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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사학 update

The Korean journal of history of education

  • : 한국교육사학회
  • : 사회과학분야  >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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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2권0호(1978)~41권2호(2019) |수록논문 수 : 646
한국교육사학
41권2호(2019년 06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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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조선의 '문검' 합격자들

저자 : 김광규 ( Kim Kwangkyu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1권 2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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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기인 1910 - 1943년 간 중등교원검정시험인 '문검'에 합격한 조선인과 재조선 일본인의 면면을 살펴보고, 당시 '문검'의 역할과 교육사적 의미를 탐색해 본 것이다. 조선인, 재조선 일본인 모두 '문검' 합격자의 대다수는 초등교원이었다. 당시 조선의 관공립초등학교 교원이 일본의 초등교원에 비해 더 나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검'에 응시한 중요 동기는 초등교원과 중등교원 사이에 존재했던 학력의 차이, 임용시 대우의 차이, 사회적 지위와 인식의 차이였다고 할 수 있다. '문검'은 고등교육기관으로 진학하지 못한 자가 중등교원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이었고 고등교육기관 졸업과 동등한 학력을 갖추었음을 공인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문검'은 당시 교육제도가 갖고 있던 한계를 개인 차원으로 전가시키고 그것을 개인의 노력과 수고의 결과라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합격자 중 조선인의 비율, 실제 중등교원 임용율이 일본인에 비해 매우 낮았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엄연히 존재했던 교육에서의 민족 차별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aspects of the Korean and Japanese who passed the National Qualifying Examination for Secondary school('MunGeom') and explores the role and the meaning of the educational history of this exam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majority of successful applicants were elementary teachers. Although the teachers of public elementary schools in Chosun were able to enjoy a better socio-economic status than elementary teachers in Japan, they took 'MunGeom' to gain status and status as a secondary teacher. 'MunGeom' was an opportunity for those who did not advance to higher education institutions to acquire the qualification of secondary teacher and to be recognized as having the same level of education as graduated from higher education institutions. As a result, 'MunGeom' functioned to justify the defects of the educational system at the time and to justify it as a result of individual effort and effort. And the percentage of Koreans among the successful applicants and the actual rate of secondary teacher recruitment were very low compared to those of the Japanese. This was due to national discrimination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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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강회(講會) 시행과 그 특성

저자 : 김대식 ( Dae-sik Kim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1권 2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9-5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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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활동한 한강 정구의 생애를 통해 강회 제도의 확산 방식에 대해 고찰하였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강회는 서원이라는 교육기관을 통해서 시행되거나, 특정 문인 공동체를 기반으로 시행되었다. 하지만 한강의 경우는 주희가 제시한 증손여씨향약의 체계를 기반으로 강회를 시행하고자 하였다. 임란 이전에 한강이 조직한 계회는 주희 향약을 모방한 조직이었다. 계회에서는 구성원들에게 운영에서 교육적 목적을 강조함은 물론, 학업에 성과가 없는 계원은 퇴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주희 향약의 매월 독약(讀約) 행사인 월조약회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강론 활동에 초점을 두어 운영하였다. 이 월조약회에서 학생들의 학업을 점검하였고, 학업에 관심 없는 계원은 퇴출하였다. 계회는 향약 제도에 의거하여 시행하되, 교육적 강회적 요소를 강화하여 운영하였다. 임란 후 한강은 통독회를 조직하여 강회를 진행하였다. 이때는 계회에서 진행하던 강회 방식에 변화를 시도하였다. 통독회는 주희 향약과 별개의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우선 강회의 시행일을 매월 첫날 하던 것을 변경하여 매월 보름에 실시하였다. 그리고 강회 절차도 주희 향약에 제시된 독약 절차와 다른 형태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향약 독약 의례로서의 성격은 약화되고, 강회적 성격이 강화된 절차가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통독회의이다. 통독회를 통한 강회는 서원과 문인공동체가 시행한 강회와 함께 조선 강회의 세 번째 형태에 해당한다. 이런 강회 시행 방식의 분화는 조선 유학자들에게 강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This study examined the diffusion method of the Ganghye system through the life of HanGang Jeong-Gu before and after the Japanese Invasion. According to existing research, GangHye was conducted through educational institutions called Seowon, or based on a specific school community. However, in the case of the HanGang, he tried to conduct a GangHye based on the community rule of Zhu Xi. HanGang organized a ceremony that imitated the spirit of Zhu Xi before Imjin-Japanese attack. The community emphasized the educational purpose to the members in the operation and took steps to eliminate the members who had no achievement in the study. The study was implemented based on the community rule of ZhuXi, but strengthened the pedagogical elements. After the birth of the War with Japan, the Tongtok Community was organized and the class was held. At this time, he attempted to change the method of GangHye. The Tongdok Community clarified its distinctive character from that of Zhu Xi. First, the effective date of GangHye was changed on a full moon day of each month. And the ritual of GangHye was reformed in a way different style from the ritual for reading the community rules of Zhu Xi. As a result, the character of reading ritual was weakened, and the strengthend GangHye system was completed. This is the TongDok Community. It is the third form of the Chosun GangHye together with the study by the Seowon and the school community. The differentiation of Implementation method of GangHye. shows how important it was to the Chosun confucian scho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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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제강점기 함경남도의 교육연구

저자 : 김동환 ( Kim Dong-hwan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1권 2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5-8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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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함경남도의 교육에 대해 고찰하려고 하였다. 함경남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사학인 원산학사가 세워졌던 공간이며, 1930년대 이후 중화학 공업화로 개발된 공간이다. 아울러 '북청물장수'라는 식민지시대 교육열의 상징인 북청의 공간이다. 첫째, 본 연구에서는 우선 함경남도 교육의 사회적 배경으로서 도별 인구구조의 변화를 파악해 보았다. 일본인의 도별 인구변동도 같이 알아보려고 하였다. 둘째, 1910년대 이후 1930년대까지 함경남도의 교육의 특징적 양상에 대해 고찰하였다. 일반계 각종학교가 활성화된 배경. 부와 군의 교육격차 등이 문제로 파악되었다. 이는 함경남도의 사회적 관계, 부와 군의 교육재정에서 보조금의 문제를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함경남도의 공업화과정과 교육에서의 대응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였다, 공업화와 관련하여 실업교육상황에 대해 알아보고, 공업화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흥남에서의 교육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함경남도의 교육을 설명하기 위하여 루스 베네딕트에 의해 활용되고 마루야마 마사오도 활용한 '각자의 알맞은 위치찾기'라는 개념의 적용가능성을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천황제국가는 가치의 중심인 천황으로부터 거리가 준거가 된다. '각자의 알맞은 위치찾기'라는 개념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육의 격차와 부군의 교육격차, 기타 교육에 대한 설명에 일정 정도 설명력을 높혀줄 수 있는 확장성이 있는 개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근대의 주역으로서 일본인이 과학기술과 사회적 지위를 추구해나가는 것이 당연한 반면에 조선인의 교육열은 민도와 시세에 적합하도록 조절되어야 할 사회적 행위였다.


This paper attempted to examine the educational situation of Hamgyeongnam-do district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major findings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Hamgyeongnam-do district was rapidly industrialized on 1930-1940', and there were the change of the structure of population. The growth of the population related to industrialization, and the Japanese people were in the Hamgyeong-do. Second, there were the difference between Bu(city) and Gun(rural area) on the growth of student. The Wonsan city and after 1930, Hamheong city were more students population than other areas. And on the Hamgyeongnam-do there were more nonauthorized private school and student than other districts with it's relative equal social relationship. Third, the cause of difference between city and rural area, can be estimated for it's non-equal distribution of educatioal budget and also between Korean and Japenese people.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Hamgyeongnam-do. was not related to the education of Korean and the Hamgyeongnam-do people. Fourth, the Ruth Benedict's concept for Japenese culture, 'take one's proper position' was estimated for non equal education, there were proper portion for explanation of the Japenese colonized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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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경주 옥산서원의 강학 활동과 그 성격

저자 : 이병훈 ( Lee Byounghoon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1권 2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7-10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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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경주 옥산서원의 강학 활동 실태와 그것의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제향과 교육은 서원의 주요기능이자, 해당 서원의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 요소였다. 정치적으로 남인계를 표방하였던 영남지역 사족들은 인조반정, 갑술환국, 무신란(戊申亂) 등을 겪으면서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는 영남 남인계 서원으로서는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기 어렵게 만들면서 서원 경영에도 일정한 악영향을 주었다. 특히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거재와 거접 등의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서원이 증가해갔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옥산서원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초반에 침체된 유생 강학을 위하여 장현광을 초빙하여 강회(講會)를 개최하였다. 이후 경제적 기반이 안정화되어가던 17세기 중반에는 거재(居齋)를 실시하면서 유생들의 서원 참여를 강제하였다. 이후 거재가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심원록』을 참고하면, 17세기 후반부터 타읍 출신 유생들도 참여하는 거재가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아울러 당시부터 부정기적으로 거접(居接)도 시행하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거접은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들을 위하여 시행하던 강학방식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초반부터 옥산서원에서는 유생들의 문풍(文風)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매년 산당(山堂)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거접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이후 옥산서원 운영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영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쇄신(刷新)을 추진하였다. 이때 매년 진행하던 거접을 중단하고, 이를 경주부(慶州府) 남쪽의 용산서원(龍山書院)이 승계하였다. 아울러 18세기 말부터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어가는 순제(旬題)와 백일장(白日場) 등을 통해 강학 전통을 계승하고, 유생들의 서원 이탈을 방지하고자 했다. 나아가 19세기 중반이후에는 용산서원과 함께 거재를 시행하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처럼 옥산서원은 유생의 교육을 위한 노력을 17세기 이래로 이어오면서, 정치·사회적 변화와 서원의 운영 상황을 고려하여 강학의 형식을 바꿔왔다. 이를 통해 유생들의 서원 참여를 강화하고 이탈을 막음으로써 경주를 대표하는 교육기관이자, 향촌운영기구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actual situation of the lecture activities of Gyeongju Oksan Seowon(書院,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and its meaning of social history. memorial service[ceremony] and education were essential functions of the seowon and essential to maintain the social status of the seowon. on Injobanjeung(仁祖反正), Gap sool-hwan guk(甲戌換局), Moosinnan(戊申亂) and after, The political groups in the Yeongnam area, which had been claim to support to the Nam-in(南人), were utterly expelled from the political world. This made it difficult for the local ministry to actively cooperate with the people in the Yeoungnam, and had a certain adverse effect on the management of the Seowon. Oksan Seowon invited Jang-HyunKwang to lecture at the beginning of the 17th century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Josun. In the mid-17th century, when the economic base was stabilizing, a practice boarding study(居齋) forced to participate in the student of Confucianism. Although it is not known whether or not boarding study(居齋) was regularly carried out, it has been regularly observed that the the student of Confucianism rituals participated in the Geojeob(居接) rituals from the late 17th century. At the same time, it was practiced irregularly since then. However, since the beginning of the 18th century, in order to promote the cultures of the student of Confucianism in the Okshan Seowon, the mountain temple was established every year and the Geojeob(居接) was regularly executed. However, since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the operation of the Oksan Seowon has been difficult, try the company had been revamping its overall management. At this time, Yongsan Seowon was succeeded by Geojeob(居接). In addition, from the end of the 18th century, it was succeeded to the lecture tradition through the Soonje(旬題) and BaekIljang(白日場) where the cost is relatively low in the Seowon. Furthermore, after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the discussion with Yongsan Seowon in the southern part of Gyeongju was discussed. For consequence the Oksan seowon wanted to prevent departure of the Confucian scholar. Thus, since the 17th century, the Oksan Seowon has made efforts to educate the Confucian scholar by changing the form of lecture in consideration of the political and social changes and the operating conditions of the seowon. Through this, it was possible to maintain the position as the educational institution representing the region and the organization of the Gyeongju by strengthening the participation of the Confucian scholar and preventing the departure from 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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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한제국 전·후기 교육재정 추이 분석

저자 : 정덕희 ( Chung Duk-hee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1권 2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1-156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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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대한제국 국가재정처분권이 사실상 피탈된 1904년을 기준으로 1896∼1904년도까지를 전기로, 1905∼1910년도까지를 후기로 하여 교육재정 추이를 분석하였다. 정부예산 대비 교육예산 비중은 1896∼1904년도 1.4~2.6%, 1906∼1910년도 2.7~5.7%이었으며, 1906~1910년도까지 매년도 교육예산 증가분 총계의 83.0%는 학교시설비(64.4%)와 매년 순증하는 일본인 학부관리·교원들의 봉급(18.6%)으로 투입되어 교육 식민지화를 위한 인적·물적 기반 구축에 사용되었다. 1905∼1910년도 학교급별 평균 배분비는 전기와 비교하여 초등교육이 14.4% 증가한 반면 중등교육은 11.6% 감소하였다. 1896~1904년도 중등교육예산의 평균 배분비는 외국어계열 55.5%, 실업계열 20.6%, 일반계열 13.3%, 사범계열 10.6%이었다. 실업계열 중등학교예산 증가율은 1899~1904년도 평균 96.3%로 다른 계열보다 월등히 높았으며, 특히 1904년도의 경우 그 증가율은 272.0%이었다. 한편 고등교육재정의 1908~1910년도 학교별 평균 배분비는 관립농림학교 38.2%, 법관양성소 17.9%, 의학교 10.3%를 나타냈다. 이와 같은 배분비는 식민지화를 위한 정책적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1910년도 1인당 평균 봉급연액 기준으로 일본인 보통학교 교원 1명의 고용을 유지하는데 투입된 인건비는 한국인 보통학교 교원 4.1명의 봉급연액에 해당하였으며, 일본인 중등학교 교원은 한국인 중등학교 교원보다, 고등교육기관의 일본인 전임교원은 한국인 전임교원보다 각각 3.1배와 3.4배 많은 봉급연액을 받았다.


By the base year 1904 which was divested of disposal authority for national finance of the Korean Empire, this study analyzed the trend of education finance for the period from 1896 to 1910 classified into two periods: the former period(1896~1904) and the latter period(1905~1910). The proportion of education finance to government finance was 1.4~2.6 percent from 1896 to 1904, 2.7~5.7 percent from 1906 to 1910. Meanwhile, 83.0 percent out of the total amount of education finance increased annually from 1906 to 1910 was spent on establishing human and material infrastructure for education colonization such as school facilities expenditure(64.4 percent) and salaries(18.6 percent) for Japanese officers of Hakbu(Ministry of Education) and Japanese teachers increased every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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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춘당대(春塘臺)가 지니는 시험장소로서의 역사적 변화 고찰

저자 : 최두진 ( Choi Doojin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1권 2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7-17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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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에 자리 잡은 춘당대(春塘臺)가 시험장소로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조선시대는 문묘(文廟)를 설치하여 공자를 비롯한 유가 성인들을 모시고 그들의 행실과 삶을 본받아 성인이 되고자 하였다. 궁궐에서 행해지는 교육활동으로는 문과나 무과와 관련된 과거시험이 대부분이다. 시대마다 다르지만, 정조대에 이르면 춘당대에서 시행되는 과거시험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알성시(謁聖試)는 임금이 성균관 문묘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유생들에게 과거시험을 보게 했는데, 주로 성균관의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문과 시험의 문제를 내고 관리를 했다. 한편, 무과 시험은 활쏘기와 같이 시사(試射)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성균관은 문묘를 중심으로 앞뒤로 넓은 뜰이 있지만, 시사를 치르기에는 공간이 크지 않았다. 이에 시사를 치르기 위해, 세종대(世宗代)에는 모화관(慕華館)에서, 숙종(肅宗)·영조대(英祖代)에는 하련대(下輦臺)와 춘당대(春塘臺)에서, 정조대(正祖代)에는 문무과 시험을 모두 춘당대에서, 고종대(高宗代)에는 경무대(景武臺)와 춘당대에서 문무과 시험을 모두 치렀다. 춘당대의 기록은 연산군대(燕山君代)에서 나타나지만, 시험장소로서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숙종대부터였다. 조선후기에 임금의 편의와 응시자 수의 확대로 인하여 성균관과 인접해 있는 춘당대가 시험장소로서 활용되었다. 또한 정조대에 이르면 초계문신들의 친시도 춘당대에서 빈번하게 시행되었다. 조선후기 춘당대는 국가의 여러 행사와 더불어 시험과 같은 교육행사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로서 역할을 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out how the Chungdangdae(春塘臺), located in the backyard of Changdeok Palace(昌德宮), was used as an educational space. In the Choseon(朝鮮) Dynasty, Munmyo(文廟) was set up, and the Confucius and other Confucian saints were invited to be saints based on their conduct and life. In the palace, most of Gwageo(科擧) examinations related to Mungwa(文科) examination and Mugwa(武科) examination. Although it had vari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the number of Gwageo in Chungdangdae had rapidly increased when King Jeonjo(正祖) ruled. Alseongsi(謁聖試) was a test after the king held the Seokjeonje(釋奠祭) in the Sungkyunkwan(成均館) Munmyo. In this test, the wage went directly to the Myeongnyundang(明倫堂), a space for lectures by Sungkyunkwan, and tested for larvae. On the other hand, the field test required a large space because the examination was centered like an archery. Sungkyunkwan had a large garden back and forth around Munmyo, but the room was not large enough to take notice. Therefore, Alseongsi was conducted at King Sejong(世宗)'s reign in Mohwakwan(慕華館). In King Sukjong(肅宗)'s reign and King Yeongjo(英祖)'s reign, the test was conducted in Haryundae(下輦臺) and Chundangdae. And in Jeongjo's reign, most of the examinations were conducted in Chundangdae. In King Gojong(高宗)'s reign, Alseongsi was tested at Gyeongmudae(景武臺) and Chungdangdae. The records of Chundangdae were found in King Yeonsangun(燕山君)'s reign, but the one that was used as a test space was used in earnest from Sukjong. Therefore, due to the convenience of wages and the increase in the number of candidates in the late Choseon Dynasty, Chungdangdae adjacent to Sungkyunkwan was used as an educational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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