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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도부산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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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2)~39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335
항도부산
39권0호(2020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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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헌을 통해 본 고대 부산의 대외교류

저자 : 백승충 ( Baek Seung-chu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6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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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고대 부산의 정치체의 출현 및 삼한∼삼국시대의 대외교류의 성격과 그 추이를 살펴본 것이다. 선사시대 이래 부산은 해양성, 개방성, 그리고 낙동강을 통해 내륙과 연결하는 관문으로의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전근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이 지역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전근대 부산의 중심지는 '동래'이고, 이곳을 관통하는 온천천은 수영강과 합류하여 동남해에 맞닿아 있는 수영만에 이른다. 강과 바다를 끼고 있는 고대 부산의 생업 조건은 대내 활동보다는 대외 활동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삼한·삼국시대 고대 부산과 김해는 정치적으로 일종의 '연합'을 맺어 대외교류 활동을 주도하였다.
삼한·삼국시대 부산은 '독로국'과 '거칠산국'이라는 지역 단위의 정치체가 존재하였다. 특히 삼한 시기 즉 초기 가야 때의 부산의 독로국은 인접한 김해 구야국과 함께 '철 소재'를 매개로 한 대외적인 교류 활동인 '중계교역'의 중심지였고, 그 대상 범위는 동북아 전체를 통괄하였다. 이것은 초기 가야가 신라 보다 정치·문화적으로 앞설 수 있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4세기 들어 삼국시대의 고대 부산은 한군현의 소멸 및 삼국의 정립 속에 종래의 대외교류의 성격은 유지하지만 일본열도로 한정되는 등 점차 약화되고 내적 성장에 주력하였다. 더욱이 고구려 남정(400)의 여파로 5세기대의 부산은 고구려·신라 남정군으로부터의 정치·군사적 피해는 물론 신라의 낙동강 하류 진출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기 시작한다.
고구려 남정 이후 고대 부산의 이 같은 정황은 인접한 김해·울산·양산 등의 동향과 궤를 같이 한다. 신라 삽량주간 박제상의 해상 활동과 거도의 우시산국·거칠산국 정복담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적어도 문헌적으로 볼 때, 5세기 중반 이후 부산의 정치체인 '거칠산국'은 신라의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 해양권 행사도 신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삼국시대 김해, 부산, 양산 지역의 신라 편입 시기를 늦추어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적 관점'에서만 바라본 것으로서 '실제적 현상'이라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6세기 전반 부산에 고총고분(연산동 고분군)이 존재하더라도, 이것 자체가 신라와는 무관한 가야의 정체성을 가진 완전히 독립된 정치체의 존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즉 고대 부산과 신라의 관계에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신라의 낙동강 하류 진출과정과 동·남해의 제해권의 확보 시기, 그리고 직·간접적인 지배 방식의 변화를 세밀하게 밝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고대 부산의 정치체인 '거칠산국'의 신라에의 편입 시기를 6세기 전·중반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인접한 김해 가락국(=금관가야)의 병합(532) 시기에 맞춘 것일 뿐 특별할 것도 없는 안일한 해석에 불과하다.


This paper examines the emergence of ancient Busan political bodies and the nature and trends of foreign exchanges in the Samhan~Three Kingdoms Era, with a focus on the literature.
Since prehistoric times, Busan has been characterized by openness and oceans, and has a geographical condition as a gateway to inland through the Nakdong River. These characteristics define the historical character of Busan as well as pre-modern times.
In the Samhan and Three Kingdoms Era, Busan had regional political bodies called the Dokroguk and the Geochilsanguk. Busan's “Dokroguk” during the Samhan period, or early Gaya, was the center of external exchange activities through “iron material” along with Gimhae Guyaguk. This was a factor that could lead the early Gaya politically and culturally over Silla.
However, in the 4th century, the ancient Busan of the Three Kingdoms Era focused on internal growth and the weakening of foreign exchange in the disappearance of Hangunhyun and the establishment of Three Kingdoms. Furthermore, after the Namjeong of Goguryeo(400), Busan began to be directly affected by the political and military damages from the Goguryeo and Silla Namjeong forces, as well as the Silla's advance into the Nakdong River.
This situation in ancient Busan coincides with the political trends of neighboring Gimhae, Ulsan, and Yangsan. The maritime activities of Park Je-sang, the ruler of Silla in ancient Yangsan region, and the conquest tales of the Ushisanguk and Geochilsanguk of the island are well illustrated.
Some see the incorporation of Silla in ancient Busan as early and mid 6th century. This argument, however, fits with the merger of the Garakguk(532) and is merely an easy interpretation. At least in literature, it can be seen that since the mid-5th century, Busan's political body, Geochilsanguk, was not only influenced by Silla, but also the maritime event passed to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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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일(朝日) 문화교류의 측면에서 본 조선후기 왜관(倭館) -일본산 담배 및 담뱃대를 중심으로-

저자 : 장순순 ( Chang Soon-soo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7-7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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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산 담배와 담뱃대가 왜관을 통해서 조선에 어떻게 전해졌고 생활 문화 속에서 어떻게 투영되었는지를 조일 문화교류의 측면에서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지금까지 왜관을 통한 문화교류 연구가 주로 음식, 회화, 도자기 등에 주목한 것들이었고, 담배에 대해서는 다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15세기말 아메리카에서 서양으로 전래된 담배는 17세기 초반에는 조선에 전래되었다. 담배는 급속히 보급되고 재배되어 17세기 초부터 한반도의 절대 다수가 즐긴 기호품의 제왕으로 조선인의 일상적인 삶에서 중요한 물질이 되었다. 18세기에는 국내에서 담배의 소비가 보편화되면서 담배는 조선후기에 중요한 상품작물로 등장하였으며, 담배 수요의 증가와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힘입어 담배매매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편, 일본산 담배, 즉 지사미는 최고급 담배로 인기가 있었다. 가공 기술면에서 조선에 앞선 일본산 담배는 담배가 전파된 첫 1세기 동안 동아시아 흡연자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먼저, 일본산 담배는 1609년 기유약조 체결 이후 쓰시마의 상인들이 왜관에서 무역을 하게 되면서 왜관무역을 통한 수입되었다. 왜관의 개시 등에서 이루어진 사무역이나 밀무역의 형태로 수입되어 조선에 판매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왜관업무 수행 과정에서 선물을 통한 유입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통신사행과 문위행 등 일본사행을 통한 유입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조선에 들어오게 된 담배와 담뱃대는 서울 등에 거주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시 선물로 전해져서 국내에 유통되었고, 조선 국내에서 일본산 담배와 담뱃대는 최고의 품질로 알려져 매우 비쌌으며, 국왕이 신하에게 선물로 줄 만큼 귀한 물건으로 취급되었고, 동래지역을 비롯한 국내 장시를 통해서 유통되었다. 이러한 일본산 담배와 담뱃대의 유통은 경상도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담배에 관한 민요로 널리 불렸으며 '동래의 담바구'라는 노랫말로 불리고 전승되었다. 또한 일본 담뱃대의 영향으로 동래연죽과 부산연죽이 조선의 최고급 명품 담뱃대로 알려지고, 동래가 담뱃대 제작의 명산지로 문헌에 기록되었다. 이렇듯 동래·부산 지역의 담뱃대가 최상품으로 알려진 배경에는 왜관과 일본사행을 통해서 유입된 일본산 담배와 담뱃대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This study aims at examining how Japanese tobacco and tobacco pipes brought into Joseon through the Wegwan were projected in the lifestyles and culture of the people of Joseon from the perspective of Joseon-Japanese cultural exchange. Most studies on cultural exchange through the Wegwan focused on food, paintings and ceramics, but no studies were conducted on tobacco.
Japanese tobacco was first imported through Wegwan when merchants from Tsushima began trading from Wegwan after entered the treaty called Giyuyakjo in 1609. It is assumed that it was imported in the form of private trade with the opening of the Wegwan or smuggling for sales in Joseon. Second, it may have been brought into Korea as gifts while performing Wegwan duties. Next is inflow through envoys to Japan such as the Tongshinsahaeng(通信使行) and Munwihaeng(問慰行). Tobacco and tobacco pipes that came into Joseon were spread to others as gifts, etc. in Seoul and other parts of the nation for domestic distribution, and Japanese tobacco and tobacco pipes were known to be of the highest quality in Korea, making it very expensive. It was treated as a very valuable item in that the king would give it as gifts to vassals, and it was distributed in domestic markets such as Dongnae. Distribution of Japanese tobacco and tobacco pipes was sung as folk songs in not only Gyeongsang-do, but all around the nation. Furthermore, due to the influence of Japanese tobacco pipes, Dongnae tobacco pipes and Busan tobacco pipes became known as the most luxurious tobacco pipes of Joseon, and Dongnae was recorded in literature as a great producer of tobacco pipes. Likewise, it is evident that tobacco pipes from the Dongnae and Busan regions becoming known as the best products was due to the impact of Japanese tobacco and tobacco pipes that were brought into Joseon through Wegwan and envoys to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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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항장 부산 일본 거류지의 소비공간과 소비문화

저자 : 이가연 ( Lee Ga-yeo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9-10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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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은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고, 그에 동반하여 문화적으로도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부산에는 개항 이후 기존의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일본 거류지가 설정되었다. 이곳은 일본인의 거주와 상업을 위한 공간이었고 식민 지배자로서 권력의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거류지를 중심으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근대 새로운 문화 조류의 하나인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탄생이 그것이다. 부산의 일본 거류지는 시가지의 공간적 구조에서 거의 일본과 다를 바 없었다. 공간 구조의 변화는 도시문화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거류지에는 행정과 상업시설뿐만 아니라, 신사, 사찰, 극장 등의 문화시설이 등장하였다. 식민도시라는 것에서 불균등성이 전제되어 있지만, 부산은 조선적인, 일본적인, 서구적인 것들이 혼재된 공간이 되어 갔다. 이때 부산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고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권력관계가 접합되는 중층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은 이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근대적 욕망이 꿈틀대는 곳이기도 하였다. 거류지에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상점들로 부산은 생활의 공간에서 점차 거대한 상품 전시장으로 변화해 갔다. 이에 동반한 소비행위의 증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소비는 단순히 경제적인 현상이나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비가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을 반영하는 문화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소비행위에는 지역사회 제반의 사회, 경제, 문화적 특질들이 필연적으로 반영된다. 개항과 함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돌입하게 된 식민도시 부산에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소비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거류지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상업에 종사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어 행정, 변천정, 본정 등의 번화가에는 근대적 상업시설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패션의 선두주자 의복과 여러 생활 잡화를 파는 가게, 일식·양식 등 이제까지 쉽게 접하지 못한 전문음식점들이 그 거리를 가득 매웠고,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새로운 소비문화가 창출되었다. 상점들은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화려한 장식과 상품진열, 경품행사, 바겐세일 등의 영업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렇다면 이 소비문화의 향유자는 누구였을까. 분명한 것은 소비공간과 소비문화를 이야기할 때 향유자는 식민자이고 원주민은 여기에서 완벽히 소외된 자들이라고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식민지 도시는 필연적으로 식민자와 원주민들의 '섞임'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만을 부각하는 것 또한 한계가 있다. '섞임'에는 서로에 대한 '경계'와 '배제', 그에 따른 '불균등성'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식민성을 담보한 근대적 소비문화의 발전은 시작부터 불균등 할 수밖에 없다.


With the opening of the port in 1876, Joseon had significant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changes. And culturally, there was a wind of change. Since the opening of the port in Busan, a Japanese settlement has been built around Choryang Waegwan[초량왜관]. This was a space for Japanese people's residence and commerce and a place of power as a colonial ruler. Nevertheless, cultural changes began to take place around this place. It is the birth of a modern capitalist consumption culture. The Japanese settlement in Busan was similar to Japan in the spatial structure of the city. The change in spatial structure has affected the entire urban cultural life. In addition to administrative and commercial facilities, cultural facilities such as shrines, temples and theaters were featured here. A colonial city is predicated on being Unequality. Busan, however, has become a “mixed space” with a mixture of shipbuilding, Japanese and Western. At that time, Busan was a place where tradition and modernity coexist and the power relations of the colonizers and the native was created. But most of all, it was also a place where modern desires were stirred beyond all this. With many stores located in the Japanese settlement , Busan gradually changed from a place of life to a huge products exhibition hall. Thus, the increase in consumption was a natural phenomenon. Consumption is not just an economic activity, but a cultural phenomenon that reflects the time and space in which consumption takes place. In the Japanese settlement, many Japanese engaged in commerce. The streets were filled with restaurants that were not easily accessible until now, such as clothes, shops that sell various daily miscellaneous items, and Japanese and Western restaurants. These created a new culture of consumption. Shops have attracted people's attention by doing business activities such as fancy decorations, product promotions, prize giving events and bargain sales to make more profit. Then, who enjoyed this consumer culture most? What's clear is that when talking about consumption space and consumption culture, it can't simply be dichotomous: It can't the enjoyer are the colonists and the natives are the completely marginalized. Colonial cities inevitably have the “mixion” of the colonists and natives. But there is also a limit to highlighting this only. This is because there is clearly a 'boundary' and 'excluding' of each other and an 'unequality' accordingly. In this regard, the development of modern consumer culture based on colonialism is unequal from the begi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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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산 출토 적색마연평저호의 검토

저자 : 배진성 ( Bae Jin-su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7-13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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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부산지역의 청동기시대 분묘는 약 50여기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고 종류도 다양하며, 대규모 분묘군도 확인되는 등 이전에 비해 자료적 여건이 나아지고 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는 석관묘의 가장 큰 특징은 단벽 쪽에 부장칸을 설치하고 적색마연평저호 한 점을 부장한 점이다. 이 토기에는 마연과 목리가 보이며, 기형은 후기의 적색마연호에 일반적인 원저가 아닌 평저라는 점이 특이하다. 태토는 전형적인 적색마연토기에 비해 정선도가 떨어지며, 적색마연토기에 공렬문이 시문되는 점도 특이하다.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적색마연토기는 한반도 내에서 부산지역에서만 확인된다. 분포의 중심은 현재의 부산 도심에 해당하는 수영강일대이며, 강서구 일대까지 분포범위를 넓혀 볼 수 있지만 동쪽의 기장지역에는 분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함안지역부터 강서구까지 분포하는 함안식적색마연호와 대비하는 의미에서 부산식적색마연호라는 형식명을 부여할 수 있다.
부산지역 청동기시대에 대해 주거지의 분포를 통해 송국리문화와 검단리문화가 공존하는 점이지대라는 견해가 있고,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특징이다. 그러나 타 문화의 주변부적인 특징보다는 부산만의 독자적인 특징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부산식적색마연호인 적색마연평저호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의 중심권역은 송국리형주거지와 울산식주거지가 모두 확인되는 동시에 적색마연평저호의 분포권에서도 중심부에 해당하는 수영강 일대로 판단된다. 특히 대규모 분묘군이라 할 수 있는 온천2동유적에서 고품질의 부산식적색마연호가 출토되는 점에서, 수영강 일대 중에서도 현재의 온천동은 청동기시대 후기 부산지역의 중심적인 취락지일 가능성이 높다. 기존의 점이지대론, (공렬문)적색마연평저호, 수영강 일대가 중심권역이라는 점을 통해 앞으로 청동기시대 후기의 부산지역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About 50 Bronze Age tombs have been identified in Busan. As the types of tombs are diverse and large groups of tombs have been identified, data conditions are better than before. Most of the tombs are stone coffins. Its biggest features are separate space installed on the side of the wall and red burnished jars. It is particularly unusual that bottom of these red burnished jars are flat. These red burnished jars are not visible in other areas and are only found in Busan. These pottery are mainly distributed in Suyoung River within Busan. It is also distributed in Gangseo-gu area in the west, but not in Gijang area in the east. Red burnished jars, which shows this local characteristic, can be called Busan type red burnished jar in contrast to Haman type red burnished jar, which distributes to Gangseo-gu.
As for the characteristics of Busan's Bronze Age, views are growing that it can be seen as a transition belt because both Songguk-ri Culture and Geomdan-ri Culture are visible. There is no denying that the mix of dwellings of both cultures is a feature of Busan's the late Bronze Age. However, it is Busan type red burnished jars that represents the late Bronze Age in Busan. Its central area is determined by Suyeong River area, which is the center of distribution of red burnished jars, while both Songguk-ri type house and Ulsan type house are identified. It is necessary to recognize Busan in the late Bronze Age through transition belt, Busan type red burnished jar, and Suyoung River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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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저자 : 선석열 ( Seon Seok-yeol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3-16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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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위서동이전』에 보이는 삼한시대의 독로국이 동래 즉 부산에 위치하는가 아니면 거제도에 위치하는가를 살펴보았다. 거제도와 부산은 모두 왜와 경계를 접하며 가장 가깝기 때문에 독로국의 위치비정에 대해 논란이 지속되어왔다. 독로국 거제설은 정약용의 지리고증에서 상군의 음차인 두루기가 독로국과 비슷함을 근거로 하고 이를 지지해왔다. 즉 한국고대어에서 독로는 받침이 발음이 되지 않으므로 도로 흑은 두로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라 왕경 6부의 명칭가운데 ○탁부라는 발음의 사례로 보아 신라어에서 이두의 자음 받침을 구사하였던 점과 한국고대어와 조선시대어가 같다고 보는 해석의 시각은 잘못이다. 당시의 거제도는 사등 또는 사도도라고 불렀다. 거제도의 경우도 문무왕 때에 설치된 상군과 경덕왕 때에 개명된 거제군, 그리고 부산의 경우 본래의 명칭인 거칠산국과 경덕왕 때에 개명된 동래군은 음운학적으로 연결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의 군현 명칭 개정은 경덕왕 때를 전후하여 이두식 표기에서 한자식 표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군현 명칭인 거제도의 상군과 개명된 거제군 그리고 거칠산국과 개명된 동래군은 음운학적으로 연결지울 수 없다. 고고학적 자료로 보면 거제도는 읍락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며 문헌 기록으로 보면 6세기 중엽 이후부터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다. 반면에, 고대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의 두 측면으로 보면 부산지역은 삼한시대부터 나라가 존재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금관가야와 주축을 이루어 가야권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거칠산군으로 편제되었고 해양제사처인 형변이 있었던 점에서 남해항로나 대왜교류의 중요한 해양거점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따라서 독로국은 부산에 있었다고 결론짓는다.


This study examined whether Dokroguk, which is seen in the Weishu Dongyizhuan(위서동이전), is located in Dongrae(Busan) or in Geoje Island in the Samhan period. Since both Geoje Island and Busan are closest to the Japanese archipelago, the controversy persisted. over the location of Dokroguk.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Geoje Island was called Sanggun, which is pronounced as a Durugi. Jung Yak-yong was based on the similarity of pronunciation between Durugi and Dokroguk, and other researchers have supported it. In other words, in Korean ancient language, the Dokro insisted that it should be read in Doro or Duro because the consonant support is not pronounced.
However, in the case of the pronunciation of 'Takbu' among the division names of the Silla Dynasty, it used the consonant support in Silla language. It was wrong to say that the Korean ancient language and the Joseon Dynasty were the same.
At that time, Geoje Island was called Sado or Sadodo. Geoje Island was called Sanggun during the reign of King Munmu, and was renamed Geoje during the reign of King Kyungdeok. And Busan was originally called Geochilsanguk, and it was renamed Dongrae during the reign of King Kyungdeok. Their nominations are phonologically uncorrelated. Because the amendment of the name of the county changed from Yidu to Chinese characters before and after the time of King Kyungdeok.
Archaeological data show that Geoje Island is not even within the size of the town, and it has existed historically since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On the other hand, in terms of ancient literature records and archaeological data, the Busan area has existed since the Samhan period.
By the time of the Three Kingdoms, the Dokroguk had established a strong force in the Gaya area, with the main axis of the Geumgwan Gaya. After the merger into Silla, it was organized as Geochilsangun and there was Hyeong-Byeon as maritime ceremony. In this fact, the Dokroguk played a role as an important marine base for the exchange of Namhae Sea routes and Japan. Therefore, it is concluded that the Dokroguk was in 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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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임진왜란 시기 부산포의 위상과 해전

저자 : 김강식 ( Km Kang-sik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9-20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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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시기에 부산진성전투와 부산포해전이 전개되었던 釜山浦는 임진왜란전부터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으로서 해상 방어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입장에서 부산포는 조선에서 일본군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본국과의 연락을 위한 운송 거점으로서 중요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 첫 전투였던 釜山鎭城을 침략하여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순차적으로 부산포로 상륙하여 한성으로 진격하였지만, 전선이 확대되자 일본 본국과의 연락 기지이자 병참 거점으로서 부산포를 적극적으로 장악할 필요성이 있었다.
1592년 9월 1일 전개되었던 부산포해전은 부산포 일대가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군의 교두보와 병참 기지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일본군의 근거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전투였다. 때문에 이순신의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해양이 아니라 포구 안의 적진으로 직접 뛰어들어 전투를 수행하는 위험을 감수하였다. 부산포해전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두 수군들이 연합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로서 임진왜란 시기의 전세를 바뀌게 할 만큼 획기적인 승리였다. 부산포해전의 패배 이후 일본군의 수군은 서해로의 진출이 불가능해졌으며, 동시에 육군의 진출도 어렵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한반도 남단에 고립되면서 강화회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일본군의 군량 공급지와 보급지를 공략하여 승리함으로써 회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부산포해전은 임진왜란 시기의 여러 해전 중에서 일본 전선을 많이 쳐부순 대첩 중의 하나였으며, 일본 수군의 기동력을 약화시켜 전쟁사 전체의 흐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였다. 이에 부산포해전은 임진왜란 4대 해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후대에 군수전에서의 승리 때문에 부산포대첩으로 평가 받기도 하였다.


Busan-port(釜山浦), which had the battle of Busanjinseong(釜山鎭城) and the naval battle of Busan-port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in 1592, was the main headquarters of the JwaSooyoung(左水營) of Gyeongsang-do even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For Japan, which caused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in 1592, Busan-port was important as a transportation hub for securing a bridgehead in Joseon and contacting Japan. First, on April 14, 1592, Japan attacked and occupied Busanjin, the first battle of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in 1592. After that, the Japanese army gradually advanced to Hansung after landing at Busan-port, but as the front expanded, it actively controlled the Busan-port as a liaison base and logistics hub with its home country.
The naval battle of Busan-port, which took place on September 1, 1592, was a necessary battle to weaken the base of the Japanese army when the area of Busan-port was a bridgehead and a logistical base for the Japanese arm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Therefore, Yi Sun-shin's combined fleet of Joseon's Sooyoung took the risk of jumping directly into the enemy camp inside the port and carrying out the battle. The naval battle of Busan-port was such a landmark victory that the two naval forces of Gyeongsang and Jeolla combined to win a major victory that the war was fought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After the loss of the naval battle of Busan-port, the Japanese military became unable to make inroads into the West Sea, while at the same time making it difficult for the army to advance. As Japan became isolated at the southern tip of the Korean Peninsula, it was forced to stay away from the peace talks.
In Joseon, on the other hand, the Japanese military could gain a foothold for recovery by targeting supply and supply areas of the armed forces. The naval battle of Busan-port was one of many naval battle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in 1592, and it greatly affected the flow of the entire history of the war by weakening the mobility of the Japanese navy. As a result, the naval battle of Busan-port can be regarded as one of the four major naval battles of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in 1592, and was also regarded as the a sweeping victory of Busan-port for later generations. Because of the victory in the naval battle of Busan-port, Joseon was able to win the munitions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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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후기 왜관요의 자원 수급

저자 : 허현정 ( Heo Hyunju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5-2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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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요(倭館窯)는 임진왜란 이후 왜관에 설치되어 대마번(對馬藩)의 구청자기를 제작하였던 가마이다. 임진왜란 이후 왜관은 절영도에 설치된 뒤 두모포, 초량으로 이전되었다. 왜인구청등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두모포 왜관 때 처음으로 왜관요를 운영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 왜관요는 이전에 왜관 밖에 설치되었으나 이후 왜관 내부로 들어간 것으로 적혀있다.
대마번에서 개요를 요청하는 서계를 보내고, 이를 동래부사가 장계로 경상감사를 통해 예조로 보내며, 예조에서 이 개요를 승인하였을 때 비로소 왜관요가 운영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마번은 왜관요에서 사용될 도토와 약토, 땔감 등을 함께 구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기장 및 옹기장도 요청하여 왜관요에서 원활히 도자기를 만들 수 있도록 안배하였다.
자기를 제작하는 인원은 일본에서 구청한 조선인 사기장, 옹기장, 일꾼에 더하여 일본에서 파견된 도공두, 화공왜, 번조왜 등까지 포함되었다. 이들의 임금은 대마번에서 지급했다. 주원료인 도토는 경상도 진주, 하동, 곤양, 경주, 울산, 김해 등지에서 공급하였으며, 대마번에서는 원료의 양, 종류, 생산 지역 등을 선별하여 구청했다. 연료도 이와 마찬가지로, 대마번에서 연료를 구청하면 이를 받아 조선 왕실에서 왜관요에 필요한 연료를 제공했다. 주 연료인 땔감은 부산지역에서 생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상도 도민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본고에서는 왜관요의 운영과 도자기의 생산을 집중적으로 고찰하여 왜관요 운영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한다.


Waegwanyo was installed in Waegwan during the Joseon Dynasty. And made pottery for the order of Demabun.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Waegwan was installed in Jeollyeong Island and relocated to Dumopo and Choryang. If you look at the records of Record of Japanese' Requests(倭人求請謄錄) there is a record of running Waegwanyo for the first time during the Dumopo Waegwan. The records show that Waegwanyo was previously installed outside the Waegwan, but later inside the Waegwan.
The Japanese side sent a document asking for the opening of the waegwan kiln, which was sent by a Dongnae adverb to Seoul. Waegwanyo was only operated when the Yejo(禮曹) approved it. In the process, Japan sought the clay, medicinal soil, and firewood to be used in Waegwanyo. In addition, a potter of Joseon was also requested to arrange the pottery in Waegwanyo to be made smoothly.
The number of people who produced themselves included potters and painters dispatched from Japan in addition to the Korean potters and workers requested from Japan. Their wages were paid in Japan. The main ingredients of the soil were supplied from Jinju, Hadong, Konyang, Gyeongju, Ulsan and Gimhae in Gyeongsang Province, and the amount, type, and production area of the soil were selected in Japan. Likewise, fuel was given when it was requested from Japan and provided the fuel needed for Waegwanyo in Joseon. Firewood, the main fuel, was produced in the Busan area. It is assumed that the residents of Gyeongsang Province were mobilized in the process. In the paper, the operation of Waegwanyo and the production of pottery are intensively considered. It seeks to identify the substance of the op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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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76년 '개항'의 개념적 의미와 역사적 성격

저자 : 전성현 ( Jeon Sung-hyu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1-28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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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이라는 용어는 1876년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 체결과정에 비로소 사용된 새로운 용어였다. 그렇다면, 이 용어가 지닌 개념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를 위해 개념사 연구방법론 가운데 하나인 '의미장' 분석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미장 분석에 의하면, 개항은 만국공법에 기초한 조약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자유로운 통상, 거주, 통행이 가능한 공간과 그에 따른 외교공간의 출현이 가능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의미는 1876년 개항을 통해 일부 관철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뒤늦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의미는 개항의 개념 속에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편, 1876년 조선의 개항을 둘러싼 조일 간의 조규 체결과정을 살펴보면, 개항의 역사적 성격도 확인할 수 있다. 개항을 규정한 조규 등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일본에 의해 요구되었지만 강제적으로 체결되었다거나, 일본의 힘의 우위 속에서 조선에 불평등하게 체결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측은 이미 그리고 어느 정도 일본의 요구와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비가 완벽하지 않았더라도 가능한 한 조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 개항을 규정한 조일수호조규와 그 부속 문서들에서는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지도 조선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개항, 즉 부산의 개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개항을 1407년으로 올려봐야 한다는 주장은 그 의미와 성격에서 역사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07년 개항설의 첫번째 근거가 개항 개념의 일반화와 탈시간성이며, 두 번째 근거가 1876년 개항의 강제성과 불평등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한다면, '개항'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근대적 개념이며 그 의미도 만국공법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전근대의 역사적 상황을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1876년 개항의 성격을 강제성과 불평등성에 두는 것도 단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입장에서 1876년 개항은 일본의 요구이긴 하지만 최대한 자국의 이해를 보장하려고 하는 움직임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The term 'open port' was not used before 1876. In other words, the term open port is 'modern language'. Then, what is the historical meaning based on the conceptual meaning of this term? It is necessary to look into 'the semantic fields', one of the research methodology of conceptual history. In this way, the open port was made by a treaty based on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萬國公法). Also, it can be said that it has historical meaning that free space of trade, residence, and passage and the appearance of diplomatic space accordingly. Of course, this meaning was partly achieved through the open port in 1876, but the rest was not so and it was done over time. However, such meaning continued in the conceptual meaning of the open port.
In addition, the treaty concluded in the period around 1876 was not by Japanese forced force or by unequal conclusion to Joseon, as it has been known so far. The Joseon side had already been aware of Japan's intentions to some extent. Even if there was not enough preparation for him, he responded as actively as possible. Therefore, in the process of signing the treaty surrounding the open port, we tried to ensure our own equality by responding to the unilateral interests of Japan as much as we prepared. The open port was done in the same way.
If so, the claim of '1407 Opening Port', which is currently being raised in some parts, is because it misunderstood the conceptual meaning of the opening port and the nature of the opening port in 1876. Again, 'open port' is a modern language and its meaning is also based on international law, so it can not be used as a concept referring to the historical situation of premodern times. In addition, the open port in 1876 can not define the personality only in the negative aspect of coercion and inequality. Rather, it can be said that there was a strong movement to guarantee independence and equality from the standpoint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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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무형문화재 정책 변화에 따른 <동래 기영회>의 무형문화재적 가치

저자 : 김형근 ( Kim Hyung-ku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1-32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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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무형문화재 정책 변화, 더 정확하게는 '지정 범주'의 확대로 인하여 그간 무형문화재로서 검토되지 않았던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를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청의 정책 변화에 따라 부산시 또한 향후 부산시무형문화재 신규 지정변화 필요성이 있다. 이에 '동래 기영회'를 하나의 샘플로 삼아 논의를 진행하였다.
지금까지 국가 및 시도에서는 전통적으로 공연 및 기능을 무형문화재로 삼아왔지만, 최근에는 전통지식, 구전전통, 관습 등의 범주가 유네스코의 영향으로 추가되었다. 본격적으로 최근의 국가무형문화재에서 신규로 지정된 종목들은 이 분야들이며, 향후에도 이 분야의 지정이 활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 인하여 시도에서도 이러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하여 확대된 영역에 맞는 위원회 인적 구성과 예비 종목에 대한 리스트업(list-up)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동래 기영회는 1846년(헌종 12년) 노년의 동래부 퇴임 이서와 무임들이 조직하여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계(契)이다. 구체제가 무너지는 갑오개혁과 국권을 침탈당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점차 공적 역할 감당하면서, 오늘날까지 동래지역의 오피니언리더(opinion leader)그룹으로 지속되게 된다. 그 역할은 의례, 교육, 사회·경제, 문화 등 한 지역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치고 있다. 이런 동래 기영회의 역할은 새롭게 확장된 무형문화재 범주 중 '의식주 등 전통적 생활관습'에 부합됨을 밝혔다.


This paper was written to bring attention to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which has not been considered as an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due to the change in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policy, or, more precisely, the expansion of designated categories.
As the policy of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designates and manages national intangible cultural heritages, Busan also needs to change the designation of new intangible cultural heritages located in the city. Thus, the discussion is based on the example of the “Dongnae Kiyounghoe(耆英會),.”
Up to now, countries and cities have traditionally used performances and functions as intangible cultural heritages. Recently, however, categories such as knowledge and practices concerning nature and the universe, oral traditions and expressions and social practices have been added due to the influence of UNESCO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These categories have been newly designated as national intangible cultural heritages in earnest, and the designation of these categories is expected to be active in the future. This is why it is necessary for cities and provinces to prepare for future changes. To that end, the researcher stressed the necessity of listing the committee's human resources and the list of preliminary categories to the expanded area.
Dongnae Kiyounghoe is a kye (契) that has continued to this day. It was organized in 1846 (King Heonjong's 12th year) by Dongnaebu(東萊府)'s elderly retired Yiseo(吏胥) and Mooims(武任).
The group eventually played a public role in the Gabo(甲午) Reform, when the old regime collapsed, an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undermining the sovereignty. It has continued to serve as the opinion leader group in Dongnae. The role of the group spans almost all sectors of the community, such as rituals, education, socio-economics, and culture. The role of the Dongnae Kiyounghoe was found to be in-line with “traditional life practices, including food, clothing, and shelter” among the newly expanded category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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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제강점기 손진태 채록 부산지역 민요의 성격과 의의

저자 : 박경수 ( Park Kyung-su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21-35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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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제강점기에 손진태(1900~1960년대 중반)가 조사, 채록한 부산지역민요 자료들을 여러 문헌에서 찾는 작업을 한 후, 이들 부산지역 민요 자료가 갖는 성격과 의의를 고찰하는 목적에서 진행된 것이다. 손진태가 조사, 채록한 부산지역 민요 자료는 ① 문예지 『금성』(1924. 1~2)에 '손중자(孫重子)'란 필명으로 발표된 14편, ② 김소운이 편찬한 『언문조선구전민요집』(1933)에 수록된 83편, ③ 미발표 유고 원고 수록 민요 자료 50편, ④ 민요론에서 인용된 민요 자료 17편 등으로 전체 164편이 된다.
손진태가 조사, 채록한 부산지역 민요는 대부분 1922년 8월부터 1931년 4월 이전까지 걸쳐 있다. 이들 자료는 당시 부산지역 민요의 전승 국면과 특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소중한 자료이며, 대부분 손진태가 직접 현장조사를 통해 취득한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손진태의 민요 채록 방식이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선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방언 그대로 채록한 점, 음보를 구분하여 정연하게 채록한 점, 방언이나 어려운 어휘에 주석을 붙인 점, 제보자를 명확하게 밝힌 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손진태가 조사, 채록한 부산지역 민요 자료는 또한 당시 '동래군 구포'에서 주로 채록한 것들이다. 이들 중에서 <모심기 노래>는 1920년대 초반 전승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며, <아리랑>은 일제강점기의 세태를 흥미롭게 반영하고 있는 노래로, 일명 '구포아리랑'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장타령>과 <각설이타령>도 구포를 둘러싼 지역의 장소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민요로 역시 '구포 장타령'과 '구포 각설이타령'으로 부를 수 있다. '캐지랑이'로 채록된 <쾌지나칭칭나네>도 경상도의 대표적인 민요의 하나로 당시 부산지역에서 불린 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노래로 주목된다.


I first searched for various folk songs collected by Sohn Jin-tai (1900-1960s) in the Busan a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Next, I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these folk songs. The folk song materials collected and surveyed by Sohn Jin-tai are as follows. ① 14 song materials sung by the pen name 'Sohn Jung-ja' in the literary magazine Keumsung, ② 83 song materials in Korean Oral Folk Songs(1933) edited by Kim So-un, ③ 50 song materials in unpublished note manuscript collecting folk songs, ④ 17 songs cited in folk songs theories. These folk songs are 164 pieces in total.
Most of the folk songs in the Busan area surveyed and collected by Sohn Jin-tai ranged from August 1922 to before April 1931. These songs are very valuable materials for understanding the characteristics of folk songs in Busan, and most of them are meaningful because they were obtained by direct field survey. It is also worth noting that Sohn Jin-tai's folk song recoding method is quite advanced at the time. We can see folk songs as written in tongues, neatly divided by musical scores, annotated dialects or difficult vocabulary, and clearly identified folk song singers.
The folk song materials collected and surveyed by Sohn Jin-tai were also collected mainly from 'Dongrae-gun Gupo'. Among these, < Arirang > is an interesting song that reflects the conditions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needs to be reexamined as 'Gupo Arirang'. < Jang-taryeong >(i. e. Song of Markets) and < Gakseoli-taryeong >(i. e. Song of Beggar) are also folk songs that show the placeness of the area surrounding Gupo. < Quejinachingchingnane > is one of Gyeongsang-do's representative folk songs, and it is noted as a song that shows the song sung in Busan.
Sohn collected and discussed on Children's Oral Songs and Female Folk Songs with special interest. The folk songs surveyed and collected by Sohn Jin-tai are very important evidences for understanding the patterns and characteristics of Children's Oral Songs and the characteristics of narrative folk songs in the 1920s and early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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