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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and Visual Culture

  •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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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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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2)~24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210
미술사와 시각문화
24권0호(2019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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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 안견 필 〈설천도〉와 조선 초기 절파 화풍의 수용 양상

저자 : 장진성 ( Chin-sung Cha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23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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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견(安堅, 15세기 중반에 주로 활동) 전칭(傳稱)의 〈설천도(雪天圖)〉는 흑백 도판으로 소개되었을 뿐 그동안 전혀 학술적으로 논의되지 못했다. 이 그림 옆에 붙어 있는 별지(別紙)에는 안견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편 화면 오른쪽 중간의 가장자리 부분에는 '안견(安堅)'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이 도장은 후날(後捺)된 것이다. 〈설천도〉는 안견의 진작(眞作)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 안견파 산수화의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인 편파이단구도(偏頗二段構圖)와 단선점준(短線點皴)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설천도〉는 구도, 경물 표현 방식, 모티프들에 있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중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와 매우 흡사하다. 따라서 〈설천도〉는 단순히 겨울 풍경을 그린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가 아니라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한 장면인 '강천모설(江天暮雪)'을 그린 〈강천모설도〉라고 생각된다. 이 그림은 《소상팔경도》 화첩 중 1엽이었는데 화첩이 해체되면서 단독 그림으로 유전(流傳)되어 후대에 〈설천도〉로 명명되었다. 한편 화면 오른쪽 상단에 보이는 끝이 뾰족하고 각이 진 첨형(尖形) 원산(遠山)은 대진(戴進, 1388-1462) 및 전기(前期) 절파(浙派) 화가들의 산수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조선 초기 산수화 작품들 중 대진 화풍의 특징인 원경에 배치된 첨형 암봉들이 나타난 최초의 예는 전(傳) 안견 필(筆)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의 '만동(晩冬)'이다. 〈설천도〉를 포함해 16세기 전반에 제작된 산수화 작품들 중에는 첨형 암봉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가 존재한다. 첨형 암봉은 대진 화풍이 15세기 후반에 조선에 소개된 후 16세기 전반에 점차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시각적 증거이다. 결국 〈설천도〉는 안견파 화풍에서 절파 화풍으로 전환되던 과도기적 화풍의 양상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This essay explores how the early Zhe School manner was introduced and received in 15th- and 16th-century Korea by closely examining the style and theme of Snowy Sky attributed to the great master An Gyeon (active ca. 1440- 1470), now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Snowy Sky is currently included in an album of paintings by various painters both Chinese and Korean. The painting shows a bleak winter landscape at dusk with a twisting and turning mountain, an empty pavilion, buildings under pines, and distant peaks. The lonely and desolate atmosphere, the cold weather, and the evening sky and landscape blanketed by snow in Snowy Sky strongly recall the scene of “River and Sky in Evening Snow” or “River and Sky, Evening Snow,” one of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In style, this painting bears a striking similarity to “River and Sky in Evening Snow,” one leaf from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album, attributed to An Gyeon,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In all likelihood, Snowy Sky, once part of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album, has been transmitted as a single landscape painting since the album was split up. As a result, the painting has lost its identity as one of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sharply defined and angular peaks in the distance in Snowy Sky are often found in landscape paintings by early Zhe school masters such as Dai Jin (1388-1462). The landscape motif is one of the stylistic hallmarks of Dai Jin. Although An Gyeon's stylistic influence is clearly manifested in Snowy Sky, the appearance of Dai Jin's pictorial manner is noteworthy. Snowy Sky shows the transition from the dominance of the An Gyeon School manner to the growing popularity of the Chinese Zhe School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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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숙종과 숙종어진(肅宗御眞)의 제작과 봉안 ―성군(聖君)으로 기억되기―

저자 : 이성훈 ( Lee Sunghoo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71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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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 이르러 역대 국왕의 어진 봉안처를 중건·개수하는 작업과 역대 국왕의 어진을 이모·보수하는 작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숙종은 스스로 자신의 어진을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작하고 완성된 어진을 여러 전각에 봉안하였다. 이러한 작업들은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중단되거나 없어진 조선 초기 어진 제도를 복구한 행위로 설명된다. 그러나 특히 숙종에 의해 200여 년 만에 재개된 현임 국왕의 어진 제작의 원인을 단순히 옛 제도의 회복이란 측면에서만 파악하기는 어렵다.
숙종은 재위 2년 만에 태조어진의 이모 작업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이로부터 12년 만인 1688년에 도감(都監) 설치를 통해 이 작업을 완수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이모 작업을 마무리한 지 1년도 채 안된 시점인 1689년 3월에 조세걸(曺世傑, 1635년경-1704년 이후)로 하여금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게 하였다. 이때 그가 그 어진의 제작을 이미 몇 해 전에 계획했음을 밝힌 사실로 미루어 그는 태조어진 모사와 자신의 모습을 포착한 초상화의 도사를 거의 동시에 추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은 자신의 초상화를 제작한 지 6년 만인 1695년에 조세걸을 시켜 다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때 숙종은 완성된 어진 두 본을 후대에 선원전(璿源殿)으로 지칭된 궐내 전각 및 강화부에 세워진 장녕전(長寧殿)에 각각 보관하였다. 숙종은 태조어진의 모사 작업을 도감 설치를 통해 공개적으로 진행했으나 1689년과 1695년 두 차례의 어진 도사 및 1695년 본의 장녕전 봉안 등의 사업들은 신하들과의 논의 없이 모두 비공개로 추진하였다. 그의 재위 후반기인 1713년에 이르러서야 숙종은 도감 설치를 통해 공식·공개적으로 자신의 어진을 도사하고 봉안하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1713년의 어진 도사 사업을 통해 재임 국왕의 어진 제작 관행이 200여 년 만에 재개되고 또한 어진 제작 및 봉안 관련 의절이 새로이 마련된 점에서 이 도사 사업은 조선 후기에 어진의 제작 및 봉안 제도가 정립되고 발전적으로 계승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1688년부터 1713년까지 숙종이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어진 관련 일들이 서로 매우 긴밀히 연계된 사업들이라는 점이다.
숙종이 도감 설치를 통한 공식적이며 공개적인 절차로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고 봉안하고자 한 것은 무엇보다 그 어진을 단지 자신을 재현한 그림이 아닌 자신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즉 자신의 '대체물'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1713년의 어진 도사 시에 1688년의 태조어진 모사 시에 사용되었던 의절을 그대로 적용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게 하며 또한 신분이 낮은 화사들로 하여금 자신을 빈번하게 첨망하게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하도록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숙종은 자신의 모습이 매우 핍진하게 재현된 초상화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이 후대의 자손 및 신하들에게 정확히 전해지고 또한 그들에게 태조 및 세조와 같은 국초(國初)의 공적이 큰 열성(列聖)에 버금가는 군왕, 즉 성군(聖君)으로 기억되기를 강력하게 기대하고 염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초상화의 선원전 및 장녕전 봉안을 통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러한 자신의 기대와 염원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King Sukjong (r. 1674-1720) made serious efforts to reconstruct and repair the halls of royal portraits as well as to copy and restore the portraits during his reign. In addition, the king ordered his portraits to be painted several times and kept them in various halls. The work commissioned by him is intended to be the reinstatement of the various systems related to the production and enshrinement of royal portraits of the early Joseon period, which were suspended or disappeared around the Imjin War (1592-1598). King Sukjong tried to produce a copy of the portrait of King Taejo (r. 1392-1398) in 1676, two years after his enthronement but failed to do it. He completed reproducing the portrait by establishing the Superintendency for Copying the King's Portraits (Eoyong mosa dogam) in 1688. In the third lunar month of 1689, less than a year after its completion, he ordered Jo Segeol (ca. 1635-1704) to paint his portraits. In 1695, six years after his portrait was drawn, he asked Jo to paint him again. At this time, he kept the two completed portraits in two special halls: Jangnyeongjeon in Ganghwa Province and Seonwonjeon in the palace. He carried out these projects from 1689 to 1695 without consulting with his officials. It was not until 1713 that he was able to produce his portraits officially and openly and hang them in the two halls by establishing the Superintendency for Painting the King's Portraits.
When producing the portraits in 1713, King Sukjong officially and publicly used the same procedures and performed ceremonies that he arranged for the reproduction of Taejo's portrait in 1688, such as the establishment of a directorate and the selection of the main painter through examinations. The king actively advocated the opinions of his subjects and let court painters observe him frequently in order for them to capture a truthful likeness of him. It reveals that he wanted to impart sovereignly authority to his portrait to serve as a substitute for him. In other words, the king wanted accurate portraits of him and made them serve as substitutes for him for posterity. He was eager to be remembered as a great monarch comparable to former great kings such as King Taejo and King Sejo (r. 1455-1468) through his portraits as he and his contemporaries commemorated the two king's distinguished accomplishments. King Sukjong used his portraits as a means of enhancing his kingly way and rulership. In the late Joseon period, the literati who belonged to a particular school or faction commissioned portraits of their teachers after their passing and built shrine to hold memorial services. Enshrinement of a teacher's portrait was aimed to commemorate him as a great scholar. Local people began to build shrines for their magistrate, produced his portrait, and hung it on the wall of shrines to celebrate his remarkable achievements. Late Joseon kings commissioned court painters to paint loyal subjects regularly and stored some of the portraits in the palace or in state institutions. They thought that each of the subjects should be remembered as a 'loyal subject' to future generations. King Sukjong also hoped that his descendants would see his appearance in his portraits and then remember him as a sage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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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의 핵심은 주인공의 정체성, 곧 자의식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주역인 문인사대부와 양반관료들의 정체성은 사(士)로서의 즉자적(卽自的)인 사적 자의식과 관인(官人)으로서의 대타적(對他的)인 공적 자의식의 이원적 차원의 결이 있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이와 같은 자의식의 이원적 특성에 대응해 공적 초상화와 사적 초상화의 두 가지 결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관료의 관복상(官服像)은 공적 초상화의 성격이 강하고, 포의(布衣)의 야복상(野服像)은 사적 초상화의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양반관료들이 관복상과 야복상을 동시에 그려공적 자의식과 사적 자의식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정체성을 담고자 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의 〈분무공신상(奮武功臣像)〉과 〈학암무송상(鶴巖撫松像)〉은 18세기 초의 가장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예이다. 조문명은 이 두 가지 초상화에 각각 공적인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공명(功名) 의식과 사적인 한유자적(閒遊自適)의 시은(市隱) 의식을 담았다. 이는 조선 후기의 현실주의적 의식과 그에 따른 새로운 초상화 문화를 잘 보여준다.


The essence of portraits lies in the representation of the sitter's self and identity. Portraits of Joseon scholars and yangban (the ruling elite literati class) bureaucrats show two dimensions of identity: the self-in-itself private selfconsciousness as a person and the being-for-others public self-consciousness as an official. Public portraits and private portraits were created in accordance with such two-dimensional characteristics of self-consciousness. In general, while official uniforms in portraiture strongly represent the public dimension of portraits, poui (non-degree holders) scholars' outdoor uniforms show the private one.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a new trend in portraiture appeared. Yangban bureaucrats wanted themselves to be portrayed both in official uniforms and in outdoor uniforms and attempted to reflect in portraits their complex and multi-layered public and private personae. The most typical and representative examples are Bunmugongsinsang (Portrait of Jo Munmyeong as a Meritorious Subject for Military Achievements) and Hakammusongsang (Portrait of Hakam [Jo Munmyeong] Touching a Pine Tree) of the distinguished court official Jo Munmyeong (1680-1732) by Jin Jaehae (?-before 1735), one of the most eminent court painters of the time. In Bunmugongsinsang, Jo Munmyeong delivered his political message on how to accomplish the dream of managing the world for popular welfare and to raise his fame as a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 devoting his life to the development of the country. In Hakammusongsang, he conveyed his personal thoughts on the virtue of leisurely happiness and self-contentment in the life of a city recluse and attempted to fashion his self and identity as a hermit. These portraits show the emergence of a new type of portrait touching upon the sitter's psychological selfhood both as a public official and as a private man of let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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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김홍도 필 〈기로세련계도〉와 '풍속화'적 표현의 의미

저자 : 조규희 ( Kyuhee Cho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6-157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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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는 개성에 거주하는 노인 64명이 1804년 9월 송악산 아래 만월대(滿月臺)에서 가진 계회를 기념하여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그린 그림이다. 송악산 아래로 커다란 차일이 쳐져 있고, 그 아래로 각 상을 받은 흰 수염의 노인들이 빽빽이 방형으로 둘러앉았다. 김홍도는 행사 주인공들인 개성 노인들은 똑같은 자세로 비슷하게 그린 반면, 차일 밖에 위치한 구경꾼들이나 걸인 등의 모습은 다양한 몸짓과 자세로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주변 인물들의 현장감 있는 묘사로 인해 〈기로세련계도〉는 제목의 의미나 계회 장면에 대한 분석 없이 김홍도가 풍속화에서 이룩한 성과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만년의 대표작으로 칭송받아 왔다.
〈기로세련계도〉에 보이는 이러한 현장감과 달리 이 작품은 계회가 이미 끝난 후에 행사를 주관한 이들이 계회의 전모를 적은 서문을 가져와 김홍도에게 그림을, 홍의영에게는 기문을 부탁하여 제작된 것이었다. 홍의영은 기문의 말미에다 그림의 제목을 쓴 유한지가 그 서문을 읽고, “그 일을 마치 직접 보는 듯 대단하다고 일컬었다”고 적었다. 김홍도와 홍의영 모두 “직접 보는 듯한” 성대한 계회의 정황을 적은 서문을 토대로 그림과 글을 창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홍도의 그림 상단에 기문을 적은 홍의영은 이 그림의 풍속화적 요소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홍의영은 기문에서 이 행사를 전형적인 왕실 후원의 〈기로회도〉 장면처럼 묘사하면서, 계회의 배경이 된 만월대를 '시든 풀 폐허가 된 터(衰草荒地)'로 표현해 김홍도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홍의영의 기문뿐 아니라 이 그림의 전거가 된 실제 행사 장면을 기록한 서문에도 차일 밖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에 두 번이나 등장하는 걸인의 모습까지 “대단한” 행사 장면에 포함되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그림의 '풍속화'적 표현은 김홍도가 선택한 시각적 재현 방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논문은 이렇게 우리가 당시 계회에 대해 파악할 내용 이상의 시각적 정보를 제공하는 김홍도의 '풍속화'적 표현의 효과와 의미를 개성 세족들의 정치적, 학문적, 사회경제적 위상 변화와 관련하여 섬세하게 살핀 연구다.


Gathering of Elderly People at Manwoldae, one of the major works of Kim Hongdo (1745-after 1806) in his later years, is a painting that commemorates the meeting held for 64 elderly men of Gaeseong in the ninth month of 1804 at Manwoldae, right under Songaksan (Mount Songak). The painting depicts a huge awning put up against the background of Mount Songak under which numerous elderly men are densely seated in a square. Kim Hongdo meticulously depicts the onlookers and beggars outside the awning in various postures and gestures whilst showing all the main figures in the exact same position. Such realistic portrayal of the minor figures has essentially allowed the painting to receive great acclaim without much analysis of the title or its scene.
Despite the realistic rendering of figures in Gathering of Elderly People at Manwoldae, Kim Hongdo produced this painting according to the preface of the meeting written by those who had organized the event. While Kim Hongdo created the painting, Hong Uiyeong (1750-1815) wrote an inscription. Hong used a quote from Yu Hanji (1760-1834) who stated “the content of the preface was so vivid and great that I felt as if I were there watching.” The preface no longer exists, but it is apparent that both Kim Hongdo and Hong Uiyeong were able to create their works based on it. However, there is no mention in Hong Uiyeong's inscription of the elements of a typical genre painting. His description of the event is different from what is represented in the painting as he mentioned Manwoldae, the main setting of the event, as a site in ruin with withered grass. Hong's inscription is no more than a description of an ordinary scene in a typical Gathering of Retired High- Ranking Senior Officials. This implies that the lost preface was the source of information for both Hong Uiyeong's inscription and Kim Hongdo's painting. The lost preface could have included accurate descriptions of the figures inside the awning. But it does not seem to have described the figures outside the awning.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Kim Hongdo even paid great attention to the two beggars when he created this painting. His realistic rendering of minor figures outside the awning is remarkable. He was at liberty to add new elements to the painting. This makes the painting different from what is mentioned in Hong's inscription.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ext and image. Kim invented his own visual strategies for carefully depicting the postures and gestures of figures. In doing so, he succeeded in turning this documentary painting into a genre painting. This paper explores how Kim used his visual strategies in the making of Gathering of Elderly People at Manwoldae and how his realistic rendering of figures and landscapes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creation of a pictorial record of the event within the larger context of political and socioeconomic changes of the noble houses of Gae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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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석굴암 승려상 10구, 십대제자상(十大弟子像)인가?

저자 : 임영애 ( Lim Young-a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8-187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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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석굴암(石窟庵) 주실의 10구 승려상이 '십대제자(十大弟子)'가 맞는가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는 승려상의 수가 10구이니 큰 의심 없이 십대제자상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석가모니의 십대제자를 표현할 때는 예외 없이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을 부처 좌우에 두었는데, 왜 석굴암의 10구 승려상은 이를 따르지 않았는지, 가섭과 아난을 좌우에 배치하지 않아도 이들을 십대제자로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필자는 석굴암 10구 승려상이 '십대제자상'이 아니라 불법(佛法)을 전하는 '행도승(行道僧)'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 해석은 석굴암과 같은 시기인 8세기 중국에는 '불법을 전하고 다니는 행도승'의 시각 전통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10구 승려상이 걸어가는 모습 및 입구 쪽 좌우의 나이 든 승려상이 손에 '전법(傳法)'을 상징하는 '손향로'를 들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동시에 '행도(行道)'가 요당(繞堂), 요불(繞佛)과 같은 의미로 부처를 예배, 공양하기 위해 부처의 주위를 우요(右繞)하는 행위를 포함한다는 점도 중요한 판단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8구 승려상 역시 우요하는 형상이며, 손에는 손향로를 들고 있어 이 역시 8세기 통일기 신라 행도승의 실체를 알려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석굴암 주실 주벽의 10구 승려상을 조각하면서, 석굴암제작자가 의도한 것은 8세기 중국 유명 화가들이 선호하는 주제였던 '행도승'이었다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왜 10구인가? 이에 관해서 필자는 의상(義相, 625-702)계 화엄(華嚴)이 주목했던 '十'에 주목했다. 화엄에서 숫자 '十'은 특별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화엄 신앙은 '십'이라는 원만수(圓滿數)를 기준으로 모든 교리를 체계화했다. 석굴암이 조영되던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대에 화엄사상(華嚴思想)은 신라 불교계의 중심에 있었다. 재상이었던 김대성(金大城)은 의상의 제자인 표훈(表訓, ?-?)에게서 의상계 화엄사상을 배웠으며, 의상계 화엄학파의 거점 사찰로서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을 창건하였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본존상 뒤에 배치된 10구의 승려상, 그 위의 10개의 감실(龕室) 역시 『화엄경(華嚴經)』에서 완전한 수로 여기는 '십'을 의도한 것이라고 봤다. 10구의 승려상은 불법을 세상에 전하는 '행도승'을 화엄의 완전한 수인 '10'에 맞춰 조성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This study begins with the question of whether the ten monk images in the main hall of Seokguram are those of the 'ten principal disciples of the Buddha.' Until now, the number of monk images is ten, so they have been considered the images of the ten principal disciples with no doubt. However, in East Asia, Ka-s´yapa and A-nanda were placed to the left and right of Buddha with no exception when visually representing the Ten Principal Disciples of S´a - kyamuni Buddha. It is questionable why the ten monk images at Seokguram did not follow this iconographic principle and whether they could be viewed as those of the Ten Principal Disciples without placing Ka-s´yapa and A-nanda on the left and right sides.
I assume that the ten monk images at Seokguram are not images of the 'Ten Principal Disciples' but those of xingdaoseng (itinerant Buddhist monks) who are always on the move to convey the Buddha-dharma. In eighthcentury China, at the time when Seokguram was constructed, the theme of the xingdaoseng who made a pilgrimage to pursue the Buddha-dharma gained popularity in painting. There is a picture of ten monks walking.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old monks on each side of the entrance at Seokguram hold an 'incense burner with a handle' which symbolizes the 'dharmatransmission.' It must also be noted that the meaning of xingdao includes the act of 'circumambulating the Buddha' in order to worship and honor him. The eight monk images in the Gyeongju National Museum show the scene of circumambulation of the Buddha to the right. That each monk is holding the incense burner with a handle is also indicative of the existence of the Korean xingdaoseng in the Unified Silla Kingdom. For this reason, it is assumed that while carving ten monk images on the wall of the main hall of Seokguram, the Seokguram creators seem to have intended to create images of xingdaoseng. The xingdaoseng was one of the most popular Buddhist themes in painting in eighth-century China. In all likelihood, the creators of Seokguram must have been aware of the xingdaoseng iconography.
And if so, why are they ten? I have noticed the role of the Uisang (625-702) sect in the Hwaeom (Ch. Huayan, Avatamsaka) school emphasizing the symbolic significance of 'ten' in teaching Mahayana Buddhism. In the Hwaeom tradition, the number ten is of special importance. As is well known, the Avatamsaka faith organized all the doctrines based on the perfect number ten. In the era of King Gyeongdeok (r. 742-765) when the construction of Seokguram was being prepared, Hwaeom thought was at the heart of the Silla Buddhist world. Kim Daeseong, who was the premier under the king at the time, learned and advocated Uisang's Hwaeom thoughts from Pyohun, a disciple of Uisang. The Bulguksa Temple and Seokguram were founded as the principal temples of Uisang's Hwaeom school. For this reason, the ten monk images placed behind the main Buddha image at Seokguram and the ten stone niches above them reflect the idea of the perfect number ten in the Avatam. sakasu-tra (Flower Garland Sutra or Garland Scripture). In conclusion, the images of ten monks at Seokguram are those of xingdaoseng (itinerant Buddhist practitioners). The images of ten monks were created in line with the symbolic meaning of the perfect number ten that was greatly emphasized in Hwaeom thought and t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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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왕을 위한 유골함: 생트샤펠과 성 루이의 유골

저자 : 임윤신 ( Yim Yunsh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8-211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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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의 생트샤펠(Sainte-Chapelle)은 13세기 중반, 라틴제국으로부터 구입한 그리스도의 가시관과 십자가를 비롯한 성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다. 건축을 명령한 루이 9세(Louis IX, 재위 1226-1270)는 생트샤펠을 당시의 왕궁 바로 옆에 위치시키고 성경의 내용 중 왕권의 정당성을 강조할 수 있는 장면을 선택하여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였다. 특히 마지막 창에서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메고 파리로 들어오고 있는 왕의 모습은 실제 당시 행해졌던 의례를 묘사한 것으로 구약의 왕들의 계승자이자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로서 스스로를 위치시키고자 했던 루이 9세의 의도를 보여준다.
루이 9세는 사망 후 그리스도교의 모범적인 왕으로서의 통치를 인정받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루이 9세의 손자인 필리프 4세(Philippe IV, 재위 1285-1314)는 생트샤펠에서 성물을 수호함으로써 종교적 권위를 빌리고자 했던 루이 9세의 의도 이상으로 생트샤펠을 활용하였다. 그는 성인이 된 루이의 유해 중 머리부분을 생트샤펠로 옮겨와 안치함으로써 이곳에 “프랑스 왕국 전체의 머리(caput totius regni Francie)”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나아가, 당시에 건축물 형태의 유골함이 특히 유행하였고 루이 9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 필사본에도 이러한 형태의 유골함이 언약의 궤로 등장하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생트샤펠은 성 루이의 유골함으로 기능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거대한 크기의 유골함 형태의 이 건축물 안에 그리스도가 남긴 성물들과 함께 안치됨으로써 성 루이의 유골은 더욱 신성한 존재가 되어 프랑스 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The Sainte-Chapelle of Paris was built by Louis IX (r. 1226-1270) of France in the mid-thirteenth century to house the Crown of Thorns, the True Cross, and other holy relics purchased from the Latin Empire. Erected close to the royal palace, the chapel was richly adorned with a series of stained-glass windows that feature scenes from the Bible. The carefully chosen images, along with the precious relics, visualize the authority of the French monarchy, which is clearly conveyed in the last scene where Louis carries the Crown of Thorns on his back. It records an actual ceremony that took place when the relic was brought into Paris in 1239. Seen together, these images and objects demonstrate Louis' desire to be regarded as the successor to the Biblical Kings and as defender of Christianity.
After the canonization of Louis IX, Louis' grandson Philippe IV (r. 1285- 1314) augmented the religious and political significance of the Sainte-Chapelle. Philippe placed Louis' head relic in a bust-shaped reliquary and installed it in the Sainte-Chapelle, as a symbolic gesture to establish the chapel as the “head of the French kingdom.” In a sense the royal chapel was a grand-scale reliquary for Saint Louis. It recalls the building-shaped reliquaries that enjoyed immense popularity in France at the time. Placed in this enormous reliquary, decorated with jewel-like stained-glass windows, the relics of Saint Louis gained increased sanctity and symbolized the legitimacy of the French k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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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밧세바 또는 매춘부?: 얀 스테인의 “현대적” 역사화

저자 : 김소희 ( Sohee Kim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2-235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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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스테인(Jan Steen, 1626-1679)의 회화 중 역사화와 장르화의 장르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와 관련한 화가의 의도를 살펴본다. 본 연구는 역사화와 장르화의 경계에 선 스테인의 작품들 중 특히 밧세바 도상을 주목하였다. 그 이유는 이 도상 속 재현된 여인이 예수의 조상인 밧세바와 동시대 네덜란드 매춘부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관람자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스테인의 회화에서 밧세바는 대부분 17세기 네덜란드 실내공간을 배경으로 동시대 여인의 복장을 하고 등장한다. 고전주의자이자 미술이론가인 헤라르트 데 라이레세(Gerard de Lairesse, 1641-1711)는 그의 저서 『대 화가전(Groot Schilderboek)』에서 역사화를 화가의 동시대 풍습으로 재현한 경우를 언급하며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주제와 주제를 재현하는 세부의 불일치가 관람자에게 혼란을 야기하여 역사 주제를 동시대 사건으로 잘못 파악하게 한다는 것이 데 라이레세의 설명이다. 미술사학자 마리엣 웨스터만(Mariet Westermann)은 데 라이레세가 비판한 장르화와 역사화의 경계가 모호한 회화를 “현대적” 역사화로 칭하고 이를 스테인의 작품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다. 스테인이 데 라이레세가 동시대 화가들에게 피하라고 권고한 현대적 역사화를 의도적으로 생산했다는 사실은 웨스터만의 연구를 포함하여 많은 연구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본 문은 스테인이 회화 간 장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주제를 현대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이유를 화가로서 그의 사업적 전략의 일환으로 설명한다.


This study examines the history paintings of seventeenth-century Dutch painter Jan Steen as a crossover that features the characteristics of both history paintings and genre paintings. The Netherlands at the time had built the most advanced art markets in Europe and nurtured professional painters with specialized themes of their own creation. Dutch painters had to survive in highly competitive art markets, so they sought to develop their signature genres in order to secure their own artistic territory. Jan Steen distanced himself from the dominant trend. Steen produced a great number of paintings of different genres. He even mixed heterogeneous genre conventions into one single painting. In an attempt to interpret Steen's cross-genre works, and their implications, this study pays attention to the image of Bathsheba which frequently appears in Steen's paintings. Steen's Bathsheba can be read as both the Biblical figure and a prostitute in contemporary Dutch society. Steen portrays Bathsheba as a lady in modern garb situated in an interior setting specific to the seventeenth-century Netherlands. Many critics since Steen's time have dismissed his “modern” history paintings as a laughable case of anachronism. This study, however, reinterprets Steen's “modern” history paintings as part of the painter's entrepreneurial strategy that capitalizes on humor to appeal to potential buy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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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자기 형성의 무대: 왕립거래소의 폰스와 스트랜드의 거래소들

저자 : 진혜윤 ( Hyeyun Ch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36-255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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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스(pawns)는 16세기 후반 무역 거래를 위해 건립된 런던 왕립거래소(The Royal Exchange) 내부에 자리했던 사치품 소비 공간이다. 폰스는 거리 또는 통로에서 유래하는 이름대로 복도와 같은 상점길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실내 공간으로서 폰스가 가진 폐쇄적 성격은 사치품 소비를 통해 자신들을 차별화했던 왕족과 귀족, 그리고 17세기 초부터 런던에 급증한 신흥 부유층을 주요 소비층으로 아우를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폰스에서 이뤄진 사치품 소비는 사회지배층(social elite)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확인받기 위한 사교활동(sociality)에 가까웠다. 이 글은 그동안 1차 사료의 부재로 한계에 부딪혔던 폰스의 공간적 특수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런던의 논서치(London's Nonsuch)』(1668)에서 찾은 평면도와 사무엘 핍스(Samuel Pepys, 1633-1703)의 생생한 기록을 실마리로 사용자의 공간적 경험을 재구성함으로써 폰스가 근대 초런던에 소개한 새로운 유형의 소비문화가 지배층의 사회관계망까지 포함하는 것이었음을 밝힌다. 폰스는 사회적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알려지고 보호되는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변화하는 신사 계층의 이상이 소개되고, 구현되었던 무대였다.


The pawns refers to the luxury shopping area of the Royal Exchange, an institution established for the purpose of commerce and trading in late sixteenth-century London. As its name is deemed to mean a passageway or a corridor, the pawns was structured by the endless rows of the shops. The enclosed nature of the pawns drew not only royalty and nobility, but also the new urban gentry, who rapidly increased in London from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The shopping practice at the pawns was a new form of sociality that was instrumental in the self-fashioning of social elites. This paper seeks to understand the spatial specificity of the pawns. By examining the floor plan of the space from London's Nonsuch (1668) and the Diary of Samuel Pepys (1633-1703), it argues that the pawns was not only a stage where external markers of an elite identity were accepted, admired, acknowledged, and protected, but also where the changing notion of the gentlemanly ideal was introduced and practi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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