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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도부산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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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1962)~37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307
항도부산
37권0호(2019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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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산지역 3·1운동 연구 성과와 전망

저자 : 강대민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6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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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1운동의 사회 · 경제적 배경 -동시대 원인분석과 부산의 지역성-

저자 : 배석만 ( Bae Suk-ma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5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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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3ㆍ1운동의 사회ㆍ경제적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동시대의 관련 분석과 부산의 지역적 배경 요인들을 검토해 본 것이다. 3ㆍ1운동이 한창이던 이른 시점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 3ㆍ1운동이 발발한 사회ㆍ경제적 배경으로 기존 식민통치의 문제, 민족차별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동을 바라보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지배자의 인식에는 사회적 차별은 있었으나 경제적 수탈에 대한 인식은 희박했다. 다이쇼데모크라시를 주도한 민본주의자들 조차도 경제와 관련해서는 근대와 발전을 보고 있었다. 반면 3ㆍ1운동으로 폭발한 조선 사회는 정치 폭력, 사회 차별에 더하여 경제 수탈에 대한 인식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차별만을 바라보는 식민지 지배자와 달리 3ㆍ1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으로서의 '차별'과 '수탈'이라는 두 축은 이렇듯 운동이 진행되던 동 시기에 식민지 피지배자에게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인식이었다.
부산만이 갖는 특성은 압도적 규모의 일본인이 거주하는 도시공간과 그들의 사회ㆍ경제적 주도성,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 놓은 어느 지역 보다 앞서는 식민지 근대와 자본주의의 발전이다. 전자는 민족 차별의 강도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서, 이에 대한 조선인의 분노와 저항도 보다 높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후자는 일제에 저항하는 기업가와 노동자를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빠르게, 대규모로 성장시켰다. 백산상회의 기업 활동과 3ㆍ1운동기에 이미 활발했던 노동자의 항일동맹파업이 이를 뒷받침한다.


This paper examines contemporary analyses on the social and economic background of March 1st movement and regional background factors specific to Busan. In the midst of March 1st movement, both the governing and the governed raised problems related with the existing colonial rule and national discrimination, as the social and economic background of March 1st movement. Although the governing who should monitor the movement and establish policies for it recognized social discrimination, they rarely recognized economic plundering. Even democrats who initiated Taisho Democracy focused on modernity and development in terms of economy. On the other hand, The Joseon society awakened by March 1st movement strongly recognized economic plundering, in addition to political violence and social discrimination. Different from the governing who only perceived the discrimination in the colonial period, two axes of 'discrimination' and 'plundering' as socio-economic background of March 1st movement were already recognized by the governed, in the same period, when the movement was under way.
Busan was characterized by the urban space in which an overwhelming number of the Japanese resided, socio-economic autonomy, colonial modernity superior to that of any other areas, which was promoted them and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The former raised the possibility that the strength of national discrimination was relatively higher than that in other areas, so Koreans' anger and resistance against it might be stronger. The latter fostered entrepreneurs and labours, who resisted to Japanese imperialism, more rapidly and largely, relative to those in other areas. This is supported by business activities of Baeksan Trading Company and alliance strikes against Japan, which were already actively implemented in the period of March 1st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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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산진 일신여학교의 3 · 11 독립만세 시위와 여성운동

저자 : 오미일 ( Oh Mi-il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7-104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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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서 여성들은 시위행렬의 선두에 섰고 격문이나 비밀문서의 인쇄와 배포도 담당했다. 3·1운동에서 조직적 운동주체로서 여성의 활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3월 11일의 부산진 일신여학교 학생 시위이다. 이 글은 부산경남 3·1운동에서 첫 만세 함성이었고 동심원의 파장과 같이 시위 확산에 큰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도 인물들의 정확한 인명이나 이력, 출옥 이후 삶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부진한 연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실증적 분석 작업이다.
3·1운동에 부산진지역 일신여학교와 공립보통학교 여학생들이 조직적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한말부터 선교사, 지역 유지와 婦人會 등 다양한 주체에 의한 근대적 여성교육기관의 설립이 다른 지역에 비교해 활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교육을 받은 여학생들은 평소 반일적 태도와 정서를 지니고 있었고, 그러한 교육 효과는 여성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3·11만세시위로 체포된 이는 약 30명이었는데, 그 중 교사 2명(징역 1년 6개월), 여학생 10명(5개월), 일반 주민 1명(징역 8월)이 옥고를 치렀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한 달 간의 휴교 후 등교하자, 다시 인근 주민들과 함께 4월 8일 2차 시위를 전개했다. 경찰에 탐지되어 비록 거사하지는 못했지만, 4월 9일과 10일에도동래고보, 부산제2상업학교와 함께 시위를 계획했다. 따라서 그동안 일신여학교 만세 운동에 대해 '부산경남지역에서 최초'라는 점만 강조해왔으나 2차 시위 실행에 이어 3차, 4차 시위를 계속 시도했다는 점에서 '운동의 지속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3·11독립만세 시위 주도자를 비롯해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지역의 문화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1년 6월 창립된 부산여자청년회의 지역적 기반은 부산진이었고 인적 기반은 일신여학교였다.


In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women were at the forefront of demonstrations and were responsible for the printing and dissemination of diaries and confidential document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female activism as the organizational movement body in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was Busanjin Ilshin Women's School demonstration.
The 3.11 hurray demonstration of Busanjin Ilshin Women's School was the first long-awaited act of independence movement in Busan, Gyeongsangnam-do and played a major role in spreading protests like the wave of concentric circles. Nevertheless, even the basic facts about life after death have not been grasped. This article is an empirical analysis of the 3.11 hurray demonstration at Ilshin Women's School.
The reason why girls from Ilsin Girls' School and public ordinary schools in Busan participated in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was because of the diversity of education by missionaries, Japanese, local opponent and women's associations. Among them, the female students who witnessed the world situation and received the national education had the usual anti-Japanese attitudes and emotions, and the women would have been actively involv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meantime, we have generally emphasized the fact that 3·11 demonstration of Ilshin Women's School is the first in the Busan Gyeongnam area. However, we should pay attention to the 'sustainability of the movement' in that They continued to carry out the third and fourth protests following the second protest.
The students of Ilshin Women's School, including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3·11 demonstrations, actively participated in local cultural enlightenment campaigns. Founded in June 1921, the Busan Women's Youth Association's regional base was Busanjin and its human base was Ilshin Women's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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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산지역 3·1운동 전개 양상과 특징

저자 : 홍순권 ( Hong Soon-kwo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5-151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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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총체적으로 보면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면서도 동시에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복잡하게 작동한 사회적 변혁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이 특히 두드러진 것이 부산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지역에서는 3월 11일 첫 만세시위가 부산부 좌천동에서 일어났고, 이어서 3월 13일 동래 시장에서 두 번째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부산에서의 초기 만세시위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소식을 접하고 나서 일어났다. 서울 만세 시위를 부산에 전달한 이들은 주로 부산 출신의 재경 인사와 부산 거주자로 미리 상경하여 서울 만세 시위에 참여한 자들이었다. 지리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서울에서 3·1 독립만세시위가 발생한지 열흘만에 시위가 발생할 수 있는 있었던 것은 두 지역이 근대적 교통수단인 경부선 철도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부산지역의 시위가 서울의 종교 조직 및 학생세력과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부산지역의 만세시위는 처음에는 부산부 조선인 거주지역에서 먼저 발생하고 이어서 동래군 군청소재지인 동래면으로, 그리고 점차 인근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도시 지역에서 농촌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일제의 무차별적 진압에 대응해 시위 방식도 점차 폭력적인 양상을 띠어 갔다. 또 시가지에서의 시위운동은 초기에는 주로 교사와 학생층이 주도하였으나 시위가 반복되면서 노동자들도 주도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반면, 구포와 기장 등 농촌 지역에서의 시위는 시장의 상인층과 농민층이 주된 참가자였다. 특히, 구포에서는 곡물상이 시위를 계획하고 이끄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반드시 부산지역만의 특징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시위 준비 과정에서 면사무소의 서기가 시위 계획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시위때 필요한 전단 제작을 위해서는 등사판이 필요했던 사정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관리에 대한 일제의 민족적 차별 정책이 그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부산지역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운동은 김해, 양산 등 인근 농촌지역에서의 만세 시위 발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점차 경상남도 일대 전 지역으로 만세 시위가 확산되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 종교적 측면에서 볼 때 기독교와 불교세력이 시위에 가담한 사실은 확인되나, 경상남도 내 다른 군에서처럼 유림들의 역할은 발견되지 않는다.


The first demonstration for the Korea's independence in Busan area occurred at Jwachon-dong, the outskirt of Busan-bu on the March 11th, 1919. The people who projected and leaded the first demonstration in Busan were the teachers and students of Ilsin girls' school which was governed by Australian Christian Mission. The next demonstration occurred at Dongnae marketplace, the main street of Dongnae-gun. Its leaders were the residents who moved from Busan to Seoul, and those who came back from joining the Seoul demonstration in March 1st, 1919. The Busan demonstration occurred relatively earlier than other providences of the south part of Korea Penisular such as Honam, Kangwon etc. when we take the distance between Seoul and Busan into consideration. It could be so fast because of the Kyong-Bu Railroad Line as the modernized traffic network opened in 1905.
The demonstration was spreaded step by step from the urban district or the main street of the Dongnae-gun into other rural communities. In the urbarn district or the main street of the Dongnae-gun the demonstrations were leaded by the students or young workers, but in the rural communities the demonstrations were leaded and attended by local merchants or farmers.
We can find out the Christians and Buddhist students or monks, but cannot find out any Confucian groups nor Cheondo-gyo believers who attended initiatively the independence demonstration in the other provinces. It is very interesting that some myeon officials attended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y provided mimeographs that were necessary for making out a large quantity of handbills during the demonstration. Or it is possible to guess that they attended the demonstration because of racist practices of colonial policy under the Japanese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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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운동 이후 부산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성격

저자 : 김형목 ( Kim Hyung-mo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3-19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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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알리는 '분수령'이었다. 소수친일세력을 제외한 한민족은 조국광복을 향한 대열에 동참했다. 적극적인 참여에도 만세운동은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는 새롭게 재편되었다. 변화에 부응하려는 민족해방운동은 모색되고 있었다.
사회주의 유입으로 민중운동론에 입각한 대중투쟁은 강조되는 분위기였다. 부산지역도 이러한 흐름에 부응하여 다양한 항일운동론은 모색되었다. 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해방 직전까지 지속되는 분위기였다. 조선인 본위교육 시행, 민족적인 차별을 일삼는 일본인 교사 배척 등은 주요한 문제로 자리매김했다. 다양한 경험은 1935년을 기점으로 반제·반전운동을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활동도 병행되었다. 1940년 부산항일학생운동과 소규모 비밀결사는 암울한 식민지시기를 밝히는 '희망봉'이었다.
1920년대 초반 부산부두노동자 총파업은 초유의 상황을 맞았다. 인쇄직공조합파업 등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운동가들은 외부 세계와 교류나 소통을 통하여 탄압에 맞섰다. 소비조합운동이나 야학운동 등은 노동자들의 현실인식을 심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메이데이 기념식은 노동자들의 주체의식을 일깨우는 밑거름이었다.
신간회 부산지회는 노동단체와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대중조직 기반은 노동운동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문화계몽운동과 학생운동과도 일정한 연계를 지녔다. 특히 노동운동 진전은 소부르조아 중심에서 벗어나 대중성을 확보하는 근간이었다. 이는 대중투쟁이나 부문별 민족해방운동과 일정한 연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신간회 '해소론'을 최초로 제기한 부산지회는 이러한 인식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The March First Movement was a watershed that announced a new departure in history of natioanl liberation movement. Except the Minority of pro-Japanese group, the Korean nation joined the line of nation's independence. Despite active participation, The March First Movement could not achieve the final aim. After the World War Ⅰ, an international order has been reorganized, and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was sought to meet the new change.
The mass struggle was stressed based on the theory of popular movement by inflow of Socialism. In Busan, the variety of theory of anti-Japanese movement were sought to meet these flows. A student movement was continued from the March First Movement to right after Korean liberation. The implement of Korean principal education and exclusion of Japansese teachers who segregated Koreans became major problems. The combination of experience developed into the central force starting from 1935 who took the lead in the anti-imperialist and anti-war movements. The variety of activities that awakened the national spirits were conducted opposing the policy to obliterate the Korean nation. The Busan Student Indepentence Movment in 1940 and secret organization on a small scale were a 'Cape of Good Hope' which lightened the dark of colonial period.
In the early 1920s, the general strike of workers of Busanport faced into an unheard of situation. The strike of association of printing workers was in same situation. The Labor agitator stood against their suppression through exchange and communication with the outside world. The cooperative society movement and movement of night school was one of the factors intensifying the awareness of reality of workers. The ceremony of May Day was a foundation which awakened the worker's sens of sovereignty.
The Busan branch of Singanhoe was organized based on labor associations and youth organizations. The base of mass organization was realized in close relations with labor movement, and cultural enlightenment and student mov movements was in the same vein. Especially, the progress of labor movement was a base to secure the pupular appeal getting out of petit-bourgeois-centralism. It conducted in conjunction with mass struggles and national liberation movements. The Busan branch of Singanhoe had relation with these cognition, which raised the theory of dissolution of Singanhoe at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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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의 생애와 부산경찰서 투탄(投彈)

저자 : 박철규 ( Park Chul-kyu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1-248 (5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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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朴載赫)은 1895년 5월 17일 범일동 183번지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15세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과 생활했다. 1911년 3월 22일 부산진사립육영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3월 22일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제4회로 졸업했다.
박재혁은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중에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등과 함께 『동국역사』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했다. 3학년 때에는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오재영 등과 구세단(救世團)을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단보를 발행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배포했다.
박재혁은 1917년 6월 부산을 떠나 3년 이상 상해와 싱가포르 등지를 왕래하면서 인삼 등의 무역업에 종사했다. 동시에 동지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기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신심을 다져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부산경찰서가 타격대상으로 지목된 것은 당시 의열단이 3.1운동 이후 기존의 독립운동노선에 방향전환을 선언하고 조직됐는데, 제1차 국내기관총공격 계획이 1920년 6월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관련자 전원이 체포됐다. 이에 의열단에서는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거두어 이를 반전시켜야 할 필요성 요구됐기 때문이다. 또한 부산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관문이며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개발됐으며, 제2의 오사카로 불렸기 때문에 상징성이 컸다.
거사 준비 과정에서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가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역업을 하던 경험을 살려 중국 고서 상인으로 위장했다.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30분 경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공무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하시모토 서장의 오른쪽 가까이 접근하자, 서장이 집무를 멈추고 그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자신이 의열단임을 밝히고 투탄했다. 당시 하시모토 서장은 경상을 입었다. 박재혁도 부상을 입어 탈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박재혁은 부산지법의 1심부터 1921년 3월 31일 진행된 경성고법의 3심까지 일관되게 '살인미수죄'가 적용됐다. 박재혁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의 공소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진행된 재판에서는 원심이 파기되고 박재혁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박재혁은 1921년 3월 31일 3심인 경성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박재혁은 체포된 후 고문과 폭탄 투척 당시의 상처로 고통을 겪는 와중에 폐병까지 얻게 되었지만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1921년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에 대구 감옥에서 사망했다.


Jae-hyuk Park was born as the only son in 183 Beomil-dong on May 17, 1895. At the age of 15, his father passed away and he lived with his mother and sister. On March 22, 1911, he graduated from Busanjin Primary School, and on March 22, 1915, he was the fourth graduate of Busan Public Commercial School.
While attending Busan Public Commercial School, Jae-hyuk Park secretly reproduced and distributed 『Dongguk History』 with Cheon-taek Choi, Byeong-tae Kim and Hong-gyu Park. In his third grade, he formed Gusedan(救世團) with Cheon-taek Choi, Byeong-tae Kim, Hong-gyu Park, and Jae-young Oh, and issued a noticed to promote national identity in Busan and the whole region of Gyeongsangnam-do Province.
Jae-hyuk Park left Busan in June 1917 to Shanghai and Singapore for more than three years to work in the trade industry. At the same time, he was seeking ways to contribute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while interacting with his companions. He then decided to devote himself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after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Busan Police Station was targeted as the attack after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when Euiyeoldan had been organized by declaring the change of direction to the existing independence movement, and it was when everyone involved was arrested upon failure of the first national full-scale attack plan in June 1920. As a result, Euiyeoldan needed to achieve results and reverse the situation in a short time.
Busan was also a gateway from Japan to Joseon and was developed as the typical colonial city, and had its symbolism as it was called as the second Osaka.
In preparation for the rebellion, Jae-hyuk Park obtained information that Hashimoto, the Busan police chief, liked ancient books and disguised himself as the Chinese ancient book dealer by taking advantage of his experience in trade business.
At about 2:30p.m. on September 14, 1920, he entered the Busan Police Station pretending to be on duty, approached chief Hashimoto from the right side and threw a bomb after declaring himself as a member of Euiyeoldan when the chief turned his body towards him.
At that time, chief Hashimoto was slightly injured. Jae-hyuk Park was arrested at the scene after failing to escape due to his injury.
Jae-hyuk Park was consistently charged with 'attempted murder' from the first trial of the Busan District Court to the third trial of the Gyeongseong High Court on March 31, 1921.
Jae-hyuk Park was sentenced to life imprisonment at the Busan District Court. However, the appeal by the prosecution annulled the original decision at the trial at the Daegu High Court, and Jae-hyuk Park was sentenced to death. Eventually, Jae-hyuk Park was sentenced to death as his final judgment on March 31, 1921 after the third trial of the Gyeongseong High Court.
Jae-hyuk Park suffered from lung diseases due to tortures after arrest and injuries from the bomb, but his spirit was never thwarted. He died in Daegu prison at 11:20a.m. on May 11, 1921 before the exec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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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야사에서 복천동고분군의 위상과 역할

저자 : 김두철 ( Kim Doo-chul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9-294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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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고분군은 고대에는 수영만을 앞에 둔 해상왕국으로서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함께 전기가야의 중심지이자 맹주국의 묘역이었다. 하지만 기록에도 전하며 다소 우월하였던 김해세력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고구려군 남정 이후 5세기 전반대에 후기가야에 들어서는 영남지역의 신문물 창달에 가장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5세기 후반대에 빛을 보게되는 신라 귀족문화의 밑거름이 되면서 그것에 묻혀 역시 주목을 받지 못하고 더러는 신라문화에 편입된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론을 바로 잡기 위하여 본고가 기획되었다. 필자의 기존 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가야사에서의 복천동고분군의 실제 위상과 가야와 신라의 성장과정에 끼친 영향력과 역할을 재평가하였다.
그 결과, 4세기대(전기가야)의 복천동고분군의 피장자 집단은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함께 묘제나 부장품인 토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공통의 제의를 행하면서도 엄연히 이질적 집단이었다. 대성동고분군의 지배자 집단이 외래적 성격이 강하다면 복천동고분군은 토착사회에 기반한 안정된 집단으로서 결국 전기가야는 외래집단인 대성동고분군과 토착집단인 복천동고분군의 연합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양 집단에게는 공통성과 이질성의 양면이 상존한다.
5세기대(전환기와 후기가야)의 복천동고분군 집단은 사회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며 새로운 묘제나 유물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이후 고총고분시대의 후기가야와 신라 문화의 성립뿐만 아니라 왜의 고분시대 중기문화 성립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5세기 후반대 이후는 세력이 약화되지만 연산동고분군과 함께 가야 세력의 일원으로서 그 역할을 이어간다.


The Bokcheondong Tombs located alongside Suyeong Bay was the centre of the Former Gaya with the Daesungdong Tombs of Gimhae and it was the cemetery of the leader. However, it has been undervalued under the shadow of Gimhae group. After the conquest of Gogurye, it played a crucial role in developing new culture in Yeongnam area in the first of the 5th century. With emerging the culture of the Silla nobility in the latter of the 5th century, although it served as a foundation for its growing, but it was upstaged by Silla, and sometimes it was misunderstood that the Bokcheondong Tombs was already incorporated into Silla.
This paper was projected to correct this wrong perception. Based on my previous studies, it was revalued that the real status of Bokcheondong Tombs and its influence and role in developing Gaya and Silla.
As a result, although holding a common religious ceremony, but the buried leaders in Bokcheondong Tombs were different from them of Daesungdong Tombs in the 4th century. The leaders of Daesungdong Tombs had got strong foreign character, but the group of Bokcheondong Tombs was stable group based on the native society. These two group were united into Former Gaya, community and difference coexisted in two groups.
In the 5th century (the transition period and the Latter Gaya), the group of Bokcheondong Tombs adapted to the social change and created new type of tomb and artifact. It influenced to the formation of the culture of Latter Gaya and Silla as well as the formation of the culture of middle Gohun Period in Japan. In the latter of the 5th century, it lost its strength but played a role as a part of Gaya with the group of Yeonsandong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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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후기 동래부(東萊府) 사천면(沙川面)(사상면(沙上面)) 동안(洞案) 연구를 위한 예비적 검토

저자 : 진상원 ( Jin Sang-wo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95-337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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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東萊府 沙川面(沙上面)은 양반들이 거주하기를 기피하는 변방의 변두리 지역이었지만 이 지역에는 현재 동안을 비롯한 고문서들이 다수 전승되고 있다.
이 연구는 조선후기에 작성된 이 지역 동안들의 작성 및 추록 시기를 추정하고 여기에 보이는 의문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음 사실들을 밝혀내었다. 임진왜란직후 사천면에서는 지역 엘리트들이 친목과 상호부조를 위해 면 단위의 동계를 결성하고 운영해 왔다. 그러다 중앙정부의 시책에 따라 1678년(숙종 4년) 동래부사가 주도하는 향약 체계로 개편되었다. 그런데 1753년(영조 29년) '舊洞契'라 자칭하는 또 하나의 동계가 결성되어 향약 계열의 동계와 양립하며 임진왜란 직후 지역 엘리트들이 만든 동계의 정통성을 이었음을 내세웠다. 향약 계열 동계는 계원들의 특권과 門地의 차이를 점차 강조해가는 경향을 보이는데 반해 이와 양립한 동계는 상호부조와 경제적 의무 외에는 여타의 특권 의식이나 문지의 차별 등이 보이지 않는다.
향약 계열의 동계와 양립한 동계는 19세기 초에 新舊 사또의 迎送 행사 비용을 더 이상 부담하지 않아도 되자 그 재원을 계원들에게 고루 利殖하여 얻은 수익을 계의 운영비 뿐 아니라 面의 각종 경비에 사용하였다. 그러다 비축한 재원이 많아지자 이의 운영을 둘러싸고 계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마침내 1872년(고종 9년)에 재산을 모두 향약 계열의 동계에 넘기고 이와 병합하였다. 이렇게 통합된 동계는 예전 향약 계열의 그것과 달리 개방적인 성격을 띠었고, 계원들의 특권의식이나 문지에 따른 차별도 보이지 않았으며, 비록 面首의 관할 하에 있지만 상대적 독자성을 견지하고 있었다.
상이한 두 동계의 양립과 통합의 역사를 단순히 향약 계열 동계와 면의 경비 마련을 위한 목적계의 관계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며 조선후기 주변부 지역사회의 복합적인 양상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된다. 이 연구는 이러한 접근을 위한 예비적 검토이다.


This study is a preliminary review for the study of elite association rolls in Sacheon(Sasang) district of Dongraeboo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study tried to know when elite association rolls were written and then tried to solve the questions about the result. In this process, This study found out follows.
Immediately after the end of invasion of Japan, district elites established an association for friendship and mutual assistance in Sacheon district of Dongraeboo. And the other association was established by the chief officer of Dongraepoo according to dynasty's policy and replaced the former association in 1678. And another was established in 1753 and insisted it had the legitimacy of the former association established immediately after the end of invasion of Japan. Finally the association merged with the other and made one in 1872.
The association, established by the chief officer of Dongraeboo in 1678, had tendency to emphasize the privilege of the members and the difference of social position, while the association, established in 1753, did not have this tendency.
At last these two associations were merged into one in 1872. This unified association had not tendency to emphasize the privilege of the members and the difference of social position and it was more opened to new me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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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08년 동래부 동하면 호적에 기재된 392명의 개인정보를 통계 분석하고, 그 내용을 동래부 동하면의 지역적 특성 그리고 거주민의 집단적 생활방식으로 이해하였다. 이를 통해서 그 당시 해당 지역민의 공동체적 정체성과 그에 따른 삶의 선택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당시 동래부 동하면은 활발한 인구이동과 집중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주변 지역의 특성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주민의 거주 성격과 존재 방식에 영향을 주어 동하면 거주민은 평균적으로 40대 이후 연령대에서 높게 나타났으며 대부분 농업을 주요 직업으로 하였고, 특정 주요 가문이 토착화되어 뚜렷한 지배세력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경제 수준은 평균적으로 초가 2~3칸의 가택을 소유할 만큼, 거주민 사이에서 부의 차이 없이 공통적으로 유사한 사회·경제적 수준을 보였다.
다음으로 동래부 동하면 주민들의 거주 양상을 좀 더 다각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호주 개인 정보를 동거친속과 결합시켜 가족으로 재구성하여 살펴보았다. 당시 동래부 동하면 가족은 4인 가족이 가장 전형적인 규모로 나타났으며, 5인 이상의 가족에서 비교적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의 가족구성은 당시 도시 가족과 비교해서 동거친속 유형이 적게 나타나는 제한성과 직계가족 중심의 가족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은 당시 동하면 가족이 부계중심의 전통적 가족관계를 중시하고 있었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In this study, we conducted a statistical analysis of the details pertaining to family registers of 392 persons in Donghae-myeon, Dongraebu in 1908 and examined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of myeon, Dongraebu, and collective lifestyles of the residents based on results of the analysis. Through that, we investigated into the community identity of local residents and patterns of their lifestyles in myeon, Dongraebu.
At that time, Donghae-myeon, Dongraebu exhibited the characteristics of neighboring regions that did not witness active population relocation and concentration. Such regional characteristics influenced the residential characteristics of residents and their mode of lives and were revealed clearly particularly in the population aged 40 or older on average among residents of Dongha-myeon. Most residents were engaged in farming as occupation and most families were indigenous and did not emerge as a clear ruling power. From the standpoint of economics, their owned thatched houses, each consisting of 2 to 3 rooms and no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was found among residents, suggesting that they led similar level of social and economic lives.
Following that, we looked into the residential patterns of residents in Donghae-myeon, Dongraebu from a more multi-faceted approach by combining the details of family registers with details of co-habitating relatives into families. Most typical form of families in Donghae-myeon, Dongraebu was the family comprised of 4 persons, while the ratio of families, each consisting of 5 or more persons, were relatively higher. Their family structure showed the constraints that limited the number of cohabiting relatives to low level and the closed characteristics centered around lineal family type. Such aspect highlights the tendency that traditional patrilineal family relationship was emphasized in Dongha-myeon at that time.

KCI등재

10식민지 '지역언론'에서 '제국언론'으로 -신문체제와 지면을 통해 본 『조선시보』의 특징과 의미-

저자 : 전성현 ( Jeon Sung-hyun ) , 이가연 ( Lee Ga-yeon ) , 배병욱 ( Bae Byoung-wook ) , 하지영 ( Ha Ji-you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3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65-39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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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부산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에 의해 이른 시기 창간된 『조선시보』는 당초 부산의 일본인사회를 대변하는 지역 상업신문으로 창간되었다. 그리고 조선이 식민지가 되고 식민지체제가 심화되자 식민지 전조선의 신문으로 성장하고자 했다. 나아가 제국언론으로 확장하고자 신문지사·지국의 확대는 물론 지면 구성도 제국과 식민지 전체를 다루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같은 흐름은 현재 확인 가능한 1914년부터 1941년까지의 신문체제의 변화와 지면내용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을 위한 지역신문인 『조선시보』는 지면 구성과 게재 기사를 대략적으로 분석해 보면 몇 가지 특징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을 대변하는 신문이었기에 제국주의, 식민주의, 지역주의의 경계를 넘나 들었다. 즉,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입장에서 조선총독부를 대변하기도 했지만 지역주의의 입장에서 총독정치의 미흡한 점을 언급하거나 성토하기도 했고, 일본 본국의 정당정치와 식민정책에 대해 과감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둘째, 다른 일본인 지역신문인 『부산일보』보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지역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으며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울 수 있는 신문이었다. 특히 식민자 측면에서는 '부민의 여론'과 '공공성'을 명분으로 사회 상층은 물론 중산층 이하의 여론까지 대변하고자 하였다. 또한 피식민자 측의 동향에도 매우 촉각이 예민하여 부산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조선인사회에 대해서도 당대 주요 한글신문에 보도된 내용보다 상세히 보도하거나 빠진 부분에 대한 기사도 자주 게재했다.
다만 『조선시보』가 강조하는 '부민', '여론', '공공성'에는 사회 하층의 절대 다수인 조선인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들이 조성한 '여론'과 '공론'에 조선인이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동원했지만 일상에서는 차별과 배제라는 식민자의 시선으로일관했다. 그렇기에 중앙지에 비해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모욕적 기사 보도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상과 같이 『』조선시보『』는 식민성, 지역성, 계층성, 민족성이 한데 얽혀 복잡하고 독특한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언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The 『Chosenjiho』, which was founded in the early days by the Japanese who came to Busan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was originally established as a regional commercial newspaper representing the Japanese society in Busan. When Chosun became a colony and the colonial system deepened, the 『Chosenjiho』 tried to escape from the local newspaper. In other words, the proportion of articles covering the whole empire and colony as well as the expansion of newspaper offices and branches has increased. This trend can be confirmed through the change of the newspaper system from 1914 to 1941 and the contents of the paper.
The Japanese local newspaper 『Chosenjiho』 of colonial Chosun has some characteristics. First, it represented the position of the Chosun governor general as a private newspaper. However, it did not hesitate to criticize the governor-general politics and Japanese party politics as well as colonial policy. Secondly, it reported more about the area than the other local newspaper 『Fusannippo』, and it was a newspaper that could fill the gap. Especially, from the aspect of the colonizer, it tried to represent not only the society upper class but also the public opinion below the middle class with 'public opinion' and 'publicness'. In addition, from the viewpoint of the colonized, it published an article on the details or missing parts of the Chosun people society than reported in major hangul newspapers of the day.
However, there was no place for Chosun people, who are the majority of the under-society in the 'Bumin(府民)', 'public opinion', and 'Publicness'. Although the "public opinion" included Chosun people, it was consistent with the gaze of colonizer such as discrimination and exclusion in everyday life. Therefore, there were relatively many discriminatory and insulting articles about Chosun people compared to the central newspaper. As mentioned above, 『Chosenjiho』 was a Japanese media of complicated and unique colonial Chosun, which was intertwined with coloniality, locality, hierarchicality and ethni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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