial paintings is particularly explored to reveal colonial attitudes to the metropole, the empire―the British and as a historical phenomenon―and their colonised realm during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he article explains how the debates around the establishment of the National Gallery sustained a focus on art and its capacity to facilitate a community such as South Australia to develop a culture of its own and on an imagined future of South Australia as an independent state. By highlighting these aspects, which could be revealed or conceived only by considering visual art and building its institution, it argues for the role of art and the National Gallery in contemporary South Australian 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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