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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Cultural Studies

  •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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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1)~36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356
한국문화연구
36권0호(2019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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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적 기원

저자 : 도면회 ( Do Myounhoi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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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국의 근대 역사학이 서구의 역사학을 수용하되 일본제국주의 역사학을 비판, 극복하는 역사학이고 박은식·신채호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통설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근대 역사학은 국가/국민/민족 등 통시대적으로 존재하는 단일한 역사적 행위 주체의 발생과 성장, 고난, 영광 등의 과정을 서술함으로써 국민을 동원하려는 담론적 행위로 보아야 하며, 그러한 성과는 이미 1906년 현채의 『중등교과 동국사략』에서 달성되었다. 한국의 근대 역사학을 성립시킨 방법론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만국공법의 국가론을 받아들여 한국의 역사가 청의 속방 지위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한 역사였음을 서술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조선시대 이래 사용해 왔던 정통론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변용시켜 단일한 정통이 단군시대부터 당대까지 면면히 계승되어 왔음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둘째, 일본 근대 역사학의 국가주의 사관과 서유럽에서 발생한 사회진화론을 도입하여 자국사를 편찬하였다. 이를 통해 국민 교육을 추진하여 애국심을 고양시키고 부국강병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한국의 일본 식민지화 직전 역사가들은 일본의 국체론을 받아들여 국혼론을 개발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신채호의 「독사신론」과 같은 '부여족 소장성쇠의 역사'로 귀결되었다. 기존의 통설과 달리 신채호의 「독사신론」은 반일 민족주의보다 반중국 민족주의 성격이 더 강하다. 그의 역사학은 백두산 일대를 4천 년 전부터 부여족이 세운 단군조선·부여·고구려·발해의 강역으로 설정함으로써, 일본 근대 역사학자들이 신화를 역사로 탈바꿈시킨 것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근대 역사학은 일본의 근대 역사학과 異形同質性을 띠게 되었다.


This study is to challenge the conventional wisdom on modern historiography of Korea, which asserts that modern historiography of Korea was established by SIN Chaeho(申采浩) and PARK Eunsik(朴殷植), whose historical writings criticized and overcame Japanese colonialist historiography by adopting Western historiography. But, I think that modern historiography is a narrative practice rather than a science, aiming to mobilize the people by describing the genesis, growth, hardship, glory of a single historical entity, such as the state / people / ethnicity. I think, in this sense, such goal was accomplished Tong'guksaryak(東國史略) by HYON Chae(玄采) in 1906.
There seems to be two basic theories which established modern historiography of Korea. Firstly, Korean historians accepted the theory of international law to describe the Korean history as one of independent country, not as a China's dependency. They tried to prove that single orthodoxy had been inherited from the Tankun(檀君) period to the present by utilizing the theory of orthodoxy used since the beginning of Joseon Dynasty. Secondly, They also adopted the nationalistic view of history from Japanese historiography and social Darwinism from Western Europe, trying to enhance patriotism and achieve strong army and rich country by promoting national education. Just before Korea's colonization by Japan, They developed the theories of national spirit(國魂論) from Japanese theory of nationality(國體論), one of which resulted in 'the history of Puyeo(扶餘) tribe' of “Toksasinron”(讀史新論: new theory of historiography) by SHIN Chaeho. This essay, different from conventional wisdom, expressed strong anti-Chinese ethnic nationalism rather than anti-Japanese. He described the Paekdu mountain area as territories of such dynasties as Tankun Joseon, Puyeo, Koguryeo(高句麗), Parhae since 4,000 years ago, resembling Japanese historians who transformed myths into history. In this point, modern historiography of Korea is a polymorphism of Japa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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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현대비평의 수립, 혹은 통설의 탄생-1959년 백철과 강신재의 논쟁에 주목하며-

저자 : 연남경 ( Yeon Namkyung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7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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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현대문학의 방향성이 모색되던 전후 문단 상황을 젠더적인 관점에서 조망하였다. 본고는 1959년에 있었던 짧지만 인상적인 논쟁에 주목하며 글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평론가 백철이 폄하한 작품 <절벽>의 평가에 대해 작가 강신재가 반론을 제기한 경우였다. 백철은 여인의 신변이야기는 시대성을 담보하지 못하므로 작품의 질이 낮으며, 수사학적 차원에서 문장의 오류를 지적하며 작품의 리얼리티를 찾기 힘들다고 평가한다. 이에 강신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몰이해와 폄하를 반박하는데, 이는 당대 비평계의 화두였던 비평의 이념과 방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였으며, 현대비평 수립과정에서 부재했던 여성의 비평적 논평을 찰나적으로나마 포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한국현대비평은 끊임없는 논쟁의 산물이며 세대별 인정투쟁의 결과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1955년 전후로 대거 등장한 '신세대 비평가(55년대 비평가)'와 '4·19세대 비평가(65년대 비평가)'들 사이의 세대론적 갈등과 인정투쟁의 과정은 그들이 모두 '젊은' '남성' '엘리트'라는 공통점에서 부자서사의 계보로 봉합된다. 궁극적으로 세대론은 근대화의 주체를 문제 삼는 논의라는 점에서 남성 비평가들 사이에서 주고받았던 헤게모니의 이동은 여성들에게는 닫힌 오이디푸스적 계보에 해당했다. 특히 백철은 전후 대표적인 지식인 잡지 『사상계』를 거점으로 문학의 이념과 과학적 방법을 강조하며 새로운 문학을 견인하는 데 앞장선다. 그리고 감성을 압도하는 지성의 우위, 창작을 지도하는 비평의 우위를 특징으로 하는 담론 하에서 여성작가는 배제된다.
실상 1950년대 한국사회는 전후의 혼란과 실질적으로 부재했던 가부장의 자리로 인해 예외적으로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이때 전후 남성지식인 에 의해 주도되었던 국가재건의 과제는 가부장적 질서 회복을 포함한 것이었고, 문단의 담론도 그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강신재와 같이 전후에 등장한 여성작가들은 세대론에서 신세대에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순수참여논쟁에서 현실 참여의 문학을 표방하는 참여론자들에게 밀려난다. 비평 담론은 여성작가의 작품과 지식인 여성 인물에 부정적인 면모를 투사함으로써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남성)문학의 대타항으로 설정한다. 이로써 여성문학은 당대에 표준이 되는 남성작가의 작품에 비해 미달태이자 '여류'라는 비주류로서의 위상이 오랫동안 고착된다. 당대 비평 담론은 남성비평가(작가)에 의해 선취되었기에 문학 비평의 주체로서 여성의 역할은 부재하였다. 그렇기에 여성지식인(작가)은 작품을 통해 복화술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현대비평이라는 지식과 문단의 정립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담론, 즉 보편과 표준으로서의 문학이라는 통설의 탄생이었다.


This research approaches the situation of the literary field after the Korean War from a gender point of view. It focuses on an argument in 1959, which was short but impressive. Kang, Shin-Jae, a young female writer, disputed Paek, Cheol's criticism about her fiction, The Cliff. Paek, Cheol, the critic, diminished Kang's work because it was a personal, female story which didn't show an awareness of time, and contained many problems in the rhetorical sentences. Therefore, he insisted that her work lacked a sense of quality and reality. However, Kang, Shin-Jae refuted the critic's misunderstanding and disparagement of her work. This is important because it was a fundamental question in the direction of criticism and, moreover, the women's critical commentary that was absent from the process of modern criticism.
Modern Korean literary criticism is a product of constant controversy and is considered to be the outcome of the struggle for the recognition by generations of critics. However, the process of the generational conflict and the recognition struggle between the new generation critics of 1955 and the 4·19 generation critics of the 1960s are all defined by the genealogy of the father-son narrative which both have in common: 'young', 'male' and 'elite'. Ultimately, the shift of hegemony among male critics in terms of the discussion of the subject of modernization was a closed oedipus lineage for women. In particular, Paek, Cheol established a new type of literature, which was characterized by the superiority of the intellect which overpowers the emotion, and the superiority of the critique over the creation.
In fact, in the 1950s, the breakthrough of women was exceptionally prominent during the era of the postwar turmoil and the virtual absence of the patriarch in Korean society. At this time, the task of national reconstruction led by the intellectuals included the recovery of the patriarchal order. The literary discourse reflexed this new order. In the process, women writers, such as Kang, Shin-Jae who appeared after the war, were unable to belong to the new generation in the modern age. Since the discourse of contemporary criticism was preempted by a male critic(writer), women intellectuals(writers) were forced to make themselves heard in their works by using “ventriloquism”. For Korean women writers, the knowledge of modern criticism and the establishment of a literary field was the birth of a negative legacy, a universal, standard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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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산 녹산동 고려시대 가마터 출토 청자의 특징과 의의

저자 : 김태은 ( Kim Taeeun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1-11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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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녹산동에서 고려시대에 대단위 요업을 했던 가마터가 발굴조사되었다. 최초에 도기를 생산하다가 전환하여 청자를 제작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마를 이동하면서 상당기간 요업을 지속하였다. 총 5기의 가마와 그에 속한 폐기장이 조사되었다. 5만 점이 넘는 출토품을 통해 대량생산을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지리적으로 낙동강과 남해안 수계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경남지역 일대에 청자를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품 분석 결과 요업 성쇠 및 운영시기에 따른 유물의 양식 변화가 감지되었다.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지나 종류와 조형 면에서 비교적 다양하며, 장고·향완·잔탁·매병과 같은 위상 높은 기종이 다수 제작된 특징을 보인다. 특히 대량의 철화청자를 생산하여 주목된다. 문양의 수준과 다양성은 떨어지나, 철화를 장식한 기물의 종류와 양은 고려시대 대표적 철화청자 생산지였던 해남 진산리 요장과 비견할만하다. 또한 전세품이나 다른 가마에서는 보기 어려운 녹산동 청자의 특징으로 금속기를 여럿 모방한 점, 도기와의 여러 유사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특징들은 고려 중기 이후 전국 대부분 청자가마가 최고급 청자 생산지였던 강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녹산동 가마는 경남의 지역적 특색이 강한 청자를 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편년의 표식 유물인 한국식 해무리굽완이 보이지 않고 통형잔·팽이형잔·매병 등 고려 중기부터 나타나는 기종과 형식이 소수 보이기 때문에 운영시기 하한은 12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력으로 제작된 기종과 형식에서 용운리 10호 Ⅰ층 및 Ⅱ층 가형식, 삼흥리 D지구 출토품과 유사한 고려 전기적 특징을 주로 보이기 때문에, 적어도 요업의 시작은 11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A kiln site where large scale of ceramic manufacture was done during Goryeo Dynasty was excavated and investigated in Noksan-dong, Busan. It was a place where they produced earthenware at first and switched it into celadon. As time went by, they continued ceramic manufacture for a long time moving kilns. There were 5 kilns and attached waste sites. It was found that there was a large scale of production through over 50 thousand excavated articles. It was located in a place where water systems of the Nakdong River and the southern coast could be used to provide celadon to Gyeongnam area.
In the result of analyzing the excavated celadon pieces, the change of pattern was detected according to ups and downs of ceramic industry along with the period of operation. Overall, the quality was low, types and forms were diverse, and many high status types such as hourglass-shaped drum(janggo), cup shaped incense burner, saucer and meiping were manufactured. Especially, a large number of iron painting(cheolhwa) celadon pieces were manufactured. Even though the level and diversity of patterns were low, the types and volume of items that decorated cheolhwa can be compared with excavated celadon pieces of Jinsan-ri, Haenam, which was a representative cheolhwa celadon manufacturing site during Goryeo Dynasty. In addition, the characteristics of Noksan-dong celadon are the imitation of metalware and similarity with earthenware, which are difficult to find in those handed down as precious artwork or other kiln sites. It is different from the fact that most of celadon kiln sites were affected by Gangjin that manufactured the highest level of celadon. In conclusion, Noksan-dong kiln site can be thought to have produced celadon items with the strong features of Gyeongnam areas.
The Haemurigupwan of Korean style, which is a criteria of chronology, is not found, but types and forms of mid-Goryeo Dynasty such as cylindrical shaped cup, peg-top shaped cup and meiping are found, so it is estimated to have been operated during mid-Goryeo Dynasty. However, there are some characteristics of early Goryeo Dynasty similar to excavated items from Yongun-ri No. 10, 1st floor and Samheung-ri D-District in the types and forms, so the ceramic industry might have started in the late 11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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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운지(怡雲志)』의 농업공간에 관한 고찰

저자 : 심명주 ( Shim Myungjoo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9-15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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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이운지(怡雲志)』 권1 「형비포치(衡泌鋪置)」에 수록된 '농업 공간'에 관한 연구이다. '은자가 살아가는 집의 배치'라는 의미를 지니는 「형비포치」에는 향촌 거주와 관련된 다양한 접근과 구상이 수록되어 있는데, 본고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 중 '농업 공간'에 국한해 논의를 진행하였다.
구체적인 논의에 앞서 제2장에서는 향촌 농업생산 공간의 전제라 할 수 있는 입지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서유구는 상택지에서 '복거사요'에 관해 언급하며 생업 활동이 가능하고 지리적, 사회적, 심미적 환경 조건이 구비된 곳을 '낙토'라 부르고 있는데, 낙토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지리적 조건과 함께 생계를 위한 농업 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제반 환경이라 밝히고 있다. 제3장의 농업 공간에 관한 제안에서는, 먼저 서유구가 구상했던 농업공간의 특색과 상세한 내용 및 함의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서유구는 이운지의 농업공간에 '사(社)'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이들이 향촌의 '자치적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들 공간에는 『임원경제지』에 집적된 서유구의 지식과 이상이 반영되어 있음도 살필 수 있다. 논농사를 위한 공간인 행포사는 지식과 노동력의 협력을 도모하여 운영하는 향촌의 공동 농업을 위한 '농업관제 센터'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포정'의 경우 새로운 농법을 실험해 보는 공간으로 구상되었다. '전어사'는 향촌의 대규모 목축어업을 위한 단지의 구상이며, '경솔지사'는 양잠과 길쌈이 한 공간 안에서 모두 이루어질 수 있는 '통합 공간'을 구성하여 작업의 효율을 극대화 하고자 한 구상도 살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운지의 공간에 대한 연구는 사대부의 심미적 취향을 반영한 공간 혹은 공간이 가진 공공성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까지 진행된 바 있다. 본고에서 다룬 농업 공간에 관한 고찰의 중요성은 서유구가 공간 속에서 반영하고자 한 농업 개선과 관련된 구상과 이러한 구상이 반영된 공간의 구체적인 내용과 의미를 살펴본 점에 있다고 하겠다.


This paper discusses agricultural spaces as described by Seo Yu-gu. The agricultural spaces described in 'Yiwunji (怡雲志)' of ImwonGyeongjeji (林園經濟志), Treatises on Management of Rural Life, consist of four different kinds: The first is the Hangposa (杏蒲社) which is a space for rice farming; the second is Pojeong (圃亭) for dry-field farming; the third is Jeoneosa (佃漁社), the space for livestock farming and fisheries; and lastly, Chungyeongryo (春鶊寮) and Chusolwa (秋蟀窩) for sericulture and weaving.
These four types of space all contain the academic ideals of Seo Yu-gu, accumulated in ImwonGyeongjeji. The most important thing that can be learned from the analysis of the spaces is that he made an attempt to create an agricultural community; he organized an autonomous community of a village to devise a plan to increase agricultural production in the form of combined knowledge and labour. Second, it illustrates Seo Yu-gu 's thoughts on agricultural management. It seems that he also considered selling the products outside the village beyond self-sufficiency by creating an integrated production space for a large-scale livestock fishing complex and sericulture enterprise. In addition, it can be seen that Seo Yu-gu was trying to test his new farming methods in these spaces. In Pojeong, Seo Yu-gu suggests the use of two farming methods together to increase the production of dry-field farming. It is thought that, in this way, he tried to experiment with many agricultural ideas he studied, as well as to reflect his ideal through the space of Hyungbipochi (衡泌鋪置).
Until now, studies on the space of Hyungbipochi have been limited to discussions of space that reflect the personal taste of the nobility or the public nature of the space. Therefore, this paper has developed existing discussions to examine the specific characteristics of the agricultural spaces and identified that the contents of Seo Yu-gu's ideal agri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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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 17~18세기 백자원호(白磁圓壺)의 조형과 성격

저자 : 김규림 ( Kim Kyurim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3-18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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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후 상부와 하부를 접합해 제작한 백자원호는 동체의 단면이 옆으로 벌어진 주판알 형태부터 장원형까지 다양하다. 이 항아리들은 모두 백자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달과 같은 원형 항아리와 동일한 제작방법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유사한 조형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근대기 이후 백자 달항아리로 지칭되는 백자원호는 주로 심미적 측면에 대한 논의만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백자원호의 조형 특징과 제작 당시의 성격을 살펴 기존에 확립된 범위를 확장하고, 제작 당시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했다.
17세기 이후 제작된 백자원호는 동일한 크기의 발 두 개를 위·아래로 이어 붙여 제작하였다. 이 기술은 이미 15~16세기부터 조선에서 항아리를 제작할때 활용하였는데, 반드시 대형 기물을 만들 때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백자원호는 두 개의 발을 이어 붙인 뒤, 굽과 구연을 따로 깎아낸다. 그래서 구연의 내측선은 모두 사선으로 외반하며, 외측선은 각이 지거나 곧게 직립한다. 주로 각이 진 구연은 무문백자와 철화로 시문한 것이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17세기 전반부터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직립한 구연은 모두 무문백자로 이루어졌으며, 대체로 18세기 전반기 이후에 나타나는 조형 특징을 보인다.
한편 현재 전해지는 백자원호 중에는 「웃밧쇼」, 「연령군 겻쥬방」과 같이 왕실 주방을 의미하는 한글 명문이 바닥면에 새겨진 것도 있다. 이를 통해 추정만 이루어지던 백자원호의 용도와 성격을 좀 더 명확히 규명하였다.


A white circular porcelain jar, produced ever since the 17th century, comes in various shapes, from abacus[horizontally wide circle] to elliptical[vertically wide circle]. They are not only produced using the producing method of a large white porcelain jar, also known as 'Moon Jar', but also sharing the similar formative characteristics. Therefore, the author believes that it would be necessary to expand the scope of A white circular porcelain jars to include them.
A white circular porcelain jars are made by attaching two bowls and then, carving out the foot and mouth rim. Therefore, the inner line of the mouth rim is everted diagonally while its outer line is either angular or straight. Generally, the angular mouth rim is identified in white porcelain jars without patterns and white porcelain jars with patterns drawn using the underglaze iron-brown so it is possible to assume that they were generally produced since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However, the straight mouth rim is identified only in patternless white porcelain jars, and these white porcelain jars often show formative characteristics of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or later.
Meanwhile, the artefacts of large white porcelain jars were shown to be engraved on the bottoms, as 「Utbatsho(웃밧쇼)」and 「Yeonryeonggun Gyeotjubang(연령군 겻주방)」, representing the royal kitchens. Therefore, it would be possible to more clearly clarify the purpose and characteristics of large white porcelain jars, which have been solely assumed till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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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국 대중미술의 원류-근대 광고 도안의 미술사적 연구-

저자 : 김지혜 ( Kim Jihye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1-21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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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는 근대의 일상을 소비사회로 견인한 매체였을 뿐만 아니라 인쇄매체의 발달 속에서 등장한 신흥 미술양식으로, 새로운 방식의 기록과 복제, 신속한 유통을 통해 대중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각미술이라 할 수 있다. 전시회나 전람회, 화보집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미술작품들과 달리, 광고는 다양한 인쇄물에 게재되고 거리와 상점, 전차, 기차역 등 대중에게 친숙한 공간에 진열·전시된 시각문화로써 근대의 일상을 채우고 단장했다. 광고가 제공한 신문물에 대한 정보와 그것이 함의한 이상적인 근대의 도안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대중적으로 공유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 대중미술의 원형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본 연구는 대중매체가 출현하며 광고가 지면에 실리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 2차 세계대전으로 대부분의 매체가 폐간된 1940년대 전반까지 신문과 잡지 등 인쇄매체에 게재된 광고 도안과 거리, 상점 등 대중에게 친숙한 공간에 전시된 광고 포스터를 중심으로 근대 광고 도안의 대중미술로서의 성격을 고찰해 보았다. 대중미술이라는 시각에서 광고를 재해석하고 미술사의 틀로 재구축함으로써 근대 시각문화의 원형을 살피고 그 이미지가 내포하는 근대와 근대성이 구축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시현시키고자 했다.


Advertisement can be not only medium connecting modern daily life to consumptive society but also visual art people can approach easily through record and duplication of new method and quick distribution as newly-rising art style appeared in development of print media. Unlike art works people could meet through only exhibit, exposition, and photo book, advertisement fills and decorates modern daily life as visual culture appeared on various printouts and displayed·exhibited in space familiar to people, such as streets, shops, streetcars, train stations, etc. Information of new culture provided by advertisement and its ideal modern design can be evaluated as an origin of Korean modern pop art as it was shared plebeianly by getting out of time and space constraints through various media.
This researcher intended to analyze advertisement design from an angle of art history through division of advertisement design types such as print type, cartoon type, illustration type, painting type, photo type, etc. and approach the origin of Korean Peoples art through the process tracing genealogy of iconography. Furthermore, activities of Joseon's advertisement designers, prize contest of advertisement design for the public, and events such as contest exhibit can show the process advertisement design was widely settled in Joseon as Korean Peoples art. Therefore, the purposes of this study were to reinterpret advertisement from an angle of Korean Peoples art and reestablish it by the frame of art history, examine the origin of modern visual culture, and show modern times connoted by the image and the process modernity was established visually. Thereby, this study promoted integrated research of modern visual culture, expansion of research methodology of visual culture, furthermore, and diachronic study on Korean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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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태평양전쟁 전후 캠프 쇼의 계보와 미군의 동아시아 인식

저자 : 이유정 ( Lee Yujung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3-24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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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세계 2차 대전 시기 태평양 지역 군사 충돌이 심화되고 주둔 규모가 커지면서 등장하는 캠프 쇼(Camp Show)라는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장르와, 이 캠프 쇼가 1945년 이후 미군 부대의 '현지인 캠프 쇼'라는 형태로 동아시아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특히 <지나의 밤>이라는 노래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중첩된 제국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식민지 전후 한국예술인들의 캠프 쇼 퍼포먼스의 특징과 변화들도 함께 살펴본다. 1945년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서 아메리카합중국(미국)으로의 급속한 힘의 재편 과정에서, 그 해 8월을 기준으로 불과 몇 달 전까지 일본 제국을 위한 캠프 쇼를 공연하던 한국예술인들이 미군이라는 새로운 관객을 위한 캠프 쇼를 조직, 새로운 기대에 부흥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게 된다. 태평양전쟁 직후 일본을 향한 호의적인 아시아정책에 맞추어진 미국의 새로운 헤게모니 아래서 일제의 식민지 국가들의 관계도 재편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 현지인 캠프 쇼(Korean Native Show)의 무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범아시아(Pan-Asian) 이데올로기와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모순적인 논리가 뒤섞이며, 미군들에게 낯설고 이국적이지만 익숙하고 심지어 편안한 퍼포먼스를 제공하는 장소가 된다. 한반도 내 복잡하고 중첩되는 군사주의와 식민주의의 유산은, 그대로 한국인 캠프 쇼 엔터테이너들의 모순적인 혼종(hybrid)의 퍼포먼스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힘으로서 작용한다. 이 논문은 한국에서의 미군부대 캠프 쇼, 소위 미8군 쇼와 관련된 연구들의 연장선에서, 캠프 쇼의 역사를 한국전쟁 이전으로 확장하고, 미군부대의 캠프 쇼가 동아시아 지역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하나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에 의의가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ways in which multiple traditions of camp shows and the overlapping and relational layers of Imperial Japan and U.S. presence in Korea shaped Korean entertainers' lives after 1945, producing their idiosyncratic performances in response to rapid shifts in Korea's relations with Japan and the United States in the 1940s-1950s. When the United States sought to reposition Japan at the top of the newly emerging American hegemonic order of Asian countries, Korean entertainers who served the Imperial Japanese Army a few months earlier found themselves performing for American soldiers. The stage of the Korean native camp shows became a “strange and exotic” yet “familiar and even comforting” place where inconsistent logics, such as Imperial Japan's pan-Asian ideology and American Orientalist fantasy, mingled. Under the complicated legacies of overlapping militarization and colonization in Korea, militarization has constituted a structuring force that enabled Korean women camp show entertainers generating their hybrid performance styles in ironies, contradictions, and complexities. Building on postcolonial theorists' notion of hybridity, I argue that Korean entertainers' performances were being shaped or negotiated in contact with different audiences and expectations as well as Korean entertainers attempted to navigate the acceptable ground of performances and womanhood in the constantly changing political and ideological environment.

KCI등재

8한국전쟁 휴전회담과 전후체제의 성립

저자 : 정병준 ( Jung Byungjoon )

발행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간행물 : 한국문화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5-288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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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1년간의 공격·방어전과 후기 2년간의 진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51년 7월 개시된 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전쟁포로의 처리문제였다. 유엔측은 17만 명의 공산포로를 보유했고, 공산측은 총 1만 3천 명의 유엔포로를 보유했다. 10배 이상 포로 수가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공산측은 강제송환을, 유엔측은 자유송환을 주장했고, 휴전회담이 지연되었다.
전선 밖에서도 다양한 압력수단이 사용되었다. 공산측은 포로수용소 폭동을 일으키는 한편 유엔군이 세균전을 자행했다고 비난했고, 이에 맞서 유엔측은 북한에 대한 대대적 폭격으로 맞섰다.
1953년 봄 휴전에 대한 양측의 합의가 임박하자 한국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이중공세를 펼쳤다. 한편으로 작전지휘권 환수, 단독북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한적 공세를 펴면서, 한편으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나섰다. 한국군 통제를 위해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계속 유엔군사령관에게 둘 것을 요구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편지로 이를 수락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51년 봄 한국전쟁의 위기를 실감한 미국은 관대하고 우호적인 평화조약이자 반공조약을 체결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과 함께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평화와 안보를 교환했다. 한국은 조약서명국은 아니었지만, 이 조약의 영향 속에서 일본과 한일회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휴전 이후 남북한은 인적·물적 피해 위에 분단의식, 적대의식이 심화되었다. 한반도에는 적대적 관계가 상존하는 휴전체제가 지속되었다. 휴전 후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네바정치회담이 개최되었지만 합의 없이 종료되었다. 남북한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군사적 진장과 충돌을 지속했다. 1970년대 이후 해상분계선과 NLL이 충돌의 중심이 되었다.
휴전 이후 조·중·소 관계의 전반적 재편이 이루어졌다. 전쟁의 개전과 전개과정에서 소련과 스탈린의 결정력이 압도적이었지만, 소극적이고 방어적 태도를 취했다. 스탈린의 사망이후 소련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감소되었다. 중국은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격리되었지만, 중국혁명을 보위했고, 북한을 자기 영향력 하에 두었다. 전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원조국가로 남았다.


When Korean War truce talk started in July 1951, the major issue was how to deal with prisoner of war. UN side had 170,000 communist POWs and communist side had 13,000 UN POWs. UNC who had more than 10 times of POWs argued free will repatriation but communist side argued compulsory repatriation. It took 18 months to be settled down and delayed the armistice.
Every methods to press the other side was adopted. Communist side took advantage of psychological warfares such as POW camps riots and campaign on so-called “biological warfare” of UNC. UN's counter-measure was overwhelming air bombing to the North Korea.
Korean government opposed the armistice and took severe measures such as release of anti-communist POWs and threatening to march to the north by herself with redemption of military control of Korean army which was under the command of UNC. Also she asked to settle the Korea-US mutual defense treaty and provide military aid to strengthen Korean army. US planned contingency plan to oust Syngman Rhee from his presidency and began to negotiate mutual defense treaty with Korea. US asked to keep the military control of Korean army under the command UNC to control the Korean army's arbitrary military action against North Korea.
US hastened the Peace Treaty with Japan in the fear of losing Japan during the Korean War.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with Japan was generous and genuine peace as well as anti-communist treaty. Japan restored her sovereignty by exchange peace with security. Korea was not a signatory state but had to start the Korea-Japan diplomatic talk with the arbitration of US.
After the end of war, South-North Korea suffered huge casualties, demolition of building and industrial facilities. The consciousness of national division and antagonism to the other side were deepened. The Korean War armistice system was prevailed in Korean peninsular which enabled the hatred against the other side became the legitimacy of each regime. South and North Korea kept on military crash along the Demilitarized Zone. Sice 1970s, demarcation line on sea and the Northern Limit Line (NLL) became the core of South-North military tension.
Soviet's influence to the North Korea diminished as a result of Stalin's passive and defensive attitude during the war. China was isolated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but protected her revolution and emerged as a new leader of international communist movement. Soviet and China were the key states who aided North Korea after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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