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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and Visual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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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2)~26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225
미술사와 시각문화
26권0호(2020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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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제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유전(流轉), 그리고 그 성격

저자 : 임영애 ( Lim Young-a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35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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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부여 규암면 규암리에서 2구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됐다. 그 가운데 1구는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다른 1구는 일본으로 흘러가 버렸다. 이 글은 2020년 현재 일본에 있는 '규암리 보살상'에 대한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남아 있는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여 1922년 이치다 지로가 보살상을 소장하게 된 내력을 살피고, 2구의 금동관음보살상이 함께 발견된 규암면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 규암리 보살상이 발견된 장소는 바로 보살상을 봉안했던 사찰 영역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규암리의 2구 보살상은 함께 묻혀 있었지만, 제작 시기는 차이가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의 보살상은 7세기 전반이지만, 일본의 규암리 보살상은 의자왕(재위641-660) 시대인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국립부여박물관의 규암리보살상은 X자형 영락 장식에 커다란 손을 지닌 반면, 일본의 규암리 보살상은 2줄의 U자형 천의에 적당한 크기의 손, 유연하게 몸을 구부린 진전된 형식 및 양식을 갖췄기 때문이다. 이는 수대 보살상에 초당 보살상의 특징이 더해진 것이다. 주조 기술도 훨씬 발전해 일본 소재 규암리 보살상의 경우 천의와 영락을 한꺼번에 주조하지 않고 별도로 제작해 결합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본 소재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작품이다. 광배와 대좌를 잃었고, 몇 군데 손상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 보살상은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조형미가 탁월한 한국 불교조각사에서 손꼽을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이 보살입상은 26cm 크기로 금동상 중 중형에 속하는데, 특히 백제지역에는 이 정도 크기의 금동입상의 유례가 많지 않아 더욱 귀한 예이다. 백제 불교미술은 7세기, 특히 의자왕이 다스리던 7세기 중엽이 최고 절정기이다. 안타깝게도 백제가 660년에 망하면서 백제 미술은 절정기 이후 내리막길을 맞이하기도 전에 급작스럽게 끝났다. 뛰어난 조형성과 주조 기술을 보여주는 일본 소재 규암리 보살상은 7세기 중엽 절정기에 달했던 백제 불교미술의 마지막 명작이다.


In 1907, two gilt-bronze statues of the bodhisattva Avalokites´vara were discovered in Gyuam-ri of Gyuam-myeon, Buyeo. One was designated a national treasure and is currently in the collection of the Buyeo National Museum, while the other was taken to Japan. This paper focuses on the second 'Gyuam-ri bodhisattva' in Japan. The first part of this study discusses the statue's history through an examination of all extant records, from the possession of the statue by Ichida Jiro in 1922 up until its relocation to Japan. Furthermore, an analysis of the two statues' findspot indicates that the area was once a temple intended for the enshrinement of both bodhisattva statues.
Though the two Gyuam-ri bodhisattva statues were buried together, they were not produced in the same period. The statue in the Buyeo National Museum was created around the first half of the seventh century but the example in Japan was most likely created around the mid-seventh century during the reign of King Uija (r. 641-660) of Baekje. The Buyeo bodhisattva features X-shaped ornaments as well as large hands. In contrast, the statue in Japan has two rows of distinctive U-shaped folds in the drapery of the garment and moderately sized hands placed close to the body. Based on these differences, the latter example is most likely from a later period than the former, showing greater development in form and style. In other words, the sculptural features present in the bodhisattva statues of the early Tang period are emphasized and more advanced in casting techniques than the examples of the Sui dynasty. Furthermore, with significant developments in molding techniques, the garment and ornament of the statue were cast separately and later added to the main form.
Gilt-bronze statues of the standing bodhisattva Avalokites´vara produced in the Baekje kingdom are valuable, few in number, and their precise findspots are often unknown. The Gyuam-ri bodhisattva in Japan has damage in the halo and pedestal, but its overall condition is relatively satisfactory. It is an important and rare example of remarkable aesthetic beauty i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t sculpture. Within the category of standing statues with heights of approximately 26 centimeters, the Gyuam-ri bodhisattva is of medium size, which is a rarity in the Baekje region. During the height of Baekje Buddhist art in the seventh century, the reign of King Uija in the midseventh century was the peak of Baekje art. Unfortunately, the arts of Baekje came to an abrupt end after this period. The Baekje kingdom collapsed in 660. A representative example of the exceptional form, aesthetic charm, and casting technique, the Gyuam-ri bodhisattva statue from the mid-seventh century can thus be considered the last masterpiece of Baekje Buddhis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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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에 전래된 구영의 작품과 구영 화풍의 의의

저자 : 서윤정 ( Seo Yoonju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6-71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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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의 작품은 다양한 경로와 매체를 통해 조선에 전해져 조선의 화단과 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실제로 조선에 유입된 구영의 관서가 있는 작품은 얼마나 충실하게 구영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구영의 이미지와 화풍은 어떤 층위의 작품을 토대로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이해가 실상과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당시 문화계와 화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본 논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필자는 문헌기록을 상세히 검토하여 조선시대문인들이 감상했던 구영의 작품과 그들이 그려낸 '구영상(仇英像)'을 재구성하고 조선에 유입된 구영 회화의 다양한 면모를 제시하였다. 조선에 전해진 구영의 작품은 양적, 질적인 측면에서 중국에서 유통되던 구영의 작품과 차이를 보이며 실상과는 다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비단 구영의 작품뿐 아니라 조선에 전해진 중국 회화의 질과 양에 관한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으며, 국내에서의 중국 회화수집에 관한 경향과 그 지식의 형성 과정과도 연관되어 있다. 구영 그림의 동전(東傳)과 그의 화풍에 대한 연구는 중국화의 조선 유입과 그 경로, 중국 서화 수장과 감상이라는 문제뿐 아니라, 작품의 진위 여부, 모사와 복제, 소주 지방에서 이루어진 상업 회화의 제작과 유통, 소주편과 휘주 판화의 동아시아적 확산이라는 동아시아 문화교류 현상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조선에 전래된 구영 그림과 그의 화풍에 대한 검토는 회화, 소설 삽화, 판화 등 매체에 따른 양식의 변화와 작품을 통한 화풍과 도상의 전래 문제, 새로운 화제의 전래와 도상의 선택적 변용 과정, 명대 소주의 정원과 문인 문화에 대한 조선시대 문인들의 관심을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Qiu Ying had an enormous influence on the Korean artworld since both his genuine paintings and copies and forgeries of his originals, were transferred to the Joseon dynasty via multiple routes. This study examines the following questions to provide Joseon literati's and artists' perception and understanding of Qiu Ying's painting and his style and reconsider the Chinese master's legacy and influence on late Joseon art. How were forged paintings closely copied after bona fide works of Qiu Ying? Which kinds of paintings, copies, and forgeries bearing Qiu Ying's signature and seals were available to Joseon audiences? How was the quality and quantity of Qiu Ying's works exported to Korea in comparison with his paintings circulated in the contemporary Chinese art market? Where were Joseon Koreans' reception and appreciation of Qiu Ying's artistic achievements based? What is Qiu Ying's impact on the spread of new iconography and the innovative style in late Joseon art? Through delving into the extant documents and his accomplished works, this paper investigates the painter's critical stylistic characteristics and thematic scopes, which form his legacy as an artist with unmatched versatility and technical virtuosity in beautiful-woman paintings and blue-and-green landscapes. Noting that copies and forgeries of Qiu Ying's genuine paintings that flooded the markets as well as woodblock illustrations modeled after his work served as a significant source for Joseon Koreans to understand the artist's style, this research attempts to relocate Qiu Ying's place in a transcultural context and redefine the Chinese art collections in the Joseon dynasty from multivalent perspectives.
The study offers not only vital clues to various routes from which Chinese paintings were transferred to Korea, but also explores cross-cultural exchanges in East Asia through issues in connoisseurship and art market. It also closely examines the creation of copies and forgeries, the flourishing of commercial art in the Suzhou area, and the wide circulation of Suzhou fakes and Huizhou woodblock prints in East Asia. In addition, this is pertinent to the changes of style and iconography in various visual media, the eclectic adaptation of new motifs and styles, the Joseon elite's increased interest in the garden culture of Suzhou during the M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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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송시열 초상화의 제작과 '대현(大賢)'의 이미지 구축

저자 : 이성훈 ( Lee Sunghoo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2-119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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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후기에 정계와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학자였다. 그는 1680년에는 김진규와 김창업으로부터, 1683년에는 화원 한 시각으로부터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받았다. 〈송시열 초상 초본(방건본)〉(김진규 본), 〈송시열 초상(방건본)〉(김창업 본), 〈송시열 입상〉(한시각 본)은 바로 이때 이 화가들이 제작한 초상화이거나 그것의 이모본이다. 송시열의 제자 및 문도들은 1680년과 1683년에 그가 상경했을 때 그의 초상화 제작을 계획하여 실행했다. 그들이 그의 초상화를 제작하고자 한 목적은 무엇보다 그들이 숭모하는 선사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영원히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또한 그의 사후 건립될 수 있는 원사 내에 걸어 봉안하는 것에 있었다. 한편 송시열 또한 자신의 초상화를 가지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추앙했던 주자가 평생 여러 차례 초상화를 제작하고 관련 글을 남긴 것을 본받아 1680년 이전에 이미 자신의 초상화를 직접 주문하고 자신의 초상화 관련 글을 썼다.
1680년과 1683년에 제작된 송시열 초상화에서 송시열은 심의나 포, 복건 등 유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당대에 심의나 복건은 주자를 상징하는 옷으로, 아울러 심의·복건을 포함한 유복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한 상황에서 대명의리를 상징하는 옷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이때 제작된 초상화에서 유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표현된 송시열의 이미지는 명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초야에서 복수설치의 마음을 가진 채 주자의 학문을 계승하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던 그의 철학과 신념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송시열 사후에 그의 초상화는 이모의 방식을 통해 많은 복제본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 중에는 〈송시열 초상(방건본)〉처럼 후대에 그의 문도들의 주문에 따라 부분적으로 윤색이 이루어진 초상화도 있다. 이 초상화에서 송시열은 그 복식 종류를 특정하기 어려운 건과 포를 착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입은 포는 조선시대 고사도나 성현도 등에서 고사나 성현이 입은 것과 유사한 형태의 것이다. 따라서 이 복식은 송시열을 주자를 포함한 옛 성현에 비견되는 '대현(大賢)'으로 추앙하고자 한 그의 문도들의 의사가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Song Siyeol (1607-1689) is an eminent scholar who immensely influenced the political as well as the academic world in the late Joseon period. In 1680, he received several portraits of him from scholars Kim Jingyu (1658-1716) and Kim Changeop (1658-1721), and another portrait painted by the court painter Han Sigak (1621-?) in 1683. Portrait Sketch of Song Siyeol with a Square Hat, Portrait of Song Siyeol with a Square Hat, and Portrait of Song Siyeol Standing were presumably produced during that time or a little later than this. Song Siyeol's students and disciples planned and executed the creation of his portraits in 1680 and 1683, when Song Siyeol was summoned to the capital city of Hanyang (present-day Seoul). Their purpose of producing the portraits was to preserve the appearance of their venerated teacher so that he could be forever remembered and cherished. Furthermore, it was also in preparation for hanging them inside Confucian shrines, which might be constructed when he died. Even Song Siyeol himself showed a strong interest in possessing his portraits. The Southern Song philosopher Zhu Xi (1130-1200), whom Song Siyeol revered most highly, had commissioned a number of portraits of him and wrote essays and poems for his portraits during his lifetime. In emulation of this, Song Siyeol commissioned his portraits and wrote texts about them already before the year 1680.
In the portraits dated 1680 and 1683, Song Siyeol is shown wearing the clothes of a hermit featuring Confucian robes such as simui or po and bokgeon. At that time, this kind of attire was generally associated with Zhu Xi. In addition to that, such robes were also understood as a symbol of loyalty to the Ming dynasty, which collapsed in 1644. The Manchu Qing dynasty was established after the collapse of the Ming. Thus, the portrayal of Song Siyeol as a recluse can be interpreted as an expression of his philosophy and principles: continuing the teachings of Zhu Xi and following the wisdom of the Chinese sages, while living in the remote countryside with the desire for revenging on the Qing dynasty which ended the Ming. After Song Siyeol's death, numerous copies of his original portraits were produced. Among those, there are portraits that were partially embellished upon request from his later followers. Portrait of Song Siyeol with a Square Hat is such a case. In this portrait, Song Siyeol is wearing a hat and a robe that are difficult to identify as a certain type of costume. His clothes are similar to those worn by historical figures or ancient Chinese sages depicted in Joseon narrative paintings and paintings of sages. Consequently, the clothing in these portraits of Song Siyeol shows his disciples' intention to venerate him as a great sage who could be compared with ancient sages such as Zhu 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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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 제 문제: 일본 에도시대 아미타구품인 도상의 형성, 확산 그리고 일반화

저자 : 정진영 ( Chung Jin-you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0-157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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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미타구품인'에 관한 오류를 바로잡고자 시작되었다. 필자는 아미타불의 대표 수인이라 여겨졌던 아미타구품인이 후대에 만들어진 도상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필자는 이를 위해 아미타구품인을 구성하는 아홉 가지 수인의 본래 의미는 무엇인지, 또 아미타구품인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조합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았다. 본 논문은 이 용어 및 개념이 언제부터 우리의 인식속에 당연한 것으로 이해된 것인지, 그 일반화의 과정을 추적하고자 했다.
'아미타구품인'은 아미타불상의 손 모양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어 온 도상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譯 424-442)을 포함한 어떤 경전에서도 아미타구품인의 용어, 개념, 형상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아미타구품인의 전형은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에 편찬된 불교 도상집인 『불상도휘(佛像圖彙)』(1690)에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는 헤이안시대 이래 일본 아미타불의 수인으로 가장 많이 선택되어 온 '묘관찰지인', '설법인', '내영인'이 각각 상생, 중생, 하생으로 정의되어 있으며, 양 엄지와 맞닿은 손가락을 검지, 중지, 약지로 바꿔가며 상품, 중품, 하품으로 이름 붙여졌다. 결과적으로 상생, 중생, 하생의 삼생과 상품, 중품, 하품의 삼품이 교차하게 되면서 총 9개의 수인(手印)인 '아미타구품인'이 만들어진다.
누가, 왜 이와 같은 도상을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불상도휘』서문에 실린 “이 책에서 추려 모은 것들은 ……”의 구절, 책이 갖는 백과사전적·학술서적인 성격, 그리고 『불상도휘』보다 약 10년 일찍 조성된 토쿄 죠신지(浄真寺)에 있는 구체아미타여래좌상(1664-1680년경)의 선례 등을 보면 아미타구품인은 『불상도휘』의 저자가 홀로 만들어낸 도상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즉, 이미 잘알려져 있던 도상을 저자가 옮겨 그렸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11-12세기 일본에서는 '구체아미타당' 혹은 '구체아미타불'의 조성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당시의 유행 규모와 달리 9구의 불상을 구분 짓는 도상에는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이는 에도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듯한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미타구품인의 전형 이외에도 또 다른 유형들이 확인되며, 또한 전형으로 여기는 형식도 『불상도휘』와 죠신지 불상, 단 두 건뿐이다. 우리가 아미타구품인이라 당연시하는 것 역시 적어도 당시에는 구체아미타불 손 모양의 여러 유형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만약 필자의 견해가 맞는다면 아미타구품인은 아주 특별하거나, 혹은 이례적인 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예로부터 관습적으로, 또 일정한 기준 없이 조성되어왔던 구체아미타상의 손 모양 중 하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이 도상을 '아미타구품인'이라 확신하고, 또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였던 것일까? 물론 무수히 인쇄, 배포된 『불상도휘』가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를 기준으로 불교 도상을 정립한 근대기 일본 연구자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는 다소 늦은 1970년대 후반의 연구물에서부터 아미타구품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매우 빠른 속도로 학계에서 이 용어 및 개념이 확산되었다. 특히 당시 출판된 불교미술 개설서는 아미타구품인의 일반화·대중화를 가속화시켰으며 '아미타구품인=아미타불상의 수인'이라는 통념을 만들었다. 그 결과 아미타구품인은 박물관의 유물 설명 및 문화재 해설 등에서 여과 없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일부 연구자들의 논문에서 아미타구품인에 대한 의구심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즉, 이 수인은 후대에 만들어진 인위적인 도상이므로 사찰 안내문, 불교미술 개설서, 문화재 설명문 등에 근거 없이 적혀 있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 아쉽게도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잘못된 개념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은 분명 쉽지는 않다. 지금부터라도 이를 어떻게 정정해 나갈지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This paper examines that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is newly created by the Japanese in the Edo period (1615-1868). Moreover, I try to trace the previous stages of how they were formulated and spread.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are commonly used to describe the hand gestures of Amitābha Buddha, although the term, concept, shapes and figures are never mentioned in any texts including the Amitā yurdhyāna Sūtra.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as is well known, first appeared in the Butsuzō zui (Illustrated Compendium of Buddhist Images), compiled in 1690, which explicitly contains nine different Amitābha images with the respective mudrās. Those are Dhyana Mudrā, Dharmachakra Mudrā , and Welcoming Mudrā, the three most popular hand gestures of Amitābha Buddha since the Heian period (794-1185). The book respectively redefines them as Upper, Middle, and Lower Birth, and classifies them again Upper, Middle, and Lower Level according to the finger (index, middle, ring finger) that touches the thumb tip.
It is not clear by whom and why this iconography was created. However, due to the publishing background and encyclopedic character of the Butsuzozui, it seems that it is not the author's own creation. In addition, there are nine Amitā bha statues, almost identical to those in the Butsuzō zui, in Joushinji which was built 10 years earlier. A large number of temples enshrining nine corresponding forms of Amitābha based on the theory of the nine grades of rebirth were built during the 11-12th centuries in Japan. Interestingly, contrary to the scale of the popularity, there was no distinct standard including hand gestures. The same is true of the Edo period because not only the typical type of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which we are familiar with, but also others existed. What we take for granted would be just one of the many types, thus it is difficult to say that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is very special or unusual.
Then, from when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began to be called and came to be considered special? The countless printing and distribution of the Butsuzō zui played a vital role in the creation of the term. But Japanese modern scholars who established the Buddhist iconography based on the Butsuzō zui should not be ignored. Moreover,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began to appear in late 1970s Korea. The term and concept of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spread in academia rapidly afterwards. As a result, it became the common notion that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is the most general iconography of Amitābha Buddha. Some Japanese scholars have raised questions about this iconography since the late 1960s. They argued that this was a newly created iconography without any scriptural evidence so that it should be reconsidered and reexamined. However,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is still in use in the Korean academia. It is time to revisit and reexamine the term and concept of the 'Mudrās of the Nine Grades of Amitābha Budd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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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30년대 중반 경성의 초상: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서울풍경(風景)」 연구

저자 : 성효진 ( Sung Hyo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8-189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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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서울풍경(風景)」이 1930년대 중반 경성(京城)의 도시 이미지와 맺고 있는 관계를 고찰하려는 시도이다. 「서울풍경」은 미술가 청구(靑駒) 이마동(李馬銅, 1906-1980)의 삽화와 문필가인 경안(耿岸) 서항석(徐恒錫, 1900-1985) 및 양산(凉山) 신남철(申南澈, 1907-1958)의 글로 이루어져 연재된 기사이다. 본 연구에서 중점을 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서울풍경」이 게재된 1930년대 중반은 경성의 도시 공간과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시기였다. 무엇보다 경성의 도시 공간 자체가 당시 하나의 거대한 구경거리였다. 둘째, 「서울풍경」은 독자를 염두에 둔 신문 삽화의 형태로 연재되었다. 「서울풍경」에는 신문이 발행된 시점에 신문의 독자, 즉 당대인들에게 가장 화제가 된 주제들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본고의 초점은 1930년대 중반 도시와 미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상황에서 신문 삽화의 형태로 연재된 「서울풍경」이 도시 이미지의 한 단면임을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데 있다.
「서울풍경」이 연재된 1930년대 중반 경성의 도시 공간은 볼거리가 넘쳐났다. 한성(漢城)을 상징하는 장소들인 궁궐은 경성의 대표적인 유원지가 되었다. 경성을 상징하는 백화점은 문화의 중심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이 경성에 적용되면서 1936년 경성은 그 영역이 확장된 대경성(大京城)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신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주목되는 점은 신문 간의 구독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신문 역시 독자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설 연재는 독자를 유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여겨졌다. 또한 소설 삽화는 소설 연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소설 삽화는 점차 소설만큼이나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소설에서 독립된 형태의 신문 삽화가 등장하였다.
「서울풍경」은 이례적인 예로 이마동의 삽화 및 문필가 서항석, 신남철의 글과 함께 이루어져 1935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약 한 달간 연재되었다. 「서울풍경」이 신문에 게재된 형태를 보면 삽화가 글의 부연(敷衍)이기보다는 삽화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첫 4회는 이마동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5회에서 13회까지는 이마동이 그림을 그리고 서항석과 신남철이 글을 썼다. 마지막 2회에는 이마동의 그림만 실렸다. 삽화 및 글의 특징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작품에서 다루어진 장소들 대부분은 북촌(北村) 일대에 한정되어 있다. 경성역(京城驛)조차도 봉래교(蓬萊橋)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로 인해 식민 근대 도시 경성을 상징하는 남촌(南村) 일대와 백화점은 배제되었다. 둘째, 근대화된 도시 공간에 대한 인식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삽화에 조각난 형태로 얽혀진 근대식 건물들, 넓고 평평한 도로, 높은 전신주, 거미줄 같이 엮인 전선 등이 나타났다. 셋째, 일부의 장소들은 엽서에 나타난 장소들이지만 경성역을 제외하고는 엽서와는 다르다. 마지막 4회에서 다루어진 동소문(東小門)은 거의 허물어질 듯한 모습이다.
「서울풍경」에서 확인된 장소의 선택 및 배제, 엽서와 같은 시각 매체와의 유사성 등은 도시 이미지의 형성과 닮아있다. 명소 엽서들은 당대인들에게 도시를 대표할 만한 이미지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울풍경」은 독자를 염두에 둔 한 신문 삽화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경성으로 전환되면서 도시 공간에서 과거가 된 서울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 과정은 당대인들에게 시각적인 충격을 주었으며 도시 공간에 대한 당대인들의 기억도 연속적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웠다. 서항석 및 신남철과 교유한 문인들이 경성 대신 서울을 제목으로 쓴 기사들을 통해서도 도시 공간에 대한 인식 및 기억이 확인된다. 이는 「서울풍경」과 내용적인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따라서 「서울풍경」은 1930년대 중반 경성 도시이미지의 한 단면으로 당대인들이 기억하고자 한 경성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attempts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Landscapes of Seoul,” which was published serially in the Dong-A Ilbo (Dong-A Daily Newspaper) in 1935, and the city image of Gyeongseong in the mid-1930s. The “Landscapes of Seoul” is composed of illustrations by the eminent artist Yi Ma-dong (1906-1980) and writings by Seo Hang-seok (1900-1985) and Sin Nam-cheol (1907-1958). There are two main points of focus in this study. Firstly, the growing interest in the urban space and visual culture of Gyeongseong was heightened when the “Landscapes of Seoul” was published. Secondly, the “Landscapes of Seoul” was published in the form of newspaper illustrations based on the premise of readers. The most popular themes for Koreans were chosen and dealt with in the “Landscapes of Seoul.” Therefore, the main focus of this essay is to examine that the “Landscapes of Seoul,” serialized in the form of newspaper illustrations, was a portrait of the city in the middle of the 1930s when interest in the city and art markedly increased.
In the mid-1930s, Gyeongseong called Dae-Gyeongseong (Great Gyeongseong) and the area of Gyeongseong expanded. The urban space of Gyeongseong was considered a huge spectacle. The royal palaces symbolizing Hanseong, the old capital city of the Joseon dynasty (1392-1897), were turned into representative amusement parks in Gyeongseong. The department store, symbolic of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was established as the center of urban culture. The situation was also frequently dealt with in the newspapers. The newspaper was one of the most popular visual media. The serialization of the novel was a powerful strategy to attract readers' attention. Novel illustrations painted by prominent artists of the time played a key role in creating the urban images of Gyeongseong. Along with novel illustrations, newspaper illustrations in the mid-1930s gained enormous popularity. The “Landscapes of Seoul” exploring the urban space of Gyeongseong under the title of Seoul is one of the most unusual works of art.
The “Landscapes of Seoul” is a collaborative work consisting of illustrations and writings published for about a month between June and July 1935. Yi Ma-dong drew illustrations and wrote the first four episodes. From the fifth to the 13th episodes, Yi drew illustrations and Seo Hang-seok and Sin Nam-cheol wrote episodes, while the other two episodes only featured Yi Madong's illustrations. The characteristics of the work are the following. Firstly, the places covered in the work are limited to the Bukchon (Northern Village) area. Namchon (Southern Village), the urban center of Gyeongseong, was excluded. Secondly, the perception of urban space is demonstrated, as seen in modern buildings, asphalt roads, and utility poles that are considered to symbolize modern cities. Thirdly, the places that appear on popular postcards are differently depicted in the “Landscapes of Seoul.”
The selection and exclusion of sites in the “Landscapes of Seoul” are similar to visual media such as postcards. Both newspaper illustrations and postcard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diffusion and proliferation of urban images of Geyongseong. The “Landscapes of Seoul,” aimed to attract readers' attention, shows how the urban city of Gyeongseong looked and how the visual images of the modern city appealed to the public. The use of the name Seoul, not Gyeongseong, however, important in understanding the “Landscapes of Seoul.” It was not easy to find the remaining traces of the old city of Seoul in the mid-1930s. As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rapidly developed, old villages and monuments all disappeared. What represented the old capital city of Seoul vanished. Nostalgia for the old city emerged in the mid-1930s. Therefore, the “Landscapes of Seoul” is a portrait of Gyeongseong which was overlapped with the fragmented memories of Koreans about the old city. Both the present and the past of Gyeongseong are explored in the “Landscapes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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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욕망의 방: 라이프치히미술관의 패널화 〈사랑의 주술〉과 15세기 독일의 에로티시즘 문화

저자 : 한유나 ( Yu Na Ha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0-229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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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라이프치히미술관에는 라인강 하류 지역 출신의 한 화가가 15세기 후반에 제작한 〈사랑의 주술(Liebeszauber)〉이라는 작은 회화 한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삼면의 벽으로 둘러싸인 실내 공간 중앙에 위치한 누드의 한 여성이 작은 상자에 담긴 심장 모형에 부싯돌로 불을 붙이는 동시에 스펀지로 물을 뿌리는 장면을 담고 있다. 대다수의 선행 연구들은 이 여인이 뒤쪽 문가에 기대어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성을, 당시 실제 행해지던 특정 주술을 사용하여 유혹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하였다. 브리기테 뤼만트(Brigitte Lymant)는 이 견해에 반박하며, 여성의 행위를 중세 후기 로맨스 문학에서 유행했던 '점화와 진화'의 메타포와 연결시켰다. 남성 구애자가 자신의 심장에 불꽃을 일으킨 여성에게 고통스럽다 토로하면서 그녀로 하여금 물을 뿌려, 즉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고 궁극적으로는 성적 관계를 통해 그 고통을 잠재워 달라고 애원하는 서사 구조를 시각화했다는 것이다. 본고는 뤼만트의 논의를 확장시켜, 라이프치히 패널의 주요 인물인 누드의 여성과 남성 구애자, 그리고 그들이 위치한 공간 및 세부 오브제들의 상호 관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면서, 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와 시각 구조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하였다.
먼저, 중앙의 여성 누드는 1400년경부터 독일 로맨스 문학에서 에로틱한 사랑의 화신으로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거짓 미네'의 도상을 차용한 것으로, 이작품의 초점이 인간의 성적 욕망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외부인의 출입이 가능했던 부엌 혹은 식당과 같은 공적 공간의 요소들과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사적 공간인 욕실의 요소들을 하나의 방 안에 교묘하게 교차시켰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는 여성의 신체를 열린, 또는 닫힌 공간으로 비유하는 동시대의 수사학에 기대어, 성적 결합에 대한 남성의 환상과 이것이 실현되지 못한 현실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라이프치히 패널은 두 개의 창문과 열린 문의 배치를 통해 정면을 포함한 사방에서 여성의 몸을 모두 관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감상자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의 관음증적 욕망을 극대화시킨다. 또한 의미가 중의적이거나 모호한 세부 요소들을 통해 감상자에게 끊임없이 수수께끼를 던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바닥에 웅크린 개는 중세 상징의 전통에 따라 신실함과 성적 욕망, 우측 창가의 앵무새는 순결과 방종과 같은 서로 상반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의 의미를 명시해 줄 글을 적을 수 있는 띠 장식(banderole)은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 감상자는 자신의 문화적 지식을 최대한 사용하여 난해한 그림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내러티브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에로티시즘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대하여 재조명하고 숙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A fifteenth-century female nude painting by a Lower-Rhine painter, now in the Museum der bildende Kunste Leipzig, is known by its modern title, Love Spell. The woman stands at the center of a richly furnished room while sparking fire and sprinkling water on a heart-shaped object stored in a casket. Most scholars have regarded the woman as bewitching the man at the door in the background, practicing a certain love magic. Brigitte Lymant on the other hand, convincingly argued that the woman's performance reflects a popular metaphor of “kindling and extinguishing heart” in late medieval German literature. It refers to a suitor's pain of love and his plea to his beloved to fulfill his desire. Lymant clarified the meaning of the main motif, but the general framework that connects the figures, the space, and other details has yet to be interpreted.
This paper first shows that the female nude adopts the iconography of falsche frau minne, the personification of lust, well-known in the visual culture of fifteenth-century Germany. Minne's body, twisted like a serpent's, refers to the traditional representation of Eve, which underlines Minne's character as a temptress as well as her playfulness as a queen of fools. It is also noteworthy that the room in the Leipzig panel combines the characteristics of private and public areas of a medieval house. While the woman is located in her private bathroom equipped with a basin, jug, and a mirror, the man at the door looks into a kitchen or a dining room open to visitors. The room, either as closed or opened, symbolizes the female body: the former case stands for the virtue of chastity; the latter, by contrast, alludes to the availability of sexual intercourse. The ambiguous look of the man belies that he is unable to see the woman with his physical eyes in reality, and his desire has not been gratified yet. In his fantasy, however, he penetrates the room, that is, the woman's body.
From the viewer's perspective, the Leipzig painting also activates the viewer's voyeurism in an unusual way. It creates an illusion as if the viewer could observe the woman's body from every direction―namely, through the two windows on both sides and through the back door, while the viewer already faces her body frontally. The painting further challenges the viewer with its enigmatic, multivalent details such as the dog and parrot. According to medieval symbolism, the dog stands for both fidelity and sexual desire, the parrot for both chastity and slackness. The meaning of each object cannot be fixed, as the entire composition is a combination of reality and fantasy in the first place. This ambiguity lets the viewer work on his/her own speculation, which ultimately leads to self-knowledge, the insight into his/her own understanding of eroticism. That is to say, the Leipzig panel stages not only a room of sexual desire, but also a room of intellectual desire where the viewer confronts and fathoms one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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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에서 온 카라모노(唐物): 혼가쿠지 소장 〈석가탄생도〉의 일본 내 수용과 확산

저자 : 김소연 ( Soyeon Kim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30-259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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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혼가쿠지(本岳寺)에 소장되어 있는 〈석가탄생도(釋迦誕生圖)〉는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불화의 일례로, 석가모니의 탄생과 관련된 여러 장면을 한 화면에 도해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제작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여러 점의 모사본이 제작되었다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선행 논문들을 통해 이 작품의 도상과 양식, 제작 시기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었는데, 본 논문은 이러한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석가탄생도〉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이후의 역사에 주목하였다.
〈석가탄생도〉의 첫 일본 소장자인 타카노 미치히토(高野道仁, 생몰년 미상)와 그가 활동했던 하카타(博多)라는 지역적 배경은 이 그림이 당시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고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타카노 미치히토는 16세기 말-17세기 초에 하카타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하카타를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으려고 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와 호혜적 관계를 맺은 상인 중 하나로, 〈석가탄생도〉는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카타는 카라모노(唐物) 교역의 중심지로, 다이묘들은 물론, 부유한 상인들에게까지 큰 인기를 끈 중국 물건들이 일본으로 유입되는 주요 항구였다. 미치히토의 사후에 같은 지역의 사찰인 혼가쿠지에 봉안된 〈석가탄생도〉는 약탈물인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중국 그림, 혹은 외국 그림이라는 뜻의 카라에(唐畵)로 규정되었다.
16세기 후반 이후 혼가쿠지의 〈석가탄생도〉의 모사본이 다수 제작된다. 불화사 키무라 토쿠에이(木村徳栄, 대략 1640년대-1690년대에 주로 활동)가 제작한 초기의 모사본들은 황벽종(黃檗宗) 사찰들이 소장하고 있는데 중국 문화를 그대로 번안하여 받아들인 황벽 문화의 특성으로 미루어 보아, 원본인 〈석가탄생도〉는 외국 그림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카라에, 즉 중국 그림으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석가탄생도〉의 시각적 요소들은 근세 일본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서 일본 문화와는 다른, 이질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이질성이 조선풍이 아닌 중국풍으로 규정되어 적극적인 재생산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카라모노에 대한 열렬한 관심이 정치 권력과 대외 교역, 종교계까지 영향을 미치던 당시의 하카타에서 이국의 문물에 종교적,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정교한 감식안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규정한 카라모노의 개념과 범주에 근거한 것이었다.


Housed in Hongakuji, Japan, Birth of Śākyamuni is a 15th-century Buddhist painting, produced in Joseon Korea, showing many scenes of the birth of Śākyamuni narrative. This work, transported for unknown reasons to Japan, is notable because it has been copied many times by Japanese painters. This paper focuses on the history of Birth of Śākyamuni following its mysterious migration to Japan, especially its reception and the subsequent diffusion of its copies. Both Takano Michihito (active late 16th century), the first Japanese owner of the painting, and his regional background provide a clue to understanding how Birth of Śākyamuni was received in its new environment. Then the center of the international karamono (imported Chinese artworks) trade was the port city of Hakata where various Chinese objects flowed into Japan. A Hakata merchant of the late sixteenth century, Michihito had a reciprocal relationship with Toyotomi Hideyoshi (1537-1598). Considering his connection to Hideyoshi and the fact that the painting was in a poor condition,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Birth of Śākyamuni was war booty taken during Hideyoshi's invasion of Korea (1592-1598), after which it was given to the Hakata merchant who had supported Hideyoshi during the war. After the death of Michihito, the painting was donated to Hongakuji and accepted as “kara-e,” which means “Chinese painting” or, sometimes, “foreign painting.” This labelling led to its illegal transmission being concealed, thus increasing the value of the work. It was made possible due to Hakata's commercial and international atmosphere.
Among the copies of the Hongakuji Birth of Śākyamuni produced after the seventeenth century were early copies made by Kimura Tokuei (active ca. 1640s-1690s), a professional Buddhist painter. These were owned by monasteries belonging to the Ōbaku sect. The Ōbaku sect, introduced to Japan during the seventeenth century, was characterized by its enthusiastic pursuit of Chinese culture. It seems that copies of Birth of Śākyamuni were celebrated by the Ōbaku monks―the possible commissioner of Kimura Tokuei's copies. They seem to have regarded the Hongakuji Birth of Śākyamuni as a Chinese painting. In premodern Japan, the foreignness of Birth of Śākyamuni was perceived as Chineseness, not Koreanness. This misunderstanding or reinterpretation might have led the Ōbaku monks to commission copies of the Hongakuji original. It was a way of assigning religious and artistic value to an anonymous foreign object in Hakata, where the karamono boom extended to the political, commercial, and religious spheres. This way of estimation was based on a variable and often arbitrary notion of karamono developed by the Japanese rather than precise connoisseu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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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교유와 합작: 동기창과 진계유 집단 그리고 증경과 항성모의 초상 제작

저자 : 최석원 ( Seokwon Choi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0-293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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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明末) 강남(江南)에서 문인 문예의 부흥을 주도했던 동기창(董其昌, 1555-1636)과 진계유(陳繼儒, 1558-1635)는 초상화가 개인은 물론 집단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데 중요한 상징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이 주창한 이론대로 남종화(南宗畵)적 산수화를 주로 그렸던 동기창이나 화가보다는 저술가에 가까웠던 진계유는 자신들의 초상화 제작을 당시 초상화의 명수(名手)였던 증경(曾鯨, 1564-1647)에게 일임했다. 증경은 1620년대를 전후하여 강남 예술계를 이끌던 두 거목인 동기창과 진계유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초상화가로서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동기창의 《추흥팔경도책(秋興八景圖冊)》에 권두 초상화로 삽입된 〈동기창 초상〉은 증경이 초상을 그리고 항성모(項聖謨, 1597-1658)가 산수 배경을 그려 넣은 합작 초상화이다. 동기창의 망년우(忘年友)였던 항성모는 자신이 애호했던 소나무를 배경의 주요 수종으로 그려 넣어 동기창이 은일 기간에 유지했던 지조와 예술혼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증경은 명말의 지식층 사이에서 은일하는 문사로 유명했던 진계유를 학과 함께 화로 옆에서 겨울의 추위를 견디는 은자로 묘사했다. 동기창과 진계유는 초상화의 대상이 되는 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두 문인은 주변 인물들에게 증경을 소개해 주고 초상화를 그리게끔 했으며 직접 화상찬(畵像讚)을 써 주기도 했다. 동기창과 진계유의 화상찬이 쓰인 시패(施沛, 1585-1661)의 초상화가 그러한 예 중 하나이다. 특히 전기적 글쓰기와 초상화 간의 긴밀성을 설파한 바 있는 진계유는 증경이 그린 초상화에 화상찬을 써넣는 형태로 일종의 협업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림고회도(靑林高會圖)〉가 보여주듯이 초상화는 동기창과 진계유를 구심점으로 한 집단의 유대와 동류의식을 표상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항성모와 증경의 제자인 장기(張琦, 17세기 중반 활동)가 그린 〈상우도(尚友圖)〉는 동기창과 진계유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집단의 실체를 회화적으로 증명한 작품이다. 항성 모는 증경의 유산을 계승하여 그린 〈상우도〉를 통해 동기창, 진계유 및 자신이 속한 집단의 동지애와 문예적 성취를 기념하고, 더 나아가 명청(明淸) 교체기에 맞닥뜨린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한족(漢族)의 유구한 역사를 소환해 내었다.


Dong Qichang (1555-1636) and Chen Jiru (1558-1639), two of the leading arbiters of cultural and artistic taste in late Ming Jiangnan, recognized Zeng Jing's (1564-1647) artistic prowess and commissioned their portraits. By virtue of his association with Dong and Chen, Zeng enjoyed immense prestige as a portraitist among friends of the celebrated pair as well as the broader community of Jiangnan intellectuals. Dong's portrait attached to his 1620 album of landscape paintings was a collaborative work between Zeng and Xiang Shengmo (1597-1658). It might have been Xiang's suggestion to depict Dong standing among tall pine trees, which could serve to symbolize Dong's steadfastness in political adversity. Prefacing the collection of Dong's landscapes with Zeng and Xiang's frontispiece portrait of the reclusive artist, this album monumentalizes Dong's retired life and artistic achievements of the time.
Chen was well known for cultivating the image of the lofty recluse, and Zeng portrays Chen as a resilient recluse enduring the hardship of a cold winter. The inclusion of a crane, coupled with the painting's winter setting, serves to emphasize Chen's noble character in a turbulent age. Portrait of Shi Pei is the earliest known portrait by Zeng that contains encomia by both Dong and Chen. Their portrait encomia praise Shi Pei's (1585-1661) medical skills. Zeng portrayed Shi as a physician checking his pulse. Many members of Dong and Chen's coterie in Huating, like Shi, sat for portraits by Zeng. A number of these portraits bear Dong and Chen's encomia. The literary celebrity Chen, whose encomia frequently appear on Zeng's paintings of the 1620s and 1630s, played a particularly important role in promoting Zeng's work as a portraitist.
Dong, Chen, Xiang, and their coterie seem to have perceived portraiture not only as a means of fashioning their self-images but also sharing a sense of camaraderie with their friends. The 1652 group portrait Venerable Friends, currently in the Shanghai Museum, showcases a manifestation of friendship through pictorial representation among Dong and Chen's circle. Venerable Friends, a collaboration between Xiang and Zeng's disciple Zhang Qi (active mid-17th century), highlights Dong's and Chen's intimate companionship and their pivotal role in the elite group of late Ming Jiang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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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동기창(董其昌, 1555-1636)의 대필화가 연구

저자 : 장진성 ( Chin-sung Cha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94-315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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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명나라 말기에 활동한 화가이자 서예가이며 회화이론가이다. 그는 남북종론(南北宗論)을 통해 문인화 절대우월론을 제기하였다. 동기창은 문인화를 남종화(南宗畵)로, 직업화가 및 궁정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북종화(北宗畵)로 이분(二分)한 후 그림의 절대적인 기준을 남종화로 확정하였다. 그는 문인화가들의 계보를 설정한 후 이 계보에 속하지 않는 직업화가 및 궁정화가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아울러 그는 상업화된 문인화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동기창은 이론과 실제 모두에 있어 문인화의 절대 우월론과 문인화의 정수(精髓)가 무엇인지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대필화가(代筆畫家)들까지 고용하여 밀려드는 그림 수요에 대응했던 매우 상업적인 화가였다. 즉 겉으로 그는 가장 순수한 문인화가로 자처했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지극히 상업적인 화가였던 것이다. 1962년에 발표된 치공(啟功)의 「董其昌書画代笔人考」는 동기창이 어떻게 대필화가를 고용하여 폭주하는 그림 주문에 대응했는가를 밝힌 기념비적인 글이다. 치공은 여러 문헌 자료를 검토하여 동기창의 대필화가로 조좌(趙左, 1570년경-1633년 이후), 승(僧) 가설(珂雪, 17세기 초에 활동), 심사충(沈士充, 대략 1607년-1640년에 주로 활동), 오진(吳振, 17세기 초에 주로 활동), 오역(吳易, 17세기 전반에 활동), 섭유년(葉有年, 1590-1669), 조형(趙泂, 17세기 전반에 활동)을 거론하였다. 동기창의 〈청산백운홍수도(靑山白雲紅樹圖)〉, 〈의양승몰골산도(擬楊昇沒骨山圖)〉는 조좌가 제작한 대표적인 대필화이다. 동기창의 〈의장승요몰골산도(擬張僧繇沒骨山圖)〉와 〈운장우산도(雲藏雨山圖)〉는 심사충이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동기창의 〈호산추색도(湖山秋色圖)〉는 오진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승 가설, 오역, 섭유년, 조형도 대필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전세(傳世) 작품이 거의 없어 이들이 그린 대필화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동기창이 대필화가들을 어떻게 고용했으며 어느 정도의 윤필료(潤筆料)를 지급했는지는 진계유가 심사충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진계유는 심사충에게 종이 한 폭과 은(銀) 삼성(三星, 0.3량)을 보내 동기창을 위한 대필화를 그리도록 부탁했다. 그는 심사충에게 단 하루의 시간을 주고 빨리 대필화를 완성하도록 했으며 동기창이 관서를 할 예정이니 그림에 낙관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였다. 동기창이 이들에게 준 윤필료는 거의 착취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결국 동기창은 이들을 활용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중년 이후 사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대필화가들을 고용해 그림을 제작한 것은 경제적 이윤 추구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심지어 희시(姬侍, 첩)들을 활용해 다량의 대필화를 그림 고객들에게 팔았다. 동기창은 평생을 철저히 상업적인 화가로 살았던 인물이다.


Dong Qichang is perhaps the most influential and eminent painter, calligrapher, and art theorist in late Ming China. He created the theory of the Southern and Northern schools of painting, establishing sets of canonical models for literati painters in the Southern school and harshly criticizing the practice of professional and court painters in the Northern school. He dismissed the Northern school as heterodox. The art-historical formulations through which he codified his understanding of the past laid the foundation for the creation of the myth of literati painters. Dong has been considered to be a truly high-minded artist embodying the amateur ideal in Chinese painting who was never involved in the commercial transactions of paintings. Contrary to our understanding of Dong Qichang, he was an active artist-entrepreneur producing and selling a large number of paintings for commercial purposes. He even employed ghostpainters to meet the high demand for his paintings. Qi Gong's 1962 seminal essay on Dong's ghostpainters laid the groundwork for understanding how they worked for him. Thanks to Qi's research, Zhao Zuo (ca. 1570-after 1633), Monk Kexue (fl. early 17th century), Shen Shichong (fl. ca. 1607-40), Wu Zhen (fl. early 17th century), Wu Yi (fl. early 17th century), Ye Younian (1590-1669), and Zhao Jiong (fl. early 17th century) came to be identified as Dong's ghostpainters. Nonetheless, no close examination has been made of what paintings by or attributed to Dong were, in fact, created by them.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the paintings that they ghostpainted for Dong. In all likelihood, Green Mountains, White Clouds, and Red Trees by Dong in the Guangdong Provincial Museum and Boneless Landscape after Yang Sheng, dated 1615, in the Nelson-Atkins Museum of Art, were painted by Zhao Zuo. “Boneless Landscape after Zhang Sengyou,” one leaf from the Album of Landscapes in the Styles of Old Masters in the Shanghai Museum and Concealing Clouds and Scattering Rain in the Low Chuck Tiew Collection in Hong Kong by Dong are thought to have been painted by Shen Shichong. Wu Zhen joined them in ghostpainting Autumn Colors in Lakes and Mountains in the Wuxi Museum for Dong. Although Monk Kexue, Wu Yi, Ye Younian, and Zhao Jiong acted as ghostpainters for Dong, there is no visual evidence proving how they worked for him. It must be noted that Chen Jiru (1558-1639), in a letter to Shen Shichong, sent the latter a piece of white paper together with a brush fee of three-tenths of a tael of silver on behalf of Dong Qichang. This episode serves to highlight how Dong used his ghostpainters in the business of painting. He is said to have even used his concubines to sell his paintings. Dong was a commercially successful painter with high business acu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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