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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es of seon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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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2006)~26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224
선문화연구
26권0호(2019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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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해의 독립운동과 선학원 - 재산환수승소판결문을 중심으로 -

저자 : 최종진 ( Choi Jong - Jin )

발행기관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간행물 : 선문화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4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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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용운선사(이하 만해)는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항일운동과 함께 불교계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는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으며 또한 자비를 실천하고 다른 이의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만해의 행적과 희생적인 노력은 민족불교의 중요한 초석이었으며 왜색불교를 타파하기 위한 임제종 운동, 그리고 선학원과 항일운동이라는 새로운 불교사의 지평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선학원은 임제종을 시원(始原)으로 삼아 시작되었다. 선학원 설립의 시초부터, 만해는 견고한 이념적 토대를 실질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만해의 독립운동은 선학원 설립의 정신적 이념이 되었으며 선학원은 설립 이후, 만해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기여하였다.
일찍이 그는 조선불교청년회 창설, 그리고 조선불교임제종 창립 즉 보종운동(保宗運動)과 같은 다양한 불교계의 항일운동 내지 그 흐름을 주도하였다. 만해는 임제종의 관장대리를 맡았던 일이 있었고, 임제종의 전통을 전승한 선학원을 활동거점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래서 오늘날 만해는 선학원을 설립한 여러 선사들과 더불어 선학원 조사 가운데 한 분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만해는 3.1만세운동의 배후자로 일제에 의해 검거되어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선학원 창설 직후인 1921년 12월, 출옥하면서 선학원으로 운신하였다. 여러 자료를 토대로 검토해보면, 만해는 선학원의 정기 총회에 꾸준히 참여했고, 이 곳에서 1931년까지 약 10여 년 동안 그는 한국불교의 정체성 회복과 독립운동으로 동분서주하였다.
만해는 좌익과 우익의 연합체인 '신간회'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신간회의 경성지회 대표를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한문 불적을 유려한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하였고, 끊임없는 대중 강연으로 교육활동을 병행하였다.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망령의 상징이라 할 일본경찰에 의해 만해는 6·10만세운동의 주요 배후 인물로 지목 받아 선학원의 입구에서 긴급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의 독립, 그리고 한국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찬동 연설을 강행했으며, 조선학생을 위한 대학인 민립대학을 설립하고자 시도하였다.
본 연구의 목적은 만해가 선학원에 머물며 활동했던 상기의 제반활동을 시기적으로 재검토하는 한편, 만해의 독립운동과 선학원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선학원 설립에 끼친 만해의 영향을 명확히 이해하고자, 선학원이 소장한 재산환수소송판결문을 객관적인 1차 자료로 채택하였다.
3.1만세운동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만해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 선학원을 활동중심지로 삼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한편 식민주의에 대항하여 한국역사에 깊이 스며든 불교전통의 보존을 위한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만해의 행적은 근현대불교의 정체성과 개혁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본질적 성격을 지닌 사례라 할 수 있다. 불교계의 독립운동이나 불교전통에 대한 보존과 전승을 보종운동에서 살펴볼 수 있고, 선학원의 설립 역시 만해의 행적과 그 궤를 같이한다. 선학원 설립의 지남(指南)이 되었던 불교계의 보종운동과 항일운동 깊숙이 만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Seonhakwon was established upon the foundation of the Yimje Order. When Seonhakwon was first founded, Manhae Yongun Seonsa(Ven. Manhae) provided practical suggestions regarding the establishment of a robust ideological foundation.
Due to this contribution, he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any founders of Seonhakwon, along with many monks who were involved with the sect from the beginning.
This is because Ven. Manhae had served as the executive chief of the Joseon Buddhist Yimje Order, and considered Seonhakwon - the historical successor of the Yimje Order - as the hub of his spiritual activities.
In addition to dedicating his life to the independence of Korea, Ven. Manhae led a life of service for the Korean people. He practiced mercy while making an effort for other people to reach this enlightenment.
Such an effort by Ven. Manhae derived from traditional teachings of Buddhism. His efforts were self - sacrificial and noble, and opened the way for the future of Korean Buddhism.
Ven. Manhae of Seonhakwon took active participation in the Singanhoe, an alliance created from the balance between the political left and right. He served as the chairman of the Seoul branch of the organization.
Also, in an attempt to propagate the traditional teachings of Korean Buddhism, he made the Korean translation of the Buddhist books originally translated from Sanskrit to Chinese. Ven. Manhae also consistently gave lectures for the enlightenment of the Korean people(Minlibdaehag).
In the process, the Japanese Police - the symbol of Japanese imperialism and colonialism - began suspecting him as the leader of the June 10 Independence Movement, so Ven. Manhae was arrested at the entrance to Seonhakwon.
Ven. Manhae made a constant effort for Korean independence, as well as peace and prosperity for the Korean people.
He supported the Gwangju Student Independence Movement, and attempted to establish a university funded and founded by the Korean people.
The objective of the current study is to review the history and identity of Seonhakwon, to elucidat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ndependence movement by Ven. Manhae and Seonhakwon.
Once, Seonhakwon stood in the court as a plaintiff in a civil lawsuit regarding a property issue. The judgment from the trial in that lawsuit reveals the impact of Ven. Manhae on the foundation of Seonhakwon.
The current study adopted the written judgment from the lawsuit as a crucial and objective material that can clarify the impact of Ven. Manhae on the foundation of Seonhakwon.
In addition, facts disclosed in various data indicate that Ven. Manhae regularly attended the ordinary general meetings of Seonhakwon.
When he was released after serving a prison time due to his involvement in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Ven. Manhae relocated his center of activity to Seonhakwon to engage in a dynamic anti - Japanese movement. In addition, to efficiently resisting the Japanese imperialism from Seonhakwon, he also fought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ism. Furthermore, he did not spare his effort to preserve the Buddhist traditions deeply penetrating the history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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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용운의 독립운동과 자유·평등사상의 역사적 맥락

저자 : 김성연 ( Kim Seong - Yeon )

발행기관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간행물 : 선문화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5-7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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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한용운의 독립운동 정신에 내재된 자유·평등사상이 시기별로 어떤 의미와 성격을 지니는지 그 맥락을 짚어 보았다. 한용운은 3.1운동에 민족대표로서 참여하고,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에서 경성지회장을 역임하는 등 항일운동의 최일선에서 직접 운동을 이끌었다. 또 승려로서 조선불교를 통제하는 사찰령의 철폐를 주장하고, 자주적 교단 건설을 지향했다. 1910년대 초 임제종운동이나 자주적 교단 건설을 지향했던 내용들은 불교 내적인 활동이었으나 일본불교의 영향과 총독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점에서 민족운동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용운이 국가와 민족의 해방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승려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불교적 자유·평등관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했던 종교적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한용운의 자유·평등사상을 시기별로 나누어 그 성격을 살펴보았다. 우선 1910년대 초에 발간한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서양 칸트 철학의 개인적 자유개념을 소개하고, 그에 대응하여 '본성의 자유'로서 불교적 '진여' 개념을 통해 보편적 자아와 개별적 자아를 모두 포함하는 자유사상을 주장했다. 이 단계에서의 자유·평등관은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개념 정립에 그치고 있다. 그의 자유·평등관이 민족을 의식한 가운데 현실을 직시하며 나타났던 것은 3.1운동을 겪으면서이다. 특히 감옥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그의 자유·평등, 평화, 민족, 독립정신 등을 복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그의 자유사상의 주체는 개인을 넘어 민족과 국가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승려였던 그는 개인, 민족, 국가의 자유·평등사상을 견지하면서, 불교 교단 운영의 자주성 회복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 불교 교단 운영과 관련한 자주적 성격의 논설이 많이 확인된다. 한용운의 자유·평등사상은 불교적 본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식민지라는 현실 속에 개인, 민족, 국가를 주체로 확대되며 조국독립의 목표를 지향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meaning of the freedom and equality thought inherent in Han Yong-Un's independence movement. Han Yong-Un was a pioneer of the Korean people who led the anti-Japanese movement, including the representative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president of the Gyeongseong Branch of the Shinganhoe(新幹會). As a Buddhist monk, He also led a campaign to remove Temple ordinance(寺刹令) that control Joseon Buddhism and advocated the construction of an independent Buddhist order. Such activities as Buddhist monks were internal to Buddhism, but they could be understood in terms of the national movement in that they were trying to escape the influence of Japanese Buddhism and the control of the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Han Yong-un had a religious belief that he wanted to embody Buddhist freedom and equality in the real society with his identity as a Buddhist monk.
In the text, I examined his freedom and equality thoughts in each period. First, in “Theory of Reformation in Chosun Buddhism(朝鮮佛敎維新論)” published in the early 1910s, he introduced the concept of personal freedom in Kant philosophy, and in response to that, advocated the idea of freedom which included both universal and individual self through the concept of Buddhist "Tathata(眞如)". His freedom and equality ideas at this time were conceptual and theoretical. It was during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that developed into a freedom and equality idea with national consciousness. Especially, “summary of Impressions on Korean Independence” written in Seodaemun prison shows his freedom, equality, peace, ethnicity and independence spirit. During this period, the subject of his freedom thought expanded beyond the individual to the nation and the state. And as a monk, he did not neglect to claim the Independent operation of the Buddhist order. Since the 1930s, he has published many editorials on the operation of independent Buddhist order. The freedom and equality thought of Han Yong-un is based on Buddhism, but in the reality of colonialism, the subject of his freedom and equality included individuals, nations and states, and they all aimed at the independence of his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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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원허(圓虛)의 금강산 활동과 대한불교 조계종 출범 기여

저자 : 최동순 ( Choi Dong - Soon )

발행기관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간행물 : 선문화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9-11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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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허[圓虛 曉璇, 1889~1966]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전쟁이후 조계종 출범에 기여한 인물 중의 한 분이다. 그는 표훈사 도량을 일신했으며 포교활동에 매진했고 또한 남한에서는 불교계 정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불교 현대사의 중요 인물임에도 조명하지 못한 것은 그의 금강산 활동의 거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며, 전쟁 후 남한에서의 기반 구축이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
그는 경기도 안성 출신이며 표훈사 관허[貫虛天日]를 스승으로 출가하였다. 1910년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표훈사와 그 소속 말사의 경영, 그리고 잡지 발행과 금강산불교회 구성, 포교서적의 보급, 불교학 연구지원 등의 불사들을 단행하였다. 월남하여 그는 이승만과 교분을 구축했으며 또한 불교계 정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강원도의 주요 사찰들을 정화했다.
원허의 생애자료는《불교시보》의 내용 그리고 제자인 최준섭과 인환(印幻)의 구술 그리고 불교정화와 관련한 자료들과 언론보도이다. 필자는 호암 채인환의 제자로서 그의 생애사 구술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원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인환은 자신의 스승이 활동했던 업적에 대한 연구를 필자에게 부촉하였다. 멸실될 수도 있었던 원허의 업적들을 본 연구조사에 의하여 다수 발굴되었고 그의 연고지들도 답사하고 확인하였다. 전쟁후 동산, 효봉, 금오 등과 함께 현 조계종을 출범시킨 원허의 생애와 활동기록은 불교사의 중요 자료이다.


Choi Won - He is a Buddhist monk of Pyo Hoon-sa temple located in Mount Geumgang, Korean Peninsula. He repaired many temples belonging to Pyo - hoon Temple. And He concentrated on buddhist missionary work there. Before the Korean War(1950~1953), he crossed the border from North Korea to South Korea. He is one of the leading figures in the launch of the Buddhist Jogye Order in Korea.
His hometown is Bangchuk-ri, Yangseong - myeon, Anseong-gun, Gyeonggi Province. He became a Buddhist monk at Mt. Geumgang at the age of 19. His teacher is Ven. Jeon Gwan - He of Pyo Hoon - Sa. In 1910, to liberation from Japanese occupation, he published a magazine 'Geumgangsan' and organized the 'Geumgangsan Buddhist Society', distributed missionary books, etc. carried out a Buddhist project. Wonhe came to the South in 1949 and established a special friendship with President Rhee Seung - Man. With that connection, Rhee supported Buddhist purification in south korea. And Wonhe purified many temples in Gangwon - do.
The activity data for Choi Won - He is as follows. There are magazines such as BulgyoSibo, Bulgyo, Seonwon and Geumgangsan and Yujumsa Bonmalsazi.
And there is a recording of the students' oral history, They are Choi Joon - Sup (In - Hae, 1939~) and In - Hwan (1931~2018). And there are materials related to Buddhist purification and press reports.
I graduated from Dongguk University, and I am a student of In - Hwan. I know Won - He, which is in the process of organizing the life history of In - Hwan. Right before his death, In - Hwan asked me to study the work of Won - He. Although Won - He's achievements could have disappeared, many of them were unearthed through this research. The activities of Won - He, who launched the Korean Jogye Order with Dong - San, Hyo - Bong and Geum - Oh after the war, are very impor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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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혜암 성관(慧菴性觀)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

저자 : 오용석 ( Oh Yong - Suk )

발행기관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간행물 : 선문화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9-15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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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성관(慧菴性觀)은 중도의 정견과 돈오의 사상을 중심으로 수행의 방법과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간화의 사상과 방법을 제시할 때 자신 스스로가 증험한 방식을 중심으로 경전과 조사어(祖師語)를 인용하고 해석하였다.
선사는 화두 참구의 과정과 관련하여 대원(大願), 신심, 분심, 의심을 강조하였다. 특히 대원을 통해 보살심을 다지고, 수행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원력을 통해 생사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도울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화두 참구를 하게 되면 동정일여, 몽교일여, 숙면일여, 오매일여의 경계를 지나 깨치게 된다고 말하였다.
선사는 화두 공부의 근기는 따로 없기에 화두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공부만 하면 누구나 수행하여 깨달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선사가 제시한 화두 공부의 핵심은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소식으로 의심해 들어가는 것이다. 선사의 이러한 화두 공부법은 출재가 공통의 수행 가풍을 이루게 하였고 재가자들을 간화선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Hyeam presented the method and the principle of practice based on the Middle Way of Correct view and the Sudden enlightenment. But when presenting the ideas and methods of Ganhwa, he cited and interpreted the scriptures and the Dharma Discourse of zen Masters on the way of self - examination.
Hyeam emphasized that when practicing the Ganhwa Seon, we will break through the immutability of throughout movement and non - movement, the immutability of throughout dreaming, the immutability of throughout deep sleeping, the sameness of deep sleeping and then can become enlightened immediately beyond the gradual stages of practice.
The essence of the Zen master Hyeam's Ganhwa seon is that doubting the realm where no delusion rises. This is a way to follow the meaning of Hwadu, not the formal transformation of a way of practice Ganhwa. These Hyeam's style become a dynamic to make Buddhist practice Hwadu acti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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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홍명집(弘明集)』과 『광홍명집(廣弘明集)』에 보이는 불식육계(不食肉戒) 논쟁

저자 : 한수진 ( Han Su - Jin ) , 신성현 ( Shin Sung - Hyun )

발행기관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간행물 : 선문화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9-202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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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홍명집』과 『광홍명집』을 중심으로 초기중국불교에서 불식육계(不食肉戒)에 대한 논쟁을 살펴봄으로써, 불식육계가 초기중국불교에서 수용·발전되어진 과정과 강조된 원인을 살펴볼 수 있었다. 초기중국불교에서 육식금지는 육식을 금하는 대승경전이 특정 조건하에서 육식을 허용한 소승경전과 율장보다 먼저 역출되어 전파됨으로서 불교의 도입단계에서부터 금지 조항으로 각인되어져 수지하게 되었다. 또한 남북조시대에 남부지역에서의 육식금지는 대승보살계를 설한 『범망경』의 불식육계와는 무관하였으며, 오히려 여래장사상 계통의 경전들을 전거로 들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초기중국불교에서 불식육계가 강조된 원인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식육계는 불·도·유간의 교섭관계에 있어서 불식육계가 도교의 양생술(養生術)과 비교되는 경향으로 인해 불·도를 구별하고, 불교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불식육계는 남북조 시대에 양나라의 신불멸론(神佛滅論)을 주장한 재가신도들에 의해 윤회응보론에 입각하여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지키고,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불식육계 실천의 중요성이 설명·강조되면서, 불식육계를 불교 최고의 계로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셋째, 불식육계는 양나라 양무제가 승단의 통제와 국가통치 수단을 필요로 하는 과정에서, 대승의 여래장사상을 설한 경전을 중심으로 불식육계의 실천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이를 법령화함으로서 강압적인 왕권 개입이 있었다. 하지만 양무제의 확고한 불교교단의 불식육계 수지 의지는 이후 중국불교가 채식위주의 식생활을 지속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은 결과에 따라 중국불교에서 불식육계 논쟁은 특히 남북조시대에 남부지방에서 불교교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주목된 보살계가 연원이었다. 아울러 불식육계의 수지는 곧 보살계를 지키는 것으로서, 불식육계는 궁극적으로 보살계실천운동이라 할 수 있다.


In this paper, by researching the significant contentions about forbidding the intake of meat, which was issued in the Hong ming ji and the Guang hong ming ji, it was possible to analyze this precept in the context of early Chinese Buddhism.
In early Chinese Buddhism, the prohibiting of meat-eating was regulated from the very beginning due to the propagation of the Buddhism following the directives of the Mahāyana Sutra, which was translated faster than the Hīnayāna, with the former advocating this rule. Moreover, in the Southern Dynasties, this precept was irrelevant with Brahmāʼs Net Sutra(梵網經), which the Bodhisattva of Mahāyana supported, but preferred Buddhism based on the Mahāparinirvāṇa sutra with the tathāgatagarbha theory(如來藏思想).
The precept of forbidding the intake of meat was strict in early Chinese Buddhism. There are reasons for this as follows.
First, the precept of forbidding meat consumption was compared with the regimen of Taoism, so it was required clarifying the superiority of Buddhism as well as its differences between Buddhism and Taoism.
Secondly, the practice of forbidding meat-eating was approved upon the laity claimants of Shen bumie lun(神不滅論) with the Buddhist doctrines of karma and rebirth in the Liang(梁) Dynasty. They emphasized keeping ahiṃsā with karuṇā and maritrī in general.
Thirdly, Liang Wu - di(梁武帝), the Emperor of Liang Dynasty, took advantage of the precept of forbidding meat-eating and instituted it as the national law to control the Buddhist saṃgha and the nation.
In summation, in Chinese Buddhism, the contention of forbidding meat-eating was one of the most practical regulations of the Mahayana Bodhisattva precepts, of Buddhism especially in the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era at the South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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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진제(眞諦 Paramārtha, 499~569) 『구식장(九識章)』과 거기에 설해진 '능연(能緣)의 아마라식(阿摩羅識)'이 진제 사유에 귀속되는지 여부에 대한 기존 연구가 유식 사상가 진제의 정체성 해석과 관련되어 있음에 주목하면서, 원측(圓測, 613~696)이 『구식장』과 그 속의 구식설(九識說)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고찰하며, 이를 통해 원측 안에 있는 진제 사유의 한 측면을 밝히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원측이 『결정장론(決定藏論)』「구식품(九識品)」과 『구식장』을 어떤 문헌으로 인식했을는지 가늠해 보았고, 이어서 그 문헌 속에서 핵심 개념으로 제시된 '해성리야(解性梨耶)'와 '능연의 아마라식'이 진제와 섭론사(攝論師)에게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살펴보았으며, 마지막으로 원측이 어떤 관점에서 전자를 암묵적으로 긍정하고 후자를 명시적으로 비판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고찰 결과 우선 원측은 『결정장론』「구식품」과 『구식장』 모두를 진제의 역저(譯著)로 인식했던 듯하며, 따라서 그 문헌 속의 '능연의 아마라식'도 진제의 사유로 읽고 있다. 하지만 현장(玄奘 600 또는 602~664)과 호법(護法 530~561)의 표준에 따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여 자신의 식 체계에서 배제하는 반면, '해성리야'는 수행론적 맥락에서 아뢰야식 안의 '진여'의 의미로 해석하여 자신의 체계 속에 통합하려 하고 있다.
원측은 때로는 현장과 호법의 해석의 표준에 따라 진제 사유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표준 안에 진제의 사유를 포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 표준과 무관하게 진제의 해석을 수용하기도 하는 여러 해석학적 태도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보면 원측은 식설에 있어 진제와 현장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 사유의 연속성에도 주목한 점에서 특징적이다.


This paper is a trial of exposition on features of Woncheuk's (圓測 613~696, Ch. Yuance) view on Jiushi zhang (九識章, Treatise on the Nine Vijñānas) of Paramārtha (眞諦 499~569, Ch. Zhendi) and his Theory of Nine Vijñānas, and legacies of Paramārtha's thought implicated in his own. This topic is worthy of studying in that it deals with the opponent views between researchers on whether Jiushi zhang and amalavijñāna (阿摩羅識) as the perceiver could conform to Paramārtha's thought or not, futhermore on the identity of himself as Yogācāra thinker.
For this, first I investigated the view of Woncheuk on the authorship of “Chapter on Nine Vijñānas” (九識品) of Jiedingzanglun (決定藏論) and Jiushi zhang. Second, I illuminated how Paramārtha's concept of jiexingliye (解性梨耶) and amalavijñāna as the perceiver interpreted by himself and his followers in next generations. Finally, I tried to find the intention of Woncheuk's hermeneutical attitude, which implicitly affirms the former and explicitly negate the latter.
In my view, Woncheuk recognizes Paramārtha as the author of both “Chapter on Nine Vijñānas” (九識品) of Jiedingzanglun (決定藏論) and Jiushi zhang, accordingly regards amalavijñāna as the perceiver presented in these two scripts as conforming to Paramārtha's thought. But from the standard viewpoint of Xuanzang (玄奘 600 or 602~664) and Dharmapāla (護法 530~561), on one hand, he criticizes and excludes it from his own system of Eight Vijñānas. On the other hand, he interprets the concept of jiexingliye as the tathāgatā aspect of Ālayavijñāna and integrates it into the very system.
In conclusion, Woncheuk shows multi-faceted hermeneutical attitude toward Theory of Nine Vijñānas, sometimes explicitly criticizes some aspects of it from the very standard viewpoint, sometimes implicitly tolerates other aspects of it as long as they does not conflict with the interpretation of Xuanzang, sometimes presents Paramārtha's interpretation about it, regardless that of Xuanzang. In my view, these hermeneuticlal attitude shows Woncheuk tried to recognize and stress the possible continuity of thought between his two Masters, regardless of appreciating some critical differences between their theories of Vijñā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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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황 원효(芬皇元曉)와 경허 성우(鏡虛惺牛)의 구도 정신 - 원효 일심(一心)과 경허 조심(照心)의 접점과 통로-

저자 : 고영섭 ( Ko Young - Seop )

발행기관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간행물 : 선문화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1-28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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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신라시대 분황 원효(617~686)와 대한시대 경허 성우(1846~1912)의 구도 정신을 일심(一心)과 조심(照心)을 중심으로 살펴본 글이다. 출가자의 경계를 넘어 소성(小性)거사와 난주(蘭州)거사로도 살았던 이들 두 사람의 구도와 나눔, 깨침과 깨달음, 일심지원(一心之源)과 조료심원(照了心源), 요익중생(饒益衆生)과 이류중행(異類中行)은 연속되기도 하고 불연속되기도 한다.
원효와 경허는 '비승비속'(非僧非俗) 즉 승도 아니도 속도 아니었으며, 혹은 '역승역속'(亦僧 亦俗) 즉 승이기도 하고 속이기도 한 자유인이었다. 이들은 출가승만도 아니고 재가자만도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출가승이기도 하고 재가자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자 도리를 구하는 구도자로 살았다. 원효와 경허는 공부가 무르익자 출가자로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계율의 사다리'를 차버리고 '구제의 사다리'를 높이 세운 이들이다. 이들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각기 일심지원(一心之源)과 조료심원(照了心源)을 체득하고 대중교화(大衆敎化)와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실천하였다.
원효와 경허 두 사람이 터득한 일심(一心)과 조심(照心)은 구도 정신과 나눔정신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요익중생(饒益衆生)과 이류중행(異類中行)으로 드러났다. 이들의 구도 정신은 부처와 중생, 홍법(弘法)과 화생(化生), 청산과 세속, 열반과 생사가 둘이 없는 무이(無二)의 중도세계로 표출되었다. 원효와 경허는 중생을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려고 했으며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체까지 구제하려고 했다. 이들이 성취한 일심지원과 조료심원은 결국 자아발견과 자아 성찰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여러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불교에서의 구도는 나눔을 전제로 하며 구도 과정의 치열함은 나눔 과정의 적극성에 상응한다. 원효와 경허의 구도 정신은 일심(一心)과 조심(照心)에서 시작되어 이류중행과 요익중생의 나눔 정신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였고 그 결과 그 성취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출가와 재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활짝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이러한 꽃조차 버림으로써 대중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었고, 그 열매를 나눌 수 있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spirits of Bunhwang Wonhyo (617~686), of the Silla dynasty, and Gyeongheo Sungwoo (1846~1912), of the Korean Empire, in seeking Dharma focusing on their One Mind and Illuminating Mind. The ideologies of these two masters are well described as the Origin of One Mind, and Illuminating and Awakening One Mind, or “Giving benefits to many sentient beings,” and “Living among many sentient beings.” These ideas sometimes seem identical, but other times do not.
Both Wonhyo and Gyeongheo led unique lives that were neither those of a monk nor common of lay people. However, it would not be inaccurate to say that they were both monks and laymen at the same time. In essence, they were free people who forged their own lifestyle focused on seeking truth and Dharma. Since the most important value they cherished was not that of precepts that were important to themselves as monks, but was that of benefitting others, they set the ladder of salvation for others high and put away the ladder of precepts for themselves. They were both winners in the battles they fought with themselves. and they eventually attained enlightenment. As a result, one of them awakened to the truth of One Mind, while the other awakened to the truth of the Illuminating Mind and practiced Benefiting Others and Living with Others.
The contact point of these two masters' ideology, One Mind and Illuminating Mind, was made at the place where their spiritual awakening and shared compassion meet. This is manifested in their actions of “Benefitting others” and “Living with others.” Wonhyo and Gyeongheo's spirits in seeking the truth form the ideology of the Non-dual Middle Way, where Buddha and unawakened beings, deity and incarnate avatar, sacred and secular, and Nirvana and samsara, are not divided. These masters were both dedicated to helping the world to flourish, helping others, and tried to save not only human beings but also all living beings. Their awakenings were the result of discovering their true inner selves. It was these awakenings that led them to the acts of saving and helping others.
In Buddhism, seeking truth is based on the spirit of sharing, and the more intense one's endeavor in awakening the truth, the more compassionate one's spirit of sharing the results becomes. In the case of Wonhyo and Gyeongheo, their spirits of truth-seeking and sharing their awakening interconnected beyond the border where the concept of monks and the laity were no longer divided. This was where their spirits eventually awakened and bloomed. However, as they did not attach themselves to the flowering they attained, they were able to realize the result of the blooming flowers, fruits, and these fruits were the ones they shared with other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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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의 방편행과 MBSR 치유기제의 상통성 고찰

저자 : 차차석 ( Cha Cha - Seok )

발행기관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간행물 : 선문화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87-331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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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의 방편행과 MBSR의 마음챙김을 비교하여 심리적 관점에서 어떠한 치유 요인과 상호관련성이 있는지, 상담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로 시작되었다. 『천태소지관』의 수행론과 현대인의 정서에 맞게 개발된 MBSR의 마음챙김은 인간의 심리에 대한 근원적 접근이며, 서로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 현대인들은 첨단 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학도 심리적·정신적 병리증세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적 공황은 그 심각성이 늘고 있으며 이로 이해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 또한 매우 크다.
『천태소지관』의 「치병장」에서는 방편을 강조하고 있다. 이 내용은 심리치유의 관점에서 활용성이 있다고 본다. 서양의 상담심리학자들이 고안한 MBSR의 치유기제와는 모종의 관련성이 고찰된다. MBSR의 마음챙김 프로그램은 일반인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목적으로 다방면에 걸쳐 시도되고 있고, 상당한 치유적 효과를 보이고 있다. MBSR의 마음챙김은 불안을 감소시켜 스트레스를 해소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고 변화시켜 긍정적 사회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두 사상의 접점으로 인식되는 내용이다.
불교는 괴로움의 소멸을 목표로 동양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종교지만, 불교 수행의 심리치료적 활용에 대한 연구는 서양에서 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찰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마음챙김 명상을 병원과 일상생활에 적용한 MBSR의 마음치유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는 괴로움의 소멸을 궁극적 목적으로 여기는 불교의 현대화 과제에 큰 시사점을 줄 수 있다. 특히 『천태소지관』의 심신 치유의 방편과 MBSR의 마음챙김은 현대인의 심리적 우울, 불안,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자각하도록 하는 효과적인 대응 방법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
깨달음과 열반이라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을 유지하면서 현실적, 실용적 측면에 대중과 소통할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자 불교인들의 과제이다. 따라서 『천태소지관』에 나오는 방편을 심층심리치유의 입장에서 응용한다면 현대인의 심리적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고통의 원인을 자각하고, 그것의 근원적 해소와 예방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알려주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psychological aspects of Zhiyi's five dharmas taught in the Smaller - Śamatha - Vipaśyana (小止觀, T46, No.1915) and compare it to MBSR's mindfulness. Zhiyi's Śamatha - Vipaśyana and MBSR program are both a systematic device to develop psychological healing effects through meditation practices.
Zhiyi's five dharmas, which are included in his twenty - five devices for real meditation, contains psychological healing effects based on his theory of Śamatha - Vipaśyana meditation. Zhiyi attempted to include all Buddhist doctrines and concepts in his Śamatha - Vipaśyana (止觀)system. MBSR's mindfulness program has been studied in many ways for the purpose of relieving the stress of the general public and has shown its considerable healing effects. MBSR's mindfulness is reported not only to reduce anxiety and relieve stress, but also to produce one's own potential and positive social outcomes.
Although MBSR's mindfulness was developed from a viewpoint that the concept of sati contains many beneficial mental components, which is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Theravāda Buddhist notion that sati is only one of many steps in Vipaśśana meditation, it has proven the healing mechanisms of the program. On the other hand, despite its lack of sufficient explanations about healing mechanisms of the system, Zhiyi's theory of five dharmas puts great emphasis on how a practitioner gradually develop the ability to meditate intensely for long time. Therefore, in this study, it is demonstrated how both systems can be complementary to each other.
Buddhism is a religion that has grown up around the Orient with the aim of attaining Enlightenment, but research on the psychotherapeutic use of Buddhist practice has been actively pursued in the West. The study of the MBSR program, which applied the mindfulness meditation centered on Buddhist temples to the hospital and everyday life, can give great implications to the modernization task of Buddhism, which considers the annihilation of suffering as the ultimate purpose.
It is the task of modern Buddhists to develop the way to communicate with the public in practical aspects while maintaining the ultimate goal of Buddhism, Enlightenment and Nirvana. Therefore, applying the method of Zhiyi's five dharmas as an in-depth psychotherapy can be one of the ways to heal the psychological pain of the modern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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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열반 체험의 해석학적 - 현상학적 연구 - 아잔 차(Ajahn Chah)의 열반 체험을 중심으로 -

저자 : 윤동현 ( Yoon Dong - Hyun )

발행기관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간행물 : 선문화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33-37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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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초기불교의 '열반(nibbāna)'에 대한 해석학적-현상학적 연구를 수행하여, 기존의 문헌적·논리적 연구방법의 한계를 벗어나, 열반 체험의 본질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 불교의 '실천적 수행'으로서의 영역과 '이론적 학문'으로서의 영역을 연결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더 나아가 불교학연구 일반에 있어서 해석학적 - 현상학적 체험연구의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열반'은 초기불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열반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제한적이며, 논란이 많다. 이는 인간의 일상적 인지능력을 넘어서는 열반을, 문헌과 언어와 논리만으로 연구하려는 기존 연구의 내재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다. 즉, 연구대상과 연구방법간의 근원적인 범주의 오류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초기불교의 '열반'의 특성을 찾아내기 위해, '열반'에 대한 초기불교의 교설을 검토하고, '열반의 체험'에 대한 일종의 해석학적-현상학적 체험연구를 진행한다. 체험연구를 통해 문헌적·논리적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여 생생한 '열반'의 실상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구체적 방법으로 태국의 고승 아잔차(Ajahn Chah)의 열반 체험을 기술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석학적-현상학적 체험연구를 진행하여, 열반 체험의 본질적인 구조를 파악한다. 이후 연구결과인 본질적 구조의 타당성을 체험의 보편성, 문헌적 타당성, 이론적 신뢰성의 측면에서 각각 검토함으로써 보강한다.
연구 결과 다음과 같은 3가지 본질적 구조가 발견된다. (1) 열반은 마음(주체)에서 대상(객체)이 분리된 상태이다. (2) 열반은 '순수한 알아차림'이다. (3) 열반은 '절대적 텅 빔(空)'이다. 즉, 현상학적으로 열반은 세속적인 지각에 영향을 받지 않는 '초월적 인지(transcendental discernment)'라 볼 수 있다.


This paper aims at finding out the essential meaning-structures of the living experiences of nibbāna through a hermeneutic - phenomenological study of it from early Buddhism. This paper thereby goes beyond the text - and logic - bound limitations of prevalent existing studies of nibbāna. Through this research, I hope that Buddhism as practice and Buddhism as theory could be mutually connected. In addition, I would like to suggest a new methodology of hermeneutic phenomenology in the field of Buddhist studies.
Nibbāna is not only the most important concept, but also the ultimate practical goal in early Buddhism. Despite the importance of the concept, research on nibbāna has been very limited. This is due to the inherent limitations of existing research on nibbāna that focuses only on its scriptures, languages, and logical arguments. However, nibbāna lies beyond ordinary human logical - cognitive abilities. In other words, existing research on nibbāna is committing a fundamental categorical error of applying a logical-rational methodology to a research topic which is beyond logic and rationality.
Investigating the characteristics of nibbāna-experiences from early Buddhism has the following steps. First, the doctrines of early Buddhism related to nibbāna are shortly reviewed. Then, a kind of hermeneutic-phenomenological research on some living experiences of nibbāna is conducted. Through a research on such living experiences, we can gain an understanding of the vivid reality of nibbāna (In this way, we can overcome the limitations of text - and logic - based existing studies on nibbāna). To this end, we take up the experiential data on nibbāna written by a noble Thai monk Ajahn Chah. Conducting a hermeneutic - phenomenological study on such data, we grasp the essential meaning - structures of nibbāna. Then, the validity of such essential structures is again corroborated by the documented universality of the nibbāna - experiences drawn from the early Buddhist scriptures as well as from the latest Buddhist studies.
In this study, the following three essential structures are discovered: (1) nibbāna is the state in which the mind (subject) is separated from the objects; (2) nibbāna is pure awareness; and (3) nibbāna is absolute emptiness (suññata). That is, nibbāna, phenomenologically speaking, can be regarded as a 'transcendental discernment' that is unaffected by secular per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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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고성 옥천사 명부전 불상과 조각승 경옥

저자 : 최선일 ( Choi Sun - Il ) , 조태건 ( Jo Tae - Gun )

발행기관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간행물 : 선문화연구 2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73-40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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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고성 옥천사 명부전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 경옥(敬玉)에 대한 연구이다. 고성 옥천사 명부전 발원문은 이들 존상들이 1670년 경옥을 포함한 4명의 조각승에 의해 조성된 것을 알려준다. 고성 옥천사 명부전 권속은 경옥이 수화승으로 활동한 유일한 작품으로 그의 조형 감각을 분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경옥은 17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조각승 승일(勝一), 희장(熙藏), 도우(道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존재가 알려진 조각승이다. 경옥은 1648년에 승일의 정수사 불상 조성불사와 1649년부터 1650년까지 희장의 불상 조성불사에 참여하였다. 1653년부터 1655년까지는 도우와 함께 대구 3건의 조성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수련기 활동을 통해 경옥은 크게 승일과 희장 계보에 속한 조각승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옥이 나무가 아닌 석조로 대부분의 불상을 조성한 점은 희장 계보에서 함께 수련기를 보낸 승호와의 관련성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보주를 쥔 지장보살좌상의 형태는 승호 및 그 계보에 속한 조각승이 조성한 지장보살좌상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경옥과 승호는 명부전 지장보살좌상 조성방식에 있어서는 동일한 도상적인 이해를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부전 하부권속에서는 희장이 조성한 진도 쌍계사 존상들과 유사한 조형감각을 찾을 수 있다. 비록 목재와 석조라는 재질 차이와 신체비례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지만, 변화가 없는 시왕 관모 형태, 10구 시왕상을 거의 동일하게 조성한 점, 장신구(관모와 광다회) 표현 및 장군상의 날개장식 등을 통해 두 사찰 명부전 존상들 사이에서 동일한 조형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경옥은 희장이 속한 계보의 조각승으로 수련기를 보내면서, 그 계보 명부전 조상 지침을 충실히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밝혀진 경옥의 조상활동은 고성 옥천사 1건 뿐이지만, 경상도 일대 다수 사찰에 유사한 조형감각을 공유하는 불상들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 경옥은 17세기 후반 승호와 함께 경상도 일대 석조불상 조성 활동에 왕성하게 참여하였던 조각승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앞으로 전국 사찰에 봉안된 조선후기 불상의 조성 발원문이 체계적으로 공개된다면 조각승 경옥과 관련된 분석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This paper is a study for a monk sculptor, Gyeong - Ok(敬玉). Recently, the votive inscription of Goseong Okcheonsa(玉泉寺) Myeongbujeon(冥府殿) shows that Geong - Ok and three monks carved Ksitigarbha triad, the Ten Kings and other attendants. This Myeongbujeon sculpture is the only work that can analyze his sense of sculptor.
Gyeong - Ok is a sculptor whose existence is known through research on the sculpture Seung - Il (勝一), Hee - Jang (熙藏), and Do - U (道祐)), all of whom represent the mid~17th century's main figures of monk sculptor. He work with Seong - Il in 1648, and during 1649~1650 he participated in Hee - Jang's Buddhist sculpture rendering project. From 1653 to 1655, he jointed Do - U's three Buddhist sculpture making assingmnets around Dea - gu (大邱) district. Through his training activities, Gyeong - Ok can be seen as a sculptor belonging to Seung - Il and Hee - Jang monk sculptor school. However, the fact that Gyeong - Ok created most of the Buddha statues in stone rather than wood can be inferred from his connection with Seung - Ho, who work within Hee - Jang monk sculptor school. In particular, the shape of the Ksitigarbha holding a sphericity, which belongs to Seung - Ho sculptor school, appears to have shared the same iconographical understanding in terms of how to create a Ksitigarbha statue.
the Ten Kings and other attendants seem to share similar a sense of sculpture in Ssanggyesa in Jindo, which wre created by Hee - Jang in 1666. Although there is nothing in common with the material difference between wood and stone, one can find the same sense of composition between the two temple's statue of the Ten Kings. Through this, Gyeong - Ok seems to have faithfully followed the instructions of Hee - Jang's sculptor school.
Although only one temple in Okcheonsa has been discovered to Geong - Ok's work, Buddha sculptures, sharing a similar style of Gyeong - Ok, remain in many Buddhist temples in Gyeongsang-do. By doing so, Gyeong - Ok can be judged as a monk sculpture who was actively involved in stone Buddha's statues in Gyeongsang Province in the late 17th century along with Seung - Ho. If many votive inscriptions, enshrined in temples across the country, is systematically disclosed, it is hope that the analysis to Gyeong - Ok's stylistic features, can be further divers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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